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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장 세례인 요한과 예수의 탄생 예고와, 마리아의 찬가 및 세례인 요한의 출생과 사가랴의 찬가
구속사적 개관
누가복음의 제일 첫 장인 본장은 넓게는 1:1-4:13까지의 예수의 공생애 개시 이전 사건들에 대한 기사의 시작부분이다. 또한 좁게는 1:1-2:52까지의 예수의 탄생 및 유년 시절 기사의 시작부분이기도 하다.
주지하다시피 사복음서는 예수께서 우리의 구주(救主)되시는 진리를 서로 다른 측면에서 4중으로 조명하고 있다. 요약하자면 마태는 구약에서 예언되고 약속된 메시야(Messiah)로서 새로이 천국구원(天國救援)에 대한 새 약속인 신약을 주신 메시야로서의 예수를 강조한다. 그리고 마가는 죄인된 우리의 구원(salvation)을 위하여 애쓰시며 고난받으신 능력과 사랑의 종으로서의 예수를, 나아가 요한은 본래 제 2위 성자(聖子) 하나님 곧 하나님의 아들이셨으나 죄인된 인간을 위하여 구속(救贖)의 법을 직접 성취하신 제 2위 하나님으로서의 예수를 강조하고 있다. 한편 본서의 저자 누가는 예수께서 역사상 유일하게 완전한 인간(入間) 즉 죄와 그 결과로 오염되지 않은 완전한 인간으로서는 유일한 자로서, 그와 달리 죄에 오염된 불완전한 인간인 우리 모두를 위하여 구속희생하사 결국 자신을 믿고 죄를 회개하는 자들은 창조 당시의 완전한 인간의 상태로 회복시켜 결국 구원을 주시는(롬 8:19-21)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누가는 이런 동기에서 다른 그 어떤 복음서보다도 사회적 . 종교적 제반 상황에 처한 불완전한 인간의 모습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
역으로 말하자면, 불완전한 인간이 처한 사회적, 종교적 모순과 질고(疾苦)에 다른 복음서들보다 더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갖고 있다. 이렇듯 스스로 완전하신 유일한 인자요 불완전한 우리를 완전케 하는 인자(人子)로서의 예수에 대한 강조는 본서 곳곳에서 발견되어지며 이는 예수의 탄생과정을 보도하는 제 1,2 두 장에서도 발견된다. 즉 제 1,2 두 장은 결국 예수의 탄생과정을 보도하면서 예수가 흠 없는 유일한 인자로 태어나게 된 사실을 집중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문맥의 누가복음을 개시하는 본장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1-4절은 누가복음 전체의 기록동기와 기본적인 편집 원칙을 밝히는 소위 서론(序論)이다. 다음 5-25절은 예수의 선구자인 세례인 요한의 어머니, 엘리사벳의 특이한 잉태에 대한 예언과 이의 성취에 대한 보도이다. 다음 26-38절은 동정녀(童貞女)로서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한 마리아에게 주어진 예수의 탄생 예고를, 39-56절은 처녀의 몸으로 수태하게 된 마리아가 자신의 친척이면서 동시에 장차 자신이 낳을 예수의 선구자가 될 세례인 요한을 잉태한 엘리사벳을 방문하여 성령(the Holy Spirit)에 감동된 엘리사벳으로부터 자신의 수태가 하나님의 구속사적 섭리에 의해 이루어진 것임을 확인하고 여호와를 찬양한 소위 '마리아의 찬가'(Mainpast)를 기록하고 있다. 이어57-80절은 세례인 요한의 탄생 기사와 세례인 요한의 사역에 대한 예언의 내용을 담은 요한의 부친 사가랴의 찬가(Benders)를 기록하고 있다.
먼저 1-4절의 저자 누가가 자신이 복음서를 집필하게 된 동기와 기본적인 편집 원칙을 밝힌 서론을 구속사적으로 개관할 때에 특히 다음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누가는 여기서 자신을 주의 복음을 처음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자로 소개하고 있다. 이는 자신이 집필한 복음서가 자세하고 치밀한 통찰과 숙고를 통하여 된 것으로서 신빙성이 있음을 강력히 주장한 것이다. 또한 저자는 모든 일을 차례대로 써 보내겠다고 말하고 있다. 알다시피 저자 누가는 이 누가복음에 이어 사도행전까지 집필한 사람이다. 그리하여 누가는 복음(Gospel)의 실체 그 자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아울러 그로 인해 태동(胎動)된 초대 교회의 역사까지 즉 주의 복음의 첫 결실까지 기록한 결과가 되었다. 그리하여 누가는 주의 복음과 이의 확장을 가장 객관적이고 체계적으로 그리고 역사순으로 집필하게 되었다. 끝으로 저자는 본서의 집필동기가 본서의 1차 독자인 당시의 고관 데오빌로와 그 측근들에게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하기 위한 것임을 밝히고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는 본서의 영원한 독자인 오고 오는 시대의 성도 모두의 신앙의 확신을 위해 집필된 것임을 밝힌 것이라 하겠다.
이제 이런 서론을 종합하면 예수님의 지상 사역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초대 교회 격동기의 사람으로서, 더욱이 지성과 덕망을 갖춘 의사요 전도자로서 복음의 실체요 기원인 주의 생애와 주의 복음이 열매 맺기 시작하는 과정인 초대 교회 역사까지 차례대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기록한 누가의 기록은 신빙성이 있는 것이며 우리에게 주의 복음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를 줌과 아울러 그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을 새로이 갖게 해주는 책임을 누가복음 초두(初頭)에서 확인시켜 주고 있다 하겠다. 실로 이런 믿음의 선배들의 기록을 통해 주를 믿는 우리의 신앙은 진실된 것이다.
다음 5-25절의 예수의 선구자 세례인 요한의 탄생예언은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에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먼저 본문은 예수의 선구자에 불과한 세례인 요한 조차도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에 의한 이적적 과정을 거쳐서 그리고 또한 구약 예언 성취(17절; 말 3:1; 4:6)로서 탄생한 특이한 존재임을 보여 준다. 이것은 궁극적으로는 세례인 요한이 예표한 실체이신 예수님은 태초부터 종말까지 모든 구속사(救讀史)를 다 계획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의하여, 또 그 역시 직접적으로도 구약 예언의 성취로 탄생한 존재로서 실로 절대 완전한 인간임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로 신약을 새로 여신 예수의 선구자였던 세례인 요한은 결국 구약을 마감한 인물이었다(마 11:13,14). 이런 세례요한이 예수의 존재와 사역에 대하여 증거하고, 백성들을 주의 오심(The Lord's Coming)을 향하여 예비시키는 사역을 감당한 것은 구약은 그 자체로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오직 신약의 예표요 전 단계로서의 가치만 갖는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한 신약은 어느 날 갑자기 개시된 것이 아니라 태초부터 있었던 구약의 연속으로 개시된 것이며 또 종말까지 진행될 것인바 결국 태초부터 종말 모두가 신약과 구약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약속과 그 성취를 핵심으로 하는 구속사의 연속된 장(場)인 것을 깨닫게 해준다.
다음 서로 이어지는 두 단락 곧 마리아를 향한 천사 가브리엘(Gabriel)의 예수의 수태 및 탄생에 대한 고지(告知)를 보도하는 26-38절과 마리아가 자신이 잉태한 예수의 선구자 곧 세례인 요한을 그 역시 이적적 과정을 통하여 잉태한 엘리사벳을 방문하고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말한 내용(39-45절)을 통해 다시금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구약에 약속된 다윗의 자손 메시야로서 장차 많은 사람을 구원할 구주(The Saviour)를 성령으로 잉태하였음을 거듭 확신하고 소위 마리아의 찬가(Magnificat)를 올린 사실(46-56절)을 보도한 39-56절은 부분 부분이 모두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전체적으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왜 굳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께서 성육신(Incarnation)하여 인간으로 나셔야 했는가 그리고 또 왜 굳이 동정녀 탄생이라는 비상한 방법으로 성육신 하셔야 했는가 하는 사실에 대한 구속사적 이해라 하겠다.
태초에 하나님은 자유의지를 가진 전 피조물(被造物)의 대표인 인간과 에덴 동산에서 선악과 언약(Covenant)을 맺으면서 이를 어길 경우 필히 죽을 것이고 이를 지킬 때에만 생명을 보장해 주기로 약속하셨다(창 2:17). 그런데 인간은 이를 어겼다. 따라서 인간의 죽음은 필연적이었다. 하나님은 절대 거룩한 분이시므로 그분이 세운 언약의 법(法)도 절대적으로 준수되어야 했다. 이에 하나님은 그 법 자체는 일단 지켜서 인간이 지은 죄의 책임은 물으시면서도 그 죄를 범한 인간 자체만은 죄를 회개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다시금 영생(Eternal Life)을 얻을 새 기회를 주시기 원하셨다. 따라서 하나님은 다른 존재가 인간을 대신하여 죽어 언약의 법에 따라 요구되던 죄의 대가를 치루는 대신 인간은 회개하면 다시 구원을 얻을 수 있는 이른바 구속(redemption)의 원리를 인간의 범죄 이후 새로 세우셨다. 그런데 그 대속(代贖) 희생을 할 자는, 즉 사람의 죄를 대신 질 회생자의 자격은 먼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은 흠이 없어서 전적으로 타인의 죄를 담당할 수 있도록 완전한 인간이어야 했고, 또 반대로 인류에게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를 보증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자신이셔야 했다.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서 양쪽 모두에게 완전한 중보자(仲保者)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인 동시에 인간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먼저 인간인 자가 하나님이 될 수는 없는 것이었으므로, 먼저 하나님이신 분이 완전한 인간이 되사 중보자로서 구속 사역을 감당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삼위 하나님중 제 2위이신 성자께서 성육신하사 하나님(신성)인 동시에 인간(인성)이 되어 대속 희생을 치루셔야만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의 성육신과 십자가 구속 희생 수난에 담긴 하나님의 구속의 원리는, 당신의 법을 세우시려는 공의(公義)와 죄인을 살리시려는 사랑의 원리가 오묘하게 조화된 결과였다. 또한 그 옛날 구약의 동물 희생 제사는 그 자체가 구속의 효력이 있던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신약의 예수 대속 회생을 예표하기 위한 것이었다. 즉 구약의 동물 회생 제사는 미래 예수의 구속사역과의 관련성 안에서만 구속의 효력을 소급 적용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제 이런 원리로 본래 절대 영(Spirit)이신 제 2위 성자께서 사람의 육신까지 입으셔야만 하는 성육신의 필연성을 실현시키셔야 했다. 그런데 이때 만약 일상적인 남 ․ 녀의 성관계를 통하여 성육신 탄생할 경우에는 그 과정에서 태초에 범죄한 아담의 원죄(原譯)를 물려받게 되므로 예수의 무죄성이 훼손되어 결국 성육신하신 예수의 구속주(救贖主)로서의 절대적 자격이 상실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취하신 방법이 바로 성령(The Holy Spirit)을 통한 동정녀 잉태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처럼 엄정(嚴正)한 원리에 의한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세속 신화의 터무니없는 영웅설화가 아니라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이 또한 역으로 모든 구속사는 어느 한 사건도 결코 우연이나 제 스스로의 원리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한 번 정하신 구속의 원리와 계획대로 엄정히 진행되는 것임을 깨닫게 해주며 이를 정확히 보여 주는 성경의 무오성(無誤性)에 새삼 신뢰를 갖게 한다.
끝으로 이제 천사가 전날 예언한 대로 이적적으로 수태된 세례인 요한의 출생 사건을 보도한 57-66절과 이에 이어지는 사가랴의 찬가를 기록한 67-80절이 갖는 구속사적 의의를 개관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우리는 그 옛날 사가랴가 천사로부터 처음 세례인 요한의 탄생 예고를 듣던 때와 달리 이제 10개월이 지나 세례인 요한의 탄생을 목도하고 난 다음에는 아기 세례인 요한에 대한 작명(作名) 그리고 그의 찬양의 내용에서 드러나듯이 세례인 요한의 출생과 관련된 하나님의 구속사적 뜻을 온전히 깨달았음을 발견한다. 이는 인간의 지혜로는 구속사(redemptive heists)의 진리를 깨달을 수 없으며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자만이 구속사의 진리를 깨달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고전 1:25).
또한 사가랴도 밝히 깨닫고 찬양한 대로 세례인 요한의 출생은 전 우주적 구원자이신 메시야의 등장 그리고 그가 세울 평화의 나라 곧 천국의 태동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그 역시 사가랴가 노래한 대로 모두 다 옛적에 주어진 언약의 성취였다. 실로 하나님은 한번 주신 언약을 모두 다 기억하시고 성취해 주신자. 이는 결국 구약의 약속들을 예수를 통해 성취한 하나님은 예수께서 주신 신약의 여러 구속사적 언약들 곧 천국 구원으로 최종 실현될 모든 신약의 언약들도 분명히 성취해 줄 것을 깨닫게 해준다. 한편 사가랴는 자기 아들인 세례인 요한의 구속사적 사명에 대해서까지 자세한 깨달음을 피력하고 있다(76-79절). 이는 태초부터 종말까지 이어지는 구속사의 실체를 깨달은 자는 그 안에서의 각자의 위치와 사명까지도 바르게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이 시간 나는 구속사외 흐름 중 어디에서 어떠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 끼를 새삼 묵상해 보자!
외울 말씀
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눅 1:68,69)
머리말
1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2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꾼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3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4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
세례 요한의 수태 예언
5 ○ 유대 왕 헤롯 때에 아비야 반열에 제사장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사가랴요 그 아내는 아론의 자손이니 이름은 엘리사벳이라
6 이 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의인이니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하더라
7 엘리사벳이 수태를 못하므로 저희가 무자하고 두 사람의 나이 많더라
8 ○ 마침 사가랴가 그 반열의 차례대로 제사장의 직무를 하나님 앞에 행할새
9 제사장의 전례를 따라 제비를 뽑아 주의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10 모든 백성은 그 분향하는 시간에 밖에서 기도하더니
11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향단 우편에 선지라
12 사가랴가 보고 놀라며 무서워하니
13 천사가 일러 가로되 사가랴여 무서워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15 이는 저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저희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니라
17 저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앞서 가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예비하리라
18 사가랴가 천사에게 이르되 내가 이것을 어떻게 알리요 내가 늙고 아내도 나이 많으니이다
19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이 좋은 소식을 전하여 네게 말하라고 보내심을 입었노라
20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
21 백성들이 사가랴를 기다리며 그의 성소 안에서 지체함을 기이히 여기더니
22 그가 나와서 저희에게 말을 못하니 백성들이 그 성소 안에서 이상을 본 줄 알았더라 그가 형용으로 뜻을 표시하며 그냥 벙어리대로 있더니
23 그 직무의 날이 다 되매 집으로 돌아가니라
24 ○ 이 후에 그 아내 엘리사벳이 수태하고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으며 가로되
25 주께서 나를 돌아보시는 날에 인간에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이렇게 행하심이라 하더라
천사 가브리엘의 예수 수태 고지
26 ○ 여섯째 달에 천사 가브리엘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들어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27 다윗의 자손 요셉이라 하는 사람과 정혼한 처녀에게 이르니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28 그에게 들어가 가로되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시도다 하니
29 처녀가 그 말을 듣고 놀라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생각하매
30 천사가 일러 가로되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께 은혜를 얻었느니라
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32 저가 큰 자가 되고 지극히 높은신 이의 아들이라 일컬을 것이요 주 하나님께서 그 조상 다윗의 위를 저에게 주시리니
33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 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36 보라 네 친족 엘리사벳도 늙어서 아들을 배었느니라 본래 수태하지 못한다 하던 이가 이미 여섯 달이 되었나니
37 대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38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니라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
39 ○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 한 동네에 이르러
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41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42 큰 소리로 불러 가로되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43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 된 일인고
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에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45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
46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47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48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대대로 이르는도다
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52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53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긍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55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56 마리아가 석 달쯤 함께 있다가 집으로 돌아가니라
세례 요한의 탄생
57 ○ 엘리사벳이 해산할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으니
58 이웃과 친족이 주께서 저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을 듣고 함께 즐거워하더라
59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60 그 모친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라 요한이라 할 것이라 하매
61 저희가 가로되 네 친족 중에 이 이름으로 이름한 이가 없다 하고
62 그 부친께 형용하여 무엇으로 이름하려 하는가 물으니
63 저가 서판을 달라 하여 그 이름은 요한이라 쓰매 다 기이히 여기더라
64 이에 그 입이 곧 열리고 혀가 풀리며 말을 하여 하나님을 찬송하니
65 그 근처에 사는 자가 다 두려워하고 이 모든 말이 온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매
66 듣는 사람이 다 이 말을 마음에 두며 가로되 이 아이가 장차 어찌 될꼬 하니 이는 주의 손이 저와 함께 하심이러라
사랴가의 찬양 노래
67 ○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68 찬송하리로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그 백성을 돌아보사 속량하시며
69 우리를 위하여 구원의 뿔을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70 이것은 주께서 예로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으로 말씀하신 바와 같이
71 우리 원수에게서와 우리를 미워하는 모든 자의 손에서 구원하시는 구원이라
72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그 거룩한 언약을 기억하셨으니
73 곧 우리 조상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맹세라
74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75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도다
76 이 아이여 네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일컬음을 받고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77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
78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을 인함이라 이로써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79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고 우리 발을 평강의 길로 인도하시리로다 하니라
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본문 & 자료노트
도표-1:1-4 누가의 위대한 점
본문은 본서 전체의 서문으로서 저자인 누가의 본서를 기록하는 목적이 서술 되어 있다. 본문을 통해 우리는 저자 누가의 성격 및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이에 본문과 신약 성경에 나타난 누가의 위대한 점 7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 치밀하고 주의 깊은 성격 (눅 1:2-4) |
2 | 예수님에 대한 관심과 사랑(눅 1:2-4) |
3 | 뛰어난 문장력과 저술 능력(눅 1:3) |
4 | 약자들에 대한 사랑(눅 11:5-13) |
5 | 바울에 대한 신의(행 16:10-17) |
6 | 자신의 임무에 충실함(딤후 4:11) |
7 | 자신을 드러내지 알는 겸손(몬 1:24) |
보감-1:5. 사가랴의 5가지 실수 본장 연구자료 참조
주요주제 -1: 5 신약 시대의 역사적 배경 본서 14전 신약 총론 참조
보감-1:8-23 사가랴의 5가지 실수
1 |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 없이 믿지 못함(막 11:23) |
2 | 기도한 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지 못함(막11: 24) |
3 |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을 깨닫지 못함(눅1:13.18) |
4 | 하나님의 말씀보다 인간적인 생각을 앞세움(눅 1:17) |
5 |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깨닫지 못함(엡 1:11) |
도표-1:5-25 세례인 요한의 탄생과 관계된 사실들
그리스도의 선구자인 요한은 하나님에 의해 파송된 자로서 회개의 물 세례를 베풀고 메시야의 오심을 미리 전하여 메시야의 사역을 준비했다. 더욱이 이러한 사역을 담당한 세례인 요한은 그의 이적적 탄생에서부터 그리스도의 이 적적 탄생을 예표했다. 한편 세례인 요한과 관계된 전반적인 사실은 막 1장, 눅 3장 연구 자료를 참조토록 하고 여기서는 세례인 요한의 탄생과 관계된 사실 7가지만 모아보면 다음과 같다.
