우왕 14년(1388년) 우왕은 마침내 요동 정벌을 결심하고 4월이 되자 장인 최영을 팔도 도통사로,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로,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로 임명하고 전국에서 군사들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역성혁명의 주역 이성계는 4불가론을 강하게 주장하며 요동정벌을 반대하고 나선다.
1. 이성계의 4불가론
우왕 14년(1388년) 4월 1일, 우왕이 봉주(鳳州, 지금의 황해북도 봉산군)에 당도했다. 당초 우왕이 최영과 둘이서만 의논해 요동 공격을 결정지어놓고 드러내어 말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날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과인이 요양을 치려하니 경들이 힘을 다하시오"라고 당부했다. 이 자리에서 이성계는 이른바 '4불가론'을 내세워 출정을 반대했다. "지금 군사를 일으켜서는 안되는 이유가 네 가지 있습니다.
以小逆大 一不可
夏月發兵 二不可
擧國遠征, 倭乘其虛 三不可
時方暑雨, 弓弩膠解, 大軍疾疫 四不可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역격(逆擊) 하는 것은 안 될 일입니다.
둘째. (농사철인) 여름에 군사를 동원해서는 안 됩니다.
셋째, 온 나라의 군사들이 원정에 나서면 왜적이 허점을 노려 침구할 것입니다.
넷째, 때가 장마철이라 활을 붙여놓은 아교가 녹고 대군이 전염병에 걸릴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우왕이 자못 수긍하는 빛을 보이자 이성계가 물러 나와 최영더러, 방금했던 말로 내일 다시 왕을 설득해야 한다고 말하니 최영은 그 자리에서는 좋다고 했으나 밤에 다시 입궐해 공격 이외 다른 간언을 용납하지 말라고 일렀다.
이튿날 우왕이 태조(이성계)를 불러 "이미 군사를 일으켰으니 중지할 수 없다."라고 하자 태조(이성계)가 다시 반대했다.
"전하께서 꼭 이 계책을 성취하려고 하신다면 일단 서경에 머물러 계시다가 가을철에 군사행동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때는 대군이 먹을 군량이 풍족할 것이니 사기가 높은 가운데 행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군사행동에 적합한 시기가 아니 오니 비록 요동의 성 하나를 함락시키더라도 쏟아지는 비 때문에 군대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한다면 군사가 지치고 군량이 떨어져 화만 재촉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최영은 원정 강행을 고집했고 우왕도 마음을 굳혔다. 4월 19일 조민수와 이성계가 각각 좌·우군을 거느리고 서경을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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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성계 회군을 다시 건의하다.
5월 7일에 의주의 압록강에 다다른 고려 원정군은 압록강 가운데 있는 섬 위화도(威化島)에 머물렀다. 그 사이 군졸들은 대오를 이탈하여 도망치는 자들이 끊이지 않았는데 우왕은 이탈하는 자들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런데 이성계가 이끄는 정벌군이 위화도에 닿았을 때 갑자기 큰비가 내리고 강물이 불어 사망자가 많아졌다. 결국 요동 정벌이 어렵다고 판단한 이성계는 조민수와 함께 우왕에게 회군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건의문을 보냈다.
첫째, 앞으로 요동성까지는 하천이 많고 빗물이 넘쳐 건너기가 어렵다.
둘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길이다.
셋째, 명에 보낸 사신 박의중이 아직 귀국하기도 전에 큰 나라를 침범하는 것은 사직과 백성을 보호하는 길이 아니다.
넷째, 지금 장마로 활이 풀리고 갑옷이 무거워 군사와 말이 모두 곤핍한데 이러한 군사를 몰아 견고한 성을 치면 이기기 어렵다.
다섯째, 만약 군량까지 제대로 공급되지 못한다면 진퇴난곡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대동강에 나가서 주색잡기에 열을 올리던 우왕은 이성계의 회군 요청을 묵살하고 다만 환관 김완을 보내어 진군을 독려할 뿐이었다.
3. 이성계, 조민수의 위화도 회군 그리고 목자득국(木子得國)
5월 22일 다시 조민수, 이성계가 최영에 사람을 보내어 회군을 허락하기를 청했으나 우왕과 최영은 듣지 않았다. 이에 이성계는 조민수를 비롯한 여러 원수들을 설득했다.
"만일 상국의 영토를 범하여 천자께 죄를 얻으면 종사와 생민에게 화가 곧 이를 것이오. 내가 옳고 그른 것을 가려서 글을 올려 회군하기를 청했으나 왕이 살피지 못하고 최영이 늙고 어두워 듣지 않으니 내 어찌 그대들과 함께 돌아가서 왕을 뵙고 친히 화와 복을 진달하고 왕 옆의 악한 사람을 제거하여 생령(生靈)을 편안히 하지 않으리오."
이때 이성계의 형인 이원계(李元桂)만은 이를 반대하면서 요동으로 진군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모든 장군들이 이성계의 두를 따라 회군하자 다음과 같이 통곡하였다고 한다.
"아! 역적 이성계야, 그래도 말을 듣지 않느냐? 지하에 가서 무슨 면목으로 조상을 대한단 말이냐."
5월 22일 원수들이 모두 동의하여 모든 부대는 위화도에서 압록강을 건너 개경으로 진군하였다. 이성계의 회군 소식이 전해지자 근처의 군민은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이씨가 나라를 얻는다(木子得國, 목자득국)'라는 아이들의 노래가 널리 불렸는데 이는 이성계 일당의 배후 공작이 치밀했음을 보여준다.
이성계는 우왕을 폐위시키고 종실 가운데 한 사람을 옹립할 생각이었는데 회군 도중에 조민수에게 그 뜻을 말하여 동의를 얻어낸다. (이는 후에 창왕 옹립을 두고 조민수와 이성계가 갈등하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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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회군한 원정군이 개경 교외에 도착했다. 개성에 도착한 이성계는 제일 먼저 최영을 체포할 것을 명령했다. 이 무렵 최영은 우왕과 함께 팔각전에 있었는데 우왕은 끝까지 최영을 내주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이성계의 군사들이 무력으로 담을 부수고 팔각전 안으로 들어가 최영을 내놓으라며 소리치자, 우왕은 하는 수 없이 최영의 손을 잡고 울면서 작별하고 최영은 왕에게 두 번 절을 하고 나와 그날로 고령의 고봉현으로 유배되고 그 해 12월 참살당한다.
이성계가 실권을 잡자 우왕은 이성계를 암살할 목적에서 사재를 털며 장수들을 모집하는 등 동분서주하지만 이마저 실패하고 강화도로 유배된다.
사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은 왕조의 전복까지 염두에 둔 거사는 아니었다고 일부 학자들은 주장한다. 명나라를 자극하다가는 자신의 앞날 또한 어찌 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더 크게 작용한 것이다. 아무튼 이성계가 회군한 후 군사를 이끌고 개성으로 진군하자 우왕은 이성계를 제거하기 위해 군사를 모집하는 등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민심은 이미 이성계에게 돌아간 뒤였다.
※ 작성 : 과학이와 수학이 & 울 아빠
※ 이미지 출처 : KBS 대하드라마 정도전
※ 참고문헌 : 역동적 고려사(이윤섭/필맥),
이야기 고려 왕조실록(한국인물사연구원/타오름),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박영규/웅진닷컴)
인물로 읽는 고려사(정성희/청아출판사)
출처 http://blog.naver.com/skh8464/602119074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