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소에서 여장을 찾아 이창(宜昌)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타고 형주역으로 간다. 원래 택시를 가급적 타지 않기로 했지만 여장의 무게도 만만치 않고 캐리어와 배낭을 가지고 시내버스를 타는 것도 용이치 않을 뿐만 아니라 택시비도 비싸지 않기에 택시를 탄다. 징저우에서 이창까지는 이창이 고속철 종점인데다 1시간 거리(요금 : 1人/25.5元)라 예매를 하지 않아도 고속철 이용에 불편이 없다.
▶ 이창 효정전투유적지 잔도(펌)이창은 아우 관우를 잃고 손권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찼던 유비는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복수를 하기 위해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오나라로 향했으나 손권에게 아우 관우의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사리분별을 제대로 하지 못했던 유비는 결국 이창에서 손권에게 대패하고 패잔병을 데리고 백제성으로 후퇴한 효정(猇亭)전투유적지가 있는 곳이다.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해 아우를 잃은 슬픔과 자책, 그리고 허탈감으로 몸 져 자리에 누운 유비는 마침내 백제성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 계기가 된 삼국시대의 큰 획을 그은 역사작인 곳이다. 이창의 옛 지명이 이릉(夷陵)이기에 이릉전투라고도 불린다.
▶ 이창 효정전투유적지 입구(펌)
오후 12시 45분에 징저우 역을 출발한 고속철(動車)는 13시 50분 東이창역에 도착한다. 짐보관소에 캐리어와 배낭을 맡기고 역 앞에서 시내버스 3路를 타고 효정전투 유적지로 향한다. 이창 시내를 벗어나 달리던 시내버스 기사가 이릉장강대교(夷陵長江大橋)가 보이는 언덕에서 내리라고 알려 준다. 시내버스에서 내려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효정전투 유적지 입구는 보이지 않고 도로변을 가림막으로 가린 공사장만 즐비하다. 언덕을 조금 내려와 공사장 출입구로 가 보니 유적지 전면 보수 공사 중으로 2015년 5월에 개장할 예정이란 안내판이 보인다. 출입을 통제하고 있는 안내원에게 한국에서 이곳까지 찾아왔는데 좀 들어가 볼 수 없느냐고 물으니 위험해서 절대로 안 된단다. 역에서나 짐 보관소에서 이곳으로 오는 교통편을 물었을 때 “이곳이 공사 중이라 가 볼 필요가 없다.”라고 미리 알려줬으면 좋았을 텐데...... 아쉽지만 다시 시내버스를 타고 역으로 향한다.
이창은 장강삼협(長江三峽) 투어의 출발점이라 이곳에서 배를 타면 유비가 숨을 거둔 백제성을 갈 수 있지만 비자 기간이 30일로 제한된 여행일정을 감안할 때 백제성을 포기하고 당양(當陽)으로 간다. 이창에서 당양은 60km가 좀 넘는 거리다. 기차는 두 시간 이상 기다려야 하기에 역과 붙어 있는 버스터미널로 가 버스를 탄다.(1人/25元) 당양에 도착하니 이미 해는 서산으로 넘어 간 뒤다.
아침 식사를 마치자 조자룡이 홀로 조조의 100만 대군 속으로 진격해 유비의 아들을 구하고, 장비가 홀로 장판교에 서서 조조의 백만대군을 호통처 물러나게 한 전설 속 영웅담의 무대를 눈으로 직접 보기 위해 발걸음을 서두른다. 숙소에서 시내버스 1路를 타고 10분쯤 가니 당양 시내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창판로(長板路)가 보인다. 장판교 전투에서 이름을 따서 창판로라 불린다. 창판로 양 옆으로는 현대식 건물이 즐비하다.
▶ 장판파 공원 앞 조자룡 동상
시내버스를 타고 조금 더 가니 장판파 공원 앞 로터리 한복판에 조자룡 동상이 우뚝 서 있다. 높이 3.5m 가량의 거대한 조자룡 동상은 장판교 전투 당시 조자룡이 유비의 아들를 갑옷 품속에 넣고 조조군을 단기필마(單騎匹馬)로 헤치고 나오는 모습의 동상 주위로는 자동차와 즐비한 상가로 경적소리, 상인들의 호객행위 등으로 무척 번잡스럽고 시끄럽다.
