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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에 대통령과 기숙사 룸메이트였다는
어느 교장선생님의 이야기
후당 고 광 창
1972년 광주지산초등학교 근무 당시 보고 듣고 느낀 내용이다.
출근하려면 무등경기장 정문에서 담양 大田면(한재)가는 ‘광신여객’ 시외버스를 타야하는데 평범한 시골 노인 모습을 한 분과 함께 차를 기다렸는데 다음날 알고 보니 그 분이 인근에 있는 광주양산초등학교 林福x 교장선생님이셨다.
무등경기장 정문에서 매일 아침 광신여객 시외버스를 기다리는 10~20분 동안 궁금한 점이 많은 내가 주로 질문을 하고 林교장 선생님이 답변해 주는 형식으로 대화가 이루어졌다.
林福x 교장선생님은 珍島가 고향이신데 일제 강점기 때인 1932년에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하여 1937년에 졸업했다고 한다. 왜 머나먼 대구까지 가서 학교를 다니셨느냐고 물으니 당시 사범학교는 서울에 경성사범, 웃녁에 평양사범, 아랫녁에 대구사범 밖에 없었고 우리 전라도에는 사범학교가 없으니까 전라도 사람들은 대구사범학교를 갈 수 있도록 인원이 배정되어 있었다고 한다.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1학년 때 박정희 대통령과 룸메이트(Room mate)였단다.
대통령의 어렸을 때 모습을 물어보니 고향이 경북 선산인데 한 달에 한 번 정도 집에 다녀올 때마다 짚으로 10개씩 묶은 달걀 꾸러미를 가져와 가게에서 학용품으로 교환했다고 한다. 학교생활은 독서를 좋아해서 책을 많이 읽었고, 운동(유도)과 군사훈련에 적극 참여했던 것 같고 의지가 강해서 어떤 일을 한 번 시작하면 끝장을 내고야 마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졸업 후 언제 대통령을 만나셨는지 물어보았더니 1963년 5대 대통령 당선된 후 그 이듬해에 옛날 룸메이트를 만나보기 위해 청와대를 갔지만 정문에서 넣어 주지 않아 못 들어가고 있는데 마침 대통령차가 안에서 나오니까 경비원들이 나를 한쪽으로 밀치려고 하고 나를 대통령을 만나려고 하는 등 실랑이가 벌어졌는데 대통령 차가 멈추더니 어떤 분이 내려서 경비원에게 몇 마디하고는 대통령 차는 지나갔는데 조금 후 청와대 안쪽에서 차가 한 대 나오더니 자기를 태우고 들어갔다고 한다. 그때, 직원이 하는 말이 대통령 각하께서 곧 돌아오신다고 하니 그때까지 여기서 좀 쉬시라고 하면서 직원들이 자기를 깎듯이 대해주었다고 한다.
1시간 정도 기다리고 있다가 안내를 받아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는데 집무실 한쪽에 권총차고 앉아있던 직원(경호실장?)에게 ‘이 분은 나하고 친구이니까 실장은 잠시 나가 있어도 괜찮아요,‘ 했다한다. 권총 찬 직원이 나가자 대통령이 나에게 다가와 어! 복x이 친구! 오랜만일세 ’! 하며 손을 덥썩 잡고 힘껏 흔들어 대더니 ’여기는 자네와 나 외에는 아무도 없으니 우리 옛날 학창시절로 돌아가 정담을 나누어 보세!‘ 했다한다. 하지만 나는 분위기에 압도당해 대통령에게 해라를 할 수 없어서 계속 예 예를 했다한다.
