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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는 사람의 타고난 본성은 누구나 이익을 좋아하고 손해를 싫어하며, 좋은 목소리와 예쁜 용모를 탐하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만일 사람이 있는 그대로의 본성에 따르고 그의 욕구에 따라간다면, 반드시 다툼이 일어나고 사회 질서가 어지러워져 혼란을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반드시 스승이 있어 법으로 교화하고 예의로 인도한 뒤에야 사양하는 데로 나가고 예(禮)의 세세한 조리에 합당하게 되어 천하는 질서 있게 된다"고 주장했다.
순자는 인성이 비록 악하지만, 사람의 후천적 노력에 의하여 선한 방향으로 바꿀 수 있다고 보았다. 또한 이러한 능력은 누구에게나 갖추어져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모두 발휘할 수만 있다면 평범한 사람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인성이 형성되는 사회적 조건에 주목했고 교육의 효과를 강조했다.
-순자의 성악설과 말나식이 이기식이라는 점에서 유식사상은 닮은 점이 있다.
유식학은 불교사상 중에서 특히 이론적인 학문의 성질을 가장 잘 갖추고 있는데, 유식학파 교리에 의하면 중생이 부처님과 같은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다양한 수행의 단계를 밟아야 한다. 그 대표적인 수행단계가 수행 5위(수도5위)이다. 즉,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통달위(通達位). 수도위(修道位). 구경위(究竟位)라고 하는 다섯 단계를 거침으로써 중생의 마음은 차츰 부처의 마음으로 변하게 돼 마침내 구경위에 이르러 부처의 경지에 도달한다고 했다.
이와 같은 수행의 과정을 거친 결과 부처님과 같은 지혜를 얻게 되는 것을 전식득지(轉識得智)라고 한다. 전식득지란 중생의 업식(의식)이 맑아지면 지혜로 바뀐다는 말이다. 이것은 우리의 마음이 서로 관계해 연기하고 있는 까닭에 좋은 인연을 만나면 진실 되고 지혜로운 마음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범부의 8가지 의식이 변해 대원경지(大圓鏡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묘관찰지(妙觀察智). 성소작지(成所作智)의 4지가 된다고 한다. 유루(有漏)의 8식(識)을 통해서 얻는 무루(無漏)의 4종 지혜라는 말이다.
즉, 우리의 의식 가운데 가장 심층의식으로 불리는 제8식 아뢰야식이 정화돼 대원경지(大圓鏡智)라는 지혜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심층의식이 지혜로 바뀜으로써 나머지 의식도 지혜로 바뀌게 되는데, 제7식 말나식이 정화돼 평등성지(平等性智)로 바뀐다. 편등성지란 자아의식을 버리고 모든 것을 평등하게 보는 대아적(大我的) 지혜이다.
그리고 제6 의식이 정화돼 사물을 있는 그대로 통찰하는 지혜인 묘관찰지(妙觀察智)로 전환하고, 이어서 안. 이. 비. 설. 신 등 전5식이 정화돼 성소작지(成所作智)로 바뀌는데, 이는 실제 행동하는 구체적인 행위가 모두 지혜롭다는 이성적 지혜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상의 8식은 현상일 뿐 그 본성은 결코 실체가 없는 공성(空性)인데, 이것이 전의에 의해 번뇌로 오염된 식(識)이 청정하고 분별이 없는 지혜로 전환된다고 하며, 이러한 전식득지(轉識得智)가 곧 유식교학의 근본취지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해서 번뇌로 오염된 의식이 정화돼 부처님의 지혜로 전환한 네 가지 지혜를 유식 4지(唯識四智) 혹은 불과사지(佛果四智)라고 한다.
그리고 8식이 정화돼 4지를 증득하는 것은 자신만을 고집한 아집(我執)의 마음을 비우는 아공관(我空觀)의 경지를 말한다. 그리고 사물과 현상계의 모든 것은 인연의 집합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망각하고 색 . 수 . 상 . 행 . 식의 하나하나에 모두 실체가 있다는 그릇된 집착을 해서 탐욕을 발생하는 법집(法執)의 마음을 비우는 것을 법공관(法空觀)의 경지라 말한다. 이와 같은 아공과 법공은 곧 말나식과 의식의 아집과 법집의 번뇌를 정화하는 것이고, 그 밖의 모든 번뇌도 함께 정화하게 된다.
이렇게 번뇌에 오염된 8식이 정화돼 4지로 전환하게 되는 것은 유식실성(唯識實性)이라고 하는 마음의 본체인 불성이 있기 때문이다. 유식실성이란 유식학에서 마음의 체성을 의미하는 말인데, 유식실성은 진실하고 변화가 없는 진여성(眞如性)이다. 그리하여 이 마음의 실성은 영원히 변하지 않으며, 시작도 없고 종말도 없으면서 마음속을 빛나게 하는 지혜를 발생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지혜와 깨달음을 유지하는 불성(佛性)에서 발생하는 지혜가 4지(四智)로서, 곧 대원경지(大圓鏡智), 평등성지(平等性智), 묘관찰지(妙觀察智), 성소작지(成所作智) 등 네 가지 지혜를 말한다.
① 대원경지(大圓鏡智)---대원경지는 인간의식의 심연에 있는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이 무명(無明)을 모두 제거하게 될 때 나타나는 지혜이다. 즉, 오염된 유루(有漏)의 제8식을 질적으로 변혁해 얻은 진여본성이 드러난 청정한 지혜란 말이다. 비추어내는 크고 맑은 거울처럼, 아뢰야식에서 오염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이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아뢰야식 안의 모든 잡염법(雜染法)이 소멸돼, 한 점의 티끌도 없는 대원경(大圓鏡)처럼 된 상태로서, 여기서 ‘대(大)’라 함은 시간 · 공간을 초월하기 때문이고, ‘원(圓)’은 사물의 실상을 그대로 비추기 때문에 그렇게 부른다. 우주 전체가 대원경처럼 변화돼 모든 사물이 있는 그대로 비추어지듯이, 시공을 초월해 모든 것을 아는 원만한 지혜이다.
이것은 한 점의 티끌도 없는 거울에 삼라만상이 그대로 비쳐 모자람 없이 나타나는 것과 같이 원만하고 분명한 지혜이며, 자신과 진여법계가 하나가 됨으로써, 이 지혜는 마치 크고 둥근 거울에 모든 사물의 영상이 있는 그대로 환하게 비치듯이 모든 진리를 관찰하는 지혜이다.
그리고 이 지혜는 이타적인 지혜[보리(菩提)]로서 그 모습[경상(境相)]이 우매하지 않고, 체성과 형상이 모두 청정하고 원만한 덕성을 지니게 되며, 이러한 공덕을 중생과 보살들에게 베풀어주는 지혜이다. 즉, 만덕(萬德)을 원만하게 구족해 모든 법을 깨달아 안 것을 말하는데, 불과(佛果)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얻게 되는 지혜이다.
※잡염법(雜染法)---아뢰야식은 모든 잡염법의 저장소 역할을 하며, 윤회의 주체이다. 잡염법은 허망 된 변계소집성을 말하고, 그 반대의 청정법(淸淨法)은 진실 된 원성실성을 말한다.
② 평등성지(平等性智)---오염된 제7 말나식(末那識)을 질적으로 변혁해 얻은 청정한 지혜이다. 즉, 유루의 제7식을 전환해 얻는 무루(無漏)의 지혜이다. 이 지혜는 자아에 대한 집착을 떠나 자타(自他)의 평등을 깨달아 대자비심을 일으키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여기서 평등한 성품이란 진여(眞如)를 말하며, 진여는 체성이 평등해 일체법에 두루 함으로 평등성이라 한다. 또한 지혜가 그것을 반연(攀緣)하므로 평등성지라고 한다. 말나식에서 자아집착 작용에 의한 모든 차별심이 소멸돼 일체를 평등하게 보며, 대자비심을 일으켜서 중생제도 활동을 하게 된다.
제7 말나식은 원래 나와 남에 대한 구별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의식이므로 여러 가지 차별을 낳게 된다. 그러나 일체가 한결같고 평등함을 관해 자타에 대한 차별적인 견해를 대자비심(大慈悲心)으로 바꾸기 때문에 중생교화를 위한 평등한 지혜가 발현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평등성지는 일체의 법과 자타의 유정(有情)들을 모두 평등하게 이익을 주는 대자대비의 지혜이다.
※반연(攀緣)---‘반연’에서 반(攀)이란 의지한다는 뜻이고, 연(緣)이란 조건이란 의미이니, 곧 얽힌 인연이라는 말이다.
③ 묘관찰지(妙觀察智)---오염된 유루의 표면의식인 제6식을 질적으로 변혁해 얻은 청정한 무루의 지혜이다. 이 지혜는 모든 실상을 잘 관찰해 자유자재로 설법을 베풀어 가르침을 설하고 중생의 의심을 끊는데 사용하는 지혜이므로 이와 같이 말한다. 즉, 묘관찰지는 중생의 근기(根機)를 알아서 불가사의한 힘을 나타내고 훌륭하게 법을 설해 모든 의심을 끊게 한다.
통달위(通達位)에서 그 일부분을 얻고 불과(佛果)에서 전체를 성취한다. 묘(妙)는 불가사의한 힘의 자재(自在)를 말하고, 관찰은 모든 법을 관찰해 정통하는 것이다. 의식에서 개별적이고 개념적인 인식상태가 변화돼, 모든 사물의 자체상[自相]과 보편적인 특질[共相]을 있는 그대로 관찰한다.
