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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람서원(크리스찬타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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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주의 설교학 스크랩 열정에 사로잡힌 설교자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 연구
고-건은준 추천 0 조회 25 15.03.08 21:4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열정에 사로잡힌 설교자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 연구


류응렬 (총신대 신대원)

들어가는 말: 말씀으로 말미암는 진정한 부흥을 꿈꾸며




조국의 강단은 위기다. 기독교인의 수가 정체되어서 오는 위기가 아니다. 신자의 수가 줄어드는 것을 위기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가시적인 기독교인 수의 정체나 감소는 위기의 한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나라 기독교의 본질적 위기는 강단의 위기다. 강단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흘려보내는 곳이다. 오늘날 조국교회의 강단은 말씀의 신실한 선포와 이를 향한 목회자의 간절한 땀방울보다 청중의 관심을 얻으려 하는 방법을 모색하는 방향으로 치우쳐 간다. 청중을 얻기 위한 전달의 기술이 전해야 할 대상을 점점 사라지게 하는 위기에 우리는 서 있다.

조국의 신앙인은 불안한 천칭에 서있다. 기독교를 “가슴이 없는 지성”으로 이해하는 사람은 은혜의 교리 속에 영원한 안전지대를 노래하며 신앙에서 흘러나오는 윤리를 삶을 지배하는 규범이 아닌 삶의 한 분야로 여긴다. “지성이 없는 가슴”으로 신앙을 느끼는 사람은 말씀의 본질적 빛 앞에 비추임을 알지 못한 채 느낌의 만족을 찾아 나선다. 특히 목회자들에게 “가슴이 없는 지성”의 문제는 치명적이다. 목회자의 가슴이 진리의 말씀으로 물들지 않거나 영혼을 향한 거룩한 열망으로 채워지지 않을 때 진리의 온전한 선포나 청중의 변화를 기대하기란 물에서 불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다.

조국의 강단과 신앙인은 부흥을 기다린다. 진정한 부흥이란 가슴이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불태워지고 가장 예리한 지성의 마지막 자리까지 진리의 빛으로 채워져 이성과 감성이 하나 되는 것이며 신앙과 삶이 일치되는 것이다. 진정한 부흥이란 신앙인의 삶의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반드시 드러내고자 하는 열망으로 차오르는 것이며 이는 오직 진리의 말씀이 지성과 감정의 프리즘을 통과할 때 주님이 허락하시는 선물이다.

참된 부흥을 필요로 하는 한국교회의 목회자와 신도는 21세기의 에드워즈를 필요로 한다. 오직 진리의 말씀으로 침잠해 들어가 신도들을 하나님의 거룩함을 향해 일깨웠던 에드워즈의 외침이 설교자들의 가슴에 스며들어 동일한 열망으로 피어날 때 참된 부흥은 시작될 것이다. 오늘도 영혼의 변화를 통해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자 하는 설교자는 다시 에드워즈의 설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거기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이 땅에 표출하기 위해 온 삶을 던지며 서 있는 한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는 우리에게 변화의 소망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필자는 본 소고에서 에드워즈의 설교에 나타난 특징들을 살펴본 후 이를 개혁주의 강해설교의 입장에서 비평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필자는 먼저 에드워즈의 설교가 형성되는 배경을 살펴본 후 에드워즈의 설교에 나타난 특징을 7가지로 나누어 고찰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개혁주의 강해설교적 관점에서 장단점을 살펴보고 한국교회 강단에 던지는 교훈을 찾아내고자 한다.




에드워즈의 설교에 미친 영향들




1. 두 사람이 미친 영향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의 설교를 형성하는데 영향을 미친 배경으로서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직접적인 영향이 있고 둘째는 그가 읽은 두 권의 설교학 책에서 얻은 간접적 영향이 있다. 에드워즈의 아버지 티모시 에드워즈 (Timothy Edwards)는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설교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아들이 설교자로 자라는 시기에 살아있는 거울”로서 결정적 영향력을 미쳤다.1) 아버지의 설교는 당시 청교도 설교의 전형적 유형인 본문, 교리, 그리고 적용 형식을 따른 설교였으며 어릴 때부터 그의 설교를 들어온 조나단 에드워즈가 이러한 형식을 본받았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베일리(Richard Bailey)는 조나단에게 미친 아버지의 영향을 다음과 같이 몇 가지로 요약한다.2) 아버지는 강단에서 “주와 선생”으로서 서 있는 설교자의 위엄에 대해 강조했으며, 설교 원고를 주로 암기하고 원고의 요약본을 가지고 설교하는 방법을 추구했고, 청중의 회개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것을 아들에게 가르쳤다.

아버지의 설교에 관한 철학이 조나단에게 미친 영향은 그의 설교 전반에 널리 확인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설교자의 직분에 대하여 평신도와는 훨씬 구별된 특별한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식했으며 원고를 작성하고 읽는 설교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에드워즈의 설교 전달 방식이다. 에드워즈는 설교의 목적을 청중의 진리의 말씀에 대한 철저한 변화에 두고 적용을 강조하는 설교에 임했다. 또 다른 면에서 에드워즈의 아버지는 교리와 적용 부분의 설교에서 머리글을 수십 개 이상 제시하면서 논증해 간다. 아버지의 설교에는 이미지나 비유가 적게 나타나고 설교의 내용을 증명해 나가기 위해 성경 인용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에드워즈의 설교에는 풍부한 상징과 비유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아버지와의 차이도 발견되지만 수 많은 머리글을 설교에 제시한다든가 본문의 논증을 위해 가능한 모든 성경구절을 인용하는 점에서 아버지와 매우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두 번째 에드워즈의 설교에 영향을 미친 사람은 그의 외할아버지 솔로몬 스토다드 (Solomon Stoddard)였다. 스토다드는 몇 가지 점에서 티모시 에드워즈와 유사한 영향력을 미친다. 스토다드는 아버지와 같이 설교가 단순한 지식을 전달하는 도구가 아니라 청중의 회개를 불러일으켜야 할 것을 강조했다. 조다단 에드워즈 하면 떠오르는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놓인 죄인들”의 설교에 나타나는 무시무시한 지옥심판에 관한 강조 역시 두 사람의 공통의 영향이라 할 수 있다.3) 외할아버지는 아버지와 달리 쉬운 언어를 통한 일상에서 살아있는 언어를 구사하는 설교를 했으며 거의 모든 설교에서 질의 응답 식의 형식을 추구했다.4) 에드워즈의 설교에서 논증을 위해 먼저 질문을 던져 놓고 그 질문에 대해 답을 제시하는 가운데 교리를 설명하거나 증명해 가는 모습은 낯설지 않다. 당시 논리를 강조하는 청교도 스타일의 설교와 달리 스토다드 설교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인간의 심리에 관심을 두는 수사법에 대한 강조가 있다. 사람의 변화는 이성의 논리에 호소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심리의 문을 통해 가슴으로 스며들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에드워즈의 설교에 나타나는 풍부한 수사법의 유산은 외할아버지에게서 받아온 것임에 틀림없다. 비록 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강조점은 다르다 할지라도 두 사람은 “에드워즈가 설교의 기법을 익혀가는 초기에 우연하게도 서로 상호보완적인 영향을 미쳤다.”5)