1 | 구약에서의 예언 성취로 탄생함(말 3:1) |
2 | 부모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탄생함(눅 1:13) |
3 | 무자(無子)하던 부모에게 기쁨이 됨(눅 1:14) |
4 | 많은 백성들에게도 큰 기쁨이 됨(눅 1:14) |
5 | 백성들을 하나님에게로 인도할 자로 태어남(눅 1:15-17) |
6 | 이웃과 친족의 축복 속에 탄생함(눅 1:58,59) |
7 | 백성들에게 메시야의 도래를 예고할 자로 태어남(눅 3:3-6) |
보감-1:8-19 하나님께 대한 천사의 사역
1 | 하나님을 경배(느 9:6; 히 1:6) |
2 | 하나님을 찬양(시 104: 눅 2:13) |
3 | 하나님의 뜻을 전달(눅 1:19,28) |
4 | 하나님께 봉사(시 103:20,21) |
5 |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왕하 19:35) |
인물연구-1:13-17 예수의 선구자 세례인 요한 본권 눅 3장 연구자료 참조
보감-1:26-56 마리아의 위대한 믿음
1 | 인간의 이성보다 하나님의 능력을 더 신뢰한 믿음(34-38절) |
2 | 사람 앞에서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하나님의 뜻을 좇은 믿음(34절) |
3 | 하나님의 뜻에 즉각적으로 순종한 믿음(38절) |
4 |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내어 맡긴 믿음(37절) |
5 | 하나님을 기뻐하고 찬양을 돌림(47,47절) |
6 |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춘 겸손한 믿음(48절) |
7 | 하나님의 능력을 절대적으로 확신한 믿음(49-55절) |
신학용어-1:30-35 동정녀 탄생(Virgin Berth)
기독교의 최대 이적 사건은 바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다.
더 나아가 이 사건은 근본 초월자이신 하나님, 곧 제 2위 성자께서 성육신(Incarnation)하사 택한 죄인의 구속을 위한 구속주(救贖主)로서 인류의 역사에 개입하시기 위해 오신 사건으로서 인류 역사상 가상 위대한 사건(The Great Event)이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이 발생한 방법, 혹은 그 성격은 믿음으로 그냥 받아들이지 않는 한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것들이다. 이에 흑자들은 동정녀 탄생사건에 대해 순진한 대중들을 현혹하기 위해 기독교가 조작해낸 거짓 이야기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예수의 동정녀 탄생은 인류의 구속의 종교인 기독교 신앙의 정수(精髓)를 이루는 사건이며 분명 역사적인 사건이다. 진정 이 사건이 없었다면 기독교가 역사상 존재 할 수 없었을 것이며, 또한 인류 구속의 소망도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올바른 기독교 신앙의 정립을 위해서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에 대한 바른 이해가 절대적으로 요청된다 하겠다.
1. 정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다같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에 의해 사내를 알지 못하는 처녀 마리아의 몸을 통해 탄생 하셨다고 증거하고 있다(마 1:18-25; 눅 1:30-35) 이를 일컬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Virgin Birth of Jesus Christ)이 라 한다. 그런데 왜 이를 '초자연적인 탄생', 혹은 '기적적인 탄생'이라 하지 않고 유독 '동정녀 탄생'이라고만 일컫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나 세례인 요한의 기적적인 탄생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즉 이삭과 세례인 요한의 탄생도 초자연적인 이적적 탄생이긴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남자와 여자의 육체 관계를 통한 탄생이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으로 잉태되었고, 한 번도 사내와 육체 관계를 갖지 않은 처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은 육적(肉的) 아버지가 없었으며, 심지어 육적 어머니의 능력에 의해서도 아닌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 탄생인 것이다. 따라서 '동정녀 탄생이란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독특성을 가장 잘 반영하는 신학 용어인 것이다.
2. 동정녀 탄생의 필연성
혹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동정녀의 몸에서 탄생하실 필요가 있었는가 ? 모든 일각들과 동일하게 정상적인 남녀 관계를 통하여 탄생할 수도 있지 않았는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동정녀 탄생을 하셔야만 했다. 그것은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구속주로서의 자격을 온전히 갖추기 위해 절대 필요한 것이었다. 최초 인간 아담이 하나님과의 선악과 언약을 범하였을 때 아담은 그 언약을 어기면 죽음을 당한다는 규정에 따라 반드시 죽어야 했었다. 그러나 절대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세우신 언약의 법은 반드시 준수하시면 서도 인간 자체만은 살리시는 새로운 구속의 법을 세우사 다시금 인간으로 하여금 영생(eternal life)을 얻을 새 기회를 허락하셨다. 즉 인간으로 하여금 죄에 대한 책임을 지게 하면서(공의), 죄를 범한 인간 자체만은 살리시는(사랑), 대속의 법을 세우신 것이다. 다시 말해 마땅히 자기 죄로 인해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들을 대신하여 다른 존재로 그 죄 값을 담당하게 하시는 대속의 법을 세우신 것이다. 그런데 그 대속자의 조건은 먼저 아담의 원죄를 물려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죄를 범하지도 않은 완전한 인간이어야 했다. 또한 인류에게 자신의 대속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를 보증할 수 있는 자이기 위해서는 스스로 죄용서의 권세를 가진 하나님 자신이어야 했다. 그런데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자 하나님은 될 수가 없는 것이므로 하나님이신 분이 인간이 되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하여 삼위 하나님 중 제 2위이신 성자께서 성육신(成肉身)하사 대속희생을 치루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때 성자께서 성육신 하시는 방법으로서 만약 정상적인 남녀의 성관계를 통하여 탄생하실 경우에는 그 과정에서 아담의 원죄를 물려받게 되어 대속자로서 무흠해야 한다는(벧전 1 :19) 조건을 상실하게 된다. 그리하여 하나님 앞에서 완전한 인간이 되어 인류를 위한 구속 사역을 담당해야 했던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필연적으로 인간의 원죄와 무관한 동정녀 탄생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3. 의의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사건은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초월자이며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사 피조계로 들어오신 인류 역사상 최대의 사건(The Great Event)이다. 따라서 이 사건이 우리에게 주는 의의는 매우 심오하고 또 무궁무진한 바 그 핵심적인 몇 가지 사실들만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성실하심을 증거한다. 선악과 언약의 파기로 마땅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인류에게 새로운 삶의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새 구속의 법을 세우신 사실, 그리고 그 구속의 법과 원리에 대해 창 3:15의 원시 복음(原始福音, 창 3장 자료노트 참조)을 주신 이래로 계속해서 약속과 예언의 말씀을 주시고 결국 그것을 성취하신 사실이 이를 증거한다 하겠다.
②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과 함께 하나님의 태초 천지 창조 사역에 버금가는 재창조(再創造, 사 43장 자료노트 참조) 사역이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즉 그리스도는 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피조물이 원창조(原創造)의 목적에서 이탈된 것을 회복케 하시기 위하여 성육신하사 이 땅에 오신 것이다(롬 8 :19-23). 이를 위해 그리스도는 첫 인간 아담과는 다른 방법으로, 즉 성령의 능력에 의한 동정녀 탄생을 하셨고, 이러한 피의 탄생이 새로운 시작. 인류와 온 피조계의 새로운 출발 신호가 된 것이나.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하신 것이다(고후 5:17).
③ 하나님이 영원히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심의 증보를 주셨음을 보여 준다. 일찍이 이사야 선지자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첫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고 예언했다. 그리고 마태복음 기자도 이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이 하나님이 영원히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심의 증표가 됨을 암시 적으로 증거하였나(마 1:22.23)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직접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요15 : 4)고 자주 말씀하신 사실 등이 이를 증거한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은 온 인류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고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 거함을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증표로서,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약 33년간의 기간 동안 인류와 함께 하신 사건의 시발점인 것이다.
도표-1:5-80 본서에만 기록된 기사들
1 | 세례인 요한의 탄생 예고(1:5-25) |
2 | 예수의 동정녀 탄생 예고(1:26-38) |
3 | 마리아의 엘리사벳 방문(1:39-45) |
4 | 마리아의 찬가(1:46-56) |
5 | 세례인 요한의 탄생, 유년기(1:57-66) |
6 | 사가랴의 찬가(1:67-80) |
7 | 로마 황제의 호적령(2:1-4) |
8 | 천사들의 예수 탄생 공포(2:8-14) |
9 | 목자들의 아기예수 경배(2:15-20) |
10 | 예수의 할례(2:21-24) |
11 | 시므온, 안나의 예수 증언(2:25-38) |
12 | 예수의 유년시절(2:40-51) |
13 | 베드로의 고기잡이 기사(5: 1-11) |
14 | 나인 성 과부의 아들 소생(7:11-17) |
15 | 예수의 제2차 갈릴기 전도(8:1-3) |
16 | 70인 제자 파송(10:1-24) |
17 |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10:25-37) |
18 | 밤중에 찾아온 친구 비유(11:5-8) |
19 | 어리석은 부사 비유(12: 13-21) |
20 | 안식일에 병든 여인치유(13:10-21) |
21 | 안식일에 고창병자 치유(14:1-6) |
22 | 천국의 큰 잔치 비유(14:15-24) |
23 | 잃은 양의 비유(15:1-7) |
24 |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15:8-10) |
25 | 탕자의 비유(15:11-32) |
26 | 불의한 청지기 비유(16:1-13) |
27 |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16:19-31) |
28 | 열 문둥병자 치유(17:12-19) |
29 | 끈기있는 과부의 비유(18:1-7) |
30 |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18:7-14) |
31 | 세리장 삭개오의 구원(19:1-10) |
32 | 열 므나의 비유(19:11-27) |
33 | 헤룻의 예수 심문(23:8-12) |
34 | 십자가상의 회개한 강도(23:39-43) |
35 |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24:13-35) |
도표-1:27-38 복음서에 나타난 마리아들
구 분 | 특 징 | |
예수의 모친 | ․ 성령에 의한 예수 잉태(마 1:18; 눅 1:27-31) ․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지켜봄(요 19:25-27) | |
사도요한과 야고보의 모친 | ․ 예수의 이모(요 19:25) ․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지켜봄(마 27:56; 요 19:25) ․ 안식일 다음날 예수의 무덤을 보러감(막 16:1) | |
작은 야고보와 요셉의 모친 | ․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지켜봄(마 27:56; 요 19:25) ․ 안식일 다음날 예수의 무덤을 보러감(막 16:1) ․ 작은 야고보는 예수님의 제자였던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를 지칭(마 10:3) | |
막달라 마리아 | ․ 일곱 귀신이 들렸으나 예수님에 의해 치유됨(눅 7:7) ․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지켜 봄 (마 27:56; 막 15:40; 요 19:25) ․ 안식일 다음 날 예수님의 무덤을 보러감 (막 28:1; 막 16:1; 요 20:1) | |
마르다의 동생 | ․ 예수님께서 그녀의 오라비였던 죽은 나사로를 살리심 (요 11:32-44) ․ 베다니에서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예수님의 발을 씻음(마 26:6-13; 막 14:3-9; 요 12:3) |
도표-1:26-28,31 천사를 만난 신약의 인물들
메시지 및 사건 내용 | |
요셉 | 아내 마리아의 성령으로 인한 수태고지(마 1:18-21) |
사가랴 | 아내 엘리사벳의 수태고지(눅 1:11-13) |
마리아 |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예수 수태 고지(눅 1:26-28,31) |
목자들 |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소식을 알림(눅 2:8-11) |
막달라 마리아 | 예수의 부활 후 빈 무덤에 나타남(요 20:12,13) |
사도들 | 예수의 승천 시 그의 재림 선포(행 1:10,11) |
빌립 | 복음 전도의 길을 인도해 줌(행 8:26) |
고넬료 | 베드로를 청하여 복음을 듣게함(행 10:3-5) |
베드로 | 감옥에 갇혔을 때 구출 받음(행 12:5,7-9) |
바울 | 가이사에게 체포될 때를 대비해 격려해 줌(행 27:23,24) |
사도 요한 | 미래의 일을 계시해 알려주심(계 1:1) |
원어연구-1:68, 속량(贖良)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원어는 '뤼트로시스'로서 동사 '뤼오'에서 유래한 여성 명사이다. 여기서 동사 '뤼오'는 담을 '헐다'(엡 2:14), 법적인 합법성을 인정하여 '자유롭게 하다'(마 16:19; 행 2:24), '깨뜨리다'(행 27:41). 감옥에 갇힌 자를 '놓아주다'(계 20:3) 등의 의미들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에서 유래한 명사 '뤼트로시스'는 법적으로 얽어매는 것, 또는 정치적으로 압제하는 것 또는 정신적으로 고통을 주는 것으로부터의 해방 자유 구속의 뜻을 갖는다(눅2:38.78; 24:21; 히 9:12). 또한 종교적인 의미에서 부정하고 악한 것으로부터 정결케 되는 것' (딛 2:14; 벧전 1:18)을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의 '그 백성을 돌아보아 속량하시며'라는 구절에서 '속량'의 의미는 일차적으로 정치적인 의미에서 이스라엘을 이방 국가의 압제에서 해방케 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나. 그러나 보다 궁극적으로는 이 세상에서 얽어매는 것, 곧 죄의 굴레에서의 해방, 사망의 법에서의 해방(롬 8:2)을 의미한다. 한편 뤼트로시스'와 동족어인 '뤼트론'은 '속전'(price of release) 내지는 '대속물'(마 20:28; 막 10:45)을 가리키는 것으로, 노예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 지불하는 몸값이나 희생물. 혹은 채무나 의무로부터의 면제를 의미한다. 이에서 볼 때 '속량'(헬, 뤼트로시스)의 의미는 다른 어떤 존재의 희생이나 대속에 의한 해방을 구속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세례인 요한의 부친 사가랴가 이스라엘인의 속량을 위해 노래한 것은 골 그리스도의 대속의 희생을 통한 이스라엘의 구속, 곧 죄와 사망의 법에서의 해방을 노래한 것이라 볼 수 있다(롬 8:1,2).
1:1-4 집필 배경 및 목적을 밝히는 서문
누가복음서의 첫 단락인 본문에서 저자 누가는 일종의 서론으로서 자신의 집필 배경과 목적을 밝히고 있다. 이를 살펴보면 이제 예수의 생애와 죽음을 직접 목격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사도권(使徒權)을 직접 수여 받은 복음의 제 1세대가 서서히 사멸하는 시기에 순수하고도 권위 있는 복음의 기준을 마련하기 위하여 복음서의 기록이 각처에서 추진되고 있는 상황이 먼저 암시된다(1,2절). 그리고 저자 누가는 복음의 실체인 주의 생애와 이를 근거로 주의 승천 이후 오순절을 기점으로 개시된 교회의 태동(胎動)을 목격 내지 통찰한 자로서(3절) 본서의 수신자인 당시 로마의 고위층 인사였던 데오빌로 각하의 복음에 대한 확신을 위해 집권을 시도한다는 집필 목적(3,4절)을 제시하고 있다. 물론 본서는 단순히 데오빌로 한 개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를 대표로 한 당시의 헬라 문화권의 모든 이방인들을 위한 기록이었을 것이다(3,4절 주석 참조). 더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이 복음서를 읽는 후세대의 독자 모두가 주의 복음의 내용에 대한 지식과 확신을 얻게 하기 위해 본서를 기록했음이 분명하다.
