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평문씨 시조는 고려 개국공신이시고 중시조때는 세도와 재력을 겸비한 문벌로 자리매김을 하였고 많은 선조들이 국정에 참여 하셨습니다. 조선의 초기는 불사이군을 지켜 출사하지 않거나 은거하신 분이 많았기에 문과 급제하신 분은 52명으로 문씨의 전성기인 고려에 비교할 수는 없으며 의병활동과, 독립투쟁에는 많은 선조께서 참여하셨습니다. 우리의 행동 하나 하나는 가문과 관계가 있습니다. 명예를 무겁게 여기고 재물은 가볍게 여깁시다.
①시조~6세 ②역사의인물(족보에 없고 역사기록에 있는분) ③7세~33세 ④13세~하대 ⑤하대 ⑥의병활동 ⑦항일투쟁 ⑧대한민국 으로 구분하여 설명하였습니다. 자료는 계속 보충할 것입니다 ※효자정려가 있는 선조는 사적-효자비를 참고하십시오.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ikjum.com%2Fimg%2Ftool%2Fline2.gif)
남평문씨 시조 무성공(武成公) 諱 다성(多省) |
|
字는 명원(明遠) 號 : 삼광(三光) 금자광록대부 삼중대광보국 상주국 동 평장사 고려개국 벽상공신 남평백으로 봉군 되시고 식읍 3천호를 받으시고 98세에 별세하심 탄강지인 전남 나주시 남평면 풍림리의 문바위 옆에 1993년 설단하여 매년 3월20일 전국 일가들이 단제를 모시고 있으며 장연서원에 배향함 |
문씨는 [조선씨족통보]와 [증보문헌비고]등의 문헌에 남평, 단성, 영산, 보령, 감천, 정선, 결성, 개령, 강릉 등을 156본으로 기록되어 있고 2000년 인구조사에서 40여개의 본이 조사되었습니다 정선을 제외한 본관은 모두가 남평에서 분적되어 시조가 같은 단일본입니다. 그러나 정선문씨(2000년 인구조사시 1000명 미만)는 남평문씨와는 관련이 없습니다.
[조선씨족통보]에 기록된 남평문씨 시조 출생에 대한 전설은 472년(신라 자비왕 15년) 남평현 동쪽에 장자지란 못이 있고 그 못가에 천길 높이의 바위가 솟아 있었다. 하루는 군주가 그 바위 아래서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에 오색구름이 감돌면서 갓난아이의 울음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신기하게 여긴 군주가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바위 위에 올라가 보니 석함이 놓여 있었고, 그 속에는 피부가 옥설같이 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아이가 들어 있어 기이하게 생각하며 군주가 거두어 길렀다. 나이 5세에 문사에 스스로 통달하고 무략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총명하여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지라 성을 문으로 하고 이름을 다성이라 칭했다고 한다. 그후 삼중대광 벽상공신으로 남평백에 봉해지고 98세까지 살았다고 하여 후손들이 남평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
대종회에서는 472년(신라자비왕 15년) 탄생은 역시 기록과 맞지 않아 신라말기로 정정하였다 |
무성공 전(武成公 傳) |
현존 남평문씨 대동보 최고본(最古本)인 신해보(1732 영조3년) 서두의 내용 |
널리 전해오는 옛말에 호남(湖南)의 남녘에는 남평군(南平郡)이 있고, 남평군의 동녘에는 큰 못이 있으며, 못가에 천길이나 되는 높은 바위가 있었다. 군주(郡主)가 하루는 못기슭 그 바위 밑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바위 위에 오색구름이 감돌더니 문득 어린 아기 울음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군주가 이상하게 여겨 바로 사다리를 만들게 하고 시종자로 하여금 올라가 보게 하니, 석함(石函)이 있는지라 끈으로 매어 당겨 내렸다. 함을 열어보자 그 속에는 어린 아기가 있는데 피부가 백설(白雪) 같고 용모가 기이(奇異)하므로 군주는 데려다 양육하였다. 나이 겨우 5세에 글과 사상이 자연 통달하고, 무예와 지략이 뛰어난 재주가 있는 등 사물의 이치(理治)에 막힘이 없었다
그러므로, 문자(文字)로서 성(姓)을 삼고 다성(多省)이라 이름하고 명원(明遠)으로 자(字)를 삼으니 그 시대 사람들이 칭송하여 말하기를, 문군(文君)은 밝기가 해와 달 같고 맑기가 별 같다 하여 호(號)를 삼광(三光)이라 하였다 나이 14세에 대사도(大司徒)가 되었고, 18세에 대사마대장군(大司購大將軍)에 이르렀으며 삼중대광보국(고려초 9품계의 향직중 첫째등급) 삼한벽상공신(三重大匿輪國三韓壁上功臣 : 후삼국 통일에 협력한 당대의 세력가들에게 내린 공신호임)으로서 남평개국백(南平開國伯)에 봉해지고, 태사태부(太師太博)가 되시었다. 수(壽)는 98을 누리시고 시호를 무성으로 받으셨다 |
김광순 교수의 <시조신화의 양상에 대한 연구>란 논문에, 시조 무성공의 오색구름은 수신(水神)의 영향으로 상서로운 기운을 이름이요, 수신(水神)이 석함을 봉정(奉呈)하고 그 안에서 동자가 나오는 경이적인 탄생은 시조신화의 신성성(神聖性)과 생명(生命)을 가진다'고 하였다 따라서 문암(文巖) 옆의 못을 장자지(長者池)라 이름하였고, 공을 모신 서원도 장연(長淵)이라 하였음은 예삿일이 아니므로 시조께서 태어난 문바위(文巖)는 성스러운 바위(聖巖)이요 장자지(長者池)는 성지(聖池)인 것이다. |
남평문공 다성 제단비명 |
1993년 季夏 문학박사(文學博士) 진성(眞城) 이가원(李家源) |
운운(많고 많은)한 만성(萬姓) 중에 시조(始祖)가 없는 씨족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씨족이 번영하고 가문이 훤혁(위엄이 밝게빛남)하면 반드시 그 뿌리를 찾게 된다. 저 호남(湖南)의 남평문씨도 이에서 예외는 아니다. 문씨는 고려초에 이미 번영하였으나 조선 영조(英祖) 신해(辛亥1732년)에 이르러 처음 수보(修譜; 족보를 만듬)하였고, 그 벽두에 그의 시조 무성공전(武成公傳)이 실려 있다. 그 내용을 읽으면 신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자못 양일(洋溢: 가득차 넘침)하였다.
