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의 생성과 문예지의 기여
우리 현대시의 역사는 올해로 100년을 맞는다. 대체로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이 1908년 11월, 그가 창간한『少年』지에 신체시「海에게서 少年에게로」를 발표한 것을 기점으로 하여 산정한 것이다. 그러나 최남선은 이 작품을 통해서 시의 형식면에서 새로운 시도를 하고 있으나 그 내용은 개화기의 일반 시가(詩歌)와 잘 구분되지 않는 면도 있다. 종래의 4. 4조나 7. 5조의 정형시 율격을 파괴하고 근대시로 발전시킬 준비의 단계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우리의 근대시는 서구문명(1984년, 정조 8년에 서교(西敎)의 성경과 찬송가가 들어오고 1985년에는 영국의『天路歷程』이 소개된)의 유입으로 신구 문화의 갈등에서 출발한다. 이는 개화기 시가가 개화사상이나 애국정신을 고취하는 강렬한 저항을 노래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우리 근대시의 본격적인 출발은 최남선과 이광수, 김 억이『少年』,『靑春』,『學之光』등이 창간되어 여기에 신시를 처음 보여줌으로써 이 시도는 우리 현대시의 방향을 예고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현대시의 출발점은 어디서부터일까. 많은 학자나 평론가들은 육당이 신체시의 선구자라고는 할 수 있어도 완전한 자유시의 개척자라고는 할 수 없다는 사실에 간과(看過)하지 않는다. 우리는 1919년 2월『創造』창간호에 발표된 주요한(朱耀翰)의「불놀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아아 날이 저문다, 西便하늘에, 외로운 江물 우에, 스러져가는 분홍빛 놀...... 아아 해가 저물면, 날마다 살구나무 그늘에 혼자 우는 밤이 또 오건마는, 오늘은 사월이라 파일날, 큰길을 물밀어가는 사람소리....... 듣기만 하여도 흥성스러운 것을, 왜 나만 혼자 가슴에 눈물을 참을 수 없는고?(제1연)
이는 육당의 강한 창가적(唱歌的)인 요소를 완전히 배제하고 산문형식으로 구성한 자유시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4월 초파일에 흥겹게 노는 군중과 떨어져 죽은 애인을 그리워하던 젊은이가 죽음의 유혹에 사로잡히지만 ‘불놀이’ 광경을 보고 삶의 의지를 회복하는 이야기시의 형태가 시인의 개성적인 서정의 발견이며 형상화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우리 현대시의 생성은 1919년 3. 1운동을 전후하여 우선『태서문예신보』(1918.9.)가 창간되어 김 억의「밋으라」,「오히려」,「무덤」, 장두철의「외 외 아직도」, 백대진의「어진 아내」, 이 일의「나의 노래」,「孤獨의 歌」, 최영택의「일어나는 불」,「잠자코」,「己未의 세임」, 계 원의「樂群」과 음고생의「떠라 怠學生」등의 창작품과 번역물이 게재됨으로써 활기를 갖게 된다.
또한 그 이전에 발간된『少年』,『靑春』『태서문예신보』가 교양을 겸한 준문예지 성격을 띄었다면『創造』(1921.2.) 는 유학생들에 의해서 발간된 순문예지라는 데서 우리 문학사상 획기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는 이 일의「東京아 잘 있거라」,「新生의 日」, 오천석의「꿈길」, 김 억의「浪人의 봄」,「夜의 雨滴」,「無過의 泣」,「그리워」,「春岡」,과 이광수의「밋븜」,와 함께 주요한의「불놀이」,「새벽꿈」, 「하이안 안개」,「선물」등이 발표되면서 시연(詩聯)을 고려한 반자유음률의 신시로 발전시켰다. 이후 계속되는 시동인들의 활발한 활동은 동인지(혹은 문예지)들의 창간과 더불어 다음과 같이 전개되어 문예지들의 역할은 괄목할만한 성과를 낳게 되었다.
- 『開闢』(1920.6.) 잔 물(「어머님」), 노 월(「死의 讚美」), 청 우(「자연의 느 낌」), 강아지(「동무들에게」), 황석우(「微笑의 花輿」), 춘 성(「가을」), 오상 순(「新詩」), 김석송(「離鄕」) 등이 창간호에 작품을 발표하였음.