한편 주지하다시피 본서의 저자 누가는 헬라인 출신의 의사로서 헬라 문화를 배경으로 한 상당한 수준의 지식인이었다. 이런 누가는 본서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의 저자이기도 하나, 혹 누가는 먼저 주의 탄생에서 승천까지를 기록한 누가복음과 주의 승천 직후부터 초대교회의 태동과 초기 정착 과정을 기록한 사도행전의 저자로서 결국 예수를 기점으로 개시된 신약의 초대 역사를 가장 포괄적으로 제시한 저자이다. 이런 누가가 그의 서문에서 밝힌 바대로, 그는 복음 관련 사실을 당대의 성실한 지식인이요 의사로서 자세히 살핀 것이다. 즉 당대의 고위층 인사인 데오빌로를 확신시키고자 쓴 주의 구원 사역에 대한 기록인 본서와 그에 이어지는 초대교회 역사의 기록인 사도행전은 누가의 예리한 필치와 저로서의 성실함을 보여 준다. 결국 이 누가복음서는 본서의 극적 독자인 우리 모두가 우리 구주 예수 안에서 구원받을 있음을 보여주는 복음의 진리가 실로 산 진리임을 확신케 하는 책임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1:1 우리 중에. - 누가는 복음서 기자들 중 저작의 목적을 간략히 설명하기 위해 서문을 붙인 유일한 사람이다. 이와 같은 식의 서문은 헬라 문학서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관습으로 헬라 관습에 익숙해 있던 누가가 그 관습을 자연스럽게 따른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여기서 '우리'란 말은 매우 광범위하게 쓰여졌다. 즉 예수의 사역과 교훈을 직접 듣고 목격한 12사도들 이외에도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친히 경험하고 목격한자들, 또는 그 사실에 대해서 사도들로부터 자세히 전해 들어 알고 있었던 사람들 모두를 가리킨다. 따라서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들인 성도들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이들은 세례인 요한의 출생에서부터 예수의 탄생과 사역. 십자가 죽음 및 부활의 사건을 자세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 중 상당수가 그 되어진 일들을 기록하려고 시도했는데, 그것은 교회의 급속한 성장과 살아있었던 예수의 증인들이 하나 둘씩 죽어감에 따라 교회의 권위와 기독교 신앙을 확고히 세우기 위해서 점차적으로 체계화된 말씀이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술을 시도한 많은 사람들 중에는 작업을 완성시키지 못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한편 누가가 이들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 그들의 저술을 참고했을 가능성도 있다. 이루어진 사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페플레로포레메논'( )은 '플레 로포레 오' ( )의 완료 수동태 분사로서 '충분한'이라는 뜻을 가진'플레레스'와 '이끌어 오다'의 뜻을 가진 '포레오'( )의 합성어이다. 따라서 그 뜻은 '확실하게 믿어진 것'이나 '확신된 것'을 의미하며, 때로는 '예언 등이 성취되는 것'을 가리킬 때도 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성경에서 이루어지리라고 말해져 왔었던 예언이 확실하게 성취된 것을 말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누가가 역사를 우연히 일어난 사건들의 총합이나 일련의 결과들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계획이 성취되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누가복음 전체에 걸쳐 뚜렷이 드러난다(눅 1:45; 4:21; 7:21.22; 12 :50; 22:22). 따라서 이제부터 서술하려는 예수의 사역과 십자가의 죽음도 구약의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이 예수 안에서 성취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 것을 보여 주는데 중점을 두고 있는 것이다.
1:2 처음부터. - 직역하면 '모든 일의 시작부터'라는 뜻으로, 이 말에 대해서는 대체적으로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즉 ① 예수의 탄생부터라는 견해(Olshausen), ② 세례인 요한의 활동에서부터 라는 견해(Gilmour), ③ 예수의 공적 사역의 시작에서부터라는 견해(Alford, Godet, Plummer)가 그것이다. 이 견해들 중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시기도 비슷하여 사실상 동일한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 두 견해를 좇은 해석이 적절하다(요 15:27; 행 1:21).
말씀. - 성경에서 '말씀'(로고스)은 성자 하나님(요 1:1), 즉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요 1:14)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의 '말씀'은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자체를 가리킨다기보다는 그에 의해 전하여진 말씀, 즉 '복음(Gospel)을 가리킨다.
목격자되고 일꾼된 자. - 여기서 '목격자'(아우토프타이)는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아우토스'와 '보다'를 의미하는 '호라오'( )의 합성어로, '스스로 본 자', 또는 '자신의 눈으로 본 자'라는 의미가 있다(Robertson). 그러므로 본절에서 '목격자'란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을 친히 본 자를 가리킨다. 또한 '일꾼된 자'(휘페레타이)는 '종', '지지자' , '조력자'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복음 전파자를 가리킨다(행13:5). 그런데 헬라어 원문에는 이 '목격자'와 '일꾼된 자'를 수식하는 관사가 하나밖에 없다. 따라서 본절의 '목격자'와 '일꾼된 자'는 동일 존재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목격자'와 '일꾼된 자'들은 예수의 12사도 외에 70인 제자들을 비롯해서 예수의 형제들과 그를 따르던 여인들 및 요셉과 맛디아 등이 해당될 것이다(행 1:12-26). 이러한 자들이 바로 예수의 행적을 친히 목격하지 않았던 누가로 하여금 본서를 기록하도록 예수의 행적을 전하여 준 증인들이었다.
전하여 준 그대로.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도산'은 '손에서 손으로 건네준다'는 뜻으로 '확실한 전달'을 의미한다. 이러한 '전하여준' 것에는 구전(oraltradition)과 기록된 문서(written tradition)가 모두 포함될 것이다. 하여튼 누가는 여기서 본절을 통하여 두 가지 사실을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자신이 예수의 행적과 십자가 죽음을 직접 목격한 증인이 아니라 다만 목격자들의 전승에 의존하여 그리스도의 행적을 정리한 복음의 제 2세대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비록 자신은 복음 증거의 제 2세대의 사람이지만 자신이 기록하는 사실들과 자신이 사용한 자료는 원형 그대로로서 오류가 없는 믿을 만한 것이라는 것이다.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 '붓을 든'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페케 이레산'은 본래 '손을 대다'라는 뜻의 의학 용어로서 '어떤 일을 시도하다'란 의미이다. 그러므로 본절은 누가가 본서를 저술하기 이전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들을 기록하려고 시도했었음을 보여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가 또 다시 본서를 기록하고자 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분명 다른 사람들과의 경쟁 심리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아마도 누가는 예수에 대해 남다른 증인 의식을 갖고 그의 행적을 보다 체계적이고 정확히 전하고자 하는 충성심으로 본서를 기록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여튼 누가는 다른 사람이 기록한 기존의 자료를 자신의 저술에 사용했음에 분명하다. 그러나 누가는 단순히 내려온 전승과 자료들을 종합하고 편집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다. 그는 기존의 자료들을 참고로 하되 성령의 영감을 받아 본서와 사도행전을 집필하는 데 있어서 누가 자신만의 독특한 필체와 방식으로 저술하였다.
1:3 그 모든 일을‥‥자세히 미루어 살핀. - 여기서 '미루어 살핀'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레콜루데코티'는 '옆에', '가까이'를 의미하는 '파라'와 '따라가다'라는 의미의 '아콜루데오'의 합성어이다. 이는 '주의 깊게 뒤를 추적하다'는 뜻으로, 여기서는 어떤 사건의 정확성을 끝까지 추적하다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결국 본절은 누가가 자신의 기록이 완전할 뿐만 아니라 정확함을 표현한 것으로서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기록에 대해 신뢰감을 갖도록 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다. 특별히 여기서 '자세히'(아크리보스)는 '첨단','극단'을 의미하는 '아크론'에서 유래한 말로, 누가는 그의 기록이 철저한 조사의 바탕 위에 근거하고 있음을 독자들에게 강조하고 있다.
근원부터.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노덴'은 '시초부터', '일찍부터'라는 뜻으로, 이는 누가가 다른 복음서의 기자들과 달리 세례인 요한의 출생과 예수의 어린 시절에 관해 기록한 눅 1: 5-2:52을 염두에 두고 한말인 듯하다.
데오빌로 각하에게. -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수신자로 되어있는 '데오빌로'(데오필레)가 어떠한 사람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데오빌로'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친구',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뜻으로, 그 이름에 비추어 일부 사람들은 이를 상징적 명칭으로 해석하여 모든 성도들을 가리킨 다고 주장한다(Origen, Ambrose, Bruce).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데오빌로'가 실제 인물일 것으로 추정한다. 그에게 벨릭스(행 23:26)나 베스도(행 25:1)에게 사용된 경칭인 '각하'(크라티스테)라는 말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그는 아마도 로마의 고위 공직자일 가능성이 크다(Ramsay, Robertson). 혹자는 '데오빌로'가 그의 아내 도미틸라와 함께 독실한 신자였다가 A.D. 96년에 순교한 도미시안 황제의 조카 클레멘스(Clemens)라고 하나(Streeter) 정확한 것은 아니다. 한편 본절은 본서가 마치 데오빌로 한 사람을 위해서 기록된 것처럼 보이게 한다. 그러나 이는 자신의 책을 권위 있고 명성 있던 사람에게 헌정하는 당시 관례를 따른 것일 뿐이며, 당시 본서의 독자는 헬라 문화권의 모든 이방인 신자였다. 당시의 저술가들은 이처럼 자신의 책을 명성 있는 사람에게 헌정함으로써 자신의 책에 대해 더 높은 권위와 더 많은 독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고 한다(Fascher, Geldenhuys).
1:4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 본서의 일차적인 저술 목적을 명백하게 나타내 주고 있는 부분이다. 데오빌로는 기독교 진리에 대해 가르침을 받았다. 그것은 구전(Oral tradition)을 통한 것이었다. 즉 여기서 '배우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케오'는 '귀에 소리를 울리게 하다'라는 뜻으로, 이는 말로 가르치는 것을 가리킨다. 여기에서 '교리문답'을 의미하는 영어의 '케트키즘'(Catechism)이 파생되었다. 결국 데오빌로는 기독교 진리에 대해 문답식으로 교육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고대에는 어떤 진리에 대해 가르칠 때 문답법이 보편적으로 적용되었다(Wilcock). 하여튼 데오빌로는 구전을 통해 기독교 진리를 배웠기 때문에 기독교 진리에 대한 그의 지식은 불완전했을 것이며 그의 신앙은 확고한 기반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Lenski). 이에 누가는 본서를 기록함으로써 데오빌로로 하여금 그 배운바 기독교의 진리에 대해 확실히 깨닫게 하고자 한 것이다. 특별히 여기서 '확실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아스팔레이안'은 '비틀거리다', '넘어지다'를 의미하는 '스팔로'와 부정 접두어 '아'의 합성어로 '실족하지 않게 하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확실함을 알게한다 라는 말은 결국 기독교 진리에 대해 견고하고 안전하게 서게함으로써 당시 세상의 박해와 이단 사상의 오류로부터 승리하게 한다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여기서 '알게 하려 함이로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그노스'는 '알게 하다', '배우다'라는 의미의 '기노스코'와 '~덧붙여'를 의미하는 전치사 '에피'의 합성어인 '에피기노스코'의 제 2부정 과거 능동태로 알고 있는 어떤 사실에 대하여 더욱 정확하게 알게 하는 것을 가리킨다.
1:5-25 세례인 요한의 탄생 예언
주지하다시피 누가복음서는 이 세상 역사에 유일하게 완전한 인간으로 세상에 오셔서 누구 하나 예외없이 원죄(原罪)와 자범죄(自犯罪)로 죄인이 된 우리를 죄에서 구속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사 우리를 원래 창조 당시의 완전한 인간으로 회복시켜 주신 예수의 구원 사역을 인자(人子)라는 측면에서 보여 주는 복음서이다. 또한 누가복음서는 객관적이고 전체적인 신앙 지식을 요하는 헬라인을 독자로 쓰여진 복음서이기도 하다. 이런 특징은 본서의 초두인 제1장에서부터 확연히 드러난다. 그리하여 누가는 완전한 인간 예수의 포괄적 역사를 체계적으로 제시하기 위하여 예수가 완전한 인간으로 세상에 오시게 된 사건, 즉 인간 예수의 탄생 사건에 대한 객관적 묘사로부터 그의 복음서를 개시하고 있다.
이런 문맥 하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예언 기사에 앞서 예수의 선구자였던 세례 요한의 탄생 예언 기사를 제시하고 있는데 복음서 중에서 유일하게 본서에만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복음을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시각에서 상세히 기록하고자 하는 누가의 의도가 처음부터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이것은 메시야의 도래에 대한 구약의 배경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한 이방인 독자들에게 메시야의 길을 예비한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의 존재를 알림으로써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깨닫게 하려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본문은 먼저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성품과 경건된 신앙생활을 소개하고(5-7절), 이어서 천사 가브리엘의 출현과 세례 요한의 탄생에 대한 예언 (8-17절), 그리고 사가랴의 불신과 징벌(18-23절), 엘리사벳의 수태 사실(24,25절)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한편 세례 요한의 탄생 예언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측면을 주지해야 한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세례 요한의 탄생은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메시야의 도래라는 하나의 사건과 관련하여 동일 선상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이미 400년 전 말라기 선지자에 의해 '주의 길을 예비할 사자'로서 요한의 탄생이 예고되었고(말 3:1) 이제 때가 찬 하나님의 섭리로 경건한 사가랴 제사장의 가문을 통해 성취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런데 세례 요한의 탄생 예언이 하나님의 사자에 의해 예고되었다는 것은 그의 모든 예언과 증거(눅 3:2-17)가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 받은 것이라는 사실을 증거해 준다. 하여튼 천사는 세례 요한에 대해 이스라엘 자손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을 가지고 사명을 수행할 것이라고 했는데(말 4:5), 그 예언대로 세례 요한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마지막 선지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 하였다(마 17:12; 막 9:13). 이에 대해서는 눅 3장 연구자료, '예수의 선구자 세례 요한'을 보다 참조하라. 따라서 세례 요한의 탄생은 궁극적으로 메시야의 도래라는 구약 예언이 성취되는 시작으로 볼 수 있다.
둘째로 사가랴 부부는 자식을 낳을 수 없는 늙은 몸이었지만(18절) 하나님께 간구하였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자식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13절). 이것은 하나님 앞에 의롭게 행한 그들의 삶에 대한 축복으로 볼 수 있다(6절).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의로움을 잊지 않으시고 언제나 갚아주시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축복받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히 10:38).
1:5 유대 왕 헤롯 때. - 본절에 언급된 '헤롯'은 B.C. 37-4년까지 유대를 통치한 헤롯대왕(The Great Herod)으로, 에서의 후손인 이두매 출신의 안티파터 2세(Antipater II)의 아들이다. 그는 성격이 매우 잔혹하여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수많은 무고한 생명이 피를 흘렸으며, 비록 헤롯 성전을 건축하기는 했으나 예루살렘 주변에 많은 이방 신상을 세움으로써 유대인들을 우상숭배의 길로 인도했다. 따라서 그의 때는 정치·종교적으로 매우 어두운 암흑기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때에 사가랴와 같은 경건한 제사장이 있었다는 것은 실로 하나님의 큰 은혜요 당신의 구속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결과라 할 수 있다. 하여튼 본절의 '때'는 헤롯의 오랜 통치가 막을 내릴 무렵이었다. 한편 헤롯대왕에 대해서 마 2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아비야 반열. - 다윗 시대 이후부터 제사장들은 24반열로 나뉘어졌으며 이들은 각 반열의 순서대로 1년에 한 주간씩 2회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사하도록 되어있었다. 대상 24:1-19 강해와 주석을 참조하라. 이러한 제사장 반열 가운데 아비야의 반열은 8번째에 해당 되었다(대하 24:10). 물론 다윗 시대에 조직된 제사장의 24반열은 사실상 예루살렘 멸망과 성전의 파괴(B.C. 586)와 함께 무너지고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귀환할 때는 24반열 가운데 4반열, 즉 여다야, 임멜, 바스훌, 하림만이 돌아왔다(스 2:36-40). 이를 에스라가 다시 다윗 시대와 같이 24반열로 나누어 제사장 반열을 회복시킴으로써(느 12:1-7) 사가랴 때까지 그 반열이 유지 되었다. 따라서 사가랴가 속한 아비야 반열은 다윗이 조직한 때의 아비야 반열은 아니었다.
사가랴…엘리사벳이라. - '사가랴'(자카리아스)는 구약에 매우 흔하게 나타나는 전형적인 히브리 이름인 '스가랴'(왕하 14:29; 스 8:3,11; 슥 1:1)의 헬라어 음역으로, 그 뜻은 '여호와께서 기억하신다' 이다. 또한 '엘리사벳'은 아론의 아내였던 '엘리세바'(출 6:23)와 같은 이름으로 그 뜻은 '나의 하나님이 맹세하시다'이다. 한편 사가랴와 엘리사벳은 모두 제사장의 가문 출신으로 이처럼 제사장 가문끼리 결혼하는 것은 당시 매우 영광스러운 일로 여겨졌다고 한다(Plummer, Geldenhuys). 그런데 이처럼 인류의 구속 사역을 감당하실 메시야의 선구자인 세례 요한의 부모가 모두 제사장 가문 출신이라는 것은 세례 요한이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부족함이 없는 가문에서 태어났음을 시사한다.
1:6 하나님 앞에 의인. - 히브리적 표현 양식으로 유대인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이요, 영예로운 말이다(창 6:9; 7:1; 18:23,28; 시 37:37; 겔 18:5-26). 즉 요한의 부모는 문벌만 좋았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경건한 삶을 살았던 인물들이다. 물론 인간이 율법적 행위를 통해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고 오직 믿음을 통해서만 의롭다고 인정을 받을 수 있음을 고려할 때(롬 3:28), 본절의 사가랴 부부에 대한 칭찬은 윤리적 행위에 대한 칭찬이라기보다는 종교적인 측면의 경건한 신앙이 강조된 것이다. 즉 본절은 사가랴 부부가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께 대한 순전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음을 강조한 표현이다(롬 4:20-22). 이러한 사실은 메시야의 선구자로서의 세례 요한의 자질이 어떠할 것인지 벌써 암시해 주고 있다 하겠다.
계명과 규례. - 본절에서 '계명'(엔톨라이스)은 '하나님의 명령'(Commebndment)을 가리키며, '규례'(디카이오마신)는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시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계명은 도덕적인 것으로, 규례는 의식적인 것으로 나누어 설명하기도 했다(Calvin, Bengel, Farrar, Godet). 그러나 여기서는 계명과 규례가 서로 다른 의미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동일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말들을 반복함으로써 그 의미를 강조하는 유대인 특유의 관용법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Bruce, Plummer). 따라서 계명과 규례는 하나님의 명령인 모든 율법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흠이 없이 행하더라. - 이는 윤리적 행위의 측면에서 사가랴 부부가 비난 받을 만한 것이 없는 상태에 있었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단순히 그들이 선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성실하고 빈틈없이 지킨 것을 가리킨다. 모든 계명들을 '흠이 없이 행한' 사가랴 부부의 생활이 얼마나 경건했는가를 짐작하게 해준다.
