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8월 6일(목)입니다.
전 교회에서 교제하며 개척 때에 간판이며 의자를 헌물 했던 집사님, 예수님이 방문하시고 작년 10월 중순까지 교제가 있었던 집사님, 예수님이 파 무기도 주신 집사님,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며 예수님과 성령님의 품에 안기며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았던 집사님, 그러나 예수님이 결단으로 몰아가시며 본인의 선택에 직면했을 때 예수님을 떠나갔던 k집사님, 예수님은 집사님 대신에 다른 사람들을 붙여주셨습니다.
엊그제 누군지 모르는 전화가 밤 기도시간에 와 있었습니다.
어제는 오후 2시경에 전화가 왔는데 보니 어제 밤에 온 전화와 같았습니다. 누군지 받아보니 k집사님이었습니다.
우리의 근황을 궁금해 하고 초원교회에 대해서 궁금해 해서 조금 말을 했는데 여전히 일반교회처럼 모이는 숫자나 마귀를 단번에 쫓는 능력을 말하므로 예수님의 인도받는 나를 무안케 했습니다.
예수님의 인도받고 동행하는 초원교회에 대한 인식보다 목사인 내가 어떻게 살며 가족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어떻게 목회하는지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졌습니다.
집사님이 엊그제 밤 9시경 교회 바깥에서 성도들의 기도소리를 들었다고 했습니다. 화요일인데 기도를 하는가 생각했다고 하며 오고자 했지만 작년에 목사님이 오지 말라고 해서 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내가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오셔도 된다고 했습니다. “언제든지 오고 싶으면 오세요.” 했습니다. 반가운 전화와 묻는 말에 최근 교회이야기를 좀 해드렸는데 당한 느낌이었습니다. 말하지 말아야 할 사람에게 내탕고를 열어 보여준 것 같았습니다.
“히스기야가 사자를 인하여 기뻐하여 그에게 궁중 보물 곧 은금과 향료와 보배로운 기름과 모든 무기고와 보물고에 있는 것을 다 보였으니 궁중의 소유와 전 국내의 소유를 보이지 아니한 것이 없은지라”(사 39:2)
집사님은 초원교회의 소식에 대한 궁금증에서 전화한 것이지 초원교회에 역사하시는 예수님에 대해서 더 알고자 하고 사모하여 오고자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미련을 가지고 집사님의 전화를 받았는데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미련을 가진 마음에 묻는 대로 이야기한 것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고통을 하며 밤에 회개했습니다.
기도가 끝나고 Y형제님에게 k집사님의 이름을 대면서 상태를 점검했습니다. 안 좋은 것이 밀려온다고 하면서 “아, 안 좋아요.” 하며 크게 반응했습니다.
집사님은 초원교회와 단절된 뒤 나름대로 교회를 다니며 봉사하고 신앙생활을 잘 하는지 몰라도 예수님과 상관이 없었습니다. 이미 마귀가 장악한 것으로 생각되었고 Y형제님을 통해서 그 상태가 점검이 된 것입니다.
밤에 자기 전에 둘째를 통해 예수님께 “k집사님과 전화통화를 하고 집사님을 교회에 와도 된다고 말했는데 아니지요?”하고 여쭈니 오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고 했습니다. 내일 전화를 해서 오지 말게 하라고 하셨다고 했습니다. 아내는 기도로 막으라고 했지만 내가 볼 때 내가 저지른 일을 전화해서 수정해야 했습니다.
교역자에 대한 섭섭함이나 다른 사람의 궁금증을 대신하여 우리의 동정을 살피며 방문과 소식을 흘림으로 교역자를 자극하여 사람들의 관심을 자기에게 돌리려는 인간적인 계산에서 방문하는 것은 막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다음날 휴대폰으로 문자를 보냈습니다.
“집사님, 제가 초원교회에 와도 된다고 했는데 예수님이 오게 하면 안 된다고 하세요. 오지 마시고 전화도 마세요.”
이는 앞서 초원교회를 방문하여 은혜를 받고 말할 수 없는 영적체험을 하고서도 예수님의 뜻에 불순종하고 떠나간 사람들에게 다 해당되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미련을 갖고 언제라도 예수님이 간섭하셔서 돌아오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마음이 전화하는 것만으로도 기뻐했는데 예수님은 아니셨습니다.
선택의 기로에서 예수님을 선택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선택하여 예수님을 떠난 것을 철저히 회개하여 돌아오지 않으면 예수님이 받아주시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집사님의 일을 통해 깨달은 것은 이미 예수님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들과의 전화통화와 일회적인 방문은 무의미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와 함께 교제하는 은혜로운 그때에도 변화되지 않고 자기주장과 생각을 내세운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나간 상태에서 변화될 것을 기대한 것이 무리였습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미련을 가지고 전화를 받으며 방문이라도 하고 교제를 나누면 변화될 것임을 바랬습니다. 예수님이 간섭해 주시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각은 우리의 생각과 다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선택하지 않고 떠난 사람들에게 간섭치 않으시고 다른 사람들을 부르고 계셨습니다. 기회의 문은 다른 사람들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떠나간 사람들이 전화하거나 헌금하는 것은 예수님이 감동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과 마음에 따른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회개에 따른 분명한 전환이 없이 마귀에게 속한 상태에서 하는 말과 감동, 행동은 다 거짓된 것이고 마귀를 위하는 것이며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중심을 흐려놓고 우리의 걸음을 지체하게 만드는 것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과거에도 그랬듯 자신이 가진 것을 놓지 않고 예수님께로 오는 사람들은 예수님께 합당치 않고 전폭적으로 예수님을 의지하며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없는 한계를 가졌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가라사대 네게 오히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 사람은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을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막 10:21,22)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7,38)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개 주를 좇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눅 9: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