▶ 주변에는 조자룡을 활용한 곳이 많다
주변에는 자룡호텔(子龍飯店), 장판파 여행사, 자룡로 등 과거 조자룡이 장판파에서 조조군을 휘저었던 활약상을 기념하며 이름 지어진 상점들이 몰려 있어 이곳 사람들의 조자룡 사랑을 알만하다.
▶ 장판파 전투 장면 그림
조조가 백만대군을 이끌고 무서운 기세로 쳐 들어오자 유비는 수십 만명의 백성과 함께 피난길에 오른다. 조조군에 쫓기다가 다다른 곳은 바로 당양(當陽). 조조가 기병 5000명을 급파해 공격하자 유비는 간신히 목숨만 건져 달아나지만 유비의 식솔과 백성들은 뒤쫓아 온 조조군에게 추격당해 당양(當陽) 장판파(長板坡)에서 겹겹이 포위된다. 비록 장판파전투에서 유비군은 조조군에 패했지만 장판파전투는 조자룡과 장비라는 두 영웅을 탄생시킨다. 중국 대륙극장가를 휩쓸었던 우위썬(吳宇森) 감독의 영화 ‘적벽대전 : 거대한 시작’의 첫 부분에 조자룡과 장비가 조조군과 숨 막히는 혈전을 벌이던 곳이 바로 당양 장판파 전투다.
▶ 장판파 공원 입구
조자룡 동상을 뒤로 하고 장판파 공원 입구로 들어간다. 당양 시내 서쪽의 경사진 언덕 위에 있는 장판파공원은 유비군과 조조군이 전투를 벌였던 것을 기념해 1930년대 공원으로 조성해 놓은 것인데 입장료가 무료다. 중국여행을 하면서 입장료를 받지 않는 곳에 오면 기분부터 좋아진다. 입장료가 다른 물가에 비해 워낙 비싸 늘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 자룡각
▶ 자룡각 내 조자룡 좌상
입구를 지나 층계를 올라서면 이층누각으로 된 자룡각(子龍閣)이 나온다. 안에는 흙으로 빚어 채색한 것처럼 보이는 조자룡 상이 모셔져 있다. 흰 얼굴, 짙고 검은 눈썹, 굳게 다문 입술, 불끈 쥐고 있는 주먹이 인상적이다. 다소 투박해 보이며 어딘지 모르게 엉성한 느낌이 든다.
▶ 장판웅풍 비석
자룡각을 지나면 언덕 위에 시민들이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조성해 놓은 야외공원이 나온다. 공원 한가운데 있는 장판웅풍(長板雄風) 비석은 명나라 1582년 장판파 전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으로 세월의 풍파를 겪은 탓인지 비문이 닳아서 글씨를 알아보기 힘들다. 조자룡이 홀로 적진에 뛰어들어 유비의 아들을 구한 이야기가 적혀 있다고 한다.
▶ 장판파 전투시 조자룡의 모습을 한 기마상
그 옆에는 바로 조자룡이 장판파 전투 시 품속에 아두를 안고 창칼로 에워싼 조조군을 무찌르며 적진을 빠져 나오는 모습의 조형물이 있다. 당시 조자룡이 얼마나 용맹을 떨쳤으면 조조가 그의 싸우는 모습에 반해 사로잡아 자기사람으로 만들고자 했겠는가?
▶ 장판파 전투시 조조 기마상
한쪽에는 장판교 다리 앞에서 두 눈을 부릅뜨고 호랑이 수염을 추켜세운 채 조조군을 향해 고함을 질러 조조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는 모습을 한 장비의 모습도 보인다. 말을 탄 장비의 부리부리한 눈이 정말 무서워 보인다. 그러나 세월의 풍파 탓인지 관리가 허술한 탓인지 장비의 팔뚝은 어디 갔는지 보이질 않고 색칠까지 다 벗겨져 있는 것이 흉물스럽기 짝이 없다.
▶ 비랑
▶ 장판파 전투시 조자룡의 활약상을 그린 그림
앞쪽의 장판파 비랑에는 조자룡의 용맹함과 충성심을 비석에 새겨 추모하고 있고 벽에는 조자룡의 장판파에서의 활약상을 보여주는 벽화가 화려하다.