남평군 동녁에 한 대택(大澤;큰못)이 있고 못가에는 천길 높은 바위가 있었다. 어느 날 군주(郡主)가 그 바위 밑에서 놀제, 별안간 바위 위에 오운(五雲)이 찬란한 가운데에 어린아기 우는 소리가 은은히 들려오는 것이었다. 군주는 이상히 여겨 사람으로 하여금 살펴보았다. 석함(石函) 한 구를 발견하고 철색(철索)으로 달아내려 열어보았다. 그 속에 아기가 들어 있었는데 피부는 옥설(玉雪) 같고 용모가 기이(奇異)하기에 거두어 길렀다. 나이 겨우 5세에 문사(文思)가 영롱(玲瓏: 빛이 맑고 산뜻함)하고 무략(武略)이 뛰어났으며, 총명영오(聰明讀悟)하여 사물의 이치에 통달하였으므로, 이내 문(文)으로 성을 삼고 다성(多省)으로 이름하고 명원(明遠)으로 자를 삼았다. 당시 사람들은 문군(文君)은 일월(日月)같이 밝고 성신(星辰)처럼 맑다하여 호를 삼광(三光)이라 하였다. 14세에 대사도(大司徒)에 오르고 18세에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이 되었고, 삼중대광보국 상주국 평장사 삼한벽상공신(三重大匿 輪國 上柱國平章事 三韓壁上功臣)으로 남평개국백(南平開國伯)과 태사태부(太師太侮)에 이르렀다. 수는 98세요, 무성(武成)이란 시호를받았다.
부인은 김씨(金氏)요 아들 탁(卓)은 문하시중 무열공(門下待中 武烈公)이요 후손이 번영하여 명공거경(名公巨卿)이 끊어지지 않았는데, 경절공 익(翼)과 경정공 공유(公裕)와 충숙공 극겸(克謙)과 효혜공 유필(惟弼)과 충선공 익점(益漸)이 더욱 교연(翹然 : 여럿중에 뛰어남)하였다.
그 뒤에 사림(士林)과 후손이 남평 사자봉밑 지석강위에 장연서원을 세워 시축(尸祝)하였고 또 장자지(長者池) 위에 문암각(文巖閣)을 세웠다. 공의 묘는 실전한 지 오래되었으므로 이제 남평문씨 대종회 시조 무성공 설단건립 추진위원회에서 문암각 좌편 간좌원(員坐原)에 제단을 모아 공의 향화(香火)를 받들기에 이르렀다 또 이 궁비(穹碑: 묘앞의 비석)에 사실을 새겨 천추(千秋)에 전하려 한다.
명 (銘)하되, 하늘로부터 큰 인재가 내려오시니 보통 사람은 판단할 수 없네. 오색구름이 뭉게뭉게 일어나고 사자 봉우리 우뚝 솟아 있는데 하늘로부터 떨어진 것 돌레 하나였네. 돌레 속에 무엇이 있었는가? 어린아기 우는 바로 그 소리였네, 아기가 자라고 또 영특함에 나라 위한 큰 일꾼이었네 벼슬은 공후(公候)의 지위에 오르고 시호는 무성공이요 자손은 번창하였네 선비들이 높이 추앙하니 고요함이 있고 도량이 깊었네 제사를 고이 드리오니 신령한 제단이 다시 우뚝하여라 옛적 법규에 의지하오니 일천년의 뒤 에는 영웅의 풍모가 생각될진저 |
비명은 산문부분과 운문부분인 명으로 구분하여 작성하는데 명의 한자는 생략하고 번역내용만 적었으나 원본을 알고 싶으면 남평문씨 세덕록(대종회 발행) 참고하십시오. |
시조 탄강 연대 고찰 |
보명 |
년도 |
탄강 년대 기록 비교 |
신해보 |
1731 |
발문에 시조께서 고려말~신라초에 남평에서 탄간하셨으니 남평을 본으로 삼았으며 고려초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심을 말하였다 |
병진보 |
1736 |
신해보와 같음(고려말 ~ 신라초) |
무진신보 |
1808 |
시조 무성공의 탄강을 신라 자비왕 15년으로 처음 기록함 |
갑자보 |
1824 |
무진신보의 자비왕 탄강설의 잘못 바로 잡음(고려말~ 신라초) |
정해보 |
1827 |
창간 신해보와 내용 같음 (신라말~고려초) |
병자보 |
1846 |
창간 신해보와 내용 같음 (신라말~고려초) |
경오보 |
1851 |
무진신보와 같이 신라 자비왕 15년으로 기록함 다음 족보인 임술보까지 113년간 유지되어 여러 문헌에 잘못 소개되게 하였다. |
임술보 |
1983 |
창간 신해보와 내용 같이(신라말~고려초) 탄강년대를 로 바로잡음 자비왕 15년을 탄강년대로 할 수 없는 근거로서는 1. 474년은 남평을 백제 개로왕이 통치했으니 신라 자비왕의 연호는 맞지 않으며, 벼슬은 180년 후의 신라(新羅) 진덕여왕이 베푼 중시(中侍)를 지냈다고 기록함 2. 시조~ 중시조(경절공)는 600여년이 됨에도 12대로 기록하여 한 세대가 50년이 됨 3. 946년 왕건이 고려건국 공신들에게 내렸던 삼한벽상공신을 474년에 미리 받음 |
을해보 |
1995 |
신해보의 내용 같이(신라말~고려초) 탄강년대를 로 바로잡음 |
남평문씨 대동문헌록 4쪽의 내용 시조의 생졸연대와 벼슬길에 이르신 사적과 배위와 묘소는 일찍이 문헌의 증거가 없으므로 기록치 못하였으니 후에 그 기록이 없는 것은 대개는 이와같은 것이나 근자에 상고한즉 각처에 간혹 초한 족보와 인출한 족보가 있는데 동경사를 상고한 즉 시조가 신라 자비왕(20대왕) 15년(474) 미동부리현에 나시어서 벼슬이 삼광상중대부(신라관직) 상구국 대아손 대원수 남평개국백이며 시호는 무성이라고 하고 또 부인 김씨라하였는데 정묘년 가을 경주에 가서 동경사를 상고한즉 처음부터 실린 것이 없으니 위에서 말한 것은 어디 근거를 두고 말한 것인지 알수없다. |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
가. 《고려사》 〈세가(世家)〉 태조 34년조에 처음 나타난다. 936년(태조19)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한 뒤 940년 신흥사(新興寺)를 중수하고 이곳에 공신당(功臣堂)을 세우고 공신당의 동서 벽에 삼한공신의 모습을 그렸다. 벽에 그린 삼한공신이라 하여 삼한벽상공신으로 부른다.공신당에 그려진 삼한벽상공신은 고려의 개국공신 가운데서도 큰 공을 세운 인물들로
