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코 끝에 감추어진 비밀(태을금화종지) 3/4
마음은 또 이렇게 꼬일 수도 있다. "그냥 코 끝을 응시하라는 것은 영안에 집중하라는 것이구나." 마음은 항상 집중을 좋아한다. 그것으로 먹고 사는 것이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나 학원, 대학에서는 명상이 아닌 집중을 가르친다. 그들은 모두 마음을 제조해 내는 공장들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음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눈이 어디를 향하면 마음도 그곳으로 향한다.
어떻게 그것이 위와 아래로 동시에 향할 수가 있겠는가?
또 마음은 이렇게 속삭일 수 있다. "보라 이것은 불가능하다. 그러한 요구는 불합리하다. 어떻게 동시에 양쪽을 바라볼 수 있단 말인가? 코끝과 제3의 눈을 말이다. 그것은 있을 수 없고 되어지지도 않는다. 멍청한 짓 하지 말라." 이제 마음이 늘어놓는 세 번째 수작은 그것이 불합리하다 하여 비난하는 것이다. 우선은 그것이 엉터리라는 생각을 불러일으킨 다음, 이어서 그것을 부수기 시작한다. 그리고 부술 때는 가학적(sadistic)이거나 피학적(masochistic)으로 아주 흐뭇해한다. 이렇게 지껄이면서 말이다. "보라, 이게 바로 그런 의미다. 엉터리 같으니라구. 처음에는 코 끝을 바라보라더니 나중에는 영안이라구? 어떻게 상하를 동시에 보란 말이야?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모두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달 그 자체로
혼동해 버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면 이것의 참 의미는 무엇인가?
'코 끝'이라는 말은 아주 오묘하다.
코는 눈에 대해 길잡이 역할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게 전부다. 하나의 길잡이라는 것. 그대가 영안의 자력에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그 에너지 장(場)에 들어갈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되어질 수 없다. 그대는 그 자력과 에너지의 현장에 존재해야 한다. 그러면 그것이 그대를 맞아줄 것이다. 그대가 들어갈 필요는 없다. 들어가려고 어떤 노력도 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제 격식에 따라 스스로 일어난다.
코를 기준삼지 않으며 눈을 너무 뜬 상태에서 먼 곳을 바라보게 되어
코가 보이지 않게 되거나 또는 눈을 너무 내리감아서 역시 코가 보이지
않게 된다. 눈을 너무 크게 뜨면 시선이 바깥으로 쏠려 쉽게 주의가
산만해진다.
그리고 가볍게 코끝을 응시하는 것의 또 하나의 기능은 이것이 바로 눈을 크게 뜨지 않게 한다는 것. 눈을 크게 뜨면 세상 것들이 들어오게 된다. 그러면 천 갈래 만 갈래로 주의가 산만해진다. 잘 생긴 여자가 지나가면 마음으로 그녀를 쫓아가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싸우고 있을 때 관심은 갖지 않더라도 이렇게 생각하기 시작한다. "무슨 일일까?"
혹은 누군가가 울고 있을 때 호기심이 발동한다. 수많은 일들이 그대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눈을 크게 뜨면 그대는 남성적인 에너지, 양(陽)이 되어 버린다. 눈을 완전히 닫아버리면 그대는 일종의 몽상에 빠져 꿈을 꾸기 시작한다. 그대는 여성적인 에너지, 음(陰)이 되어 버린다. 그 양단을 피하기 위해서 바로 코 끝인 것이다. 간단한 방법이다. 그러나 그 성과는 거의 기적에 가깥다.
그리고 이것은 도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불교에서도 그것을 알고 힌두교에서도 안다. 수세기를 걸쳐 내려오면서 명상가들은 반눈을 뜨게 되면 기적과도 같이 양쪽의 함정으로부터 벗어나게 된다는 사실에 당도하였다. 하나는 바깥세계에 끌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상상의 세계에 끌리는 것이다. 그대는 내면과 외면의 경계에 존재하고 있다. 핵심은 바로 그것이다. 그대가 내면과 외면의 경계상에 존재한다는 것. 그 순간에 있어서 남성도 여성도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대는 이원성 시각을 탈피한다. 그대는 내면적인 분열 세계를 초월하였다. 내면적 분열을 벗어날 때만 그대는 영안의 에너지 장에 떨어지게 된다.
너무 내리감으면 또 안으로 들게 되어 혼미해지기 쉽다.