▶ 악기를 부는 아저씨
비랑 앞에서 중국인 아저씨가 대금처럼 보이는 악기를 불고 있는데 그 가락이 어찌나 구성지고 슬퍼 보이는지 마치 죽은 조자룡을 추모하는 듯하다.
▶ 장판파공원 앞에서 공놀이를 하는 시민들
공원 곳곳엔 중국 어디서와 마찬가지로 스피커를 틀어 놓고 춤 연습에 한창인 여인들과 태극권 등을 수련하는 모습이 보인다. 중국의 노인들은 아침식사 만 마치면 공원으로 나오는 것 같다. 공원엔 늘 연세가 좀 있어 보이는 어르신들이 군데군데 모여 신체를 단련하는 모습, 마작이나 카드놀이를 즐기는 모습,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 등으로 분주하다. 우리 나라 어르신들도 중국처럼 건전하게 노년을 즐겼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 장비횡모처 비석이 있는 비각
장비가 장판교(長坂橋) 전투 당시 활약했던 장판파(長坂坡)로 간다. 장판파는 장판파공원에서 서남쪽으로 1km 정도 되는 곳으로 걸어도 10여분 거리라 걷기로 한다. 장비가 고함을 질러 조조 100만대군을 물리쳤다는 현장은 장비의 활약상을 기념하기 위한 비석만 세워져 있다. 소설 삼국지 삼국연의에서 장비는 장판파 전투에서 쫓아오는 조조군을 물리치기 위해 20마리의 말 꼬리에 빗자루를 매달아 먼지를 일으킴으로써 군사가 많은 것으로 위장하고 쫓아오는 조조군을 향해 강 다리 앞에 장팔사모를 들고 홀로 서서 조조군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내가 바로 장비다. 누구든지 목숨이 아깝거든 물러나라!”라고 고함친다. 장비의 고함소리에 간담이 서늘해진 조조군은 감히 덤빌 엄두를 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말이 놀라 발버둥치자 조조의 명장인 하후걸이 낙마해 사망했으며 장비가 다리를 끊고 조조군을 물리쳤기에 유비 일행은 무사히 적의 포위를 뚫고 빠져나갈 수 있었다고 그리고 있다. 장비가 실로 삼국지연의에서 묘사된 것처럼 ‘용감함이 비범하고(勇武过人), 거칢 속에 정교함이 있는(粗中有细)’ 장수였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일화다. 물론 지금은 장비가 끊었다는 다리도 거친 물살이 흘렀다는 강물도 이곳에 남아있지 않고, 그 위로 아스팔트 포장도로만이 깔려있다. 다만 당시 장판교에서 장비의 활약상을 기록해 놓은 ‘장비횡모처(張飛橫矛處)’ 비석만이 하나 남아있어 과거 장판교 전투의 유적지라는 사실을 증명해주고 있을 뿐이다.
장판파를 나와 관릉(關陵)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지도를 보니 장판파 공원으로 다시 가 거기서 곧장 2km 쯤 가면 될 것 같아 걷기로 한다. 시내버스를 탈 수도 있지만 이번 여행을 통해 제대로 한 번 다이어트를 해 보고 싶은 아내가 걸어가자고 한다. 4차선 대로를 따라 30분 쯤 걸으니 관릉이 나온다.당양(當陽) 시내 서북쪽 약 3km 지점에 관우의 시신이 묻혀있는 관릉은 6만4000㎡ 면적에 황제의 능처럼 중간에 곧게 뻗은 길을 중심으로 좌우 대칭적인 구조를 갖췄고 4개 전각, 5개 정원, 총 9겹으로 이뤄진 중국 내 최고의 격식을 갖춘 황릉에 비할 수 있다고 한다.