즉, 묘관찰지는 모든 물질계와 정신계의 자체에서 나타내는 자상(自相)과 서로 의존하고 상부상조하며 공동의 모습을 이루고 있는 공상(共相)을 무애자재하게 관찰하는 지혜이다. 이 지혜가 있는 수행인은 공덕과 보배를 대중들에게 베풀며 큰 진리를 가르쳐서 모든 의심을 없애주고 큰 이익과 즐거움을 베풀어주게 된다.
※통달위(通達位)---견도위(見道位)라고도 하는데, 보살의 수행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눈 수행 5위(修行五位)에서 제3위를 일컫는다. 통달위에 오르면 진여성(眞如性)을 관찰하게 되며, 진여성을 관조하면서 매우 기쁘다는 뜻으로 환희지(歡喜地)라고도 한다. 환희지는 초지보살(初地菩薩)이 수행하는 경지를 뜻하며, 이는 수승한 보살이 닦는 수행위로서 성인의 지위에 든 것이다.
④ 성소작지(成所作智)---불과(佛果)에 이르러 오염된 유루의 전5식(前五識)이 변혁해 이루는 무루의 지혜이다. 즉, 안(眼) · 이(耳) · 비(鼻) · 설(舌) 신(身) 등의 5관으로 행하는 일을 올바로 이루도록 하는 지혜이고,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해야 할 것을 모두 성취하므로 성소작지라고 한 것이다. 이 지혜는 모든 중생을 관찰하며 근기에 따라 이익을 주는 지혜로서, 이 지혜는 본심에서 발생하는 원력(願力)에 따라 이타적인 자비의 사업을 성취한다. 즉, 본원(本願)의 해야 할 일을 해 마치는 지혜이다.
그런데 위의 네 가지 지혜는 수행에 의해 점진적으로 성취되느냐, 아니면 단박에 증득되느냐 하는 것이다. 이는 선종(禪宗)에서 말하는 돈오돈수와 돈오점수설 가운데 어떤 입장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다.
능변계성(能遍計性)인 제6 의식과 제7 말나식이 각각 묘관찰지와 평등성지로 전환되는 것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즉, 묘관찰지와 평등성지는 통달위(通達位)에서 일부[一分]를 증득하고, 이후의 십지 중에서 점차 닦아서 불과(佛果)에 이르러 그 전체[全分]를 증득한다. 그리고 현량성(現量性)인 아뢰야식과 전5식이 각각 대원경지와 성소작지로 전환되는 것은 성불할 무렵에 단박에 이루어진다고 한다.
이러한 구경의 부처님 지혜는 우주 삼라만상의 진리를 마치 손바닥 위에 구슬을 보듯이 환하게 확실히 보고 알 수 있는 지혜이다. 성불이란 이렇게 닦아서 사지(四智)를 구족하게 되고 법신, 보신, 화신의 모습으로 자재해 육도의 중생들에게 지혜와 자비를 드리우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마음의 실성(實性)은 네 가지 지혜를 발생하며 자비를 실현하게 된다. 그리고 실성은 4열반(四涅槃)을 실현한다. 4열반은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과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과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과 자성청정열반(自性淸淨涅槃)을 말한다.
첫째, 유여의열반(有餘依涅槃)은 마음의 번뇌가 거의 정화됐으나 아직도 미세한 번뇌가 남아 있지만 고통이 없는 열반을 실현한다.
둘째, 무여의열반(無餘依涅槃)은 번뇌가 완전하게 정화돼 열반이 구현된 것을 말한다.
셋째, 무주처열반(無住處涅槃)은 어떠한 거주처에서든지 항상 안정과 즐거움을 실현하는 열반을 뜻한다.
넷째, 자성청정열반(自性淸淨涅槃)은 본래 자성이 청정하고 진실한 진리를 간단없이 보존하고 있는 열반성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유식(唯識)의 실성(實性)은 4지와 4열반을 실현하는 것이며, 진여의 본성이기도 한다. 이 경지는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실현하는 진리의 세계이다. 즉 아공은 아집이 없는 무아(無我)를 실현하는 것이고, 법공은 모든 현상계가 인연의 집합체로서 그 인연의 법체가 본래 공한 것임을 증득한 경지이다. 이는 편견의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이 없는 절대 평등한 일진법계(一眞法系)를 실현하는 경지를 뜻한다.
이와 같이 유식실성은 진여(眞如)와 불성(佛性), 또는 법계(法界), 실제(實際), 공(空), 승의(勝義), 법성(法性) 등 여러 가지로 표현하며 이는 하나의 진리를 이 그 이치에 따라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진리는 마음 외에 따로 있을 수 없으며, 마음의 실성에 의해 실현되는 것을 유식이라고 한다.
※능변계성(能遍計性)---실체가 아닌 것을 실체라고 잘 못 보는 것.
※현량(現量)---불교의 인식논리학에서는 우리가 앎을 획득하는 방법에 현량(現量)과 비량(比量)의 두 가지가 있다고 한다. 요새 말로 바꾸면 현량은 ‘직관(直觀)’이고 비량은 ‘추리(推理)’이다. 예를 들어 내 앞에서 불이 타오를 때 눈으로 이를 보거나 몸으로 온기를 느끼는 것은 현량으로 통한 것이고, 먼 산 너머에서 연기가 날 때 보이지는 않지만 그곳에 불이 났을 것이라고 아는 것은 비량으로 통한 것이다. 현량은 ‘감관을 통한 직접적인 앎’이고 비량은 ‘생각을 거친 간접적인 앎’이다.
법천사지 유물
6) 4선근(四善根)=4가행(四加行)
유식불교에는 보살의 수행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눈 것으로 수행 5위(修行五位)라는 수행과정의 다섯 단계가 있다. 즉,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究竟位)의 다섯 단계로서 보살 5위(菩薩5位), 수도 5위(修道5位)라고도 한다. 이 다섯 단계의 제2위인 가행위(加行位) 내에 다시 범부중생이 해탈, 즉 견성오도(見性悟道)를 하기 위해 수행해야 할 네 단계가 있어 이를 사선근(四善根) 또는 사가행(四加行)이라고 한다.
4선근(四善根) 또는 4가행(四加行)이라고 하는 것은 범부중생이 해탈, 즉 견성오도(見性悟道)를 하기 위해 처음 수행해야 할 네 단계를 말한다. 물론 이런 과정을 밟지 않고 매우 드물게 순서 없이 바로 올라가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사람은 업장도 가볍고 총명해야 한다.
대개 사람의 경우, 본래 불성이 있다고 하나 나쁜 버릇에 물들어 있고, 업장(業障)을 많이 지어서 이것을 녹여 들어가려면 순서를 밟아가야 한다. 한 걸음 두 걸음 순서를 밟아 올라가는 시초의 단계를 4선근(四善根)이라고 하는 것은 착한 뿌리를 많이 심어야 한다는 뜻이다.
4선근에는 난(煖)ㆍ정(頂)ㆍ인(忍)ㆍ세제일(世第一)의 네 단계이고, 이 네 단계의 수행과정을 거쳐 성자의 경지인 견도(見道)에 이르게 된다. 이런 과정을 알지 못하면 혼자 토굴 같은 곳에서 열심히 수행을 해서 어떤 경계를 만나면, 이 게 어떤 경지인지 몰라서 헤매게 된다. 다음은 유식론(唯識論), 구사론(俱舍論) 등에 밝힌 네 가지 수행단계의 요약이다.
※가행(加行)---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더욱 힘을 쓰고 마음을 닦는 것을 말한다.
① 난위(煖位) - 4선근 가운데 첫 번째 자리로, 불을 일으키기 위해 나무와 나무를 서로 문지르면 불이 일어나기 전에 먼저 그 마찰열에 의해 주변이 따뜻해지는 것과 같이, 번뇌를 없애는 불이 생기기 전에 접촉된 부분의 선근을 이에 비유해 난(煖)이라고 한다. 이 난위란 선정에 의해 사물이 실재한다고 여기는 착각에서 벗어나 범부의 지혜로써 4제(四諦)를 분석적으로 관찰하는 단계로서 지혜를 증득하기 위한 준비단계라 할 수 있다.
② 정위(頂位) - 정(頂)이란 산꼭대기를 의미하는데, 범부의 지혜로는 최상의 단계이므로 정수리라 한다. 이 선근은 그래도 불확실한 선근 가운데에서는 최고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정(頂)이라 부르기도 하는 것이다. 이 자리에서 앞으로 나아가면 인위(忍位)에 들게 되며, 물러서면 난위(煖位)에 떨어지는 위치로서, 마치 산 정상에 있는 것 같다 해서 비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범부의 지혜로써 사제를 분석적으로 관찰하는 최상의 단계이다.
③ 인위(忍位) - 인위에서는 선근이 확정돼서 부처님의 가르침인 진리를 수용하는 위치를 말한다. 즉, 범부의 지혜로 4제의 이치를 확실하게 알고서 이를 인정해 받아들이는 단계로서, 사제의 이(理)를 인가(忍可)해 물러나는 일이 없는 단계이다.
④ 세제일법위(世第一法位) - 아직도 번뇌의 세계를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그 세계 가운데에서는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이와 같이 부르는데, 유루법(有漏法)이 존재하는 세간 중에서 최상의 선근이 일어난 위치라는 말이다. 즉, 가장 뛰어난 범부의 지혜에 이른 단계로서 그 다음 단계가 성자의 경지인 견도(見道)이다.
<다음은 위의 내용을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한 청화(淸華)스님의 법문을 요약한 것임>
4선근(四善根)은 견성오도(見性悟道) 하기 전에 우리가 더욱 증가시켜야 하는 네 가지 선근을 말한다. 즉, 난법(煖法), 정법(頂法), 인법(忍法), 세제일법(世第一法)이다. 이것은 우리가 견성오도 하기 전, 즉 견도(見道) 직전의 수행계위이다. 견성오도 해야 참다운 자기이다. 견성오도하기 전에는 가짜 자기이다. 견성오도를 해야 참다운 대아(大我), 진아(眞我)가 된다.
