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현아."
"응."
"…."
상처는 점점 아물고 있었다. 윗옷을 벗겨내 조심스레 묶여있던 붕대를 풀어내자 수술자국이 드러난다. 새로운 붕대를 들어 약을 바르곤 다시 둘러준다. 혼자 할 수 있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럼에도 도와주겠다고 하니 꽤 미심쩍은 얼굴로 바라본다. 왜 그래. 볼에 한번 입을 맞추고 침대 위로 앉힌다. 소독을 새로 마치고 얇은 나시 한장 걸쳐입은 하얀 몸을 본다. 그대로 허리를 숙여 목에 얼굴을 묻고 힘을 살짝 주니 뒤로 풀썩 넘어간다. 머리칼이 아랫턱을 간질이는 게 괴로웠는지 작은 손으로 어깨를 짚어내 밀어낸다.
"내가 할 수 있다고 했잖아."
"…혼내지마,"
"혼내는 거 아니야."
"응."
"자꾸 너가 나 괴롭히잖아.."
조그만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타이르듯 말한다. 말속에 가시가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가만히 어깨에 얼굴을 묻고 들어올리지 않자 두 손을 들어 억지로 볼을 쥐고 밀어낸다. 얇은 면 안으로 손을 집어넣어 조심스레 쓰다듬는 거, 금세 저지해 옷속에서 손을 빼낸다.
"나 다 나았어."
"응."
"나 어린애 아니야."
"응,"
"…."
엎어졌던 몸을 일으켜 손을 잡고 일으키자 침대 밑에 놓은 작은 슬리퍼에 두 발을 넣고 걸음을 옮긴다. 벗어두었던 티셔츠를 집어 입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본다. 뒤에서도 작은 어깨 위로 물린 이빨 자국이 선명했다. 조금씩 천천히 발을 떼 다가간다. 아직도 여주는 내 기척을 제대로 느끼지 못했다. 두 팔을 뻗어 뒤에서 한가득 끌어안았다.
"몸은 좀 괜찮아?"
"응. 다 나았어."
"거짓말. 어제도 아팠으면서 또,"
"여주만 보면 다 괜찮아져."
우리에게는 조금 아팠던 첫눈이 함박처럼 내리고 지난 후에야, 몸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늑대들에게는 1년에 한번씩 오는 발정기가 첫눈이 지난 겨울에 찾아온다. 그걸 잘 알아서 아직 다 낫지 못한 여주 옆에서 아픈 행색을 하기가 싫었다. 어쩔 수 없는 짐승의 본능이었다. 씨를 뿌리려는 번식기가 길면 겨울 내내 짧으면 첫눈이 끝나고 한달동안. 발정을 풀지 않으면 몸살을 앓고 굳어 심지어는 사경을 헤매는 늑대도 있었다.
아직 다 낫지도 않은 아픈 애 붙잡고 억지로 괴롭히기는 죽어도 싫었다. 새벽사이에 거의 39도까지 오른 열이 너무 고통스러워 도무지 인간의 모습으로 있을 수도 없었다. 그나마 늑대는 인간보다 평균체온이 높아서 39도정도면 평균이니까.
"여주야."
"응?"
"놀러갈까."
"..갑자기?"
가만히 품 안에 안겨있던 몸이 둘러져있던 팔을 풀어 나온다. 뒷모습이었던 자세를 앞으로 돌아 마주본다. 두 손을 어깨에 올려놓고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그대로 등허리를 다시 끌어안아 콧잔등에 코를 맞대 비빈다.
"싫어?"
"..너무 추워서,"
"안 춥게 해줄게."
"…."
"눈이 와서 싫은가?"
"…응."
그래, 알았어. 가만히 안긴 몸을 들어안아 침대 위로 다시 눕힌다. 이불을 들어 안에 몸을 넣어주고 따듯하게 덮어 토닥이자 서서히 눈이 감긴다. 새벽동안 그래도 하루종일 간호한다고 들락날락 하던게 어찌나 기특하던지. 앞머리를 넘겨 이마에 짧게 입을 맞춘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는 얼굴을 보다가 옆으로 팔을 괴어 기댄다.
"어릴 때 친구가 괴롭혔어?"
"…."
"왜 노는데 안 끼워줬을까."
"..친구가 없으니까."
"나쁜놈이네."
"내가?"
"친구 안 해준 그놈들이."
