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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공적 사역을 시작하심
1-11절,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심
[1절] 그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예수께서는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 인류 역사의 실패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마귀의 시험에 넘어짐으로 시작되었다(창 3장). 그러므로 이제 인류를 구원하실 메시아의 사역이 마귀의 시험을 이기심으로 시작되는 것은 합당하였다.
[2-4절] 40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예수께서는 40일을 밤낮 금식하신 후 주리셨는데, 그때 마귀가 그에게 와서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므로 돌에게 명하여 그것이 떡덩이가 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지 않았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대답하셨다.
예수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실 때 성경말씀을 사용하셨다. 그는 세 번이나 “기록되었으되”라고 말씀하시며 구약성경을 인용하셨다. 그는 자신의 신적 권위 대신 성경을 사용하셨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신앙생활의 정확무오한 규칙이다. 또 에베소서 6:17의 표현대로, 성경은 ‘성령의 검’이다. 그것은 마귀의 시험을 물리칠 수 있는 무기이며 마귀의 시험에 대한 최선의 대책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셔서 돌로 떡을 만드시지 않으셨다. 그 까닭은 떡이 인생의 삶에 본질적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떡이 없으면 사람이 죽지만 그것은 육신의 죽음일 뿐이다. 많은 사람이 돈에 큰 가치를 두고 산다. 그러나 주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매우 어렵다고 말씀하셨고(마 19:23-24) 사도 바울도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말했다(딤전 6:10). 실상,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5-7절]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가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마귀는 두 번째로 예수님을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고 말했다. 마귀도 성경을 어느 정도 알지만 바르게 해석하고 적용하지 못한다. 오늘날도 마귀의 종된 많은 이단들과 거짓 목사들이 성경을 인용하지만, 그것을 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고 그것을 바르게 적용하지 못한다.
예수께서는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마귀가 성경을 잘못 인용하고 적용할 때 성경의 다른 말씀에 의해 반박하는 것이 필요하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딤후 3:16). 성경의 참 저자는 하나님이시므로 성경에는 통일성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의 전체적 빛 아래서 부분들을 이해해야 하고 명확한 교훈의 빛 아래서 불명확한 문제들을 이해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단 성경을 많이 통독해야 한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는 말씀은 성도가 어떤 상황에서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는 것같이 주를 시험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됨을 보인다. 기적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므로 옳지 않고(고전 10:9) 경계해야 한다. 정상적인 신앙생활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충실히 하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신비적 경험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고(고전 1:22-23) 배고플 때에 먹고 피곤할 때에 쉬고 돈이 필요할 때에 일하는 지극히 정상적인 생활이다. 또 기적을 추구하는 것은 자신의 신앙적 교만과 자랑과 명예심에서 나오기 쉽다. 기적을 행한다고 말하는 자들은 자신을 내세우고 자랑하며 허풍과 과장이 심하다. 우리는 기적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8-11절]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가로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마귀는 세 번째로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주며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고 말했다. 그때 예수께서는 그에게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고 대답하셨다.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은 사람이 이 세상 사는 동안만 가치가 있고 마지막 심판 때에 다 불타버릴 허무한 것들이다. 마귀가 세상 권세와 영광을 누구에게 줄 권한을 받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마귀에게 엎드려 절할 수는 없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마귀에게 절해서는 안 된다. 십계명의 1, 2계명의 명령대로, 우리의 경배의 대상은 하나님 한 분뿐이다. 우리는 성경이 증거하는 삼위일체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으로 섬기고 그에게 절하는 것은 가장 큰 죄악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마귀의 존재를 인식하고 마귀의 시험을 물리쳐야 한다. 마귀는 실제로 존재한다. 그는 신화적인 존재나 상징적 표현이 아니고 실재하는 자이다. 그는 오늘도 택한 백성을 범죄케 하려 하고 하나님의 교회를 부패시키려 한다. 성도들과 교회는 지금도 마귀와 전쟁 중에 있다(엡 6:10-11; 벧전 5:8).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의 존재를 인식하고 마귀의 여러 가지 시험들을 물리쳐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마귀의 시험을 물리칠 때 성경말씀을 사용하여 물리쳐야 한다. 예수께서는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실 때 성경말씀을 사용하셨다. 그는 성경이 마귀의 시험을 물리치는 중요한 도구가 됨을 증거하셨다. 우리는 성경을 많이 읽고 마음에 기억함으로써 마귀가 시험할 때 성경말씀을 검과 같이 사용하여 적절히 인용하여 물리쳐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육신의 양식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히 여겨야 한다. 사람은 몸과 영혼으로 구성되었고 몸도 중요하지만 실상 영혼이 더 중요하다. 몸의 질병보다 영혼의 죄가 더 중요한 문제이다. 떡은 몸에 유익하지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영혼에 유익하다. 그것은 구원과 영생을 주는 말씀이다. 성경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혼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기적주의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 기적주의란 현실의 문제를 하나님의 기적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를 가리킨다. 우리는 기적을 믿지만, 기적이 하나님의 일반적 섭리 방식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기적을 구함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고 모든 일에 있어서 겸손히, 인내하며 하나님의 계명을 충실하게 순종해야 한다.
다섯째로, 우리는 하나님만 섬겨야 한다. 사람의 참 본분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그 계명과 교훈을 순종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떤 상황이나 조건 아래서도 마귀와 세상에 굴복하지 말고 하나님만 높이고 섬기고 영화롭게 하며 그의 명령을 힘써 따라야 한다.
12-25절, 전도 사역을 시작하심
[12-17절] 예수께서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 가셨다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사 9:1-2).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 하시더라.
예수께서는 세례 요한의 잡힘을 들으시고 이사야의 예언대로 갈릴리 지방에서 그의 전도사역을 시작하셨다. 이로써 죄와 슬픔의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게 되었다. 예수께서는 “회개하라. [이는]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가까웠음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가 전하신 말씀은 세례 요한의 전한 내용과 동일하였다.
‘가까웠다’는 말은 완료시제로서 ‘이미 가까이 와 있다’는 뜻이다. 천국은 이미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구약성경 다니엘서에는 메시아의 시대에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가 건설될 것이 예언되어 있다(단 2:44). 이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전도하심으로 시작되었다.
천국이 가까웠다는 데에 회개의 절박성도 있다. 죄인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길이며 회개치 않고 죄 가운데 사는 것이 천국에서 제외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회개는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살던 사람들, 곧 불경건하고 부도덕하던 자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하나님 없이 사는 것이 죽음이요 불행이었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생명이요 행복이다. 회개는 죄인이 그 불경건과 부도덕의 죄를 깨닫고 그 죄를 미워하고 그 죄로부터 돌이키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은 회개하고 구원과 영생을 구하여야 한다.