1:7 저희가 무자하고. - 사가랴 부부는 하나님 앞에서 흠 없고 의로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은 자녀를 하나님의 축복과 기업으로 여기고 있었던바(시 127:3; 128:3) 여자가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대단한 수치였으며, 심지어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죄인으로 취급되어 합법적인 이혼 사유가 되기도 했다(Barclay).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가랴 부부는 나이 늙도록 서로 사랑과 신뢰로 온전히 연합하여 있었으며 하나님을 원망하기 보다는 오히려 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겼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경건의 모습을 잃지 않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지금까지 누구도 얻지 못한 '주의 길을 예비할' 선지자를 낳을 자들로 하나님께 선택되는 큰 영광과 은혜를 입게 된다.
1:8 제사장의 직무를 …행할새. - 당시 제사장들은 그 반열의 차례에 따라 1년에 2회 성전에서 봉사했는데 1회 봉사하는 기간은 안식일에서 다음 안식일까지 8일간이었다.
1:9 제비를 뽑아. - 성전 봉사는 24반열이 차례대로 하였으며, 반열의 차례가 되면 그 반열에 속한 제사장들은 누가 각 직무에 합당할까를 알아보기 위해서 제비를 뽑아 결정했다. 뽑힌 제사장들은 각각 불을 준비하고 제단을 청소하는 일, 분향하는 일, 제단에 제물을 바치는 일을 하였다. 성경에는 가끔 제비뽑기로 어떤 일을 결정하는 이와 같은 방법(민 26:55,56; 수 7:14; 18:6,8; 삼상 10:20,21; 행 1:26)이 나오는데, 이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과 관여하심을 바라는 유대인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제비뽑기와 관련해서는 민 26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성소에 들어가 분향하고. - 성전의 모든 예배 의식 중에서 가장 성스러운 의식은 바로 하나님께 분향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당시 제사장들의 수효는 약 2만여 명에 달하였다고 한다(Robertson). 따라서 각 반열에는 약 9백 명 정도의 제사장이 있었고 이 가운데서 하나님께 분향할 제사장을 제비뽑았으므로 하나님께 분향하는 일은 일생에 단 한 번의 기회가 주어질까 말까하는 일이었다. 이 때문에 제사장들은 분향하는 일을 최대의 영광과 특권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이러한 영광을 사가랴가 차지하고 더욱이 그 분향하는 때에 천사가 나타나 요한의 수태를 고지했다는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전적인 섭리로 말미암은 것임을 알 수 있다.
1:10 모든 백성은…기도하더니. - 유대인들은 보통 하루에 세 번씩 성전 뜰에 모여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이 가운데 그들이 하나님께 기도드렸던 처음과 마지막 시간은 제사장들이 하나님께 분향을 드리던 아침, 저녁 시간과 일치했다. 사가랴가 분향하는 동안 백성들이 바깥에서 기도했다는 것은 바로 이 같은 사실을 배경으로 한다(Meyer, Alford, Geldenhuys).
1:11 주의 사자가 저에게 나타나. - 구약에서 '주의 사자'는 종종 하나님의 현현(창 16:7-13; 21:17; 22:10-18; 출 3:2-6; 삿 2:1-5)으로 이해되어졌다(Fitzmyer). 그러나 여기서는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로서의 '천사'(마 24:36; 28:2)를 가리킨다. 19절에 의하면 이 천사의 이름은 '가브리엘'이었는데, 가브리엘은 단 10:21에 언급된 미가엘과 함께 천사장으로서 주로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임무를 맡았다(단 8:16). 이에 대해서는 제 1권 성경교리, 신론을 보다 참조하라. 한편 누가는 천사의 출현 및 사역에 대하여 많은 부분을 할애하여 기술하였는데(눅 1:26; 2:9,13; 12:8; 행 5:19; 8:26), 누가가 이처럼 천사들에 관하여 다른 복음서의 기자들에 비해 자주 언급하고 있는 것은 일어난 사건의 신적 기원과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인 것 같다. 향단 우편. - 향단 우편이란 분향자가 볼 때 향단의 오른쪽, 곧 향단과 진설병상의 사이를 가리킨다. 성소의 구조에 대해서는 레 4장 자료 노트를 참조하라.
1:12 놀라며 무서워하니. - 여기서 '놀라며'(에타라크데)는 '동요하다', '마음의 평정을 잃다'라는 뜻이며, '무서워 하니'(포보스)는 '두려워하다', '공포를 느끼다'라는 뜻이다. 이로 보아 사가랴는 천사의 갑작스런 출현으로 마음의 평정을 잃을 정도로 공포에 사로잡혔음을 알 수 있다. 사실 천사의 출현은 초자연적인 현상이다. 따라서 천사를 보고 두려워하며 무서워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할 수 있다(출 15:16; 삿 6:22; 단 10:7).
1:13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 여기서 '간구'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에시스'는 일반적인 기도를 나타내는 '프로슈케'와 달리 특별한 제목을 정해 놓고 하는 기도를 가리킨다. 그런데 사가랴가 어떠한 내용을 가지고 기도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사가랴가 다음 두 가지를 놓고 기도 했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첫째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자신의 대를 이을 아들을 허락해 줄 것을 기도했을 것이다(Alford, Bengel, Bruce). 둘째로는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제사장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평화와 메시야의 도래를 위해서 기도했을 것이다(Meyer, Plummer). 그러나 사가랴가 성소에 분향하러 가서 아들을 달라고 기도했다고 추정하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왜냐하면 사가랴는 그와 그의 아내가 나이 많아 자연적으로는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18절).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사가랴가 민족의 평화와 구원을 위해 기도했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좋다. 다만 본절에 사용된 '들린지라'라는 단어가 원문에 부정 과거형으로 '과거에도 들렸고 지금도 들린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음을 감안한다면(Robertson) 여기서의 '간구'가 과거 사가랴가 아들을 달라고 했던 기도를 가리킨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본절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기도를 결코 잊지 않으시고 당신의 계획과 미리 아심에 따라 가장 적절한 시기에 응답해 주심을 보여 준다.
요한이라 하라. - 히브리인들에게 있어 이름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히브리인들은 이름이 단순한 호칭 이상으로 그 사람의 인격과 특성을 나타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친히 이름을 지어 주시는 경우가 있었다(창 16:11; 17:19; 호 1:4,6,9 ; 마 1:21). 이럴 경우 이름은 그 사람을 통해 나타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함축하고 있다. 요한도 그러한 예에 속하였다. '요한'은 '여호와는 자비하시다'라는 뜻으로 이 이름 속에는 하나님의 구속 역사의 섭리가 어떤 것인지를 함축하여 보여 주고 있다.
1:14 너도…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 - 요한의 출생이 사가랴에게는 물론이거니와, 온 이스라엘에게도 기쁜 일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특별히 여기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다'(카라 카이 아갈리아시스)라는 말은 절정에 이른 기쁨을 나타내는 말이다. 사실 아들을 낳을 수 없었던 사가랴가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그 동안 아들이 없음으로 해서 겪었던 고통과 슬픔을 일시에 상쇄하고도 남는 큰 기쁨이라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요한의 탄생은 이스라엘 민족에게도 큰 기쁨을 주는 일이었다. 지난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선지자가 없었다. 그 기간 동안 이스라엘은 종교적으로 볼 때 실로 어두운 암흑 가운데 살았던 것이다. 이러한 때에 마지막 선지자 요한의 탄생은 민족적 기쁨이라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특별히 이스라엘 민족은 이스라엘 구원의 때가 이르면 선지자가 다시 출현하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Jeremias). 따라서 요한의 탄생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구원을 알리는 신호로 여겨졌을 것임에 분명하다.
1:15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 여기서 '큰 자'에 해당되는 헬라어 '메가스'는 '위대한', '절대적으로 큰'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요한이 메시야 왕국을 도래시키는데 있어서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할 위대한 인물이 될 것임을 시사한다(마 11:11, Lenski). 물론 이는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품으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게 될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마 3:1-12).
포도주나 소주를 마시지 아니하며. - 본문은 나실인의 규정(민 6장)을 생각나게 하는 구절이다. 그런데 나실인의 규정에 의하면 나실인은 술과 삭도를 금하고 있다(민 6:1-5). 하지만 요한의 경우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말만 언급되었을 뿐 삭도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그래서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그가 나실인이었다(Plummer, Farrar)는 견해와 아니었다(Zahn)는 견해가 있으나 그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고 그 첩경을 평탄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선택하신 회개의 설교자였음을 고려해 본다면 그는 평생을 나실인으로 보냈을 것임에 분명하다(Hendriksen). 한편 나실인에 대해서는 민 6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 요한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은 시기는 그가 어머니의 모태(Womb) 안에 있을 때였다. 이것은 구약의 성령 임재와 비교해 볼 때 독특한 현상이었다. 구약에서 성령은 특별한 사역을 이루시기 위하여 어떤 개인에게 임시적으로 잠시 머무른 후에 떠나시곤 하였다. 그러나 이제 메시야의 길을 예비할 요한에게 있어서는 성령이 떠나지 않으시고 계속 머무르시게 된 것이다. 여기서 '모태로부터'는 히브리적인 어법으로서 문자적 의미는 '모태를 떠나기 전'이다(Lenski). 한편 성령을 강조하는 것은 누가의 한 특징으로 다른 복음서의 기자(마태 5회, 마가와 요한 4회)와 달리 무려 53회(누가복음 12회, 사도행전 41회)나 '성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는 메시야의 도래와 성령이 매우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시사한다.
1:16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오게. - 요한의 사명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는 구절이다.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하지 않은 상태'에 있었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있었다. 이렇게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 일이 세례 요한의 주된 임무였으며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의 사역과 일치한다(렘 3:7,10; 겔 3:19). 그러나 요한이 구약의 일반 선지자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일반 선지자들이 백성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임무만을 가졌던 반면 요한은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는 선구자로서, 백성들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촉구하여 백성들이 메시야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사명을 갖고 있었다는 것이다.
1:17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 본절은 요한이 엘리야와 같은 기질이나 영향력 또는 엘리야가 하나님께 받은 능력과 같은 것으로 사역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본절은 요한이 곧 엘리야라는 말이 아니다. 사실 요한 스스로도 자신은 엘리야가 아니라고 말한 바 있다(요 1:21). 다만 요한은 사역적인 측면에서 볼 때 말 4:5에서 다시 오리라고 예언된 바로 그 엘리야였으며, 예수께서도 이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다(마 11:13,14). 실로 요한은 그 삶의 모습이 엘리야와 흡사했다. 즉 그는 엘리야와 같이 성격이 강직했고, 광야에서 거하며 약대 털옷을 입었을 뿐만 아니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엄격하게 하나님의 심판과 회개를 외쳤던 것이다(왕상 18:18; 왕하 1:8; 마 3:4; 14:4). 세례 요한에 대해서는 막 1장 연구 자료에 상세히 다루었으니 그곳을 보다 참조하라.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 - 말 4:6의 전반부의 인용으로 그 해석에 있어서는 다음 두 가지 측면을 고려할 수 있다. 첫째, 가정의 회복이다. 사실 말라기 선지자는 이 말을 이방인과 결혼하고 또 쉽게 이혼하는 풍토 속에 가정을 파탄으로 몰고 갔던 남 유다 사람들에게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 한 것이었다. 그런데 상황은 달랐지만 로마 치하의 유대 가정 역시 말라기 때와 같이 정치·종교적인 이유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러한 유대 가정을 세례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풂으로 가정의 화목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Hendriksen, Robertson). 둘째, 신앙의 회복이다. 이러한 해석은 본절의 '아비'를 이스라엘의 경건한 조상들을 가리킨다고 볼 때 가능하다. 즉 세례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통해 이스라엘을 죄악의 길에서 돌이켜 그들 조상이 가졌던 신앙을 다시 갖게 할 것이라는 것이다(Spence, Geldenhuys). 이상의 두 해석 가운데 어느 것이 옳다고 단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진실된 회개는 가정과 민족 모두를 구원한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세례 요한의 사역은 두 가지 측면을 모두 포함하는 것이다.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 '거스리는 자'는 의인과 상반된 개념으로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거부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렇게 불순종하는 어리석은 자들을 회개케 하여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것이 요한의 사역이 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라는 말은 가정적 회개를, '거스리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는 사회적 회개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즉 세례 요한은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회개 운동을 전개하여 이 땅에 메시야 왕국이 도래할 수 있도록 첩경을 평탄케 하는 임무를 띠고 이 땅에 난 메시야의 선구자였던 것이다.
1:18 사가랴가…나이 많으니이다. - 사가랴는 천사가 전하여 준 놀라운 소식을 의심하였다. 그런데 이처럼 사가랴가 천사의 말을 불신하게 된 것은 그와 그의 아내 엘리사벳이 나이가 많아 늙어 그의 아내가 결코 임신할 수 없게 된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천사에게 이러한 사실을 믿을 수 있는 표적과 확증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가랴의 모습은 마치 아브라함(창 15:8), 기드온(삿6:36-40), 히스기야(왕하 20:8-11)의 모습과 흡사하다. 하여튼 사가랴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함으로써 책망과 함께 요한을 낳기까지 벙어리가 되는 처지가 되어야 했다(20절). 사가랴에 대하여는 본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1:19 나는 하나님 앞에 섰는 가브리엘이라. - 여기서 '가브리엘'은 '하나님의 사람'이란 뜻으로, '미가엘'(단 10:13,21; 유 1:9)과 함께 성경에 나오는 두 명의 천사장 중의 하나이다. 성경에는 언급이 없으나 외경의 기록을 보면 천사장은 성경에 나오는 가브리엘과 미가엘 외에 우리엘, 라파엘, 라구엘, 사리엘, 레미엘 등 모두 일곱으로 나타나 있다(에녹1서 20:2-8; 토빗서 12:15). 이들은 모두 하나님의 보좌 앞에 시립(侍立)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한다(사 6:2,3; 마 18:10 ; 계 8:2). 천사에 대한 설명은 그랜드 종합 교리 천사론을 참조하라. 하여튼 가브리엘은 불신하는 사가랴에게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밝힘으로써 그것이 자신에 대한 불신이 아니라 자기를 보내서 명령을 전달하게 한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라는 점을 명백히 한다(Calvin).
1:20 벙어리가 되어. - 사가랴는 천사의 기쁜 소식을 의심한 대가로 벙어리가 되는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사가랴가 벙어리가 된 것은 단순히 불신에 대한 형벌만이 아니라 말씀에의 표적이기도 했다. 즉 사가랴는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자신에게 하신 그 말씀을 확증할 수 있는 표적을 구하였는데, 하나님은 사가랴가 벙어리가 되는 이적을 보여주심으로써 그의 요청에 응답하신 것이다. 이러한 이적은 사가랴의 불신을 없애주었을 것임에 분명하며, 침묵의 기간 내내 그는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을 되새길 수 있었을 것이다.
때가 이르면. - 여기서 '때'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이론'은 '한정되지 않은 때'를 가리키는 '크로노스'와 달리 '정해진 때'를 가리킨다. 특별히 관사 '톤'이 있어서 '정확한 때'를 가리킨다. 결국 본절은 '정확히 그 때가 되면'이란 뜻으로 천사 자신의 예언이 분명하게 성취될 것임을 강조하고 있다.
1:21 지체함을 기이히 여기더니. - 성소에서의 분향은 대체로 짧은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Robertson). 탈무드의 기록에 의하면 제사장들은 되도록 빨리 분향을 마치고 나오는 것이 관례였다고 한다. 그것은 제사장들이 나답과 아비후의 경우처럼 어떤 주제 넘는 행동을 하다가 화를 입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레 10:1,2). 그런데 사가랴는 보통 이상으로 오래 지체한 것이다. 따라서 밖에서 기다리는 백성들이 초조해 하며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사가랴에게 어떤 변고가 일어났을 거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1:22 저희에게 말을 못하니. - 성소에서 분향을 마치고 나온 제사장은 백성들에게 축복기도 하는 것이 관례였다(민 6:24-26). 그러나 사가랴는 벙어리가 되어 그 어떠한 말도 축복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단지 몸짓 손짓으로 그 받은바 계시를 전달할 뿐이었다. 물론 사가랴가 벙어리가 된 사실은 백성들에게 그가 늦어진 충분한 이유로 제시 되었을 것이고 백성들은 사가랴가 이상을 보고 놀라 말을 못하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 분명하다.
1:23 직무의 날이 다 되매. - 보통 한 반열의 직무 기간은 안식일 저녁부터 다음 안식일 아침까지였다(왕하 11:5-8). 당시 제사장들은 자기 당번 때에는 집에서 떨어져 성전 벽에 건물을 지어 만든 작은 침실에서 지냈다. 물론 율법에 제사장이 집에서 지내는 것을 금한 것은 아니나 당시 풍조가 너무 경박한 시대였으므로 이런 수단이 강구되었다. 이들에게는 또한 아내와의 동침이나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는 것도 금지되었다. 사가랴는 천사의 말을 믿지 못한 불신앙의 결과로 인하여 벙어리가 되기는 했지만 자신의 맡은 바 직분은 끝까지 수행하였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가랴의 성실성을 엿볼 수 있다.
