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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세례 요한의 출생
1-4절, 누가복음의 기록 목적
[1-4절]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일들](NASB, BDAG)(페플레로포레메논 엔 헤민 프라그마톤)[우리 중에 확실히 믿어진 일들(KJV), 완전히 확정된 일들](롬 4:21; 14:5; 골 4:12 참조)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누가복음을 쓴 이는 누가이다. 그는 사도 바울의 동역자이며 의사이었고(골 4:14; 딤후 4:11) 사도행전도 썼다. 누가는 본서의 내용을 ‘우리 중에 이루어진 일들’ 혹은 ‘우리 중에 확실히 믿어진 일들’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누가복음에 증거된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지어낸 이야기들이 아니었고, 그들 중에서 이루어진 일들이었고 초대교회에서 확실히 믿어진 일들이었다. 즉 그것들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들이었다. 기독교는 지어낸 말들이 아니고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사건들에 근거한다.
누가가 증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내용들은 처음부터 그를 보았던 목격자들과 그를 증거한 사역자들이 증거한 바이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은 그런 증인들이었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 유다 대신에 한 명을 뽑으려 할 때,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고 말했다(행 1:21-22). 사도들은 예수님의 생애에 대한 증인들이었다.
예수님을 본 목격자들 중에는 그의 말씀들과 행적들에 관해 글들을 남긴 자들이 많았다. 그들의 글들은 복음서들을 위한 참고자료들이 되었을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복음서를 기록함에 있어서 자료들의 부족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포함하여 많은 증인들과 문서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 증인들과 문서들을 참고함으로써 사건들과 사실들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얻으며 그것들을 확증할 수 있었다.
누가는 자신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내용을 근원부터 자세히 검토한 후 그것들을 차례대로 쓰게 되었다고 말한다. ‘차례대로’라는 말은 대략적 시간 순서를 포함한 내용들의 정돈을 의미할 것이다. 데오빌로 각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데오빌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인데, 당시에 어떤 고위 공직자의 이름이었던 것 같다. 그의 이름은 그가 경건한 가정에서 자란 자임을 보이는 것 같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배웠고 아마 그를 믿었던 것 같다. 누가는 그에게 글을 써 보내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의 감동으로 이 귀한 복음서를 저술하였다.
누가는 본서의 목적이 데오빌로 각하로 하여금 그가 배운 내용이 확실하다는 것을 알게 하려는 데 있다고 말했다. 즉 본서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확실한 지식을 주는 데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확실한 지식은 그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위해 필요하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얻고 그를 따를 수 있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확실한 지식과 믿음을 가져야 한다. 기독교는 사람들이 지어낸 이야기들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특별계시들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인들의 증언들에 근거한 것이다. 신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들의 증언들이다. 우리는 누가복음을 읽고 그 내용들을 잘 이해하고 그것들의 확실함을 깨닫고 그 모든 진리를 믿고 확신해야 한다.
5-25절, 엘리사벳이 세례 요한을 임신함
[5-7절]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無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주전 40년부터 주전 4년까지 통치했던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사가랴이며 그 아내도 아론의 자손인데 이름은 엘리사벳이었다. 이 두 사람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고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였다. 엄격히 말해, 세상에 의인은 없지만(롬 3:11), 하나님의 은혜로 비교적 의롭게 산 의인들은 있었다. 노아나 아브라함이나 욥이나 다니엘 등이 그러했다. 그들은, 비록 하나님의 법들을 완전히 지키지 못했어도, 짐승 제사에서 예표된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법들을 힘써 지킨 자들이었다. 사가랴와 엘리사벳도 하나님 앞에서 의인들이었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임신을 못하므로 그들은 자녀가 없었고 그 둘의 나이가 많았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 의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부족함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아마 이런 부족 때문에 오히려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더욱 경건하고 의롭게 살았을 것이다. 아무런 부족이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경우보다 육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세상적으로 어떤 부족이 있는 사람이 하나님을 찾는 경우가 더 많다. 노아도, 이삭도, 한나도 자녀가 없었고, 그들은 그 문제로 하나님께 더욱 기도하고 의지했을 것이다. 자녀가 없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믿음을 단련시켰고 그들에게 영적 유익을 주었을 것이다.
