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신경 강해
영원히 사는 것
요한복음 11:25-26; 요한계시록 21:22-27
보편교회의 보편 신조인 사도신경을 강해하면서 사도신경은 열두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사도신경은 성부 하나님에 관한 고백과 성자 하나님에 관한 고백 그리고 성령 하나님에 관한 고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오늘은 사도신경의 마지막 문장인 열두 번째 문장에 관해 생각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 주일 부활절 아침에 이 세상에 있는 종교들과 철학이 죽음의 문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다면 그런 종교와 철학은 아무 쓸모가 없다고 했습니다. 종교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철학은 사람의 존재와 삶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종교와 철학은 죽음의 문제에 대해 해답을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전혀 제공해주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만이 죽음을 정복했다고 선언하고 있으므로, 즉 죽어도 다시 살고 영원히 산다고 선언하고 있으므로 기독교만이 참된 종교라고 했습니다.
영생이란 무엇인가?
오늘은 “몸이 다시 사는 것”에 이어서 “영원히 사는 것”에 관해 생각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주 부활절 아침에 사도신경 연속 강해를 통해 “몸이 다시 사는 것”에 관해 생각했습니다. 사람의 죽은 몸이 다시 산다는 것은 몸이 죽음으로 완전히 멸절(滅絶)되지 않고, 그 생명이 계속된다는 것을 전제(前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몸이 영원히 산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 설교 본문인 25-26절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생”을 ‘영원히 죽지 않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라고 한정하여 말씀하심으로 이 땅에서 몸이 살아 있을 때 성령님께서 역사(役事)하여 주심으로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생명의 주와 그리스도라고 믿는 자라고 한정하여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죽음 이후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서 생명의 주와 그리스도라고 믿을 수 없고, 믿을 수 없으니까 구원을 받을 수 없고, 구원의 선물인 영생을 얻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 6:47, 54; 요일 5:11, 13).
여러분, 사람의 몸이 영원히 산다는 것은 단순히 죽지 않고 생명이 계속 이어짐으로 영원히 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하면 영생은 엿가락처럼 시간을 길게 늘여 놓은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흔히 영생이라고 말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은 원래 숙어로서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그리고 영원하신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으므로 “영생”의 또 다른 의미는 ‘신적인 삶’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과 같은(like) 삶을 사는 것’, ‘하나님처럼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영생”이 ‘신적인 삶’, 즉 ‘하나님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이라고 해서 인간이 장차 어느 때인가 하나님이 되는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영원히 하나님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이 땅에서의 중생과 성화의 삶을 통하여 영원한 천국에서 온전한 사람의 상태에 이른다고 하더라도 언제까지나 인간은 인간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은 영원히 하나님과 같을 수가 없고, 피조물과 창조주 하나님 사이의 간격은 영원히 좁혀질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삶이 영생인데 이 “영원한 삶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영원한 기쁨’입니다. 따라서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이 영원히 우리의 예배와 찬송과 영광을 받으셔야 할 분이십니다.
영원한 생명과 새사람
여러분, 저는 방금 “영생”은 ‘신적인 삶’으로서 인간이 하나님이 되는 것은 아니라 ‘하나님과 같은’ 혹은 ‘하나님처럼’ 삶을 사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죄로 인하여 타락한 옛사람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주와 그리스도라고 믿을 때 오는 구원과 동시에 성령님께서 덧입혀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새 생명을 가진 새사람만이 하나님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성령님의 역사하여 주심으로 새사람이 된 저와 여러분들과 같은 사람만이 신적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따라서 “영원한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새 생명’을 말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의 새 생명을 선물로 받아서 살아가는 사람이 바로 새사람입니다. 우리는 모두 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새사람이 된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새 생명에 의해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다가 몸의 죽음과 동시에 영혼은 천국의 또 다른 이름인 낙원에서 잠시 머물다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함께 내려와서 부활한 몸과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으로서 천국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인 이 땅에서부터 그리스도의 부활의 새 생명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영원한 생명인 그리스도의 부활의 새 생명으로 살아갈 때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옛사람으로는 도무지 느낄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고 경험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즉 새사람으로서 오는 기쁨과 즐거움을 느끼며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셔서 지옥에 떨어뜨리지 않고 구원하셔서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그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인데,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되어 주셔서 나의 모든 삶을 책임져주시고, 내 허물과 모든 죄를 용서하여 주시고, 때로는 연약하여서 계속해서 죄를 지어 아버지 하나님을 실망하게 하는 삶을 사는데도 불구하고 내치지 않고 여전히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그 사랑을 생각할 때 우리는 감사와 함께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입니다. 