관우는 번성전투에서 홍수를 이용해 조조가 자랑하는 칠군을 물에 매장하고 맹장 우금에게 항복을 받아 냈으며 맹장 방덕을 사살한다. 참패 소식을 들은 조조는 놀라 도읍인 허도(지금의 許昌)를 옮기려 할 때 사마의가 관우 때문에 도읍을 옮기기보다 차라리 손권에게 강남 땅을 떼어 주는 것이 낫다고 주청한다. 조조에게 강남을 양도받기로 한 동오의 손권은 여몽을 대장군으로 삼아 관우를 공격하기로 한다. 병력을 이끌고 육구에 가보니 강기슭을 따라 20∼30리 간격으로 높은 언덕 위에 봉수대가 세워져 있고 형주는 군마가 정연하게 정비돼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민하는 여몽에게 육손이 찾아가 강기슭을 지키는 적들이 봉화를 올리지 못하게 하면 된다고 하자 손권은 육손을 사령관으로 삼는다. 육손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신예였지만 관우에게 최대한의 예의로 대접해 교만하게 만든다. 육손이 젖 냄새가 나는 별 볼일 없는 장수라 무시한 관우는 형주에서 많은 병력을 빼내어 번성으로 옮긴다. 이때 여몽이 형주를 공략한다. 먼저 상인으로 변장해 봉수대를 급습해 순식간에 80여 곳의 봉수대를 접수하자 아무도 오나라가 형주를 공격했다는 봉화를 올리지 못한다. 여몽은 봉수대에서 포로로 잡은 형주의 병사들을 이용해 형주성에 들어가 불을 지르도록 하자 성은 혼란에 빠지고 이 틈을 타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오나라는 형주를 점령하는 한편 여몽은 조조에게 번성 쪽에서 관우를 공격하도록 요청한다. 관우는 오나라와 조조의 군대에 의해 함정에 빠져 협공을 당하자 상용을 지키는 유봉과 맹달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만 이들은 원조를 거절한다. 사력을 다해 싸우던 관우는 아들 관평과 맥성(麥城)을 빠져 나와 촉으로 탈출하던 중 임저<臨沮 : 현 후베이(胡北)성 위안안(遠安)>에서 오나라 매복군에게 사로잡혀 항복을 거절한 채 손권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219년 10월로 그의 나이 58세다. 이름 없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죽은 후에 왕으로 추존되는 존경받는 삶이었다. 관우는한마음으로 평생을 살았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았으며 높은 자존심을 유지하며 도도하게 살았다.
▶ 관릉 전경
관우가 중국인들에게 얼마나 높은 평가를 받는지 그의 무덤을 보면 알 수 있다. 관우의 머리없는 시신이 묻혀있는 당양의 관우 무덤은 관릉(關陵)으로 불린다. 황제의 무덤을 릉(陵)이라 부르는 데 관우의 무덤이 관릉이라 불린다는 건 곧 관우가 황제의 예우를 받는다는 것이다. 황제를 상징하는 금빛 황색지붕을 이고 붉은 장벽이 병풍처럼 펼쳐져 웅장하고 빼어난 경관을 드러내고 있어 가히 황제의 예우를 받는 영웅의 무덤답다. 물론 처음부터 관릉이 이처럼 황제 무덤의 격식을 갖춘 게 아니라 관우의 시신만 묻혀있던 이곳은 수·당나라 때에 이르러 점점 확충돼 16세기 명나라 가정제 때 황릉과 동격인 관릉으로 칭해지며 지금의 구조를 갖췄다고 한다. 1800여년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으니 관릉이 중국 삼국지 문화의 대표적인 성지로 불릴 만도 하다.
▶ 관릉 안내도
▶ 신도비정
매표소에서 입장권(1人/30元)을 사서 관릉으로 들어 간다. 입구를 들어서니 먼저 신도비정(神道碑亭)이 눈에 띈다. 역대 황제들이 관우에게 하사한 칭호가 적혀있다. 총 16명의 황제가 23차례에 걸쳐 그에게 작호를 내렸다 전해진다. 정자 양 기둥에는 청나라 동치제가 하사한 대련‘灘水夜號蛟龍飮泣三分恨(탄수야호교룡음읍삼분한 : 관우가 죽으니 강물이 통곡하고 물속의 용도 천하가 위·촉·오 삼국으로 나뉜 것을 슬퍼한다) ‘秋山晝嘯草木聲誅兩賊冤(추산서숙초목성주양적원 : 관우가 죽으니 산이 포효하고 초목이 관우를 죽인 두 명의 원수를<조조와 손권을 가리킴> 규탄한다)’이 적혀 있다. 역대 황제들의 관우를 향한 무한한 존경심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 삼원문과 그 앞 석주
▶ 마전
▶ 마전 내 적토마
▶ 청룡연월도
삼원문(三元門)을 지나면 종루와 고루가 좌우에 있고 바로 뒤 마전(馬殿)에는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전설의 말 적토마가 눈에 띈다. 수 없는 전쟁터에서 관우와 함께 혁혁한 공을 세운 적토마. 관우가 죽은 뒤 식음을 전폐하다 굶어 죽었다고 전해지니 적토마 역시 주군에 대한 충심이 관우 못지않았을 것 같다. 관우가 조조에게서 적토마를 선물 받기 전 애마였던 백마도 함께 전시돼 있다. 그리고 마전 옆에는 관우를 상징하는 청룡연월도가 꽂혀있어 이곳이 관릉임을 강조하는 듯하다.