따라서 견성오도 하면 바로 성자(聖者)인데, 성자가 되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 미처 성자가 못 된다 하더라도 수행자는 그 과정은 좀 알아야 한다. 그걸 모르고 수행하다가보면 여러 경계가 많이 있는 법이라서 자기 공부가 얼마나 돼 가는지 짐작을 못한다.
때문에 <능엄경(楞嚴經)> 같은 경에는 우리가 점차로 올라가는 4선근 법문에 대해서 아주 세밀하게 설해 놓았다. 또 <구사론(俱舍論)>, <유식론(唯識論)> 같은 데에도 역시 공부하는 과정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밝혀 놓았다. 4선근의 내용을 좀 더 살펴보자.
① 난법(煖法)
4선근 가운데 처음이 난법이다. 이것을 명득정(明得定)이라고도 하는데, 밝을 명(明), 얻을 득(得), 우리 마음이 항시 어둠이 깔려 무겁다가 마음이 훤하게 밝아 와서 마음이 시원해 온다는 말이다. 수행에 처음에 들어가면 어두움이 갔다 왔다 하고 마음이 답답하고 괴롭다. 그러나 우리가 깊이 공부하다보면, 맑아져서 몸과 마음이 개운하며 가볍고 또한 등골도 시원하고 눈도 시원하며 수마가 와도 별로 피로도 못 느낀다.
그리하여 성성적적(惺惺寂寂)하게 되는데 이때는 혼침(昏沈)도 안 오고 그야말로 어떠한 분별망상도 줄어지는 것이다. 분별망상이나 혼침은 다 맑지 못하니까 오는 것이지 우리가 개운하고 쾌적하고 상쾌할 때에는 그게 줄어드는 것이다. 그래서 몸이 마치 전류에 감전 된 것처럼 찌르르해지고, 전신이 머리에서 발끝까지 아주 시원스럽게 개어온다.
이런 때가 난위(煖位), 이른바 명득정(明得定)의 밝음을 얻었다는 경계이다. 그만치 우리 인간이 선량해졌다는 증거이고, 난법의 단계까지만 가도 그 때는 별로 피로를 모르게 된다.
그러나 그 명득정의 맑음을 얻었어도 말 많이 하고 남하고 싸우고 함부로 행동하면 그것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다. 따라서 공부를 해서 명득정이라는 밝음을 얻었으면 그 자리를 행여 놓칠세라 소중하게 아끼면서 보다 더 깊이 공부해야만 더욱 정화가 된다.
② 정법(頂法)
그 다음 두 번째 단계는 정법이다. 정법을 명증정(明增定)이라고도 하는데, 밝을 명(明), 더할 증(增), 밝은 기운이 더 증가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밝은 기운이 희미했다가 공부를 더하면 밝은 기운이 온 전신을 엄습한다.
이러할 때 기분 좋은 것은 다른 즐거움에 비교할 수 없다. 그리고 부처님 공부는 건강 악화나 노이로제 같은 것이 붙을 수 없다. 공부해서 몸도 시원하고 마음도 시원해지면 잔병치레 같은 것이 붙지 못한다.
힌두교에서는 이른바 신지학(神智學)이라는 것이 있는데, 정신수양으로 병을 고치는 것이다.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기 때문에 마음이 정화되면 몸도 따라서 정화되는 법이다. 따라서 이 명증정(明增定)은 우리 마음이 그만치 시원스럽게 되는 것을 말한다. 마음이 시원하면 자연히 혈액 순환이 왕성해지고 머리도 눈도 시원해지고, 병균도 침범을 못한다. 맑은 피가 흐르고 있으니 암이나 병균 따위가 침범할 수 없다.
③ 인법(忍法)
그러다가 제3이 인법이다. 참을 인(忍), 이 인법을 인순정(印順定)이라고도 한다. 인순정은 밝은 기운이 덤벙거려도 그때는 별로 후퇴가 안 된단 말이다. 이런 기운이 딱 몸에 배여서 습관이 돼서, 그렇게 되면 나쁜 짓을 못한다. 욕도 안 나오고 지나치게 욕심도 부리려야 부릴 수도 없고, 다 허망하게 생각이 되니까 그렇다.
④ 세제일법(世第一法)
그러다가 거기에서 더욱더 공부를 정진해 나가면 그 다음 단계가 세제일법(世第一法)이다. 세제일법은 문자 그대로 이 세상에서 제일가는 법이란 뜻이다. 견성(見性)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 성자의 법은 못 돼도 세간적인 범부에서는 제일가는 법이 세계일법이다. 이때에는 우리 마음이 맑아져서 그 가운데 훤한 광명이 비추는 이른바 심일(心日)이 비춰온다. 마음에 해가 비춰온다는 말이다. 심일이 비춰오면, 공부를 중단하지 않고 정진을 계속하면 마침내 견성오도에 이르게 되지만 아직 도인(道人)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에 심일까지 비춰 와도 함부로 행동하면 어디로 간 곳 없이 없어져버린다.
따라서 경망한 사람들은 명득정을 얻어 몸만 좀 시원하고 알음알이가 생기고 또 무슨 판단이 잘 되고 그러면 그냥 공부가 다 됐다고 튀어나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평생 거짓말쟁이가 되고 남을 엄한 길로 인도하고 업만 짓고 만다.
따라서 이 4선근인 명득정, 명증정, 인순정, 세제일법, 이런 경계에서 가짜 도인이 많이 나온다. 우리는 참 경계(警戒)를 많이 해야 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는 4선근법이 일본 사람이 쓴 불교 책에도 잘 안 나온다. 더구나 우리나라 선(禪)에서는 그저 단박에 깨쳐버린다는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추구해서 화두(話頭) 일변도로 나가기 때문에 4선근의 체계에 대한 전문성 있는 법문이 별로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능엄경>이나 <구사론> 또는 <유식론> 등에는 이렇게 점차로 공부하는 점수법(漸修法)을 아주 착실하게 밝혀 놓았다.
우리가 사실 공부할 때는 이런 경계를 꼭 거쳐야 하는 것이다. 다만 좀 빠르고 더딘 차이는 있겠지만 차근차근 공부를 하다 보면 짐작하게 된다. 더러는 이런 경계를 한 번에 다 초월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개는 점차로 닦아서 서서히 가는 것이다. 그런 것은 다 개인의 품성이나 용맹정진의 힘 따라서 차이가 있다하더라도 분명히 이것은 우리 범부가 거치는 선근이고, 부처님께서 밝혀놓으신 과정인지라 참고하면 그때그때 자기 공부를 점검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위[上]를 모르면 조금 기분이 좋고 밝아진 것 같으면 견성오도 한 것으로 알고 함부로 행동하고 묘각(妙覺)이라는 것도 함부로 생각하는 우(愚)를 범하게 된다. 묘각이란 초지(初地)의 보살이 환희지(歡喜地)를 성취한 경지에 이른 뒤, 십지(十地)까지 올라가서 부처[佛界]를 성취해야 묘각인데 그걸 모른단 말이다.
우리는 조사어록(祖師語錄)이나 불경을 보면서 한없이 겸허해야 한다. 겸손하게 조그마한 자기 알음알이를 배제해야 교만심과 증상만(增上慢)을 피할 수 있다.
증상만, 이것은 못 깨닫고 깨달았다하고 거짓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수행자로서는 가장 큰 병이다. 승려가 그러면 결국 승적을 박탈당하고 쫓겨나고 만다. 도인(道人)이 아니면서 도인인 척하는 그것이 가장 무서운 병이다. 자기는 물론 남까지 함정에 빠뜨린다. 내 공부가 지금 어느 정도에 이르렀을까. 이것을 훌륭한 스승이 곁에 있어서 점검을 해주면 좋지만 그런 스승이 없으면 자기 나름대로 한계를 몰라서 기분이 좀 좋으면 그만 공부가 다 됐다고 생각하기 쉽다.
난법(煖法)은 밝음을 얻는 때이고, 정법(頂法)은 더욱더 정화가 되고 맑음이 증가돼서 몸도 마음도 가슴도 시원하고 피가 맑아져서 순환도 잘 되고, 그래서 자연히 건강도 좋아진다. 요새 선방 가서 보면 약봉지가 설친다. 그러면 공부를 잘 못했구나 하고 반성해야 한다. 정말로 우리가 공부를 바로 하고 계행청정(戒行淸淨)하게 생활할 때는 웬만한 병 같은 것은 문제가 아니다. 마땅히 명증정이라, 우리 몸도 마음도 가슴도 시원하다 생각할 때는 병균도 침범을 못한다. 그 맑은 피가 흐르고 있는데 어떻게 에이즈나 암 따위가 침범하겠나.
이렇게 해서 금생에 재가 불자들도 도통(道通)은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세제일법이라, 세간에서 제일가는 이 법을 애쓰고 닦아 가노라면 내생(來生)에 가서는 견성오도 할 날이 올 것이다.
지광국사 현묘탑
7) 유식수행 5위(唯識修行五位)=수도 5위(修道五位)
유식에서 수행 5위(修行五位)란 <유식30송(唯識三十頌)>, <성유식론(成唯識論)> 등에서 말하는 보살의 수행과정을 다섯 단계로 나눈 것을 말하며, 보살 5위(菩薩5位), 수도 5위(修道5位), 수행위차(修行位次), 수행계위(修行階位)라고도 한다.
부파불교시대부터 이미 이와 유사한 내용들이 설해지고 있었던 것으로서 유가(瑜伽)에서 지향하는 목표와 소승(小乘)에서 바라는 이상이 비록 다를지라도 그 수행과정 자체는 같은 것으로 여겨진다.