2. 두 권의 책에서 받은 영향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에 영향을 미친 다른 배경은 그가 탐독한 두 권의 책에서 발견된다. 존 에드워즈(John Edwards)의 「설교자」(The Preacher, London, 1705)와 코튼 마더(Cotton Mother)의 「목회교범」 (Manuductio ad Ministerium, Boston, 1726)은 그의 독서목록에 나타나는 책으로서 에드워즈의 설교에 자주 그 영향력을 드러낸다. 존 에드워즈는 「설교자」에서 목사란 복음적 설교자가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중생을 강조하며 믿음으로 인한 칭의 등 개혁주의의 근간을 강조한다.6) 또한 이 책은 설교자가 “언어학자, 문법가, 비평가, 연설가, 철학가, 역사가, 궤변가, 논쟁자, 그리고 어떤 분야에서라도 배운 과학적 기술과 지식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을 강조한다. 이 책이 에드워즈의 설교에 미친 영향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설교자는 청중의 가슴에 열정을 불러 일으키는 설득력을 지녀야 한다. 설득력 있는 설교자가 되기 위해 존 에드워즈는 설교자가 자신이 확신하는 믿음과 경험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 느낌을 말씀과 함께 전할 것을 가르쳤다. 에드워즈가 가슴을 울려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설교자가 된 배경에는 이러한 존 에드워즈의 영향이 스며있으리라 쉽게 짐작이 간다.

둘째, 설교자는 적용을 통해 설교의 목적을 확실히 인식시켜야 한다. “적용이란 설교자의 가장 주요한 임무인 동시에 가장 어려운 작업이다. 그러나 이는 가장 유용하면서도 필수적이다. 설교자는 어떤 경우라도 청중을 일반적인 이야기나 축 늘어진 의미 없는 장황한 말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검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과 심장에 꽂아야 한다. 이런 구체적인 적용은 거룩한 삶을 일으키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모든 말이 다 잊혀진다 해도 이것은 사람들에게서 떠나지 않을 것이다. 한마디로 설교의 가장 주요한 부분은 적용이다.”7) 적용에 관한 강조는 에드워즈의 모든 설교에서 동일하게 발견된다. 그는 철저한 교리해석 위에 반드시 풍부한 적용으로 청중에게 변화를 추구했던 설교자이다. 셋째, 설교자는 논리보다 청중의 심리에 호소해야 한다. 솔로몬 스토다드처럼 존 에드워즈도 신앙이란 근본적으로 가슴의 문제라고 여겼다. 당시에 편만했던 이성의 우위성에 대하여 반기를 들고 철저한 지성의 훈련을 거친 후 사람의 감정에 호소함으로 삶의 변화를 촉구했다. 지성과 감성의 문제는 조나단 에드워즈에게서 동일하게 나타나는 중심문제이다. 이성의 계시 인식 능력에 대한 불가능성을 강조한 조나단 에드워즈는 설교자가 이성의 인식을 넘어 감정의 자리까지 나아갈 것을 주장했으며 감정에 대한 그의 우선적 강조는 설교전편에 잘 나타난다.

에드워즈는 「목회교범」을 늘 곁에 두고 설교자의 교육을 위한 권위를 주장할 때 인용하곤 했다.8) 코튼 마더는 그의 책에서 강조하는 수사법과 고전적 논리, 새로운 이성과 신앙에서 감정의 역할을 논의한다. 마더는 무엇보다 설교자의 영적 준비에 대하여 강조하면서 설교자가 무릎을 꿇는 것으로부터 연구를 거쳐 강단으로 나아갈 것을 촉구한다.9) 에드워즈는 회심 후 마음을 결정하고 끊임없는 성경연구에 힘썼으며 무엇보다 철저한 연구 위에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기도의 삶을 강조했다.10)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에드워즈는 설교자의 모습과 구체적 설교를 작성하는 일에 그의 앞에 있는 사람들과 책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킴낙은 이들이 에드워즈의 설교에 미친 영향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목회교범]이 [설교자]처럼 일종의 교과서처럼 반복적으로 언급되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에드워즈의 책 여러 곳에서 각각의 책의 표현이 너무나 많이 반영되었기에 그에게 미친 영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11) 두 사람의 영향과 두 권의 책의 가르침 이외에도 그를 두르고 있었던 청교도의 분위기 그리고 그가 받은 교육들 그리고 개인적 사색을 통해 에드워즈는 진리의 말씀으로 영혼을 일깨우는 한 열정적인 설교자로 형성되어 갔다.




에드워즈의 설교에 나타나는 특징




1. 설교에 대한 에드워즈의 일반적 관점




존 파이퍼는 뉴잉글랜드 지방에 일어난 대각성 운동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일이었지만 수단으로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것은 설교라고 지적한다.12)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의 말씀이 거룩한 부흥을 가져오는 원동력이라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 그 진리를 사람들에게 적용하여 변화를 일으키는 것은 바로 설교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에드워즈에게 있어 “설교자의 사명은 성경을 명확하게 설명함으로 지성을 채우고 말씀의 정황 속으로 자신의 사고를 소개함으로써 감성을 ‘자극하는’ 것”으로 나타난다.13) 즉 설교를 통해 철저한 이성적 논리를 구현하지만 이성에 의존하지 않고 가슴을 움직이는 감성까지 나아간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거룩한 삶을 향한 사람의 변화는 이성의 한계를 넘어 신앙적 감정이 변화를 일으킬 때 비로소 가능하다고 여겼다.

