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090327
제목: 늑대와 이리의 목자
본문: 시23:1-6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시편 23편 말씀 중심으로 늑대와 이리의 목자라는 제목의 말씀 증거 합니다.
늑대와 이리의 목자라는 말은 저도 그렇고 여러분도 그렇고 아마 처음 들어보셨을 겁니다.
또 저도 처음 말해봅니다.
늑대와 이리는 목자가 필요 없습니다. 다 자기들이 알아서 잘 살아갈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갖고 있는 맹수들이에요.
늑대와 이리의 목자가 되겠다고 나서는 목자도 없고 늑대와 이리가 목자를 필요로 해서 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런 말 자체가 아예 없어요.
그런데 여러분 아세요?
늑대와 이리의 목자라는 말은 없는데 실제로는 늑대와 이리의 목자가 이야기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는 것이에요. 실제로.
우리가 유명무실이라는 말을 합니다. 이름은 있는데 유명무실. 실제로는 없어요.
그런데 거꾸로 무명 유실한 것들이 있습니다. 이름은 없어요.
그런데 실제로는 있어요. 그게 뭔 줄 아세요?
늑대와 이리의 목자입니다. 늑대와 이리의 목자.
신앙이 결국 뭐냐?
우리의 신앙의 현실, 본질적이고 올바른 신앙은 무엇이냐? 라고 말하면 늑대와 이리의 목자라는 것과 관계가 없어요.
그러나 신앙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우리 교회의 현실을 들여다보면 하나님이 어쩔 수 없이 늑대와 이리의 목자가 되도록 강요받으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문제요, 현재 우리 교회들의 문제라고 할 수 있어요.
하나님은 양의 목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늑대와 이리와 사자와 곰, 이런 맹수들의 목자가 되도록 강요받고 있다는 것이에요. 어디서?
교회에서. 교회에서.
시편 23편을 저는 저 혼자 이렇게 별명을 붙입니다.
구약의 주기도문이다.
구약에서 성령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치신 말씀이 바로 시편 23편이다.
이 말씀을 외우면서 그것을 나의 기도로 바꾸면 이보다 더 좋은 기도가 없다. 하는 그런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기가 막힌 말이에요. 기가 막힌 말.
아놀드 토인비가 역사를 도전과 응전으로 풀이를 합니다.
역사의 흐름이 왜 가능하냐? 역사의 진행의 원동력이 무엇이냐?
도전과 응전이다.
도전이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부족함을 느끼는 겁니다.
그리고 부족함을 느낌에서 창조적이고 그리고 적극적이고 장애를 극복하려는 어떤 도전정신이 생긴다는 것이에요. 도전을 받게 되면 응전의 태도가 거기서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족함을 느낀다는 게 전제되어있어요. 역사의 진행이.
그런데 다윗은 오늘 말하기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과연 인류역사상 다윗이 부르는 이 노래를 불렀던 사람이 누구겠습니까?
진시황? 부족함이 있었어요.
알렉산더? 부족함이 있었어요. 부족함이 있다, 라는 말보단 더 정확히는 그 사람들이 부족함이 있다고 느꼈어요.
이게 중요합니다.
부족함이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 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정할 수가 없어요.
중요한 것은 그 사람이 부족함을 느끼고 있느냐, 안 느끼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죠.
다윗이 부족함이 없는 사람입니까?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를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콩가루 집안의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에게 10년이 넘도록 이유 없이 쫓겨 다니며 도망자생활을 한 사람입니다.
평생 돌아봐서 부족함으로 점철되어있던 사람입니다.
무엇을 기준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런데 부족함이 없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부족함이 있다, 없다를 객관적으로 증명할 길은 없는 것이고 돈이 있다고 부족함이 없겠습니까? 돈이 없다고 부족함이 있겠습니까?
알 수가 없어요.
진시황도 부족함을 느꼈고 알렉산더도 부족함을 느꼈고 바로 왕도 느꼈고 마릴린 먼로도 부족함을 느꼈고 헤밍웨이도 부족함을 느껴서 그 부족함에 짓눌려서 자살을 합니다.
그런데 도대체 다윗은 뭐라고 부족함이 없다고 얘기를 하느냐?
여호와가 목자기 때문에.
말을 해놓고 보면 또 그래요.
여호와가 목자인데 부족함이 있다는 건 또 말이 됩니까?
말이 안 되지요.
다윗도 목자요, 아브라함도 목자였습니다. 모세도 목자였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목자인데 사람들이 목자라도 목자의 사명과 책임의식이 어디에 있느냐?