유식사상에서 말하는 수행이란 모든 인식활동으로 얻어진 번뇌를 정화하고, 이의 본성인 진여성(眞如性)을 깨달아 열반과 해탈을 증득하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 즉, 유식불교에서 수행의 목적은 8식(八識)의 번뇌를 정화하고 식(識)의 본성인 진여성을 깨달아 열반과 해탈을 증득하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번뇌로 말미암아 오염된 허망한 인식인 망식(妄識)을 대승적인 수행의 힘으로 정화하고 지혜를 증득하는 수행 5위에는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구경위(究竟位)의 다섯 단계가 있으며, 그 간추린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자량위(資糧位) - 자량위는 수행의 첫걸음으로서 내적인 자질과 역량을 키우는 단계를 말한다. 깨달음을 실제로 체험하기 위해 수행에 필요한 지혜와 복덕, 선근과 공덕을 쌓는 준비단계이다. 매우 초보적인 이 단계에서는 지말적인 번뇌는 정화할 수 있어도 근본번뇌는 아직도 정화되지 않고, 허망한 마음과 분별하는 마음이 일어나서 ‘나와 너’가 존재하고, 매사에 상대적이며, 의존적이라는 것을 머리로 깨달은 상태이다.
옛날에 먼 길을 가려면 노자(路資)와 식량(食糧)을 준비해 가듯이 자량위 수행은 육바라밀을 실천함으로써 복덕과 지혜를 구족해 자량으로 삼는다. 그리고 붓다의 말씀을 깊이 신해(信解)하고서 대승의 순해탈분(順解脫分), 즉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回向) 등 삼십심(三十心)을 닦는 단계를 말한다.
이와 같이 자량위 단계는 유식의 본성을 추구하기 위해 기초체력을 다지는 것과 비슷한 단계이다. 그러나 아직은 충분하지 못한 상태라서 인식의 상황에서 쉽게 잠복된 번뇌에 끌려간다. 하지만 자량위 단계는 도덕적인 측면에서 건강하고, 사회적인 배려심이 깊고, 자아와 세계가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매우 깊게 잘 이해하고 있는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중요한 것은, ㉠ 좋은 벗[선우(善友)]을 만나는 것이고, ㉡ 지혜를 얻고자 하는 자신의 굳은 의지[작의(作意)]가 필요하며, ㉢ 이러한 여건들을 충분히 갖추고[자량(資糧)] 출발해서, ㉣ 신해(信解)로서 부처님께서 보여 주신 가르침을 강한 정신으로 믿고 이해하는 것이 우선 필요하다고 한다.
※순해탈분(順解脫分)---분(分)은 원인을 뜻하며, 해탈로 향하게 하는 원인이 되는 것, 해탈을 향해 나아가게 되는 계위, 해탈에 수순하는 단계란 말이다. 구사론(俱舍論)에서는 삼현(三賢-현자의 세 단계)을 말하고, 유식설에서는 자량위(資糧位)를 일컫는다.
여기서 삼현이란 모든 속박에서 벗어난 경지로 나아가는 오정심관(五停心觀) . 별상염주(別相念住) . 총상염주(總相念住)을 말하는데, 유식학에서는 십주(十住), 십행(十行), 십회향(十廻向) 등 삼십심을 삼현위 혹은 내범부위(外凡夫位-깨달음 밖의 단계)라 한다. 이러한 삼현위는 지전보살(地前菩薩)의 단계이다. 보살 수행 5위 중 자량위(資糧位)와 가행위(加行位)를 닦으면 지전보살이라 하며, 현자라 하고, 통달위부터는 지상보살(地上菩薩)이라 했다.
삼현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깊은 사유로 말미암아 마음이 해탈의 방향으로 굳어진 단계로서 이러한 삼현위는 산란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모든 존재의 개별적 특성과 보편적 특성을 전체적으로 관찰 수행함으로써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해탈해 열반으로 나아가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순해탈분이라 한다.
② 가행위(加行位) - 가행도(加行道) 또는 방편도(方便道)라고도 하는데, 가행이란 힘을 더해 더욱 정진한다는 의미로서 실질적인 유식수행(唯識修行)의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내가 이래서는 안 되겠구나. 사흘이고 나흘이고 일주일이고 오로지 공부만 해야 되겠다.’라고 결심하고 오로지 공부만 하는 것이 가행위(加行位)로서 가행정진(加行精進)이라고도 한다.
제1위 자량위의 단계가 복덕과 지혜로써 내적인 자질과 역량을 키우는 단계라면, 가행위는 본격적으로 노력하는 단계로서 인식의 주객(主客)이 본래 존재하지 않음을 통찰해 현상을 ‘나와 너’,또는 ‘나와 대상’으로, 상대적으로 분별해서 받아들이는 정신적 습관을 자각하고, 그러한 습관을 제거하는 훈련을 닦아나가 어디에도 안주하지 않는 참된 유식(唯識)의 도리를 깨닫는 것을 말한다. 지심(止心, samatha)과 관법(觀法, vipasyana)이 가행위 단계에서 근원적인 사유의 단계로 실수(實修)된다.
그리하여 번뇌가 없는 지혜를 얻기 위해 모든 대상과 그것을 인식하는 주관은 모두 허구라고 주시하는 단계이다. 이렇게 수행해나가는 가운데에 자연히 심신은 경쾌해지고 여러 가지 신통력도 일어나며, 난(煖) . 정(頂) . 인(忍) . 세제일법(世第一法)이라는 4선근(四善根)도 차례로 생겨 순결택분(順決擇分)에 들게 된다. 즉, 자량위 수행을 거쳐 가행위에 들어서서 더 공부를 하면 가행위 중의 첫 번째 단계인 난위(煖位)에 이른다.
※지전보살(地前菩薩)---보살이 부처에 이르기 위해 수행하는 10단계를 십지(十地)라 하는데, <화엄경>에서 천명한 52위 중 제41에서 제50까지의 10지와 천태종(天台宗)의 통교(通敎) 십지가 있다. 십지 중 초지인 환희지(歡喜地)에 오른 보살을 초지보살(初地菩薩)이라고 하고, 그 이전의 보살을 지전보살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통달위부터는 지상보살(地上菩薩)이라 하는데, 진여법성을 확실하게 깨우쳐서 더 이상 후퇴하지 않는 단계를 말하며, 초지보살에서 십지보살까지를 말한다.
※순결택분(順決擇分)---‘결택(決擇)’은 결단하고 가려서 사유한다는 말로서 번뇌가 없어진 세계로 방향이 정해지는 단계이다. 즉, 번뇌가 없는 지혜로써 모든 의심을 끊고 4제(四諦)를 사유하는 성자의 경지로 나아가는 난(煖) . 정(頂) . 인(忍) . 세제일법(世第一法)의 4선근(四善根)을 말한다. 이는 다음 통달위에 이르기 위해 특히 애써서 수행하는 자리이다.
③ 통달위(通達位) - 견도위(見道位)라고도 하는데, 통달위에 오르면 진여성(眞如性)을 관찰하게 된다는 뜻에서 견도(見道)라고도 한다. 진여성을 관조하면서 매우 기쁘다는 뜻으로 환희지(歡喜地)라고도 한다. 환희지는 초지보살(初地菩薩)이 수행하는 경지를 뜻한다. 즉, 보살 십지(十地)의 첫 단계인 환희지[초지(初地)]에 입문한 상태를 말한다. 수승한 보살이 닦는 수행위로서 성인의 지위에 든 것이다.
통달위에서는 참으로 마음의 흐름을 명확히 보아 무아(無我)인 줄 알게 되고, 초지보살 이전의 수행위를 지전(地前)의 수행위라 하는데, 지전의 수행위가 자량위와 가행위이다.
이 지위에 오르면 비로소 무루지(無漏智)를 얻어 진여(眞如)의 이치를 체득하게 된다. 그런데 분별심이 없어지지만 아직 반연(攀緣)하는 작용이 남아 있어서 진여를 완전히 증득한 것은 아니다. 즉 후천적인 번뇌[분별기번뇌(分別起煩惱)]는 한꺼번에 소멸되지만 선천적인 번뇌[구생기번뇌(俱生起煩惱)]는 아직 요지부동이다. 하지만 분별기번뇌가 끊어지면 통달위이다. 통달위에 오르게 되면 청정의 힘이 굉장히 강해지고, 번뇌의 근원인 ‘나와 나의 것’이 없음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 경지에서도 아직까지 인간이라는 궁극적인 존재는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에 이와 함께 하는 번뇌는 요지부동이라는 것이다. 몸에 침투된 번뇌는 여전히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으며, 각종 종자(種子)를 함장하고 있는 아뢰야식(阿賴耶識/alaya-vijnana)은 변화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근본이 되는 무분별지(無分別智)를 얻기 위해서는 수행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불교 일반에서 수행의 단계를 크게 견도(見道)와 수도(修道)와 무학도(無學道)라는 3도로 구분할 때, 앞서 말한 자량위와 가행위에 이 통달위를 더해 견도로 간주한다.
④ 수습위(修習位) - 수도위(修道位)라고도 하며, 통달위에서 아직도 정화하지 못한 부분을 더욱 정화하기 위해 수행하는 단계이다. 그 동안 긴 기간에 걸쳐서 끊임없는 수행과 그로 인해 체득된 무분별지의 발현에 의해 아뢰야식 중에 있는 번뇌와 주객체의 잠재력을 함께 단절하게 된다. 그리하여 이 단계에서는 아집(我執)과 법집(法執)을 정화하는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닦아 진여의 경지에 진입하는 수행을 한다.