에드워즈는 신학자요 저술가이지만 근본적으로 그는 목회자요 설교자이다. 한 사람의 목회자로서 뿐만 아니라 설교자로서 그의 설교전면에 흐르는 가장 중요한 사상은 하나님의 영광을 온전히 추구하는 정신이다.14) 우리 인생의 목적처럼 설교의 목적 역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으로 여겼다. 하나님의 영광이란 사람의 행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하는 각자의 성품을 통해 이루어진다. 훌륭한 설교란 하나님의 성품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삼을 때가능하다. 에드워즈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성품을 신도들에게 보이고 그들에게 동일한 성품을 향해 거룩한 삶을 살아갈 것을 촉구한다. 또한 에드워즈는 설교를 통해 사람의 마음에 종교적 정서가 싹트게 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 체험이 일어날 것을 기대했다. 하나님의 선포되는 말씀인 설교를 통해 청중에게 거룩한 종교적 열망을 일으키는 것은 개혁주의 전통 속에서 형성된 에드워즈의 설교관의 핵심을 이룬다.15)

에드워즈의 설교에 대한 관점은 설교자의 정체성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에드워즈는 설교자 역시 타락한 아담의 후손의 상태를 짊어지고 있기에 겸손함을 주장하지만 그에게 설교자란 평신도와 비교할 수 없는 구별된 사람으로 나타난다.16) 심지어 그는 설교자는 사명 때문에 한층 더 고차원적인 사람으로 변화된 것으로 여기기도 했다.17) 설교자는 하나님이 주신 이러한 권위를 가지고 진리의 말씀을 통해 신자들에게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담대하게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설교자에 대한 이런 높은 의식은 신도들의 영적 권위자로서 뿐 아니라 자신의 삶에 거룩함을 추구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에드워즈는 설교자가 진리의 본질을 논리적으로 전하는 것에 관심을 집중할 뿐 설교의 웅변이나 설교 스타일에 관심을 크게 두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한다. 평범하고 세련되지 못한 설교의 방법으로 하나님은 영혼을 구원하기에 오직 진리의 복음 자체의 선포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심지어 설교에서의 위트나 설교 스타일이 효과적인 설교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그가 처한 문화적 배경에 기인한다. 즉 수사나 웅변이란 논리구조와 분리된 것이라고 어릴 때부터 배워왔기 때문이다.18) 비록 설교에서 논리를 통한 논증을 강조하는 그였으나 그의 논리란 감성과 열정과 분리된 이성적인 체계가 아니라 진리의 말씀 자체의 논리성에 기인한다.

바람직한 설교자상에 관한 논의에서 에드워즈는 요한복음 5:35절 설교를 통해 그의 가슴에는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으로 불타올라야 하며 타오르는 가슴과 함께 빛나는 빛을 소유한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설교자는 사람의 감정을 움직이기 위해 자신이 정렬적 감정으로 타올라야 한다. 에드워즈의 감정에 대한 호소는 그의 신앙에 대한 정의에서 비롯된다. 그는 진정한 신앙을 종교적 감정 혹은 신앙에의 열정으로 보았으며 이 감정을 “성향의 강력하고도 지각 있는 활동과 영혼의 의지”로 보았다.19) 여기에서 한가지 주목할 것은 에드워즈는 당시 전통적으로 의지와 감정을 구분한 것을 거부했다는 점이다. 의지란 지성의 기능이 아니라 감정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동시적인 요소로 본 것이다. 즉 의지란 지성만을 자극하고 감정까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독립된 요소가 아닌 의지와 감정을 하나의 통합적 기능으로 본 것이다.

이미 그의 “지옥불”에 대한 부흥설교에서 드러나듯이 에드워즈는 열정적 감정을 강조했고 이 감정을 일으키기 위해 모든 것을 쏟고자 했다. “뉴 잉글랜드의 신앙부흥에 관한 사색”(Thoughts on the Revival of Religion in New England)에서 에드워즈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신앙의 진리를 교리적으로 다룰 때 뚜렷한 구분과 설명 그리고 이성의 힘과 훌륭한 방법이 여러 면에서 필요하고 유익하기에 무시될 수 없는 것이다. . . 오늘날 사람들은 머리를 쌓아가는 일보다 가슴을 적시는 일이 더욱 필요하다. 즉 그들은 이런 역사를 일으킬 위대한 성향을 가진 설교를 가장 필요로 한다.”20) 에드워즈는 이러한 열정과 빛을 소유하기 위해 설교자들이 부지런히 연구하고 성경에 해박하고 하나님을 깊이 추구하며 기도를 통해 빛과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교통할 것을 강조한다.21)




2. 풍부한 성경인용을 통한 교리의 논증




에드워즈는 수많은 성경인용을 통해 그의 설교를 논증하고 증명하고 발전시켜 간다. 그의 모든 설교는 수십 개의 성경본문의 인용을 담고 있다. 이는 그가 초기부터 성경에 관하여 폭넓고 깊은 지식을 추구하리라 다짐한 결심에서 비롯된다. “내 자신이 지식에 자라가는 것을 확인하고 명백하게 인식할 수 있도록 성경을 매우 부지런히, 지속적으로, 그리고 자주 연구하기로” 그는 결심했다.22) 그는 성경에 근거한 설교로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성경에 깊이 침잠하여 모든 설교가 성경의 지지를 충분히 받음으로 확실한 설득을 추구했다. 조금이라도 본문과 관련이 있거나 본문의 논증을 위해 필요한 구절이라면 몇 개가 될지라도 인용하기를 놓치지 않았다. 그가 들려주는 말이다. “본문을 인용하라! 본문을 인용하라! 본문에 나오는 실제 단어를 반복해서 말하라. 여러분의 생각이 성경 어디에서 나오는지 사람들에게 보여주라”고 그는 주장한다.23)

성경인용에 관한 그의 특별한 강조는 성경이 철저히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영감된 계시라는 그의 성경관에 근거한다. 에드워즈는 성경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필요한 모든 지식을 담고 있다고 믿었으며 하나님 안에서 구속 받은 신자들의 새로운 삶에 관하여 충분한 윤리를 말씀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에드워즈는 주로 세 가지 목적을 위해 성경을 인용한다. 첫째, 설교에서 자신의 신학적 관점에서 논증하고자 하는 것에 무게를 더하고자 할 때 가능한 많은 구절을 인용한다. 둘째, 자신이 선택한 성경본문의 주요한 단어들이 자신의 설교에서 사용하는 주요 단어를 지시할 수 있도록 인용한다. 셋째, 본문의 내용을 더 잘 묘사하기 위해 성경을 인용한다. 즉, 본문의 의미를 세밀하게 설명하기 위해 많은 성경본문을 예화로 사용한다는 것이다.24) 이와 같이 에드워즈는 성경본문을 다양하게 인용함으로써 자신의 설교의 논점을 청중에게 보다 설득적으로 전달함으로 청중의 이성에 대한 충분한 만족을 거쳐 감성의 변화를 촉구하려 했다.