[8-17절]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새 제사장의 전례(前例)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는 천사의 말은 사가랴가 평소에 자녀를 위하여 기도했음을 보인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다. 나이가 많도록 기도한 것을 보면, 그는 아마 결혼 후 오랜 세월 동안 기도했을 것이다. 옛날 노아는 5백세가 된 후에 세 아들들을 낳았는데(창 5:32), 그렇다면 노아도 오랫동안 기도했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란을 떠난 후 100세가 되어 아들 이삭을 얻었으니 그도 여러 해 기도하였을 것이다. 이삭도 40세에 결혼하여 60세에 쌍둥이를 낳았으니(창 25:20, 26), 그도 여러 해 기도했을 것이다. 그들은 기도 생활로 믿음의 단련을 얻었고 마침내 하나님께로부터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
천사는 사가랴에게 엘리사벳이 임신하여 낳을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지으라고 말한 후 그에 대해 네 가지 내용을 전했다. 첫째, 그는 큰 자가 될 것이다. 둘째, 그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않고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얻을 것이다. 셋째, 그는 많은 사람을 회개시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할 것이다. 넷째, 그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경건하고 의로운 부모에게서 그의 귀한 종이 나오게 하셨다. 오늘날에도 경건한 부모에게서 하나님께서 귀하게 쓰시는 종들이 나올 것이다.
[18-23절]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 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의 성소 안에서 지체함을 기이히 여기더니 그가 나와서 저희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 성소 안에서 이상(異像)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형용으로[손짓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벙어리대로 있더니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의인 사가랴에게도 믿음의 연약함이 있었다. ‘어떻게’라는 원어(카타 티)는 ‘무엇에 근거하여’라는 뜻이다. 사가랴는 천사의 전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나와 나의 아내가 나이가 많은데 무엇에 근거하여 이것을 알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한 것이다. 이것은 그의 불신앙을 나타내었다고 보인다. 성도의 믿음의 근거는 오직 하나님 자신이시지 다른 어떤 것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믿는다면, 우리는 그의 모든 말씀을 의심 없이 다 믿을 수 있고 또 믿어야 한다. 그러나 사가랴는 천사를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했다. 그 때문에 그는 얼마 동안 벙어리가 되어야 하였다. 백성들은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가 성소 안에서 지체함을 기이히 여겼고, 그가 나와서 그들에게 말을 하지 못하니 백성들이 그가 성소 안에서 어떤 이상(異像) 즉 환상을 본 것을 알았다.
[24-25절] 이 후에 그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임신하였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가로되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여인이 자녀를 임신하지 못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으나 하나님께서 나이 많은 그에게 임신하는 복을 주셨다. 과거에 오랫동안 사가랴와 엘리사벳 부부에게 자녀를 주지 않으셨던 자도 하나님이셨고, 이제 엘리사벳이 아들을 임신하게 하신 자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의 주권적 섭리자이시다. 그는 그가 기뻐하시는 일들을 하늘과 땅에서 다 이루시는 자이시다(시 135:6).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세례 요한의 부모이었던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비록 자녀가 없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계명대로 사는 의인들이었다. 의인들에게도 고민거리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자녀가 없는 것이 부족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들에게도 이런 저런 부족을 주신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부족을 인해 낙심하지 말고 주권적 섭리자 하나님만 믿고 그의 하시는 일들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만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법적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 3:22).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그 의 안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구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의지하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힘써 행함으로 실제로 의롭게만 살아야 한다.
둘째로, 사가랴는 자신의 영적인 생활과 자기 나라 백성을 위해서뿐 아니라, 자기 가정의 자녀를 위한 기도도 간절히 아마 오랫동안 올렸을 것이고 그 기도는 마침내 하나님께 들으신 바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반드시 응답해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무엇이든지 힘써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육의 문제를 위해, 우리의 가정과 가족들을 위해, 우리의 교회를 위해, 또 우리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의 응답을 믿고 기대하며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셋째로, 사가랴는 천사가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였다가 일시적으로나마 벙어리가 되었었다. 오늘 시대는 성경에 대한 불신앙과 회의주의가 가득한 시대이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잘 이해하고 의심치 말고 다 믿고 또 힘써 행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말씀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인류 역사상 주신 하나님의 특별계시들과 그 저장소인 성경의 말씀들을 다 믿어야 한다.
26-56절, 마리아가 천사의 방문을 받음, 엘리사벳을 방문함
[26-27절]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다윗의 자손(다윗의 집 출신)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우리는 천사를 본 적이 없을지라도 천사가 존재함을 믿어야 한다. 천사는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지방의 한 조그만 시골 마을인 나사렛으로 가서 다윗의 집 출신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인 마리아에게 나타났다. 요셉을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한 것은 메시아에 대한 구약 예언의 성취를 보인다. 마리아를 ‘처녀’라고 두 번이나 언급한 것은 예수께서 특별한 방식으로 잉태되셨음을 증거한다. 마리아는 아직 남자를 알지 못한 처녀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의 탄생을 위해 한 순결한 처녀를 사용하셨다. 마리아가 순결을 지킨 처녀가 아니었다면 그는 하나님께 그렇게 사용되지 못했을 것이다.