어이 없다는 듯이 피식 작게 웃음을 내뱉은 네가 정자세로 누운 몸을 옆으로 돌린다. 순식간에 보이던 얼굴이 감춰지고. 작은 등에 대고 혼자 떠들게 생겼다.
"나 보기싫어?"
"아니.."
"그럼,"
"..이게 익숙해서."
"그래?"
"…."
"괜찮아."
그래도 괜찮아. 토닥이던 손이 갈 길을 잃고 정처없이 허공을 맴돌다가 다시 앞으로 뻗어 배를 살살 쓰다듬는다. 상처가 난 바로 위로 금방 낫길 기도하며 쓸어내린다. 발정기때문에 같이 침대 위에서 잠을 청한 적이 그리 많지 않아 금방 알아채지 못했는데. 처음엔 기분이 안 좋은가 했더니 그냥 등을 돌려 자는 게 습관이라고 했다. 시야 안에 아무도 없는 게 오히려 더 잠이 잘 온다고.
"혼자서 노는 게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응. 익숙한 게 슬픈거지."
"나 괜찮으니까 굳이 안 달래줘도 된다고.."
"여주야,"
"…."
너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벌써 잠에 들었나 해서 고개를 앞으로 살짝 빼보면, 아까까지만 해도 감겨있던 두 눈이 슬그머니 올라가있다. 눈꺼풀 안에 위치한 눈동자가 아무런 초점이 없었다. 또 무슨 생각에 그리 빠졌는지 알 길이 없다. 가슴께까지 덮은 이불을 한 손으로 야무지게 꼭 주먹을 쥐어 잡는다. 작은 주먹 위로 손바닥을 감싸 덮자 미동않던 고개가 슬쩍 밑을 향한다. 하도 등 뒤로 빈틈없이 붙겠다고 해서 너의 짧은 잔머리가 눈과 코를 간지럽힌다.
너는 추위를 그다지 막 타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겨울이 싫어서 잘 방문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아직까진 각방을 쓰는 터라 내가 먼저 걸음을 옮겨야했다. 항상 아쉬운 쪽은 나지. 그래도 들어가면 전과 달리 반겨주는 걸 알고있었다. 문 앞에서 기다리는 건 아니지만 내가 네 옆에 가서 앉을 때까지, 너는 내게 시선을 떼지 못했으니까. 표현하는 게 부족해도 어때. 그만큼 내가 눈치가 빠르니까 괜찮아.
해열제를 먹고 금방 열이 내려 어제와 달리 혼현을 풀 수 있었다.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만약 네가 나처럼 혼현을 가지고 있었다면 뭐였을까. 말똥히 뜬 눈이 귀여운 토끼였을까. 아니면 고양이. 나보다 단단해서 아마 같은 늑대였을 수도 있겠다. 정말이지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물론 난 네가 인간이어서 더 좋아. 내가 너를 이해하게 되었으니까.
해외는 무서워서 아직 나가지 못하겠다는 네 말에 따라 가까운 국내라도 갈까 생각했었다. 너는 겨울을 싫어하고 눈을 싫어해서. 아마 제주도라면 눈이 잘 내리지 않아 괜찮을텐데. 아직 안정되기 전까지 무리하게 뭘 타고 떠나고 이러고 싶지 않다는 의견을 반영해 그저 가만히 이곳에 둥지를 내렸다.
그래도 너에게는 딱히 좋지 않은 기억들이 많은 곳이라서 난 아직도 미안한데. 너는 딱히 아무 생각 없어보였다. 벌써 잊기로 마음을 먹은건지. 아니면 아까처럼 초점 없는 눈으로 허망한 생각에 빠질 때마다 아직도 되새기는지. 제일 위험한 적을 모조리 정리하고. 해외로 수출입하던 계약도 끊겨서 바쁘지않고 한산했다.
딱히 중요한 일이 아닌 이상 모두 제 부하들에게 맡겼다. 여주를 만나기 전에도 항상 이맘때쯤 발정기로 진통제에 의존하며 살았을 때 많이 해봤으니까. 이제는 잠이 든 것 같은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침대에서 내려왔다. 잘자. 잠이 든 얼굴에 한번 더 입을 맞추고 방을 나왔다.
"여주. 여주야."