“분노한 하나님의 손에 놓인 죄인들”(Sinners on the Hands of an Angry God)에서 에드워즈는 철저히 성경에 근거하여 죄인들이 현재 상태가 가지고 올 하나님의 무시무시한 심판과 생생한 지옥 불의 이미지를 그려낸다. 이 한편의 설교에서 에드워즈는 성경을 19회, 구약과 신약 가운데 10권의 책에서 모두 25절을 인용한다. 이처럼 다양한 성경인용을 통해 자신의 교리를 성경에 근거해 논증해 가는 기초로 삼았다.25)

성경에 천착한 에드워즈의 설교는 당시 이성의 우위성에 대한 주장과 철저한 대조를 이룬다.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인간이성의 우위를 노래하는 시기에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는 도구로서 이성의 불가능성에 관하여 지적한다. 성경계시의 우위성을 강조하면서 모든 본문해석과 교리 그리고 적용에서 철저한 성경인용을 통해 진리를 논증하려 했다. 홉킨스는 에드워즈의 성경관을 이렇게 요약한다. “그는 다른 어떤 책보다 다른 어떤 신학자들보다도 성경을 더 많이 연구했다. 성경에 관한 그의 비범한 지식은 그의 설교에 면면히 드러난다. 그는 자신의 신앙 원리를 인간의 어떠한 체제나 신학체계에서 가져오지 않고 성경에서만 이끌어 내었다.”26)




3. 에드워즈의 설교 형식

에드워즈의 설교는 본문 설명, 교리, 그리고 적용이라는 동일한 형식을 띠고 있다. 페리 밀러(Perry Miller)는 에드워즈가 “성경으로부터 경험할 수 있는 한 절을 선택하여 그 절에서 가장 확실한 교리를 끌러낸 후 그 교리를 논증하고 전형적인 청교도 형식을 따라 그 교리를 적용했다”라고 요약한다.27) 성경본문 선택에서 에드워즈는 긴 본문을 선택하는 일이 결코 없다. 거의 한 구절 내지 세 구절 정도만 제시하고 서론에서 본문에 대한 간결한 설명 혹은 간단한 주해가 이루어진다. 서론의 길이는 반 페이지에서 네 페이지까지 다양하다.

본문을 읽기 전에 서론적인 이야기가 없으며 때로 의미가 명확할 때는 특별한 주해나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기도 한다. 때로 설명이 필요할 때는 “관찰”(observation) 혹은 “추론”(inference)이라 명명하면서 몇 개의 머리글을 제시하면서 상세히 설명하기도 한다. 에드워즈의 성경본문에 대한 간결한 설명에는 그가 성경을 절대적 진리와 모든 지식의 근원으로 삼는 그의 철학이 베어져 나오며 설교에서 성경의 주장이외의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성경우위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에드워즈의 설교에서 서론이 가장 뛰어난 부분이라고 평하기도 한다.28) 서론에서 에드워즈가 논증을 이끌어가는 능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볼 수 있고 본문을 직접 경험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그는 마치 기자나 소설가처럼 본문을 간결하고도 심도 있게 묘사하는 능력 때문이기도 하다.

서론 다음으로 설교의 중심 부분인 교리가 나온다. 에드워즈는 한 본문에서 하나의 중심 주제를 뽑아내어 이를 “교리”(Doctrine)라 명하고 그 교리를 한 문장으로 설명하고 이를 논증해 간다. 교리부분은 에드워즈 설교의 중심 부분으로 몇 가지 특징을 보인다. 첫째, 에드워즈가 한 본문에서 하나의 중심 되는 교리를 선택한 후 그 교리를 설명하고 논증하고 설득한다. 이는 당시의 일반 설교자들과의 차이를 보인다. 에드워즈 시대의 설교자들은 한 본문에서 두 개 혹 그 이상의 교리를 설정하여 그것을 교리의 머리에 나열하고 설교해 간다.29) “거룩의 길”(Way of Holiness)에서 에드워즈는 이사야서 35:8을을 본문으로 “거룩한 자들만이 천국의 도상에 있다”라는 교리를 제시한 후 이를 설명해 간다.30) 둘째, 선택한 교리를 논증하기 위해 관계가 되는 여러 성경본문을 인용한다. “거룩의 길” 설교에서 에드워즈는 9번의 성경인용을 통해 자신이 선택한 교리를 논증해 간다. 예를 들어 거룩함이란 하나님께 마음과 삶이 일치되는 것이라 주장하면서 열왕기하 14:1?20절에 나타난 아마사의 모습이 외적인 모습에서는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지만 그 내면적으로 온전하지 못한 것을 지적한다. 나아가 거룩함이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라 주장하면서 마태복음 11:29절을 인용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은 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임을 지적한다.

셋째, 에드워즈는 선택한 교리의 논증을 위해 성경인용 뿐 아니라 사람의 이성과 일반적 경험에 호소하기도 한다. 이성적으로 확신시키고자 하는 주제들은 원인과 이유를 분석해 가거나 또는 정의를 내리거나 비교하면서 또는 반대 의견들을 하나씩 분석해 가면서 제시한 본문과 교리에 대한 사람들의 모든 질문들과 궁금한 점들을 미리 설교를 통해 논증해 나간다. 에드워즈의 논증에 자주 등장하는 형식으로 질문과 응답의 구도가 있다. 이는 거의 모든 설교를 질문과 응답 형식으로 이끌어간 외할아버지 스토다드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이 질문은 반드시 본문의 중심 되는 주제와 관계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제시한 교리를 풍부하게 설명하고자 하는 논증의 일환으로 제시되는 질문이다.

교리 설교가 마치면 반드시 “적용”(Application)이라는 제목으로 에드워즈의 설교 가운데 가장 큰 부분이 나온다.31) 적용이 반드시 모든 설교에서 가장 긴 부분은 아니지만 긴 설교일 경우 때로 적용은 본문이나 교리의 몇 배의 길이로 나오는 경우도 있다. 오늘날 설교에서 나타나는 비교적 짧은 본문에 근거한 삶의 촉구와는 달리 에드워즈는 적용에서도 교리에서 제시한 말씀을 근거로 교훈하고 책망하고 호소하기 위해 길게 논증한다. 본문과 교리가 이론이나 원리 그리고 교훈적인 것에 관하여 논증하고 설명한다면 적용 부분은 성도의 일상의 삶이나 경험과 관련되어 있다. 적용이 다루는 범위로 신자의 구체적인 삶에 관한 사고, 그리스도인의 생활태도, 그리스도인의 행동 등 다양하다. 적용에 대한 철저한 강조는 당시 에드워즈가 지성만을 자극하는 계몽주의의 한계를 벗어나 지성을 통하여 가슴을 울려 삶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거룩한 삶을 향한 그의 열망을 엿볼 수 있다. 적용에서도 교리처럼 몇 가지 적용할 주제들을 제시한 후 다시 논증하는 형식을 볼 수 있다.