[28-30절]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하시도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도다](전통본문)1)하니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초자연적 잉태와 출산의 도구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마리아를 포함하여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외의 모든 사람은 다 죄인이다. 그러므로 마리아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고서는 메시아의 거룩한 출산에 쓰임을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31-33절]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왕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마리아가 잉태하여 낳을 사람의 이름은 ‘예수’라고 불릴 것이다. ‘예수’는 ‘구원’이라는 뜻이다. 그는 만세 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의 구주이시다. 그는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으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어질 것이다. 또 그는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 곧 다윗의 왕위를 이어서 야곱의 집에서 왕노릇하실 자이시며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이것은 구약에 자주 언급된 메시아의 왕의 사역이다.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실 자는 메시아 곧 그리스도이시다.
[34-36절]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라는 마리아의 말은 그의 의아함을 나타내지만, 사가랴처럼 불신앙의 말은 아니었다. ‘어찌’라는 원어(포스)는 ‘어떤 방식으로’라는 뜻으로 그의 말은 어떤 방식으로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인가라는 질문이었다. 천사는 성령께서 그에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 곧 하나님의 능력이 그를 덮음으로써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처녀 마리아의 메시아 잉태는 하나님의 전적인 능력으로 될 일이다. 임신하지 못하던 그의 친척, 늙은 엘리사벳의 임신보다 처녀 마리아의 잉태는 더 신기한 하나님의 능력의 일일 것이다.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는 말씀은 처녀 마리아의 몸에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어 나실 메시아의 두 가지 특별한 점을 증거한다. 첫째는 ‘거룩함’ 곧 무죄성(無罪性)이며, 둘째는 신성(神性)이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서 나셨다는 것은 그의 무죄성과 신성에 관계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처녀 출산을 부정하는 사람은 그의 무죄성(無罪性)과 신성을 부정하는 잘못을 범하게 될 것이다.
[37절]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이는 하나님께는 능치 못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니라](KJV, NASB, NIV).
천사는 “이는 하나님께는 능치 못한 일이 아무것도 없음이니라”고 말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증거한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사자는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고 말했었다(창 18:14). 욥은 “주께서는 무소불능(無所不能)하시오며[모든 일을 하실 수 있사오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라고 고백했었다(욥 42:2).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이요 또한 그의 전능하심을 믿는 것이다.
[38절]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 종(헤 둘레 퀴리우)[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마리아의 말은 그의 겸손과 믿음과 순종을 나타낸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믿었고 그 앞에 복종했다. 그는 혹시 처녀가 아이를 가짐으로써 생길 비난과 수치와 죽음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자신을 온전히 바쳤다. 마리아의 믿음과 순종은 아름다웠다. 그는 확실히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여자이었고 하나님의 은혜로 참된 믿음과 순종의 마음을 가진 자이었다.
[39-45절] 이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마리아의 고향은 팔레스틴의 북쪽 갈릴리 지방 중남부에 있는 나사렛이었던 것 같고(눅 1:26), 그는 거기로부터 사가랴가 살았던 팔레스틴의 남쪽 유대 산중의 한 동네로 빨리 갔다. 그것은 친척 엘리사벳이 임신했다는 기쁜 소식과 자신에게 일어난 일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을 때, 복중에 있는 아이가 뛰놀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감동 때문일 것이다. 마리아도, 사가랴도, 엘리사벳도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들이었다. 엘리사벳은 성령의 충만함 가운데 마리아의 잉태 사실을 알았다. 그는 젊은 마리아를 ‘내 주의 모친’이라고 불렀다.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아기는 엘리사벳의 주님이 되시고 또한 우리 모두가 복종해야 할 주님이 되신다. 엘리사벳은 또 마리아를 ‘믿은 여자’라고 부르면서 그에게 복이 있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주의 모친’이 될 마리아는 복되었다. 그러나 후에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눅 11:27-28). 마리아가 하나님의 아들을 잉태하고 낳은 것도 복이지만, 우리들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경건하고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은 더 큰 복이다.