해가 떠있는 오후 한창에 잠이 들었었는데, 그 상태로 너는 다음날까지 일어나지 않았다. 해가 지면 조금 일어날 줄 알았는데. 아직 저녁치 먹지 못한 약봉지가 내 손에 초라하게 들려있었다. 굳이 너를 깨워서 먹여야할까, 생각하다가 잠에 빠지도록 냅두었다. 기절한 것처럼 푹 자길래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하루내내 눈을 뜬 네 모습을 보지 못해 조금 서운하긴 했지만. 그래도 내일 보면 되니까. 창밖으로 다시 해가 지고 뜨고. 일부러 눈부실까봐 암막커튼은 걷지 않은 채 너의 어깨를 조심스레 흔들어 깨웠다.
큰 품의 티셔츠가 어깨 밑으로 내려가 살짝 드러난다. 맘 같아선 계속 재우고 싶었는데 굳이 깨워야하는 이유가 있었다. 오늘은 사내 대청소가 있는 날이었다. 대청소가 진짜 그 청소는 아니고. 일년동안 이룬 실적을 조회해서 물갈이하는 그런 시스템이었다. 웬만해선 내쫓진 않지만 그래도 회사가 잘 굴러가려면 필수였기 때문에. 아마 오늘 하루 조금 소란스러울 예정이었다.
역시 그 과정은 모두 제 부하들한테 맡긴지 오래였다. 잠이 든 여주 방에 와서 어깨를 조심스레 흔들어도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았다. 조금 더 세게 흔들어야하나. 그러다가 아프면 어떡하지. 머리를 싸매고 낑낑거리다가. 결국 이불보다 조금 더 얇은 털담요를 들어 그 안으로 칭칭 감싸고 안아들었다. 마치 신생아를 수건에 돌돌 감싼 형태였다.
그 상태로 깨지않게 조심스레 방을 나오니 밖에 있던 놈들과 눈이 마주친다. 이제는 그러려니 고개를 꾸벅 숙이곤 알아서 발걸음소리를 낮춘다. 하루내내 시끄러울 사내를 대신해서 어디를 가는 게 좋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눈이 싫다는 여주의 말이 떠올라서. 그래도 좋은 추억 하나는 만들어주고 싶었다. 다른 한손으로 신발을 들고 떨어지지 않게 꽉 안고서 밑으로 내려왔다.
차 안을 미리 따듯하게 히터를 틀어두고 차시트까지 뎁히고 나서야 뒷자석에 조심스레 눕혔다. 한바퀴 돌아 운전석의 문을 열고 백미러를 뒷자석이 잘 보이도록 고정시켰다. 사람이 많지않은 따뜻한 곳. 그런 곳이 있었다. 별장의 형태를 갖춘 숨겨진 곳. 집에서 내가 8살 즈음 내 앞으로 만들어준 곳이었다. 그곳에는 다른 사람을 전부 제외하고 조금 쉬고 싶었을 때 혼자 내려가서 하룻밤씩 자고 오곤 했다.
처음으로 발을 들이는 외부인이 너라서 좋았다. 이제는 외부인이라고 표현하기도 기분 나쁠 정도로 너는 내 모든 것이 되었지만. 그 안에 들어가서 마저 잠을 재우고. 사람 하나 드나들지 않아 발자국 하나도 찍히지 않았을 뒷마당에 너를 데리고 가서 밤에는 별을 보여주고 싶었다.
혼자 노는 게 익숙하지 않다고 했던 너는 그 오랜 시간동안 어떻게 혼자서 버텼을까. 위로하지 말라고 했지만 그게 되야 말이지. 아직 나를 잘 모른다고 했던 너는 왠지 모르게 조금씩 선을 치는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우리는 사랑하니까.
조심스레 차를 바치고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 않은 너를 안아들었다. 신발 혹시몰라 챙겼는데. 괜히 가져왔네. 나만 이용하던 공간에 제 반려를 들이는 것. 늑대에게는 이만큼이나 영광스러운 일이 없을것이다. 나만 사용하던 침대에 너를 눕혀주고. 나만 보던 풍경을 너에게도 보여주고. 그렇게 천천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내 모든 것을 너와 나눌 수 있겠지.
침대에 눕혀진 너를 천천히 쓰다듬다가 잠든 너를 따라 옆에 누웠다. 혼자서 잘 때는 침대가 그리 크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너와 같이 누워있으니까 괜히 쓸데없이 크다는 생각을 했다. 너의 목 아래로 팔을 집어넣어 껴안았다.