4. 지성과 정서의 균형을 이루는 설교




훌륭한 설교는 듣는 사람의 가슴 속에 죄에 대한 증오감이 생기게 하는 동시에 거룩함에 대한 열망이 생기게 한다. 바르게 선포되고 적용되는 진리의 말씀이란 반드시 영혼의 구체적 변화를 목표로 한다. 사람의 변화에는 진리의 말씀을 인식하게 하는 지성적인 면과 말씀을 인식하되 머리로만 그치는 불완전한 깨달음이 아닌 가슴까지 내려가고 행동을 유발하는 정서적인 면 두 가지 요소가 모두 필요하다. 에드워즈의 설교에는 지성과 정서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설교를 작성하고 전달하는 부분에서 이성과 정서라는 두 가지의 영역으로 나눈다. 그는 지성(intellect)과 정서(heart) 사이의 전통적인 구분을 거부하고 양자간의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또한 의지(will)와 정서(affection)의 위치를 다름과 같이 규명했다. “의지와 영혼의 정서는 두 가지 기능이 아니다. 정서란 근본적으로 의지와 다르지 않고 의지의 단순한 활동이나 정신의 성향과도 차이가 없으며 다만 실천 면에서 그 활동성과 민감성에서 차이를 보일 뿐이다.”32) 초기에 에드워즈는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논증, 즉 지성의 면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청중의 지성뿐 아니라 감정이나 정서에 호소하는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33) 이는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근본적으로 어디에 내제되어 있는지에 대한 그의 깨달음의 결과라 볼 수 있다.

에드워즈에게 정서란 신앙의 경험적인 것으로서 지성이라는 이성의 표면에 감추어져 있는 영역으로 이해했다. 그는 설교의 목적을 신자의 가슴 속에 거룩한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보았다. 거룩한 감정이 신앙인의 마음속에 새겨지면 그에 합당한 열매는 자연스럽게 따라 나온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신자의 구체적인 변화의 삶을 끊임없이 촉구했지만 삶의 행동의 근원을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망으로 보았기에 가슴을 향한 설교를 추구했다.

정서를 강조하는 에드워즈는 지성이라는 문을 통해 정서로 들어간다. 지성을 일깨우기 위해 에드워즈는 모든 설교에서 교리를 이성과 논증에 기초하여 다루었으며 어려운 문제들을 성경과 논리에 근거하여 설명했다. 설교자는 정서를 움직이기 위해 지성을 움직이고 지성을 움직이기 위해 설교라는 언어의 매개체를 사용하는 사람이다.34)

당시 많은 주장들과 달리 에드워즈는 사람의 결정은 지성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서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았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능력 또한 지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지식이란 오직 가슴이나 정서를 움직이는 도구의 역할을 할 뿐이다. 비록 에드워즈가 지성의 역할을 결정을 내리거나 행동을 유발하는 결정적인 능력으로 인식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설교에서 지성적 영역을 매우 높이 여기고 사람의 지성부분을 움직이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왜냐하면 정서가 결정을 내릴 때 이는 지성에 전달된 정보에 근거해서 하기 때문이다. 정서가 결단을 내리는 일에는 성령의 특별한 역사가 필요하다.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을 설교를 통해 정서를 자극하고 사람에게 변화를 일으키는데 정서를 자극하여 변화를 일으키는 과정에 성령이 역사한다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설교는 이러한 자신의 철학을 잘 보여준다. 그의 설교는 진리의 지성에 설득할 수 있는 충분한 논리적 설명과 행동을 유발하는 정서를 적절하게 추구하는 것을 보여준다. 이와 같이 에드워즈는 지성의 역할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정서의 우위성을 잘 지적한다. 그의 지성과 정서에 대한 시각은 “빛이 있는 열” 또는 “열이 있는 빛”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35) 존 파이퍼는 에드워즈에게 나타나는 지성과 정서의 균형을 다음처럼 평가한다. “좋은 설교란 청중의 지성을 거룩한 진리로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 . 열과 빛, 타오르는 것과 빛나는 것, 머리와 가슴, 심오한 교리와 심오한 즐거움.”36)




5. 청중의 반응을 촉구하는 설교




예수님의 말씀이 선포되었을 때의 반응은 두 가지였다. 진리의 말씀에 긍정적으로 응답하여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 부류가 있고 진리를 거부하며 오히려 진리를 더욱 거슬리는 부류가 있다. 진리의 선포 앞에 중립의 자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설교자가 설교가 끝난 후 죽은 자가 살아나든 산 자가 더욱 헌신하든 변화의 역사 없이 그냥 자리에 앉는다면 이보다 안타까운 일은 드물다. 에드워즈는 설교의 목적을 진리의 말씀에 근거한 청중의 변화에 두었다. 칼빈주의를 표방하고 말씀 속에 구현했던 에드워즈가 청중이 지옥 불을 피하고 천국을 향한 열망을 가지도록 촉구하는 것이 가능했을까? 그는 비록 사람의 전적 타락을 지지하고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을 믿었지만 설교를 통해 청중의 반응을 철저히 촉구했다.

에드워즈의 적용에 대한 강조는 설교에 나타나는 비중뿐 아니라 그 강도에서도 나타난다. 적용에 관한 부분은 교리부분과 그 길이 면에서 비슷하든지 때론 교리보다 몇 배나 긴 설교도 있다. 교리 자체가 분명할 경우 긴 논증이나 설명보다는 그 교리에 기초하여 적용을 발전시키는 설교유형을 보인다. 청중의 변화를 향한 촉구가 그렇게 강한 배경에는 그가 설교란 죄인에게 들려지는 구원의 메시지 또는 믿는 자들에게 들려지는 거룩한 삶을 향한 선포로 여겼기 때문이다. “죄인들은 나아와서 주님을 영접하고 복음이 그들을 위해 제시하는 모든 용기를 북돋우는 논증으로 죄인들이 마음으로 주님께 굴복하도록 철저히 촉구해야 합니다.”37)