▶ 관제묘 배전
▶ 배전 기둥의 대련
배전(拜殿)은 역대 황제들이 관우를 참배하던 곳이다. 전각 양 옆 기둥에 역시 관우의 충의를 찬양하는 대련이 새겨져 있다. 독특하게 ‘州’자 5개와 ‘德’자 5개를 넣어 만든 게 인상 깊다. ‘生蒲州長解州戰徐州鎭荆州万古神州有赫(생포주장해주전서주진형주만고신주유혁 : 푸저우에서 태어나 셰저우에서 자라고, 쉬저우에서 적군과 싸우고 징저우를 지키니 그 이름이 천하에 길이 기억되리라)’, ‘兄玄德弟翼德擒龐德釋孟德千秋志德无雙(형현덕제익덕금방덕석맹덕천추지덕무쌍 : 현덕<유비>을 형으로 익덕<장비>을 아우로 삼고, 방덕의 목을 베고 맹덕<조조>을 놓아주니 관우의 그 덕심은 천추에 영원하리라)라는 뜻이다.
▶ 관제묘 정전
배전을 지나 정전(正殿)에 들어서면 청나라 동치제가 17세 젊은 나이에 친필로 쓴 威震華夏(위진화하, 그 위세가 대단해 천하를 흔든다.) 현판이 정전을 입구에 걸려 있다. 문화대혁명 당시 백성들이 이 편액을 떼어내 집에 가져다가 책상으로 사용하다가 80년대 초에야 비로소 찾아내 다시 원위치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문화대혁명의 광기 속에서도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편액이 다시 보인다.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중국내 문화재의 피해는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 정전 내 관우상
▶ 정전 벽에 걸린 그림
▶ 정전 우측 벽에 진열된 관우상들
정전 안에는 거대한 관우상이 모셔져 있다. 봉황의 눈을 부릅뜨고 두 눈썹을 바짝 치켜세우고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가히 전쟁신(戰神)을 방불케 한다. 좌우에는 각각 청룡언월도를 비껴 든 주창과 투구를 두 손으로 바치고 있는 관평이 서 있다. 아버지와 죽음을 함께 한 관우의 양자 관평, 그리고 관우를 따라 죽었다는 아들과 다름없었던 부하 주창, 이들 ‘세 부자(父子)’의 충심과 의리에 저절로 마음이 숙연해진다. 좌측 벽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양류관음(楊柳觀音) 그림과 관우가 청룡연월도를 든 그림 그리고 좐우를 중심으로 관평과 주창이 서 있는 그림들이 걸려 있고 우측 벽엔 조그만 관우 조각상들이 진열돼 있다.
▶ 관제묘 침전
▶ 침전 내 관우 동상
정전 뒤편의 천하무성(天下武聖)이란 현판이 걸린 침전(寢殿)엔 3.6m 높이에 무게 800kg의 거대한 관우상이 모셔져 있다. 전 세계 관우상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큰 것으로 전해진다. 관우를 존경하는 한 대만인이 90년대 이곳 관릉을 찾았다가 무려 1만 달러를 기부해 만든 동상으로 알려져 있다.