"..깼어?"
"…."
"일어났어, 여주야?"
"..뭐야, 어떻게 알았어."
품 안에서 색색거리던 규칙적인 호흡수가 조금씩 엇나가는 걸 느꼈을 땐, 진작에 네가 일어났구나 알고있었다. 깼냐는 내 말에도 모른 척 시치미를 떼고 눈을 뜨지 않는 네가 귀여우면서도 서러웠다. 이제 좀 보여주지. 나를 담은 네 눈동자를 보는 게 내 하루의 전부였는데. 몇시간동안 죽은듯이 잠만 자는 너를 일방적으로 껴안기만 하니까 마음이 허했다.
"내가 모르는 게 어딨어."
"..치사하게. 재미없어."
재미없다는 네 말에 그저 미소를 짓고 콧잔등에 잘게 입을 맞춘다. 그러자 품 안에서 바르작대던 네가 장난스레 얼굴을 뒤로 빼고 두 손을 들어 내 입을 막아온다.
"그만해,"
"…."
"..뭐야, 진짜 말 잘 듣네."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외라는 듯이 나를 쳐다보는 너의 눈을 마주쳤다. 그럼. 누구 말인데, 잘 들어야지. 속으로 말을 꾹 삼키며 다시 너를 안아들었다. 몸을 일으키자 가만히 안겨있던 네 몸도 자연스레 일으켜진다.
"배 안고파?"
"응, 안고파."
"어제부터 아무것도 안 먹었는데."
"응. 안먹어도 돼."
조금 못 먹은 거 가지고야. 네 마지막 말에 저절로 미간이 구겨진다. 조금이라니. 마지막으로 먹은 게 엊그제 점심이었으면서. 이러다 살이 계속 빠지는 몸이, 팔뚝마저도 한손에 잡힐 지경이었다. 영양실조로 안 쓰러지는 게 이상했다.
"그게 어떻게 조금이야."
"괜찮아."
"난 안 괜찮아,"
"이런 적 하루이틀 아니야."
못 먹은 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그게 마치 일상이라는 것처럼 말하는 네 모습이 속상해서 화가 났다. 물론 너한테가 아니라 나한테. 그냥 어젯밤에 억지로라도 깨워서 뭐라도 먹일 걸 그랬나보다.
"하루이틀 아니라고 네 몸이 약한 게 아닌게 돼?"
"…너 지금 나한테 화내는거야?"
순간 답답했던 마음이 포장없이 튀어나오느라 너에게 배려도 없이 말을 꺼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차, 싶었던 건 이미 말이 입을 떠난 뒤였다. 아니야, 여주야. 그게 아닌데. 그저 됐어, 괜찮아. 하며 침대를 벗어나려는 작은 몸에 또 불안해졌다.
"화내는 거 아니야."
"응. 나도 알아."
"…."
"진짜 괜찮아. 지금 좀 더워서 그래."
"더워?"
"응."
아까부터 두른 담요에 그대로 두꺼운 이불을 덮고 품에 안겨있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불안한 마음이 아직도 가시지 않아 너의 얼굴을 한동안 붙잡고 뚫어져라 바라봤다. 진짜 괜찮다니까. 나한테 화낸 거 아닌거 알아. 정말 아무렇지 않다는 걸 일부러 보여주려는 듯 두 눈을 말똥말똥 뜨며 일부러 입꼬리를 올린다. 그 표정이 엉성한 게 또 귀여워 그제야 웃음이 튀어나온다.
"알았어, 미안해."
"..아니 괜찮다니까,"
"그래도 미안해."
"…."
여주가 괜찮다고 하는데 괜히 몰아붙였어. 난 그래도 네가 너무 걱정돼서 그런거야. 말 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그저 고개만 끄덕인 네가 품 안에서 나와 일어선다. 침대 밑에 넣어두었던 작은 슬리퍼를 네 발에 직접 신겨주니 얌전히 내 어깨에 손을 올린다.
"언제 이런 걸 준비한거야."
분명 있을리 없는 작은 슬리퍼가 있으니 의아한 듯 보였다. 딱 자기 발 사이즈와 맞는 신발.
"그냥."
목 위로 차가운 체온이 느껴진다. 네가 손바닥을 가만히 목 위로 대고 쓰다듬는다. 신발을 다 신겨주고 나서도 가만히 있자 저보다 낮아진 눈높이를 그저 내려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슬슬 굽혔던 허리를 피고선 가져온 목도리를 거의 코 아래까지 칭칭 둘러 감는다. 손을 올려 목도리를 살짝 내린 네가 가려져있던 입을 내민다.