[18-22절]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저희는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이 그 부친 세베대와 한가지로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예수께서는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시몬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제자로 부르셨다. 그들은 다 어부들이었고 그 일터에서 부르심을 받았다.
주께서 공적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하신 첫 번째 주요한 일은 제자를 삼는 일, 곧 전도자를 부르신 일이었다. 전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었고 그는 자신이 전도하기 위해 왔다고 말씀하셨다(막 1:38).그는 자신이 전도하실 뿐만 아니라 전도할 자들을 제자로 부르셨다. 전도의 일은 중요하며 전도자를 부르는 일도 중요하다.
예수께서는 전도자를 ‘사람을 낚는 어부’라고 표현하셨다. 그것은 그 어부들이 이해하기 쉬운 표현이었다. 사람을 낚는다는 말은 사람을 구원한다는 뜻이다. 죄인의 구원이 전도자의 임무요 목표다.
주께서는 ‘나를 따르라’는 초청의 말로 전도자를 부르셨다. 전도자는 주의 부르심을 통해 세워진다. 오늘날도 그는 전도자들을 부르신다.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단순한 초청 이상이다. 그것은 주의 하시는 일을 보고 배우라는 뜻도 내포되어 있다. 전도자는 주님을 따르는 자, 즉 주님의 발자취를 보고 배우며 준비되고 훈련되는 자이다.
부르심을 받은 그들은 즉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 20절, “저희가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22절, “저희가 곧 배와 부친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 부르시는 그가 누구이신지, 또 부르신 그 일이 무엇인지 안다면 그렇게 응답하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다. 그는 전도하는 일을 위해 그의 몸과 마음을 바치며 시간과 재능과 돈과 자기 생명까지도 바칠 것이다.
[23-25절]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예수께서는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시며 세 가지 일을 하셨다. 첫째로, 그는 회당에서 하나님의 모든 진리들을 가르치셨다. 둘째로, 그는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다. 그것은 그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전하신 것을 포함할 것이다. 셋째로, 그는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셨다. 그에게는 병자들을 고치는 능력이 있으셨고 또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으셨으므로, 그는 병자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고 다 고쳐 주신 것이다. 그의 소문은 온 수리아에 퍼졌다. 갈릴리와 데가볼리뿐 아니라,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도 허다한 무리가 그를 따랐다. 사람들은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왔고 그는 그들을 다 고쳐주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주 예수께서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전파하셨다. 그것은 전도의 내용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뜻이며 명령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필요하고 중요하다. 사도행전 17:30-31,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그것은 주께서 전하신 내용이며 또한 사도들이 전한 내용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전도 사역의 내용을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한 것이라”고 요약해 말했다(행 20:21). 회개는 구원을 위해 필요한 일이며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 준비해야 할 필수적 과정이다.
둘째로, 전도자들이 필요하고 중요하다. 주 예수께서는 전도자들을 부르셨다. 사람은 전도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 로마서 10:14-15, 17,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전도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다(막 1:38). 전도는 예수님의 사명이었다. 그는 자신이 전도하실 뿐 아니라, 이 사명을 이을 전도자들을 부르셔서 제자로 삼으셨고 그들이 그를 보고 배우며 훈련을 받게 하셨다. 오늘날도 교회는 전도자들을 부르고 훈련시키고 기도와 물질로 후원해야 한다.
셋째로, 교회는 예수님의 사역을 계승해야 한다. 본문에서 예수님의 사역은 세 가지로 증거되었다. 그는 각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셨고 천국 복음을 전하셨고 모든 병자들을 고쳐주셨다. 교회는 주님의 사역을 계승해야 한다. 첫째, 교회는 천국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천국에 들어갈 준비를 하라고 전해야 한다. 이것은 교회의 첫 번째 임무이며 사명이다. 둘째, 교회는 모든 성경말씀, 즉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교리와 생활 교훈을 잘 가르쳐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성경을 많이 읽고 연구함으로써 성경에 대한 바르고 풍성한 지식을 가져야 한다. 셋째, 교회는 병약하거나 가난하거나 어려운 일 당한 자를 돌아보아야 한다. 비록 우리에게 예수님처럼 병 고치는 능력은 없지만, 교회는 복음 전도와 말씀 교훈과 함께 그가 가지셨던 사랑과 긍휼의 심정으로 병환자나 가난한 자나 어려운 일 당한 자를 심방하고 구제해야 한다.
5장: 완전한 의의 삶
1-6절, 팔복 (1)
[1-2절]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마태는 무리와 제자들을 구별한다. ‘무리’는 이런 혹은 저런 동기로 예수께 나온 자들이며,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고 그의 말씀을 배우고 그를 본받고 그의 교훈을 행하려는 자들을 가리킨다. 오늘날도 교회에 나온 사람들 중에 두 부류가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입을 열어 가르치셨다. 그가 산 위에서 가르치신 보배로운 교훈이라고 하여 ‘산상보훈’(山上寶訓)이라고 부른다. 그 대상은 제자들이었다. 예수께서는 먼저 여덟 부류의 복된 자들을 언급하셨다. 흔히 ‘팔복(八福)’이라고 불린다. 처음 네 가지 복은 구원을 위한 준비이고, 나머지 네 가지 복은 구원받은 자의 덕이라고 본다.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심령이 부유한 자는 자신이 지혜와 지식, 의와 힘이 있다고 생각하여 하나님을 찾지 않고 구원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자이며,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이 지혜와 지식, 의와 힘이 없음을 깨달아 하나님을 찾고 구원의 필요를 느끼는 겸손한 자이다.
불신앙과 불순종은 교만과 함께 간다. 교만은 하나님 대신 자신을 높이고 신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라는 것과, 또 자기가 의뢰하는 돈이나 세상의 것들은 환난 날에 자기를 구원하지 못하며 영생을 보장하지 못하며 지옥에서 자기를 구원하지도 못한다.
믿음은 가난한 심령에서 시작된다. 겸손한 자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를 믿고 그를 따를 수 있다. 심령이 가난하지 않으면 아무도 믿음의 길에 들어설 수 없다. 심령의 가난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며 은혜 받은 자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66:2에서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인하여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권고하리라[돌아보리라]”고 말씀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그의 소유가 될 것이다. 성경에 증거된 대로 사람은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음으로 천국에 들어간다. 그러므로 주께서 하신 말씀은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으려면 우선 자신의 빈곤을 알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우리는 겸손하게 우리 자신이 지혜와 지식이 부족하고 의가 없고 힘이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믿음의 길에 들어설 수 있다.
