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등일보의 이 훈선생이 남도 이순신길을 매주 화요일에 계속 연재합니다.
정유년 8월의 남도 700리 ‘이순신 길’로 떠나다 <1>
길의 배경<상> 2014. 05.13.
임진왜란이 터지기 전, 한 달간 슬피 흐느끼다가 왜란이 터지자 그쳤다는 조선 태조의 건원릉.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동구릉에 있다.
'우그렁쪽박' 마저 박살나고 시궁창에서 죽어 가
대낮에 사람을 잡아먹는 판인데
열병까지 겹쳐 길거리에 죽은 자가
서로 베다시피 즐비했다
수구문 밖 송장이 산더미를 이뤄
성벽보다 두어 길이나 높았다
한성에 기괴한 행렬이 나타났다
수백 명씩 떼를 지어
미치광이, 도깨비, 무당처럼 노래하고 춤추다
울고 웃으며 도성 안팎을 쏘다녔다
사람들은 난리가 나
나라가 망할 징조라며 두려워했다
화순 동복 현감 황진에 매달려
올해가 갑오년. 420년 전인 1594년 갑오년은 임진왜란 3년째로 극악한 전쟁의 독이 조선을 덮쳐 백성들 목숨이 감나무에 걸린 연줄처럼 간들거리던 때다.
‘(왜란 2, 3년째인) 계사·갑오년에는 흉년으로 무명 한 필 값이 쌀 두 되, 말 한 마리 값은 서너 말에 불과했다. 굶주린 백성이 대낮에 사람을 잡아먹는 판인데 열병까지 겹쳐 길거리에 죽은 자가 서로 겹쳐 베다시피 즐비했다. 수구문 밖에 쌓인 송장이 산더미를 이뤄 성벽보다 두어 길이나 높았다.’(‘난중잡록’ ’연려실기술‘)
곡식을 모두 군량으로 빼앗긴데다 흉년까지 겹쳐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을 정도로 굶주림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도적이 되거나 쪽박을 차고 전국을 떠도는 것 외에 달리 연명할 길이 없었다.
우그렁쪽박 하나가 전 재산인 백성들. 이 쪽박과 관련해, 임진왜란 직전 동복현감을 지낸 황진黃進과 얽힌 얘기가 ‘목민심서’에 보인다.
동복현감으로 있을 때 폭우가 쏟아져 많은 사람들이 동복천으로 떠내려갔다. 현감도 발 벗고 나서서 손수 한 노파를 구했는데, 정신을 수습한 노파가 내 쪽박이 떠내려갔다며 찾아달라고 매달리더라는 얘기다.
그러나 전쟁에 휘말린 백성들에겐 목숨 한 가닥 건져 줄 임금도, 하소연할 벼슬아치도 없었다. 들고 나선 우그렁쪽박마저 전쟁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황진은 동복현감으로 오기 전, 1590년 통신사 황윤길黃允吉, 김성일金誠一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황윤길을 보좌하는 무관으로 일본에 가서 살펴보니 조선을 침략할 기미가 역력했다.
왜란 소문에 미치광이 된 백성들
일본에서 돌아오는 길에, 다른 사람들은 희귀한 물건을 사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데 황진은 전대를 털어 보검 두 자루를 샀다. 일행들이 뭐하려고 사느냐니까, 오래지 않아 적이 오면 쓰겠다고 했다.
황진은 본래 주색을 좋아했으나 일본에서 돌아온 뒤 뚝 끊었다. 재산을 털어 말을 사 밤낮으로 말 달리기와 활쏘기를 익히며 곧 터질 난리에 대비했다. 동복현감으로 와서도 무술 단련은 쉬지 않았다.
유학자 조헌趙憲도 나름대로 왜란에 대비했다. 걷고 걸었다. 사람들이 왜 수고로운 일을 하느냐니까 “명년 왜란 때 효력을 볼 것이다”라고 했다.
일본에서 돌아온 황윤길은 왜적이 꼭 쳐들어올 것이라고 했으나 김성일은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뒷날 김성일은 온 나라가 놀라고 민심이 요동칠까봐 그랬다고 변명했지만, 그들의 말과 관계없이 난리가 가까이 왔음을 백성들이 먼저 알고 있었다. 세상이 흉흉하고 괴이한 일이 잇따랐다.
한성에 기괴한 행렬이 나타났다. 선비들이 수백 명씩 떼를 지어 미치광이, 도깨비, 무당처럼 노래하고 춤추다가 울고 웃으며 도성 안팎을 쏘다녔다. 이를 ‘등등곡登登曲’이라고 했는데, 거리를 휘젓고 다니는 이 기괴한 행렬을 보고 사람들은 난리가 나 나라가 망할 징조라며 두려워했다.
전쟁 소문은 날로 급박했다. 백성들은 공황상태가 되어 날뛰었다. 곳간을 털어 마련한 술과 음식을 싸들고 인근 산에 모여 해가 지도록 노래하고 춤추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오래지 않아 세상이 바뀔 것이니 생전에 취하고 배부름이 제일이다!”
