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자족할 줄 아는가
빌 4:10~13
옥한흠 목사
본문 말씀은 우리가 평소에 퍽 사랑하는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이 말씀을 읽는 사람마다 제각기 느끼는 감정이 다를 것입니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이 대동소이한 느낌을 가지리라고 봅니다. 저는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유난히 저의 마음을 사로잡는 하나의 단어를 보게 되는데 그것은 11절 끝에 있는 바로 ‘자족’이라는 단어입니다.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마음의 상태를 자족이라 합니다. 우리가 이 자족에 대한 인상을 뚜렷이 하기 위해 원어를 알고 있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자족을 원어로 ‘아우타르케이야’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 이 말을 외워둡시다. 아우타르케이야! 그리하여 특별히 불만이 쌓일 때마다 이 말을 상기하고 ‘아우타르케이야’의 뜻을 묵상하면 점차로 마음의 평안을 되찾게 될 것입니다.
본문에서 자족한다는 말을 하는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런데 바움은 죄수였습니다. 로마 감옥에 갇혀 언제 풀려나올지 모르는 비참한 신세였습니다. 그는 결코 만족할 만한 것이 없는 밑바닥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나는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죄수의 입장에서 자족한다는 말을 하는 것은 정말 우리에게 굉장한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더 힘이 있습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쓴 서신으로 유명한 빌립보서를 읽으면 가장 자주 나오는 말씀이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힘있게 유쾌한 음성으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 4:4).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이 이처럼 '기뻐하라'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요? 정말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감옥에 앉아서 기뻐하라고 소리치는 바울을 보면 아무 구속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거리를 활보하며 다니는 사람이 오히려 무색할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쁨은 보통 기쁨이 아닙니다. 어떤 환경의 지배도 받지 않고 항상 마음 속에 누릴 수 있는 기쁨! 바로 이 기쁨이 솟아나는 샘이 ‘아우타르케이야’입니다. 자족입니다.
비록 감옥에 앉아 있어도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그 마음에서부터 이 기쁨은 솟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쁨을 바울에게서 빼앗아갈 자가 아무도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 본문을 주시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이 이와 같은 ‘아우타르케이야’를 가지고 기뻐할 수 있었다면 우리도 이 비법을 배워서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감옥에 앉아서도 자족을 가지고 기뻐했는데 여러 가지로 풍요롭고 자유로운 환경에 사는 우리가 왜 기쁨이 없고 불평스런 삶을 살아야 합니까? 이왕 예수 믿고 살 바에는 바울처럼 살아야 합니다.
자족은 배우는 것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11절)란 말씀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자족은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자족은 자연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배워서 얻는 것이라고 바울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배우기 전에는 전혀 몰랐다는 이야기나 다름이 없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진리입니다. 우리가 경험적으로 아는 사실은 인간 본성만으로 항상 자족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부패한우리의 성품을 보면 불평과 불만으로 부글부글 끓고 있는 지옥이지, 작은 것에도 감사하고 자족할 줄 아는 마음이 아닙니다. 이것은 마치 갈지 않은 땅과 같습니다.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거기에는 잡초가 납니다. 거기에는 가시덤불이 엉킵니다. 잡초 씨앗을 가져다가 심을 필요가 없고 가시나무종묘를 가져다가 심을 필요가 없습니다. 가만히 내버려둬도 잡초는 나고 가시는 뿌리를 내립니다. 인간의 마음도 꼭 같습니다. 불평을 가르쳐 줄 필요가 없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인간의 마음에는 항상 불평이 쏟아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부인들에게는 좀 죄송합니다만 부인들이 시집오기 전에 바가지 학원에 가서 특별히 바가지 긁는 법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그런 특강을 배워야만 남편을 못살게 구나요? 그것은 아담으로부터 이어받은 못된 본성에서 나오는 천성입니다. 비단 여자만 그렇지 않습니다. 남자들도 말을 안해서 그렇지 항상 마음 속에는 불만과 불평이 가득합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키우려면 땅을 그대로 두어서는 안 됩니다. 땅을 갈고, 모종을 심고, 물을 주고, 거름을 주고 가꾸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얻을 수 있고 일용할 양식인 곡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족이라는 것은 천상의 꽃입니다.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우리의 본성에서 저절로 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배워야 합|니다. 배우지 아니하면 자족할 줄 모릅니다. 그러면 바울이 어떤 방법으로 자족을 배웠는지 우리가 한 번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12절 말씀을 가만히 음미해 보십시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 말을 알기 쉽게 풀이하면 나는 가난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부족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 나는 잘 먹을 때나 배고플 때나 넉넉할 때나 아쉬울 때나 어떤 형편에서든지 그리고 모든 형편에서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노라.'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생의 경험을 통해서 자족을 배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가난을 겪으면서 가난 속에서 자족하는 비결을 알았습니다. 그는 부요함을 경험하면서 부요 속에서 자족하는 비결을 터득했습니다. 여기서 ‘배웠다’ 라는 단어는 현재완료형입니다. 현재완료 동사의 기능을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지 않습니까? 그것은 지금까지의 경험을 통해서 이어진 행동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배워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가난할 때, 부할 때, 배고플 때, 배부를 때, 천할 때, 또는 존귀할 때 갖가지 인생 경험을 거쳐오면서 배웠다는 것입니다. 환경을 통해서 배웠다고 했습니다.