어떡하든지 양들에게 부족함이 없게 해주려는 게 목자의 사명이요, 목자의 존재가치요, 목자의 의식이에요.
늘 그 직업의식에 사로잡혀있어요.
직업의식을 넘어서서 양을 자기 살처럼 사랑하지 않습니까?
양에게 부족함이 없도록 하는 게 목자의 일인 거예요. 목자의 일. 목자의 소원인 거예요. 그게. 양에게 부족함이 없게 하는 게.
그런데 그 목자가 누구냐 하면 다윗도 아니고 아브라함도 아니고 모세도 아니고 누굽니까?
하나님이라면 하나님이 목자라면 목자의 의식 속에는 양에게 부족함이 없게 하겠다는 게 이 여호와이신 목자 되시는 분의 소원이에요. 소원.
그런데 하나님이 무엇이 부족해서 누가 무섭게 하고 누가 눈치를 줘서 당신의 소원을 못 이루시겠습니까?
양인 당신의 백성들에게 부족함이 없게 만드는 게 여호와하나님의 소원이고 여호와하나님의 직업이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여호와하나님이 목자신데 부족함이 없어야지. 대단한 노래도 아니에요. 당연한 노래지.
그런데 왜 저하고 여러분은 부족함을 느끼죠?
다윗처럼 여호와하나님을 여호와하나님으로만 부르는 게 아니라 우린 아예 아버지라고 불러요. 주님의 십자가사건 덕분에.
그런데 왜 부족함이 있습니까? 왜?
그거 이상하지 않아요?
실제로 내가 부족함을 느끼잖아요.
현실적으로는 우리의 지금 주어진 현실이 부족한 현실이라는 걸 객관적으로 증명할 길이 없다고 말씀드렸어요. 분명히.
그건 말이 안돼요. 객관적인 기준이 없어요.
내가 그렇게 느끼고 있는 거지.
그런데 왜 그렇게 느낍니까?
여호와가 목자신데. 그럼 뭐 이런 목자지요, 뭐.
여호와는 나의 게으른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는 이유가 게을러서 당신의 일을 안 하시기 때문이다. 라든지.
여호와는 나의 머리가 조금 모자라시는 목자이시니 나의 이런 고통을 도대체 알 수가 없는 그러한 모자라는 목자이시다. 내지는
여호와는 나의 능력이 한참 딸리는 목자이시라서 내가 이렇게 경제적으로 어렵다.
여호와는 나의 고집이 센 목자이시라서 자기 생각이 아니면 도대체 내 생각을 들어먹어주시지를 않으신다.
여호와는 나의 어려움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무덤덤한 목자라서 내가 이렇게 고통스러워도 남의 일처럼 생각하신다.
그렇지요. 그런 목자니까 내게 부족하지.
얼간이 같은 목자니까. 얼간이 같은 목자니까 내게 부족하지. 내게 부족할 리가 있어요? 내가 양인데?
여러분, 뭐가 문제인 것 같아요?
지금 우리에게 주어져있는 지금 이 상태, 이 현실이 여호와하나님께서 당신의 능력과 지혜와 양을 향하신 사랑의 마음으로 목자의 신분으로서 하여간 내가 얘한테 부족함이 없게 하겠다는 소원을 가지고 허락하신 현실입니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소원을 가지고 내가 얘한테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다는 소원을 갖고 그 능력과 그 지혜와 모든 걸 동원해서 허락하신 현실이에요.
그런데 왜 나는 부족함이 느껴집니까?
내가 양이 아니라서 그런 것이에요.
내가 늑대요, 내가 이리요, 내가 곰이요, 내가 사자요.
저는 이 시편 23편으로 기도를 할 때 이 점만 생각을 하면 너무너무 은혜가 되는 거예요.
그저 선교회문제가 있다고 느껴지고 부족하다고 느껴지고 내 자식놈 때문에 부족함이 느껴지고 집안에서 부족함이 느껴지고 경제적으로어렵고 할 때마다 또 내 몸이 좀 불편하고 할 때마다 주변의 사람들 때문에 힘들 때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없으리로다.
그런데 왜 나는 부족함을 느낄까?
아, 목자에게 문제가 있는 게 아니라 내가 양이 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구나.
그렇잖아요, 여러분.
어느 늑대가 어느 이리가 푸른 초장을 만족해하겠습니까?
어느 사자와 어느 호랑이가 어느 곰이 도대체 푸른 초장을 만족해하며 거기서 되새김질하며 놀고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셨어요.