대통령의 첫 번째 질문은 현 정부에 대한 국민 반응이 어떤가였다고 한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하셨어요? 라고 내가 물으니 ’농촌에서는 농어촌 고리채 정리를 해 주어서 농민들이 고맙게 생각하고 있고, 도시에서는 요즘 데모와 췌류탄 가스가 없어져서 국민들이 마음 편하게 생각한다‘. 고 했더니 대통령도 고개를 끄덕이더라고 말한다. 다음은 가정사 이야기로 지금 어디서 어떻게 사는지? 부모님은 살아계시는지? 자녀들은? 등등을 물어서 나는 진도 고향에서 연로하신 어머님을 모시고 농사지으면서 교장으로 근무하고 있고 애들은 광주에서 하나는 대학교 하나는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고 막내딸은 진도에서 중학교 다니고 있다고 했더니 그럼 자네도 광주시내에서 근무하면 좋겠네 하고 말씀 하시길레 나는 광주에 집도 없지만 연로하신 어머님이 고향에 계시니까 고향을 떠날 수도 없어요’. 했다 한다. 이야기 도중에 비서들이 들어와 다음 스케쥴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서 내가 일어서면서 이제 가봐야겠습니다. 했더니 직원을 불러 서울역까지 모셔다 드리고 차표까지 사드리라고 했다한다.
목포에서 하룻밤 자고 다음날 진도에 오니 아침부터 도교육청과 진도교육청에서 몇 차례 학교로 전화가 왔다는데 집에 오는 즉시 전화해 주라고 했단다. 그래서 ‘대통령 만난 것이 큰 잘 못인가 옛날 친구라 만났는데’ -- 하면서 진도교육청에 전화를 해 보니 광주시내로 발령이 났으니 빨리 도교육청에 가 보라고 했다한다. 내가 광주로 발령이 났다고? 애들이 광주에서 학교 다니고 있다고 하니 대통령이 나를 배려해준 모양이니 고맙기는 하지만 광주에 거처할 집도 없고, 진도에는 연로하신 어머님도 계신데---
이렇게 해서 林福x 교장은 64, 10월 고향 진도 석교초등학교에서 광주지원초등학교 교장으로 발령을 받았고 대통령으로부터 축전까지 받았다고 한다.
당시 떠도는 풍문에 의하면 청와대에서 “oo에 근무하는 아무개 oo로 발령하고 즉시 결과 보고할 것”이란 전통이 떨어지면 어느 기관에서든 시간을 다투어 즉시 시행을 하고 보고를 해야만 했다고 한다. 그런 과정에서 피해를 입는 사람이 생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林교장 선생님이 이런 상황을 뒤늦게 아셨던 모양이다.
광주지원초등학교에서 3년이 넘었으니 다른 학교로 옮겨야 하므로 희망학교를 적어내라고 도교육청에서 연락이 왔을 때, 희망학교를 따로 적지 않고 아무 학교나 빈자리에 발령을 내주라고 했더니 광주 제2수원지를 지나가야 하는 학교(광주청풍초등학교? -광주지원초등학교보다 교통 조건이 더 좋지 않은 학교)로 발령을 내 주어서 거기서 3년 살다가 이곳 양산초등학교로 왔다는 것이다. 林교장 선생님은 대통령 친구 덕분에 광주시내로 발령을 받았지만 광주에 온지 10여년이 다 되는데 그동안 교통조건이 좋지 않은 광주 변두리 학교만 근무한 셈이다.
진도고향에 있을 때는 노모님 모시고 논농사를 지으면서 아무 걱정 없이 살았단다. 진도는 섬이고 당시에는 진도대교도 없어 해남에서 동력선을 타고 가야하는 교통 상 어려움 때문에 육지 사람들은 진도까지 오지 않아 교감, 교장 승진 때도 다른 사람과 경합 없이 진도사람들끼리 순서대로 승진했다고 한다. 그동안 임교장 선생님은 진도 섬에 갇혀 바깥세상 돌아가는 것은 모르고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왔던 것 같다.
이 말을 들은 지 18년 지난 1990년 내가 진도교육청에 근무하게 되었다. 이때는 이미 진도대교가 개통되어 교통이 편리해졌을 뿐만 아니라 도서벽지교육진흥법이 발효되어 승진하는데 필요한 도서벽지 근무점수를 받기위해 육지부에서도 일부 교원들이 진도에 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장, 교감 전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진도출신 교원들이 자기들 끼리 전화해서 형님 먼저 아우 먼저 하는 식으로 사전에 교통정리를 해버리기 때문에 여러 교원들이 선호하는 학교도 경합이란 게 거의 없었다. 이런 곳에서 오랫동안 생활해 오셨으니 임복x 교장 선생님이 어떤 생활태도를 가지고 계셨는지 알 만 했다.
