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고항
항구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정서 속에 그리움과 아쉬움으로 각인되어 있다.
어쩌다 보니 경기만에 있는 몇 군데 포구(浦口)를 다녀보고 있다. 날씨 더운데 혼자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집을 나서는 나를 보고 아내는 혀를 찬다. 그러면서도 아내는 보온병에 얼음을 담고 군것질거리를 챙겨주었다. 왜 하필 포구일까? 나름대로 포구에 대한 기억을 떠올려 보다가 오래전 바닷가의 조용한 마을들에 대한 기억이 유독 생생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항구(港口)와 포구(浦口)는 같은 의미인 것 같지만 뉘앙스가 조금 다르다. 한자어로 보면 둘 다 물을 나타내는 삼수변에 입구(口)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항(巷)은 마을이나 거리를 뜻하는 장소에 가깝고, 보(甫)는 크다는 의미로 형태에 가깝다. 오늘날 항구는 배가 드나들 수 있도록 인위적으로 시설을 갖춘 곳이라면 포구는 배가 드나드는 자연 그대로의 형태를 일컫는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지명에 포항(浦項), 군포(軍浦), 김포(金浦), 마포(麻浦) 등은 모두 지형적으로, 바다로 통하는 뱃길이 열려 있던 곳이다.
오래전 석문 방조제가 생기기 전에는 해안을 따라 여러 포구들이 있었고 어선들이 들어오는 시간을 잘 맞추면 푸짐한 먹거리와 작은 식당에는 제철에 나는 생선들을 맛보는 즐거움이 있었다. 특히 봄철 실치 잡이가 유명해서 가끔 찾아가던 곳이다. 그러나 오랜만에 찾은 이곳은 전혀 새로운 모습이었다. 작은 포구들이 있던 자리에는 커다란 산업단지가 들어서 있고, 장고항 양쪽으로 길게 뻗어나간 방파제 안쪽으로는 어선들과 낚싯배 그리고 이웃 섬 국화도를 오가는 여객선들이 있고, 규모가 큰 수산물 시장과 광장, 주차장엔 캠핑 카라반들이 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평일인지라 항구는 비교적 한산했다. 몇몇 관광객들이 바위 절벽 근처에서 사진을 찍고 있었다. 바위 절벽 규모는 크지 않으나 오랜 세월 파도에 의해 만들어진 모형으로 가운데 솟은 촛대바위와 안쪽으로 둥글게 노적봉이 있고 그 아래로 해식동굴이 있어서 이곳 장고항에서는 명소다. 이곳에서 1km 가 넘는 방파제로 이어지며 푸른 바다가 눈앞에 나타난다. 가까이에 있는 섬 국화도가 눈앞에 보이고 그곳을 왕래하는 여객선, 그리고 물때에 맞추어 들어오고 나가는 낚싯배들의 모습이 영화의 한 장면 같다. 원칙적으로 이곳 방파제에서의 낚시는 금지되어 있고, 낚시를 원한다면 이웃 섬 국화도로 가거나 낚싯배를 이용하여야 한다. 물 때를 맞추면 갯벌에 들어갈 수도 있다.
항구는 오래전부터 인간의 정서 속에 그리움과 아쉬움으로 각인되어 있다. 삶의 터전을 벗어나 먼 곳으로 떠나는 이별이 있는 장소인 동시에 떠났던 사람이 다시 돌아오는 귀향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삶의 장소를 떠난다는 것은 모험이고 관계했던 모든 것들에 대한 포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결단이 있어야 한다. 이와 동시에 한 번 떠난 장소를 돌아오기는 더욱 어렵다.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소설<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53년간의 사랑을 간직한 체 각자의 삶을 살다가 노년에 해후하고 함께 유람선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두 사람은 안타깝게도 가족들의 눈초리 때문에 현실의 삶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유람선에서 내리지 못하고 다시 항해의 뱃길로 나아가는 그들에게 선장이 언제까지 이 짓을 반복하겠느냐고 묻자 이렇게 대답한다. “죽는 날까지”
나이를 먹으면 시간의 그릇에 잡동사니가 많아서 새것을 담기 어렵다. 여행은 그릇을 씻는 일이다. 항구건 포구건 어느 곳으로 우리의 발길이 가든지 그곳에 갈 때는 무엇을 먹고, 얻고, 새로운 것을 본다는 것보다, 이제는 떠나보내야 하고 또 다시 회복하여야 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항구를 찾게 되는 것 같다. 하루를 보내고 몸은 다시 집으로 발길을 돌리지만 그래도 돌아오는 발길은 가볍다.
● 수원과 당진을 거점으로 이곳을 가려면 수원 버스 종합 더미널에서 수원~당진 버스가 수시로 운행된다. 당진 종합 터미널은 최근에 시내버스와 통합 운영되는 시설이 잘 갖추어져 있어서, 이곳에서 출발하는 장고 항 행 버스로 외목마을 회관 입구에서 하자하면 곧바로 바다로 이어진다. 시간은 수원~당진. 1시간 20분, 당진~장고항 50분 소요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