사실 바울 만큼 다양한 인생경험을 한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는 굉장히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생 후반에는 주를 위해서 지독한 가난을 몸소 체험한 사람입니다. 바울처럼 존귀를 받은 사람도 바울처럼 멸시와 천대를 받은 사람도 드물 것입니다. 그는 인생의 양극단 사이를 오가면서 다양한 경험을 통하여 자족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던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도 바울과 같은 다양한 인생을 살아본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가난을 맛보지 못한 사람이 가난을 알 도리가 없고 돈이 한푼도 없는 사람이 부자의 사정을 알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생은 경험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갖가지 인생 경험을 했지만 우리는 부분적으로 조금씩 경험한 것 뿐입니다. 바울을 따라가려면 아직도 요원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우리가 현재 몸담고 있는 환경이 자족을 배울 수 있는 값진 기회가 된다는 사실입니다.
당신은 가난합니까? 가난하다면 지금의 그 환경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바울처럼 자족할 줄 아는 것을 배우는 절호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평생 가난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언젠가 가난이 지나갑니다. 나중에는 가난하고 싶어도 가난할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의 기회를 놓치면 다음에 배우고 싶어도 배우지 못할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이 자족하는 것을 배울 수 있는 참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십시오. 지금 가난할 때 자족하지 못하면 다음에 부자가 되어도 자족하지 못하는 사람이 될 것이요, 지금 부유하게 살면서도 자족하지 못하면 다음에 가난해질 때 자족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자족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자족하는 비결
이제 우리가 검토할 것은 바울이 배운 그 자족의 실재적인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그것을 ‘비결’이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13절에서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바꾸면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그 때마다 내게 능력을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언제든지 자족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의 비결을 이렇게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는 능력을 주님이 주신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 능력을 받으면 어떤 환경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비결입니다.
어떤 식당에서 식사를 할 때의 일입니다. 찍어 먹는 소스가 참 맛있어서 어떤 사람이 "야! 이거 참 맛있네" 하니까 옆에 있던 사람이 "이 정도면 나도 만들 수 있겠어. 몇 가지만 들어가면 되겠지"라고 대꾸했습니다. 옆에서 가만히 그 말을 듣고 있던 웨이터가 "아, 그거 못만들 거예요. 그 비결은 우리 주방에 있는 한 사람만 아는 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요? 그렇게 어려워요?"라고 손님이 묻는 말에 웨이터는 "그럼요. 그 사람은 그것 가지고 먹고 사는데요. 아무도 안가르쳐 줘요"라고 대답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마 몇 가지 재료를 섞어서 묘하게 맛을 낼 것입니다. 사실 비결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면 별 것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방법을 익히느라 오랫동안 고생한 사람에게는 매우 소중한 것임에 틀림 없습니다.