▶ 관우 묘 앞 비정과 묘비
▶ 관우 묘 전경
이곳을 지나면 관우의 시신이 실제 묻혀있는 무덤을 만날 수 있다. 무덤 앞 비각 안에는 그의 벼슬이었던 한수정후묘(漢壽亭侯墓)라 쓴 비석이 유리관 속에 들어 있다. 이곳의 무덤엔 관우의 머리 없는 시신만이 묻혀있다. 관우의 수급은 손권이 나무상자에 담아 조조에게 보낸 까닭에 현재 허난(河南)성 뤄양(洛陽) 관림(關林)에 묻혀있다. 관우 역시 장비처럼 죽어서 몸과 머리가 따로 묻히는 기구한 운명을 맞았다. 관우의 무덤은 생각보다 크지 않은 것 같다.
▶ 관우 묘 등의 나무들
무덤을 한 바퀴 빙 돌아본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무덤 주위 나무마다 가지 끝이 말라서 죽어버린 듯 보인다. 마치 ‘머리 없는 나무’ 같단 생각이 드니 오싹 소름이 돋는다. 이곳의 고목들은 이상하게 일정 이상 자란 뒤에는 더 이상 자라지 않고 죽어버려 어찌 보면 수급 없는 관우의 시신이 이곳에 묻혀 있는 것과 우연히 맞아 떨어지는 기이한 자연적 현상이라고 한다. 무덤 주위의 고목들은 어쩐지 스산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 같다.
▶ 계성궁 현판
▶ 계성궁 내 관우 선조들의 좌상
관우 묘를 뒤로 하고 관릉 출구 쪽으로 발길을 돌리면 좌측에 관우의 선조를 모신 사당인 계성궁(啓聖宮) 건물이 보인다. 계성궁 입구에는 대의귀천(大義歸天)이란 현판이 걸려 있고 사당 안에는 관우의 선조로 보이는 3명의 조상과 패위(牌位)가 모셔져 있다. 청나라 건륭제 때 걸립한 것으로 관우가 황제로 추증되어 황제의 예법에 따라 관우가문의 종묘를 만든 것이다.
▶ 성상정
▶ 성상정 내 한수정후상 비
계성 궁 앞 건물은 춘추루인데 보수공사로 가림막이 처져 있어 건물도 내부도 볼 수 없다. 춘추루 앞엔 성상정(聖像亭)이란 정자가 보인다. 이 정자는 팔각모양을 하고 있어 팔각정이라고도 하고 달단정(達旦亭)이라고도 하는데 명나라 숭정 13년(1640년)에 건립해 청나라 광서제 때 중수한 것으로 정자 내에는 관우가 춘추를 읽고 있는 그림을 새긴 한수정후상(漢壽亭侯像) 비석이 모셔져 있다.
▶ 백자사 내 관평 입상
▶ 관평의 일생을 그린 그림
▶ 관평을 찬미하는 글
관우의 아들 관평(關平)을 모신 사당인 백자사(伯子祠)는 관우 묘에서 출구 쪽 오른쪽에 있는데 관평전이라고도 한다. 이 사당은 명나라 만력 31년(1603년)에 건립되어 수차례 중수한 건물로 내부에는 평생 아버지 관우를 따라 전장을 누비다 맥성전투에서 패해 젊은 나이에 죽은 관평이 갑옷을 입고 아버지 관우의 인장을 들고 서 있는 조상이 보인다. 그런데,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수염이 트레이드마크인 관우와 달리 수염 한 터럭도 없는 청년 관평의 얼굴을 보니 아버지를 닮은 것 같지 않다. 옆방에는 관평의 일생을 그린 그림과 그를 찬미하는 글들이 전시돼 있다.
▶ 래지헌 내 비석
백자사 앞 래지헌(來止軒)은 관릉의 비랑(碑廊)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관우의 충심과 절개를 비석에 새겨 추모하고 있다.
관릉을 나와 시내버스를 타고 숙소로 향한다. 아침 8시에 숙소를 출발해 장판파 공원, 장판파, 관릉을 걸어서 돌아보는데 5시간 정도 걸린 것이다. 이제 당양을 떠나 기차로 샹양(襄陽)으로 가기 위해 시내버스를 타고 당양역으로 간다.
당양(當陽) 시내에서 동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에 주창의 묘가 있다고 하나 주창은 삼국지연의에 만 등장할 뿐 정사에는 언급되지 않는 인물로 그곳이 주창의 묘인지도 확실히 밝혀지지 않아 생략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