이 기쁨과 즐거움은 이 땅의 사람인 옛사람으로서는 도무지 느낄 수 없는 것으로서 영원한 천국으로부터 오는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성도들은 이미 이 땅에서부터 영원한 삶을 맛보고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교회를 통해서, 예배를 통해서, 개인의 일상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이 무엇인가를 맛보고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현재 성령님의 능력으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릴 뿐만 아니라 현재의 기쁨과 즐거움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왔다는 것을 확신하고, 또 우리는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새 생명을 가지고 살면서 오는 즐거움과 기쁨과 평안을 맛보고 경험하며 살면서 영원한 천국을 확신하고, 장차 들어가 살게 될 영원한 천국을 소망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여기서부터 하늘에 있는 영광스러운 미래의 삶을 시작하게 하셨고 즐기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소망은 막연한 바람이 아닙니다. 영원한 천국에 관한 우리의 소망은 우리 안에 계신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확신에서 나오는 소망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난 주일 아침에 몸이 다시 사는 것에 관해 생각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몸이 죽는다는 점과 부활한다는 점에서는 악인과 의인이 같지만, 그 결과는 엄청나다는 것에 관해 생각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최후 심판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악인들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의인들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 삶에 대해서 마태복음 25:46에서 “그들[즉 악인들]은 벌에, 의인들[즉 신자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죽음과 부활 이후에 있을 모든 인간의 삶이며 모든 인간의 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 땅에서 혼인하여 부부의 연을 맺어서 자식을 출산하고 양육하면서 살아가는 부부라 할지라도, 부모 밑에 태어난 자식이라고 할지라도,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언젠가는 우리가 영원히 볼 수 없는 그런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죽음과 부활 이후에 있을 모든 인간의 삶이며 모든 인간의 길입니다. 따라서 이 땅에 있을 때 믿지 않는 남편, 믿지 않는 아내, 믿지 않는 자식들, 믿지 않는 부모를 위하여 기도하시고 전도하여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기를 힘쓰시기를 바랍니다.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
여러분,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지겹고 따분한 곳이 아닙니다. 영원하고 매일 매일 신선한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는 곳입니다. 물론 우리는 영원한 천국에서 있을 일에 대해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영원한 삶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그 영광스러운 실체는 아직 다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 땅의 우리는 영원한 천국의 삶에 대해 희미하게 알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희미하다고 해서 모른다거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풍성하게 알지 못한다는 의미일 뿐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삶은 우리가 이 땅에서 도무지 우리 눈으로 보지도 못하고, 귀로 듣지도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한 엄청나고 어마어마한 놀라운 사건이 될 것이 분명합니다(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58문). 우리가 이 사실을 어떻게 확신하느냐고요?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확신을 주시고, 확신을 주실 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의 매일매일의 삶 가운데서 구원과 동시에 영원한 천국을 맛보고 경험하고 살아가게 하심으로 확신을 주심으로 우리가 확신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이 세상에 심판의 주로 재림해 오실 것입니다. 그때 죽은 자의 몸이 부활하여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영혼과 하나가 되어서 온전하고 신령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까지 살아있는 사람들의 몸은 순식간에 신령한 몸으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고전 15:51-52).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는 영원한 천국에서 어린 양 혼인 잔치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잔치가 우리에게 주는 이미지는 풍요로움과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따라서 천국에서의 삶은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이며 풍성한 삶입니다. 