"밖에 나가게?"
"응."
"…."
"배 안 고프다며."
"…."
밖에 나가냐는 질문에 긍정의 표시를 하니 살짝 눈알을 굴린 네가 뒤로 한발자국 물러난다. 싫다는 뜻이겠지.
"이리와봐."
"…."
"안 춥게 해줄게."
고민하는 듯 하더니 다시 벌린 거리를 쪼르르 다가온다. 자고있던 행색 그대로 나와 수면잠옷을 입고 있는 너의 몸 위로 긴 코트를 하나 입혀준다. 소매를 두어번 걷어 올려야 작은 손이 보이기 시작했다. 단추까지 꽁꽁 잠구고 목도리를 다시 코 아래까지 올려준다. 눈이 멈춰서 많이 춥지는 않은데. 워낙에 너는 추운 겨울을 싫어했으니까. 조심스레 네 손을 잡고 걸음을 옮긴다. 발에 살짝 힘이 들어가 잘 따라오지 않았다.
"괜찮아."
"…."
"응?"
어린아이를 달래듯 타이르자 다시 아까처럼 걸음을 뗀다. 손 안에 미리 따뜻하게 해둔 핫팩을 쥐여주고 뒷마당으로 향했다. 가만히 쪼그려 앉아 꽤 소복하게 쌓인 눈바닥만 뚫어져라 바라본다. 조금만 기다리라 전한 후 다시 안으로 향했다. 네 옷을 챙겨주느라 겉옷도 입지 않았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코트를 집어 한 팔을 넣다가 다시 빼냈다. 슬며시 다른 몸으로 바꾸곤 네가 앉아있는 곳으로 다시 나왔다. 야무지게 무릎을 모아 얼굴을 괸 그 동작이 아까와 변함이 없었다.
그러다가 살짝 손을 내려 자국 하나 찍히지 않은 깨끗한 눈밭 위에 제 손가락을 푹 찔러 넣는다. 그게 너무 차가웠는지 소스라치게 놀라며 손을 빼내곤 탈탈 턴다. 가만히 네 옆에 다가가 자리를 잡고 앉으니 그제야 눈치챈 네가 방금까지 눈밭에 담가 차가워진 손을 내게 닦아낸다. 그 잠깐 사이에 빨개진 손을 녹여주느라 혀를 내밀면 손을 뒤로 내뺀다. 그리곤 내 뒷목을 살살 쓸어내리다가 그 손길이 점점 과격해진다. 괜히 화풀이를 하듯 손가락으로 털을 집어 콕콕 뽑아낸다. 아픈척 낑낑거리면 또 재밌다고 웃는다.
"완전 바보같아."
"…."
작은 손에 뽑혀진 털이 한바가지일 것 같지만 굳이 말리지 않았다. 그러다가 곧 흥미를 잃었는지 그냥 제 몸을 옆으로 내게 기댄다. 살짝 고민하다가 기대고 있던 네 몸을 살짝 물리곤 땅에 내려가 네 앞에 서자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본다.
"발자국 찍혔다."
"…."
"이제 보니까 완전 고양이 발바닥 같다, 너."
"…."
"발 안 시려?"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는 질질 끌리는 긴 코트자락을 살짝 물어 당기자 당황한 듯한 네가 어정쩡하게 일어선다.
"얘, 왜이래."
"…."
"뭐. 어쩌라고."
코트자락만 물고 자꾸만 질질 끌어당기니 헛웃음을 터트린 네가 갑자기 물린 코트자락을 잡고 낑낑 당긴다. 난데없는 힘싸움이었다. 못 이기는 척 살짝 놔주니 휙 빼낸다. 눈사이에 묻힌 발을 조심스레 들어 휘저으니 그제야 눈치챈다.
"…타라고?"
"…."
"나 무거워."
"…."
"너 힘 쎈거 알겠는데 나 무겁다고."
"…."
"멍청아."
"…."