①홍유(洪儒:殷悅 의성) ②배현경(裵玄慶 성산) ③ 유금필(庾금弼무송) ④복지겸(卜智謙 목주) ⑤ 신숭겸(申崇謙 평산) ⑥김선필(金宣弓 선산) ⑦이총언(李총言 벽진) ⑧김선평(金宣平 안동) ⑨권행(權幸 안동) 10.장정필(張貞弼 인동) 11.윤신달(尹莘達 파평) 12최준옹(崔俊邕 동주) ⑬문다성(文多省 남평) ⑭이능희(李能希 청주) ⑮이도(李棹 김의) 16.허선문(許宣文 양천) 17.구존유(具存裕 능성) 18.원극유(元克猷 원주) 19.금용식(琴容式 봉화) 20.김훤술(金萱術 해평) 21.한란(韓蘭 청주) 22.강여청(姜餘淸 냉천) 23.손긍훈(孫兢訓 밀양) 24.방계홍(房係弘남양) 25.나총례(羅聰禮 금성) 26.이희목(李希穆 부평) 27.염형명(廉邢明서원-파주) 28.최필달(崔必達 강릉) 29.김홍술(金弘述 ) 30. 김락(金樂) 등이다
|
나. 이후 벽상공신 칭호는 1170년 정중부의 난으로 명종이 즉위하면서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이고(李高)의 초상을 그려 조정의 벽에 붙였다 |
화벌보(華閥譜) 고려지 서문 변역문 |
우리 동방 국사에 이르기를 신라가 망할 때 많은 영웅들이 다투어 일어났다. 궁예는 동주(철원)에 도읍하고 나라 이름을 태봉이라 하고 견훤은 도읍을 완산(전주)에 정하고 국호를 후백제라 하여 남북이 서로 다투고 침범했다. 이때 하늘이 어진 임금을 내리시어 고려를 세우고 지혜로운 신하와 사나운 장수들이 줄을 이어 하늘을 우러러 만세를 부르니 태종 왕건께서 나라를 세울 때 충성을 다하야 훈공을 세운 여러 신하들을 벽상에 기록하고 이를 자손에게 전하여 대대로 벼슬과 녹봉을 내리게 했든 것이 475년에 이르러 하늘의 뜻이 다하여 왕씨가 망한후 26년 세종조 정미년에 여조에 대대로 벼슬과 녹봉을 받은 신하들의 방명을수록하여 화벌보라 이름하는 한 책자를 만들었다 그후 성종 신묘년에 영상 김질이 이를 다시 압수하여 불태워 버렸으나 혹은 어느 선비의 집에 숨겨둔 것을 보았다는 사람이나 들었다는 사람이 간혹있었으나 나같이 한미한 사람은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것이다. 이리하여 500여년이란 오랜 세월이 지난뒤 경인 병란때 서울에 사는 김민석씨가 고향을 떠나 남으로 피난을 오든중 우연이 길거리에서 만나 소지한 행장에 여사 화벌보가 있었다 내가 이것을 얻어 읽어 보매 세상에도 희귀한 것으로 천고의 기적이라 할수있다. 이 사적을 일일이 베껴서 똑같이 실고 마침내 그와 또 같은 수사본을 이룩하니 여기 43가(家)에 영광이 있기를 바라며 내 뜻을 전하여 기록하는 바이다. 세재 갑오중양절 대흥 이재하 근지 |
< 화벌보 > 나라를 세운 공신들은 높은 벼슬로 영화누리네 충성된 훈업은 대대로 녹을 이어받고 벼슬을 주어 가문을 이어가네 관직을수록하고 아름다운 이름을 모아 세보를 만들었네
< 벽상공신 > 한자 은패에 공훈을 세겼도다 군후의 대례복에 통천관을 쓰고 대궐안 임금님 거실에 그 이름 나란히 걸었네
< 삼중대광 > 문반에선 중신이 되어 모든정치 보살피고 무반에선 장군되어 나라 사직 받들었네 군후의 봉함 받으니 높은 벼슬 더욱 영광일세 |
중시조(1세) 경절공(敬節公) 익(翼) |
시조에서 중시조까지는 해석상 모순이 있어 신해보에서 경절공을 중시조로 모시고 1세로 하였다. 고려문종때 과거에 급제해 왕에게 직간을 서슴치 않았고, 국교가 불교인 상황에서도 유교의 정대한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여 기대와 촉망을 받았다 헌종1년(1095) 근신으로 보제사 상량준비문 받음 숙종3년(1098) 찬선대부, 급사중(종4품)을 거쳐 1099년 3월(숙종4년) 요나라에 원자 책봉 임무 완수후 좌복야 승진 1102년 직문하성사로 서북면 병마사를 거쳐 1103(숙종8년) 우산기 상시(정삼품)로 승진하고 예종 3년(1108) 병부시랑지어사대사 충상장군 병부상사 1112(예종7년) 참지정사(종2품) 강종때 평장사 상주국 영동정의 추증과 풍산군으로 봉함 남평문씨를 고려 명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중흥조로 네분 아드님(공인,공원,가관,공유)도 모두 뛰어나시었다.. |
묘소를 실전하여 설단을 논의하고 있는데 고간원과 장연서원에서 서로 모시겠다 하여 조정중에 있습니다 |
2世 |
충의공(忠毅公) 공인(公仁) 초휘(初諱) : 공미(公美) |
문과 급제후 직사관이 되고 예종10년(1115) 호부시랑(戶部侍郞)재직시 사은사겸 진봉부사로 宋에 다녀온 후 전중소감 우부승선겸 태자 우찬선이 되고 1122년(예종17) 예빈소경 추밀원(樞密院) 지주사를 거쳐 1123(인종원년) 추밀원 부사로 봉직 1127(인종5년)최사전과 이자겸의 모함으로 충주로 유배당했으나 이자겸이 몰락한 후 이부상서, 1129(인종7년) 지문하성사(종2품) 예부상서 등 여러 벼슬을 거쳐 평장사 및 서경 유수 1130(인종8년) 판상서형부사 인종11년 판상서 병부사 감수국사에 봉직함 묘청의 서경천도설에 찬성해 묘청을 추천 하였는데 묘청이 난을 일으키자 일시 좌천되었으나 상주국 남평현 개국백(佰)에 식읍(食邑) 3천호와 식실봉 3백호를 받음 인종15년(1137) 73세로 별세하니 왕은 3일간 조정을 닫고 장례를 돌보게 함 부인은 해주최씨 |
2世 |
정경공(貞敬公) 공원(公元 ) 일명 공윤(公允) 1084~1156 |