영원한 천국에서 있을 어린 양 혼인 잔치의 즐거움은 끝이 없이 계속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부활의 새 생명을 주시고, 우주 만물의 통치자로 회복해 주셔서 우리의 구원의 완성과 함께 회복된 우주 만물을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과 은혜를 생각하면서 삼위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예배를 드리며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영원한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은 절대로 지루하지 않은 예배와 찬양이 계속되는 곳입니다. 그것은 항상 완전한 생활의 의미를 발견하는 생명의 장소이므로 하루하루가 새로운 것이 될 것입니다. 항상 완전한 생활의 의미를 발견하는 생명의 장소가 영원한 천국이기 때문에 항상 완전한 생활의 의미를 매일매일 발견하므로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은 매일매일 새로운 삶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가 신선할 것입니다. 20세기 영국의 공상과학 소설가이며 천문학자인 프레드 호일(Fred Hoyle)과 철학자이며 사회주의자인 영국의 버트란트 러셀(Bertrand Russell)과 같은 무신론자들은 장래의 영원한 삶을 생각하면 너무나 지루할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진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이들이 왜, 천국에서의 삶이 지루하다고 생각했는지 아십니까? 그들은 현재의 삶이 지루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천국에서의 삶도 지루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현재 자신들이 느끼고 있는 삶의 지루함이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히 지속된다면 정말로 살기 힘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삶을 끔찍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영원히 살게 될 천국이 그런 곳이라면 정말로 천국에서의 삶은 끔찍할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영원한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은 지루해서 견딜 수 없는 그런 끔찍한 곳이 아닙니다. 제가 늘 강조하여 말씀드립니다만, 영원한 천국은 죄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곳입니다. 죄가 없는 곳입니다. 영원한 천국은 죄 있는 사람은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입니다. 영원한 천국은 이 땅에서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 받은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우리 인생이 왜, 힘듭니까? 이 땅을 살아가는 인생들의 삶이 왜 힘듭니까? 바로 죄(sin) 때문입니다. 인간이 죄를 지어 타락하여서 삶이 힘들 뿐만 아니라 인간의 타락과 함께 세상도 타락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사는 세상이 힘든 세상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 세상에서의 삶을 아주 끔찍하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마치 자기 생명의 결정권이 자기에게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자살(自殺)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영원한 천국은 죄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사람만 들어가는 곳으로써 우리를 힘들게 하는 죄가 없는 곳입니다.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은 거룩하신 주님과 함께하는 삶입니다. 따라서 주님과 함께하는 삶은 날마다 신선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찬 삶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죄는 죽음을 잉태하고 죽음을 낳았습니다. 죽음으로 인하여 인간 세계에는 질병과 불합리함이 들어왔고, 그 결과 인간을 고통 가운데 떨어뜨리고 비참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따라서 질병과 불합리함과 고통은 죽음의 증상들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인간의 삶은 한시도 마음 편하게 살아갈 수 없는 삶이 된 것입니다. ‘혹시 병이 들어 고통을 받고 끝내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별해야 하는 아픔이 곧 혹은 어느 순간에 닥치지 않을까?’ 하는 것을 걱정하며 살아감으로 이 땅에서의 삶은 정말로 고통스럽습니다. 스트레스를 받고 병을 얻게 하는 불합리한 것들로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있습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잠시 누리고 사는 마음의 평안까지도 빼앗아 가버릴 수 있다는 염려로 인하여 걱정과 고통 가운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교적 평안한 삶을 살지만, 그들 가운데는 ‘인간이 누구이며,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알지 못함으로 인하여 인생을 따분하고 지루하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노새 노새 젊어서 노새”하면서 허랑방탕한 삶을 살거나 마약과 술과 놀음에 중독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비관주의자들의 생각이고 삶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영원한 천국은 이런 모든 현상의 근원인 죄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곳이며, 완전하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완전한 의(義)와 평강과 희락이 있는 곳입니다(롬 14:17).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 4:17에서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라고 말하고, 이어서 18절에서는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라고 했습니다. 장차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사는 것이 가장 큰 위로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천국에서의 삶의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와 영원히 함께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 오는 온전한 기쁨과 즐거움이 천국에서의 삶의 본질입니다(시 16:10-11; 17:15; 히 12:23).