반눈을 뜬 상태에서 코끝이 보이는 때가 올바른 자세이다.
그러므로 코가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눈꺼풀을 올바르게 내리고 빛이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오도록 하는 일이다.
이것을 기억하는 일이 중요하다. 빛을 강제로 안으로 끌어들이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 창문이 열려 있으면 빛은 저절로 들어온다. 문이 열려 있을 때 빛은 밀려들어 온다. 그것을 당길 필요도 없고 밀칠 필요도 없고 끌 필요도 없다. 어떻게 빛을 끌어당길 수 있겠는가? 어떻게 빛을 밀칠 수 있겠는가? 그저 예민하게 열려있는 것이 필요한 전부이다. 코끝을 응시할 때 일어나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냥 바라보는 것 아무런 집중도 하지 않고 바라만 보는 것, 어떤 긴장이나 무게감도 없이 그냥 응시할 때 돌연 영안의 창이 열리고 빛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한다. 항상 흘러나가기만 하던 빛이 이제는 흘러들어오기 시작하고 순환하는 원이 된다. 사람을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 바로 이 원이다. 사람에게 휴식을 주고 이완을 주는 것도 이 원(circle)이다. 이 원이 사람을 전체적이고 성스럽게 만드는 것이다. 거기에는 더 이상 분열이 없다.
그렇지 않은 모두에게는 다소간 정신 분열증이 있다. 그리고 정신 분열증을 넘어서 있는 그 빛의 원을 만들 수 있는 사람만이 참으로 건강하고 신경증이 없다. 그렇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별 차이가 없다. 신경증이다, 아니다는 단지 정도의 차이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환자와 정신과 의사는 다른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 그들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다. 한 사람의 신경증 환자가 다른 사람의 신경증을 치료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간혹 가다가 환자보다는 치료하는 쪽이 오히려 더 신경증이 심한 경우도 있다.
이 세상에서 다른 어떤 직업보다도 더 많이 미치는 것은 정신과 의사들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많이 자살하는 것은 정신과 의사들이다. 왜인가? 어떤 점에서는 그것이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다. 끊임없이 신경증을 다루고 온갖 미친병들을 취급하다보면 그들도 완전한 사람이 아닌지라 감염이 되게 되어있다. 그들은 스스로 신경증을 먹어대고 있다.
정신분석 의사가 환자의 그 모든 헛소리와 넋두리를 들을 때, 사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것들을 자신 속에 축적하고 있다. 환자는 그 모든 넌센스를 의사에게 헐값으로 팔아넘긴다. 그는 댓가를 지불하였고 점차 정신분석 의사의 내면에 그 싸구려 신경증이 가득 차서 폭발하기에 이른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만약 내가 정신분석 의사의 자격을 결정한다면 빛을 회전시킬 수 있는가 아닌가가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요건이 될 것이다. 자신의 빛을 회전시킬 수 없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치료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자신의 빛을 회전시킬 수 있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의 신경증에도 감염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듣고 도와주면서도 전혀 거기에 오염이 되지 않을 것이다. 빛의 회전이 그를 목욕시키고 깨끗하게 해 줄 것이다. 그는 신성한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스승과 정신분석 의사와의 차이점이다. 스승만이 진정한 정신 분석 의사가 될 수 있다. 스승만이 임상 의사가 될 수 있다. 자신의 전체성에 도달한 사람만이 어둠 속에서 헤매며 넘어지는 사람을 진정으로 도울 수 있다. 그렇지 않고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꼴이 되서 둘 다 구덩이에 빠지게 되어있다.
이 책, 『태을금화종지』는 앞으로 정신과 의사가 되려는 사람들의 기본적인 훈련서적이 되어야 한다. 그대는 놀랄 것이다. 이 책을 최초로 서양의 언어로 번역했던 빌헬름(Wilhelm) 자신이 바로 유명한 심리학자였다. 그것이 바로 그가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된 이유이다. 그러고 이 책을 번역한 후 그는 아주 혼란에 빠져 미쳐 버렸다. 그의 모든 심리분석 훈련과 이 책의 내용이 그의 내면에서 극도의 모순과 알쏭달송함을 불러 일으켜 그는 더 분열되어 버렸던 것이다.
