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없는 거리 조절의 연속이 삶이다. 물리적 거리와 감정적 거리를 조율하면서 앞으로 나아가는데 그 총합이 인생이다.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어머니 자궁에서 나와서 관(棺)에 들어가기 전까지 다닌 총거리를 계산해 보든, 출발지와 목적지의 공간을 생각해 보든, 어떻든 살아가면서 그 거리를 머리로 사유(思惟)하게 된다. '아부의 기술', ‘유혹의 기술’, ‘사과의 기술’과 같이, '거리 조절의 기술' 도 빼놓을 수 없는 처세술이다. 나는 이를 ‘거조기(距調技’)라 부르고 싶다.
아장아장 걷는 유아기, 걷고 뛰어다니는 소년기, 마라톤 하는 청년기, 성년기를 지나고 장년기, 노년기엔 산책이나 등산을 한다. 사람에 따라 지팡이를 집고 다니거나 요양병원에 들어가 누워지내기도 한다. 삶의 거리를 늘리거나 줄이거나, 그 끝은 있다. ‘돌아다니느라 수고한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이것은 그 끝에 온 사람을 위로해 주려는 구절이다.
생활 속에서 함께 보고 느끼는 페널티킥, 3점 슛, 홀인원, 극장 골(Goal), 홈런, 같은 취미 스포츠 용어들은 ‘거조기’의 심볼이다. 왜앵 소리를 내며 여름날 밤, 잠자는 얼굴에 앉은 모기를 잡으려 스스로 귀싸대기를 때렸으나 허탕 친 나, 풀 속에서 숨었다가 덮치려 했으나 한발 먼저 달아나는 얼룩말을 쳐다보는 치타, 적 기지를 빗나가 민간 병원에 떨어진 미사일도 ‘거조기’가 실패한 흔적이다.
또한 저 사람과 얼마의 '공간'이 적당한가를 늘 가슴에 두고 살아가는 게 감정의 거리이다. 이웃오브 사이트 아웃오브 마인드, 불가근 불가원, 쇼펜하우어의 <고슴도치 패러독스>는 물리적, 감정적 거리의 중요성을 잘 설명한다.
그러고 보니, 친구와 스승과 직장 선후배, 상사와의 끊임없는 거리 조율 해가며 나도 살아왔다. 절대자와 자신과의 신앙의 거리는 감정의 거리이고 <사랑방 손님과 아저씨>의 소설은 인간 삶에서 그 거리를 잘 묘사해 준다.
인간이 공간에 존재하는 한 거리는 시간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그 거리를 조절하는 기술에도 감정이 끼어든다. 유언 남기기는 마지막으로 유족들과의 거리를 '1미터 더 가까이' 줄이려는 행위이다. 러브 레터와 키스와 포옹과 악수도 그런 감정의 거리를 조절하려는 데서 나온다. 스토킹에 의한 범죄는 두 거리 조절의 실패 사례이다.
얼마 전 지하철 타고 자리에 앉았는데 맞은 편에 5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여성이 뜨개질 하고 있었다. 이마 위에 안경을 걸치고 모자(帽子)로 보이는 작품을 만들고 있었다. 바늘 코와 실타래를 오르락내리락하는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재봉틀 바늘이 헝겊에 실을 박는 것을 연상시켰다. 뜨개질은 두 눈과 두 손 사이의 물리적 거리 조절이면서, 그게 손주에게 줄 선물이라면 두 사람 간의 감정의 거리를 줄이려 함이다.
태어난 아이에게 어머니 젖을 물리는 때에도, 망자의 묘지를 협의하는 데에도 거리 조절이 숨어 있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인생 곁에는 늘 그 기술이 살아 숨 쉰다.
(2024년 3월 31일 7.9 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