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 아프리카 공화국
위치: 아프리카남단
인구: 61,218,150명 (2023년 추계)
수도: 프리토리아(행정수도), 케이프타운(입법수도), 블룸폰테인(사법수도)
면적: 1,220,813㎢ 세계면적순위
공식명칭: 남 아프리카 공화국 (Republic of South Africa)
기후: 아열대성기후
민족 구성: 아프리카 흑인(79%), 백인(10%), 유색인
언어: 아프리칸스어,영어
정부/의회형태: 공화제 / 다당제&양원제
종교: 그리스도교(74%), 아프리카 토착종교(15%), 이슬람교
화폐: 남아프리카공화국 자르 (R) 환율계산기
국화: 프로테아
대륙: 아프리카
국가번호: 27
GDP: USD 370,887,000,000
인구밀도: 48명/㎢
전압: 220V / 50Hz
도메인: .za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한국과의 관계
▶ 외교
▶ 경제·통상·주요 협정
▶ 문화교류·교민 현황
요약
아프리카에 있는 국가. 행정수도는 프리토리아, 입법수도는 케이프타운, 사법수도는 블룸폰테인이며 화폐단위는 랜드다. 20세기 내내 인종분리 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를 펼쳐 국제사회로부터 비난을 받았지만 넬슨 만델라의 지도 아래 흑인 다수당이 승리하면서 1994년 이후 정책 폐지에 이르렀다. 현재에도 높은 범죄율, 인종 간 긴장, 주택과 교육 기회에서의 커다란 격차, 유행성 전염병 등 풀기 어려운 난제들에 직면해 있다. 면적 1,220,813㎢, 인구 61,218,150(2023 추계).
남위 22∼35°, 동경 16∼33°에 위치하며 동서·남북으로 각각 약 1,600km에 이른다. 동쪽과 동북쪽으로 모잠비크·스와질란드, 서북쪽으로 나미비아, 북쪽으로 보츠와나·짐바브웨와 접하고 동남쪽으로 인도양, 서남쪽으로 대서양과 접한다. 독립국인 레소토가 영토 내에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행정수도는 프리토리아, 입법수도는 케이프타운, 사법수도는 블룸폰테인이다.
다채로운 지형과 뛰어난 자연경관, 문화적 다양성으로 유명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1994년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인종차별정책)이 법적으로 폐지되자, 관광객들이 방문하고 싶어하는 나라가 되었다. 다른 지역과 동떨어져 있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20세기 내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강력하게 펼칠 수 있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라고스나 카이로 같은 아프리카 주요 도시로부터 수천㎞ 떨어져 있고, 남아프리카의 주요 무역 상대국인 유럽, 북아메리카, 동아시아의 나라들로부터는 1만㎞ 이상 떨어져 있다. 소수 백인들에 의해 지배되었던 정부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따라, 주택·교육 그리고 실질적인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인종에 따른 엄격한 분리 정책을 시행했다.
정부는 주민들을 백인, 유색인, 흑인으로 구분하여 3개 국가로 분리했다.
첫번째는 영국과 네덜란드계(보어인) 조상을 가진 백인 집단이다. 이들은 정치적 지배권을 얻기 위해 몇 세대에 걸쳐 싸웠고, 그 투쟁의 폭력적 정점은 보어 전쟁(1899~1902)이었다.
2번째 흑인 집단은 북서쪽 사막지역에서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는 산족, 동쪽 고원에서 주로 목축업에 종사하는 줄루족, 그리고 남쪽의 케이프 지역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코이코이족 등으로 구성된다.
유색인종 집단은 흑인과 백인의 혼혈인종인 컬러드와 인도·말레이시아·필리핀·중국계 아시아 인종으로 구성된다. 아파르트헤이트 체제는 국제사회로부터 맹렬한 비난을 받았고 거센 반대에 부딪히기도 했다.