1:24 엘리사벳이 수태하고…숨어 있으며. - 천사의 예언이 엘리사벳의 잉태함으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엘리사벳의 수태는 삼상 1:19,20과 같이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였다. 물론 한나는 엘가나의 아내로서 잉태하지 못하는 여인이었지만 나이 많아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상태는 아니였다(삼상 1:7,8). 그러나 엘리사벳은 더 이상 인간적으로는 임신을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노쇠한 상태였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크신 능력의 손길을 통하여 엘리사벳이 아이를 낳을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이를 통해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을 능히 하시면서, 구속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보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엘리사벳이 왜 임신 초기에 5개월 동안이나 숨어 지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인의 전통적인 관습과도 무관한 일이었으며, 또한 늙은 나이에 임신하게 된 사실을 부끄러워 해서 숨은 것은 아니라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자식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무자(無子)함이 하나님의 저주로 인식되던 유대적 상황 속에서 자신의 잉태함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님이 자신에게 베푸신 크신 은총을 기뻐하면서 자랑해야 마땅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벳이 이처럼 숨어 지낸 것은 필시 하나님의 놀라운 계시가 자신에게서 성취되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장차 태어날 아이를 위해서 경건으로 준비코자 했기 때문이거나 공중 앞에 나타나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기 앞서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충분한 확증을 얻기 위해서였을 것이다(Banes).
1:25 내 부끄러움을 없게 하시려고. -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서 자식은 단순히 후사를 잇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총을 판가름하는 방편이기도 하였다(시 113:9; 128:3; 사 4:1; 44: 3,4). 따라서 자녀가 없는 것은 한 여인으로서 수치스러운 일이며 이것은 정당한 이혼 사유가 되었다. 7절 주석 참조. 이러한 유대 특유의 상황 속에서 엘리사벳이 임신을 하게 된 것은 하나님이 그녀에게 은총을 베푸시고 계신다는 증거이며 감격할 만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본절은 엘리사벳이 자신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로 말미암아 넘치는 기쁨을 표현한 말이다. 라헬, 한나도 이와 같은 찬양을 한 바 있다(창 30:23; 삼상 2:1,2).
1:26-38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예언
앞단락(5-25절)의 주의 길을 예비할 사자로서의 세례 요한의 탄생 예고에 이어 본문에는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예고되고 있다. 본문의 내용은 천사의 마리아 방문(26-29절), 천사의 예수 탄생 예언(30-33절), 처녀 마리아의 수태(34-38절)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본문은 마 1:18-25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the Virgin Birth)의 근거가 되는 부분이다. 그런데 두 기사는 서로 다른 관점에서 기록되어 예수의 동정녀 탄생을 보도하고 있다. 즉, 마태는 요셉의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고, 누가는 마리아의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다. 이런 관점의 차이는 예수의 족보를 소개하고 있는 마 1:1-17과 눅 3:23-38에서도 뚜렷이 나타난다. 하여튼 예수의 탄생 예언은 세례인 요한의 탄생 예언과 구조적으로 평행을 이루고 있어서
매우 유사한 점이 많은데 그것은 천사가 나타나서 예언한 사실(11,28절), 사가랴와 마리아가 모두 이 기이한 일에 놀랐다는 사실(12,29절), 둘 다 아들이 약속되었다는 사실(13,30,31절) 등이다. 그리고 그 태어날 아이의 사명이 하나님의 구속 섭리에 있어 예비하는 자와 예비함을 받는
메시야로서 연속적인 선상에 있음을 보여 준다. 뿐만 아니라 세례 요한의 탄생과 마찬가지로 예수의 탄생도 구약 예언의 성취였다. 반면에 차이점도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첫째로 세례 요한의 탄생은 인간의 육체적 결합에 의한 것이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동정녀의 몸에서 잉태되었다는 것이다. 즉 마리아의 고백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는 남자를 알지 못했던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셨다(34절). 둘째로 세례인 요한은 인간의 출생법에 의해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닌 불완전한 인간인 반면, 예수는 천사의 메시지가 전해 주듯이 다윗을 조상으로 하여 태어난 인간의 후손이면서도(32,33절) 성령의 능력으로 오신 흠 없고 완전한 인간이신 동시에 하나님이시라(35절)는 점이다. 셋째로 세례 요한은 구약에 예언된 '주의 길을 예비할 사자'로서 이 세상에 온 반면, 예수는 구약 예언의 중심이 되는 구원의 복음 그 자체인 동시에 세례 요한이 예비할 주, 즉 메시야로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점이다(35절). 한편 동정녀 탄생과 성육신 사건은 '여자의 후손'에 대한 예언(창 3:15)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라는 예언(사 7:14)의 성취로서 이는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사건이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그것이 인간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인간이어야 했고 전혀 죄가 없는 완전한 몸이어야 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대속으로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를 보증할 수 있는 자이어야 했는데 이를 모두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육신을 입는 방법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성자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었다. 결국 동정녀 탄생과 성육신 사건은 인류 구속의 종교인 기독교의 정수를 이루는 사건이다. 본장 자료노트 '동정녀 탄생'과 막 10장 자료노트 '예수의 성육신과 대속 수난을 통한 인간 구원의 필연성' 참조.
다른 한편 천사의 예언을 들은 마리아의 태도는 실로 불 신앙적이었던 사가랴의 태도(18절)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믿음을 보여 준다(38절). 사실 당시의 사회 ․ 문화적 배경으로 볼 때, 처녀가 결혼도 하기 전에 아이를 갖는 것은 돌로 쳐 죽임을 당하는 죄에 해당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리아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다는 것은 그가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했다는 증거가 된다. 우리는 이런 마리아의 순종을 보면서 인간적인 이해타산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는 교훈을 배울 수 있다.
1:26 여섯째 달에. - 엘리사벳이 임신한지 6개월이 되는 달을 가리킨다(36절). 갈릴리 나사렛이란 동네 갈릴리는 레바논 산맥 남단에 위치한 지역으로 남동쪽의 갈릴리 호수를 제외하고는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이 지역은 이방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던 지역이었으며 정치적 . 종교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하던 곳이었다. 더욱이 나사렛이란 동네는 갈릴리의 남단에 위치해 있는 조그마한 동네로 외부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곳이다(Fitzmyer), 이처럼 이름도 없던 작은 동네가 크게 유명해지게 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여기서 보내셨기 때문이다(눅 2:39,51). 나사렛에 대해서는 마 2:23 주석과 눅 4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1:27 다윗의 자손‥‥정혼한 처녀에게. - 요셉은 메시야가 태어날 것으로 약속된 다윗의 후손으로서(마 1:16; 눅 3:23) 마리아란 처녀와 정혼하고 있었다. 그런데 요셉이 다윗의 후손인 것은 성경에서 명백하게 나타나 있는 반면에 마리아의 가문에 대해서는 언급이 전혀 없다. 혹자는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친족 관계라는 이유(36절)로 마리아는 레위 자손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Scchleiermacher).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마리아 역시 다윗의 후손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Alf
ord, Bengel, Plummer, Farrar 등). 그 근거로는 첫째, 예수는 '다윗의 자손'이란 칭호로 자주 불리웠으나(마 9:27; 12:23; 15:22; 막 10:47,48; 눅 18:38,39). 이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없었다는 것이다. 둘째, 요한의 부모가 모두 제사장 가문인 것과 대비되어 예수의 가문도 모두 다윗 계통일 것이라는 것이다. 한편 그 당시 유대인의 관습에 의하면 결혼 전에 약 1년 동안의 약혼 기간을 가졌다. 그런데 이 기간은 결혼과 같은 구속력을 지니고 있어서 육체적 성관계를
갖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면에서 사실상 결혼한 것과 동일하게 취급되었다(마 1:19,20). 따라서 약혼한 상태에서 남자가 죽으면 여자는 과부로 간주되기도 하였다(Mettew Henry). 그러므로 요셉과 마리아는 아직 결혼식을 하지는 알았지만 유대의 관습에 의하면 이들은 실질적으로 부부로 인정받고 있었다. 한편 본절에 사용된 '처녀'(파르데논)는 남자를 알지 못한 동정녀를 가리키는 말이다. 이에 대해서는 마 1:23 주석을 보다 참조하라.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라. - '마리아' (마리암)는 히브리어 '미리암'(출 15:20)의 헬라어 음역으로 '높여짐'이란 뜻을 갖고 있는데 유다 여인에게 매우 흔한 이름이었다. 신약에는 모두 6명의 마리아가 나타나는데 이들에 대하여는 본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1:28 은혜를 받은 자여 평안할지어다. -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평안을 비는 장면이다. 여기서 '은혜를 받은'(케카리토메네)은 '은혜를 베풀다'라는 의미의 '카리토오'의 완료 수동태 분사로 '은혜를 받아서 그 결과로 은총의 상태에 있는'이란 의미이다. 이는 결국 마리아가 어떤 특별한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메시야의 모친이 뵐 수 있는 은총을 하나님께 받았음을 보여 준다. 한편 벌게이트역(Vulgate)은 '케카리토메네'를 '그라티 플레나'(eratile plena)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를 로마 카톨릭에서는 '네가 주어야 할 은혜의 충만'으로 이해함으로써 마리아를 숭배의 대강으로 삼고 있다. 즉 마리아를 은혜를 나누어 줄 수 있는 무죄한 자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하나님 앞에서 순전한 여인으로서, 메시야를 잉태할 여인이었지만 '죄 없는 존재'는 아닌 것이다.
그녀도 우리와 동일한 성정을 지닌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야 될 자이었지 은혜를 베푸는 자는 아닌 것이다. 따라서 본절은 문자 그대로 '은혜를 받은 자'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좋다.
1:29 이런 인사가 어찌함인고. - 마리아는 천사의 문안에 놀라며 당황해 했다. 그녀는 자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사자에게서 그와 같은 인사를 받아야 할 이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한 놀라움은 당연한 것이었다. 혹자는 마리아가 놀란 이유를 유대 사회에서는 남자가 여인에게 인사하는 것이 이례적인 일이기 때문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본절은 천사가 남자의 형상을 지녔다는 언급이 없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형상을 지니고 나타났다는 언급도 없다. 그래서 혹자는 마리아가 소리만 들었을 뿐 모습은 볼 수 없었다고까지 주장한다(Godet). 그러나 이것 역시 정확한 근거는 부족하다. 따라서 마리아가 놀란 것은 아마도 그녀를 높게 표현한 천사의 인사말의 내용과 자신이 구약의 위대한 인물처럼 하나님을 섬기도록 선택되어지는 전혀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했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Van Unnik).
1:30 천사가‥‥무서워 말라. - 천사가 사가랴에게 한 말이 여기서 다시 반복되어져 나온다(13절). 마리아가 천사의 말을 듣고 놀란 것은 신적 존재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구약에서 천사는 종종 하나님의 현현(theophony)의 한 형태로 인식되었다. 이와 같은 이유로 마리아가 천사를 보고 두려워 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한편 천사는 무서워하는 마리아에게 무서워하지 말라며 안심을 시키고 있다. 특별히 천사는 마리아가 두려워하지 않아도 될 이유를 본절 하반부에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마리아가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은혜를 얻었느니라. - 메시야의 모친이 되는 은총을 입었다는 말이다(31-33절). 여기서 '얻었느니라'에 해당되는 헬라어 '휴레스'는 '찾는다'는 뜻과 '얻는다'는 뜻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따라서 본절은 '은혜'란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보여 준다.
1:31 예수라 하라. - 이 천사의 예고는 사 7:14의 성취구로 보여진다(Harshall). '예수'는 히브리어 '여호수아'를 헬라어로 음역한 것으로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누가는 마태와 달리(마 1:21) 이름에 대한 의미를 설명하지 않고 있는데 이는 본서의 독자가 히브리식의 어법에 낯선 이방인들이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의 이름의 의미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았어도 그를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로 소개함으로써(32,33절)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설명해 주고 있다.
1:32 큰 자가 되고. - 이 표현은 세례인 요한의 수태 고지에서도 사용된 말이다(15절). 그러나 그 의미에서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즉 요한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할 자로서 사람 가운데 가장 위대한 인물이었던 반면(마 11:11), 예수께서는 하나님과 동등한 분으로서 가장 크고 위대한 분이신 것이다. 특별히 15절의 '큰 자' 앞에는 '주 앞에'라는 말이 덧붙여 있는 반면 본절에는 아무런 말이 없이 단지 '큰 자'라는 말만 쓰임으로써 위의 사실을 보다 명확하게 보여 주고 있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 - 여기서 '지극히 높으신 이'(휘프시스투)는 70인역(LⅩⅩ)과 유대문헌에서 초월적이고 탁월한 하나님을 표현할 때 자주 사용하는 단어이다. 따라서 본절은 예수께서 신적 존재임을 드러내 준다.
그 조상 다윗의 위. - 하나님이 다윗에게 하신 언약, 즉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가 다윗의 혈통에서 나게 될 것이라는 말씀(삼하 7:12-16)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취되었음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다윗에게 주신 언약에 기초하여 메시야가 다윗 왕가를 계승한다는 것은 유대인의 보편적이고 전통적인 사상이다. 또한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을 가장 이상적인 통치자로 생각하고 있었고 따라서 그의 후손으로 태어날 메시야 역시 공의와 능력으로 세상을 다스릴 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누가는 이 같은 약속과 사상들이 모두 예수를 통해 만족될 것임을 시사한다. 다윗 언약에 대해서는 삼하 7장 자료노트와 삼하 7:4-16 강해 부분을 보다 참조하라.
1:33 야곱의 집에‥‥그 나라가 무궁하리라. - 다윗의 위를 계승하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실 통치 영역과 기한을 보여 주고 있는 구절이다. 여기서 '야곱의 집'은 이스라엘을 상징한다(출 19:3; 사 2:5,6; 8:17; 48:1). 따라서 그리스도의 통치 범위는 이스라엘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이스라엘'은 단순히 육적 이스라엘을 의미하지 않는다. 구약의 '이스라엘' 개념은 육적이요 현세적인 것이었던 반면 신약의 '이스라엘'은 영적이요 미래적인 개념이다. 따라서 예수의 통치 대상은 육적 이스라엘 민족을 초월하여 영적 이스라엘인 성도들 모두이며 그 영역 또한 이스라엘이라는 국한된 이 땅의 한 지역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이다. 여기에 메시야 왕국을 현세적으로 이해한 유대인들과 예수 사이에 갈등의 원인이 있었다. 한편 여기서 '무궁하리라'(우크 에스타이 텔로스)는 직역하면 '멈추지 아니하다', '끝이 없다'라는 뜻으로, 이는 그리스도께서 다스릴 메시야 왕국의 영원성을 드러내 준다.
1:34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 문자적인 의미에서 남자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성관계를 가져본 적이 전혀 없다는 말이다. 여기서 '알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기노스코'는 히브리어 '야다'와 같은 의미인데, '야다'는 성경에서 성관계를 나타낼 때 사용되었다(창 4 :1,17). 한편 카톨릭에서는 본절을 근거로 마리아의 영원 처녀설을 주장하나 마리아는 현재 자신의 처지를 말한 것뿐이므로 그러한 주장은 타당성이 없다(Geldenhuys). 특별히 복음서의 기자들은 예수께 육친이 있었음을 증거하고 있는바(마 12:46; 막 3:31,32) 카톨릭의 마리아 영원 처녀설은 받아들일 수 있는 여지가 전혀 없다.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 사가랴의 경우(18절)처럼 의심하는 말이라기보다는 성취의 길을 물은 것이라고 여겨진다(Plummer, Alford, Godet, Farrar). 혹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로서의 당연한 의아함일 것이다(Weiss). 한편 예수의 동정녀 탄생에 대해서는 본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1:35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너를 덮으시리니. - 천사는 마리아에게 성령의 능력을 상기시켜 침착하고 평온한 가운데서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바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성령이 '임하시고' 하나님의 능력이 그녀를 '덮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적이고 활동적인 힘이 그녀에게 임하였음을 나타내 주는 말로 많은 주석가들은 이 부분을 구약의 세키나(Shekinah, 영광의 구름) 사건(출 25:22; 40:34-38 민 9:15)과 연결시키고 있다(Bengel, Robertson). 특별히 여기서 '덮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스키아조'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구름이 성막을 '덮을때' 사용되었다(출 40:38). 그런데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구름이 성막을 덮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자기의 백성을 보호한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그 백성을 인도하시는 것을 나타내 주는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성령이 '세키나'의 사건과 같이 마리아에게 임하는 것은 그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잉태를 설명하는데 있어 가장 적절한 표현이라 할 것이다. '세키나'에 대하여는 신 12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하나님의 아들. - '인자'라는 말과 함께 메시야의 별칭으로, 예수께서 세례받으실 때와 변화산에서 하나님에 의해 불리워졌다(눅 3:22; 9:35). 또한 예수께서 친히 이 명칭을 사용하신 적은 없으나 베드로(마 16:16) 귀신들(막 5:7), 백부장(막 15:39) 등에 의해 예수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한편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워질 것이라는 말은 곧 그가 신적 기원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 준다.
1:36 네 친족 엘리사벳. - 예수와 요한이 친족 관계가 된다는 사실을 밝혀 주는 성경의 유일한 증언이다. 그런데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친족이 됨으로써 마리아가 다윗 가문이 아니라 엘리사벳과 같이 레위 가문의 출신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Zahn). 그러나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두 가문의 혼인 관계로 인한 먼 친척일 것으로 보는 것이 옳다(Plummer. Alford, Farrar). 27절 주석 참조. 하여튼 나이 늙어 자연적으로는 수태하지 못한 엘리사벳이 수태하여 임신 6개월이 된 사실은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표증이 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1:37 하나님의 모든‥‥없느니라. - 구약에서 천사들이 사라에게 한 말과 같은 말이다(창 18 :14). 여기서 '말씀'(레마)은 동의어인 '로고스'( )가 전반적인 개념을 나타낸 것과 달리 '선포된 말씀', 또는 '진술' 등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라는 말이다. 한편 히브리 사고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온 우주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의 창조 활동을 의미하기도 한다(시 33:6-9). 그렇다면 본절은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의미가 된다. 실로 하나님의 능력에는 어떤 장애물도 있을 수 없으므로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될 것이다.