극단적인 칼빈주의자들에 따르면 택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은 설교자로 하여금 오직 성령님께 마음을 여는 증표가 확실한 사람들만 그리스도께로 초청할 것을 강조하고 모든 죄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지는 않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에드워즈는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칼빈주의도 아니며 또한 성경에도 어긋나고 개혁주의 전통에도 맞지 않는 것으로 여겼다.38) 비록 죄인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열고 효과를 미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하나님의 역사가 설교자로 하여금 청중에게 적극적으로 반응을 촉구하는 열심을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에드워즈는 사람들의 변화를 촉구하기 위해 지옥과 심판의 사실성을 강조했다. 지옥의 생생한 묘사나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는 설교는 이미 그의 아버지와 외조부로부터 강조되어온 설교 유형이었다.39) 청중의 회심을 촉구하는 대표적인 설교인 “진노한 하나님의 손에 놓여있는 죄인들”의 적용부분은 설교 길이 면에서 본문부분보다 10배나 되고 교리부분보다 두 배나 된다. 에드워즈는 적용부분 시작부터 회심하지 않는 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를 생생하게 묘사하면서 일관되게 죄인들이 현재 죄 가운데 처해있는 지옥 불 앞의 위험성에 대하여 경고한다. 설교가 거의 종결부에 이르러 에드워즈는 복음 앞에 반응을 촉구한다. “젊은 남녀 여러분, 여러분들과 같은 또래의 수많은 사람들이 젊음의 모든 허영을 벗어 던지고 그리스도께로 몰려 나아오는데 여러분은 바로 지금 잡을 수 있는 이 고귀한 기회를 무시하겠는가?” “아직 회심하지 않은 어린이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밤이고 낮이고 여러분들에게 분노하시는 하나님의 그 무시무시한 진노를 그대로 겪으려고 지옥으로 내려가고 있는 중이라는 사실을 모르는가?” “아직 그리스도 밖에서 지옥의 구덩이 위에 매달려 있는 모든 사람들이여! 당신이 노년이 된 남자든 여자든 중년이든 젊은이든 아니면 어린이에 불과할지라도 바로 지금 거대한 목소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과 섭리를 들으시오!” 회심을 향한 메시지가 모인 모든 계층의 청중에게 들려지기를 선언한 후 에드워즈는 구체적으로 반응할 것을 촉구하며 설교를 맺는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여! 이제 깨어나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시오. 전능하신 하나님의 진노가 바로 지금 우리 회중의 많은 사람 가운데 드리워져 있다는 사실은 조금의 의심할 여지도 없습니다. 여러분, 소돔을 떠나 피하십시오.”40)

말씀 앞에 구체적인 반응을 촉구하는 에드워즈의 설교는 오직 복음 앞에 변화된 사람만이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이 될 수 있다는 그의 구원관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인 통로는 설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라는 설교관 그리고 모든 죄인들이 반드시 구원의 은총 속에 들어오기를 갈망하는 그의 영혼을 향한 열망을 보여준다.




6. 풍부한 이미지를 구사하는 설교




성경은 풍부한 비유로 가득 차 있다. 특히 예수님은 여러 가지 이미지를 통해 천국의 모습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미지란 독자에게 전하려는 내용을 눈으로 보게 하는 힘과 그림으로 상상할 수 있는 생동감을 제시한다. 설교에서 풍부한 이미지 묘사는 딱딱할 수 있는 논증이나 추상적인 설명을 현실감 있게 만들어 주기도 하며 청중이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한다. 에드워즈는 설교원고를 작성하면서 언어적 표현을 다양하게 구현함으로써 당시 청중의 마음속에 선명한 이미지를 제시했다. 드와이트는 에드워즈의 설교에 나타난 이미지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누구든지 에드워즈의 글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그의 모든 작품들, 심지어 가장 형이상학적인 것까지도 예증이 풍부하게 나타난다는 점과 그의 설교가 강력하고도 지속적인 인상을 심어주기 위해 선택한 온갖 종류의 이미지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줄 필요가 없다.”41)

에드워즈의 설교에서 가장 이미지가 생생한 것 가운데 하나는 잘 알려진 “진노한 하나님의 손 안에 놓인 죄인들”이다. 에드워즈는 “전능하신 이의 맹렬한 진노의 포도주 틀”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하나님의 진노의 무시무시한 심판의 그림을 청중의 눈앞에 보여준다. 이 설교에서 지옥불의 이미지는 죄인들을 당장에라도 태워버릴 듯이 타오르며 영원한 고통의 지옥으로 떨어지기 전에 매달려 있는 죄인의 긴박성과 심각성의 생생한 묘사는 듣는 사람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하나님의 진노의 불길이 타오르는 무시무시한 구덩이가 있습니다. 지옥은 그 넓은 입을 쩍 벌리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발 디딜 자리는 없으며 무엇 하나 잡을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과 지옥 사이에 있는 것이라곤 허공밖에 없습니다.” 에드워즈는 이 설교가 아직 회심하지 않은 청중을 위해 들려지는 것이라 지적했다. 이를 듣는 청중 가운데 정신이 들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매달려 있던 죄인의 무게가 점점 지옥을 향해 내려가고 있음을 묘사하는 에드워즈는 청중의 가슴을 점점 더 조여 간다. “여러분의 사악함은 마치 납덩이처럼 무겁게 달라붙어 여러분을 엄청난 무게와 압력으로 지옥을 향해 아래로 향해 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여러분을 그냥 놓아버리신다면 여러분은 당장에라도 떨어져 눈 깜짝할 사이에 끝도 없는 심연으로 빠져들어 갈 것입니다. 여러분의 건장한 신체도, 여러분의 보호와 신중함도, 최고의 노력 그리고 여러분의 모든 의로움이 여러분을 지탱해 주고 지옥에서 벗어나도록 지켜주는 일보다 오히려 거미줄이 떨어지는 바위를 멈추게 하는 일이 더 쉬울 것입니다.”42)

납덩이처럼 육중한 사람들의 죄악, 지옥불 바로 위에서 죄인들을 붙들고 계시는 하나님의 손, 그리고 가느다란 거미줄 위에서 위태롭게 떨어질 듯한 거대한 바위.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이러한 이미지들은 듣는 사람들에게 성경의 진리를 현실로 그려내고 있다. 비유나 직유 또는 인유를 통한 상징적 언어는 신자의 마음속에 설교자가 묘사하는 세계로 동참하게 하는 힘을 제공한다. 이미지에 대한 세밀한 묘사는 진정한 신앙이란 설교를 통하여 경험되어져야 하고 이해되어져야 한다는 그의 설교에 대한 이론에 기인한다. 그에게 진리의 말씀이란 단순한 지적 인식이나 동의에 그치지 않고 철저히 삶 가운데 경험되어지는 것으로 여겼다. 그는 풍부한 이미지 묘사를 통해 청중의 가슴 속에 말씀을 체험하게 하고자 했다. 콘라드 체리(Conrad Cherry)는 에드워즈의 이러한 이미지 사용을 “성경적인 비유를 경험으로 그리고 경험을 상징적 의미로” 전환시키는 기법이라고 지적한다.43) 에드워즈의 이미지에 대한 묘사는 설교를 듣는 작업을 마치 현실을 체험하는 것처럼 여기게 만들어 청중에게 확실한 반응을 불러일으킨 주요한 특징이다.