아공은 나 자신이 공(空)한 것을 깨닫는 것이고, 법공은 인연의 법이 공(空)한 것임을 깨닫는 것을 뜻한다. 모든 사물은 인연의 집합과 더불어 공동의 노력으로 조성된 것이기 때문에 선정의 지혜로 그 본성을 잘 관찰하면 공(空)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소지장(所知障)이 없어지고, 동시에 번뇌장(煩惱障)이 정화되면서 그 동안 장애를 받아 발휘되지 못했던 지혜가 본격적으로 발현되기 시작한다. 이는 점차 부처의 경지에 가까워져 가는 본격적인 수행 과정이다. 보살 십지 중 첫 단계인 초지의 둘째 단계이고, 삼도(三道)로 말하면 수도(修道)에 해당한다.
※소지장(所知障)과 번뇌장(煩惱障)---깨달음을 방해하는 장애에는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이 있다. 번뇌장은 탐. 진. 치(貪瞋癡) 등에 의해 수행에 지장을 받는 것이고, 소지장이란 기왕에 조금 알고 있는 알음알이(얕은 지식) 때문에 수행에 장애를 받는 것이다. 번뇌장은 자기 자신의 감정적인 열정과 관련된 번뇌이고, 자아가 존재한다는 믿음에 기초한 번뇌이다. 반면에 소지장은 외적인 현상의 존재가 실재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어리석음에 기초한 번뇌이다. 소지장은 지혜의 결여로서 결국은 깨달음의 장애가 된다. 번뇌장이 정서적인 혼란을 가리킨다면, 소지장은 지적인 편견과 우매함을 포괄한다.
※삼도(三道)---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는 3가지 수행 과정인 견도(見道). 수도(修道). 무학도(無學道)를 이르는 말이다.
⑤ 구경위(究竟位) - 구경위는 자량위, 가행위, 통달위, 수습위의 4위의 수행을 통해 8식(八識)에서 야기되는 모든 번뇌를 정화하고, 성불(成佛)의 지위에 오른 과위이다. 즉, 구경위는 모든 번뇌를 정화하고 성불의 보살들이 수많은 기간에 걸쳐서 수행을 한 결과 마침내 마음이 최고의 이상적인 경지에 머무는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여기에서는 지금까지 우리 중생들이 일상생활에서 신체적인 감각이나 의식 등의 주관적인 인식활동을 통해 얻은 모든 알음알이들이 완전히 제거돼 다시는 번뇌나 망상과 같은 삿된 생각들이 일어나지 않는 깨달음의 경지를 말한다.
이때는 금생에 지은 번뇌 또는 과거 전생으로부터 잠재의식에 묻어온 번뇌를 다 뿌리 뽑아서 참 우주의 본바탕인 불성과 하나로 일치된다. 그러면 그것이 바로 인격의 완성 정각성불(正覺成佛)이다. 즉, 최상의 깨달음에 도달한 부처의 경지로서, 삼도로 말하면 무학도(無學道)라고도 불린다. 무학도란 더 이상 닦을 것이 없는 단계라는 뜻이므로, 여기서 수행의 목적은 성취된 것이다. 이것을 긍정적으로 표현할 때는 부처라는 수행의 결실, 즉 불과(佛果)를 얻었다고 한다.
이상이 유식에서 말하는 5위의 수행단계로서, 중생은 현재 번뇌의 마음을 지니고 있지만 수행을 통해서 마음을 정화하면 번뇌가 사리지고, 육바라밀(六波羅蜜) 등의 수행으로 보살도에 나아가게 된다는 내용이다.
*진여眞如 tathata , 불교에서 궁극적 진리, 만물의 본체를 뜻하는 말.
여여·여실·여라고도 한다. 변화하는 세계의 변화하지 않는 존재 그대로의 진실한 모습을 말한다. 진여라는 개념은 대승불교가 일어나기 이전부터 사용되었지만 대승불교가 흥기하면서 반야사상 계통의 경전에서 중요한 개념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후 유가행파와 여래장사상에서도 진여는 중요한 개념으로 받아들여졌으나 그 내용은 학파에 따라 다르게 규정되었다.
내용
진여는 우주 만유의 실체로서 현실적이며 평등 무차별한 절대의 진리로 불교의 여러 학파에서 끊임없이 연구되어 왔다. 우리 나라에서는 ≪대승기신론 大乘起信論≫에 입각하여 신라의 고승 원효(元曉)가 주장한 설을 널리 채택하고 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일심(一心)을 참되고 한결같은 본체적인 면과 변화하고 움직이는 현상적인 면으로 나누고, 이를 심진여(心眞如)와 심생멸(心生滅)이라 하였다. 그리고 참되며 한결같은 진여는 말로써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여 이언진여(離言眞如)를 간략히 밝히고, 이어서 그래도 감히 말로써 설명해 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하는 것을 밝힌 의언진여(依言眞如)의 장을 두었다.
본체로서의 진여가 과연 절언인가 부절언(不絶言)인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이 있을 수 있고 논쟁이 전개될 수 있는 충분한 소지가 있다. 이에 대하여 원효는 진여를 사(事, 現象)에 대한 이(理, 본질적인 원리)로 이해하고, “이 이(理)는 언설을 절한 것도 아니고 언설을 절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이(理)는 언설을 절한 것이며 또한 언설을 절하지 않은 것이기도 함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원효는 ≪대승기신론소 大乘起信論疏≫에서 이언진여에 대한 몇 가지 점을 말을 빌려 밝히고 있다.
① 진여는 전체성·보편성·영원성을 지닌 대총상(大總相)이며, ② 진여는 참된 이해를 낳게 하는 원리원칙으로서의 법(法)이고, ③ 진여는 열반에 들어갈 수 있는 문이 되며, ④ 일심을 그 체(體)로 하고 있고, ⑤ 불생불멸(不生不滅)로서 시간성을 초월하고 있으며, ⑥ 망념(妄念)을 떠나 있기 때문에 말로써 설명될 수 있는 것도, 문자와 개념으로 알릴 수 있는 것도, 분석적 사변이 닿을 수 있는 것도 아니라고 하였다.
진여에 대한 두번째 설명은 말에 의지하는 방법이다. 말에 의거한 진여 설명은 부정으로서의 공[如實空]과 긍정으로서의 공[如實不空]으로 다시 분류된다. 궁극적인 실재를 드러내기 위하여 여실공을 세웠고, 진여의 자체에는 완벽한 상태의 공덕이 갖추어져 있음을 밝히기 위하여 여실불공을 세운 것이다.
즉, 여실공의 진여는 유상(有相)도 아니고 무상(無相)도 아니며, 비유상(非有相)도 비무상(非無相)도 아니라고 하여 일체의 상대적인 모습을 부정하고 있다. 그리고 여실불공으로서의 진여는 영원하여 불변하고 공평무사한 법이 가득 차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여실불공의 진여가 깨달은 사람에게만 온전히 드러난다는 사실을 원효는 상기시키고 있다.
진여에 대한 세번째의 설명은 진여를 본체[體]와 속성[相]과 작용[用]의 측면에서 살펴보는 것이다. 진여의 체는 보이지 않는 초험적인 것이고 선험적인 것이다. 그것은 모든 현상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진여 그 자체이며, 본각(本覺)이기도 하다. 이 체의 모습은 범부라 하여 주는 일이 없고 부처라 하여 늘어나는 것이 아니며, 시작과 끝이 없는 영원한 것이라고 한다. 진여의 상은 진여한 마음이 갖는 완벽한 덕성이다.
그 덕성이란 ① 대지혜이고 광명이며[大智慧光明], ② 모든 대상세계를 남김없이 두루 비춰 주며[偏照法界], ③ 진실한 인식이며[眞實識知], ④ 그 본래의 성격은 청정한 마음이며[自性淸淨], ⑤ 영원하고 행복하고 자유자재하고 더러움이 없으며[常樂我淨], ⑥ 청량하고 변화됨이 없으며 자재로운 것이다[淸凉不變自在].
이 여섯 가지 진여의 속성들은 말로써 표현할 수 없는 본체를 세속적인 표현을 통하여 열거한 예에 불과하다고 원효는 단서를 붙였다. 진여의 용은 진여심의 작용면에의 위대성이다. 이 용에 대한 설명은 본각을 회복해서 가진 부처를 내세워 설명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진여의 용이 무슨 까닭으로 있게 되는가를 주로 다루고 있다.
즉, 진여의 작용은 ① 제불여래(諸佛如來)가 본래 부처가 되려고 수행하는 단계에서 대자비를 발하여 갖가지 바라밀(波羅蜜)을 닦아 중생을 포섭하여 교화하고, ② 대서원(大誓願)을 세워 무한한 겁(劫)을 통하여 미래가 다하도록 모든 중생계를 해탈시킨다. ③ 일체의 중생을 자신의 몸과 같이 여기기 때문에 따로 중생관(衆生觀)을 두지 않는다. 그 이유는 중생과 자신의 몸이 진여이고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을 분명하게 알기 때문이다.
원효는 진여의 작용이 있게 되는 이 세 가지 중에서 ①을 결과가 나타나게끔 하는 행위, 즉 본행(本行)이라 하였고, ②를 본래의 소원[本願], ③을 위대한 능력을 지닌 대방편(大方便)이라 하였다. 그리고 대방편의 지혜가 있기 때문에 무명을 없애고 본래의 법신(法身)을 볼 수 있게 된다는 것과 불가사의한 여러 가지 작용이 저절로 나타나게 된다고 하였다. 또한, 그 작용은 참되고 한결같아 두루 미치지 않는 데가 없으며, 중생이 보고 듣는 데 따라서 그 이익을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결국 진여의 작용은 대방편의 지혜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초월자적인 존재가 힘없고 어리석은 중생들에게 베푸는 그 무엇이 아니라 중생심 그 자체의 작용이며, 진여한 중생심 속에서 스스로가 어떻게 보고 어떻게 듣느냐에 따라서 발현되는 작용이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원효의 진여에 대한 주장은 중생의 본체를 설명하는 데 있어 후대의 우리 나라 불교계뿐만 아니라 중국 및 일본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현장 유식학의 발달과 한계
현장이 인도로 간 이유 중 하나가『유가사지론』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장은 미륵에서 시작한 유식학파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인도불교를 중심으로 배운 현장의 유식학에는 중국의 정서와는 다른 필연적인 문제점을 품고 있다. 이것이 五性各別說*이라고 하는, 인간마다 근기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성불’에 어떻게 다가가야 하는지를 제창한 학설이다.