그런데 천사가 이처럼 마리아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설명해 주는 것은 그 약속을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주된 저해 요인이 그녀의 연약한 믿음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흔히 고백하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 밖의 일을 약속하려고 하면 망설이게 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다. 물론 이처럼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인간의 지적 수준 이상으로 허용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직 하나님의 주권을 분명하고 확고하게 마음에 새기는 자들만이 신앙을 가로막는 여러 가지 장애물을 능히 극복할 것이다.
1:38 마리아가‥‥이루어지이다. - 마리아는 천사가 전해 준 믿을 수 없는 놀라운 말에 전적으로 겸손하게 순종하고 있다. 여기서 '계집 종'에 해당하는 헬라어 '둘레'는 '결코 그 주인의 뜻을 거스를 수 없는 하녀'를 의미한다. 따라서 본절의 마리아의 말은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복하겠다는 고백이다(Plummer). 물론 마리아가 천사의 말을 모두 이해했다고 볼 수는 없다. 단지 그녀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의지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하여튼 그녀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으로써 몇 가지 어려움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것은 첫째로 처녀가 아이를 낳음으로 부정한 여인으로 낙인찍힌다는 점과 둘째로 정혼자인 요셉에게서 파혼 당하리라는 점을 각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는 하나님의 능력을 확신했고 완전한 순종의 고백으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 드렸다. 여기에 마리아의 위대한 신앙이 드러나고 있다.
1:39-56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과 찬양
본문은 앞에서(5-38절) 각각 세례인 요한과 예수의 이적적 탄생 예언을 들은 엘리사벳과 마리아가 만나 서로 찬양으로 화답함을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본문을 살펴보면 먼저 천사로부터 수태 고지(受精告知)를 받은 마리아는 즉시 세례 요한을 잉태한 친족 엘리사벳을 방문한다(40절). 이때 세례 요한은 복중(服中)에서 마리아의 복중에 있는 예수 그리스를 알아보고 기뻐했는데(41절), 이는 그리스도에 대한 세례인 요한의 사역이 이미 시작되었음을 보여 준다. 또한 엘리사벳도 성령에 감동되어 마리아가 메시야를 잉태하고 있음을 크게 기뻐하며 그녀를 축복한다(41-45절). 특히 성령의 감동으로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내 주의 모친'이라고 불렀는데(43절). 여기서 '주'라는 호칭은 예수께서 메시야로 오신다는 것을 알려 주는 말이었다.
한편 46-55절은 본서에 기록된 5편의 노래 중 두 번째 것으로, 전통적으로 '마리아의 찬가'(Magnificat)라 불리워진다. 이러한 '마리아의 찬가'는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자신에게 임한 축복에 대한 감사(46-48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은혜(49,50절), 권세있는 자와 비천한 자에 대한 하나님의 공평하신 심판(51-53절),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과 언약 성취(54,55절)를 찬양한다. 그런데 이 찬가는 거의 대부분 구약의 성구를 인용하고 있으며, 특히 사무엘을 낳고 기뻐한 한나의 노래(삼상 2:1-10)와 유사한 점이 많다. 이는 유대인들의 종교 교육에서 기인한 것으로, 마리아가 어릴 때부터 성경 교육을 통해 듣거나 암송해서 익숙한 성구들을 인용하여 찬양한 것이 '한나의 노래'와 유사한 찬양을 하게 된 것으로 본다. '한나의 노래'와 유사한 점을 살펴보면 여호와로 인한 찬양과 기쁨(46,47절; 삼상 2:1), 여호와의 거룩(49절; 삼상 2:2). 교만한 자를 흩으심(51절; 삼상 2:3), 비천한 자를 높이심(52절; 삼상 2:8), 부자와 가난한 자의 처지를 바꾸심(53절; 삼상 2:5) 등이다.
그러나 마리아의 찬가'에는 '한나의 노래'에 나타나지 않는 자신의 영광된 모습이 묘사되고 있다(48,49절). 특히 이 찬가의 후반부에는 개인적 기쁨과 찬양이 확대되어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구원의 소망으로 나타난다. 즉 하나님께서 언약을 기억하셔서 이스라엘 민족을 압제자들로부터 구원해 주실 것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구약 시대부터 내려온 메시야 사상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을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구원해 낼 메시야의 영적 사역을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언약을 성취하시는 언약의 대상은 궁극적으로 영적 이스라엘인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리킨다(롬9:5; 갈 3:16; 6:16). 그러므로 이 마리아의 찬가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체험한 자들이 필연적으로 그분을 찬양하고 감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교훈해 준다.
1:39 이 때에 마리아가 일어나 빨리 산중에 가서 유대의 한 동네에 이르러. - '이 때에'라는 표현은 누가가 자주 사용하는 애용어로(눅 1:5; 2:1; 4:25; 9:36; 행 1:15; 2:18; 5:37), 마태가 자주 사용한 '그때'라는 시간 부사와 같이 앞뒤 문맥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이때는 아마도 마리아의 수태 고지가 있은 후 약 1개월 정도 후일 것으로 추정되는데(Farrar) 그 사이에는 아마도 마 1:18-24의 사건이 있었을 것이다(Spence),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절은 마리아가 천사가 떠난 후 즉시 친족 엘리사벳을 방문하고자 한 것처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누가가 천사의 메시지에 대한 마리아의 순종을 강조하고자 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본절은 엘리사벳의 집의 위치를 분명하게 나타내지 않고 단지 '산 중에'(오레이넨)라고만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엘리사벳의 집이 유대 땅 어느 곳에 위치했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오레이넨'이라는 말은 해안에 인접한 산지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다(Lenski). 이를 근거로 학자들은 엘리사벳이 거주했던 동네를 헤브론 남쪽 유다(Juttah)일 것으로 추정한다(Reland, Plummer. Farrar). 이곳은 나사렛에서 무려 150km나 떨어진 곳이다. 마리아는 친족 엘리사벳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수태하게 된 것을 축하해 주기 위해 이처럼 먼 곳까지 기꺼이 여행을 떠났던 것이다.
1:40 사가랴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문안하니. - 마리아는 마침내 사가랴의 집에 도착하여 엘리사벳에게 문안 인사를 했다. 특별히 여기서 '문안하다'(에스파사토)는 '껴안다'라는 의미로, 이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서로의 만남을 기뻐하며 포옹하는 장면을 표현한 것이다.
1:41 엘리사벳이 마리아가 문안함을 들으매 아이가 복중에서 뛰노는지라. - 임신 6개월 된 아이가 어머니의 복중(womb)에서 뛰노는 것은 특이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이러한 아이의 행동이 마리아의 문안을 받고 나서 발생했다는 것은 아이가 성령의 충만으로 인해서 메시야의 어머니를 알아보고 기뻐했음을 의미한다(45절). 이처럼 요한이 그리스도를 기뻐한 것은 이후 그의 사역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나는데 이는 그와 예수와의 관계를 잘 드러내 준다(요 1:34).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 엘리사벳은 그녀의 복중의 아이와 마찬가지로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그런데 이처럼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을 입게 된 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섭리에 의해서이다. 즉 성령께서는 엘리사벳을 감동시켜 장차 마리아에게서 메시야가 나실 것을 예언하게 하고 또한 이스라엘에 임한 큰 축복과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찬미케 하신 것이다(42-45절).
1:42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 직역하면 '큰 부르짖음'이라는 뜻으로, 기쁨에 넘쳐 찬사를 터뜨리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는 성령에 감동된 엘리사벳이 메시야를 잉태한 마리아의 문안을 받고 희열에 넘쳐 큰 소리로 탄성을 발했음을 나타낸다. 하여튼 본절에서부터 45절까지에 나타나는 엘리사벳의 노래는 한글 개역 성경에는 산문 형태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자그마한 시의 형태를 가지고 있다. 한편 본서에는 예수의 탄생과 관련하여 모두 다섯 개의 시적 형태의 노래가 나타나는데 이에 대해서는 2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 유대 여인이 받을 수 있는 가장 명예로운 칭찬이다(삿 5:24 ; 아 1:8). 이와 같은 엘리사벳의 칭찬은 여인의 신분이 남편과 그녀가 낳은 아이에 의해 평가되 었던 유대 사회의 관습을 반영한 것으로 메시야를 출생할 마리아가 다른 모든 여인보다 크고 위대하다고 일컬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Fitzmyer).
네 태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 - 문장의 흐름으로 보아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 임신 사실을 알리지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벳은 즉각적으로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깨달았는데 이는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아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미리 알았던 까닭이다(AUord. Bengel).
1:43 내 주의 모친이 내게 나아오니 이 어찌된 일인가. -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단순한 친척 이상으로 대하는 장면이다. 그녀는 성령의 영감으로 마리아를 '내 주의 모친'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여기서 '주'는 유대인들이 대망한 메시야를 가리킨다. 따라서 마리아를 카톨릭에서와 같이 '하나님의 어머니'(데오토코스)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마리아는 인성을 지니고 메시야로서 오신 예수의 육적 어머니일 뿐 하나님의 어머니라 불릴 수 없는 것이다. 한편 마리아에게 취한 엘리사벳의 태도는 구약에서 아라우나가 다윗의 방문을 받고 자기는 왕의 방문을 받을만한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삼하 24:21). 엘리사벳은 진정 세례 요한이 예수는 흥하여야 하고 자신은 쇠하여야 한다고 고백한 것(요 3:30)과 같이 하나님이 마리아에게 준 우월한 축복을 시기하거나 질투하지 않고, 순전한 겸손으로 인정했다.
1:44 보라 네 문안하는 소리가 내 귀에 들릴 때 아이가 내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놀았도다. -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잉태한 분이 메시야임을 성령으로 직감하였는데 그것은 자신이 잉태한 아이가 마리아의 문안하는 소리를 듣고 심한 태동을 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헬라어 원문의 본절 앞에 있는 전치사 '가르'는 이유를 나타내주는 말로서 그 의미는 '~이기 때문에 ~하다'로 아기 요한이 기뻐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설명해 주고 있다. 즉 마리아의 목소리를 듣고서 기뻐 뛰놀게 된 것이다. 결국 세례인 요한은 태중에서부터 메시야를 맞이할 선구자적 사명을 개시하였던 셈이다.
1:45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 본문은 옐리사벳의 독백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지금까지 마리아를 2인칭(네가)으로 호칭하다가 갑자기 3인칭(그에게)으로 바꾸어 사용하고 있음을 보아서 알 수 있다. 한편 한글 개역 성경에는 나타나지 않으나 헬라어 원문에는 '복이 있도다'와 '주께서' 사이에 '~하는 것'(that), 또는 '~이기 때문에'(because)라는 의미의 '호티'가 있다. 이를 전자의 의미로 해석하면 본절은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리라고 하는 것을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라는 의미가 되고, 후자의 의미로 해석하면 '믿은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 왜냐하면 주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의미가 된다. 어느 해석도 좋으나 후자의 해석이 보다 적합하다.
1:46,47 마리아가 가로되. - 본절에서부터 55절까지는 일명 '마리아의 찬가'(Magnitficat)라 불리는 부분으로 삼상 2:1-10에 수록된 한나의 노래와 비슷하나 그 내용은 보다 깊고 포괄적이다. 한편 몇몇 사본에는 본절에 '마리아' 대신 '엘리사벳'으로 나타나 있는 까닭에(알렉산드리아. 바티칸. 레기우스 사본) 일부 학자들은 '마리아의 찬가'를 엘리사벳의 노래의 연속으로 보나, 대부분의 사본과 학자들은 마리아의 찬가로 본다.
내 영혼이‥‥내 마음이. - 본절은 인간의 삼분설(trichotmy)을 주장하는 학자들(Vincent, Farrar)의 근거가 되는 구절이다. 즉 삼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인간이 '영'(프뉴마)과 '혼'(프쉬케)과 '육'(소마) 세 부분으로 구성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의 전반적인 흐름은 인간은 '영' 또는 '영혼'과 '육' 두 부분으로 구성되었음을 보여 준다(창 2:7). 즉 '영'과 '혼'은 별개의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의 두 가지 명칭인 것이다(창 41:8; 시 42:6; 요 12:27). 이에 대해서는 성경교리 부분 '인간론'을 보다 참조하라. 사실 히브리인들은 동일한 의미의 말을 다른 말로 반복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하고자 하는 말을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다(신 6:5). 하여튼 여기서 '내 영혼'이나 '내 마음'은 다같이 마리아 자신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주를 찬양하며. - 여기서 '찬양하며'(메갈뤼네이)는 '크게 기뻐하다'라는 뜻으로, 본절은 마리아가 큰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했음을 보여 준다.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 마리아는 하나님의 위대함을 찬양하면서 동시에 구원자로서의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다. 그런데 마리아가 하나님을 구원자로서 고백한 것은 그녀가 자신이 잉태한 예수와 관련된 하나님의 계획을 이해한 것으로 볼 수 있다(Lenski).
1:48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 마리아가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는 이유를 나타내 주는 구절이다. 특별히 '비천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타페이누스'는 매우 '낮은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본절은 나사렛 목수의 정혼자인 마리아 자신의 비천함(마 1:18)을 인식한 말인 동시에 그러한 자신을 메시야의 모친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마리아의 겸손한 마음의 고백이다.
이제‥‥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 마리아는 메시야를 잉태했다. 그것은 그녀가 하나님께 크신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이제 마리아는 메시야의 모친으로 모든 세대에 알려지고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한, 사람들은 그녀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축복을 말할 것이며 따라서 그녀의 영광 또한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마리아가 이 말을 사람들의 숭배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의미로 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다만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메시야의 모친이 되는 은혜를 주신 것에 감사한 것 뿐이다. 따라서 카톨릭의 마리아 숭배는 지극히 잘못된 것이다.
1:49 능하신 이가 큰 일을. - 마리아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두 번째 이유에 해당되는 부분이다. '능하신 이'는 구약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창 17:1; 시 89:8). 특별히 이 말은 모든 사람이 굴복할 수밖에 없고,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을 가지신 하나님을 표현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본절에서는 동정녀에게 메시야를 잉태케 하신 능력의 하나님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 - '거룩'(하기온)은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로, 모든 피조물 위에 뛰어나신 하나님의 초월성과 무흠하신 도덕적 특성을 드러내 준다(출 3:4,5; 레 11:44; 벧전 1:16). 실로 하나님은 영원히 거룩하신 분이시다(사 57:15). 바로 그러한 거룩하신 분이 비천하고 보잘 것 없으며 죄로 오염된 자신에게 역사하여 인류를 구속할 메시야를 잉태케 하심을 마리아는 지금 찬미하고 있는 것이다.
1:50 긍휼하심이 두려워하는 자에게. -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한 자들에게 임하시는지를 보여 주는 구절이다. 여기서 '긍휼'(엘레오스)은 '자비', '은혜', '사랑' 등을 의미하며 '두려워하는'이란 하나님의 권능과 위대하심을 올바로 인식한 상태,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의미한다(행 10:2,22; 골 3:22; 계 14:7). 그와 같이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른다(시 103:17).
1:51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 구약성경에 자주 나타나는 신인 동형 동성론적(神人同形同性論的) 표현으로(신 4:34; 시 44:3; 89:13), 여기서 팔은 하나님의 '능력'을 상징한다(Hendriksen, 출 6:1; 신 4:34; 사 40:10). 마리아는 이러한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대적과 원수를 파멸시키는 데 사용될 뿐만 아니라,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데도 사용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51-55절). 한편 신인 동형 동성론적 표현에 대하여 는 신 32장 자료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마음의‥‥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 '교만한 자'는 앞절(50절)의 '두려워하는 자'와 대조를 이루는 자들로서 하나님께 대하여 대적하는 자를 가리킬 때 사용하는 말이다(사 2:12: 13:11). 또한 '흩으시다'(디아스콜피조)는 '흩어지게 하다'. '퍼뜨리다', '휘뿌리다'라는 의미로, 70인역(LⅩⅩ)에서 주로 하나님의 심판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삼하 22:15). 그러므로 본절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대적하는 불의한 자를 친히 심판하신다는 의미이다. 한편, 성경에서 '마음'은 인간의 감정, 행위, 사상 등의 원천, 곧 인간 존재의 핵심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란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을 거부하고 대적하는 자를 가리킨다.
1:52 권세 있는 자를‥‥비천한 자를. - '권세 있는 자'와 '비천한 자'는 사회적 지위 면에서 대조를 이루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다. 그런데 마리아는 하나님께서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고 비천한 자를 높이셨다고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권세는 무조건 악하고 비천함은 무조건 선한 것으로 오해하게 하기 쉽다. 그러나 권세가 무조건적으로 악한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다고 비천함이 무조건 선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본절의 마리아의 노래는 앞의 '두려워하는 자' 및 '교만한 자'를 전제하여 생각해야만 한다. 즉 여기서 '권세 있는 자'는 그의 권세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을 알지 못하고 그 권세로 인하여 교만히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죄악을 범한 자들을 가리킨다. 반면 '비천한 자'는 그의 비천함으로 인하여 하나님 앞에 겸손히 복종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따랐던 자들을 가리킨다. 하나님께서 교만하고 강한 자를 낮추고 겸손하고 비천한 자를 높이신다는 것은 성경 전체의 흐름으로, 바울 서신에도 명백하게 나타나고 있다(고전 1:26-28).
1:53 주리는 자를‥‥부자를. - '주리는 자'와 '부자'는 경제적인 면에서 대조를 이루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다. 마리아는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주리는 자'를 배불리시고 '부자'를 공수(空手)로 보내셨다고 노래하고 있다. 이러한 본절 역시 앞절의 '권세 있는 자'와 '비천한 자'에 대한 해석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하여튼 멸시받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보이고, 부자나 권세 있는 자와 같이 기득권층에 대해 경계하는 것은 누가의 특징 중 하나이다(눅 6:20-26; 12:
13-21; 16:19-31). 하나님의 공의는 자신의 의(義)와 자랑에 빠져버린 부자들에 대해서 책망하시고 징계하시지만, 마음이 가난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그의 백성들에게는 한량없는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물론, 권세나 부 자체가 악하고 잘못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구약적 개념에 의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의 산물이다. 다만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높아져 부유해진 마음이 잘못이다.