고려 선종1년(1084)출생. 음보로 기용되고 예종때 문과 급제해 승진을 계속하여 인종때 우정언ㆍ지제고에 발탁되시어 전중시어사 이주연과 함께 상소해 시정의 폐해를 바로 잡고 1130(인종 8)년 중시어사(정6품) 1135년(인종 13)랑중(郞中)으로 봉직시 금나라에 만수절 축하사절로 다녀온 후 1148년(의종 2) 어사대부 지추밀원사 판삼사사 됨 1150년(의종 4) 지공거 참지정사, 판형부사 중서시랑 평장사 판이부사를 거쳐 수국사가 됨 1152년(의종 6) 서경유수 1156년(의종10) 서경유수를 거처 문하시랑 평장사로 치사하고 별세하시니 의종 묘정에 모심 왕이 공의 저택을 진사400근에 구입해 순어사로 삼은 기록은 벌족으로 경제력을 증명하며 조선금석총람에 공의 묘지명(위쪽그림누르면 크게보임)에는 선세가 현달하였고 조부와 증조의 휘자가 마모되었으나 명망이 세상에 저명했다고 적혀 있습니다.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ikjum.com%2Fphoto%2Finmul%2Fgongwon1.jpg)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ikjum.com%2Fphoto%2Finmul%2Fgongwon2.jpg)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ikjum.com%2Fphoto%2Finmul%2Fgongwon3.jpg)
|
묘지석의 판독한 결과 |
석함내부의 문양(모란,주작 청룡) |
정경공 문공원 묘지명 (墓誌銘)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실려 있다- |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판이부사(判吏部事) 수국사(修國史) 정경공(貞敬公)이 이미 돌아가신 지 3년 후의 일이다. 그 외손 국학(國學) 양정당(養正堂) 조영심(趙永心) 등이 공(公)의 행장(行狀)을 나한테 보이며 말하길 "우리 외조부님 생전에 자네를 대접함이 자못 후(厚)하였다. 이제 그 분을 장사함에 마땅히 자네의 명(銘)을 얻어 소장하려고 하네."하였다. 내가 대답하기를 "공(公)이 세상의 새 중에 봉(鳳)이 있음 같고 짐승 중에 기린(麟)이 있음 같아서, 비록 하찮은 사람들도 모두 추존할 줄 알거늘 하물며 나는 공의 문하(門下)에 수학 한 지 오래되었는데 감히 명(銘)을 받들지 않으랴."하였다
공(公)은 남평군인(南平郡人)이니 문(文)씨가 그 성(姓)이요 공원(公元)이 그 이름이다.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 휘 익(翼)의 아들이요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 행초맹중랑장(行抄猛中郎將) ○의 손자요 증조는 휘○ 벼슬이 ○○이었는데 그 명망이 높아 세상에 알려졌다. 모친 유(柳)씨는 현덕(賢德)이 있어 항상 공(公)을 옳은 법도로 가르쳤으니 옛말에 이른바 '능히 효자(孝子)로 하여금 충신을 만든다'함을 이뤄낸 것이다.
공(公)이 처음 음직으로 예종때에 관직을 받았으나, 일없이 지낸 10년 후인 갑오에 진사(進士)에 올랐다. 이때 인종(仁宗)이 즉위하여 공(公)이 가히 크게 쓸 수 있음을 알고 우정언(右正言) 지제고(知制詰)에 발탁하였다. 이후로 역임한 관직이 모두 난대(문하성)와 봉각(鳳閣:중앙관서를 말함)이었다.
공(公)은 인품이 밝고 평탄하여 표리(表裏)가 통달하지 않음이 없어서, 사람을 대함에 성실하고 공검(恭儉)○○○하였다. 또 남의 과실을 말하지 않았는데, 대절(大節)에 임하고 대의(大議)를 결단할 때는○○○○ 비록 죽음이 목전에 있어도 동요됨이 없었으니, 상감이 이 때문에 공(公)을 중(重)히 여겼다.
○○○○○군신(君臣)이 서로 만나기 가히○○○○ 공(公)이 상부(相府)에 들지 못하였다.한번 찰방사(索訪使)가 되고 두 번 안부(안部)가 되고 세 번 ○통(統)이 되었으니 역임한 바에 모두 치적이 있었다. 경오년에 과거 시험을 맡았는데, 문생(門生)들이 모두 당시의 어질고 뛰어난 사대부(士大夫)들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공(公)의 명감(明鑑)을 알게 되었다.
공이 중추원사(中權院使) 이의(李이)의 따님에게 장가들어 부인(夫人)을 삼았는데, 아들은 없고 딸만 넷을 낳았다. 장녀는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최숙문(崔淑問)에 출가하였고, 이녀는 도염서령(都染署令) 박황(朴環)에 출가하였고, 삼녀는 시대관서령(試大官署令) 조○언(趙○彦)에 출가하였고 사녀는 사경원판관(寫經院判官) 최언방(崔彦方)에 출가하였다.
공(公)이 공(功)을 이루고 늙어 물러감을 아뢰어서 녹야(綠野)의 풍취를 추상 하였으며, 향수 73세되는 병자(丙子) 12월에 감기로 돌아가셨다. 부고를 알리자 주상(主上)이 크게 슬퍼하시며 3일간 조회를 폐하고 유사(有司)에게 그 장사를 명(命)하여 조양산(朝陽山) 동편 기슭에 장지를 정하였다가 齡勳() 5월 13일에 오관산(五冠山) 천태사(天금寺) 부근으로 이장하였다. 슬프다. 선비가 분장(文章)과 공업(功業)으로 역대의 세 왕조(王朝)에 벼슬하여 높은 지위에 오르고 집에서 돌아가셨다. 이는 예전에도 일직 듣기 어려웠거니와 곧은 그 영광을 얻었으니 어찌 위대하지 않은가?
명(銘)하기를 망망한 조화(造化) 속에 옛날과 지금이 바뀌어 백세(百世) 후에는 능곡(陵谷)이 변천되어도 오직 공(公)의 영명(令名)은 하늘과 같이 다함이 없으리 명(銘)을 무덤 속에 넣으니 덕(德)에 부끄러움 없다오.
