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산.... 오래된 길
E C C E H O M O
언 제 : 2016. 11. 15 (화) 07:10~16:42
동 행 : 홀로
코 스 : 추곡령~죽엽산~운수고개~696봉~817봉~문바위~사명산~선정사
김장하느라 펼쳐놓은 자리, 채를 친 무우며 썰어놓은 파, 곁에 둔 고춧가루에서 싸~한 냄새가 난다. 예전엔 맵싸해서 코끝을 찌르던 것이 이젠 많이 둔해진 모양이다. 그저 은근한 것이 오래된 느낌으로만 다가온다. 잊혔던 냄새 하나에도 끌려드는 마음이라...... 마침 좋은 계절, 늦은 가을 산이 마음을 끈다.
황반변성이라는 안과질환이 있다. 3 년째 앓고 있지만 그럭저럭 버티는 중이었는데 몇 달 전 그게 변고를 일으킨다. 등산 중 갑자기 눈에 커튼을 친 것 처럼 시야가 막힌다. 혈관이 터져 황반이 많이 부어올랐단다. 붓기 빠지고 안정될 때까지 혈압 높일 일은 삼가란다. 넉 달째 술은 물론 큰 산은 엄두를 내지 못하고 지내왔다.
그동안 가까운 산에만 다녔으나 오늘은 조금 범위를 넓힌다. 계절 더 가기 전에 좀 걸어보고 싶기 때문이다. 가을에 마음 가는 산이 몇 있지만 멀리 가는 건 무리다. 가까운 양구 사명산엘 다녀오기로 한다. 내게는 익숙한, 마음 속에 오래 묵은 산이다. 평소보다 거리를 줄였다.
▲ 68 년만에 떴다는 수퍼문(super moon) - ' 달의 노래 ' ' 잠들지 않은 영혼 ' 이란 가사가 떠오른다
▲ 산행 들머리 - 추곡터널 모습.
▲ 산행 시작 직후 맞은 일출
▲ 추곡령 옛 도로에 내린 아침 햇살
▲ 멀리 오늘 가야할 사명산이 보인다
▲ 이곳이 옛 추곡령 정상
7 월 마지막 주, 비가 내리던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들머리에서 한 시간 반 가량 열심히 걸어 첫 봉우리에 올랐을 때 갑자기 왼쪽 눈에 커튼이 처졌었다. 그 트라우마가 남아있는 걸 보니 마음이 대범치 못한 모양이다. 눈 주변에 큰 힘 들어가지 않도록 최대한 조심하며 걷는다.
▲ 가을이 깊어진 곳 - 사람 다닌 흔적이 없다
▲ 이곳을 지나면 힘들기로 유명한 죽엽산 오르막이다
▲ 죽엽산 방향 - 정상은 뒤로 숨어 보이지 않는다
▲ 죽엽산 오르는 도중 전망대에 앉아 한 숨 돌린다 - 방금 올라온 능선과 멀리 중앙부의 부용산과 오봉산
▲ 화천군 간동면 오음리 일대
▲ 죽엽산 정상 - 사방이 막혀 답답하다
▲ 누군가 간이 정상석을 만들어 놓았다
▲ 계절도 모른채 피어난 굳센 진달래
천천히 걸어도 죽엽산 오름길은 만만치 않다. 네 달 가까이 쉰 탓도 더해져 애를 많이 먹는다. 정상 지나 당분간은 내리막이지만 운수고개 지나면 또 696봉, 817봉을 넘어야 한다. 좋은 가을날, 몸 상태도 체크해 볼 겸 여유있는 산행을 기대했던 건데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아직 눈에 이상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다. 마음이라도 여유를 가지려 애를 써 본다.
▲ 등로 왼편으로 멀리 사명산이 보인다
▲ 한참 고도를 낮추니 제법 걷기 좋은 등로가 펼쳐진다
▲ 저 봉우리들 앞이 옛 운수현이다
▲ 등로를 Cross 하는 운수현
▲ 696봉이 보인다 - 그 앞이 운수현 대신 차로를 뚫어놓은 운수고개
▲ 여기가 운수고개
696봉 급경사와 그 뒤로 이어지는 지루한 오름길을 지나야 사명산 주능선에 있는 817봉에 닿는다. 817봉만 지나면 사명산까지 육중하고 순한 등로가 이어진다. 우선은 817봉까지, 힘들겠지만 최대한 여유를 가지고 걷기로 한다. 그래도 여기까지 오는 동안 상체에 힘 덜 들이고 걷는 기술(?)을 조금은 익혔다.