1:54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 '이스라엘'은 야곱의 후손으로서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이 용어에는 그들이 특별히 하나님을 섬기도록 선택된 '언약 공동체' 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그러나 신약에서는 이스라엘의 개념이 혈통적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즉 아브라함의 자손이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만이 참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할 수 있다(마 3:9; 롬 9:6). 따라서 '이스라엘'은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소유하여 하나님의 언약 공동체에 들어간 모든 성도들을 가리킨다. 하여튼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섬기도록 선택된 여호와의 종이다(사 41:8; 42:1; 44:21; 렘30:10). 그리고 하나님은 그 종을 돕기로 약속했다(사 41:9; 42:1). 따라서 하나님의 종인 이스라엘은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야 하며 그 안에서 가장 높은 축복을 발견해 내야 한다(Lenski). 하나님은 자신의 뜻에 순종하는 백성을 도우시고 긍휼을 베푸신다 이것은 과거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무수히 체험되어진 것이었으며. 오늘날에도 그의 뜻을 순종하는 모든 영적 이스라엘 자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1:55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행하신 언약(창 18:18; 22:18; 26:3,4; 28:14; 출 2:24; 레 11:45; 26:12,45)을 하나님이 신실하게 지켜주셨음을 감사드리는 마리아의 신앙 고백이다. 사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기에 하나님은 그들을 저버리셨으며 기억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마리아가 구주를 잉태함으로 하나님께서 그 조상들과 맺으신 언약을 잊지 않으시고 지키시는 신실한 분이심이 확증된 것이다. 실로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을 그 어느 것 하나도 변개치 않고 반드시 지키실 것이며 그의 백성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실 것이다.
1:56 석 달쯤 함께‥‥돌아가니라. - 마리아는 엘리사벳의 해산 시기가 될 때까지 엘리사벳의 집에 머물러 있었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엘리사벳과 함께 하나님의 약속과 기적에 대해 대화를 나누면서 기쁨으로 생활했을 것이다(Geldenhuys). 마리아가 요한의 출생을 보고 떠났는지에 대해서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녀는 요한의 출생을 보지 않고 떠났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Bengel, Godet. Ellicott). 왜냐하면 그녀가 요한의 탄생을 보았다면 누가가 그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을리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나이 많은 엘리사벳이 해산할 즈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몰려올 것이기 때문에 임신한 마리아가 번잡함을 피하기 위해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한편 헬라어 원문을 보면 본절의 '집'은 '마리아의 집'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그녀는 아직 요셉과 결혼하지 않은 상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57-66 세례인 요한의 탄생
앞단락(39-56절)에서는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해서 서로 축복하고 찬양으로 화답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장면이 소개되었다. 이어 본문은 천사에 의해 이미 예언되었던(13-20절) 세례 요한의 탄생을 소개하고 있다. 세례인 요한은 육신적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던 아브라함의 가정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난 이삭(창 18:10-14; 21:1,2)과 같이 하나님의 기적적인 섭리로 출생하였다.
이렇듯 아이가 없던 사가랴 가정에서의 세례인 요한의 출생은 이웃과 친족 모두에게 큰 기쁨이 되었는데(58절), 이것은 세례인 요한이 예비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해 죄악 속에서 방황하며 신음하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크게 기뻐하게 되리라는 것을 암시한다. 이것은 그의 이름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요한'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다'라는 의미로 그의 탄생이 메시야를 보내실 하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기 위한 것임을 보여 준다.
사실 세례인 요한은 가정에 소망과 기쁨을 주었고 민족에는 영적 각성과 회개의 신앙을 갖도록 하였으며, 온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메시야의 복음을 전파한 은혜의 심부름꾼이었다. 이런 세례인 요한의 출생은 이미 구약에서 예언되었던 말씀이 성취된 것(말 3:1; 4:5,6)으로 그는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여년 만에 등장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비했다는 점에서 구약과 신약 시대를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눅 3장 연구 자료를 보다 참조하라.
한편 사가랴는 세례인 요한의 이름을 정할 때에 가문의 전통과 관습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인간의 전통이나 관습 또는 정보다 하나님의 뜻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교훈을 준다(신 13:6-8; 28:1-3).
1 : 57 엘리사벳이‥‥아들을 낳으니. - 해산할 기한이 되자 엘리사벳은 천사가 예언한 그대로 아들을 낳았다(13,19절). 이로써 하나님의 약속의 신실성과 하나님의 전능성은 다시 한 번 드러났다.
1:58 이웃과‥‥함께 즐거워하더라. - 엘리사벳이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서 은둔 생활을 한 것은 아이를 낳을 때까지 계속 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24절). 따라서 요한이 태어나기 전까지 친족과 이웃들은 엘리사벳의 임신에 대해서 몰랐을 것이다(Fitfmyer). 하지만 출산이 임박해지자 그 소식이 친족과 이웃에 전해지고 그들은 엘리사벳의 출산을 축하하기 위해 몰려온 듯하다. 한편 본절에서 '함께 즐거워하더라'(쉬네카이론 아우테)는 미완료 시제로 친족과 이웃들이 엘리사벳의 출산을 계속적으로 기뻐했음을 보여 준다. 실로 우리는 여기서 천사가 사가랴에게 한 말, '많은 사람도 그의 남을 기뻐하리니'(14절)라는 말이 성취되었음을 보게 된다. 물론 이것은 이웃과 친족들이 그 아이가 메시야의 길을 예비할 자가 될 것을 알았다는 말이 아니다. 그들은 다만 노부부가 아들을 낳은 것을 기뻐한 것이다.
주께서 저를 크게 긍휼히 여기심. -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푼 사실에 대한 히브리적 표현이다
(왕하 13:23). 실로 무자한 사가랴 부부가 아들을 낳게된 것은 지난날의 슬픔과 수치를 완전히 벗어버리기에 충분할 만큼 그들이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사랑을 입은 것으로 사람들에게 인식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1:59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 하러 와서. - 모세의 율법은 사내아이가 출생한 지 8일째 되는 날 할례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창 17:12; 21:4; 레 12:3). 따라서 유대인들 사이에 할례를 베푸는 날짜는 엄격하게 지켜졌는데, 심지어 안식일에도 할례를 행하였다(요 7:22-23). 이러한 할례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자손이 맺은 언약의 표징으로서(창 17:11) 몸에 흔적을 남겨, 하나님의 언약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 시도되었다. 그에 따라 요한도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은 것이다.
할례의 방법, 의미, 범위 등 전반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창 17:10,14 주석과 레 12장 자료노트를 참조하라.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은 부모의 특권인데도 친척들이 아이의 이름을 지으려고 한 것은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것은 아마도 아직까지 사가랴가 말을 못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여튼 부친의 이름을 따라 자녀의 이름을 짓는 것은 유대인에게 매우 일반화된 관습이었다(Josephus, Plummer). 이에 따라 사가랴의 친족들은 아이의 이름을 사가랴로 하고자 한 듯하다. 한편 난지 8일 만에 할례를 시행하면서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 역시 유대인의 보편화된 관습이었다(눅 2:21).
하고자 하더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칼룬'은 '부르고자 했다'는 뜻으로 의지를 나타내는 미완료 시제이다. 따라서 본절은 사가랴의 친족들이 아이의 이름을 계속해서 '사가랴'로 부르고자 했음을 시사한다.
1:60 모친이…요한이라. - 친족들이 아이의 이름을 사가랴라고 지으려 하자 엘리사벳은 단호하게 거절하고 '요한'이라고 할 것을 주장했다. 그녀는 아마도 남편 사가랴와의 필담 등을 통해 천사가 전하여 준 이름을 알게 된 듯하다(Bruce, Plummer). 한편 '요한'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라는 뜻으로, ① 무자한 사가랴 부부의 슬픔과 수치를 씻었다는 점에서, ② 그의 수태 고지 때 사가랴에게 내려졌던 하나님의 징계가 풀렸다는 점에서, ③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선구자였다는 점에서 사가랴 부부는 아이의 이름을 온 인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이라는 뜻에서 요한으로 짓고자 했다.
1:61 네 친족 중에…없다 하고. - 아이의 이름을 '요한'으로 지어야 한다는 엘리사벳의 말은 그것이 가문의 이름이 아니라는 이유로 즉각적인 반대에 부딪힌다. 유대 사회는 가문의 이름이 각기 있었고 후손들의 이름은 그 가운데서 지어지곤 하였다. 제사장의 가문은 특히 이러한 규칙을 따라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낯선 이름을 아이에게 붙이려고 하였으니 계시의 내용을 모르는 친척들이 이상히 여기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더욱이 '사가랴'라는 이름은 포로 귀환 이후의 제사장
가문에서 사용되어 내려온 유서 깊은 이름이었다(느 12:16,41).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이 아이의 이름을 결정할 만한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부친의 동의를 얻고자 시도한다.
1:62 그 부친께 형용하여…물으니. - 여기서 '형용하여'(에네뉴온)는 손과 발 등을 사용하여 의사를 표시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즉 사가랴의 친족들은 사가랴에게 아이의 이름을 무엇으로 지을 것인가에 대해 손짓과 몸짓으로 물었던 것이다. 그런데 친족들이 이처럼 형용으로 사가랴에게 물었다는 것은 사가랴가 말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듣지도 못하는 상태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Alford, Farrar, Ellicott). 사실 22절에 '벙어리'로 번역된 헬라어 '코포스'는 벙어리인 동시에 귀머거리인 사람에게 사용되는 단어이다(눅 7:2).
1:63 서판을 달라‥‥요한이라 쓰매. - '서판'(피나키디온)은 밀랍을 바른 나무판으로 그 위에 뾰족한 것이나 송곳으로 쓰게 되어 있다. 사가랴는 망설임 없이 서판 위에다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썼다. 이러한 사가랴의 단호한 태도와 엘리사벳과의 의견 일치는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1:64 그 입이‥‥찬송하니. - 사가랴가 아이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쓰자 즉시 그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져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즉 불신의 표적이었던 벙어리가 이제 도리어 믿음과 순종의 표적이 된 것이다. 한편 말을 할 수 있게 된 사가랴가 처음으로 한 것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이전의 의심하던 것과는 정반대되는 모습이며, 약 10개월 동안 벙어리로 지내면서 사가랴가 어떠한 생활과 생각을 하고 지냈는지 짐작하게 한다. 그는 아마도 이 침묵의 기간 동안 하나님과 내밀한 교제를 나누면서 자신의 불신을 깊이 뉘우치고 순종의 도를 배웠음에 분명하다.
1:65 다 두려워하고. -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이적을 목도할 때 사람들은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그와 같이 사가랴의 친족들은 그들 눈앞에서 일어나는 놀라운 이적을 목도하고 두려움에 빠졌다. 그러나 여기서 '두려워하다'에 해당되는 헬라어 '포보스'( )는 단순히 무서워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깊은 종교적 경외감을 의미한다. 즉 사람들은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이적을 목도하고 하나님께 대해 더욱 깊은 경외감을 가진 것이다.
유대 산중에 두루 퍼지매. - 사가랴가 살고 있었던 지역은 대부분 산악 지대이기 때문에 어떤 소문이 퍼지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사가랴가 성전에서 환상을 보고 벙어리된 사건, 나이 많아 늙은 엘리사벳의 임신, 요한의 출생과 사가랴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이적 등은 전체 유대사회에 급속히 퍼질만한 사건이었다. 특별히 여기서 '두루 퍼지다'에 해당하는 헬라어 '디엘랄레이토'는 '화제가 되다'라는 뜻으로 요한의 출생과 관련된 일들이 유대 사회의 화제가 되었음을 보여 준다. 한편 세례인 요한의 출생이 이렇게 전체 유대사회에 알려지게 된 것은 이후 주의 길을 예비하는 세례 요한의 사역에 있어서 필시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Fitzmyer).
1:66 듣는 사람이 다‥‥장차 어찌될꼬 하니. - 유대 사람들은 요한의 출생과 관련하여 자신들이 들은 모든 기이한 사실들을 마음에 새겨두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자연히 이 아이가 커서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사실 요한의 출생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하심이 나타난 사건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가 장차 유대 민족을 위하여 큰 일을 할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임에 분명하다.
주의 손이. - '주의 손'은 누가가 특정인에 대한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관련하여 자주 사용하는 신인 동형 동성론(神人同形同性論)적 표현으로(행 11:21; 13:11) 여기서는 요한을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관심을 표현하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하여튼 요한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는 헛되지 않아서 요한은 장차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고 그 첩경을 평탄케 하는 선지자로서 사역하게 된다.
1:67-80 사가랴의 찬가
앞단락(57-66절)에서 세례인 요한의 탄생을 소개한 데 이어 본문은 그 아버지인 사가랴가 성령 충만함을 입어 예언한 노래를 담고 있다. 이는 본서에 기록된 다섯 편의 노래 중 '마리아의 찬가'(Magnificat, 46-55절) 이후 세 번째로 나오는 '사가랴의 찬가'(Benedictus)로 불리는 노래이다. 이 외에도 본서에는 메시야의 탄생을 축하하는 '천사들의 영광송'(눅 2:14)과 메시야를 찬양하는 '시므온의 고별송'(Nunc Dimlttis, 눅 2:29-32)이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본서에는 찬양의 복음서라 할 수 있을 만큼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돌리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눅 2:20; 5:25,26; 7:16; 13:13; 17:15; 18:43). 하여튼 사가랴는 천사의 예언대로 벙어리의 징계에서 풀려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바로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찬양하게 되었다. 이미 사가랴는 10개월에 걸친 침묵의 기간에 하나님과 영적 교제를 나누며 자신의 불신앙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신앙의 도리를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사가랴의 찬가'의 구성은 모두 네 소절로 나뉘어지는데 메시야를 보내 주심에 대한 감사(68-71절), 구원의 언약을 찬양(72-75절), 세례인 요한의 사명(76,77절), 메시야의 구원을 찬양(78,79절)하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나. 이를 보면 사가랴의 찬가는 '마리아의 찬가'와 마찬가지로 전반부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이 세우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신실하게 성취하시므로 메시야의 도래가 있을 것을 예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또한 과거 이스라엘의 대적에게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메시야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이다. 메시야의 도래는 유대인들의 마음속에 언제나 염원하던 희망인데, 하나님께서는 인자(人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사탄과 죄악의 권세로부터 인류를 해방시키고자 하는 당신의 구원 계획을 성취하셨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구원의 성취를 준비하는 메시야의 선구자 세례 요한을 그의 길을 예비하는 선지자로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전반부는 구약적이고 후반부는 신약적인 색채를 띠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마리아의 찬가'와 '사가랴의 찬가' 사이에는 다소 차이점이 발견되는데 '마리아의 찬가'는 어조가 장엄한 예배 풍으로 시편을 주로 인용한 반면, '사가랴의 찬가'는 제사장풍으로 예언서의 여러 구절을 인용한다는 것이다.
한편 우리는 본문을 통해 인간은 약속을 파기할 수도 있고 잊을 수도 있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언약을 성취하시는 신실한 분임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약속된 하나님의 언약이 언제 어떻게 이루어질지 알 수 없지만 언약의 불변성을 확신하고 그것이 속히 이루어지기를 간구하며 기다리는 믿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민 23:19; 약 1:17).
1:67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 본절에서부터 79절까지는 일명 '사가랴의 찬가'(Benedictus)라 불리는 부분으로, 이러한 사가랴의 찬가는 성령의 충만한 임재 가운데 말해진 하나의 예언이다. 한편 이러한 사가랴의 찬가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첫째 부분은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바를 기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을 베풀어 주심을 찬양하는 내용이다(68-75절). 두 번째 부분은 새로 태어난 아이의 사명, 즉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자로서의 그의 과업을 예언하는 내용이다(76-79절). 이런 사가랴의 찬양은 구약시대의 마지막 예언이며 동시에 신약시대의 첫 번째 예언이라고 할 수 있다(Farrar. Morice).
1:68 그 백성을 돌아보사. - 사가랴가 하나님을 찬송하는 직접적인 이유이다. 여기서 '돌아보다' 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피스케프토마이'( )는 '도움을 주기 위해 살펴본다'라는 뜻으로 여기서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면서 그들의 필요를 채우시기 위해 그들을 방문하거나 돌보시는 것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되었다(눅 7:16). 한편 본절에서 이 말은 과거형 시제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하나님의 자기 백성에 대한 돌아보심의 증거가 이미 요한의 출생과 메시야의 잉태로 나타났음을 사가랴가 인식한 까닭이다(Marshall).
속량하시며. - '속량'에 해당되는 헬라어 뤼트로시스( )는 '해방', '자유', '속전'을 뜻하는데 이것은 어떤 이가 죄인을 위하여 높은 배상금을 치르고 구해 주는 행위를 의미한다(Lenski). 따라서 이 말이 종교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죄와 사망의 구속과 억압에서 해방과 자유를 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가리킨다. 실로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당신의 독생자의 피라는 높은 속전을 지불하셨던 것이다(마 20:28; 막 10:45 ; 딤전 2:6). 그러한 의미에서 사가랴는 지금 예수의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속량 행위를 예언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일부 비평적인 학자들은 유대인들의 구원관 및 메시야관에 비추어 볼 때 사가랴는 단지 이스라엘이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되기를 염원했던 민족적 소원을 표현한 것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했다는 67절의 기록이나 '주의 백성에게 그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알게 하리니'(77절)라는 기록에 비추어 볼 때 사가랴가 말한 하나님의 속량은 영적인 구속 행위를 예언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설혹 사가랴가 정치적 의미에서 '속량'을 말했다 할지라도 그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영적 구속 행위를 예언하고 있음은 신약 성경 전반의 흐름이 잘 입증해 준다.