1980년대 중반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자국이 세계의 최빈민국에 속해 있으며, 경제·문화적으로 배척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시기에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시인 몽가네 월리 세로테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나라의 억압받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자기를 표현하고자 하는 강렬한 요구가 있다. 자기를 표현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 무언가를 말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의식적으로 역사를 만드는 사람들을 뜻한다. 우리는 사람들이 극도의 착취와 억압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생존하도록 하는 창조성을 등한시한다. 우리 국민들은 극단적인 인종차별 속에서 생존해왔다. 그것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 대해 창조적이었다는 것을 뜻한다."
결국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다문화 지역에서 인종적 분리는 지속시키기 어려운 정책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F.W. 데 클레르크가 이끈 남아프리카 공화국 정부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무효화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은 차례로 보통선거와 선거 민주주의로 변화되었다. 그 정책의 붕괴는 오랫동안 투옥되었던 반체제 인물 넬슨 만델라의 지도 아래 흑인 다수당이 승리한 1994년 선거에서 정점에 이르렀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짧은 시간 내에 사회적 평등을 이루는 데 괄목할 만한 성장을 거두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 최대 도시권이자 상업의 중심지인 요하네스버그는 인구밀집지역인 가우텡 주의 중앙에 자리하고 있다. 인도양에 면해 있는 항구인 더반은 주요 산업의 중심지이다. 남쪽 해안을 따라 발달한 두 도시 이스트런던과 포트엘리자베스는 중요한 상업·산업·문화의 중심지이다.
오늘날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비옥한 농경지, 풍부한 광산자원, 관광명소, 고도로 발전하는 지적 자본을 바탕으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혼합경제를 향유하고 있다. 하지만 한층 개선된 정치적 평등과 경제적 안정이 사회적 안정까지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21세기에 들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여전히 증가하는 범죄율, 인종간 긴장, 주택과 교육 기회에서의 커다란 격차, 유행성 전염병, 에이즈 같은 풀기 어려운 난제들에 직면해 있다.
자연환경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3대 지형구로 대별된다. 즉 광대한 내륙고원, 반원형의 산맥을 이루며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그레이트 단애, 협소한 띠 모양의 해안평야가 그것이다. 고원은 해발 610m(서쪽)에서 2,440m(동쪽)에 이르며, 넓은 범위에 걸쳐 준평원의 경관을 나타낸다.
그레이트 단애는 해발 1,500∼3,350m에 위치해 있으며, 지역에 따라 트란스발 드라켄즈버그(북동부)나 로게펠트(서부) 등 여러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최고봉은 레소토의 북동쪽 국경지방에 있는 오수르스 산이다. 해안평야는 좁고(최장 80km) 비옥하며 서쪽·남쪽·동쪽으로 길게 뻗어 있다. 주요 하천은 오렌지 강과 림포포 강이다.
기후는 온난성 아열대기후이다. 여름철(12∼2월) 평균기온은 21∼32℃이며, 겨울철(6∼8월)에는 10∼21℃ 이하이다. 연평균강우량은 약 485㎜이다. 자연식생은 케이프 주의 지중해성 기후에서 잘 자라는 관목부터 서부 반사막지대의 가뭄에 잘 견디는 관목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가 다양하다. 케이프 주 남쪽 일부가 수목으로 뒤덮여 있고, 나머지 국토의 대부분은 초원지대이다. 크루거 국립공원을 비롯하여 사자·코끼리·코뿔소·영양 등의 야생동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보호구역이 많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석탄·석면·구리·망간·금·크롬·우라늄·백금·철광석·다이아몬드·천연가스 등의 천연 광물자원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광산지대는 세계최고의 부광(富鑛)지구에 속하며, 트란스발 북부로부터 중부의 오렌지 자유주(自由州)와 케이프 주 북부를 지나 서부 연안지방까지 뻗어 있다.
