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 08. 13.
김응룡(73) 한화 이글스 감독은 지난 8월 3일 마산 NC 다이노스전에서 한국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감독으로서 개인통산 1500승을 올렸다.
김응룡 감독은 뒤에 기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1500승? 그게 뭐가 어렵나. 누구나 감독을 오래 하면 세울 수 있는 기록”이라면서 “우승을 열 번 하면 다 된다”고 했다지만, 그 뒤안길에 어려 있는 땀과 고통, 노력을 간과할 수 는 없다.
김응룡 감독은 해태 타이거즈 시절 단 한 차례도 구단에 자신의 요구조건을 무리하게 내세운 적이 없다. 모기업 해태가 명색이 그룹이긴 했지만 삼성이나 롯데, LG에 비하면 그야말로 보잘 것 없는 규모여서 그런 요구 자체가 받아들여지기도 어려운 형편이었다.
김 감독은 당초 1999년을 마치고 삼성 라이온즈 감독으로 옮길 작정이었다. 시즌 후 삼성 구단 측과 구두 합의를 이룬 상태에서 김응룡 감독의 신변 이상 낌새를 눈치 챈 해태는 박건배 당시 구단주가 나서 설득, 만류하는 바람에 다시 주저앉고 말았다. 그만큼 김응룡 감독은 정리에 약한 사람이었다.
▲ 1988년 해태가 한국시리즈 3연패의 위업을 달성한 후 김응룡 감독과 박건배 구단주 등이 기년 축하연을 갖고 있다. / 일간스포츠 제공.
초창기 해태 구단의 살림살이는 언제나 쪼들렸다. 해태 선수들은 저마다 한국시리즈 우승 훈장을 몇 개씩 달고 있었지만 대우는 늘 기대치에 못 미쳤다. 그래서 연봉 재계약 때마다 해태 주전 선수들은 다른 구단 선수들에 비해 해태 구단과 연봉 실랑이가 더 심했다. 그런 척박한 환경 속에서 김응룡 감독은 개성 강한 선수들의 불만을 어르고 달래거나 때로는 카리스마를 내세워 진압하는 강수를 둘 수밖에 없었다. 현장도 마찬가지였다. 호남의 프로야구단을 이끄는 수장으로 그는 ‘황야의 이리’처럼 거칠고 강하게 처신했다.
김응룡 감독은 삼성 라이온즈 사장이었던 지난 2005년 가을, “해태 시절 외압으로 우승을 놓칠 뻔한 적이 있다”고 술회했다. ‘승부는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틈새를 보여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그 같은 옛 일을 예로 들어 말했다.
김 사장이 해태 타이거즈 감독을 맡고 있던 1988년, 해태는 빙그레 이글스(한화 전신)와의 한국시리즈에서 광주 1, 2차전에 이어 대전 3차전을 내리 이겨 3연승을 거두었다. 한 판만 더 따내면 해태가 한국 프로야구 사상 처음으로 3연패와 통산 4차례 우승을 이룩할 수 있는 문턱에 서 있었다.
그 해 10월23일 대전 4차전을 앞두고 당시 해태 그룹 강남형 부회장과 해태 구단 노주관 사장, 심지어 한국야구위원회(KBO) 이용일 사무총장까지 나서서 넌지시 또는 노골적으로 ‘기왕이면 관중이 많은 서울에 가서 우승 헹가래를 받는 게 좋지 않겠나’라며 김 감독에게 양보를 종용했다는 것이다.
주위의 ‘외압’에 고민을 거듭하던 김 감독이 마지못해 수락 의사를 밝혔다. “겉으로는 좋다고 해놓고 경기를 이겨버리면 그만이지”라고 김 감독은 속셈을 하며 4차전에 나섰으나 웬걸, 3-14로 대패한 데 이어 잠실구장으로 옮겨 치른 5차전까지 2-6으로 내줘 연패 당하고 말았다.