이 책의 번역이 그에게 가져다 준 것은 정신병이었다. 그의 모든 훈련과 그의 모든 이해력이 완전히 뒤죽박죽이 되어버렸기 때문에 그는 방향을 상실했던 것이다. 명심하라. 비결은 어렵지 않다. 그게 오히려 문제다. 너무 단순한 것이기 때문에, 그대는 마음이 그것을 잡아 꼬아 어렵고 헷갈리게 만들어 놓지 못하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코가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눈꺼풀을 올바르게 내리고 빛이 자연스럽게
흘러들어 오도록 하는 일이다. 애쓰지 말고 그냥 빛이
응집되어 흘러들어 오기만 바라는 것이다.
집중해서 빛을 끌어당길 필요는 없다. 그것은 저절로 들어온다. 그렇게 저절로 들어올 때 그것은 아름답다. 만약 빛을 끌어오려고 노력하면 실패는 이미 맡아놓은 거나 다름없다. 그리고 실패하면 할수록 그대는 더욱더 애를 쓸 것이다. 그리고 애를 쓰면 쓸수록 실패는 더욱더 절실해질 것이다. 그것을 끌어오려고 하지 말라. 그대 자신을 올바른 위치에 놓기만 하라. 그러면 된다.
가령 밤하늘에 달이 있다고 하자. 창가에 가서 거기에 서 있으면 그대로 달빛에 흠뻑 젖을 것이다. 다른 행동을 할 필요는 없다. 이미 흐르고 있는 달빛 속에 그냥 서 있기만 하면 된다. 그대 자신을 올바른 위치에 놓기만 하면 정말 무한히 가치 있는 일이 저절로 일어나는 것이다.
코 끝을 바라보는 것은 최초 좌선(坐禪)을 시작할 때 시선이 올바른 방향으로 고정되게 하려는데 있으며, 그리하여 길잡이 역할이 끝나면 그대로 방치해 두면 된다. 이것은 마치 일꾼들이 다림줄을 세우는 것과 같다. 일단 다림줄이 세워지면 일꾼들은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고 세워진 다림줄에 따라 일을 해나가는 것이다.
양 눈으로 코끝을 바라본다는 것..... 기억하라. 코끝에서 그대의 양 눈이 이원성(duality)을 상실해 버리도록 두 눈으로 코끝을 응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코끝에서 그대의 양 눈을 통하여 흘러나오던 빛줄기가 하나가 된다. 한 점에 모아진다. 바로 그 두 눈이 만나는 지점이 창문이 열리는 곳이다. 그러면 만사가 순조롭게 된다. 이제는 모든 걸 그대로 맡겨놔 버리고 그냥 즐기고 기뻐하고 노래하고 춤을 춰라. 아무것도 더 이상 할 것이 없다.
양 눈으로 코 끝을 바라보고 편안한 자세로 똑바로 앉아라.
똑바로 앉는 것이 도움이 된다. 척추가 똑바를 때 성 센터(sex cen-ter)의 에너지가 제3의 눈에 이용될 수 있다. 아주 간단한 방법이다. 거기에는 복잡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마치 코 끝에서 양 눈이 만날 때 계3의 눈이 작동되는 것과 같다. 마찬가지로 그대의 성 에너지도 제3의 눈에 이용되게 하라. 그 효과는 두 배가 되어 강력해질 것이다. 성 센터에는 그대가 가지고 있는 모든 에너지가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척추를 똑바로 세울 때 성 센터도 제3의 눈에 연결된다. 양방으로부터 제3의 눈을 쳐서 뚫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 편안한 자세로 똑바로 앉아라.
스승은 사리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확실하게 똑바로 하라. 그러나 그것이 불편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불편함으로 말미암아 다시 주의가 산만해질 것이다. 요가의 자세가 의미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산스크리트어의 아사나란 말은 '편안한 자세'를 의미한다. 편안함이 기본 속성인 것이다. 편안하지 못할 때는 마음이 거기에 휩쓸릴 것이다. 자세는 편안함을 주는 것이어야 한다.