대통령에게 근무하기 좋은 학교로 발령내주라고 부탁하시지 그러십니까? 했더니 손사래를 치면서 ‘내가 좋은 학교로 발령이 나면 나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이 대통령을 원망할 텐데, 그것은 내가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광주시내 근무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뿐입니다’ 한다.
그럼 청와대에 대통령을 만나러 가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니 옛날 학창시절 친구가 대통령이 되어 내 일처럼 기뻐서 얼굴이나 한 번 보려고 갔을 뿐입니다.‘ 한다. 기숙사 룸메이트가 대통령인 사람치고는 너무 순진하신 것인지? 아니면?
기숙사 시절 룸메이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어떤 도움을 주셨습니까? 했더니 도움은 무슨 도움이요? 학용품을 함께 좀 나누어 썼을 뿐입니다. 사범학교는 의무교육이지만 학용품은 각자 사서 써야하는데 내 룸메이트는 한 달에 한 번 정도 자기 집에 갔다 올 때 10개씩 포장 된 달걀 꾸러미를 가지고 와서 가게에서 학용품으로 바꾸는데 간혹 만원 버스 속에서 달걀이 1~2개 깨지는 경우, 그만큼 학용품을 적게 받기 때문에 학용품이 부족할 때도 있는데 그때는 나에게 남아있는 것을 당연히 나누어 썼지요.
교장 선생님은 언제 집에 다녀오십니까? 했더니 ‘대구에서 기차를 타고 대전에 와서 호남선으로 바꿔 타고 목포에 도착한 다음 거기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 다음날 배로 진도로 들어가야 하니까 집에 가는 데만 꼬박 2일이나 걸립니다. 그러니 방학 때가 아니면 집에 갈 수가 없어요.’한다.
우리 주변에서 보면 대구사범학교 졸업생들이 시장, 국회의원(유정회), 방송국장 등을 하는데 교장선생님은 그런 거 해보실 의향은 없으신가요? 했더니, ‘나는 송충이로 태어났으니 솔잎만 먹다가 송충이로 죽을 겁니다.’ 한다.
어떤 분은 林교장은 참 못난 사람이다. 박대통령이나 육영수 여사와 조금만 인연이 있어도 그걸 놓치지 않고 이용해서 승진하고 영전하는데 1년 동안이나 룸메이트 했던 사람이 ‘나 교육장 하나 시켜주소’, ‘큰 학교 교장으로 보내주소’소리를 못하고 있으니 참 딱하다고 한다. 林교장 선생님 마을을 알고 그런 말을 하는지 ---
재미있는 여담 한 가지 소개해 주었다. 67년 제 6대 대통령에 당선 된 이듬해 교육부에서 전국 교육장회의를 개최하고 회의가 끝난 후 청와대를 방문했는데 교육장들이 한 분 한 분 대통령에게 인사를 드리는 과정에서 ‘목포교육장 朴찬x입니다’ 하고 인사를 하니 대통령이 ‘박 선배님 지금도 그 빵 좋아하십니까?’ 했다 한다. 회의를 마치고 돌아온 朴교육장이 林교장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어 林교장 나좀 살려주게, 청와대에 전화 좀 해 주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배님 걱정하지 마시오, 나는 청와대에 전화 거는 방법도 모릅니다만 대통령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했다한다.
사연은 이렇다. 林교장 선생님과 대통령이 룸메이트였던 기숙사 舍監이 바로 현 목포교육청 朴교육장 이었고 당시 맛있는 빵집은 기숙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굉장히 추운 어느 겨울 날 그 먼 곳까지 가서 빵을 사오라고 했으니 가슴에 못이 박혔던 모양이라고 --
舍監이 시켜도 춥다고 안갈 수도 있지 않아요? 했더니 사감이 매일 사감일지를 작성하는데 거기에 안 좋게 기록해 놓으면 기숙사 생활이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질문했다.