우리가 바울의 비결을 가만히 보면 별 것 아닌 것같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대단한 것입니다. 그가 경험을 통해서 배웠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비결은 예수님의 능력입니다. 그런데 능력주시는 자 라는 말은 나를 강하게 하는 자'라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로 보면 바울은 예수가 어떤 경우에서나 능력을 공급하는 원천이 되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가난 속에서는 그 가난에 구애받지 아니하고 자족할 수 있도록 주님이 자기를 강하게 하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부요한 형편에 놓였을 때는 그 부요에 자기의 마음이 빼앗기지 아니할 능력을 주님이 주시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말을 요약하면 "자족은 사람의 힘이 아니라 오직 주님이 주시는 힘이다. 주님의 능력만 받으면 어떤 환경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한 단어로 묶어서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안에서’ 라는 말에는 "자족은 주님이 주신다. 주님이 주시는 힘이 있을 때 가능하다. 그 힘을 받으면 언제든지 자족할 수 있다. 어떤 환경에서든지 주님은 그 힘을 주신다" 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당신에게 이와 같은 '주 안에서'의 비결이 있습니까? 어떤 환경에서든지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경험하고 살고 있습니까? 만약 제가 인생 경험을 많이 한 노련한 사람이요, 또 연구를 많이 한 신학자라고 한다면 주님이 주시는 이 능력을 좀더 선명하게 설명할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저는 저 자신의 한계 안에서 주님의 능력을 몇 가지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비결, 즉 예수 그리스도가 환경이 바뀔 때마다 주시는 능력이 실제로 어떤 것인가를 다음의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환경을 초월하는 능력
첫째, 환경의 노예가 되지 않는 능력입니다. 어떤 환경을 만나든지 그 환경에 매이지 않고 살 수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환경의 변화에 대단히 민감합니다. 부유하던 사람에게 갑자기 재난이 닥치면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도 한 동안은 제 정신이 아닙니다. 얼마나 당황하게 됩니까? 믿음이 어디 있어요? 그 때에는 기도도 안 나오고 찬송도 안 나옵니다. 한참 정신을 잃고 있다가 나중에 겨우 "주여!" 하고 찾는 것이 우리의 일반적인 태도입니다.
그런데 그와 같이 암담한 상황에 놓였을 때도 이상한 힘이 자기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것을 느낍니다. 이것은 경험을 안 해본 사람은 모릅니다.
도무지 자신을 주체할 수 없는 어려운 환경인데도 이상하게 환경을 마음대로 다스릴 수 있을 것같은 자신감이 생기고 또 자기가 절대로 망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생기면서 나름대로의 기대를 가지고 환경을 내려다 볼 수 있는 힘을 갖습니다. 당신은 이것을 체험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환경을 초월해서 모든 것을 다룰 수 있는 신비스러운 힘을 아십니까? 환경의 노예가 되지 아니하는 능력을 아십니까? 이것이 지금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환경이 바뀔 때마다 그것을 초월할 수 있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한 사람 가운데서 우리는 구약의 요셉을 빼놓을 수가 없습니다. 요셉의 일생을 보십시오. 아버지로부터 그렇게 총애를 받던 소년이 하루 아침에 노예가 되어 버린 사건을 우리는 잘 압니다. 요셉의 환경이 그렇게 바뀌었을 때 그에게 따라다니는 말이 하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노예 환경에 그가 내던짐을 받았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이 그 모든 환경에 구애받지 않고 자족할 수 있는 사람으로 능력을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노예생활을 할 때에도 얼마나 정정당당하게 밝은 얼굴로 생활을 했는지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짐작할 수 있습니다.
조금 지나서 요셉의 환경이 또 한번 바뀝니다. 요셉은 감옥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그럴 때도 꼭 같은 말씀이 따라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이것은 감옥에서도 요셉이 그 환경에 메이지 아니하고 그 환경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요셉은 감옥에서 생활할 때 일반 죄수들과 같이 어두운 얼굴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여유만만하게 다른 형제들을 도우면서 기쁘게 감옥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요셉을 보고 생을 포기하고 체념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체념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도 마찬가지입니다. 네로가 파놓은 지하감옥에 갇혀서 쇠고랑을 차고 있었지만 주 안에서 기뻐하라고 외친 그를 향해 체념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어떤 능력을 공급받을 때만이 가능한 정말 멋진 사람의 모습입니다. 당신에게 이 능력이 있습니까? 이 능력을 알고 있습니까? 날마다 환경에 매여서 헤어나지 못하는 미약한 자가 되는 것은 참으로 비참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 사람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환경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난하든 부하든 간에 환경을 마음대로 다루면서 살 수 있는 능력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감사의 조건을 찾아내는 능력
둘째로 바울이 말하는 능력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감사의 조건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항상 확신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은 그 어떤 것이든 아름다운 점을 한두 가지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끔찍한 벌레가 지나가더라도 그 벌레를 자세히 보면 그 흉하게 생긴 놈에게도 그 속에 조물주가 만들어 놓은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일생을 살면서 겪는 모든 환경에는 그것이 천하든 귀하든 간에 적어도 한두 가지는 감사할 조건이 들어 있다고 저는 확신합니다. 그런데 그 감사할 조건은 아무에게나 쉽게 발견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능력 주셔서 눈이 열리는 자만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높은 나무 끝에 매달려 있는 아름다운 열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자족이나 감사를 소재로 하여 말씀을 묵상할 때마다 제 마음 속에 떠오르는 자매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자매의 아름다운 음성이 제 마음을 두드리는 것 같습니다.