물론,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자는 계속 겸손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부족과 무능력을 늘 인식하고 우리의 우리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뿐임을 늘 인정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약 4:6; 벧전 5:5).
[4절]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사람에게 복이 되는 애통은 회개의 애통뿐이다. 죄인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깨달아야 하고 자신의 죄의 심각함, 즉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고 노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고 자신의 부족과 죄를 인해 애통해야 한다. 그런 자는 복이 있다.
다윗은,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라고 말하였다(시 51:17). 또 요엘은,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라고 말하였다(욜 2:12-13). 예수께서 한 동네에 들어가셨을 때 죄인인 한 여자가 향유 담은 옥합을 가지고 그의 뒤로 와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자기 머리털로 씻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었다. 그것은 회개의 눈물이었다고 본다(눅 7:37-38).
자신의 죄 때문에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 그것은 죄 문제의 해결을 통해, 즉 죄사함을 통해 이루어질 것이다. 앞에 말한 그 여자에 대해 예수께서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라고 말씀하시고 그에게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하셨듯이(눅 7:47, 50), 애통하는 자는 위로를 받을 것이다. 죄의 용서는 지극히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총이다. 왜냐하면 그 무엇으로도 씻을 수 없고 하나님의 공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는 우리의 더러운 죄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단번에 깨끗케 되기 때문이다.
[5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하다는 말은 겸손하다는 말과 비슷하다. 그것은 교만함, 완고함, 패역함, 목이 곧음과 반대된다. 교만한 마음은 불신앙과 불순종으로 나아가지만,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은 믿음과 순종으로 나아간다. 온유는 믿음의 성품이다. 믿는 자와 믿으려 하는 자는 심령이 온유해야 한다. 사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 하나님과 주 예수님을 믿고 그의 모든 교훈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순종할 수 있다.
온유한 사람은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을 얻는다. 여기의 ‘땅’은 이 세상에서 땅을 얻는 것을 의미하지 않고 새 하늘과 새 땅 곧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서는 강한 자나 힘센 자가 땅을 차지하겠지만, 천국은 다르다. 천국은 온유한 자가 얻는다. 온유한 자만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믿을 것이기 때문이다.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아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구원받은 자들도 여전히 온유해야 한다. 온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다.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온유는 또한 성령의 열매이다(갈 5:23). 그러므로 바울은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교훈하였고(엡 4:2), 또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 입으라”고 말했다(골 3:12).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의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것 즉 그 계명대로 사는 것이다. 그것은 경건과 도덕성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자신에게 의가 없고 죄만 많다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자신이 의가 없는 죄인임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 그러나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구원의 문 앞에 서 있다. 그는 의를 풍성히 얻을 것이다. 그 의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완전한 의를 말한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0:4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말했고 또 로마서 3:20-22에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고 말하였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팔복의 처음 네 가지는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준비를 보인다고 본다. 심령의 가난, 애통함, 온유함, 의에 주리고 목마름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후에도 우리는 이러한 덕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지혜와 지식과 의와 힘의 부족을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우리 자신의 죄와 연약을 생각하며 애통해야 하며 또 온유한 심령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믿고 받아들이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의만 의지하고 의로운 인격이 되기를 힘써야 한다.
7-12절, 팔복 (2)
[7절]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두 번째 네 가지 복은 구원받은 자의 덕이라고 본다. 첫째는 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긍휼은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성품이다. 사도 바울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도다”라고 말하였다(엡 2:4-5). 예정도, 속죄도, 중생도 하나님의 긍휼에서 시작되고 완성된다. 우리의 우리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러므로 남을 긍휼히 여기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당연한 태도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32에서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고 권면하였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마태복음 6:14-15에 보면, 주께서는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면 너희 천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과실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긴 자들을 긍휼히 여기실 것이며, 긍휼히 여기지 않은 자들을 긍휼 없이 대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야고보서 2:13에서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말하였다.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는 남을 긍휼히 여겨야 마땅하다.
[8절]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아담이 범죄한 후, 사람의 마음은 태어날 때부터 매우 부패되어 있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했다(렘 17:9). 주께서도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덕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마 15:19-20). 사람의 마음이 더러운 것은 물욕, 정욕, 명예욕 같은 욕심 때문이다. 사람의 욕심은 사람으로 죄를 짓게 한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모든 욕심을 다 버리고 죄씻음을 받은 자를 가리킨다. 우리는 깨끗한 마음을 지켜야 한다. 그래야 거룩하신 하나님을 감히 섬길 수 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볼 것이다. 그것은 장차 천국에서 그의 영광을 보는 것을 말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하신 영이시므로 마음이 더러운 자, 곧 죄와 탐욕으로 더러운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고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다. 그러나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므로, 우리가 그를 우리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으나,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그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그의 영광을 볼 수 있고 거기에서 그의 영광의 형상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뵈올 수 있을 것이다.
[9절]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케 한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진다고 본다. 첫째로, 그것은 하나님과 화목하게 한다는 뜻이라고 본다. 사람은 죄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으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사역으로 화목케 되었다. 로마서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골로새서 1: 20-22,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것은 복음 전도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다. 구원받지 못한 자는 하나님과 원수 관계에 있지만, 구원받은 자마다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무를 주셨다고 말하였다(고후 5:18).
둘째로, 화평케 한다는 말은 사람들 간의 화목도 의미한다고 본다. 하나님과 화목한 자들은 서로 간에도 화목하기를 힘쓸 것이다. 서로 화목하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마땅한 행위이다. 갈라디아서 5: 19-21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살인[전통사본] 등 아홉 가지를 육체의 일들로 말하였고 또 이런 일들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로마서 12:18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말하였다. 야고보서 3:17은,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다”고 말했다.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사람들 간의 불화를 제거하시고 화목하게 하셨기 때문에, 화목케 하는 성도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기에 합당하다는 뜻이다. 성도다운 행위, 즉 거룩하고 선한 행위는 구원의 표요 확증이다. 특히 죄인들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전도의 일과 하나님 안에서 서로를 화목시키는 일은 성도다운 선한 일이다.
[10-12절]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팔복의 처음 네 번째는 의에 주리고 목마름인데, 다음 네 번째는 의를 위해 핍박을 받음이다. 사람은 심령이 가난하고 죄를 애통하고 온유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름으로 하나님께로 나오고 구원을 받지만, 구원받은 후 그가 남을 긍휼히 여기고 마음이 깨끗하고 화평케 하고 심지어 의를 위하여 핍박까지 받는다면 그는 성도다운 사람이 될 것이다.