"..아무 말도 못하는 주제에,"
두 눈을 앙칼지게 뜨고 못미덥다는 듯이 바라본다. 그 앞에 몸을 살짝 낮춰오니 후회하지 마라, 하고는 폴짝 뛰어 앉는다. 두 팔을 아래로 내려 몸통을 꼭 껴안고는 등에 제 머리를 눕혀 기댄다. 그 상태로 조금씩 걸음을 옮기자 깨끗하던 눈밭위로 짐승의 발자국이 찍힌다. 눈이 아직 차갑고 시려서 친하지 않은 네게 굳이 강요해서 흔적을 남기게 하고 싶진 않았다. 넓은 마당 위를 계속해서 걷고, 또 걷다보니 등 뒤에서 느껴지는 숨소리가 조금씩 규칙적으로 변한다.
햇빛이 들어 발 아래로 그림자가 생긴다. 커다란 짐승의 덩치 위로 가만히 누워 몸을 기댄 네 모습이 간접적으로 보인다. 그 꼴이 약간 미녀와 야수 같기도 하고. 그렇게 계속 걷다가 어느정도 다시 잠에 들랑말랑 하는 네 모습이 보여서. 살짝 소리를 내 깨운다. 화들짝 놀란 네가 아씨, 하며 주먹을 들어 머리를 살살 쥐어박는다. 놀랐잖아. 다시 아까 있던 자리로 돌아오니 슬금슬금 일어난 네가 위로 올라간다. 눈이 잔뜩 묻은 발을 탈탈 털고 네 옆에 올라와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기 좋다."
"여기서 살까?"
"아, 깜짝이야.."
또 한번 화들짝 놀라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고 옆으로 물러난다. 벌려진 거리만큼 쫓아가 두 팔을 들어 네 허리를 껴안고 어깨 위로 얼굴을 내려 기댄다.
"여기서 같이 살래?"
"어떻게 살아, 여기서."
"왜 못 살아."
"여기 주위에 아무것도 없잖아."
"내가 알아서 할게."
"아프면 어떡해. 병원도 없고."
"집으로 부르면 되지."
"마트도 없어서 장 보기도 불편하고,"
"내가 다 알아서 채워넣을게."
"주위에 먹을 곳도 없어. 나 요리 못해."
"내가 다 할게."
"..심심하면 놀 곳도 없고,"
"내가 놀아줄게."
"…."
"방금처럼."
"..그게 놀아준거야?"
"싫어?"
"…여기서 어떻게 살아."
말문이 막힌 네가 결국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 너를 위해서 할 수 없는 건 없지만. 어떻게 해서든 네가 여기가 좋다면 여기에 정착할 마음도 있었지만. 빙빙 돌려서 거절하는 너를 알았다. 일부러 못 알아들은 척 장난스레 말하면 여기서 어떻게 사냐는 말과 함께 고개를 휙 돌린다.
그래, 알았어. 못할 것도 없지만, 그냥 넘어갔다. 나는 너를 숨막히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아무것도 없이 거의 고립되다시피 한 곳에서 나는 너와 매일매일 살을 맞대고 살면 더할나위 없이 좋았지만. 그게 너한테는 숨막히는 행위라는 걸 잘 알아서.
"…나 들어갈래."
"그래."
이미 목줄은 풀린지 오래였고, 너는 내 주인이 아니니까. 우리는 딱 그만큼. 사랑만 하기로 했으니까. 나는 그런 너에게 다 맞추기로 했으니까.
"…들어가자."
서글퍼도 참아야했다. 나는 너를 사랑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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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정도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찾아왔다. 겨울을 싫어하는 너를 잘 알아서, 그래도 최대한 좋은 기억들만 잔뜩 남겨주고 싶었는데. 그게 내 뜻대로 잘 되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너는 겨울을 싫어했고, 더위를 많이 탔다. 좋아하는 계절을 물으니 가을이라고 했다. 봄도 나쁘진 않은데 날씨가 너무 들쑥날쑥해서 변덕쟁이라고 했다. 변덕쟁이. 그렇게 말하는 네가 귀여워서 또 웃음이 나왔다.
겨울에는 추운 게 싫으니까 따뜻하게 해준다는 핑계로 하루종일 너를 잔뜩 품안에 넣을 수 있었는데. 슬슬 날이 풀리기 시작하면 너는 아주 철썩같이 밀어냈다. 내 기척을 잘 느끼지 못하는 건 여전하면서 붙어오려고 하면 그건 또 어떻게 알고, 거의 철옹성이었다.
"한번만 안아주면 안돼?"
"..왜 앙탈이야. 안 어울리게."
"한번만."
