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戒盈 번호 : 16조회수 : 482005.07.19 14:34
신 마을기행 (제6편)
장흥군 부산면 내안리(內安里) 내동(內洞)마을
靈光金氏 長興派의 본산
나는 기러기가 내려앉은 비안낙지(飛雁落地)의 形局 인재 배출의 요람
나 어릴적 고향은 항상 추억을 더듬게 하는 영원의 안식처이다.
내 부모님은 육신으로, 어린 나에게는 마음으로, 언제나 풍요와 빈곤이 교차하는 우리만의 거울이 저 높은 하늘 언저리에 달랑 메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좁디 좁았던 논둑길을 따라 헤어진 책보를 등뒤로 야무지게도 메고 시오리길을 거침없이 내 달리면서 먼훗날 우리는 빈곤과 무지 라는 글자를 뇌리에서 지우기 위해 선생님의 회초리쯤은 아랑곳 하지 않고 삐그덕 거리는 책상 앞에서 먼 미래를 그려가던 에덴 동산과도 같은 곳이었다.
십 수년이 지난 지금 우리들은 다시 그곳을 가고 싶어한다. 이글거리는 아스팔트위에 사람과 매연이 뒤범벅이된 광야의 도시를 뒤로하고, 긴장과 욕망, 가식의 허물을 내동댕이 치고 어머님의 품속으로 가고 싶어 한다.
그래서 고향은 영원의 안식처이다.
내동리는 장흥읍에서 북서쪽으로 4㎞에 위치해 있고 면소재지에서는 서남쪽으로 3㎞지점에 있다.
북쪽으로는 수인산 끝자락인 수리봉과 경계하여 유치면 대리와 인접해 있고 서쪽으로는 수인산 맥을 넘어 장흥읍 성불리와 경계한다. 삼면이 산으로 둘러있고 동쪽으로는 부산평야와 접해있는 해발 약 50m의 중산간 마을이다. 마을 좌측으로는 자미마을, 우측으로는 안곡마을과 이웃하고 있다,
내동 마을의 형국은 나는 기러기가 내려앉은 형국이라 하여 비안낙지(飛雁落地)라 하고 또 승려가 예불을 드리는 형국이라 하여 호승예불(胡僧禮佛) 이라고도 한다.
뒷산이 마치 용이 하늘로 오르는 모양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흥룡동(興龍洞)이라 불러왔다.
뒷산의 큰바위의 형상이 지아비 같다 하여 부암(夫岩)이라 하고 이를 따라 夫山里 라고도 하였다. 이곳 夫岩은 억불산 며느리바위를 바라다보고 있어 망부암(望婦岩) 이라고도 한다.
용이 하늘로 오르는 모양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흥룡동(興龍洞)
이 마을은 뜻깊은 지명 으로는 각시-둠벙(내동 복판에 있는 연못으로 각시가 빠졌다함)
구시-둠벙(소 먹이를 주는 구유와 닮은 연못)
도깨비보(날이 굿으면 도깨비가 나온다는 보)
지애비 바우(내동 서북쪽 산에있는 바위로 멀리 떠난 부인를 기다리고 서있는 지애비 같이 생겼다)등 수도없는 옛 지명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이 마을의 연혁은 연대는 확실치 않지나 위쪽은 공씨가 아래쪽은 장씨가 터를 잡고 살았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근거는 없고 다만 마을주변 산에 장씨묘가 몇 기 있을 뿐이다.
조선조 세종(1447년) 30년에 문과에 급제한 김필(金필) 영광인이 世祖 옹립에 불복하고 단종조(서기1453년)에 부친 경의(敬義)와 형님 찬(璨)을 모시고 이곳 흥룡동에 터를 잡고 현재까지 세거하여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한다.
이후 이 마을을 중심으로 靈光金氏 長興派가 번성하게 된다.
1914년 용계면의 일부가 합하여 현재의 부산면이 되기전까지 부산방(夫山坊)의 치소가 이곳에 있었고 마을 이름도 홍룡동 혹은 부산리라 하였으나 행정개편 이후 내안리 내동으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신정(新亭)에 병사(兵使)를 지낸 황보겸(皇甫謙)의 묘소가 있다고 전하나 찾기가 어렵다. 풍암 문위세(文緯世)의 초당터라 하여 전해온 곳도 있다.
정묘지(1747년)에는 흥룡동이라 하였고 영광김씨와 홍덕장씨가 살았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경술지(1910년)에는 내동이라 하여 영광김씨, 홍덕장씨, 김해김씨, 남평문씨, 장흥위씨가 살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수많은 문필가와 인재들이 배출되는 것을 보면 이 마을 서당이 마을의 향학을 장려함과 무관치 않아보인다.