- 『廢墟』(1920.7.) 김억, 남궁벽, 김영환, 나혜석, 염상섭, 오상순, 황석우, 이익상 등이 낭만주의를 기조로 하여 퇴폐주의, 감상주의, 이상주의를 포괄한 다양성을 띠고 있음.
- 『薔薇村』(1921.5.) 변영로(「장미촌」), 황석우(「장미촌의 향연」,(「장미촌 제 1의 여명」), 정태신(최후의 고향」), 근포 신태악(「生과 死」), 춘성 노자영 (「피어오르는 장미」,(「밤하늘」), 희월 박영희(「笛의 悲曲」,「과거의 왕 국」), 박종화(「우유빛 거리」,「懊惱의 청춘」), 이 홍(「新月의 夜曲」), 이 훈 (「春」) 등이 작품을 발표한 최초의 시 동인지임.
- 『白潮』(1922.1.) 나 빈, 홍사용, 노자영, 박종화, 이상화, 오천석, 이광수, 박영 희, 현진건, 김기진 등이 참여하여『薔薇村』의 낭만주의 경향을 계승하여 감상 적, 퇴폐적, 상징적, 환상적 방향으로 더욱 심화 발전되어 초기 낭만주의 시운동 에 기여함.
- 『金星』(1923.11.) 이상백, 백기만, 양주동, 이장희, 손진태, 유 엽, 양주동 등이 참여하였고 김동환, 박용서, 이원영 등이 추천시를 발표함.
- 『廢墟以後』(1924.1.) 오상순, 김석송 등이 예술을 위한 예술이란 예술지상주의 이념을 천명함.
- 『靈臺』(1924.) 김관호, 김소월, 김동인, 김억, 전영택, 이광수, 오천석, 주요한 등이 순수한 창조적 의욕으로 결집하여 후기 문학운동의 주조인 순문학적 요소 가 그 특징을 이룸.
- 『朝鮮文壇』(1924.10.) 방인근, 이광수, 박팔양, 남진우 등인 발간한 최초의 순 수문예지. 권두사에 ‘참된 예술’ ‘인생을 위한 예술’ ‘우리 조선’을 강조하여 민족 주의 문학을 표방함. 시론으로 주요한(「노래를 지으시려는 분에게」), 김안서 (「타고르의 시」), 이광수(「민요소고」), 이은상(「시인 휘트맨론」), 양주동 (「시단 총평」), 최남선(「조선 국민문학으로서의 시조」)이 참여함.
- 『海外文學』(1927.1.) 김진섭(독문학), 이선근(러문학), 정인섭(영문학), 이하윤 (불문학), 이헌구(불문학), 김광섭(영문학), 장기제(영문학) 등 당시 일본 유학생 중심으로 외국문학을 통한 우리 문학의 건설을 강조함.
- 『朝鮮詩壇』(1928.11.) 황석우, 염상섭, 김억, 김동환, 김해강, 고형곤, 백형기, 김정한, 김현승, 유치환, 모기윤, 이서구, 박팔양, 이익상, 김영팔 등이 범조선의 시 잡지를 표방함.
- 『文藝公論』(1929.5.) 방인근, 양주동, 염상섭, 심훈, 정인보, 이은상, 김억, 한설 야, 김소월, 이장희 등이 활동함.
이와 같이 1910년대에 생성하는 우리 현대시는 신체시를 넘어 1920년대 본격적인 자유시 형태를 갖추는데 문예지들의 많은 기여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 수 있다. 물론 만해 한용운과 같이 이러한 문예지에 동참하지 않고 자기 개성 내부에서 출발한 시인들도 많았다.
현대시는 1930년대를 맞으면서 음운적(音韻的) 혹은 음율적(音律的) 언어로 자아의 사상과 감정을 조화시킨 현대시의 면모를 갖추게 되는데, 1910년대는 시의 계몽시대이며 1920년대는 동인문단으로부터 개인적인 창작시 탐색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서정시와 주지시가 새롭게 등장하고 1930년대는 자연의 귀의와 민족정신의 수련으로 우리 현대시를 정착하는 중요한 시대가 되고 있다.
특히 1930년 3월에『詩文學』이 발행되면서 김영랑, 이하윤, 박용철, 김현구, 허보, 변영로, 신석정, 김기림, 임학수, 임춘길 등 우리 시문학을 대표할 수 있는 시인이 자신의 언어와 감정과 개성을 충분히 발현하고 있다. 더구나 외국문학과 비교할 수 있는 정인보, 이하윤, 정지용, 박용철, 서항석, 이헌구의 동서양 현대시를 번역 소개하는 새로운 업적도 빼놓을 수가 없을 것이다.