문림랑 시대학박사(文林郎 試大學博士) 직사관(直史館) 윤○신(尹○信) |
2世 |
가관(可觀) 대선사공(大禪師公) |
고려때는 왕가나 명문가의 자손들이 불문에 들었는데 조계종 대선사로 공유의 주각에 기록 되어 있다 |
2세 |
경정공(敬靖公) 공유(公裕) 자: 항적(亢迪) 후에 순수(순壽)로 개명함 |
남평에서 출생 15세에 남성시에 급제 1122년 합문지후 제수됨 권신들이 모함에 장인 韓安仁의 죄에 연루되어 양산에 유배되어 숙정후 복직됨 1129(인종7년) 금나라 생신축하차 파견 1132년 시어사 시서경 집무중 묘청을 탄핵하다 좌천되고 묘청 일당이 지은 대궐에 액자를 쓰라는 왕명을 거역하였으나 묘청의난 이후에 충의를 알게됨 1156년 검교 태자 태보 중대부 지문하성사를 제수받고 남평개국자에 식읍 3백호를 받음 서예가로 서풍은 당과 송나라에 미치고 해서(楷書)전성기 인데도 체양(북송4대가) 서풍을 바탕으로 한 독창적인 개성을 살린 행서 필체가 묘향산 보현사 창사 비문(김부식 지음)은 현재도 남아있다 (남평문씨 대동문헌록 22쪽)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ikjum.com%2Fphoto%2Finmul%2Fgongyou1.jpg)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ikjum.com%2Fphoto%2Finmul%2Fgongyou2.jpg)
|
공유 글씨 |
보현사 창사비문의 공유글씨 |
고려국 검교태자태보 중대부지문하성사(中大夫知門下省事) 형부상서치사(刑部尙書致仕) 문공유 묘지명 |
검교태자태보 승무랑(承務郎) 행시상서공부시랑(行試尙書工部侍郎) 지제고 사자금어대 사위(史偉) 지음 |
공의 휘는 공유(公裕)인데 뒤에 고수(顧壽)라 개명하였고, 자는 항적(克適)이며 남평군(南平郡) 사람이다. 나이 15세에 정당문학(正堂文學) 정문(鄭文)이 주재하는 남성시(南省試 진사시험 )에 2등으로 합격하였고, 25세에 학사(學士) 오연총 임언 등의 밑에서 우등으로 급제하였으며, 29세에는 급전녹사(給田錄事)가 되었다. 다음해 장릉(長陵)의 의신(儀寢인종이 태자때 궐내에 함께)에 있으면서 첨사부록사(畯事府錄事)로서 논어 맹자 상서(尙書)를 진독(進讀)하고 서법(書法)도 함께 올렸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주부(主簿)가 되었다. 임인년(예종17년 1122)에 왕을 호종한 공으로 합문지후(閣門福候)에 제수되었으나 때마침 권신(權臣)이 집권하여 충신(忠臣) 의사(義士)들이 모두 귀양가게 되는 바람에 공도 장인의 죄에 연루되어 양주(梁州)로 귀양갔다가 가덕도(加德島)로 이배되었다. 병오년에 이르러 권신을 추방시킬 때 상감이 공의 정직함을 알았다. 무신년 봄에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지제고(知制誥)를 제수하였고, 그 해 겨울에는 상서호부원외랑(尙書戶部員外郎)이 되었다. 기유년 겨울에는 예부낭중(禮部郎中)으로 청주목부사(淸州牧副使)가 제수되었으나 임기가 차기 전 왕의 부름을 받아 다시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郎)으로 제수받고 사관수찬관(史館修撰官)으로 충원되었다.
임자년 겨울, 시어사(侍御史)에 제수되었는데 당시 서경의 승려 묘청(妙淸)이 요망한 말로서 임금을 현혹시키려 하자 동료인 이인실(李仁實)과 함께 극력 간(諫)했던 바, 이로 인해 상감의 뜻을 거슬려 고공원외랑(考功員外郎) 충주목부사(忠州牧副使)로 좌천되었다. 서경(西京)의 임원역(林原驛)에 새 궁궐을 세워 태화궁(太和宮)이라 이름하였는데, 상감이 공을 불러 궁궐 액호를 쓰라고 명하자 공이 거절하면서 아뢰길 "신이 전일에 묘청등을 마땅히 멀리 귀양보내라 하였는데 지금 그의 말로 창립한 신(新)궁궐에 액호를 쓴다면, 이는 한 마음으로 상감을 섬기는 의리가 아닙니다. "하였다.
상감께서 장차 신궁(新富)에 납시려고 먼저 서경에 가시자, 묘청이 그 무리들과 함께 제 말을 신령스럽게 하고자 떡으로 주머니를 만들고 그 속에다 기름을 넣어 대동강(大同江)바닥에 담가두었다가 거기에서 기름이 새어나와 수면에 떠오르자, 이를 상서로움이라 하였다. 이윽고 상감이 신궁에 거동하시니 그 남쪽 산 위에 등불을 설치해 두고는, 수성(壽星)이 상서를 바쳐 신궐을 가까이 포용하는 뜻이라 하였다. 그런데 그 부근에서 갑자기 지진이 일어나 근방의 우마가 떼죽음을 하고, 하룻밤 사이에 수목이 삼백이십 그루나 뽑혔으며, 어마(御馬) 두 마리가 죽었다. 상감이 대신(大臣)들과 의논하여 급히 서쪽으로 옮겼다가 마침내 환궁하시었다 얼마 뒤 서경에서 묘청의 반란이 일어난 연후에야 상감이 공의 충의(忠義)를 아시고 호부낭중(戶部郎中) 동궁시독사(東富侍讀事) 지제고(知制詰)에 발탁하였다.
병진년 겨울에 조정에서 청주부사(淸州副使)로 있는 공의 임기가 다 차기도 전에 예빈소경(禮賓小卿)에 임명하여 황주목부사(黃州牧副使)로 삼았고, 임기가 끝나자 예빈소경(禮賓小卿) 태자좌찬선대부(太子左贊善大夫)가 되었다. 경신년에 비서소감(秘書少監) 동궁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에 제수되었다. 신유년에는 병부시랑(兵部侍郎)에 제수되고 나머지 관직은 예전대로였다. 2년후 우간의 대부(右諫議大夫) 형부시랑(刑部侍郎) 동궁시독학사(東宮侍讀學士)가 되었다가 상서좌승(尙書左丞) 지어사대사(知御史臺事)에 승진되었다. 정묘년에는 국자감 대사성 (國子監大司成)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 지도성(知都省)이 되었고, 무진년 봄에는 산기상시(散騎常侍) 보문각학사(寶文閣學士)가 되었고, 기사년 겨울에는 형부상서(刑部尙書) 수문전학사 지제고(修文嚴學士 知制詰)가 되었다.