의는 하나님의 계명에 일치하는 것이다. ‘의를 위하여’라는 말은 ‘의 때문에’라는 뜻이다. 의 때문에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즉 하나님의 계명대로 산 것 때문에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다. 왜냐하면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확실히 천국 백성이다. 의를 행하는 것이 구원받은 천국 백성의 표라면, 의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은 더욱 그러하다. 사람은 의를 사모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의 구원을 받아야 하고, 구원받은 자는 그 의를 위해 살고 의를 전파하고 의를 위해 고난과 핍박과 순교도 당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또,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나를 인하여’라는 말은 ‘나 때문에’라는 뜻이다. 주께서는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욕과 핍박을 받을 것을 내다보셨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은 평탄한 길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길이다(마 16:24-25). 그것은 핍박받을 것도 예상되는 길이다. 마귀는 예수님 믿는 자를 미워하고 세상을 충동하여 성도를 핍박케 한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 믿는 자를 욕하고 핍박하며 거짓으로 모든 악한 말로 비난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하였다(딤후 3:12).
그러나 주의 제자들은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그들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상을 말씀하시며 핍박받을 제자들을 격려하셨다. 이 구절은 또한 천국에서의 상급의 차등을 보인다. 마지막 심판 때에 사람의 죄악에 대한 형벌에 차등이 있을 것이듯이, 선행에 대한 상급에도 차등이 있을 것이다.
주께서는 또 “그들이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역사상 참 선지자들은 많은 핍박을 받았다. 그 이유는 단지 그들이 바른 말을 했기 때문이고, 그 바른 말이 회개치 않는 사람들에게는 참을 수 없는 고통이 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회개치 않는 자들은 참된 목사들을 미워하고 핍박하고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날 사람들을 공의로 보응하실 것이며 악인들의 악행에 대해 공의로 징벌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의 때문에 핍박을 받는다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에서 가장 복된 일이다. 그것은 참으로 주를 믿고 따르며 섬기는 표가 되며 큰 상이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핍박을 당하는 것은 결코 불행이 아니고 오히려 행복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핍박을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지 못한 것을 뉘우쳐야 하고 어떤 고난과 핍박이 닥쳐와도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바르게, 충성되게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팔복의 처음 네 가지는 구원을 위한 준비를 보인 것이라고 보며 그 다음 네 가지는 구원받은 자들의 덕을 보인다고 본다. 심령의 가난함, 자신의 죄로 인해 애통함, 마음의 온유함, 의에 주리고 목마름은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게 할 것이다. 그들은 참으로 복되다. 구원의 복은 가장 큰 복이다. 이제 구원받은 우리는 다른 사람의 부족과 실수와 연약을 볼 때 멸시하지 말고 그를 긍휼히 여겨야 하고, 이 죄악된 세상 속에서 죄성을 가진 우리들이지만 물욕과 정욕과 명예욕으로부터 마음을 깨끗케 해야 하고, 다른 이들에게 전도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케 하고 또 서로 간에도 화목하게 해야 하며, 또 이제는 의를 위해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받을 각오를 하며 살고 실제로 고난도 받아야 한다.
13-16절, 너희는 세상의 빛과 소금
[13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예수님 믿고 그의 말씀을 배우고 그를 본받고 그의 말씀대로 살아보고자 하는 자들이다. ‘세상’은 하나님을 모르고 그를 섬기지 않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예수님도 모르고 그를 믿지 않는 자들이며 성경말씀도 모르고 그 말씀을 믿지 않고 지키지 않는 자들이다.
예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하셨다. 소금의 역할은 두 가지다. 하나는 짠맛이고, 다른 하나는 부패 방지이다.
소금의 첫 번째 역할은 짠맛이다. 소금은 모든 음식에 필수적이다. 만일 소금이 없다면,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소금은 맛있는 음식에 필수적이다. 너무 짜게 먹는 것은 건강에 안 좋다고 하지만, 음식은 간이 적당할 때 가장 좋은 맛을 낸다.
영적으로도, 인생의 최고의 맛은 삶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알고 거기에 맞게 사는 것이다. 삶의 의미가 없고 목적이 없고 허무하고 부도덕한 삶은 맛이 없는 삶과 같다. 사람의 의미와 가치와 목적은 바로 경건과 도덕성에 있다. 거기에 기쁨과 평안도 있다.
소금의 두 번째 역할은 부패 방지이다. 이것은 짠맛의 부수적 역할이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상하기 쉬운 식품을 오랫동안 보관하는 한 방법은 소금에 절이는 것이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사용되는 중요한 방법이다. 소금은 식품의 부패를 방지한다.
영적으로도, 예수님 믿는 자들은 사회의 부패와 악화를 억제하는 역할을 한다. 그들은 늘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교회에 모여 성경적 교훈을 받는다. 하나님의 바른 교훈을 받는 자들만 악을 떠날 것이다. 그들이 그 교훈대로 산다면 세상이 급격히 타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죄악된 이 세상에서 도덕성의 최후의 보루이다.
그러나 주의 말씀대로, 만일 그들이 짠맛 곧 경건과 도덕성을 잃어버리면 아무 쓸데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들에게 밟힐 뿐일 것이다. 경건과 도덕성을 상실한 교인들은 세상에 아무 유익이 없고 세상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을 무시하고 짓밟을 것이다.
[14-16절]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성경에서 ‘빛’은 지식, 의와 진실, 기쁨과 행복, 생명을 상징한다. 그러나 반대로, 어두움은 무지, 불의와 거짓, 슬픔과 불행, 죽음을 상징한다. 세상은 어두운 세상이다. 세상에는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참된 지식이 없고 의와 진실이 없고 기쁨과 행복도 없고 영원한 생명도 없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된 지식과 의와 기쁨과 생명을 주셨다. 그것이 구원이다. 교회는 이제 세상을 밝히는 빛이 되었다.
주께서는 제자들을 ‘산 위에 있는 동네’라고 부르셨다. 신자에게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가 있다. 기독교는 은밀한 교훈을 주고 받는 밀교(密敎)가 아니다. 기독교회의 모임은 공개된 모임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시대로부터 교회로 모이며 예배를 드렸고 설교들은 다 공개되어 있다. 그리스도인들의 삶은 다 공개되어 있다.
우리의 삶은 세상 앞에 예(例)가 된다. 그것은 좋은 예나 나쁜 예가 된다. 그것은 주로 인간 관계, 대인관계에서 나타난다. 물론, 사상적으로 적그리스도적인 자들이 있다. 또 기독교를 오해해서 기독교를 비방하는 자들도 있다. 또 진리의 지식의 차이 때문에, 기본적인 혹은 중요한 생각의 차이 때문에 부득이 헤어지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범사에 정당하게, 의롭게, 선하게, 진실하게 행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서도 기독교인들이 사랑이 없다든지 악하다든지 거짓되다든지 하는 말을 들어서는 안 된다.