조선조 후기에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은 유지만 남아있지만 반야암(般若菴)과 서재(일명 興龍齋)가 있었던 것으로 전하여 내려오고 있다.
산 중턱의 서당골에 수인사(修仁寺)소속인 반야암 이라는 암자가 있었으나 폐사된 이후 김필 선생이 서당으로 개설하여 월봉 김광원, 진사 방호 김희조, 진사 은암 김몽룡, 학남 김우, 오남 김한섭등 30여명의 문사를 배출한 학당으로 알려져 있다.
또한 영광 김씨 화수계에서 설립하여 광복후 까지 교육의 도장으로 명맥을 유지 하였지만 서양식 교육의 성행으로 폐쇠된 화수정 서재가 있었다 한다.
마을의 문화유적 유물로는
흥룡단(興龍壇), 부산면 내안리 835번지에 있으며(속칭 홍룡동) 동학란때 수성군 의병장으로 싸우다 순절한 오남 김한섭과 중암 김평묵의 학덕과 순절을 기리기 위하여 배향한 단터.
반야암터, 부산면 내안리 산28-1번지에 있다.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물탄바위 밑에 수인사의 말사로 여겨지는 절이 있었다 한다. 이절이 폐사되자 영광김씨 서재로 운영되다가 불에 타 없어졌다. 지금도 암자의 주춧돌과 깨어진 기와장이 있고 우물이 그대로 있다.
오래된 고택 으로는
영광김씨 화수정(花樹亭,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건물이며 내부에는 6장의 현판이 걸려 있다. 영광김씨 제실로 약 27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영광김씨 영모재(永慕齋,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건물이다. 안곡에 있으며 영광김씨의 제실이다)
김기홍씨 사당(家廟, 1칸 배집으로 건립연대는 약 200년이다. 장흥에 있는 사당 중에서는 유일하게 벽화가 있다)
원모재, (내안리 628번지에 소재, 상자전(箱子殿) 참봉 김활(金活)의 제각, 해방 후 인곡(仁谷) 김정채(金正采) 선생이 후학을 위해 강학하던 서재. 인곡 김정채는 현 전남대학교의 전신인 대성대학 동양 철학과 교수로 50년~51년도에 재직) 등이 현존해 있다.
또한 중국 한나라때 역사서인 한전(漢鐫)3권을 비롯하여 사기평림(史記評林,중국의 고대역사서)28권, 학남집을 비롯하여 오남집,7권, 월봉실기1권, 지운집3권 등 많은 고문 고서가 보관되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역사유적 으로는백제 초기의 석실묘와, 내동마을의 사장거리, 마을입구의 영광김씨 세장비 북동쪽 평지등 2개의 고인돌군이 있다. 사장거리의 고인돌군은 병아리 바위라 불리워 왔으며 비교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나 마을입구의 고인돌군은 많이 파괴된 상태다.
또한 마을 입구에 있는 영광김씨 세장비(世庄碑)와, 인곡 김정채선생 유적비(1982년 문제자들이 건립, 추연(秋淵), 권용현(權龍鉉)이 찬하고 문인 고영완 이 씀,연고자 김기홍)
열부 청풍김씨 행적비, (1993년에 건립, 영광김씨 처식(處植)의 처로 열행이 독실하여 향천으로 장흥읍지에 등재되어 있음, 연고자 김중구)가 있다.
옛날에 정월 대보름이 되면 집집마다 짚을 거두어 고줄을 들이고 인접 접경지인 장흥읍의 기양,예양,신흥,남동,동동,주민들과 부산면의 내동,자미,용두,유랑,용동 주민들이 편을 갈라 고싸움과 줄다리기를 하면서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행사를 하였지만 없어져 버린지 오래이고 이 고싸움과 줄다리기는 우리군의 민속 축제인 보림 문화제 행사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해 가고있는 형편이다.
한편 이 마을에는 마을 고유의 농부가 가 전해오고 있다.
“여보시오 농부님네 이내 말을 들어보소
저건너라 갈비봉에 비가 묻어 오는디
허리에다 우장을 두르고 논에 잔지슴을 메어 불거나“
전답에 잡초를 메기 위해서 비가 올지라도 농사일을 해야하는 고달픈 농사일에 시름을 농부가를 부르면서 이겨낸 선조들의 지혜 이리라.