1:69 구원의 뿔을. - 히브리적 표현 양식에서 '뿔'은 일반적으로 '힘'과 '능력'을 상징한다(신 33:17; 왕상 22:11; 시 22:21; 75:5). 따라서 여기서 '구원의 뿔'이란 '능력 있는 구세주' 곧, 인류를 죄와 사망의 압제에서 구원할 메시야를 지칭하는 말이다(삼상 2:10; Robertson, Marshall).
그 종 다윗의 집에 일으키셨으니. - '구원의 뿔'을 다윗의 집에서 일으키신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야가 다윗 가문의 출신으로, 그의 직접적인 후손이 된다는 말이다. '구원의 뿔'을 요한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 요한은 다윗 가문과 연결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견해는 받아들일 수 없다. 사가랴는 지금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된 아이를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한 것이다(Hendriksen). 하여튼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다윗의 가문에서 나와서 이스라엘을 모든 이방의 압제자들로부터 해방시키고 이상적인 왕국을 건설할 것이라는 메시야 사상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예수가 다윗의 가문에서 태어나심은 결코 이상적인 지상적 나라 건설에 뜻을 두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의 오신 목적은 영원한 나라의 건설에 있음을 주지해야 된다. 즉 메시야로서 찾아오신 예수는 결코 이스라엘의 정치적 해방을 목적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한편 본절은 다윗을 '구원의 뿔'의 '종'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메시야가 이미 다윗 이전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의미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선재성을 증거한다(요 1:1-3). 예수의 선재성에 대하여는 요 8장 자료 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가 인간의 모습으로 오시고, 그것도 다윗 가문에서 출생하심은 다윗에게 하신 언약을 그대로 성취하신 것이었다(시 132:17). '다윗 언약'에 관하여는 삼하 7장 자료 노트를 보다 참조하라.
1:70 주께서 예로부터… 말씀하신 바와 같이. - 메시야가 다윗의 가문에서 나심은 갑작스럽게 발생한 사건이 아니다. 이미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 수없이 예언되었던 바이다. 사실 구약 전체가 메시야에 대해 초점을 모아 예언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Geldenhuys). 한편 여기서 '예로부터'(아프 아이오노스)는 '세상이 시작된 이래'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창조 때부터를 의미하지 않고 오랜 시간 이전을 가리킨다.
1:71 원수에게서와…구원이라. - 메시야의 구원의 내용을 설명하고 있는 구절이다. 즉 메시야의 구원은 그 원수들로부터의 구원이며 미워하는 자로부터의 구원이다. 그런데 구약에서 사용되어진 구원의 개념은 육체적이고 현세적인 것으로 억압이 제거된 상태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았다(창 26:31; 출 14:13; 15:2-5; 삼상 19:5). 특히 민족적으로는 이방인의 침략에서 구출되는 것을 가리켰다(출 14:13; 15:2-5; 대하 20: 17). 하여튼 본절에서 원수들이 누구인지 특정한 묘사는 없으나 구약의 구원관에 비추어 본다면 그들은 아마도 로마나 로마의 사주를 받은 헤롯 일당이 될 것이다. 또한 구원 역시 로마의 속박에서의 해방을 의미할 것이다. 그러나 구약의 구원 개념은 신약에 와서 그리스도를 통해 확대된다. 그것은 육적이고 현세적인 것뿐만 아니라 영적이고 영원한 것이다(Lenski). 우리의 원수는 사단과 흑암의 세력이고 죄의 권세이다(엡 2:1,2). 따라서 그리스도의 구원은 포괄적이고 영적인 것이며 죄악과 죽음에서 해방시켜 승리케 하는 건지심을 의미한다.
1:72 우리 조상을 긍휼히 여기시며. - 이스라엘 역사를 돌이켜 보면 하나님은 항상 언약에 신실하셨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배반의 연속이었다.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찍이 버림받아 마땅한 존재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파기하지 않으시고 사가랴 때까지 지속하시며 이스라엘을 돌보아 주신 것은 자기의 택한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의 결과였다. 거룩한 언약. - 사가랴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의에 맺은 언약을 '거룩한 언약'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는 그 언약 자체가 어떤 거룩성을 띠고 있다는 말이다. 즉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언약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주체가 되어 맺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언약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계획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거룩한 것이다.
1:73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맺은 언약의 대표자이다. 그리고 '맹세'는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체결하신 방법이었다(창 22:16). 결국 사가랴는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맹세로 세우신 언약을 이루셨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내용은 그 씨에 의해 원수가 정복되고 그 씨로 말미암아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는 것이었다(창 22:16-18). 물론 이 언약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영적 이스라엘의 구원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서는 창 22:16-18 주석을 참조하라. 사가랴가 이 언약의 내용을 얼마나 명확하게 이해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그는 적어도 하나님께서 이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메시야를 보내셨다는 것은 확신했음이 분명하다.
1:74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 언약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가리켜 주는 구절이다. 71, 73절 주석 참조. 한편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원수에게서 구원하시는 데에는 종교적인 목적이 있다. 그것은 곧바로 다음절에 나오듯이 두려움 없이 하나님을 섬기게 하고자 하심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당신을 완전한 자유와 전심으로 섬기도록 하기 위하여 죄와 사망과 같은 속박에서부터 건져 구원해 내시는 것이다(Geldenhuys).
1:75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 원수의 손에서 건짐 받은 자들의 삶은 거룩함과 의로움으로 성격지어지며 '죄와 분리된 삶'이다. 특별히 여기서 '성결'(호시오테티)이란 말은 구원받은 자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말로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을 뜻한다. 따라서 성결은 도덕적인 완전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의'는 하나님이 판단하실 때 옳다고 인정하는 것을 행하는 것 또는 사람 앞에서 행해야 할 바른 행위를 가리킨다. 따라서 '성결'은 내적 생활과 더 관계하고, '의'는 외적 행위와 더 관계한다(Robertson). 그러한 의미에서 '성결과 의' 두 단어는 신자의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의무를 잘 나타내고 있다 할 것이다(Marshall). 한편 '주의 앞에서'에 해당되는 헬라어 '에노피온 아우투'는 '그의 앞에서'라는 의미로, 제사장이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길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Lenski). 결국 본절은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자유롭게 섬기게 될 것을 예언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76 이 아이여. - 사가랴의 찬양의 내용이 바뀌어 여기서부터 자신의 아들의 생애와 하나님의 구속 행위와의 관계를 노래하고 있다. 여기서 '아이'는 세례 요한을 가리킨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 - '지극히 높으신 이'는 초월적인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이다(32절 주석 참조). 따라서 본절은 요한이 하나님의 선지자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결국 본절은 요한과 그리스도와의 신분적 차이를 분명하게 해준다. 한편 여기서 요한을 하나님의 선지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하면 말라기 선지자 이후 선지자가 400년 동안이나 끊긴 종교적 암흑기에 그가 하나님의 선지자로서 활동하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구속의 역사를 새롭게 시작하고 계심을 암시하여 주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하여튼 요한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선지자라고 불리는 것은 바로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그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맡은 자이기 때문이다.
주 앞에 앞서 가서 그 길을 예비하여. - 사 40:3과 말 3:1의 반영으로 세례 요한의 사명을 보여 주는 구절이다. 즉 요한은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그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갖고 있었다. 이 예언은 훗날 그대로 성취된다(마 3:1-3; 눅 3:3-6). 한편 여기서 '길을 예비한다'는 것은 구원자 예수에 대해 증거하고, 백성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영접하기에 합당하도록 준비시키는 일을 가리킨다.
1:77 죄 사함으로 말미암는 구원. - 장차 요한이 외칠 메시지의 내용과 구원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구절이다. 하나님의 구속하심은 정치적인 해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불의와 죄악에서 벗어나 참된 자유를 소유하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이 외치게 될 메시지의 내용이며 그것을 백성들에게 깨우치는 것이 요한의 사명이었다. 즉 그리스도는 구원을 주시고 세례 요한은 그 구원을 알게 하는 사명을 가진 것이다.
1:78 돋는 해가 위로부터 우리에게 임하여. - '돋는 해'에 해당되는 헬라어 '아나톨레'는 '새벽', '여명'의 뜻으로 해나 별이 떠오르는 것과 관련된 표현이며, 여기서는 메시야를 지칭하고 있다. 그런데 메시야를 '돋는 해'로 묘사한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에게 의로운 해가 떠올라 치료의 광선을 발하게 된다고 예언된 말라기 4:2의 말씀과 매우 흡사한 표현이다. 하여튼 '돋는 해'는 어두움을 밝혀준다. 그와 같이 죄와 흑암의 권세에 절망하여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는 구원의 빛을 비추시게 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본절은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밝혀주고 있다 할 것이다.
1:79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 - 아무런 도움도 없이 절망과 공포와 두려움과 탄식의 상태 속에 있는 자들을 가리키는 표현(Hendriksen)으로, 죄에 얽매여 있는 모든 인류를 가리킨다(Lenski). 예수께서 의로운 태양으로 찾아오신 이유는 바로 이러한 절망적인 상태에 놓여있는 인류에게 구원의 빛을 비추어 소망을 주고 평강과 희락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평강. - 본절에서 '평강'(에이레네)은 메시야의 도래와 연결된 모든 축복을 뜻하는 말로, ①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바른 관계 회복, ② 죄 사함을 통한 심령의 평화 등을 가리킨다.
1:80 빈 들에 있으니라. - 여기서 '빈 들'(에레모이스)은 일반적으로 유대 광야를 가리킨다. 요한은 그의 공식적 출현이 있기까지는 광야에서 조용하게 은둔 생활을 하게 된다. 일부 사람들은 요한의 금욕적인 생애 때문에 그를 사해 서편에 위치해 있는 광야에서 금욕 생활을 하던 에세네파(Essenes)의 한 일원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또한 혹자는 요한이 쿰란 공동체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A.S. Geyser). 그러나 요한은 고립된 생활을 지향했던 에세네파나 쿰란 공동체와는 달리 사회 개혁에 관심을 가졌고, 그들과는 입장이 다소 다르다는 면에서 요한을 에세네파나 쿰란 공동체의 일원이었다고 단정할 수 없다. 하여튼 전통적으로 '빈 들' 또는 '광야'는 위대한 선지자들의 영감의 고향(모세, 엘리야)이었다(Caird). 그와 같이 요한도 광야에 거하며 금욕 생활을 하는 가운데 깊은 사색과 묵상을 하며 앞으로 그가 감당해야 할 메시야의 선구자적 사명을 준비하고 있었음에 분명하다(눅 3:2).
연구자료
사가랴-의심함으로 벙어리가 되었던 제사장
1. 인적 사항
① 사가랴는 '여호와께서 기억하고 계시다'라는 뜻.
② 마리아의 친척인 엘리사벳의 남편(눅 1:5,36).
③ 세례 요한의 아버지(눅 1:59,60).
④ 아비야 반열의 제사장(눅 1:5).
2. 시대적 배경
가이사 아구스도(Caesar Augustus, B.C. 27-A.D. 14년)가 로마 황제로 있던 시기, 그리고 로마에 의해 임명된 헤롯 대왕(the Great Herod, B.C. 37-4년)이 팔레스틴 전역을 통치하던 당시의 제사장으로 활동한 인물. 이 당시 유대는 로마 식민 통치 하에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극도로 타락해 있었다. 특히 헤롯은 겉으로는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는 등 종교 부흥을 위해 힘쓰는 것처럼 보였으나 유대 사회의 최고 지도자인 대제사장직을 자기 권한 아래 둠으로써 종교를 정치 도구화 하였다. 때문에 대부분의 종교 지도자들은 강한 정치적 색채를 띨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암울한 시기에 사가랴는 성실하게 반차에 따라 성전에서 봉사하는 매우 경건한 제사장이었다.
3. 주요 생애
세례인 요한 탄생 이전 | ||
출생 | - | - |
엘 리사벳 과 결혼 | - | 눅1:5 |
아비야 반열로 제사장직 수행 | - | 눅 1:5,8-10 |
자녀 얻기를 기도해 옴 | - | 눅 1:13 |
예루살렘 성전의 분향 직무 담당 | - | 눅 1:8-10 |
천사의 수태고지를 받음 | B.C. 6년경 | 눅 1:13-17 |
천사의 말을 의심하여 벙어리가 됨 | 〃 | 눅 1:18-23 |
엘리사벳의 수태 목격 | 〃 | 눅 1:24 |
세례인 요한 탄생 이후 | ||
세례인 요한 탄생 | B.C. 5년경 | 눅 1:57 |
요한에게 할례 행함 | 〃 | 눅 1:59 |
요한의 이름을 지시할 때 혀가 풀림 | 〃 | 눅 1:63-66 |
신약 최초의 예언을 행함 | 〃 | 눅 1:67-79 |
죽음 | - |
4. 성품
① '주의 모든 규례대로 흠이 없이 행한 의인'이라 칭함 받을 정도로 신실하고 실천적인 신앙의 소유자(눅 1:6).
②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을 받을 만큼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고 당시 타락한 많은 종교 지도자들과는 달리 신실한 믿음을 소유한 자(눅 1:5-17).
③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는 천사의 증거를 볼 때 아이를 얻기 위해, 즉 자신의 문제거리를 놓고 기도에 힘쓴 자(눅 1:13).
④ 천사의 예언을 듣고도 자신의 나이를 먼저 생각하여 의심한 것으로 보아 한순간 믿음보다 인간적 생각과 이치를 앞세운 자(눅 1:18).
⑤ 아이를 낳자 천사의 지시대로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 지은 것으로 보아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이켜 믿음을 회복한 자(눅 1:57-63).
5. 구속사적 지위
① 하나님의 사자를 대면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할 세례 요한의 탄생을 예고 받은 자(눅1:11-17).
②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 칭함 받은 자(눅 1:6).
③ 하나님을 신실히 섬기는 의인이면서도 잠시 하나님을 의심하는 인간적인 한계를 보여준 자(눅 1:6,18).
④ 구약 최후의 예언이며 동시에 신약 최초의 예언인 '베네딕투스'(Benedictus)라 불리는 찬양시를 남긴 자(눅 1:67-80).
⑤ 소원 기도로써 아이를 얻은 자(눅 1:13).
6. 주요 업적
① 주의 모든 계명과 규례대로 흠 없이 행함(눅 1:6).
② 세례 요한을 낳아 하나님을 위해 일하도록 잘 양육함(눅 1:63,76,80).
③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하여 찬양으로 예언함(눅 1:67-80).
7. 주요 실수
① 천사의 수태고지를 듣고도 자신과 아내의 나이를 생각하여 이를 믿지 못함(눅 1:8-18).
② 천사의 예언에 나타난 메시야에 대한 내용을 간과해 버림(눅 1:8-20).
8. 평가 및 교훈
① 주의 사자가 사가랴에게 나타난 시기는 사가랴가 당시 제사장 계급의 대다수를 차지했던 타락한 사두개인들과는 달리 묵묵히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게 제사 직무를 행하고 있을 때였다(눅 1:8-11).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세상과 야합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직분에 충실한 자를 축복하신다. 우리 성도들도 각자의 위치에서 주께서 맡기신 일을 충실히 감당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더 큰 일을 맡기시고(눅 19:17), 종국에는 생명의 면류관을 허락하실 것이다(계 2:10).
② 주의 사자의 수태고지를 받은 사가랴는 자신과 부인의 나이든 것 때문에 이를 의심하였다(눅1:18-20). 참으로 자녀 얻음을 위해 오래토록 기도했던 그가 또한 '하나님 앞에 의인'이라 칭함 받은 그 조차도 하나님을 의심한 것이다(눅 1:6,13,18). 이는 하나님을 잘 섬긴다 하면서도 내 형편과 이성으로 납득이 안갈 때 하나님을 의심하는 우리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 준다. 그러나 사가랴의 이 같은 의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일을 반드시 행하셨다. 이처럼 오늘날 우리가, 아니 내가 의심하는 그 일도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이라면 분명히 성취되어질 것이다. 또한 본문의 사가랴처럼 우리가 때때로 우리의 간구가 더디 이뤄진다하여 그 응답조차 포기했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기억하사 자비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③ 당대의 의인으로 널리 알려진 사가랴도 주의 사자를 통해 예언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함으로써 벙어리가 되는 징계를 받았다(눅 1:18-22). 이처럼 인간의 의로움은 한계가 있으며 더더욱 불신앙과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이란 하나도 없다(롬 3:10). 이러한 인간의 속성을 생각할 때에 무흠하신 그리스도께서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인 우리들을 위해 대속제물이 되사 구원을 얻게 하신 사건은 그야말로 복음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이를 생각할 때 우리가 어찌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겠는가!
④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벙어리 된 사가랴가 천사의 지시대로 아들의 이름을 '요한'이라 지었을 때 비로소 입이 열리고 말을 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다(눅 1:20-22,64). 이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순종을 지극히 기뻐하심을 깨닫게 된다. 이에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본분임을 기억하여 주의 말씀아래 겸손히 부복(府伏)하여야 하겠다(삼상 15:22).
⑤ 한 동안 벙어리였던 사가랴는 말을 할 수 있게 되자 제일 먼저 하나님을 찬양하였다(눅 1:64). 이처럼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능력을 체험한 인생은 그 은혜에 감사의 찬양을 드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성도들이 받은 가장 큰 은혜는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이다. 우리는 늘 이 은혜를 생각하여 우리의 입술을 통해 새 노래로 여호와께 감사의 찬양을 드리는 자들이 되자(시 96:1).
9. 핵심 성구
'보라 이 일의 되는 날까지 네가 벙어리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내 말을 네가 믿지 아니함이어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리라 하더라'(눅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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