국민
아프리카 흑인이 전인구의 3/4을 차지하며 백인은 10%, 나머지는 대부분 혼혈인종(케이프 말레이 포함)과 인도인이다. 흑인은 4개 주요 어군을 구성하는데 각 어군은 모두 니제르콩고어족의 베누에콩고아군에 속하는 반투어를 사용한다. 최대 어군은 코사족·줄루족·스와지족·은데벨레족 등의 응구니어군인데 전체 흑인 인구의 절반 이상이 여기에 속한다. 2번째로 큰 어군은 소토족·페디족·츠와나족이 속한 소토-츠와나 어군이며 송가어군과 벤다어군이 그 뒤를 잇는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인구는 2023년 기준 6,121만 명이고, 인구밀도는 49명/㎢이다. 15세 이하가 전체 인구의 30%를 차지하며, 도시거주자는 인구의 67%을 이루고 있다.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만 하더라도 유럽에서 들어오는 이민자가 매년 2만 명을 넘어섰지만 1970년대 말, 1980년대 이후로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떠나는 백인이 신규 이민자보다 많아졌다.
언어
공식 언어는 반투어에 속하는 9개 언어와 아프리칸스어, 영어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은 아프리칸스어와 영어의 2개 주요 언어집단으로 대별된다. 아프리칸스어는 네덜란드·프랑스·독일 정착민의 후예들이 사용하는 언어로, 전체 백인 인구의 절반 이상이 이를 사용한다. 영어는 그들보다 나중에 건너온 영국 식민지 이주민의 후예들을 비롯해 소수의 포르투갈·이탈리아 이민자 등이 사용한다.
문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현재 10개 또는 그 이상의 언어가 통용되고 있으며, 이는 이 나라의 문화적 다양성을 잘 말해준다. 국민 대다수를 이루는 흑인의 문화는 여러 문화를 두루 받아들여 절충적인 성격을 띠며, 유럽인의 풍습을 따르는 흑인도 많지만 언어·음악·무용에는 아프리카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문학적 전통은 영어와 아프리칸스어, 기타 다양한 아프리카어로 씌어진 작품들, 특히 줄루족과 코사족의 작품들 속에 담겨 있다. 유명한 작가들 중 아프리칸스어권에는 시인 N. P. 반 위크 로와 브레이튼 브레이튼바흐 등이 있으며 영어를 사용하는 작가들에는 소설가 앨런 페이턴, 네이딘 고디머 등과 극작가 에이솔 푸가드 등이 있다.
역사
약 1만 년 전 석기시대 후기에 산족(일반적으로 부시먼)과 코이코이족(호텐토트족)이 수렵과 채집생활을 하면서 남아프리카 공화국 지역을 배회했으며, 코이코이족은 유럽인과 접촉이 있을 무렵 유목문화를 발달시키고 있었다.
철기문명의 반투족들은(∼15세기) 이 지역으로 남하하여 이전보다 복잡한 공동체조직을 만들고 정교한 금광업과 동광업, 그리고 활발한 동아프리카 무역을 발전시켰다.
1488년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르톨로메우 디아스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남단을 항해했다. 1652년에는 네덜란드인 얀 반 리이베에크가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무역선의 중간기착지로 이용하기 위해 희망봉 일대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네덜란드 이주자들은 처음에 보어인으로 불렸으나 나중에 네덜란드 본토어에서 파생된 아프리칸스어를 쓰게 되면서 그 이름을 본따 '아프리카너'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뒤 산족·코이코이족과 아프리카너 사이에 케이프 컬러드(Cape Coloured)라는 혼혈인종 집단이 생겨났다. 아프리카너들은 희망봉 일대에서 내륙쪽으로 이동하여 반유목생활을 하는 농민이 되었으며, 이들을 '트렉보어인'(trekboer)이라고 불렀다. 이들은 피시 강 부근에서 안정된 농경생활을 하며 인구도 많은 코사족과 충돌하기 시작했다.
