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를 잃지 않으려면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느끼는 불안2>
흔히 우리는 결정을 앞두고 지나치게 근심한다. 거짓 겸손과 거짓 연민이 있듯이 우리의 선택에 있어서도 하느님께 대한 '거짓 순종'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모든 선택을 하느님 뜻에 따라 하고 결코 잘못 선택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런 태도가 반드시 옳지만은 않다는 것도 알아야 한다.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고 싶다는 열망은 때로 불확실한 상황을 잘 견뎌내지 못하는 약함의 표시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결정할 필요가 없기를 바란다. 그러나 주님의 뜻은 우리가 비록 자신의 결정이 최선인지를 확신하지 못하더라도 어떤 결정을 내리도록 하신다.
이 경우 그저 우리에게 최선인 듯한 것을 행하면서 지나치게 고민하지 않는 것은 신뢰와 내맡김의 태도다.
'주님, 저는 숙고했고 어떤 것이 당신 뜻인지 알려고 기도했습니다. 분명하게 보이지는 않지만 지나치게 걱정하면서 오랫동안 고민하지 않겠습니다. 저는 여러 면으로 보아 이러한 것이 제게 가장 좋은 일이라 생각하며 그대로 하려고 합니다. 비록 제가 틀렸더라도 당신은 제 의도가 올바름을 보시고 용서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제 실수에서 당신은 선을 이끌어 내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저의 실수는 제게 겸손의 이유가 되며 가르침을 받을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평화 속에 머문다.
다른 한편으로 실수가 없고 잘못하지 않기를 바라는 우리의 바람에는 큰 교만이 들어 있고 다른 이들에 의해 판단받는 데 대한 두려움이 있다.
이와 반대로 이따금 실수하는 것을 평온하게 받아들이고, 다른 이들이 그것을 아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참된 겸손과 하느님께 대한 참된 사랑을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에 대해 잘못된 생각을 하지 말자. 하느님은 선하시고 연민으로 가득하신 우리 아버지시며 당신 자녀들의 결함과 판단의 한계를 잘 아신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선의와 올바른 지향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완전무결하거나 우리의 결정이 완벽하기를 요구하시지 않는다.
만일 우리 결정이 모두 완벽하다면 이는 분명 우리에게 이롭기보다 오히려 해로움을 더 많이 끼칠 것이다! 우리는 금세 자신을 초인처럼 생각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주님은, 하느님이 바라시는 것을 알기 위해 끝없이 고민하면서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하는 사람보다 불확실한 가운데서도 망설이지 않고 결정할 줄 알고 결과에 대해서는 주님을 신뢰하면서 내맡길 줄 아는 사람을 더 사랑하신다. 후자의 태도에 더 큰 내맡김과 신뢰와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자유로운 정신으로 앞으로 나아가면서 세부적인 것을 까다롭게 따지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신다. 완벽주의와 성덕은 별로 관계가 없다.
일생을 투신하는 결정과 같이 식별하고 결정하기 위해 시간을 들여야 할 경우와, 반대로 이런 결정이든 저런 결정이든 큰 차이가 없어 결정을 내리기 위해 시간을 끌거나 지나치게 신중한 것이 오히려 어리석고 하느님 뜻에도 반대될 경우를 잘 구분하는 것도 중요하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가 말하듯 "금괴의 무게를 잴 경우는 신중하게 무게를 재야 마땅하지만 푼돈일 경우엔 대강 재는 것이 정상이다."
언제나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려는 악마는 매우 작은 결정도 그것이 정말 주님 뜻인지 자문하게 하여 쓸데없는 일에 불안한 세심증과 양심의 가책을 불러 일으킨다.
우리는 하느님께 순종하려는, 근본적이고 항구한 열망을 지녀야 한다. 그러나 이 열망에 평화와 내적 자유와 신뢰와 내맡김이 따를 때만 참으로 성령을 따른 것이 된다.
만일 그 열망이 의식을 혼란케 하고 자유로운 결정을 방해하는 불안의 원인이 된다면 성령에 따른 열망이 아니다.
주님은 그분께 순종하려는 우리의 열망이 우리에게 진짜 고뇌의 원인이 되는 순간을 허락하실 수 있다. 또 기질적으로 세심한 사람이 있는데 그는 이로 인해 매우 고통스러운 시련을 당할 것이나 주님은 그를 시련에서 완전히 해방시키지는 않으신다.
그럼에도 우리는 내적 자유와 평화 속에 나아가려 애써야 한다. 또한 이미 말했듯이 악마가 어떻게든 우리를 불안하게 하려고 노린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악마는 교활하므로 하느님 뜻을 행하려는 우리의 열망을 이용하여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이런 속임수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어떤 이가 하느님한테서 멀어져 있을 때 악마는 그를 악으로 유혹한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하느님과 가깝고 하느님을 사랑하며 기쁘게 해드리고 그분께 순종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면 악마는 그를 악으로 꾀더라도 (이는 금세 알아차릴 수 있다) 선을 통해 유혹할 것이다. 말하자면 선을 행하려는 우리의 열망을 이용하여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는 말이다.
우리 안에 세심증을 일으켜 놓거나, 우리가 행해야 하지만 힘이 닿지 않거나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지 않는 선에까지 이르러야 한다면서 우리를 낙담하게 하고 평화를 잃게 만든다!
악마는 우리가 충분히 선을 행하지 않는다거나, 우리가 하는 일은 하느님께 대한 참된 사랑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거나 주님은 우리에게 만족하시지 않는다는 것을 믿게 만들려 한다.
악마는 우리가 할 수 없는 이런저런 희생을 주님이 요구하신다고 믿게 하여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악마는 온갖 세심증과 양심의 불안을 일으키나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하느님 품에 달려들어 이를 완전히 무시해야 한다.
우리가 앞에서 말한 이유들 때문에 평화를 잃을 경우 악마의 짓임을 스스로에게 일깨우고 다시 평화로워지도록 노력하자.
혼자 힘으로 안 된다면 영성 생활을 하는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어 의논하자. 이런 유혹에 대해 누군가에게 얘기하는 것만으로도 불안이 완전히 사라지고 평화를 되찾을 수 있다.
우리의 모든 행동과 결정을 이끌어야 할 자유로운 정신에 대한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말로 이 장을 끝맺으려 한다.
"마음을 넓게 가지고 용기를 내십시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언제나 섭리에 내맡기면서 더 큰 부드러움과 고요함을 지니도록 하십시오." (플레례르 부인에게, 1609년 5우러 13일자 편지)
"나는 당신에게, 덕의 실천에서 대수롭지 않은 일에 너무 까다롭지 않고 원만하고 솔직하며, 순진하고 자유로우며 성실하고도 대범해야 한다고 자주 말했습니다. 억압되고 우울한 정신을 나는 두려워합니다. 나는 당신이 우리 주님의 길에서 대범하고 고귀한 마음을 지니길 바랍니다." (샹탈 부인에게, 1604년 11월 1일자 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