"덥단 말이야."
"그럼 딱 1분만."
"1분은 무슨.."
이미 같은 수법으로 꼬셔서 한동안 안 놔준 적이 있었는데. 그날 하루동안 너는 잔뜩 삐져서 내게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더워서 샤워를 한다는 핑계로 화장실에 들어가 거의 1시간동안이나 나오지 않았으니. 그나마 온도가 조금 내려가는 밤에만 허락했다. 에어컨을 하루종일 틀어놓고 조금 으슬하다 싶으면 그제서야 너는 나를 찾았다. 그런 너를 보면서 맘같아선 매일 틀어놓고 싶었지만 그러면 또 네가 감기에 걸릴까봐 그러지도 못하겠다.
겨울이 끝나면서 자연스레 잦아든 발정기에 이제 나는 매일 밤마다 네 옆에서 잠을 청할 수 있었다. 항상 잠에 들기 직전까지 내게서 등을 돌리고 자다가, 잠에 들면 나는 너 몰래 네 몸을 껴안고 슬쩍 내쪽으로 돌린다. 너는 한참 전에 눈치챘겠지만 굳이 뭐라 하지 않았다.
"나 방금 씻고 나왔어."
"응, 좋은 향기 난다."
"땀나기 싫단 말이야.."
"그럼 이따가."
끈질기게 따라붙자 한뼘 거리를 벌려 앉는다. 추운 게 싫다고 겨울에는 잘만 안겨있었으면서 날이 풀리면 너는 내 털을 쓰다듬어주지도 않았다. 오히려 털 날린다며 바꾸지 말라고 잔소리만 늘어놨다. 벌써부터 이래서야 여름이 다가오기 시작하면 너는 더위를 핑계로 아마 이리저리 도망다닐 수도 있겠다.
너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때마다 그렇게 나를 괴롭혀댔다. 작은 손을 들어 퍽퍽 때리기도 했고 마구잡이로 털을 뽑아내기도 했다. 꼬리를 세게 잡고 안놔주기도 했고 제 손톱으로 발등과 발바닥을 콕콕 찌르기도 했다. 장난스레 동물학대 한다고 했더니, 그럼 네가 나한테 지난 날에 했던 건 폭력이냐 하길래 반박할 말이 없어 입을 꾹 닫았다.
"오늘 하루동안 뭐 했어?"
"뭐했긴. 항상 똑같지."
"그래도."
침대 위로 몸을 눕히는 네 모습을 보다가 벌려진 거리를 다시 좁혀 네 옆에 나란히 누웠다. 너는 항상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네 모습을 더 잘 보기 위해 네 쪽으로 몸을 돌아눕고 은근슬쩍 껴안았다. 오늘 하루동안 뭐했냐는 말에 오늘도 다른 날과 똑같았다며 말한다. 그런데 여주야, 너는 알까. 어제도, 엊그제도 그 말만 하고, 나는 네가 항상 똑같이 하는 그 일이 뭔지도 모른다는 걸. 이상하게 너는 숨기는 게 많았다.
"오늘 내가 뭘 했더라."
"뭐하느라 방에서 나오지도 않고."
"삐졌어?"
"살짝."
"어때. 나도 똑같이 너 못봤는데."
그래도 나는 널 못보는 그 잠깐의 시간에도 도무지 일이 손에 들어오지가 않았는데. 자기도 매한가지라며 유하게 넘어간다. 네가 날 못보는거랑 내가 널 못보는데에 소모되는 감정의 크기는 엄연히 다른데.
"졸려?"
"…응."
가만히 눈을 감고 아무 미동도 없던 네가 이불을 목 끝까지 올려말고는 뒤척거린다. 네 움직임이 끝나면 나는 다시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너를 껴안고.
"아, 맞다."
"응?"
"오늘 영화 봤어."
"하루종일?"
"응. 너꺼 아이패드로."
"알았어."
완전히 잠에 빠진 듯 하다가도 갑자기 말문을 열어 말을 해온다. 그리곤 또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잠에 빠진다. 영화 봤구나, 하루종일. 그랬으면 내가 생각이 안 났을 수도 있지. 안한게 아니라 못한거지. 나는 오늘 처음으로 네 일상을 공유받았다. 사랑이 뭐 별거겠어. 내가 네 일부가 되고, 네가 내 일부가 되고. 천천히 같이 걷다가 스며들고. 같이 이야기를 나누고. 그게 너와 내가 하는 사랑이지.