저는 이 설교를 여러 번 했습니다.
그런데 제 자신이 이 점을 생각할 때마다 아, 내가 지금 양이 아니라 이리거나 늑대이거나 사자거나 뭔가 다른 동물로 변해있구나. 내 마음이.
마음이 사자 같은 마음이 됐거나 호랑이 같은 마음이 됐구나.
그러니까 하나님이 인도하신 이 푸른 초장이 푸른 초장으로 느껴지지를 않고 만족하지를 않는 거예요.
늑대는 푸른 초장에서 할 일이 없어요.
어떡하든지 지금 주어진 상황을 뛰쳐나가고 싶어만 합니다.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야.
감사라는 게 있을 수가 없지요. 늑대가 푸른 초장에서 뭘로 감사를 해요. 뭘로.
풀밭에 기어 다니는 개미새끼를 잡아먹겠습니까?
늑대가 어떻게 거기서 살겠습니까?
못 살아요. 푸른 초장은 늑대에게 감옥이에요. 감옥. 말이 좋아 푸른 초장이지.
사람도 그래요. 사람이 푸른 초장이 좋을 리가 있겠습니까?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지어놓아야 좋은 거지.
우리가 양이 안 돼있는 거예요. 양이 안 돼있어요.
그리고 맨 날 우리는 목자만 반성을 하라는 거예요.
하나님, 주세요. 주세요.
뭘 안 줬다고 더 줘요. 뭘 안 줬다고. 목숨주고 생명주고 다 줬는데 공기주고 물주고. 지금도 살려주고. 다 줬잖아요.
그리고 양만 되기만 하면 당장에 푸른 초장으로 변할 텐데. 맨 날 목자가 줄 걸 안 줬대요.
그러니까 강청하래, 강청하래요.
그것도 맨 날 졸고 있는 목자니까 주여 3창해서 깨우래는 거예요.
졸고 계시니까 깨워야지.
그러니까 소리소리 질러야지요, 뭐. 소리소리 질러야지요.
이렇게 아침마다 태목사는 왜 이렇게 소리를 지르냐?
여러분들 깨우려고 그러지요, 저는. 양들 깨우려고.
늑대의 마음을 양으로 돌이키려고 난리를 치고 있는 거 아닙니까, 지금.
양으로부터 너무 거리가 멀리 떨어져있으니까.
그래서 이 개념을 여러분, 우리가 생각을 하면 너무너무 이 시편 23편을 가지고 기도하는 게 은혜가 되요
그러니까 기도하기 어렵다, 어렵다, 하지 마시고 주기도문과 시편 23편을 이어서 기도 한번 해보세요.
기가 막혀요. 기가 막혀요.
그냥 이 시편 23편 1절과 2절만 제가 지금 말씀드린 걸 기억하면서 기도를 해도 자꾸 부족함이 있기 때문에 우린 간구하게 되지 않습니까?
부족함이 있는 그 마음을 날 들여다보면 아, 주님 내가 양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양 되요?
기도가 나오는 거예요, 거기서. 내가 어떻게 양이 될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여호와하나님의 소원이 내가 부족하지 않은 쉴만한 물가와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시는 게 여호와하나님의 소원이고 일이에요. 일.
그런데 내게 부족함이 있겠어요?
그런데 왜 부족함이 느껴지냐?
내가 늑대니까. 그리고 늑대의 모습을 고수하면서 나는 전혀 반성하지 않아.
그냥 나는 늑대요 이리라도 괜찮아요.
내 속에서 불만을 그대로 고수하면서 하나님보고 내 목자가 돼 달라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이 어떻게 늑대와 이리의 목자가 되겠어요?
그럼 어떻게 우리가 양이 됩니까?
주님의 십자가에 마음을 집중시키는 거예요.
주님 내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지은 죄 때문에 내가 양이 번제로 드려져 불타죽는 것처럼 죽어야 할 것을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셨군요.
매일 아침 상번제를 드리는 거예요. 상번제를. 십자가를 보면서.
그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는 거예요.
머리에 가시면류관. 내가 이제는 머리를 쓰지 말아야지. 내가 주님을 제외하고 머리 쓴 것이 죄였습니다.
손에 못 박혔어요. 내가 손으로 만진 모든 것 자식이고 남편이고 아내고 사업이고 다 이게 죄악에 물드는 거예요. 내가 손대지 말아야지, 이제.