[46-56절]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 계집종[여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位)[지위, 직위]에서 내리치셨으며[내리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空手)로[빈손으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그는 우리 조상들에게,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히 말씀하셨듯이, 그의 긍휼을 기억하셔서 그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도다].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마리아는 자신을 ‘여종’이라고 부르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비천함을 돌아보셨다고 고백한다. 그는 겸손한 자이다. 겸손은 모든 사람에게 요구되는 덕이다. 마리아는 또 능하신 이가 큰 일을 자기에게 행하셨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신의 초자연적 잉태를 가리킨다. 이것은 사람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고 능하신 이 곧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 전체가 그러하지만, 구주를 세상에 보내시는 일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능력의 큰 일이 이루어졌다. 사람의 구원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시작되고 완성되는 일이다.
마리아는 또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하시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 자이실 뿐 아니라, 모든 피조물과 본질적으로 구별되시는 분이시다. 그는 초월자이시요 무한자(無限者)이시다.
마리아는 또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말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자세이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이다.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는 사람은 그의 긍휼하심을 얻지 못한다. 그러나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은 그의 긍휼을 얻을 것이다.
마리아는 또 하나님의 능력, 특히 공의로 통치하시는 그의 주권적 능력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들을 내리셨고 부자들을 빈손으로 보내셨고 비천한 자들을 높이셨고 주리는 자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다. 그는 악인을 공의로 보응하시는 섭리자이시다. 마리아가 하나님에 대하여 가졌던 바른 지식과 믿음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 지식이며 옛날 사무엘의 모친 한나가 가졌던 지식과 믿음이었다(삼상 2:6-7).
또 마리아는 하나님의 종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었고 그의 도우심을 받았으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조상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마리아는 엘리사벳과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그가 엘리사벳의 집에 석 달이나 머문 것을 보면, 엘리사벳은 그와 매우 가까운 친척, 아마 이모쯤 되었던 것 같다. 석 달은 임신한 여자가 입덧을 할 기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일이 필요했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탄생하셨다. 마리아는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였고 출산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잉태하고 출산한 예수께서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을 때 뱃속에 있는 아이가 뛰노는 것을 체험하였다. 또 엘리사벳은 성령 충만함을 입어 마리아를 ‘내 주의 모친’이라고 불렀다. 이런 사실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된 신성을 확신해야 한다.
둘째로, 처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어 탄생하신 예수께서는 메시아이시다. 예수라는 이름의 뜻대로, 주 예수께서는 멸망할 세상에 사는 멸망할 죄인들을 그들의 죄에서 건져내시는 구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약속된 메시아께서는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 신약교회를 다스리시는 주님이시며, 장차 그의 재림으로 나타날 영광의 천국에서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영원히 통치하실 것이다. 죄인들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는다(행 16:31). 우리는 구주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확신하고 그의 교훈을 순종하며 따라야 한다.
셋째로, 마리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로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였다. 38절,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마리아는 천사 가브리엘이 전해준 하나님의 말씀을 믿었고 그 말씀에 나타난 그의 뜻과 명령에 순종하며 헌신하였다. 그는 온갖 오해와 비난과 수치, 그리고 죽음의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 앞에 자신을 드렸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도 그의 능력과 긍휼로 구원하셨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겸손히 엎드려 하나님을 고백하며 그에게 온전히 헌신해야 한다.
57-80절, 세례 요한의 출생, 사가랴의 찬송
[57-66절]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저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8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그 모친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저희가 가로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그 부친께 형용하여[손짓으로] 무엇으로 이름하려 하는가 물으니 저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 쓰매 다 기이히 여기더라.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매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가로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니 이는 주의 손이 저와 함께하심이러라.
요한의 부친 사가랴는 요한이 출산하기까지 벙어리가 되는 징계를 받았으나, 그 기간은 그에게 있어서 불신앙을 회개하고 믿음을 더욱 굳세게 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사람이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믿음을 견고케 하는 데 매우 유익하다. 우리의 신앙 성장에는 평안과 형통보다 고난과 환난이 훨씬 더 유익하다. 우리의 신앙은 여러 가지 시험과 고난 중에서 더 견고해진다.
[67-71절]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贖良)[구원]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참된 찬송은 하나님과 그의 하신 일을 알고 그의 은혜를 체험한 자, 특히 그의 구원을 체험한 자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찬송은 일반 노래가 아니다. 찬송은 하나님께 대한 신앙고백이며 기도요 그의 구원에 대한 간증이다. 사가랴의 찬송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셔서 구원하시고 구원의 뿔을 그의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는 내용이다.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다는 것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메시아 예언의 성취를 가리킨다(렘 23:5-6; 겔 34:23-24; 호 3:5; 사 11:10 등). ‘구원의 뿔[능력]’이란 ‘능력의 구주’를 가리킨다.