인도에는 카스트제도라고 하는 피부색과 혈통에 따라 구분 짓는 신분 제도가 있기 때문에 사람은 결코 평등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에는 이러한 신분 제도가 없기 때문에 맹자가 ‘天命靡常’이라고 하여 천명은 정해져 있지 않다고 한 것이나, 『사기』 「陳涉世家」에 흔히 회자되는 ‘王侯將相의 씨가 따로 있나’라는 말이 쓰여 있는 것은 권력에 의해 재편되는 중국의 신분 구조를 잘 나타내는 예이다.
현장도 이러한 주장의 위험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유식론이 중국에서는 위험하다는 견해를 피력하였으나, 그것이 인도불교의 정설이므로 그대로 전하라는 지시를 받게 된다. 그래서 이를 시행한 현장의 유식학은 제자인 자은 규기(632~682)에 의해 발전하지만, 보편성과 평등을 앞세운 화엄종에 의해서 중국불교의 주류에서 물러나게 된다.
*五性各別說: 유식불교(唯識佛敎)에서 제시하는 다섯 가지 인간 유형.
중국 법상종(法相宗)의 현장(玄奘)·규기(窺基) 등에 의하여 제창되었으며, 이들 인간 유형이 성불(成佛)이라는 불교의 목적에 어떻게 접근하는가를 현실적으로 제창한 학설이다. 대승불교의 근본이상에 의하면 “모든 생명에는 부처의 성품이 있다(一切衆生 悉有佛性).”고 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인간에게는 근기(根機)에 따른 천차만별의 상이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대별한 인간관이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성문정성(聲聞定性): 성문의 가능성을 가지고 태어난 존재로서, 진리를 즐겨 듣기는 하나 실천이 없는 소승(小乘)의 성자를 가리킨다.
② 독각정성(獨覺定性): 성문보다는 지적으로 월등하지만 여전히 이타(利他)의 보살행을 결여한 소승적 수도인을 말한다.
③ 보살정성(菩薩定性): 보살의 이상과 행위를 실천하는 대승의 수도자로서, 오성(五性) 중 가장 뛰어난 존재이며, 후천적인 노력 여하에 따라 성불이 기약된다고 보고 있다.
④ 부정정성(不定定性): 아직 선악이 나누어지지 않은 가능성의 존재로서, 선도 악도 될 수 있는 일반적 가능태(可能態)를 가리킨다.
⑤ 무유정성(無有定性): 성불에의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존재로서, 전생부터의 악업이 쌓여서 성불을 이룰 가능성이 없다.
이상의 인간 유형 제시는 매우 현실적인 인간관임에는 틀림없으나, 마지막의 무유정성을 놓고 대승불교 사상계에는 큰 논란이 있었다. 즉, 『법화경』이 등장한 이후 아무리 극악한 존재라 할지라도 성불할 수 있다는 ‘일천제성불설(一闡提成佛說)’이 일세를 풍미하였기 때문이다.
신라의 고승 원측(圓測)은 이 오성각별설을 전면으로 부정하여 ‘일성개불설(一性皆佛說)’을 제창하였다. 즉, 다섯 가지의 현실적 인간 유형은 인정하지만 성불에 있어서는 오직 일불승(一佛乘)만이 있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성불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 대립은 끝내 유식불교를 분열시켜서 유상(有相)·무상(無相)의 구분 외에도 또 다른 분파를 초래하였다.
특히, 중국 법상종의 사상가들은 원측 등이 주장하는 ‘일성개불설’을 비판하여 그와 같은 사상 계통의 저술들을 전부 없애버리기도 하였다. 대부분의 생애를 중국에서 보낸 원측의 저술들이 인멸된 것은 이러한 까닭이다. 원측의 학설은 티베트지역 등에서 크게 호응을 얻었으며, 우리나라의 의적(義寂)·태현(太賢)·경흥(憬興) 등 유식사상가들은 대체로 원측의 학설을 따르고 있다.
불교사 100장면 261쪽. 262쪽 오성각별설 참조
*부록
<4연(緣) - 인연(因緣), 소연연(所緣緣), 등무간연(等無間緣), 증상연(增上緣)>
연(緣)은 원인 일반을 가리키기도 하고, 직접적인 원인으로서의 인(因)과 구별해서 보조적이며 간접적인 원인을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연과 인을 합쳐 인이라 하기도 하고, 연이라 하기도 한다. 이와 같이 연(緣)은 여러 경우에 쓰이기는 하나, 대개 인연(因緣)과 같은 말로서 직접적 원인과 간접적 원인을 총칭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그리고 4연은 물(物)ㆍ심(心)의 온갖 현상[온갖 유위법(有爲法)]이 생기는 것에 대해 네 가지 경우로 나누어서 설명을 하고 있다. 즉, 4세기경 세친(世親)의 논서인 <아비달마구사론(阿毘達磨俱舍論, Abhidharmakosa)>에 실려 있는 4연을 구마라습은 인연(因緣), 연연(緣緣), 차제연(次第緣), 증상연(增上緣)으로 번역했고, 현장(玄?)은 인연(因緣), 소연연(所緣緣), 등무간연(等無間緣), 증상연(增上緣)으로 구분해서 번역했다. 그런데 4연(四緣)은 주로 마음과 관계돼 마음의 활동을 잘 도와주는 인연관계를 뜻하고, 마음을 중심으로 한 유식(唯識)의 뜻을 설명해주고 있다.
1, 인연(因緣)
인연을 산스크리트어로 hetu-pratyaya라고 한다. 불교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용어 중의 하나인데, 인(因)은 생기(生起)하게 하는 것을 말하며, 연(緣)은 오랜 기간 성장을 시킬 수 있음을 말한다. 즉, 인(因)이 존재자[법(法)]의 생기(성립)에 관계되는 원인이라고 한다면, 연(緣)은 존재자의 유지와 존속에 관계되는 원인이므로 인연은 인과 연의 합성어라고 할 수 있다.
나무의 예를 들어보면, 나무의 근본적인 원인은 씨앗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씨앗이 변해서 나무가 된다. 그래서 나무의 씨앗은 인(因)이고, 그 나무 씨앗이 나무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물과 햇빛, 흙, 공기와 같은 것은 외부의 조력으로서 이것이 연이다.
그러니 인(因, hetu)이 결과를 만들기 위한 직접적이고 내재적인 원인이라면, 연(緣, pratyaya)은 인을 도와 결과를 만들어 내는 간접적이고 외적인 원인(즉 조건이나 상황)이다.
그래서 불교적 사고방식에 의하면 인(因)과 연(緣)이 화합해 생멸을 되풀이한다는 것이다. 삼라만상 모든 유위법의 현상은 원인이 되는 인과 그 결과인 연에 의해 발생하며, 항상 변화하고 일순간이라도 멈추지 않는다고 본다.
헌데 인(因)은 존재자가 본유적(本有的)으로 갖추고 있는 속성이기 때문에 바뀔 수가 없다. 내가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죽을 때까지 인간일 수밖에 없는 것과 같다. 그런데 연(緣)은 환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니, 나의 노력에 의해서 나의 존재환경에 변화가 있을 수 있다. 어렸을 때 갓 태어난 나의 존재는 지금의 나의 존재의 직접적인 인(因)이라고 할 수 있고, 자라면서 나의 뒷바라지를 해 주신 부모, 나를 잘 가르쳐준 스승, 나의 친구, 내가 성장한 환경 모두가 지금의 나의 존재에 대한 연(緣)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에게 본유적으로 존재하는 그와 같은 속성을 인(因) 중에서도 내인(內因)이라고도 한다. 그런가 하면,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공부를 열심히 해서 삶의 환경을 바꿀 수도 있는 것이니, 이 외적환경인 연(緣)을 외인(外因)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외인은 스스로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이며, 이 외인인 연(緣)에 의해서 불교가 종교로 성립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이다. 즉, 수행을 통해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연(외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연(緣-外因)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곧 인간의 작위(作爲)의 중요성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인간의 선행과 악행이 미래의 세계를 결정짓는 중요한 원인이 된다고 보는 것이 불교사상이다.
인연에 의해 생기하는 것은 인연성(因緣生), 연생(緣生), 연기(緣起) 등으로 부르는데, 연기란 인연이 발생하는 것을 말하며, 인과 연의 화합해 따라 생기(生起)했던 것은 인연이 없어지면 소멸한다는 연기의 법칙이 존재한다. 그리고 대승에서는 이 인연에 의해 생기하는 일체의 존재를 공(空)이라 한다.
2, 소연연(所緣緣)
소연연(所緣緣)은 산스크리트어로 alambana-pratyaya이며, 연연(緣緣)이라고도 한다. 소연연은 마음이 의지하는 모든 경계(境界)를 가리킨다. 즉 심적 활동이 일어나도록 하는 모든 인식대상을 가리킨다. 따라서 소연연은 바깥 대상을 인식주관으로 끌어들여 인식이 이루어지도록 하는 인식주관의 지향작용이라 할 수 있다. 소연(所緣)이 원인이 돼, 마음이나 마음작용이라는 결과가 생길 때, 마음이나 마음작용의 대상을 소연연, 마음이나 마음작용을 증상과(增上果)라고 한다.