당시 분위기는 ‘선동렬’이라는 국보급 투수를 보유하고 있던 해태의 우승은 ‘떼어 논 당상’처럼 여겨졌으나 승부의 흐름이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공교롭게도 1차전에서 삼진 14개(한국시리즈 한 경기 최다 탈삼진 기록)를 잡아내며 역투한 선동렬이 손가락 부상으로 도저히 출장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해태 구단 고위 관계자들은 물론 KBO 관계자들도 사색이 됐다. 다행히 해태에는 문희수라는 새 얼굴이 있었다. 문희수는 1차전에서 오른손 중지에 물집이 잡혀 강판한 선동렬의 뒤를 받쳐 세이브를 따냈고 3차전 완봉승에 이어 6차전에서 1실점 완투승을 올리며 팀 우승을 매조지 했다. 한국시리즈 MVP도 당연히 그의 몫이 됐다.
어디까지나 가정이긴 하지만 ‘만약 문희수라는 돌출 투수가 없었더라면 ’해태 우승은 물 건너가고 KBO는 엄청난 파문에 휩싸였을 것이다. 그 시리즈를 마친 후 이용일 사무총장은 김응룡 감독에게 ‘다시는 그런 부탁을 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다는 후일담이 남았다.
1983년은 김응룡 감독이 해태 타이거즈 지휘봉을 잡은 첫 해였다. 해태는 전반기에 삼미 슈퍼스타즈와 1, 2위 경쟁을 벌였다. 치열한 쟁투의 흐름 속에서 6월 14일, 김응룡 감독은 그예 일을 저질렀다. 1500승의 이면에 드리우고 있는 그 지난한 세월의 한 자락을 펼쳐보자.
김진영 삼미 감독이 구속에서 풀려난 지(6월 11일) 사흘 뒤였다. 그날 해태는 대전구장에서 열렸던 OB 베어스와의 원정경기에서 8회 말 2사까지 5-1로 앞서 있다가 OB의 추격을 허용, 5-5로 동점이 됐다. 해태는 그러나 9회 초 무사 만루를 만들고 서정환의 2타점 적시타, 김준환의 3타점 3루타 등으로 대거 6점을 보태 11-5로 경기는 이겼다.
사단은 경기 후에 벌어졌다. 그 경기 1회 초 이일복 3루심이 재일교포 포수 김무종의 좌월 2점 홈런성 파울타구를 홈런으로 선언했다가 파울로 번복 판정한 것이 김응룡 감독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다. 김무종의 타구가 외야 왼쪽 펜스를 넘어가자 김옥경 구심은 파울을 선언했으나 이일복 3루심은 홈런 신호를 보내 혼선을 빚었다. 그때 OB 선수들이 3루심에게 달려가 항의, 4심 합의 끝에 파울로 결론을 냈다. 당연히 김응룡 감독이 따졌지만 판정은 더 이상 번복되지 않았다. 그 소동으로 경기가 10분간 중단됐다.
김응룡 감독은 경기가 끝난 다음 밤 10시 10분께 심판실 문을 박차고 쳐들어가 김옥경 주심의 멱살을 틀어쥐고 흔들면서 철제의자를 던지는 등 분노를 표출했다. 그 장면을 지켜본 OB 구단 관계자가 경찰에 슬며시 신고하는 바람에 급기야 김 감독은 대전경찰서에 연행, 조사를 받고 유치장에 수감되기에 이르렀다.
이용일 초대 KBO 사무총장은 지난 2003년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백구와 함께한 60년’이라는 회고를 통해 그 사건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그때 회고담을 잠시 인용해보자.
“김진영 삼미 사건으로 곤욕을 치르고 나자 사회정화위원회의 심기를 건드려서 좋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운동장에서의 폭력 사고나 거친 행동에 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중략)
그날 경기는 OB와의 낮 경기였다. 해태는 에이스 이상윤을 내세워 7회까지 5-1로 여유 있게 앞서다가 8회 말 석연찮은 판정으로 5-5 동점이 됐다. 해태로서는 다행스럽게도 9회 초 OB 마운드가 무너지며 6점을 뽑아 11-5로 이겼지만 경기가 끝나자 김응룡 감독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김 감독은 심판실로 찾아가 문을 발길로 걷어차고, 심판실 안의 집기를 부수며 행패를 부렸다. 당시 나는 KBO 사무실에 있다가 오후 5시쯤 전화로 연락을 받았다. ‘김응룡 감독이 대전경찰서로 연행됐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속으로 ‘아이쿠!’하며 부리나케 정화위원회로 달려갔다. 그리고 사정을 했다. (중략)
말이 오고가는 가운데에서도 어떻게 이런 일까지 경찰에서 알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나중에 들어보니 당황한 홈구단 OB의 직원이 경찰에 신고를 했다는 것이다.”