앉는데 익숙해진 동양인처럼 마루바닥에 앉을 수 없거든 차라리 의자에 똑바로 앉는 것이 낫다. 그대는 고대 이집트의 왕이나 여왕의 그림과 동상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의자 등받이는 아주 똑바르다. 그들은 그렇게 앉았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요가의 자세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그 비밀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두 가지, 그대의 척추는 똑바로 세워져야 하고 자세는 편안해야 한다는 것. 만약 두 가지가 불가능할 때는..... 간혹 가다가 그런 수도 있지만 두 가지가 다 불가능하지는 않다. 만약 척추를 똑바로 세울 때 불편하고 편안하게 했을 때는 척추가 똑바르지 않거든 편안한 쪽을 택하라. 그것이 최선은 아니지만 그러나 차선은 편안한 자세이다. 그때는 척추와 그것을 똑바로 펴는 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려라. 마음이 흐트러지면 아무것도 안 일어나기 때문이다. 만약 양쪽이 다 가능하다면 그것은 아주 아름다운 일이다.
편안한 자세로 똑바로 앉아 마음을 연중
(center in 沆e midst of con-dition)에 고정시킨다.
그리고 세상으로부터 도피하지 말라. 세상, 그 인연 속에서 살아라. 자동차의 소음이 거기에 있고 비행기가 지나가며 열차가 덜거덕거린다. 온갖 것들이 거기에 있다.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세상이다. 그러나 조용하게 세상의 한가운데 앉아라. 히말라야 동굴로의 도피는 항상 위험하기 때문이다. 그 한 가지 이유는 히말라야의 침묵은 전염적인 것이라서 사람들이 그것을 자신의 침묵으로 착각해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공기도 시원해서 그대는 그것을 자신의 상태인 양 여기게 된다. 그것은 빌어온 것이다. 그대가 시장에 돌아오면 그것은 언제든지 사라져 버린다.
그때 그대는 깨닫게 되리라. 히말라야에서의 그 모든 세월들이 물거품이요, 도로아미타불이었다는 사실을. 그대는 스스로 바보 멍청이 짓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차라리 세속에 머물면서 중심을 잡는 것이 낫다. 히말라야에서의 거짓 침묵 같은 빼앗길 상태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디에 있든지 그 인연 속에서 그대는 중심에 머물러야 한다.
그것은 반드시 머리의 중심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중심을 잡는다고 해서 머리 한가운데 중심을 잡는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정확히 양 눈 사이에 있는 지점에 상념을 집중하는 일이다.
그리고 기억하라. 집중이 아니라 깨어있다는 것, 얼차리라는 것. 코끝을 바라보면서 가볍게 제3의 눈에 저절로 얼차려라. 사실 그대가 코끝을 바라보는 순간 제3의 눈에 저절로 얼차려가 일어난다. 그것이 코의 다른 쪽 끝이기 때문이다. 코의 바깥 쪽 끝은 밖에 나와 있지만 다른 쪽 끝은 제3의 눈에 가 닿아있다. 그래서 한쪽 끝에 얼차리게 되면 다른 쪽 끝에서도 얼차려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나 그냥 깨어만 있어라. 아무런 힘도 들이지 말고 얼만 차려라.
그것은 정확히 양 눈 사이에 있는 지점에 상념을 집중하는 일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엄청난 문구이다. 그것이면 충분하다는 것. 그대는 집에 도달하기 시작했다. 그대는 이제 혁명의 문턱에까지 이른 것이다.
빛은 극도로 유동적이라서‥‥‥
빛은 항상 유동적이며 움직인다. 그리고 빛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큰 움직임이다. 빛은 똑딱하는 일 초에 십팔만 육천 마일을 날아간다. 빛은 순수한 속력이다. 그것은 속력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이다. 빛보다 빠른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빛은 결코 고정적이지 않다. 그것은 항상 동적이다. 항상 움직이고 항상 흐른다.
빛은 극도로 유동적이라서 양 눈의 중간 지점에
사념을 집중하면 저절로 흘러들어온다.
그대가 걱정할 필요는 없다. 창문만 열어놓고 기다려라. 빛은 극히 유동적인 현상이라서 창문만 열려 있으면 저절로 흘러들어 올 것이다. 사실 빛은 수많은 삶 동안 그 창문을 두드려 왔다. 그러나 창문이 열리지 않았고 그렇다고 강제로 열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마치 해 뜨는 아침에 잠이나 쿨쿨 자대는 것과 같다. 햇빛이 창가에 와 문을 두드리지만, 그러나 그 두드림은 침묵의 소리다, 그리하여 그렇게 창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대가 눈을 비비고 일어나 창문을 여는 순간 빛은 밀려들어 온다. 그리고 빛과 더불어 생명이 들어오고 생명과 더불어 환희가 들어온다.