내가 발에 못 박혔어요. 내가 걸어 다니면서 했던 모든 일들 내 이력, 이력, 신발 履자 아닙니까? 신발을 신고 걸어 다녔던 모든 일들, 앞으로 내 맘대로 다니지 말고 하나님이 띠 띠우시고 이끄시는 대로 가야지.
그 십자가를 묵상하며 마음을 계속 퍼붓습니다.
마음을 붓다 보면 내 마음이 마치 주조할 때 그 틀에 녹인 쇳물을 부으면 모양이 나오는 것처럼 주님의 십자가, 십자가에 달린주님께 마음을 두고 계속 기도를 하다보면 내 마음이 마치 녹은 쇠처럼 되가지고 어린양 되시는 주님의 모습으로 내 마음이바뀌어간다는 겁니다. 바뀌어간다는 거예요.
이렇게 될 때 진정으로 우리가 양이 될 수가 있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에다 마음을 부을 때 우리 마음이 양의 마음이 된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오셔서 우리를 너끈히 당신의 뜻대로 이끌어 가실 수 있는 양들로 바뀐다는 거예요.
진짜 여러분 이건 괜히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너무너무 부족함이 없어요.
부족함이 없는 게 부족함이라. 부족함이 없는 게 부족함이에요. 지금. 삶이라는 게.
주님의 십자가에 마음을 계속 부어요. 그러니까 같이 죽어요. 주님과 함께.
그러면 양으로 마음이 바뀌면서 부족함이 없어요. 부족함이 없는 게 신경질 나는 거예요. 이제. 아, 왜 이렇게 부족함이 없냐, 말이야. 부족함이 있어야지.
그런데 다른 사람이 예를 들어 친구목사님이 저를 볼 때는 부족함 투성이지요. 이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그러나 내 마음이 부족함이 없는 게 신경질이 나는데, 뭐 어떡해요.
왜 이렇게 부족함이 없을까요?
보세요. 머리도 빠지지요. 얼굴도 이젠 쭈글쭈글해지지요. 뭐 선교회는 요 하꼬방만한 데서 시작했는데 지금 3년째 접어들었는데 뭐 어디 딴 데로 갈 기미는 안 보이지요. 사람은 60개 좌석 놓고 있는데 맨 날 그 모양 그 타령이죠.
아침마다 카메라만 보고 떠들고 있죠. 뭐 세상적으로 보면 이게 웃기는 장난이고 정말 웃기는 짬뽕이지 이게 뭡니까?
그러나 어떻게 해요.
제 문제는 부족함이 없는 게 문제에요.
아, 신경질 나 죽겠어요. 부족함이 없어서.
그래서 그냥 감사도 그냥 신경질적으로 감사를 해요.
아, 감사해요. 하나님. 이렇게 부족함이 없게 하실 수가 있어요? 이렇게.
아, 대단한 겁니다. 여러분.
진시황보다 제가 나아요.
그 사람은 날마다 부족했어요. 그런데 저는 날마다 부족함이 없다 그러는 판인데?
여기에 중요한 개념이 있어요. 오해가 되는 개념.
이끈다는 말을 목적과 붙였어요. 목적에 갖다 붙였어요.
목적이 이끈다. 이거 아주 사이비 중에 사이비에요.
여러분이 목적을 이끄는 삶을 아무리 은혜스럽게 읽었어도. 그 책을.
그래서 기분이 확 잡치더라도 할 수 없어요.
내가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 되요.
목적이 이끄는 게 아니잖아요.
어느 양이 자기 생애에 대한 목적의식을 갖고 사는 양이 있습니까?
양의 과제는 날다마 옆에 목자만 보는 거예요.
내 양으로서의 인생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의식하는 게 아니라.
목자만 보는 게, 양입니다. 목자가 이끌지 목적이 이끄는 게 아니에요.
두 번째, 비전.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에 대한 비전은 양이 갖는 게 아니에요.
목자가 갖는 거예요.
양의 비전은 지금 내 앞에 계신 하나님을 찾는 게 양의 비전입니다.
비전이 뭐예요? 본다는 거 아닙니까?
누구를 봐요?
양이 자기 인생의 비전을 향해서 목자를 고용해갖고 갑니까?
푸른 초장을 찾기 위해서? 아, 푸른 초장을 잘 찾는다는 A라는 목자를 우리가 고용하자.
이런 거 없어요.
목자가 비전입니다.
그리고 오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신다는 얘기가 나와요.
뭐 이런 얘기를 들으면 현실극복, 현실을 형통하게 하기 위해서 뭐 이 장애와 환란과 어려움이 있을 때 하나님께 나와서 부르짖고 뭐 이런 얘기들을 자꾸 해요.