몇 년 전에 교회에 소록도의 한센병 환자들이 초빙되어 와서 하모니카 연주회를 한 적이 있습니다. 손가락도 없는 그 이상한 손에다가 하모니카를 끼어서 비뚤어진 입으로 신나게 불어대던 그 기막힌 사람들의 모습이 아직도 우리 마음 속에 남아 있습니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감격의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연주하는 도중에 소록도에서 간호사로 수고하는 믿음 좋은 자매가 강단에 올라와서 간증을 했습니다. 그 자매의 입에서 나온 첫마디는 저에게는 하나의 원자폭탄이었습니다. "세상은 참으로 공평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 한 마디에 저는 굉장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자매의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저는 그 자매가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인지 꿰뚫어 볼 수가 있었습니다. 이어서 그 자매는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나환자들에게는 건강한 사람들이 갖지 못하는 감사의 조건이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웃음이 있고 만족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그들이 건강한 사람들보다도 더 행복할지 모릅니다. 그들은 생에 대한 탐욕을 다 버린 사람들이고 마음을 완전히 비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비우지 못한 건강한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행복과 만족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도 기뻐하고 찬송하는 것입니다.
그 자매는 이런 요지의 간증을 했습니다. 제가 소록도에 가서 집회를 인도할 때 나환자들과 접촉하면서 이 사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기쁨이 그들에게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인생은 공평한 것입니다.
나환자들의 세계에서도 영의 눈을 뜨고 세상을 보면 감사할 조건이 있습니다. 믿음의 눈을 뜨고 보면 감사할 조건이 있고 만족할 만한 조건이 있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병을 고쳐주는 대신에 그 환경에서 감사하고 만족할 수 있는 조건들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모여 찬송하는 소리를 들으면 천상을 날아 올라가는 것같은 놀라운 영감을 느끼게 됩니다. 감사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감사의 조건은 가까운데 있습니다.
찾기만 하면 자족할 수가 있습니다. '아우타르케이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요, 가까운 곳에서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한두 가지 감사의 조건을 찾아내는 데서 시작됩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있습니다. 아무리 부부사이가 나빠도 그 속에 감사할 조건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능력 주시는 자만이 그것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자족을 체득하게 됩니다.
며칠 전에 저는 차를 타고 가다가 참 감격스러운 장면을 보았습니다. 바로 우리 교회에 나오는 어떤 형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 형제의 직업은 자동차를 닦아주는 세차업입니다. 추우나 더우나 하루 종일 장갑끼고 자동차 걸레질을 하는 힘든 직업입니다. 그가 살고 있는 집은 옥상에 있는데 창문도 없는 조그마한 성냥갑 같은 방입니다. 거기에서 아내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이제 자녀도 생겼습니다. 그런데 그 세차하는 형제를 우리 집사람이 전도를 했습니다. 지금 7, 8개월 동안 교회 출석을 참 잘 합니다. 그리고 믿음이 굉장히 자랐어요. 찬송가도 멋지게 불러요. 그 부인도 참 믿음이 좋습니다.
그런데 제가 차를 타고 가다가 참 아름다운 장면을 보았습니다. 그 세차장 구석에 다 찌그러져가는 나무의자에서 그 부부가 너무나 행복하게 서로 쳐다보고 웃으며 뭔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부인이 햇볕에 까맣게 그을린 얼굴로 아기를 안고 남편을 쳐다보며 얼마나 행복하게 웃고 소근거리는지 제가 차를 타고 가다가 속도를 늦추고 가만히 보았습니다. 값비싼 화장품을 바른 다른 부인의 얼굴에 없는 만족한 웃음이 그 형제의 부인에게 있었습니다. 자동차를 굴리면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다니는 남자의 얼굴에 없는 만면의 자족이 그 형제에게 있는 것을 제가 보았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세차를 하는 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그 가운데서 감사할 조건을 찾아서 자족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이 참 행복한 사람입니다.