천덕(天德) 3년 여름에 서경지유(西京知留)가 된 지 겨우 여섯달 만에 형부상서(刑部尙書)가 되었다가 다시 병부(兵部)로 개임(改任)되고 권삼사사(權三司使)가 되었다. 계유년 정월에 소명(召命)을 받아 금상(今上)을 태자(太子)로 세우게 되자 임금이 공에겐 특별히 태자부첨사(太子府詹事)를 제수하여 봉책(封冊)하는 일을 관장케 하였다. 그 해 여름에는 마침내 형부상서(刑部尙書)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 지제고(知制詰) 겸 태자빈객(太子賓客)을 제수하며, 예(例)에 따라 검교태자태보(檢校太子太保)로 삼았다. 을해년 여름에는 동지추밀원사(同知權密院事)가 제수되었고, 그 나머지 관직은 모두 예전대로였다. 이어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고 병자년 여름에는 지금의 관직이 제수되었던 것이다.
공은 풍채(風采)가 당당하고 문장(文章)이 뛰어났으며, 더욱이 예서(隸書)를 잘썼다. 병신년에 조정에서 중국에 사신을 보내며 보행(補行)할 사람을 선택할 때 공이 사무직으로 뽑히어 수행하였다. 그리고 일찍이 사신으로 금(金)나라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또한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상서좌복야(尙書左儀射) 지추밀원사(知權密院事) 남평개국자(南平開國子: 공,후,백,자,남의 5등급중 4등급) 식읍삼백호(食邑三百戶)를 받고 금나라 하등극사(賀登極使)가 되었다 일찍이 동북서북(東北西北) 양계(兩界)의 안찰병마사(接案兵馬使) 도통병마사(都統兵馬使)를 지냈다.
공의 선세(先世)는 문무관으로 조정에서 높은 벼슬하였고, 조부와 증조 고조는 모두 가첩(家牒)에 실려 있음으로 여기는 다시 기록하지 않는다. 부친 익(翼)은 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였는데 네 아들을 두었으니, 장남은 공인(公仁)이요 차남은 공원(公元)으로 모두 총재(?宰:이부상서 )가 되었고, 다음 가관(可觀)은 조계종 대선사(大禪師)가 되었으며 공이 그 막내이다. 백씨(伯氏)와 중씨(仲氏), 계씨(季氏)가 서로 차례로 정승에 올라 세상에서는 공의 집을 재상집이라 하여 심히 영화롭게 여겼다
공이 추밀원(樞密院)에 있을 때 천문(天文)이 변동이 있자 점치는 이가 말하기를 "추부(樞府)에 변고가 있겠다. "하였는데 공이 숙직하다가 갑자기 수족의 병에 걸려 드디어 돌아가시게 되어서 세상에서 더 크게 쓰이지 못함을 개탄하였다. 세 아들을 두었으니, 장자 극겸(克謙)은 지금 이미 문과에 급제하여 7품 관직에 있고 다음 극순(克純) 극이(克易)는 모두 음직으로 조정에 벼슬하고 있다. 딸 셋이 있는데 큰사위 정극(鄭極)은 지금 내시로서 형부외랑(刑部外郎)직에 있고, 다음 사위 윤자고(尹子固)는 일찍 죽었으며, 끝에 사위는 이세창(李世昌)이니 역시 음직으로 조정에 벼슬하고 있다.
기묘년( 1159) 3월 13일에 상감께서 유사에게 명하여 백학사(白鶴寺) 서남산 기슭에 장사 드리라 하니 공의 아들과 여서(女壻)들이 묘지명을 나에게 부탁하였다.이 에 명 (銘)한다. 공의 두 자손 하늘이 아끼어 계승하였으니 여경이 있는 곳에 공의 아들 있었더라 누가 그 후 알기를 그 처음보다 크다 하리오. 충효와 문학으로 근원을 삼아 비단옷 입고 장차 높아지려는데 유명이 이미 이루어져 아들과 사위가 묘에 지명을 갖추고자 하네. 내가 공과 안 지가 오래이라고 공의 묘지명을 지어 불후함 밝히라 하니 내 재주 없으므로 피하려 했으나 감히 굳이 거절 못하고 도리어 눈물을 닦고 붓을 잡아 편다오 충의 온전한 덕 공은 실로 있었고 문의 화려한 국토 공은 실로 떨쳤어라. 몇천 만세나 이 무덤 산기슭에 전하리.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ikjum.com%2Fphoto%2Finmul%2Fgukgyum31.jpg)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ikjum.com%2Fphoto%2Finmul%2Fgukgyum32.jpg)
|
극겸영정 |
극겸 사당(충남 공주군 유구면 추계리)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ikjum.com%2Fphoto%2Finmul%2Fgukgyum33.jpg)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ikjum.com%2Fphoto%2Finmul%2Fgukgyum34.jpg)
|
현존하는 남평문씨 최고의 고분 극겸묘소 |
신도비 |
字는 : 덕병(德柄)이요 재상으로서 상장군을 겸임하였으니 문무직을 겸임한 최초의 인물로 기록됨 1122년(고려 예종17년) 2세 휘 공유를 아버지로 남평에서 출생 음보로 벼슬하고 의종때 문과에 급제 의종때 좌정언 봉직시 내시와 점장이의 폐해에 대한 상소로 황주판관으로 좌천 당했으나 선정으로 백성들의 칭송이 높자 내시들이 모함하여 진주판관으로 좌천시키려 할 때 대신들의 반대로 중앙에 복귀하여 합문지후와 전중내급사 하시고 1170년(명종4년) 궁궐 당직시 정중부의 난으로 체포되었으나 상소로 좌천된 일로 화를 면했고 좌부승선으로 왕명으로 승려들을 위무하고 추밀원 부사 지주사를 거쳐 추밀원사로 승진 상서도성의 좌복야(정2품)가 됨 송유인의 시기로 사공(최고의 명예직)으로 이직하였을 때 하는 일이 없다고 급료를 받지 않으셨다. 1179년 12월 중서시랑 평장사에 호부판서 1181년 관등순위 2위인 판예부사를 제수받음 1182년 중서문하두성의 시랑 평장사와 병부판서겸 수국사(국사편찬 책임관)로 임명되고 1183년 이부판서 겸직 1189년(명종 19) 9월 68세로 별세 조정을 3일간 폐하고 명종 묘당에 배향 공신으로 모심 출전 : 新增東國輿地勝覽<36권 全羅道 南平縣 人物 高麗> <41권 黃海道 黃州牧 名宦 高麗> 묘소는 충남 공주군 유구면 추계리이머 입구에 신도비가 있고 옆에는 고간원의 금강재이다 제향은 송호서원과 장연서원, 저산서원, 의열사 등에 배향되심 |
2003년 방영된 주말연속극 무인시대에서 강직하고 절개있는 충신으로 무신들의 횡포를 막아 국가를 지키다 돌아가신 행적 방영 |
문극겸전(文克謙傳) -고려사(高麗史) 열전(列傳)- |
문극겸(文克謙)의 자(字)는 덕병(德柄)이요 남평군(南平郡) 사람이다. 부친은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 집현전 대학사(大學士)인 공유(公裕)요 시호는 경정공이라 했다. 극겸은 처음에 백부인 공인(公仁)의 음덕으로 산정도감(制定都監)의 판관(判官)을 지내었다 나라의 제도상 남삼(藍衫:음직으로 벼슬한 사람)을 입고 있는 신분으로서 과거 시험에 응하는 사람은 세 차례만 응시하게 되어 있는데, 극겸은 여러 번 과거시험을 보았으나 급제하지 못하자 탄식하며 말하기를 "평민도 과거를 열 번이나 치르게 하면서 남삼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어찌 세번까지로 제한한단 말인가?" 하고는 다섯 번까지로 그 한도를 삼아주기를 청원드리니 조정의 의론이 그의 의견을 붸아 시행하기로 한 것이 결국 통상적인 법도가 되었다.