날마다 밤낮으로 마시고 놀기만 하니 재산이 남아나지 않았다. 파산한 집이 속출했다.(‘징비록’)
‘난리 난다’ 잇따른 예언·징조
남사고는 경상도 울진 사람으로 강원도에 살았는데 풍수·지리·천문·복서·관상 등에 통달, 그가 말해 맞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가 명종 말년에 예언했다.
“머지않아 조정에 당파가 생길 것이며, 또 오래지 않아 왜변이 일어날 것이다. 만약 진辰년에 일어나면 나라를 구할 길이 있지만 사巳년에 일어나면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로부터 네 번째 진년인 임진년에 왜란이 발발, 맷돌질 하듯 나라를 짓뭉갰다.
예언은 잇따랐다. ‘월파집月坡集’(옥과 출신 의병장 유팽로柳彭老 문집)에 장성 선비 박상의朴尙義(1538~1621)의 예언이 있다. 명리와 천문에 밝은 선비로 이름이 높았던 박상의가 1577년 어느 날 밤 이이, 조헌, 이지함, 송익필 등과 함께 앉아 있을 때 하늘에 혜성이 나타났다.
이를 본 박상의가 “앞으로 15년 뒤에 ‘푸른 옷을 입은 적이 변란을 일으켜 나라의 동문이나 남문으로 들어올 것이다”라며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그의 말대로 15년 뒤인 1592년 임진년에 왜적이 쳐들어와 한성 남대문과 동대문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그의 예지능력에 놀랐다.
‘연려실기술’에 소개된 이런 예언도 있다. 왜란 초기에 어떤 사람(혹은 명나라 장수라고 한다)이 ‘초씨역림焦氏易林’으로 점을 쳐 송괘訟卦를 얻었다. 초씨는 중국 양나라 사람으로 한나라에서 이름을 날렸던 역술가다. ‘초씨역림’은 그의 역술서다.
송괘는 ‘문물은 정교하나 세속은 황폐해지며, 장차 쓰러져 죽는 것이 삼대와 같아 흐르는 피가 방패를 적시리라. 그 어미는 알지만 아비는 알지 못하게 되어서야 전쟁이 그칠 것이다’라는 섬뜩한 괘다.
영락없이 맞았다. 왜란이 터지자 산야는 핏물로 범벅이 되었다. 백성들은 삼대 넘어지듯 죽어갔다. 부녀자들은 왜적과 구원군으로 온 명나라 군사들에게 번갈아 겁탈당해 아이를 낳으니, 그 아이가 어찌 제 아비를 알겠는가.
장성출신 선비 박상의가 ‘15년 뒤 반드시 왜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가 말한 ‘청의적입자국성동문’을 새긴 비가 장성호문화예술공원에 서 있다.
‘적침 없다’ 김성일 말에 방비령 철폐
왜란이 급박하자 선대왕들도 경고를 보냈다.
왜란 발발 1년 전인 1591년 5월에 태종우太宗雨가 내리지 않았다. 가뭄이 극심하던 1419년 여름, 태종이 “내가 죽으면 하늘에 올라가 비를 내리게 하겠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5월10일에 죽자 정말 비가 내렸다. 그 후 매년 5월10일이면 어김없이 내리던 비가 그해 처음으로 내리지 않았다. 172년만의 일이었다.
왜란이 나기 직전인 1592년 3월에는 태조의 능인 건원릉健元陵에서 슬피 흐느끼는 소리가 났다. 3월 보름날부터 시작한 흐느낌은 한 달여 이어지다가 왜란이 터지자 그쳤다.
전라도 인월 팔량치 혈암血巖에서는 피가 흘렀다. 고려 말 이성계가 남원에 와 왜구를 칠 때 팔량치에서 죽인 왜장의 피가 바위에 묻어 그때까지 생생했는데, 혈암의 피가 흐른 뒤 곧 왜적이 쳐들어왔다.
그럴 때 조정은 무얼 했는가. 전쟁이 가까이 왔음을 알리는 괴이한 징조가 곳곳에 나타나고 공포에 질린 백성들은 미쳐 날뛰었으나, 남사고가 예언한대로 일본에 다녀온 황윤길과 김성일의 상반된 말을 놓고 싸움질만하고 있었다.
선조가 개탕을 쳤다. 왜가 전쟁을 일으킬 정황을 찾아볼 수 없었다는 김성일의 의견을 받아들여 전국에 내렸던 방비령을 철폐해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유명무실한 국방이었는데 방비령까지 철폐해버리니 나라가 벌거벗은 꼴이 되었다. 왜란이 터지니 조선 천지 어느 한곳 백성들 몸 한덩이 숨길 틈이 없었다. 대학살과 굶주림, 괴질은 잘 드는 칼날에 휘젓긴 잡풀처럼 백성들을 넘어뜨렸다. 왜란 7년 동안 1백여만 명이 죽었다.
겨우 겨우 목숨을 부지한 백성들은 말 그대로 쪽박신세가 되어 전국을 떠돌았으나, 결국엔 쪽박마저 전쟁에 박살나고 낯선 땅 시궁창에 처박혀 죽어갔다. 동복 노파에게는 매달릴 현감이라도 있었지만 조선백성들에겐 기댈 언덕은커녕 좁쌀만 한 숨구멍도 없었다.
■ 글·사진 이훈(언론인) <hoonjr@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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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공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