1775년에는 사소한 소떼 약탈이 원인이 되어 아프리카너와 코사족 사이에 영토전쟁으로 발전했으며, 이 전쟁은 그후 간헐적으로 10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1795년에 영국군은 지금의 케이프 주(당시 케이프 식민지)를 점령했다가 1802년에 그 지배권을 양도했으나 1806년에 이를 되찾았다. 영국인들은 국경을 따라 반투어를 쓰는 종족들을 정복하는 정책을 펼쳤다. 1830년대에 들어와서 아프리카너들이 노예들과 함께 오렌지 강과 발 강을 건너 대규모로 북상하는 이른바 '대이주'(Great Trek)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에 보어인들은 오렌지 자유국(1854)과 남아프리카 공화국(1838, 후에 트란스발 공화국이 됨)을 세웠다. 두 공화국 모두 1850년대에 영국의 식민통치에서 독립했다. 19세기 후반에는 다이아몬드(1868)와 금(1886)의 발견으로 경제가 활기를 띠었다. 보어인들은 영국이 자신들이 세운 공화국을 남아프리카 연방에 포함시키려고 하자 이에 맞서 저항했고, 마침내 1899년 두 공화국과 영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다(보어 전쟁). 1902년 보어인들이 패하고, 두 공화국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남아프리카 연방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편에 가담했는데, 이들의 군대는 1915년 남서아프리카(지금의 나미비아)를 점령하고 있던 독일군과 싸워 승리했으며, 1919년 국제연맹은 독일의 식민지이던 남서아프리카의 통치권을 남아프리카 연방에 위임했다.
20세기 내내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정치를 지배해 온 것은 다수 흑인들에 대한 백인 지배권의 유지에 관한 문제였다. 1948년에 구성된 백인계 국민당의 신(新)정부는 아파르트헤이트라는 흑백인종차별정책을 공식적인 정책으로 채택했고, 이에 따라 기존의 인종간 계급제도는 모든 정치·경제 구조에서 백인과 흑인을 양 극단에 놓는 구조로 고착했다.
이 정책의 중간에는 아시아인과 컬러드가 있었다. 1950년대부터 유색인종들의 소요가 끊이지 않았으며, 이는 아파르트헤이트 정책과 관련하여 경찰과 폭력적으로 충돌하는 사태를 낳았다.
1966년에는 레소토(바수톨란드)와 보츠와나(베추아날란드) 공화국이 독립했다. 1968년에 국제연합(UN)은 남서아프리카의 국명을 나미비아로 바꿨으며, 1990년에 나미비아를 독립시켰다. 이 무렵 경제 제재 등 국제사회의 비난에 직면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백인 정부는 흑인들에 대한 유화정책과 함께 아파르트헤이트의 장벽을 허무는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1991년 백인 정부와 흑인 정당 간에 인종을 초월한 새 헌법의 제정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아파르트헤이트는 사실상 완전히 폐지되었고, 정부와 주요 흑인 정당인 ANC는 다수결 원칙에 따라 민주주의로 이양하는 데에 협력했다. 이에 따라 1994년 4월 모든 인종이 참여하는 민주적 총선이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ANC가 완승을 거둠에 따라 ANC 의장인 넬슨 만델라는 즉시 NP와 함께 국민통합을 위한 정부를 구성했다.
1995년 5월 '진실과 화합 법'이 의회에서 통과됨으로써 소수 백인정권하에서 저질러진 범죄적 행위의 진실을 규명하고 흑백간의 화합을 이끌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이에 따라 투투 주교가 이끄는 '진실과 화합위원회'가 설치되어 2년 6개월 동안 활동에 들어갔다. 1998년 10월 '진실과 화합위원회'는 3,5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만델라 대통령은 용서와 화합을 호소하는 한편, 반인권적 범죄가 처벌되지 않는 문화를 청산하고 법치주의를 확립하기 위해 일반사면은 거부해야 한다는 위원회의 견해에 동의를 표명했다.
만델라 정부는 국제적으로는 아프리카의 정치·경제 문제와 이른바 '로커비 사건' 등의 굵직굵직한 국제분쟁의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국제적 지위를 전례없이 향상시키는 한편, 국내적으로는 경제에서 흑백차별을 종식하기 위해 노력했다.
노동조합과 흑인 경영자들로 기업을 설립하거나 백인 회사들을 인수하고 인종·성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흑인과 여성의 고용 비율을 각각 75%, 50%로 규정한 새 노동법을 제정했다. 만델라 대통령은 1999년 5월 국민 앞에서 고별식을 가졌다.