7. 열정에 사로잡힌 설교자




설교자에게 반드시 요구되는 자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절대적 확신과 영혼의 변화를 향한 간절한 열망일 것이다. 설교자는 강단에 오를 때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진지하게 물어야 한다. 지금 전하는 말씀이 영혼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신하는가? 하나님이 오늘 설교를 통해 부르는 영혼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가? 열정이란 하나님과 영혼을 향해 이러한 가슴을 품는 설교자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신앙이 이성적인 동의에 그치지 않고 경험적인 체험까지 이르러 우리의 정서에 영향을 미쳐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강조한 에드워즈는 열정에 사로잡힌 설교자이다. 그의 열정은 모든 설교 가운데 근본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자 하는 자세와 영혼의 변화를 통해 거룩한 삶을 향유하기를 바라는 설교자로서의 노력의 결과였다. 그의 설교는 오늘날 독자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기며 새로운 인식과 행동의 변화를 촉구한다.

에드워즈의 설교원고가 그의 열정적인 가슴을 보여준다는 주장에는 이견이 없지만 대부분의 비평가들에게 에드워즈는 설교 전달 면에서는 열정적인 설교자로 인식되고 있지 않다.44) 적어도 두 가지 이유가 이를 뒷받침 한다. 첫째 이유는 에드워즈의 전기 작가 사무엘 홉킨스의 영향에 기인한다. 에드워즈의 설교에 대한 대부분의 인상은 그의 친구이자 첫 번째 전기 작가인 홉킨스의 기록에 바탕을 둔다. 홉킨스에 의하면 에드워즈는 강렬한 목소리를 구사하지 않고 엄숙한 자세로 강단에 등장한다. 청중에게 전혀 눈길을 두지 않은 채 벽 뒤에 걸려있는 시계만 가끔 쳐다보는 그는 열정이라곤 조금도 없는 설교자였다.45) 두 번째 이유는 에드워즈가 철저히 원고에 얽매인 설교자란 전통적인 인상에 근거한다. 홉킨스는 에드워즈의 모습을 “원고를 설교단으로 가지고 와서 그가 기록한 것을 거의 대부분 읽었다. 그는 설교한 거의 모든 부분을 곧잘 읽었다”라고 표현한다.46) 에드워즈가 철저히 준비한 원고를 지니고 손가락으로 집어가며 읽기만 하고 청중과 전혀 시선을 마주한 채 교감을 이루지 못했다면 열정 없는 설교자라는 일반적 평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는다. 그러나 이러한 일반적 평가는 적어도 두 가지 도전적 질문에 직면해야 한다. 첫째, 에드워즈에 대한 홉킨스의 묘사가 그의 모든 설교전달을 대표할 수 있는가? 둘째, 원고를 준비해서 읽는다는 사실이 반드시 열정 없는 설교자로 만드는 결정적 요인인가?

최근에 에드워즈가 원고에 의존하는 열정 없는 설교자라는 전통적인 의견에 도전을 던지는 학자들이 적지 않게 등장했다. 베일리는 에드워즈가 적어도 외면적은 아닐지라도 내면적으로 열정에 관심을 가진 것을 주장하며 홉킨스의 기록 가운데 에드워즈가 원고 없는 설교를 선호했다는 점을 지적한다.47) 킴낙은 에드워즈가 적어도 몇 달은 원고에 의존하지 않는 설교를 시도했으며 초기의 설교가 기억에 의존한 흔적이 있음을 지적한다.48) 가장 광범위한 논의로서 짐 에하드(Jim Ehrhard)는 기존의 주장들을 하나씩 논박하면서 다섯 가지 이유를 통해 에드워즈가 원고에 얽매인 설교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힌다. 대각성 운동의 배경을 다루면서 설교가 한 가지 스타일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점과, 에드워즈의 목격자들의 진술이 원고에 얽매인 것이 아니란 것을 증명하고, 아버지와 외할아버지가 보여준 모습은 설교원고를 읽는 것을 철저히 비판하는 가르침이란 점과, 에드워즈 자신의 설교에 대하여 가르치면서 즉흥설교를 선호했으며 그리고 에드워즈 설교원고가 후반부로 갈수록 완성된 원고가 아닌 요약이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49)

에드워즈는 설교의 목적을 청중의 가슴 속에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정서를 일으키는 것으로 여겼다. 에드워즈가 진리의 말씀으로 영혼의 변화를 촉구하여 거룩한 신자의 삶을 추구했으며 이런 그의 사상이 열정적 설교로 연결되었다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비록 원고를 의존하여 설교하고 외적인 모습에서 강렬한 그의 열망이 오늘날의 관점에서 강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의 가슴에 흐르는 설교자로서의 강한 열정은 거부할 수 없다. 베일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맺고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에 대한 지배적이 인상은 열정 없는 사람의 모습이다. 그러나 사실 에드워즈는 삶의 전 영역에 걸쳐 특히 실제 설교에서 하나님 중심의 열정(God?centered passion)인 진정한 신앙적 정서를 갈망했던 설교자이다. 그는 진실로 열정에 사로잡힌 설교자였다.”50)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청중의 거룩한 변화를 추구하는 설교자는 주님의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열망을 간직해야 한다. 비록 열정이 진리를 결정지어주지는 않지만 열정 없는 진리의 효과적인 선포란 기대하기 어렵다. 사람들이 에드워즈의 설교에 변화의 무릎을 꿇었던 힘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과 이 말씀을 전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인 에드워즈의 열망 때문이었으리라.




개혁주의 강해설교 입장에서의 평가



지금까지 필자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설교에 미친 영향과 그의 설교가 보이는 특징을 고찰했다. 지금부터 앞의 연구에 근거하여 개혁주의 강해설교의 입장에서 에드워즈의 설교를 평가하고자 한다. 먼저 개혁주의 강해설교를 간단히 정의하면 개혁주의 신앙에 근거한 강해설교를 가리키는 것으로 성경을 하나님의 절대진리의 말씀으로 믿고 본문에서 저자가 의도한 것을 청중의 변화를 위해 전달하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첫째, 에드워즈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 여기고 주해작업에 근거하여 전달하고자 하는 개혁주의 설교의 가장 기본적 사고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준다.51) 개혁주의 설교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며 구원과 신자의 삶의 규범이 된다는 성경관에서 출발한다. 설교의 문제는 결국 신학의 문제다. 신학의 문제는 개인이 가지는 성경관의 기인한다. 성경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인식하는 신앙이 전제되지 않을 때 그리고 그 말씀의 뜻을 주해하고 전하고자 하는 설교의 기본 틀이 무너질 때 진정한 개혁주의 설교란 존재할 수 없다. 에드워즈는 선택한 본문의 의미를 성경전체에서 풍부하게 설명하고 이성의 논리로서도 필요한 모든 설명을 시도함으로써 청중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설명하고 설득하고 설복시킨 설교자였다.