제임스 패거는 그의 저서 「사도신경」 강해에서 이 땅에서 패거 자신의 삶에 기쁨을 주는 네 가지 근원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그는 장차 들어가 살게 될 영원한 천국에서는 “첫 번째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두 번째 함께 천국을 누리게 될 사람들과 세 번째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이 만들어내는 선하고 즐거운 일들과 네 번째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또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가치 있는 일을 하며 살게 될 것을 생각할 때”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제임스 패거의 생각은 일리가 있고,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에 대해서 참고해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영원한 천국에서도 우리는 크고 영원하시고 위대하신 하나님에 대해 계속해서 알아갈 것입니다. 여러분, 죄는 우리의 지식에도 장애를 일으켜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일에 많은 장애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죄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 받았기에 우리가 영원한 천국에서 살 때는 지적 기능에 장애를 일으키는 모든 장애도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따라서 지식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장애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의 그 어떤 지식과도 비교할 수 없는 아주 신선한 참된 지식이 될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사실을 하나 알았을 때 ‘그것으로 끝’하고 마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무엇을 알았을 때 거기에는 지적 감정이 생기는 것입니다. 만족과 즐거움과 기쁨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처럼 영원한 천국에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으로 인하여 천국에서의 우리의 매일 매일의 삶은 새롭게 될 것이고, 하나님을 알아가는 그 지식으로 인하여 매일같이 신선한 지적 감정을 가지고 기쁨 가운데 살아갈 것입니다. 이 신선한 지적 감정은 우리를 날마다 새롭게 만들고, 천국에서의 삶을 부유하게 만들고, 그 부유한 삶은 우리를 기쁘고 즐겁게 만들 것입니다. 그래서 천국에서의 우리의 삶은 지루할 틈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는 매일 같이 대하는 사람들에 대해서 알아가고 함께 사회를 이루어 살아갈 때도 사람들의 모습이 죄로 인하여 처음 창조의 모습이 아니라 왜곡된 모습이기 때문에 결국에 이 세상에서 사람을 알아가고 사회를 이루어갈 때 온전히 알지 못하고 왜곡되게 알아가게 되고, 그로 인하여 왜곡된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람을 사귀어 갈 때 많은 염려와 걱정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뒤돌아서면 내 뒤통수를 치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걱정을 하며 비참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귈 때 겉과 속이 다르게 말하고 행동하며, 그로 인하여 손실과 고통을 겪기 때문에 많은 염려와 걱정이 뒤따르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많은 고통을 겪으며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천국에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맨 마지막에 당신의 형상을 따라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도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라고 하신 하나님의 창조의 최고의 걸작인 죄 없는 인간, 온전한 인간을 알아가고, 함께 교제하며 거룩한 사회를 이루어 살아가는 일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지 않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은 온전한 사귐으로 인하여 염려와 걱정이 없고 지루할 틈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는 인간이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맡기셨던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통치하는 것이 회복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영원한 천국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회복된 우주를 통치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도 우리의 지식이 온전히 회복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따라서 피조물들이 왜곡됨이 없이 하나님께서 각각의 피조물을 통하여 이루고자 하시는 대로 이루어 갈 것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천국에서의 삶은 만물의 통치자로서 만물을 통치할 때 오는 기쁨과 즐거움으로 인하여 지루할 틈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 65:18은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 …”(사 66:10-11 참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영원한 상태에서 누리게 될 기쁨과 즐거움은 크고 온전한 것이므로 지루할 틈이 없게 될 것입니다.
창세 전, 영원이라는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삼위 하나님께서 세우신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온전히 다 이루어지는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시고 목적하신 삶을 온전히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영원한 천국은 먹고 마시는 나라가 아니라 성령님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의 나라로서(롬 14:17; 암 5:24; 사 66:12; 슥14;9) 죄가 없으니까 의로움 그 자체이며, 하나님의 온전한 샬롬, 즉 평강의 나라이며, 기쁘고 즐거운 나라이며, 하나님의 영광으로 가득 찬 나라로서 하나님의 영광(계 21:23)과 신자들의 영광(계 21:24; 사 66:12)으로 가득 찬 나라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천국인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우리의 지식과 함께 모든 것에 진보(進步)와 발전(發展)만이 있고, 진보와 발전으로 가득 찬 상태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으로 인하여 모든 것이 거룩하고 순수한 상태로 가득 찬 상태가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가 구원을 통해서 회복된 세계인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영원히 살 때는 구원받은 우리는 우리 존재의 의미를 온전히 깨달아 알게 될 것이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과 자연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통치를 사람에게 위임하신 사실을 온전히 파악하고, 그 의미로 가득 찬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렇게 