극겸은 벼슬길에 있으면서도 학업 연마를 멈추지 않아. 마침내 의종조(穀宗朝)에 문과에 급제, 관직이 계속 승진하여 좌정언(左正言)에 올랐다. 그래서 그는 합문(閣門 :왕의 편전앞문)에 엎드려 다음과 같이 상소하였다. "내시관(內侍官) 백선연(白善撚)이 벌과 상을 주는 임금님의 권한을 함부로 부리옵고, 궁녀 무비와 은밀히 추한 짓을 했사옵니다. 점장이 영의(榮儀)는 옳지 못한 도를 가지고 임금님께 총애를 받아 백순, 관북의 두 궁전을 지어 사사로이 재물을 비축하고 복을 빌고 재(齋)를 올리는 비용으로 사용하였사옵니다. 백선연과 같이 사무를 관장하면서, 양계(兩界)의 병마사와 오도(五道)의 안찰사(按察使)가 임지로 가기에 앞서 임금님께 하직인사를 올리는 날에는, 반드시 두 궁전에다 술자리를 차리어 위로하고 송별을 하는데 제각기 지방의 토산물을 바치게 해서, 그 바치는 것의 많고 적음에 따라 전최(嚴最: 근무성적의 최상과 최하등급)를 매김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집집마다 재물을 거둬들이게 하여 백성들의 원망을 사고 있나이다. 추밀원지사 최포칭도 중요한 직책을 맡아 조정의 내외에 세도를 부리고, 탐욕이 끝이 없어서 자기에게 붙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중상모략을 하며 치부함이 아주 많사옵니다. 청하오니 백선연과 무비를 목베고 영의를 몰아내어 마소 먹이는 사람으로 충당하시고 최포칭을 파직시켜 온 나라에 사죄케 하소서,"
그는 또 궁중 여성의 일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왕이 보고 크게 노하여 그 소장(疏狀)을 불태워 버렸다 최포칭이 궁에 들어가 변명하기를 청하니 왕이 극겸을 불러 대질케 함에 극겸의 진술이 아주 적절하고 사리에 합당했으나 결국 황주판관(黃州判官)으로 좌천 당하였다. 처음에 극겸이 그 상소문을 초안(草案)하였을 때 간의대부(諫議大夫) 이지심과 급사중(給事中) 박육화(朴育和)와 기거주(起居注) 윤인첨(尹鱗瞻) 등은 그 상소문의 서명에 응하지 않았고. 극겸이 좌천된 후에도 그들이 태연하게 일을 보니 백성들 사이에서 "문공(文公)과 친히 함께 지내어 영특하고 탁월한 사람들이라 여겼는데 어찌 그리도 낯이 두터운가?"라는 말로 비방하였다.
황주판관인 극겸을 아전들과 백성들이 좋아하고 흠모하며 잘 다스린다고 명성이 자자했다. 왕의 측근인 한 고위 관리가 전부터 품은 감정으로 작은 과실을 꾸며내고 왕에게 파직시킬 것을 건의하니 왕도 이전의 일로 화를 내며 다시 진주판관(晋州判官)으로 좌천시키려 하였을때, 담당관리가 아뢰기를 "극겸은 강직한 신하이니 지방관으로 연속 좌천시키어 언로(言路)를 막는 것은 옳지 못하옵니다. "라 하여 논의하는 것을 막음에 합문지후(閣門福候)를 제수하였다. 이어 전중성(嚴中省)의 내급사(內給事)에 올랐다.
정중부(鄭仲夫)의 난이 일어날 때에 극겸은 전중내에서 숙직을 하다. 변란이 났음을 듣고 피하다가 군사들에게 잡히어 "나는 전에 정언이었던 문극겸이다. 주상(主上)께서 만약 내 말씀을 따르셨다면 어찌 오늘날에 이르렀을 것이냐? 원하노니 잘 드는 칼로 나를 죽여라" 하자 그 병사가 이상하게 여기고 여러 장수 앞에 이르니, 장수들이 말하기를 "이 사람은 우리들이 명성을 들었다. 우선 궁성 안에다 가두어라" 하였으며, 의종은 남방으로 쫓겨가는 말 위에서 탄식하기를 "내가 일찍 문극겸의 말을 따랐더라면 어찌 이런 모욕이 있게 되었으랴" 고 하였다.