양 눈의 중간지점에 사념을 집중하면 빛이 저절로 흘러들어 온다.
'저절로'란 말을 기억하라. 그대는 행위자가 아니다. 그대는 모든 걸 맡겨 놔버리고 빛에 귀의(歸依)해 왔다.
굳이 노력하여 특별히 중궁(central castle)에 주의를 쏟을 필요는 없는 것이다.
이 몇 마디 속에 중요한 요지(要旨)가 들어 있다. 그대의 전존재를 송두리째 탈바꿈시키는 비밀, 천국의 열쇠, 열반의 비결.....
'연중(緣中)'이란 극히 오묘한 말이다.
중(中)은 아니 있는 곳이 없어서 모든 것이 그 속에 들어 있으며, 창조와 변화의 모든 전개과정에 닿아있다. 그리고 그대가 제3의 눈이 있는 지점에 이르러 중심이 잡히고 빛이 몰아칠 때, 그대는 모든 창조가 일어난 그 자리에 도달한 것이다. 형상도 없고 드러나지도 않는 곳에 도달한 것이다. 원한다면 그것을 하나님이라고 불러라.
모든 것이 그 지점, 그 공간에서 생겨났다. 그것이 바로 모든 존재의 씨앗이다. 그것이 전지전능이요, 영원이다. 이제 그대에겐 죽음이란 게 없다. 이제 그대는 더 이상 젊다든가, 늙다든가, 아름답다거나 추하다고 하는 육체에 매어있지 않을 것이다. 이제 그대는 질병이란 것을 모른다. 질병이 몸에 생기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대가 더 이상 동화(同化)되지 않음으로써 그들이 일어나지 않아서이다.
라마나 마하리쉬(Ramana Manharshi)는 암으로 죽었다. 그의 몸은 극도의 고통 속에 있었지만 그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의사들은 어리둥절해 했다. 그들은 믿을 수 없었다. 믿어지지 않았다. 그의 몸은 지독한 고통 속에 있는데 그는 지극한 환히 속에 있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그들은 거듭거듭 물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는 그때마다 대답했다. "이상해 할 건 없다. 나는 육체가 아니다. 그러므로 육체에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것은 마치 그대들이 나의 몸을 바라보고 있는 것과 같다. 나는 나의 몸을 그렇게 바라볼 뿐이다. 그대들이 아무런 고통을 느끼지 않듯이 나 또한 그렇다. 그대들은 지켜 볼 뿐이고 나 또한 지켜보는 것뿐이다. 육체는 하나의 대상, 우리들 사이에 놓여있는 하나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들은 바깥으로부터 이 몸이 고통에 휩싸여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안으로부터 본다. 보는 것이 그대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데 나 또한 그러지 말라는 법이 있겠느냐?"
사실 의사들은 영향을 받았다. 그들은 매우 동정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은 슬펐다. 그들은 무력감을 느꼈다. 그들은 그 사람을 구해주고 싶었으리라. 땅 위를 걸었던 가장 아름다운 사람 중의 하나인 그를 말이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그들은 울고 있었다. 그러나 마하리쉬는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밖으로 연결되어 드러난 모든 것과의 연결이 갑작스레 끊어져 그대 내면의 드러나지 않은 세계와 연결되는 것이 자유로의 길이다. 모든 불행과 한계와 구속으로부터의 자유인 것이다.
지와 관(觀)은 원래 나눌 수 없으며‥‥‥
그리고 이것은 그대가 반드시 거쳐가야만 할 필요불가결한 것이다. 그대가 그 아름다운 경지에 도달하고 싶으면 이 지(fixating)와 관(contemplation )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것은 정(定)과 혜(慧.)를 뜻한다. 상념이 떠올라 오면‥‥‥
이제 스승이 주는 두번째의 아주 중요한 충고가 여기에 있다.
완고하게 앉아 있어서만은 안되고 그 상념이 어디에 있고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사라지는가를 주시해야 한다.
이것은 처음 시작할 때부터 그렇게 되지는 않는다. 코 끝을 응시하고 있노라면 상념이 들어올 것이다. 그것들은 수많은 삶 동안 들어온 것으로서 그렇게 쉽사리 그대만 홀로 남겨놓고 떠나지는 않을 것이다. 상념은 그대의 일부가 되어있고 거의 그대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대는 거의 각본이 짜여져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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