왜 어려운 일은 그 생도에게만 시켰을 까요? 林교장 선생님이 웃으면서 말하길 나는 고향 후배(사감 고향은 목포)이고 내가 가끔 사감이 좋아하는 빵도 사다드리니까 나는 예뻐했지만 내 룸메이트는 그런 게 없어서 어려운 일은 모두 그 친구에게 맡겼던 것 같아요. 어떻게 생각하면 나 때문에 그 친구가 어려운 일을 많이 했다고 생각해요.
다음은 양산초등학교 직원들로부터 들은 이야기다. 매년 연초가 되면 대통령이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지방 연두 순시를 했다. 이때 도지사와 교육감이 업무 보고를 하는데 업무보고가 끝나고 점심시간이면 대통령이 林복x 교장을 자기 옆 자리에 앉게 하라고 했다 한다. 대통령 옆자리에 앉아서 식사를 하는데 말끔한 대통령 복장과 허름한 林교장 선생님의 복장이 눈에 거슬렸던가 보다. 그 이듬해부터는 대통령 업무 순시가 있으면 교육청에서 사전에 林교장 선생님의 복장을 점검해야 했단다. 이발, 면도, 세탁한 양복, 와이셔츠, 넥타이, 깨끗이 손질한 구두 등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두를. 그 정도로 林교장 선생님은 외모에는 관심이 없으셨던 것 같다. 自然美를 사랑해서 일까?
대통령 옆자리에서 식사한 소감을 물으니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나 때문에 대통령 옆 자리에 앉지 못한 분에게 미안하고 식사시간에도 뒤편에는 권총 찬 경비원들이 지키고 서 있고 또 지근거리에는 청와대 직원(?)들이 대통령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고 기자들이 왔다 갔다 하면서 사진 찍고 하니까 그 자리가 좌불안이라는 것이다. 식사시간에 주로 하는 이야기는 건강과 가족 안부를 묻고 답하는 것인데 그것도 주위 사람들이 있으니까 함부로 말할 수 없더라고 한다.
어느 날 林교장 선생님이 나에게 묻는다. 지금 대통령이 정치를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느냐고? 그래서 내가 되물었다. 교장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느냐고? 그랬더니 교장 선생님 답변, 나는 대통령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선 국민들을 ‘배부르고 등 따시게’ 해 주었으니 잘 한 것 아니냐고--, 일부 노조 운동에 대해서는 ‘인간의 욕심은 단계가 있는데 배부르고 등이 따시니까 그 다음 욕심을 부리는 것이라고 --
옛말에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上水淸이면 下水淸이다)했는데 왜 지금 윗물이 맑은데(上水淸) 아랫물이 흐린지(下水濁) 모르겠다. 대통령은 돈 받고 장관을 시킨 것도 아닌데 장관들은 아랫사람에게 돈을 받고 자리를 사고판다고 하는데 그게 정말이요? 한다. 내가 뭐라고 답할 수가 없다.
다음해 내가 다른 학교로 이동되어 더 이상 林교장 선생님을 만날 수가 없었는데 들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광주시내 10년 만기를 몇 개월을 남겨두고 74년 3월 장성군으로 전보를 희망해 가셨다고 하고 교장 임기제가 생기기 전 전남교육청에서 ‘후배들에게 자리 물려주기 운동’을 전개할 때 자진해서 명예퇴임을 신청하셨다고 한다.(정년퇴임을 5~6년 남겨두고)
그런데 77년에 우연히 시내버스에서 만나 뵙게 되었다. 너무 반가웠다. 1년 동안 무등경기장 앞 길거리 다방(?)에서 매일 만났던 출근길 동행자이셨는데 -- 역시 외모는 신경을 쓰지 않은 自然美 그대로였다. 요즘 건강히 잘 지내십니까? 했더니 나에게 명함 한 장을 건네준다.
인생복덕방, 결혼소개소, 결혼주례 담당
소장 林 福 x
여기까지가 내가 알고 있는 ‘학창시절에 대통령과 기숙사 룸메이트였다는 林福x교장 선생님’의 모습이다.
林교장 선생님, 지금까지 살아 계신지 궁금하지만 알 수가 없다. 참 좋은 분 이셨는데 ---
2022년 大暑날에 고광창 拙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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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상적인 표현은 '자연미'가 넘치시다는 표현입니다.
소인도 좋아하는 생활철학(?)이 '자연주의'랍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