주께서는 특히 우리의 착한 행실을 강조하셨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선하게 살아야 하고 우리의 선한 행실이 사람들 앞에 증거가 되게 해야 한다. 성경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교훈한다(레 19:18). 기본적으로, 우리는 선하고 덕스러운 말을 해야 한다. 또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특히 가난한 자나 외로운 자나 병든 자를 돌아보는 것을 의미한다. 성경은 구제 행위를 강조한다. 굶주리는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주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남겨주셨다. 서로 사랑함은 서로 친절히 대하고 서로 용서하는 것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며 자기 유익을 구치 않으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다(고전 13:4-7). 에베소서 4:31-32,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아내는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며 남편은 자기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자녀는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해야 하며 아버지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한다. 종들은 두려운 마음을 가지고 주인들에게 순종해야 하고, 주인들은 종들에게 위협하지 말아야 한다(엡 5:22, 25; 6:1-4, 5-9).
욥은 선하게 살았다. 그는 가난한 자와 과부와 고아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 나누기를 아까워하지 않았다. 그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고기도 배부르게 먹게 하였고, 우거할 곳이 없는 나그네에게 방도 제공하였다(욥 31:16-20, 31-32).
주께서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 우리가 잘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잘 못하면 하나님께 욕이 돌아간다(롬 2:23-24). 사람은 다 죄성이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인간 관계에 있어서 바르고 선해야 하고 금전 관계에 있어서도 깨끗하고 선해야 한다.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주목하며 틈을 노린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깨어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야 한다. 소금은 짠맛을 낸다. 그것은 음식을 맛있게 하는 필수 요소다. 그것 없이는 모든 음식이 맛을 낼 수 없다. 인생의 참 맛, 삶의 참된 의미와 가치와 목적은 경건과 도덕성에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람의 참 의미와 가치와 목적을 알게 되었다. 또 그의 뜻대로 선한 삶, 사랑하는 삶을 가정에서부터 또 모든 인간관계에서 실천할 때 거기에 인간의 아름다움과 참 맛이 난다. 또 소금은 부패를 방지한다. 우리는 불의하고 악하고 거짓된 세상에서 의와 선과 진실을 지키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성도들이 그 사회의 도덕성의 수호자가 되지 못한다면 세상은 소망이 없다. 그러나 성도들이 깨어 있다면 세상은 급속히 부패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경건과 도덕성을 지켜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성경에서 빛은 지식과 의와 진실, 기쁨과 행복을 상징한다. 이 비유에서 주께서는 특히 우리의 선한 삶을 강조하셨다. 우리는 어두운 세상에서 선한 삶의 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가정에서, 동네에서, 직장에서 이런 삶을 실천해야 한다. 우리는 이기적이게 살지 말고 남을 배려하며 살아야 한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고전 13:5). 사랑은 남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선한 삶을 삶으로써 그들이 우리 때문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야 한다.
17-20절, 구약성경을 이루려 오심
[17절]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율법이나 선지자’는 구약성경을 가리킨다. 모세가 쓴 처음 다섯 권의 책들은 모세의 율법이라고 불리며 그것이 구약성경의 핵심이다. 예수님 당시에 어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구약시대의 율법을 폐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라고 말씀하셨다.
‘완전케 한다’는 원어(플레로오)는 ‘이룬다, 성취한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세의 율법이나 구약성경을 폐지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고 성취하기 위해 오셨다. 율법이나 구약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의 관계, 즉 율법과 복음의 관계는 폐지가 아니고 성취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훈과 십자가 속죄 사역은 모세의 율법의 폐지가 아니고 성취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도덕법을 성취하셨다. 즉 도덕법이 요구하는 의(義)를 이루셨다. 예레미야는 장차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가 일어날 것이며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고 불리리라고 예언했고(렘 23:5-6) 다니엘은 메시아의 때에 죄악이 영원히 속량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날 것을 예언하였다(단 9:24). 과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도덕법의 의를 이루셨다. 로마서 10:4는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의식법도 성취하셨다. 그는 구약의 상징적 의식들, 제사 제도, 성막 제도, 절기 등의 실체로 오셨다. 구약의 의식법들은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상징하였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친히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속죄사역을 이루셨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고 말했다(골 2:16-17).
또 히브리서는 “이 장막[성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느니라”고 말했고(히 9:9-12), 또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고 말했다(히 10:1).
초대교회의 이단자 말시온은 구약의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공의의 하나님이시며 신약의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서 서로 다른 하나님이시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을 폐지하기 위하여 오셨고, 율법과 복음은 서로 모순되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큰 오해이었다.
역사상, 율법주의 이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거절하고 구약의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이루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편, 반(反)율법주의라는 잘못된 사상도 있었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음으로 율법이 폐지되었다고 주장하는 사상이었다. 이 두 사상은 다 율법과 복음의 관계를 오해한 것들이다.
[18절]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본문의 ‘율법’이라는 말은 구약성경 중의 모세 5경뿐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켰다고 보인다. 주께서는 이 말씀에서 구약성경의 신적, 절대적 권위를 증거하셨다.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라는 표현은 성경의 지극히 작은 부분까지도 신적 권위를 가짐을 증거한다. 이 말씀은 성경의 축자(逐字) 영감[단어 영감]을 증거한다. 아니, 단지 축자 영감 정도가 아니고, 축점(逐點) 영감, 축획(逐劃) 영감을 보이는 것이다. 도덕법이나 성경은 결코 폐지되지 않고 남김없이 성취되어야 할 성격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다 이루셨다.
[19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마태복음에서 ‘천국’은 두 가지 뜻을 가진다. 첫째로, 천국은 신약교회를 가리킨다(마 11:11-12; 13:24, 31, 33, 44, 45, 47). 천국은 이미 신약교회로 시작되었다. 천국은 좋은 씨처럼, 겨자씨처럼, 누룩처럼 이미 뿌려졌고 심어졌다. 둘째로, 천국은 장차 영광스럽게 임할 것이다. 그 영광의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신앙생활의 정도는 각기 다르다. 어떤 이는 성경을 다 믿고 힘써 지키는가 하면, 다른 이는 그렇지 못하다. 그러한 차이가 내세 천국에서의 인격의 차등을 만드는지에 대해서는 분명치 않으나, 성경은 상급의 차등은 분명히 가르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말미암은 구원의 완전성, 즉 영화에 이르게 하실 것을 믿는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성화된 정도의 차등이 있다.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키는 자는 교회 안에서 확실히 큰 자이며 다 지키지 못하는 자는 확실히 작은 자이다. 그러므로 도덕법의 온전한 순종, 작은 부분까지의 순종은 모든 신자에게 요청된다.