멋진 곳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막힘없는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될 것이고, 다른 피조물과도 막힘없는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사람에 대해서 죄로 인하여 오게 된 오해나 곡해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온전한 그리고 풍성한 교제를 나누게 될 것이고, 그로 인하여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에 대해서 요한계시록 21:3-4은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천국에서의 우리의 삶은 진정한 안식과 즐거움을 누리며, 하나님의 지식으로 계속해서 성장과 성숙의 과정을 걷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처럼 실패하고 좌절을 통해서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 것이 아니라, 실패와 좌절을 맛보면서 성장과 성숙해 가는 것이 아니라, 실패와 좌절이 없이 계속해서 성장하고 성숙해 갈 것입니다(헤르만 바빙크). 그때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이란 현재 우리의 언어로는 말로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장차 들어가 살게 될 영원한 천국이 바로 이런 곳이기에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20-23에서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영원히 사는 삶을 이 세상의 삶 속에서 맛보고 경험했기 때문에 영원한 천국은 그가 이 땅에서 영원히 사는 삶을 맛보고 경험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아름답고 좋고 풍성한 곳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천국에서의 우리의 삶은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 매일매일 새롭고 신선한 기쁨과 즐거움으로 온전한 기쁨과 즐거움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사야 65:17은 이 온전한 기쁨과 즐거움이 너무 크기 때문에 너무도 놀라서 이 땅에서의 이전 것은 그 무엇이라도 기억하지도 않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그러므로 여러분, 영원한 천국인 새 하늘과 새 땅이 있고, 죽은 몸이 다시 살아나 영원히 산다는 이런 사실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참으로 불쌍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 세상의 사람들 모두는 이 땅에서 영원히 살기를 소원하여 의료 기술과 의학을 발전시켜 나가지만, 절대로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까지만 이 땅에서 살다가 죽어 영원한 지옥에 떨어지든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든지 할 것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인간은 죄의 삯이 죽음이라고 정하신 하나님의 법에 따라서 모두 다 죽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 세상에는 아무런 소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죽어도 다시 살고 살아서 영원히 죽지 않는 소망의 길이 있습니다. 그 길이 바로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 길입니다(요 14:6).
우리 성도들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생명, 즉 영생을 선물로 받아서 하나님과 같은 삶을 살다가 죽으면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그 이후부터는 영원한 천국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복음의 명령대로 살지 않으며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하여 살아가지 않은 악인들은 지옥에 던져져서 말할 수 없는 고통의 형벌을 영원히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악인들의 삶은 하나님께서 공의로우신 분이라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마 25:41, 46; 막 9:43; 살후 1:8-9).
이 땅에서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사람의 삶
그렇다면 영원한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새 생명이 있고, 새 생명을 경험하면서 살아가는 인격을 갖추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가진 사람들은 영원한 천국인 의와 평강과 희락이 자기 안에 있음을 인격과 삶을 통해서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서 인격과 삶에서 평화를 만들어나가야 하며, 어떤 환경이나 상황에서도 소망이 없는 사람처럼 살지 않고 견디며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함께 교회를 지체들에게도 의로운 삶을 보이며 살아가야 하고, 지체들의 마음에 평화를 주는 일에 힘써야 하고, 지체들에게 기쁨과 즐거움을 주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을 이 세상으로 돌려서 우리가 있는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의(義)를 구현(具現)하고, 평화를 만들고, 기쁨과 즐거움을 주면서 사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신자의 죽음은 성화가 끝나고 영화가 시작되는 순간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야 합니다(살전 4:13-18). 따라서 성도는 이 땅에서 살든지 죽든지 주님을 위해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구현하면서 살아가면, 영원한 천국에서도 그것들의 진가가 충만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신자의 삶과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삶이 완전히 단절된 삶이 아닙니다. 무엇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과 중생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중생할 때 우리의 타락한 영혼이 완전히 없어지고 새로운 영혼으로 만드신 것은 아닙니다. 새롭게 혹은 극단적으로 변화시켜 주신 것입니다. 전혀 새로운 질서를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도 우리의 부활체가 살아가기에 적합한 세상으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변화되는 것이지 단절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세상도 하나님의 나라로 신령하게 변화되어 편입될 것입니다. 그것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구현하면서 살아가면, 영원한 천국에서도 그것들의 진가가 충만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에서 행한 의롭고, 평강을 구현(具現)하는 삶을 살고, 기쁘고 즐거운 삶을 사는 이 모든 것들이 영원한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에 그대로 편입되어 우리가 이 땅에서 행한 우리의 행위가 천국에서 더 빛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영원한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의 이 땅에서의 삶이어야 합니다. 아멘.
(2024. 4. 7 주일 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