본인은 의도하지 않은 것 같은데. 오늘처럼 가끔씩 갑자기 떠오른 생각을 누구보다 먼저 내게 말해주고 있는 네 모습을 보면 이상하게 가슴이 찡했다. 그게 내가 너한테 받는 사랑이었다.
/
"여주야, 여주."
"…아."
고요한 새벽 사이에 이상하게 옆에서 낑낑대는 힘겨운 소리가 들려 눈을 뜨면 잔뜩 표정을 찌푸린 네 얼굴이 보였다. 아직 잠에서 깨진 않았는데. 악몽을 꾸나. 다급히 어깨를 흔들어 목소리를 높혔다. 그러자 서서히 떠지는 두 눈 사이로 맺힌 눈물방울이 툭 떨어져 베갯잎을 적신다. 너의 팔을 잡고 끌어당겨 안아 어깨를 두드리자 한숨을 내쉰다.
"악몽 꿨어?"
"..조금."
"조금이 아닌 것 같은데."
"응, 사실 그래."
엉덩이를 받쳐 토닥이자 두 팔을 들어올린 네가 내 목을 꽉 감싸안는다. 살짝씩 떨리는 몸을 안심시키려 잠재운다.
"무슨 꿈 꿨는데,"
"..목말라.."
목마르다는 네 말에 너를 도로 침대에 내려놓고 대신 일어선다. 물컵에 냉수와 정수를 적절히 섞어 건네주니 두 손으로 잡고 한번에 다 들이킨다. 손등으로 입술을 대충 닦고는 컵을 협탁 위에 올려놓는다. 목을 축이자 조금은 아까보다 괜찮아졌는지 다시 풀썩 등을 눕힌다. 말려올라간 티셔츠를 다시 정리해주는 건 내 몫이었다.
"배 내밀고 자니까 악몽 꾸지."
"…뭐래,"
픽 웃음을 터트린 너를 보며 따라 입꼬리를 올린다. 다시 이불 안으로 들어와 상체를 기대니 이번엔 네가 먼저 손을 뻗어 나를 껴안는다. 너의 머리 밑으로 팔을 집어넣어 어깨를 토닥이자 금방 다시 잠들듯한 목소리가 웅얼거리며 가슴팍에 얼굴을 묻는다.
"…있잖아,"
"응."
"너는 나 잘때 먼저 일어나면 안 깨워?"
"응. 왜?"
"왜 안깨워?"
"깨워야 돼?"
"아니 그건 아닌데.."
갑자기 말문을 열며 느닷없는 질문을 한다. 잔머리를 정리해주며 너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내려다본다.
"이제부터 깨워줘?"
"아니, 그냥 궁금해서."
"자는데 깨우면 방해되는 거 같아서."
"..그렇구나."
"응."
"그럼.. 내가 깊이 잠들면 계속 일어날 때까지 기다리는 거야?"
"응. 맨날 그러잖아."
옅게 고개를 끄덕인 네가 내 팔을 베고 다시 잠에 들 준비를 한다.
"그럼 너는 누가 깨우는 게 좋아?"
"별로 아무 느낌 안드는데."
"그렇구나."
"내일 일찍 일어나게?"
"…아니, 아무일도 없어."
그 말을 끝으로 너는 다시 눈을 감았다. 감은 눈두덩이 위로 몇번을 입맞추고. 슬슬 눈이 감길 때쯤 네 옆에서 그렇게 서로를 마주보고 잠에 들었다.
"여주야."
일어난 옆자리가 휑했다. 비어있는 자리에 눈을 떠 몸을 일으키면 침대 밑에 위치한 너의 작은 슬리퍼는 그대로였다. 화장실에도, 옷장에도, 그 어디에도 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어젯밤 네가 마시고 둔 컵이 올려진 협탁 위로. 조그만한 쪽지가 적혀있었다. 슬며시 펼쳐보는 두 손이 잘게 떨려왔다. 그러면 안되는데, 이상하게 두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백현아, 잘 잤어? 우리 내일볼까? 내일 다시 보자.]
그래. 내일 다시 보자, 여주야. 내일 다시 오긴 하는 거 맞지? 나 기다릴게. 내일까지.
"…아,"
우리 내일, 다시 보자. 꼭.
그날은 우리가 연애 이후 네가 처음으로 사라진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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