이용일 전 사무총장은 회고록에서 ‘낮 경기’로 기억하고 있지만, 실제론 밤 경기였다. 그는 최근 그 사건을 돌아보면서 이렇게 회상했다.
“내가 정화위원회 관계자를 설득한 뒤 그 앞에서 대전 경찰서장에게 전화해서 짐짓 화를 내는 척하며 김응룡 감독을 광주로 내려가게 하지 말고 서울로 나한테 오게 해라. 단단히 혼을 내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김응룡 감독은 자정이 가까운 밤 11시 반께 얼굴 핼쑥해 져서 서울로 올라왔다. 대전 경찰서장이 ‘빨리 이 총장한테 올라가보시오’라고 했으니 안 올 수가 있나. 둘이서 술 한 잔을 했다. 그 자리에서 아마도 내가 ‘다시는 그런 일이 없도록 해라. 정화위원회가 올림픽 앞두고 대통령이 직접 오더를 내려 신경을 쓰고 있다. 올림픽까지는 조용히 해야 한다. 2차로 걸리면 내 힘으로 안 된다’는 뭐, 그런 얘기까지 했을 것이다.”
검찰은 6월 19일에 김응룡 감독을 벌금 50만 원에 약식기소 했다. 한국야구위원회(KBO)도 자체 상벌위원회를 열고 제재금 50만 원과 3게임 출장정지 징계를 내렸다.
검찰은 김응룡 감독의 사건 처리를 놓고 수위조절에 고심했다. 김진영 감독이 구속됐다 풀려난 지 불과 나흘 만에 일이 터져 검찰 내부에 강경한 목소리가 없지 않았다. 김진영 삼미 감독 사건 때 구속지시를 내렸던 김석휘 당시 검찰총장은 선뜻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대검 간부들과 실무진의 의견을 일일이 물어봤다. 검찰 일각에서는 김진영 감독이 석방된 직후에 다시 사건이 발생했다는 점을 들어 폭행의 정도에 상관없이 더욱 엄중하게 처리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김진영 감독이 구속 됐을 때 프로야구 구단주들과 KBO가 나서서 선처를 바라고 자체 정화를 결의했는데 또 비슷한 사건이 생겼는데 가볍게 처리하면 검찰의 위신이 서지 않는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김응룡 감독의 일은 김진영 감독 사건과는 달리 ‘관중이 목격하거나 TV에 중계된 것이 아닌데다 폭행이라고 하기에는 가벼운 실랑이 수준이었다는 점을 감안해 불구속 처리키로 했다는 것이다.
당시 대검의 한 간부는 “여러 가지 요인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이번 사건은 ‘안방폭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논평했다는 후문도 있었다.
김응룡 감독은 그 사건에 앞서 5월 12일에는 장명부 삼미 투수의 빈볼을 둘러싸고 이일복 주심에게 강하게 항의하다가 첫 퇴장을 당하기도 했다. 승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판정 하나라도 지나치지 않고 민감하게 반응, 거칠게 대응하던 것이 그 무렵 그라운드의 풍경이었다.
김응룡 감독의 수난 속에 해태는 6월26일로 마감한 전기리그에서 결국 삼미를 2.5게임차로 따돌리고 30승 1무 19패(승률 .612)로 1위를 확정지었다. 그해 해태는 후기 1위 MBC와 한국시리즈(당시 한국시리즈 명칭)를 치러 4승(1무)로 첫 정상에 올랐다.
홍윤표 선임기자
자료출처 : OSE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