[20절] [이는]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함이니라].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의는 상당한 수준의 의처럼 보였다. 그것은 외적으로 별로 흠 잡을 데 없어 보이는 의이었다. 그들은 안식일을 지켰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치는 것 등 율법을 준수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과 거리가 멀고 온갖 탐심과 거짓으로 차 있다고 지적하셨다(마 15:8; 23:25, 28).
주께서는 천국에 들어갈 자들이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를 가져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더 나은 의’가 무엇인가? 주께서는 두 가지의 내용을 염두에 두셨다고 본다. 첫째는, 주께서 장차 십자가 죽음의 대속 사역으로 이루실 완전한 의를 가리켰다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의가 되셨다. 로마서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로마서 3:21-24,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주 예수를 믿음으로 얻은 그 의만 천국에 들어갈 자격이 된다.
둘째는, 성심의 율법 준행을 가리키셨다고 본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가르쳤다(신 6:5). 주 예수께서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는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셨다(마 15:8). 우리가 성심으로 율법을 준행할 때 우리의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보다 나을 것이다. 성도는 율법을 행하되 단지 외적으로가 아니고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성심으로 해야 한다. 그것은 외적 행위보다 더 나은 행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신약성경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밝히 증거된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에 비추어 보면, 이 성심의 율법 준행은 천국에 들어갈 조건이 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이것이 조건이 된다면, 우리는 행함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것은 복음의 부정이 되며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경고한 대로 저주 받을 이단이 된다. 성심의 율법 준행은 참된 믿음의 증거로서 필요할 뿐이다. 우리의 의는 이것뿐 예수님의 피밖에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의 복음을 참으로 깨달은 자는 율법을 성심으로 행할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구약의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즉 구약과 신약을 충돌시키지 말아야 한다. 그 둘은 조화를 이룬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모세의 율법, 즉 구약성경의 성취이다. 그것은 도덕법의 성취 즉 도덕적 의의 성취이시며 의식법의 성취 즉 상징과 예표의 실체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충돌시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구약성경에 근거해 신약성경을 이해하고, 신약성경에 비추어 구약성경을 이해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완전한 의를 믿고 의지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천국에 들어갈 충족한 자격이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의 십자가 대속 사역으로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나은 의이다. 우리의 의는 이것뿐 예수님의 피밖에 없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은 의를 확신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도덕법의 지극히 작은 것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지만, 여전히 모든 계명과 성경 교훈을 성심으로 준행해야 한다. 그것이 온전함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의 성화의 목표는 도덕적 완전이다. 우리는 성경을 힘써 읽고 다 믿고 그 교훈을 온전히 행해야 한다.
21-26절, 살인에 대하여
[21절]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십계명에서 “살인하지 말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살인은 죄악이다. 침략 전쟁이나 대량 학살은 큰 죄악이다. 출산하기 전의 태아를 죽이는 낙태도 살인이며, 자기 목숨을 끊는 자살도 일종의 살인이다. 불법적 폭력 시위나 자살 폭탄 테러나 음주 운전도 일종의 살인 행위이다.
[22절]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말씀은 그의 율법 해석의 권위를 나타낸다. 주께서는 두 가지를 말씀하셨다. 하나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지 말라는 것이고 둘째는 형제에게 욕하지 말라는 것이다.
주께서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노하는 자마다’라는 구절은 전통본문에 ‘까닭 없이 노하는 자마다’라고 되어 있다.6) 화는 정당한 경우에 낼 수 있겠지만, 까닭 없이 내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까닭 없이 성질 내는 것은 형제를 미워하는 표이며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과 같다. 고린도전서 13:5는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까닭 없이 노하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또 형제에게 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라가’(rJakav)라는 아람어는 ‘바보, 빈 머리’라는 뜻으로 남을 경멸하는 욕이다. 우리는 형제에게 ‘바보, 빈 머리, 미련한 놈’ 등의 욕을 해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후욕하는[욕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고 말했다(고전 6:10). 욕하는 것은 남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것이며, 그것은 사랑이 없는 것이며 남을 미워하는 행위이다. 남을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과 같다.
주께서는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는 자나 형제에게 바보나 미련한 놈이라고 욕하는 자는 심판을 받게 되고 공회 즉 법정에 잡혀가게 되고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거나 욕하는 것은 다 형제를 미워하는 살인죄요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지옥 불에 들어갈 죄이다.
[23-24절]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주께서는 하나님께 경배하고 예물을 드리는 것보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을 먼저 해결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 후에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라고 교훈하셨다. 사랑을 실천하고 화목하는 것이 예배보다 더 중요하다고 교훈하신 것이다. 예배 행위보다 우리의 실생활이 더 중요하다.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말했다(삼상 15:22).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죄 가운데 있다면 우리는 아직 구원받지 못한 자일 것이다. 구원받은 자의 표는 의를 행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요한일서 3:9-10,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계속]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났음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아니하니라.” 그러므로 로마서 12:18은,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말했다. 선한 삶은 다른 사람들과 화목하는 인간 관계에서 나타난다.
[25-26절] 너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화(私和)하라. 그 송사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주고 재판관이 관예에게 내어주어 옥에 가둘까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호리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단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은 엄격하고 철저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 우리를 송사하는 자와 함께 길을 가고 있는 자와 같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면 엄격하고 철저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 관계의 죄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해결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는 선한 마음을 품고 살며 남을 존중하며 서로 화목할 것이다. 선한 삶은 성도의 삶의 목표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한다(고전 13:4-5). 에베소서 4:29, 31-32,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야고보서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살인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제6계명의 내용이다. 우리는 사람의 생명을 존중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마음으로 남을 미워하지 말고 형제에게 까닭 없이 노하지 말고 욕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마음으로 그를 죽이는 일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지 말고 존중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서로 화목해야 한다.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함을 실천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다.
27-37절, 간음, 이혼, 맹세에 대하여
[27-28절]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간음’(adultery)은 결혼한 사람이 자기 배우자가 아닌 자와 성관계를 가지는 것을 가리키며, ‘음행’(fornication)은 결혼관계가 아닌 두 사람 사이에 합의적 성관계를 가리킨다. 간음치 말라는 계명은 부부관계 외의 성행위, 즉 간음, 음행, 근친상간, 강간, 매춘, 동성애, 수간(獸姦) 등을 정죄하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주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그에 대해]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그와]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여자를 보고’라는 말은 우리가 보는 것을 조심해야 함을 보인다. 사람은 보는 데서 감정적 충동이나 소유의 충동을 가진다. 아이들은 마트에서 장난감을 보면 가지고 싶어한다. 사람은 좋은 옷이나 먹음직한 음식을 보면 사고 싶어하고 먹고 싶어한다. 그러므로 그런 충동을 가지지 않으려면 안 보는 것이 상책이다.