둘째, 에드워즈는 본문의 주해뿐 아니라 적용을 강조함으로써 청중의 변화를 목표로 설교했다. 개혁주의 설교는 인간의 완전타락을 기반으로 하며 오직 구원의 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선포한다. 또한 구원 받은 백성의 불완전한 삶을 거룩한 말씀으로 촉구함으로써 온전하게 세우는 것을 설교의 방향으로 삼는다. 설교의 목적은 말씀의 신실한 선포에 그치지 않는다. 성공적인 말씀 선포는 청중의 변화를 반드시 불러일으켜야 한다. 이런 개혁주의적 강해설교를 “하나님이 저자에게 의도한 본문의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여 먼저 성령님이 설교자 자신에게 적용한 말씀을 청중의 변화를 위하여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전달하는 것”이라 필자는 정의한다.

에드워즈는 설교에서 청중이 변화를 체험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표출해 내기를 열망했다. 삶의 변화를 향한 그의 일념은 충실하고 강한 그의 적용을 통해 나타난다. 현대 설교는 본문을 설명만 할 뿐 적용을 기피하거나 거부하는 현상을 보인다. 이들은 설교에서 결론이나 적용은 설교자의 몫이 아니라 청중의 몫으로 남겨놓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청중과의 교감 또는 청중의 설교참여를 강조하면서 해석학적 축을 성경의 저자와 본문에서 청중으로 치환시켜버린 새로운 설교학의 흐름은 근본적으로 절대진리에 대한 인식의 차이에서 온 것이다.52) 개혁주의 강해설교를 표방하는 설교자들은 진리의 말씀에 근거하여 철저한 적용을 강조해야 한다. 적용을 강조하는 에드워즈는 오늘날 새 설교학의 흐름에는 환영 받지 못할 설교자이지만 바울에게는 인정받을 설교자이다. 바울 설교에 한결같이 나타나는 형식은 진리의 교리에 근거하여 신자의 삶을 촉구하는 적용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절대적 진리의 말씀으로 믿고 청중의 변화를 위해 적용을 강조하며 설교한 에드워즈는 개혁주의 설교가 나아가야 할 바람직한 방향을 제시했다. 그러나 강해설교적 측면에서 그의 설교는 적어도 두 가지 한계점을 보인다. 필자는 에드워즈의 본문선택과 주제설교를 지적하고자 한다. 첫째, 에드워즈는 한 절 내지 두세 절의 본문을 선택한 후 그 절에 근거하여 하나의 교리를 선택한 후 이를 논증해 가는 설교를 추구한다. 이는 당시 청교도 설교의 전형적인 형식이었다. 강해설교에서 본문선택의 바람직한 방법은 하나님께서 저자를 통해 의도한 말씀을 묶어내는 최소단위, 즉 강해단위(expository unit)라 할 수 있다. 물론 강해단위는 한두 절의 짧은 절이 될 수도 있고 상당히 긴 절이 될 수도 있다. 어떻게 설교본문을 정하더라도 저자의 사상이 하나로 묶어질 수 있는 하나의 단위를 결정해야 한다. 에드워즈의 본문선택에서는 이러한 강해단위가 잘 지켜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보자. 에드워즈는 “거룩한 길”에서 이사야 35장 8절을 설교본문으로 설정하고 세 가지로 나누어 교리를 설명한다. 이사야 35장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날 임할 영광스런 모습을 예언한다. 본문의 8절은 영광스런 그 나라에 들어갈 사람들을 묘사하는 하나의 구절이며 35장 전체를 대표하기란 어렵다.53) 의미란 한 문장에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도 하지만 앞뒤의 정황 없이 단독으로 존재하기 어렵다. 한 구절만 선택할 때 설교자는 저자의 목소리를 듣기보다 한 절을 통해 자신의 논점을 전하는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둘째, 에드워즈의 설교는 전형적인 주제설교의 유형을 보인다. 주제설교(topical preaching)란 성경의 어떤 특정한 본문을 강해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적 관점에서 특별한 주제를 다루는 설교를 말한다. 즉 성경본문에서 하나의 주제나 교리를 찾아내어 그 주제를 성경전체를 통해 전개하는 방법으로 강해설교의 시각에서 성경적 설교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복음적 설교라고 할 수는 있다. 복음적 설교는 복음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여 성경전체에서 주제를 발전시키는 것을 말한다. 강해설교의 시작은 저자가 본문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그 의도를 찾아 전하는 것이다. 이는 설교가 무엇인가라는 기본 질문에 근거한다. 설교란 오늘날 저자가 이 본문을 통해 전하고 싶은 말, 바로 그것을 설교자가 오늘의 청중에게 적실하게 전하는 것이다. 해돈 로빈슨(Haddon Robinson)은 강해설교란 “성경을 설교자의 사고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가 성경의 사고에 굴복하고자 하는 정직한 노력을 말한다”고 지적한다.54) 에드워즈의 설교는 이런 성경전체의 시각에서 복음을 선포하여 영혼을 일깨우지만 일반적 주제설교가 지니는 한계와 위험성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맺는 말: 에드워즈의 설교가 한국교회에 주는 목소리




조국교회는 부흥을 필요로 한다. 거룩한 말씀이 조국의 교회를 휘감아 사도행전의 제자들로 말미암아 들불처럼 번져나간 선교의 역사를 우리는 다시 기록해야 한다. 부흥을 열망하는 한국교회에 던져주는 에드워즈의 첫 교훈은 말씀에 입각한 부흥운동이다. 성경적 부흥은 감성주의도 지성주의도 아닌 말씀에 근거하여 지성과 감성의 조화를 통해 삶의 변화를 일으킨다. 에드워즈가 추구한 것처럼 이는 성경말씀의 올바른 해석과 진리의 말씀에 근거한 삶의 촉구를 통해 이루어진다. 에드워즈가 바라본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열망으로 신자들의 가슴이 채워지고, 진리의 말씀으로 교회가 변화될 때 조국교회는 새로운 부흥을 맞이할 것이다. 이는 오직 하나님의 힘으로 가능한 일이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그리스도의 가슴을 품고 성령님의 능력에 힘입어 진리를 설파하는 설교자를 통해 일어날 것이다. 에드워즈와 같은 설교자가 다시 이 땅에 서게 되는 날 조국의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타오를 것이다.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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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푸우도사 자료실~!^^ | 글쓴이 : 조광성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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