1999년 6월 역사상 2번째로 자유총선이 실시되었다. 이 선거에서 지속적인 사회개혁을 위해 단독 개헌선인 267석을 안겨달라고 호소한 ANC는 압승을 거두기는 했으나 단독개헌선에 1석 못 미치는 266석을 획득하는 데 머물렀다. 한편 아파르트헤이트 시기에 집권한 국민당의 후신인 신국민당(NNP)은 이 선거에서 불과 28석을 얻었다.
이어 만델라의 후계자인 타보 음베키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의장 겸 부통령이 차기 대통령에 취임했다.
350년간의 백인의 압제를 끝내고 흑백간의 평화정책에 성공한 만델라 정부에 이어 등장한 음베키 정부는 흑인들의 높은 실업률과 생활고, 주택난, 에이즈와 범죄 등의 산적한 문제를 해결해 인종간의 경제적 평등과 삶의 질을 향상해야 하는 무거운 과제를 안고 있다.
종교
종교 분포는 그리스도교가 전체 인구의 약 80%를 차지하며, 그 외에 무종교 16%, 이슬람교 2%, 힌두교 1%, 토착 신앙 1% 등으로 분류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한국과의 관계
외교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6·25 전쟁 때 연합군의 일원으로 공군 1개 전투비행단과 수송기 7대를 파병해 참전했으며, 이를 기리기 위해 경기도 안성시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참전비를 세웠다. 1978년 이후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차별정책에 대한 UN 제재에 부응하여 모든 공식관계를 단절했다. 공식 외교관계는 만델라 정부가 수립된 이후인 1992년 12월 재개되었다. 양국은 각각 1993년 2월과 3월에 현지 대사관을 개설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친서방과 반공을 대외정책의 기조로 하여, UN 총회에서는 한국에 관한 서방측 안을 적극 지지하고 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1995년 7월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방한해 대통령 김영삼과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 기업의 상호진출 및 교역확대를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합의했으며 1998년 4월에는 음베키 부통령이 방한한 바 있고, 한국에서는 1996년 4월에 공로명 외무부장관과 1999년 2월에 홍순영 외교통상부장관에 이어 1999년 6월에 김종필 국무총리가 만델라 대통령 이임식 및 음베키 신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바 있다. 이후 양국은 장차관급 고위인사의 상호 방문이 이어졌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1995년 7월 넬슨 만델라 대통령이 방한해 큰 환영을 받은 데 이어 1998년 4월에는 음베키 대통령(당시 부통령)이 방한한 바 있고, 한국에서는 공로명 외무장관(1996. 4)과 홍순영 외교통상장관(1999. 2)에 이어 1999년 6월 김종필 국무총리가 만델라 대통령 이임식 및 음베키 신임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한 바 있다.
한편 남아프리카 공화국은 북한과 1998년 8월에 국교를 수립했으며 북한은 2002년 3월에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사관을 개설했고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주 중국 대사관이 겸임하고 있다.
경제·통상·주요 협정
2020년 기준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대한국 수출액은 10억 달러, 수입액은 7억 달러이다. 주요 수출품은 백금, 합금철, 철광 등이고, 주요 수입품은 자동차, 기계, 합성수지 등이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삼성, LG 등 20개 업체 상사가 주재해 있으며,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는 한국 기업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진출 및 상담을 돕기 위해 요하네스버그무역관을 설치했다.
양국이 체결한 협정으로는 항공협정(1995년 7월 발효), 이중과세방지협정(1996년 1월 발효), 투자보장협정(1997년 6월 발효), 과학기술협정(2004년 8월 발효), 원자력협력협정(2011년 2월 발효), 범죄인인도조약(2014년 6월 발효), 형사사법공조조약(2014년 6월 발효) 등이 있다.
문화교류·교민 현황
2019년 기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3,834명의 재외동포가 있으며, 이들 대부분은 하우텡주와 웨스턴케이프에 거주하고 있다. 한국에는 2018년 12월 기준 2,373명의 남아프리카 공화국 국적의 등록외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