하와는 뱀의 말을 듣고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이었으므로 그 과일을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어 그도 먹게 했다(창 3:6). 다윗은 저녁 때 침상에서 일어나 왕궁 지붕 위에서 거닐다가 한 여인이 목욕하는 것을 내려다보았고 그가 심히 아름다워 보여(삼하 11:2) 그를 왕궁으로 데려오게 해 동침하는 실수를 범했다.
물론, 안 보고도 상상할 수 있고 또 보고도 충동을 억제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보면 충동을 받기 쉬운 것이 사람이다. 그러므로 죄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안 보는 것이 낫고 보아도 잠깐 보고 두 번 보지 않거나 자세히 보지 않는 것이 낫다.
‘그에 대해 음욕을 품는다’는 것은 그를 포옹하거나 그를 취하고 그와 함께 눕는 불결한 상상을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남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여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우리는 성도덕이 해이하고 매춘 행위도 많은 음란한 시대에 살고 있다. 또 음란 풍조를 조장하는 영화, TV 드라마, 인터넷, 스마트폰의 영상물들이 홍수처럼 밀려와 많은 사람들이 영향을 받고 있다. 과연 말세이다. 우리가 여성의 미니 스커트나 짧은 반바지, 너무 파진 옷, 짝 달라붙는 옷 등을 반대하며 또 청년들의 은밀한 남녀 교제를 금지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성적 충동을 일으킬 수 있고 음란죄에 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경건하고 지혜로운 성도는 그런 일을 피해야 한다.
주께서는 여자를 보고 그에 대해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그와 간음했다고 말씀하셨다. 마음에 미움을 품고 까닭 없이 노하고 또 형제를 욕하는 것이 살인에 해당하는 큰 죄악이듯이,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은 간음에 해당하는 큰 죄악이다. 사람을 죽여야만 살인이 아니고, 간음해야만 간음이 아니다. 마음에 미움을 품는 것도 살인이요,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이다. 그것들은 다 큰 죄악이다.
[29-30절]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지옥은 실재하며 범죄하는 자는 지옥에 던지울 수밖에 없고 그러므로 불구자로 성결하게 살 수 있다면 온전한 몸으로 범죄하며 사는 것보다 낫다. 두 눈으로 범죄한다면 한 눈으로만 보는 자나 장님이 더 낫고, 두 손으로 범죄한다면 한 손이 없거나 못 쓰는 자가 더 낫다. 건강한 몸보다 불구나 장애가 더 유익할 수 있다. 사람에게 두 눈이 건강한가, 두 손이 튼튼한가 하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그 눈과 그 손으로 바르게 사는가 아니면 범죄하는가 하는 것이다.
또 이 말씀은 범죄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큰복인지를 보인다. 건강한 몸보다 더 복된 것은 깨끗한 인격이다. 건강한 몸이 있어도 범죄하는 자는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장애가 있어도 범죄하지 않는 자는 지옥에 던지우지 않고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를 회개하며 범죄치 않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의 몸은 죄 짓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행하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롬 6:13). 우리의 눈은 성경을 읽는 눈이 되고, 우리의 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귀가 되며, 우리의 손은 선한 봉사를 하는 손이 되고, 우리의 입은 주를 찬송하고 기도하고 전도하는 입이 되고, 우리의 발은 전도와 봉사의 선한 일을 하는 발이 되어야 한다.
[31-32절] 또 일렀으되 누구든지 아내를 버리거든 이혼 증서를 줄 것이라 하였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주께서는 또 이혼에 관해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저로 간음하게 함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음행한 연고 없이”라는 말씀은 음행이 이혼의 정당한 이유가 됨을 보인다. 음행의 이유 외에도, 신앙적 이유로 상대가 분리하기를 원하는 경우(고전 7:15)나 고의적으로 배우자를 버린 경우도 불가피한 이혼의 경우라고 보이며, 또 구타나 학대 등 심히 비인간적인 고통을 당하는 경우나 전쟁으로 인해 오랫동안 분리된 경우도 부득이한 경우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나 이혼은 극히 삼가야 할 일이다. 하나님께서는 말라기 2:16에서 “나는 이혼하는 것을 미워하노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는 또 “누구든지 버린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부당한 이혼이 옳지 않듯이, 부당한 재혼, 예컨대 부당한 이혼자와의 결혼도 옳지 않다. 하나님께서는 부당한 이혼이나 부당한 재혼을 다 인정치 않으신다. 그러므로 교회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교회가 하나님보다 더 너그러워서는 안 될 것이다.
[33-36절] 또 옛 사람에게 말한 바 헛맹세를 하지 말고 네 맹세한 것을 주께 지키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며 무엇을 엄숙히 증거하는 것을 말한다. 참된 맹세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경외하는 표이며 그런 자만 할 수 있다. 신명기 6:12-13은,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섬기며 그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고 말하였고, 또 신명기 10:20도,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를 섬기며 그에게 친근히 하고 그 이름으로 맹세하라”고 말하였다.
예수께서 ‘도무지 맹세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늘로나 땅으로나 예루살렘으로나 네 머리로 맹세하지 말라는 뜻이요, 모든 맹세를 다 부정하신 것은 아니라고 본다. 마태복음 26:63-64에 보면, 그는 대제사장이 “내가 너로 살아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고 할 때, “네가 말하였느니라”고 대답하심으로 맹세하셨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1:23에 보면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라”고 말함으로써 맹세하였다. 이와 같이, 진실한 맹세는 오늘날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2:2는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하나님의 이름만이 사람이 그것으로 맹세해야 할 이름이며, 거기서 그것은 모든 거룩한 두려움과 존경심을 가지고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영광스럽고 두려운 이름으로 헛되이 혹은 경솔히 맹세하는 것이나, 어떤 다른 것으로 맹세하는 것은 죄악되며 매우 미워해야 한다. 하지만, 중대한 일들에서 맹세는 구약 아래서 뿐만 아니라 또한 신약 아래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보증되므로, 그러한 일들에서 합법적 권위에 의해 부과되는 합법적 맹세는 행해져야 한다.”