그러나 여러분, 이 본문이 뭘 말합니까?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들어갔을 때에,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라는 현실은 목자의 현실이지 양의 현실이 아니었어요.
양의 현실은 뭐게요?
여러분 양의 현실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갔을 때 양의 현실은 뭐게요?
목자가 양의 현실이에요. 목자가.
돈이 없습니다. 자식이 문제가 됩니다. 병이 났습니다. 난리가 났어요.
온 나라 안에 경제가 문제라 그래요.
그러나 그게 내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현실이란 말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
원수가 나를 둘러쳤어요.
그런데 원수가 보는 앞에서 상을 베풀어주시고 잔에 기름을 부어주시고 잔치가 벌어진 겁니다.
무슨 뜻입니까, 이게? 뭘 말하는 거예요.
원수가 둘러쳐져있는 게 내 현실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오해해요.
뭐 이 나라의 무슨 경제난이 있으니까 기도해야 됩니다.
이북이 어떠니까 뭐 기도해야 되요.
이북이 들썩거리고 경제가 문제가 되는 게 내 현실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 현실이요, 하나님이. 하나님이.
원수의 목전에서 여호와하나님 목자 되신 분께서 내게 상을 베풀어주시는 것이에요.
하나님이 내 현실이에요.
이북과 미국과 경제에 뭐 무슨 뭐 경제가 위축되고 부동산 값이 내리고 이런 모든 현실은 하나님의 현실이고 하나님이 이끌어 가시고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일이라는 겁니다. 교회가 여기서 오해하고 있는 거예요. 자꾸.
나라를 위해 기도하자. 구국기도를 해요? 누가 구국을 해요? 누가?
뭐 교회가 구국을 합니까? 어느 교회가 구국을 했어요? 구국? 좋아하시네.
그저 내 앞에 있는 하나님 안으로 깊이깊이 들어가요.
그래서 다윗이 마지막에 뭐라 그래요?
어디 거한다, 그래요?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르리니 내가 튼튼한 나라에 영원히 거하리라.
아니에요.
튼튼한 가정에 내가 영원히 살리라.
내가 80평, 90평 아파트에 영원히 살리라.
내가 외제차 타고 다니면서 영원히 살리라.
아니에요.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라.
그게 내 현실이라는 말입니다. 여호와가 현실이요, 여호와의 집이 현실이지 뭔 튼튼한 나라가 현실이고 튼튼한 가정이 현실입니까? 뭐 그걸 바래요?
그건 하나님이 알아서 하세요.
역사의 주관자 되시고 우리의 목자 되신 하나님의 일이지 왜 교회가 나서서 쌩 정말 난리를 치면서 교인들을 다 늑대와 이리로 만들어놓고 하나님을 늑대와 이리의 목자가 되게 만드시는 겁니까? 뭐 때문에?
그리고도 잘났대요.
말이 되는 얘기들을 하면서 하나님을 찾아야지. 하나님으로 하여금 늑대와 이리와 사자의 목자가 되 달라고 아우성이니 하나님 그만 괴롭히세요.
그리고 주님 십자가 붙잡고 늑대와 이리로 살았던 모든 과거를 청산하고 죽은 다음에 마음을 부어서 어린양 되신 주님의 모습으로우리의 마음이 바뀌시기만 하면 갑자기 세상은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요 에덴으로 바뀌게 되고 우리에게 있어 부족함이라는 건부족함이 없는 부족함.
하나님도 너무 하십니다. 왜 내게 이렇게 부족함을 안 주십니까?
이 노래가 나와야 된다는 거예요.
시편 23편-1. 뭡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는 부족함이 있다. 라는 것이 시편 23편-1이 돼야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의 노래가.
왜 이렇게 부족함이 없을까? 나는. 아, 정말 괴롭다. 부족함이 없어서.
오늘 하루 종일 부족함이 없는 게 불만인 하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아버지!
여호와가 나의 목자시면 부족함이 없는 게 부족함이지요.
어떻게 내게 부족함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언제나 하나님이 뭘 안 주셔서 안 된 것처럼 생각하며 하나님께 늑대와 이리의 자세가 되어서 목자 되기를 강요했던 우리의 삶을청산하게 하시고 주님의 십자가에 마음을 둠으로써 진정으로 어린양의 모습이 되게 하여 주시며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를 오늘 하루종일 경험하며 누리며 부족함이 없다는 다윗의 노래를 나의 노래로 삼고 사는 복된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