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담(淸淡)
김 정 식
말이 춤추는 가을이다. 바람 한 줄기가 무더위에 눌렸던 마음의 빗장을 열어젖힌다. 푸른 바람 한 줌이 성큼 가슴속으로 담긴다. 청년 시절 내 안에서 교묘히 존재하는 삶에 대한 허상과 실체가 나를 꽤 많은 불면의 밤으로 몰아세웠다. 밤하늘의 푸른 별을 바라보며 생 떽쥐베리는 어린 왕자를 산꼭대기에 올려놓고 ‘나는 외롭다’라는 메아리로 되돌아왔는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으면서 어느 것과도 바뀔 수 없는 본질을 찾아 책을 뒤적거리기도 하고, 마음 저리며 누군가를 기다리기도 하였다.
어느 날 눈이 맑은 한 여인을 만났다. 밤하늘의 푸른 별처럼 다가온 보조개가 커다란 동화(童話)스런 표정의 그녀는 쪽빛을 사랑한다고 했다. 나의 의식 속에 푸른빛은 단절, 차가움, 외로움 그런 등속이었다. 그것만이 이유가 되지 않는다. 내 청춘의 시계(視界)가 너무 붉어서 화염방사기처럼 들끓어서 바다를 닮은 푸른 빛은 어둡고 암울했다.
나는 바다를 누르고 떠오르는 붉은 태양을 사랑했다. 붉은색의 호기는 바다를 떠나면서 쓰러졌다. 그렇지만 그것은 오랫동안 나를 이끌었다. 그것은 순간적으로 뜨거워지고 지나치게 상기되었다.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숨이 가쁘고, 흥분되어 있었다. 나의 움직임은 타오르는 화염 속 불꽃 같았다. 김동인의 단편소설 「광염(狂炎) 소나타」의 주인공처럼 광포한 야성이 드러날까 두려웠다.
어느 날부터 나는 삶의 피로를 느꼈다. 나는 정신적 온도를 낮추고 싶었다. 해가 떠오르기 전의 여명을 좇기 시작했다. 아내가 왜 푸른색을 좋아하는지 궁금해졌다. 가마솥에 장작불을 지피면서 붉은 불빛 너머로 베여 나오는 푸른빛이 눈에 들어왔다. 푸른빛에 이끌리기 시작했다. 신비로운 푸른빛은 서늘하면서 시원스럽고 투명하고 느긋했다. 야릇한 안정의 푸근한 평화의 빛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을 깊게 가지고 행동을 줄이는 은유의 빛이었다.
불타는 광염을 떨치고자 느림의 미학을 찾아 문인화와 서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검은 먹빛 속으로 푸른빛을 찾아 난(蘭)을 치고 대(竹)를 그린다.
체본(體本)을 주면서 선생님이 호를 물었다. 나의 아호(雅號)는 맑을 청(淸), 맑을 담(淡), 청담(淸淡)이다. 문인화 선생님이 호(號)에 물(水)이 너무 많다고 한다. 하지만 성질이 불(火)같고 화(火)가 많으니, 불화를 두 개 겹치면 불꽃 염(炎)이 된다.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아내가 글자마다 불을 물로 꺼야 한다며 물 수(水) 변을 넣었다. 노년기는 담백하게 욕심 없이 마음 깨끗하게 살자며 아내가 나에게 청담(淸淡)이란 아호를 선물하였다.
푸른 가을 하늘은 푸른빛 중에서도 여왕이다. 아무리 맑고 아름다운 풍경이어도 물속에 가을 하늘이 담겨야 제대로 푸른 물빛의 성스러운 경지에 이른다.
단풍잎은 붉은빛 중에서도 가장 다양한 색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 붉은색은 오랫동안 나를 조종해 왔다. 붉은빛에 밀착되어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내가 사용하는 일용품들은 인주 외에는 모두가 붉은색이 아니다. 삶을 냉철하게 바라보고 싶어서 아내가 좋아하는 쪽빛을 탐하며 청담(淸淡)하게 살아보고 싶었다.
쉽게 끓고 쉽게 식어가는 알루미늄 그릇의 상징이 아니라 오래오래 정성의 불을 가해야 서서히 데워지고 서서히 식어가는 두꺼운 무쇠솥 같은 참을성이 땅거미 내리는 저녁의 푸르름 마냥 내 마음에 자리 잡는다.
삶의 여정이 만들었던 질곡의 억울함과 좌절의 반향으로 고조되고 흥분되어 있던 분위기에서 조금씩 물러나 앉고 있었다. 세월과 함께 주변이 고요해지고 있었다. 또 다른 현상이 속에서 불길로 치솟으면 냉철하게 푸른빛을 띠며 앉아있는 아내를 바라본다. 한 번 더 생각하고,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려고 냉정하게 주변을 돌아보며 또 한순간을 인내하는 시간을 갖는다.
자제력을 긋고 사물을 섬세하게 보는 빛 그것이 푸른빛이다. 깊어지게 하고 받아들이게 하고 느끼게 하는 빛 그것이 푸른빛이다. 붉은빛이 감정의 빛이라면 푸른빛은 이성의 빛일 것만 같다.
칠순이 눈앞이니 이제는 물어가면서 살아야 할 나이가 아니고, 대답하면서 살아야 할 나이에 이르렀다. 아직도 삶의 지혜가 덜 영글어서 어떤 견제나 밀고 나가는 힘이 필요하지만, 더하고 덜한지에 대한 판단도 쉽지는 않다.
“학이시습지 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논어(論語)의 첫 편인 학이(學而)의 첫 문장이다.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는가.’로 해석한다.
요즘은 마음 수련을 위하여 논어를 듣고, 서예와 문인화를 배우고 익히면서 ‘학이시습지면 불역열호아’의 즐거움에 한 주간이 하루처럼 흘러간다.
공자(孔子)가 추구하는 인자(仁者)는 될 수 없지만,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내지 않는다면 이 또한 군자답지 아니한가?
바람직한 신노인(新老人)으로 배우는 즐거움에 아호를 준 아내의 소망처럼 청담(淸淡)하게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있다.
<약력>
2014. 수필시대 신인상
경북대학교 대학원 졸업
영남대학교 대학원 국문학박사 수료
2022년 올해의 작품상(대구문인협회)
공동 수필집 ‘해국(海菊)’
첫댓글 청담 참 잘 어울리시는 호 같습니다. 청담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