[37절]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
우리는 맹세할 때 예와 아니오를 명확히 말해야 한다. 우리는 결코 자기가 잘 알지 못하는 일을 하나님 앞에서 또 그의 이름으로 주장하거나 증거해서는 안 되고 또 자기가 할 수 없는 일 즉 자신의 능력 밖에 있는 일을 하나님 앞에서 또 그의 이름으로 성급하게 약속해서도 안 된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을 주장하고 증거하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약속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생각되는 것을 옳다고 말하고,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을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상대에 대해 음란한 마음을 품음으로써 마음으로 간음을 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으로 미워함이나 까닭 없이 노함이나 형제를 욕함이 마음의 살인이듯이,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은 마음의 간음이다. 우리는 마음의 간음을 조심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몸의 지체들을 죄의 도구가 되게 하지 말고 의의 도구가 되게 해야 한다. 두 눈과 두 손을 가지고 범죄하여 지옥 가는 것보다 한 눈과 한 손을 가지고 범죄치 않고 천국 가는 것이 훨씬 더 낫다. 하나님의 공의는 매우 두렵고 엄격하고 철저하시다. 죄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 계명을 어기는 살인자와 간음하는 자는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 범죄하는 모든 죄인은, 만일 그들이 회개하지 않는다면, 다 지옥 형벌을 받을 것이다. 우리는 범죄치 말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부당한 이혼을 하지 말아야 한다. 상대가 음행했거나 신앙 문제로 분리하기를 원하거나 고의적으로 자신을 버렸거나 심한 구타나 학대를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결코 이혼해서는 안 된다.
넷째로, 우리는 오늘날도 하나님의 이름으로 무엇을 엄숙히 증거하며 약속하는 맹세를 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잘 알지 못하는 일이나 우리의 능력 밖에 있는 일에 대해서는 맹세해서는 안 된다.
38-48절, 악한 자를 대적치 말고 원수를 사랑하라
[38-42절]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5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10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우리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더 나은 의를 가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5:20).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완전한 의이시다(롬 10:4). 그 의를 받은 자는 또한 완전한 의의 삶을 살아야 한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라는 율법은 철저한 공의의 보응을 가르친 말씀이다. 이 공의는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에서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고 우리의 오른편 빰을 치는 자에게 왼편도 돌려대며 우리를 고소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우리를 억지로 5리를 가게 하는 자에게 10리를 동행하고 우리에게 구하는 자에게 주고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주께서 공의의 법을 부정하실 수 없으므로, 이 말씀의 뜻은 좀더 깊은 데 있다고 본다.
엄격한 공의의 법에 의하면, 우리는 영원한 지옥 형벌을 받아야 하는 악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고 예수께서는 죄인들을 위하여 죽으셨고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의로 벌하지 않고 선대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공의로 보복하지 말고 선대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나라에 경찰력이나 사형법이나 군대나 합법적 전쟁을 부정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로마서 13:4는, 국가 위정자들이 하나님의 사자들로서 악을 행하는 자들을 보응하기 위하여 ‘칼’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이나 사형, 군대나 전쟁은 사회의 질서와 국가의 안녕을 위해 불가피하다고 본다. 그런 것들이 없다면 사회와 국가와 세상은 더욱 혼란스러워질 것이다.
[43-44절]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전통본문)7)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누가복음 6:27-28도 비슷하다. “너희 듣는 자에게 내가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것은 “원수를 갚지 말라”는 레위기 19:18을 좀더 설명하며 강조하신 것이다. 사람이 원수를 갚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법에서 보면 잘못된 일은 아니지만, 우리가 원수 같은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과 은혜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도 원수를 불쌍히 여기고 그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도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원수를 우리 스스로 갚으려 하지 말고 도리어 그를 사랑하고 그를 축복하고 그에게 선을 베풀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45-47절]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라”는 말씀은 원수 사랑의 행위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행위구원론을 가르치신 것이 아니고, 원수 사랑의 행위가 하나님의 자녀답고 하나님의 자녀의 표가 된다는 것을 강조하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이해해야 하는 까닭은 예수님의 산상보훈의 가르치심이 사도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밝히 증거한 복음 진리와 충돌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직접적 계시로 된 것이며(갈 1:11-12) 또 열두 사도들의 복음 이해와 일치했기 때문이다(행 15:11, 25-26; 갈 2:9).
원수를 사랑하는 행위가 하나님의 자녀다운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롬 5:10). 그것은 원수 사랑의 행위이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면 그의 사랑을 본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고 친한 사람과만 인사하고 대화한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없다. 우리가 교회에 나온 모든 이들에게 친절하지 않다면, 우리는 세상 사람들보다 나은 것이 없다. 도둑들도 자기들끼리는 서로 친하며 서로 위하기도 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들보다 나아야 한다.
[48절]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이 말씀은 하나님처럼 완전자가 되라는 뜻은 아니다.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는 무한하시고 영원하시고 완전하신 자이시고, 피조물인 우리는 유한하고 시작이 있고 불완전한 존재이다. 창조주와 피조물 간에는 혼동될 수 없고 없앨 수 없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피조물인 사람은 아무리 영적으로 성장해도 신이 될 수 없다.
본문의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은 도덕적 완전을 의미한다. 그것은 친한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친하지 않은 사람들, 심지어 원수들에게까지도 선을 베푸는 긍휼과 자비와 사랑의 성품을 가리키는 것이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므로(창 1:26, 27) 하나님의 도덕적 속성을 본받아야 한다. 우리는 특히 하나님께서 해와 비를 의인과 악인에게 똑같이 주시는 것과 같이 모든 사람들에 대해 선하고 친절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로, 우리는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는 자들을 보복하려 하지 않으셨다. 공의의 보복 자체는 악이 아니지만,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악한 자에게도 선을 베푼다는 것뿐이다. 우리가 이렇게 긍휼과 선을 베풀 때 악인도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도 선을 베풀어야 한다. 그가 요구하는 것 이상으로 선하게 대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원수들을 사랑하고 우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고 우리를 욕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도 자기를 못 박은 자들을 위하여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다(눅 23:34). 스데반 집사도 자기를 돌로 치는 무리들을 위해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라고 기도하며 숨을 거두었다. 우리도 주의 은혜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원수까지 사랑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악인들에 대해서는 두고라도 우선 교우들 중에 낯선 자들에게 친절히 인사하고 따뜻하게 대하고 좁은 마음을 버리고 모든 사람에게 너그럽고 친절하게 대해야 한다. 교회에 오래 다닌 사람들은 그 교회에 처음 나온 자들에게 온화한 태도로 대함으로 그들이 편안함을 느끼게 해야 한다. 우리는 아는 사람이나 친한 사람끼리만 인사하지 말고 교회에 처음 나왔거나 교회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에게도 인사하며 친절히 대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원수에게까지도 친절해야 한다. 이것이 주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온전함같이 온전하라고 말씀하신 뜻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해 선하고 너그럽고 친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다운 태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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