이들의 작품 경향은 자기 언어의 미학을 최대한 시와 접목시키는 순수서정의 형태이며 인간의 내면세계를 미화하여 표출시킨 현대시의 전통을 새로운 차원으로 이끄는 원동력을 제공하고 있다.
이후로『新東亞』(1931.11.),『文藝月刊』(1931.11.),『新人文學』(1934.8.),『三四文學』(1934.9.),『詩苑』(1935.2.),『藝術』(1934.12.),『四海公論』(1935.5.),『詩人部落』(1936.11.),『浪漫』(1936),『朝光』(1935.11.),『詩建設』(1936),『詩人春秋』(1937.6.),『삼천리문학』(1938.11.),『斷層』(1937.4.),『靑色紙』(1938.6.),『작품』(1939),『白紙』(1939.7.),『雄鷄』(1939),『人文評論』(1939) 등의 잡지들이 발간되어 많은 시인들이 활동하게 되어 우리 시사(詩史)에서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1939년 2월에 창간된 순수문학지『文章』에서는 박종화, 김상용, 모윤숙, 임화, 이양하, 정지용, 김교한, 이병기, 김동환, 김종한, 이한직, 김수돈, 조지훈, 신석정, 김동명, 김광섭, 박두진, 김기림, 이육사, 변영로, 김영진, 박목월, 신석초, 박남수, 오장환, 이호우, 김광균, 서정주, 유엽, 노춘성 등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기라성(綺羅星)의 시인들이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어서 이『文章』지야말로 우리 현대시의 정착에 공헌을 하고 있다.
더구나 이 때 신인 추천제도를 시행하여 김종한(현대적인 감각의 추구), 조지훈(동양적 禪 세계의 직관), 박목월(향토 정관의 미), 박두진(기도하는 마음으로 자연에 귀의), 이한직(현대적 예지의 세계), 박남수(모더니즘의 실험), 김상옥(이지와 우아한 세계의 섬세), 조정순(한국 여성미의 조화), 김수돈(향수적인 토속성), 이호우(한국의 정한) 등 우리 시단의 거목들을 미리 알고 등단시킨 것이다. 물론 이 추천제도는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서도 시행했으나 1년에 한 명만 뽑는 제도였다.
당시 박목월을 추천한 정지용의 추천사와 추천소감 일부는 다음과 같다.
북에는 김소월이 있었거니와 남에는 박목월이가 날만하다. 소월의 툭툭 불거지는 삭주 구성조(朔州 龜城調)는 지금 읽어도 좋더니 목월이 못지않아 아기자기 섬세한 맛이 좋다. ...... 요적수사(謠的修辭)를 다분히 정리하고 나면 목월의 시가 바로 조선 시다.
조용한 황혼의 노래나 열 편이나 스무 편이나 쓰고 혹은 포플라의 노래 몇 편에 자장가나 두어 편 쓰고 삼십 안짝에 또는 사십 넘어서 예순 안짝에 혹은 여든 안짝에 죽으리라.(1939.9. 첫 추천. 12. 두 번째, 1940.9. 마지막 추천)
이러하듯이『문장』지를 통한 일군의 시인들은 자연의 재발견과 인간과 민족의 역사를 투영하여 우리 현대시의 지평을 열었다는 큰 의의를 갖게 된다. 그 중에서도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세 시인이 발행한『靑鹿集』(1946.6.)은 30년대 후기 우리 시문학의 이정표였다는 점과 이들을 ‘청록파’라 이름한 것도 우리 시사에 큰 흔적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우리 현대시의 생성 과정과 문예지들의 상관성은 지대하다. 아마도 불가분의 관계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매체가 있었기에 생성하고 발전해 왔다. 그 문예지들의 기여에 힘입어 오늘 우리 현대시는 보석처럼 빛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우후죽순으로 발간되는 문학지와 인터넷 매체, 영상문학의 등장 등을 보면서 21세기 현대시의 일대 전환기가 도래할 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우리 시의 형성과정에서 보았듯이 명징(明澄)한 시인의 정신을 투철하게 투영하면서 자연이나 인성 등 존재를 성찰하는 현명한 시인의 자세와 시의 위의(威儀)가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