▲ 696봉 오름길이 급하지만 중간에 이런 곳이 한 군데 있어 잠시 숨을 돌릴 수 있다
▲ 헬기장이 조성되어 있는 696봉 정상
▲ 예전에 몇 번 다녀갔지만 힘들어서 그냥 지나쳤던 삼각점
▲ 817봉 가는 능선 우측 사면엔 단풍든 잎갈나무가 보기 좋고
▲ 왼쪽으로는 사명산 주능선이 펼쳐져 있다
▲ 1년 사이 송전탑이 세워진 817봉 - 옛 춘성군 시절 양구, 화천, 춘성군의 경계를 이루는 봉우리였다
▲ 흥덕사라..... 여기서 좀 떨어진 곳에 있는 절이다
817봉 조금 지난 곳에 문바위가 있다. 점심도 먹을 겸 잠시 쉬어가기로 한다. 2016년, 여러가지 일로 내게 무거운 한 해였는데 오래 함께했던 지인 한 분이 에베레스트에서 유명을 달리한 일도 그 중 하나다. 작년 여름 사명산~운수고개 산행 중 문바위에서 함께 점심 먹던 기억이 난다. 문바위 가는 길에 고인의 명복을 빌어드린다.
▲ 문바위 가기 전 뚝 떨어진 안부 능선 - 늦은 가을날 홀로 걷기에 안성마춤이다
▲ 바람과 구름의 문, 업과 인연의 문, 극락과 지옥의 문이라는 설명이 붙어있는 문바위
▲ 작년까지 걸려있던 출렁다리가 철거되었다
▲ 많은 사연이 얽혀있는 동쪽 문바위 칠층석탑 -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간다
▲ 서쪽 문바위의 소나무 왼편으로 오늘 걸어온 능선이 한 눈에 들어온다 - 중앙이 죽엽산
▲ 지나온 등로를 조금 당겨서 찍어 본다 - 817봉 송전탑도 보인다
이제 사명산까지는 순한 길이다. 조금은 여유를 부려도 괜찮다. 가볍게 걸으며 황반변성 같은 것들 무게나 덜어보자. 기(夔)라는 외발짐승이 노래기를 보고 " 발이 그리 많으니 얼마나 편할까? " 하자 노래기가 " (사람들이 내게) 침 뱉는 걸 보지 못했느냐? " 되물었다 한다. 그러고 보니 소싯적 노래기 볼 때마다 침 뱉던 기억이 난다.
▲ 이 외딴 곳에 무덤이 다 있다
▲ 흥덕사 갈림길
이제 2.5 Km 남았다. 노래기가 夔에게 " 그저 주어진 대로 걷는 거여서 그리 편한 줄은 모른다. " 말하고는 이번에는 뱀에게 묻는다. " 발 있는 내가 발 없는 당신보다 못하니 어쩐 일일까? " 뱀 역시 같은 말을 한다. " 주어진 대로 가는 거 " 라더니 이번에는 바람에게 묻는다. " 나는 척추며 갈비에 의지하지만 당신은 의지하는 것 없이도 잘 다니니 무슨 조화인가? "
▲ 저 멀리 헬리포트 설치된 1,180 봉이 보인다
▲ 1,180 봉 헬리포트 - 우측으로 선정사 내려가는 길이 나있다
▲ 1,180 봉에서 바라본 사명산 - 두 번째 봉우리
사명산 1.3 Km 지점까지 왔다. 바람이 뱀에게 답하는데 좀 애매하다. " 손가락이나 발길질 같이 작은 것이 나를 이기지만 나는 큰 나무를 꺾는다. " 장자(莊子) 추수(秋水)편의 열 번째 이야기인데 아마 원문 일부가 사라진 모양이다. 그 처음은 ' 기(夔)는 노래기를 부러워하고 (....) 바람은 눈(目)을 부러워하고, 눈은 마음(心)을 부러워한다 ' 로 시작된다.
▲ 사명산이 가까워진다
▲ 주봉(主峰) 체면 때문인가 - 마지막은 경사가 급하다
▲ 사명산(1,198) 정상
▲ 화천댐 파로호
▲ 춘천방향 - 가운데가 죽엽산
▲ 양구 봉화산과 소양호
" 바람은 움직이지 않고도 이리저리 갈 수 있는 눈(目)을 부러워하고, 눈(目)은 보지 않고도 아는 마음(心)을 부러워한다 " 는 뜻일 테니 바람이 눈에게 또 눈이 마음에게 묻고 답하는 말이 빠져버린 것일 터이다. 어쨋거나 눈 고장나고 마음 아직 어리석은 나를 두고 한 이야기 같기도 하다.
▲ E C C E H O M O - 흔들리는 허공, 그 빛과 어두움 안에서 그런대로 아직은 잘 견뎌내고 있는
▲ 내려가는 길 - 월명리 갈림길
▲ 선정사 갈림길
오랫만에 나선 사명산길을 그런대로 잘 걸었다. 조금은 모험이었지만 눈도 더 붓지 않고 발가락이 까졌을 뿐 큰 무리는 없었다. 날씨 맑은 덕에 늦가을 풍경도 즐길 수 있었다. 천천히 걷고 힘 덜 들이는 선에서 가끔은 이렇게 나서 봐야지 하는 마음도 생겼다. 산행중에 막걸리 한 잔 못 한 게 아쉬웠지만 그건 노래기가 한 말처럼 자연이 내게 지워준 거라 생각하련다. 이제까지 그리 편한 줄 모르고 산 것처럼, 앞으로도 그리 불편한 줄 모르고 지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