세익스피어가 쓴 헨리 6세라고 하는 희곡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나의 왕관은 머리에 있지 않고 나의 가슴 속에 있도다. 그것은 만족이라고 불리우는 왕관, 도대체 몇 명의 임금이 이 왕관을 써 보았을꼬."
왕관을 쓰고 왕좌에 앉아 있어도 감사의 조건을 찾지 못하는 왕은 불행한 왕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라 하더라도 그 가운데서 감사의 조건을 찾아서 감사하고 바울처럼 기뻐하고 자족할 수만 있다면 그 사람은 마음의 왕관을 쓰고 왕좌에 앉아 있는 행복한 왕입니다. 당신에게 이러한 감사의 조건을 찾는 눈이 있습니까? 이 능력이 있습니까?
저에게는 가끔 외국에 다녀올 기회가 있습니다. 이것은 제가 재미교포들 세계에서 본 이야기입니다. 교포들이 남의 나라 땅에 가서 갖은 고생을 다하여 돈을 벌면 먼저 저택을 사고 캐딜락이나 벤츠니 하는 아주 좋은 자동차를 마련하는 것을 봅니다. 이제는 한시름 놓고 남들 보라는 듯이 살아보자는 욕심에서 그렇게 합니다. 얼마 전에 제가 그런 분의 초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여러 가지로 융숭한 대접을 받았습니다. 나중에 제가 그 집을 나올 때 남자분을 쳐다보며 "어때요. 이제 만족하세요?"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는 "목사님도, 만족이 뭐예요.
이거 내놓은 집인데 빨리 누가 와서 사기만 하면 그만 팔아 버리고 방 몇개 있는 아파트로 가서 살고 싶어요. 저택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캐딜락을 타면 뭐해요? 다 귀찮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사람이 이제 무언가를 깨달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만족의 조건을 밖에서 찾으려고 합니다. 그런 까닭으로 남의 손에 있는 것이 더 아름답고 더 크게 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자기와 다른 사람을 자꾸 비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참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왜 손해 보는 짓을 하고 있습니까? 왜 바깥 환경을 가지고 행복한가 불행한가를 판단합니까? 행복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자기가 감사의 조건을 찾느냐 못찾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자기를 믿음으로 바라보는 자는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그 환경에서 감사의 조건을 찾을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모래성에서 한 알의 다이아몬드를 찾아낼 수 있는 눈을 허락해 주신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능력입니다.
당신은 이 주님의 능력을 아십니까? 이 능력을 가지면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5평이든 10평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자동차를 가지고 있든 안 가지고 있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는 능력만 있으면 지금 몸담고 있는 환경에서 다이아몬드를 찾는 눈이 열립니다. 그 속에 자족이 있습니다. 그 속에 기쁨이 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능력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를 도우시는 주님의 능력
끝으로 바울이 말하는 능력은 어떤 환경에서든지 자기를 돕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안심하고 살 수 있도록 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일 뿐 돈도 아니요, 환경도 아니요, 어떤 사람도 아니라는 것을 믿는 능력입니다. 히브리서 13장 5, 6절 말씀을 보십시오.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 하노라“
우리의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우리를 인도하시는 이는 주님입니다. 필요할 때마다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이는 주님입니다. 약할 때 강하게 하시는 이는 주님입니다. 이 모든 것을 분명히 확인하고 믿고 고백하는 능력, 이것이 바울이 말하는 일체의 비결입니다.
또 바울은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능력을 받으면 어떤 환경에서도 자족할 수 있다는 그 비결은 경험에서 얻은 확신이었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주시는 능력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입니까?
첫째는 환경에 매이지 아니하는 능력, 둘째는 어떤 환경에서든지 감사의 조건을 찾아낼 수 있는 능력, 셋째는 어떤 환경에서든지 오직 주님을 바라보고 나의 도우시는 자는 주님 뿐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이 능력을 우리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환경에서 최대의 행복을 구가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합시다. 그 능력으로 자족한다면 우리를 따라올 자가 누가 있습니까? 우리가 부러워해야 할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예수 믿는 우리를 보고 세상 사람들이 부러워할 수 있도록 자족하는 능력을 소유합시다.
고통에는 뜻이 있다, 옥한흠, 국제제자훈련원, 2008, 203-2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