이마을이 배출한 전,현대의 수많은 인재들은 우리군에서 둘째가라면 서운 할만큼 수도없이 배출된 곳이기도 하다.
전대의 인물로는 김경의(영광, 통정대부 행 평강현감 가선대부 이조참판). 김필(영광, 1401~1449,경상.충청.경기 감사).김광원(영광, 1478~1550,이조참판 겸 성균관제주.시호 문절. 예양서원 향사).김귀년(영광, 1507~1597,선교량 의금부도사)등 19분의 수없는 공신이 배출된 마을이다.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낸 태용(台用)을 파조(派祖)로 하는 장흥파(長興派)는 그의 증손(曾孫) 찬(璨)과 필(㻫)이 세종(世宗)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홍문관 전한(弘文館典翰)과 이조참판(吏曹參判)을 각각 지냈는데, 이들 형제는 삼도(三道)의 관찰사(觀察使) 등 요직을 역임하며 나라에 공을 세웠으나 수양대군(首陽大君)이 왕위(王位)를 찬탈하자 이를 개탄하고 벼슬을 버린 후 장흥(長興)으로 낙향한 절신으로 이들의 후손들이 오늘날 장흥(長興)지방에 집중세거하고 있다.
필(㻫)의 손자(孫子) 광원(光遠)은 조광조(趙光祖)의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연마하고 문장(文章)과 행의(行誼)로 벼슬에 천거되어 승문원(承文院)의 습독(習讀)을 지냈으며,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해남(海南)으로 유배되었다가 풀려나와 장흥(長興)의 월봉산(月峰山)에 들어가 학문(學問)과 후진양성으로 일생을 마치니 사람들은 그를 <호남사표(湖南師表)>라 불렀다.
영광 김씨 참판공 김필은 조선 세종때 의정부 검사사인(검사사인), 전라도 감찰사, 이조 참판을 지내다 단종때 계유정란(계유정란)으로 세상이 어지러워 지자 관직을 그만두고 낙향하여 지금의 장흥읍 송암리 359번지에 사인정(사인정)이라는 정자를 짖고 북쪽을 바라보며 주군을 그리며 기거한 곳이다.
또한 1.894년(고종 31년)강진에서 동학군이 관아를 습격하자 동료들은 도망가고 없는 관아를 지키기 위해 민중의 추대로 수성장이 되어 성을 지키다 죽음을 당한 김한섭(1838~1894, 자는 致容.호는 吾南)의 태생지이기도 한다.
현대의 인물로는 김재구(1990년,육군 중장).김세옥(1998년,경찰청장, 현 청와대 경호실장). 김옥채(1996년,전 전남,광주농협지부장).김창남(2001년, 서울 지방 국세청 이사관). 김전근(1998년 판사 현 변호사).김옥전(2000년 경무관.전 치안감,부산 경찰청장).김기홍(1998년 전 전남대 서기관) 김정길(1980년 경감)김종대(1990년 해병대령). 김두석(1980년 해군중령).김홍섭(1987년 육군 중령) 김희태(1998년 도 문화재 전문위원)김명환(1980년 중등교장). 김준경(1985년 초등교장,아동문학가, 세종 아동문학상-77년. 대구시 문화상-87년 대한민국 동요대상-96년).김재훈(1985년 초등교장).김기성(1998년 인하공대 교수).김재승(1998년 중등교장)김석린(현 여수종고 교장)김중구(현 장흥초등학교 교장). 김정환(전 전남일보 부사장).김기철(의사).김태균(의사). 김임규(의사).김광재(의사). 김현옥,김현정,김현(김재승씨의 자제로 3형제가 전문의).김경옥(의사).김종구(현 K/T,서울 서부본부국장, 이사관) 남효섭(한의사) 씨 등이 있으며 현대에 장흥의 한학자로 칭송받는 김태경(2002년 작고, 한학자 전, 장흥향교 전교)의 태생지 이다.
예전 번성기에 120여호 500여명이 거주하는 대촌 이었지만 지금은 45호에 100여명이 생활하고 있다.
주로 수도작과 축산을 하고 있지만 이 마을에는 밭이 많아 시골 할머니를 중심으로 채전에 우리가 일상적으로 먹는 많은 종류의 채소를 심어 장흥 장에 가면 이 마을 아주머니 분들이 싱싱한 먹거리 채소를 팔고 계신다.
지금은 직접 소매를 하지 않고 장흥읍에 있는 가계에 공급하고 있다.
글.사진 김천일기자(사진있음)
[출처] 신 마을기행(장흥군 부산면 내안리)|작성자 맑은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