사가랴가 말한 구원은 우리 원수들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들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는 사탄과 악령들과 죄와 사망이며 또 사탄의 도구가 된 악의 세력들과 세상 권세자들 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앗수르, 바벨론, 로마 등의 나라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핍박하는 원수들이었다.
[72-75절]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이유는 우리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긍휼뿐이다. 사람은 다 죄인이다. 세상에는 하나님을 찾는 자도,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자도 없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와 긍휼이 아니고서는 구원 얻을 영혼이 이 세상에는 아무도 없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비를 언약과 맹세로 나타내셨다. 구약(舊約)과 신약(新約)은 하나님께서 그의 긍휼과 자비로 사람들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이다.
구원의 목적은 원수들에게서 건짐을 입어 평생토록 하나님 앞에서 거룩과 의로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게 하는 것이다. 천국은 거룩과 의의 세계이며 불결과 죄가 전혀 없고 하나님의 뜻만 즐거이 순종하는 곳이다. 거기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결코 짐스런 일이 아니고 기쁨과 즐거움의 일이 될 것이다. 또 구원 얻어 천국 백성된 자들은 이 세상에서도 거룩과 의로 즐거이 하나님을 섬긴다.
[76-79절]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그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스플랑크나 엘레우스)[긍휼의 심정]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아나톨레)[해의 돋음]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평안]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사가랴는 성령의 감동으로 그의 아들 요한의 역할에 대해 증거하였다. 요한의 역할은 지극히 높으신 자 곧 하나님의 선지자 즉 대언자로서 메시아 앞에 앞서 가서 그의 길을 예비하여 주의 백성에게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는 것이다. 메시아의 길을 예비한다는 말은 메시아를 영접할 수 있도록 죄를 각성시키고 죄를 버리게 하는 것, 즉 회개하게 하는 사역을 의미하였다. 세례 요한은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였다(눅 3:3).
사가랴는 요한이 주의 백성으로 하여금 알게 할 메시아의 사역을 ‘죄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이라고 표현했고 그것이 하나님의 긍휼의 심정 때문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였다. 죄가 사람과 세상의 근본 문제이므로, 죄사함은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다. 구원은 죄사함의 일이다. 사람이 죄사함받지 않고서는 구원과 영생의 복을 얻을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救贖) 곧 죄사함을 받았다”고 말했다(엡 1:7).
사가랴는 또 “이로써 해의 돋음이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안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라고 말한다. 해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말라기 4:2,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의로운 해가 떠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발하리니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같이 뛰리라.” 구주의 오심은 해가 돋음과 같고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옴과 같다.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은 무지와 부도덕, 슬픔과 죽음과 영원한 지옥 형벌을 가리킬 것이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어두움 속에서 살던 자들에게 지식과 의, 기쁨과 생명과 천국의 복을 주셨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 결과는 평안이다. 구원은 평안의 길이다. 이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것이다.
[80절]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때때로 사람들과 격리되어 오직 성경말씀과 기도로 훈련되고 심령이 강해진 종들이, 배교되고 타협하는 교회들의 풍조에 비교적 물들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쓰시는 설교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을 정리해보자. 첫째로,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원수들로부터의 구원이다. 우리의 원수들은 마귀와 악령들이며 죄와 불행과 죽음과 지옥 형벌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를 마귀와 악령들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이며 모든 죄와 불행으로부터와 죽음과 지옥 형벌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특히 죄사함의 구원이다. 죄사함은 구원의 방법이며 구원 자체이다. 죄가 모든 사람과 세상의 불행의 근본 원인이므로, 죄사함이 모든 사람과 세상의 문제들의 근본적 해답이 된다. 거기에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으로 오신 이유가 있었고 그가 십자가에 죽으신 까닭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의 대속 사역을 통해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셨고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 되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는 이유는 오직 그의 긍휼뿐이다. 78절,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사람들은 자기 자신들 속에는 구원 얻을 아무런 의(義)도, 어떤 조건도 없었다. 오직 하나님의 거저 주시는 긍휼과 은혜가 아니고서는 이 세상에 구원 얻을 영혼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 자신의 죄들 때문에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했던 우리들이 구원 얻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밖에 없다.
셋째로, 구원의 목표는 빛과 평안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비취는 햇빛으로 오셨다(79절). 그 빛은 참된 지식과 의와 기쁨과 평안과 영생에 이르게 하는 빛이다. 이제 구원 얻은 자들은 영원히 하나님 앞에서 거룩과 의로 두려움 없이 그를 섬길 것이다. 경건과 의의 삶은 영원한 천국에서의 우리의 삶일 것이며 또 비록 불완전하지만 구원 얻은 우리 모든 성도들의 현재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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