마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색깔 ? 형태 ? 소리 ? 냄새 등 감각 대상이나 개념 ? 관념과 같은 사유대상이 있어야 한다. 대상이 없이 마음이 생겨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인식대상들을 ‘소연연’이라 불러 마음의 생성원인에 끼워 넣는다. 그러니 유식학적으로는 6식(六識)의 대상이 되는 6경(六境)이 소연연이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소연연이란 마음이 뭔가 인식하게 하는 대상, 혹은 무엇이 일어날 때의 객관적인 조건을 가리킨다. 예를 들면, 벽에 걸린 달력에 그려진 한 장의 그림이 내 고향을 생각하게 하는 원인이 됐다고 하자. 이때 고향을 떠올리게 한 마음작용의 원인이 된 달력의 그림이 바로 소연연이다.
3, 등무간연(等無間緣)
등무간연은 산스크리트어로는 samanantara-pratyaya이며, 차제연(次第緣)이라고도 하는데, 서로서로 일어나게 하는 원인을 말한다. 불교의 찰나생멸(刹那生滅) 법칙에 의하면, 앞선 순간의 심적 활동은 그 다음 순간의 심적 활동이 일어나는 원인이 된다고 하며, 이런 현상을 등무간연이라고 한다. 등무간연은 마음의 활동, 즉 이미 발생한 결과가 곧 바로 다음 순간의 결과를 낳도록 돕는 연(緣)이 되는 것을 말한다. 연속하는 마음의 활동에서 뒤의 생각은 앞의 생각을 계승하는 동시에 그 자신도 원인이 돼 다음 생각을 일으키는데, 이 경우에 원인이 되는 것을 등무간연, 결과는 증상과(增上果)에 해당한다.
※찰나생멸(刹那生滅)---지극히 짧은 순간인 찰나에도 생겨났다가 사라지고, 사라졌다가 생겨나면서 무한의 시간으로 이어진다는 말.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1찰나마다 생겼다 멸하고, 멸했다가 생기면서 계속돼 나간다고 가르치는데, 이것을 찰나생멸(刹那生滅)이라 한다. 결국 그 어디에도 ‘고정불변의 나’는 없다는 무상을 말하므로 찰나무상(刹那無常)이라고도 한다.
※증상과(增上果)---어떤 유위법[물(物)ㆍ심(心)의 온갖 현상]이 생길 때에 자기 이외의 다른 일체 직 · 간접적인 영향을 통틀어 증산과 혹은 능작인(能作因)이라 하고, 그 결과를 증상과라 한다. 능작인과 증상연은 같은 개념이다.
불교적 시각에서 보면 마음은 부단히 흐르는 ‘상속(相續)’이다. 따라서 현 찰나의 마음이 생기기 위해서는 한 찰나 전의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불교는 존재세계를 ‘무상(無常)의 상(相) 하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마음을 포함한 모든 존재는 한 찰나 한 찰나 생성소멸이 이루어지는 ‘찰나적’ 존재이다.
따라서 어떤 존재든지 어떤 찰나에 생성되기 위해서는 전 찰나의 존재를 상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와 같이 “모든 존재는 흐름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마음의 경우도, 마음이 부단한 흐름인 한, 바로 직전 찰나의 마음이 원인이 돼서 그 결과로 현 찰나의 마음이 생기는데, 직전 찰나의 마음과 현 찰나의 마음이 시간적으로 붙어있어서 간격이 없고[무간(無間)], 또 우리가 일상에서 두 가지 일을 동시에 생각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 가지 마음[등(等)]이 꼬리를 물고 찰나적으로 이어지면서 그 질이 거의 같은[등(等)] 생각이 이어진다.
따라서 등무간연은 앞 사람이 건너가고 나서야 다음 사람이 건너갈 수 있는 외나무다리 같은 것이다. 즉, 먼저 발생한 생각이 종식될 때라야 이 종식이 조건이 돼 다음 찰나의 새로운 생각이 발생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심리상태가 생길 때는 반드시 이전 순간의 심리적용이 자리를 내주고 새 심리작용이 일어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어야 하는 만큼, 이전 순간의 심리작용이 다음 순간의 심리작용을 발생하게 하는 간접적인 원인이 된다. 이것은 동일한 순간에 성질이 다른 두 가지 심리현상이 동일한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할 수 없다는 전제에서 나온 말이다.
구마라습의 분류에 의거하면, “인연(因緣)에는 시간의 선후로 펼쳐지는 차제연(次第緣=등무간연)이 있고, 공간적으로 전개되는 증상연(增上緣)이 있다. 부모가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이 다시 자식을 낳는 것과 같은 혈연은 차제연에 해당하고, 지연(地緣)과 같은 것은 증상연에 해당할 것이다. 그리고 연(緣)과 연(緣)이 서로 물리는 연연(緣緣=소연연)도 있다. 이 모든 인연들이 덩굴처럼 어우러지는 것을 반연(攀緣)이라고 한다.”라고 했다. 헌데 혈연 지연은 인연의 평등성을 놓치는 인간의 굴레이다. 왜 그런가? 이 문제는 증상연에서 다시 살펴보자.
※반연(攀緣)---반(攀)이란 의지한다는 뜻이고, 연(緣)이란 조건이란 의미이니, 곧 얽힌 인연이라는 말이다. 정상적인 인연이 아니라 달라붙어 움직이지 못하게 하는 인연, 혹은 도 닦는 것을 방해하는 얽히고설킨 복잡하고 쓸데없는 일들을 말한다. 오이, 호박, 칡과 같이 넝쿨식물을 반연식물이라 한다.
4, 증상연(增上緣)
증상연(增上緣)은 산스크리트어로는 adhipati-pratyaya이다. 이상의 3연(緣) 이외의 일체의 간접적인 원인을 증상연이라 한다. 연(緣)을 두 가지로 구분해 어떤 특정현상이 존속하게끔 하는 직접적인 것을 인연(因緣)이라고 하고, 어떤 특정현상에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간접적으로 조력하는 연을 증상연이라고 한다. 예컨대 눈이 말짱하고 정신도 정상적으로 제 기능을 다하고 있으며, 시각대상이 눈앞에 있다 하더라도, 햇빛이 없으면 시각이 생길 수 없다. 따라서 이 경우에 햇빛이 있는 것은 시각이 생기기 위한 보조적 원인이 된다. 이러한 보조적 원인을 모두 통틀어서 ‘증상연’이라 불러 생성원인 항목에 추가한 것이다. 따라서 우주만물이 총체적으로 증상연으로서 존재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증상(增上)’이란 영향을 주는 힘을 뜻한다. 우리가 기억한 일들이 모두 동일한 힘으로 인상을 남기는 것은 아니다. 어떤 것은 강력한 기억으로 남고, 어떤 것은 약한 기억으로 남는다. 이와 같이 어떤 사건이 산출되는데 있어서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는 원인으로서의 유력증상연(有力增上緣)과 그 사건의 존재를 방해하지 않는 소극적 원인으로서의 무력증상연(無力增上緣)의 2가지가 있다.
증상연은 결과의 생기(生起)에 힘을 부여할 뿐 아니라, 이것을 방해하지 않는 것도 일종의 증상연(增上緣)으로 부른다는 의미에서 모든 존재는 그 자체 이외의 모든 사물에 대해 원인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육근(六根)과 육경(六境), 곧 십이처(十二處) 모두가 증상연(增上緣)이라 할 수 있고, 모든 존재는 어느 하나의 존재에 대해 증상연이 된다는 말이다. 따라서 증상연은 존재의 원인이 매우 광범위하다는 사실을 알리는 불교 특유의 개념이다.
헌데 지연(地緣), 학연(學緣) 같이 증산연이기는 하나 이런 지연 학연과 같은 것은 인연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인연을 도구화할 가능성이 짙다.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려는 도구로 활용하기 쉽다는 말이다. 정치판에서 지연 학연을 내세우는 작태야말로 인연을 오염시키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만남을 도구화하고 수단화함으로써 인간의 진실성을 오염시킨다는 말이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의 굴레이다. 오염된 인연 그것이 인간의 굴레란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번(2012년) 대선 때 안철수는 자기 부인이 호남 출신임을 내세워 호남에 가서 자기는 ‘호남의 사위’라고 떠들어댔다. 지연이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런 자를 옹호하는 중(법륜)도 있었으니 기가 찰 일이었다.
*용어해설
정(正, 산스크리트어: sammā, 팔리어: sammā) 또는 바름은 진리에 계합하는 것을 말한다. 즉 정확(正確)을 뜻하는데, 정확의 사전적인 의미는 '어떤 기준(基準)이나 사실(事實)에 잘못됨이나 어긋남이 없이 바르게 맞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1] 정견(正見) 등의 8정도(八正道)와 정관찰(正觀察) 등에서의 정(正)이 이 뜻에 해당한다. 사(邪)의 반대말이다.
정(正, 산스크리트어: sammā, 팔리어: sammā)은 완전함 또는 철저함을 뜻한다. 예를 들어, 정각(正覺)은 완전한 깨달음 또는 철저한 깨달음을 뜻하고, 정심해탈(正心解脫)은 완전한 심해탈 또는 철저한 심해탈을 뜻한다.
정(正)은 불편불의(不偏不倚) 즉 치우지지 않음을 뜻한다. 이 경우는 중(中) 또는 중도(中道)와 같은 말이다. 이 뜻은 정오(正午)를 뜻하는 정중(正中)처럼 물리적인 현상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쓰이며, 중도(中道) 상태의 무간등(無間等) 즉 중도(中道) 상태의 현관(現觀) 즉 치우치지 않은 현관(現觀)을 뜻하는 정무간등(正無間等)과 같은 불교 교학의 용어로도 쓰인다.
정(正)은 평평함 또는 고름을 말하며, 색경(色境) 중 형색(形色: 8가지) 가운데 하나이다.
정(淨)은 깨끗함, 맑음, 청정함의 뜻으로 무루(無漏)를 말한다.[6] 유루(有漏)를 뜻하는 염(染)의 반대말이다. 둘을 합쳐서 염정(染淨)이라 하는데, 유식학에서 염정(染淨)은 수행자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즉 소지(所知)이다.
정(淨)은 선(善)의 다른 말이다.
정(靜, 산스크리트어: śānta)은 3화(三火) 즉 탐 · 진 · 치의 불선근이 그쳤기[三火息] 때문에 번뇌의 시끄러움이 없게 된 고요함을 뜻하는데, 택멸(擇滅, 산스크리트어: pratisajkhyā-nirodha, 팔리어: patisavkhā-nirodha) 즉 열반(涅槃)을 가리킨다.
정(靜, 산스크리트어: śānta)은 불교의 수행법 중 하나인 4제 16행상(四諦 十六行相: 4성제를 관찰하는 16종의 관법 또는 관행[13]) 가운데 하나로, 4성제 중 멸제에 대한 4가지 관찰[觀法 또는 觀行]인 멸(滅) · 정(靜) · 묘(妙) · 리(離) 가운데 정(靜)을 말한다. 이것은 '택멸 즉 열반이란 모든 3화(三火) 즉 탐 · 진 · 치의 불선근이 그쳤기[三火息] 때문에 번뇌의 시끄러움이 없게 된 고요함이라고 관찰하는 것'을 말한다. 즉, 이러한 수행[行相]을 정(靜)이라고 한다.[
정(靜)은 추(麤) · 고(苦) · 장(障) · 정(靜) · 묘(妙) · 리(離)의 6행관(六行觀) 가운데 하나로 상지(上地)에 대해 정(靜)이라고 관하는 것을 말한다. 정(靜)은 적정(寂靜)하다는 것을 뜻하며, 또한 상지(上地)의 온갖 유루법(有漏法)은 오직 커다란 노력[大劬勞]에 의해서만 성취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정(定)은 삼마지(三摩地, 산스크리트어: samādhi, 팔리어: samādhi, 산스크리트어: ekāgratā, 팔리어: ekaggatā, 영어: concentration, one-pointedness, unification, unification of mind)의 다른 말이다.
정(定)은 선(禪, 산스크리트어: dhyāna,팔리어: jhāna, 영어: meditation), 디야나, 선정(禪定) 또는 정려(靜慮)의 다른 말이다.
정자재소생색(定自在所生色) 또는 자재소생색(自在所生色)은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의 교학에서 극략색 · 극형색 · 수소인색 · 변계소기색 · 정자재소생색의 5가지 법처소섭색(法處所攝色) 가운데 하나이다.[21][22][23] 정자재소생색의 한자어 문자 그대로의 뜻은 '정자재(定自在)로 생겨난 색'이다. 정자재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선정[定]의 자재(自在)로 선정(禪定)의 역량 즉 선정의 힘 즉 선정력(禪定力)을 뜻한다. 따라서 정자재소생색의 문자 그대로의 뜻은 '선정력에 의해 생겨난 색'이다.
정자재소생색은 선정(禪定)에 의해 나타나는 형상으로, 예를 들면, 물이나 불에 대해 선정을 행하여 심일경성의 상태가 되어서 나타나게 되는 물이나 불 등을 말한다.
유식유가행파의 교학에 따르면, 정자재소생색 즉 선정력에 의해 생겨난 색은 가법(假法) 즉 실체가 없는 물체인 경우도 있고 실법(實法) 즉 실체가 있는 물체인 경우도 있다. 후자의 경우는 보살 10지 가운데 제8지 이상의 보살에 의한 것으로, 이 경우에서는 선정력으로 지 · 수 · 화 · 풍의 4대종을 실제로 조합(組合: 여럿을 모아서 합하여 한 덩어리가 되게 함)하고 조작(操作: 일정한 방식에 따라 다루어 움직임하여 물을 포도주로 바꾸고, 납을 금으로 바꾸는 등의 연금술적인 변형을 일으켜 실제의 객관적 물질이 나타나게 한다. 이렇게 나타난 물질은 실제의 객관적 물질이기 때문에 현실에서 그 물질의 본질적 용도 그대로 사용된다. 말하자면, 실제의 포도주이기 때문에 잔치에 실제로 사용할 수 있고 실제의 금이기 때문에 실제로 화폐로 사용될 수 있다. 따라서 실법(實法)이다. 이에 비해 제7지 이하의 보살과 범부의 선정력에 의해 생겨나는 물체는 아직 객관적 물체는 되지 못하고 자신의 주관적 영역에만 존재하는 것이기에 실체성이 없는 가법(假法)이다.
제행(諸行, 산스크리트어: sarva-saṃskāra, saṃskāra, saṃskṛta, saṃskārāḥ, samanta-cāritra)은 '모든 행(行, 산스크리트어: saṃskāra, 팔리어: saṅkhāra)'이라는 뜻으로, 일체의 유위[一切有爲] 즉 모든 유위법을 통칭한다. 구체적으로는,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5위 75법과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의 5위 100법의 법체계에서 무위법을 제외한 모든 법들을 말한다. 달리 말하면, 물 · 심의 모든 현상, 즉 모든 물질적 · 정신적 현상을 말한다. 3법인 또는 4법인 가운데 제행무상(諸行無常)에서의 제행은 이 경우의 뜻으로 즉 '모든 유위법' 즉 '물 · 심의 모든 현상'을 뜻한다.
설일체유부의 5위 75법의 법체계에서의 나열 순서와 법수(法數)에 따르면 제행(諸行)은 색법(色法: 11가지) · 심법(心法: 1가지) · 심소법(心所法: 46가지) ·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 14가지)의 총 72가지 법을 통칭한다.
유식유가행파의 5위 100법의 법체계에서의 나열 순서와 법수(法數)에 따르면 제행(諸行)은 심법(心法: 8가지) · 심소법(心所法: 51가지) · 색법(色法: 11가지) · 심불상응행법(心不相應行法: 24가지)의 총 94가지 법을 통칭한다.
제행(諸行)은 '모든 행(行, 산스크리트어: caryā, 팔리어: cariyā)' 또는 모든 행업(行業)이라는 뜻으로, 보리(菩提) 즉 완전한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 행하는, 몸 · 말 · 뜻으로 짓는 모든 선한 행위 또는 실천을 말한다. 즉 선한 3업(三業) 또는 선한 3행(三行)과 같은 말이며, 만행(萬行)이라고도 한다.
제행(諸行)은 '모든 행(行, 산스크리트어: संस्कार saṃskāra, 팔리어: saṅkhāra, 영어: (mental) formations)'이라는 뜻으로, 무명(無明)으로 일으키는 모든 3업 또는 3행을 말한다. 이것은 특히 12연기의 유전연기의 무명연행(無明緣行)의 문맥에서 말하는 것으로, 무명(無明)에 바탕하여 일으키는, 의도(意圖)하고 지향하는 모든 마음(6식 또는 8식, 즉 심왕, 즉 심법)과 마음작용(심소법)을 통칭한다. 달리 말하면, 무명에 의한 모든 의지력 · 충동력 · 의욕 · 인식 등을 통칭한다.
종자(種子, 산스크리트어: bīja, 팔리어: bīja)는 유식학 관계의 용어로서, 업에 의해 마음(특히 아뢰야식을 말함) 속에 깃들여지는 습기(習氣: 문자 그대로는 '깃들여진 기운', 업에 따른 인상 또는 세력)를 말한다. 사람이 업을 지으면 그에 따른 인상이나 세력이 아뢰야식에 남게 되는데, 이렇게 아뢰야식 속에 깃들여진 습기는 후에 인연이 갖추어지면 현행(現行: 현재화, 현재세력화)하여 업보라는 열매를 맺게 된다. 이런 뜻에서, 업에 의해 마음 속에 깃들여지는 습기가 마치 과실 나무의 씨앗과 같다고 하여 종자라고 한다.
그리고, 습기(習氣)란, 규기의 《성유식론술기》 제2권에 따르면 '기의 분[氣分]', 즉 '기(氣) 즉 세력 또는 힘의 한 형태'로 훈습에 의해서 성립된 세력 또는 힘을 뜻하며, 곧 종자와 같은 말이다.
죄(罪)는 불교에서는 도리(道理)에 반하는 행위, 계율을 어기는 행위, 또는 고의 과보를 불러올 악행을 말한다.
불교에서의 죄(罪)는 크게 성죄(性罪: 본질상 죄)와 차죄(遮罪: 막은 죄)의 2가지로 나뉘는데, 이들을 통칭하여 2죄(二罪)라 한다. 성죄는 5악 가운데 살생(殺生) · 투도(偷盜) · 사음(邪婬) · 망어(妄語)나 5역죄나 10악죄처럼 선 · 악 · 무기의 3성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성질이 악이어서 고타마 붓다의 제지(制止)가 없었어도 죄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에 비해 차죄는 선 · 악 · 무기의 3성의 관점에서 볼 때 그 성질이 악은 아니나 고타마 붓다가 제지하였으므로 비로소 죄가 되는 것으로, 예를 들어 5악 가운데 하나인 음주가 여기에 해당한다.
시산회 님의 블로그 http://blog.daum.net/yc012175/15942988 에서 복사한글임을 밝힙니다.
유식사상(唯識思想)-정통에 가장 가까운 이론 (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