명종(明宗)이 왕이되어, 여러 신하의 관직을 새로이 베풀 때 극겸을 옥에서 석방하고 비목(批目 : 왕의 제가를 받은 인사발령장)을 쓰게 하였다. 이의방(率義方)이 왕에게 아뢰어 극겸에게 우승선(右承宣) 어사중승(御史中童)이 내려졌고, 문신중에 이공승(李公升 중서시랑평장사 1099~1183) 등 많은 사람들이 극겸의 도움으로 화를 면하고 무신들도 또한 그를 의지하고 믿으며 옛적의 많은 사실을 물었다. 이어서 용호대장군(龍虎大將軍)을 겸하였고, 재상이 되어서도 역시 상장군(上將軍)을 겸하였다 극겸의 결혼할 딸이 있었는데 이의방의 동생 이인(李璘)이 처로 맞이하였고 이러므로 계사년(癸巳年)의 난(이이방이 권력을 잡음)에 일족이 모두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좌간의 대부(左談議大夫) 김신윤(金華尹)은 "승선이란 직위는 임금님의 대변자 역할을 하는 자리로 다만 임금의 재가를 출납하면 되는 것이옵니다. 현재 이준의(李俊儀)와 문극겸은 관직이 어사대의 벼슬을 겸하고 중추부에 있으면서 일을 보니 권력을 부릴 수 있는 빌미가 되므로 청원하옵건대 그 겸직을 풀으소서"라고 상소하였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다음날 왕의 처사에 논박하는 관청의 신하들이 합문에 엎드려 애써 충간함에 이준의를 위위시(衛尉寺) 소경(少卿)으로 전보시키고, 극겸은 대부시(大府寺) 소경(少卿)으로 삼았다
하루는 왕을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이 왕의 수명장수를 비는 술자리를 베풀어, 한밤중이 되도록 끝내지 않고 주위가 점점 떠들썩해졌다 이에 극겸이 간곡히 말하기를 "이런 일로 전(前)의 임금님께서 폐위되었는데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하고 왕을 권하여 안으로 들게 하므로 드디어 그 자리가 파하게 되었다. 이에 이준의는 성내며 욕설을 했다. 곧 예부시랑(禮部侍郎)으로 전임되고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를 임명받았고, 또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 승진되었는데, 송유인(宋有仁)과 틈이 생겨 수사공(守司空)과 좌복야(左儀射)로 좌천된 후에는 명예직이라 하여 봉급을 받지 않으니 세상에서는 그의 청렴함에 탄복하였다. 모친상을 당하여 해를 넘기고 일년 만에 다시 전의 관직으로 복귀하였다. 오래지 않아 참지정사(瑻知政事)가 되고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郎平章事) 판호부사(判戶部事) 태자태보(太子太保)로 승진하였다. 이 직위를 받고서 일을 처음 볼 즈음 예관(禮官)이 왕에게 아뢰기를 "태후의 제삿날이 음력 11월에 들었사온즉 팔관회(八關會)의 예식을 음력 10월에 거행하도록 청하니, 왕이 재상부(宰相府)에게 물었을때 극겸이 대답하기를 "태조(太祖)께서 애초에 팔관회를 개설하셨음은 즉 천지신명을 위해서였나이다. 그러하오니, 뒤의 임금님께서 다른 일로 그 시기를 앞당기거나 뒤로 물릴 수 가 없나이다. 더군다나 태조대왕께서 신명에게 기도드려 말씀하시옵기를, "세세토록 음력 11월에는 왕이나 왕후의 제삿날이 들지 않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만약 불행히도 이 때에 왕이나 왕후의 제삿날이 드는 일이 생긴다면 나라의 복운(福運)이 끊어지려는 걸로 의심하겠습니다"라고 하셨던 것이옵니다. 그러므로 나라가 다 통합되어진 이래, 음력 11월에 임금님이나 왕후님의 제삿날이 없었사온데, 이제는 있사온즉 이는 나라의 재앙이옵니다. 그런데도 또 음력 10월로 팔관회를 개설키로 함은 진실로 태조께서 세우셨던 뜻대로가 아니오니 예관이 아뢴 바는 윤허할 수는 없는 것이옵니다. "라 하니 왕이 그의 의견을 따랐다
명종 15년(1185)에 판예부사(判禮部事)가 되었을 때에 한문준(韓文俊)이 문관으로는 석차(席次)가 제2위이고 그 다음은 극겸 이었으며, 그 다음은 최세보(崔世輔)였다. 한문준이 맨 윗자리의 재상으로 판이부사(判吏部事)가 됨에, 극겸은 응당 아상(亞相)이 되어야 하였다. 그러나 그는 최세보의 윗자리에 있으려 하지않고, 선수를 써서 자진해 후퇴하고 사양하며 최세보로 하여금 판병부사(判兵部事)를 맡아 아상의 지위에 오르게 하고, 자신은 그 다음 자리를 지키기로 하였다 그러자 최세보 또한 굳이 사양하여 말하기를 "나는 문공(文公)에게 은혜를 받았음이 실로 많았었는데, 감히 문공의 윗자리에 있으리오." 하였다. 왕은 예부가 병부의 위가 된다는 이유로써, 극겸에게 판예부사를 제수하여 아상으로 삼고 최세보를 그 다음 지위로 삼음에, 아는 이들이 그 양보심을 칭송하였다.
왕이 일찍이 한 절구시(絶句諒)를 지어 극겸에게 주었는데, 한 치 깊이 마음 속은 많은 일로 소란하다 나날이 시름 걱정 깊어지는데 생각이 짧고 모자라 헤아리기 어렵고 다만 백발 수천만 올이 머리 위에 가득하도다 이 시를 받은 극겸은 화답의 시를 지어 올렸으니 세월이 흘러가면 사리가 어둬지나 나라 일 도을 생각 날로 더욱 깊어 지나이다. 임금님 은혜 갚자하나 이루지 못하옵고 무정한 백발만 머리 위에 가득하오이다.
당시 사람들이 이 두 시를 비교하여 이르되 "둘 다 쇠퇴하여 시들 기미가 엿보인다. 하였는데 왕은 결국 폐출되었고 극겸도 오래지 않아 세상을 떠났으니, 생각건대 시의 뜻이 우연히도 뒷날과 적중되었다 그 다음해에 중서(中書), 문하(門下)의 두 성(省)의 시랑평장사(侍郎平章事)로 판병부사를 겸하고, 이어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에 올랐다. 명종 19년(1189년)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68세였다. 왕은 3일간 조정 조회(朝庭朝會)를 폐하였고, 충숙(忠肅)이란 시호를 내렸으며, 명종의 묘정(廟庭)에 모셔 제사 지내고 아들은 후식과 유필이 있었는데 유필은 벼슬이 문사성사에 이르고 유필의 5세손 달한이 이어서 전하였다.
그의 성품은 효도스럽고 우애하였으며, 인자하고 어진 가운데 충성스런 마음으로 바른 말을 하며 정직하였다. 그는 식사를 함에 반찬 그릇이 두셋에 불과하였고 화려하게 무늬 있는 옷을 입지 않았다. 그는 세 번이나 과거 시험을 주관, 천거한 바 이름난 선비가 많았으니 그 때에 어진 재상이란 칭송을 듣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권세 있는 사람과 세력 있는 집안의 청탁을 들어, 어진가 여부를 살피지 않고 인물을 전형(鐘衡)하여 배치함에 그릇됨이 많았고, 또 나이 어린 자제들을 벼슬하게 하고, 종을 사방으로 보내어 전원을 넓히었으므로, 당시 사람들의 논의가 애석히 여기었다. |
앞에서는 청렴한 인품(人品)에 어진 재상이라 칭찬하고, 다음에는 이치가 맞지 않는 소리로 폄하(貶下)하고 있다. 왜 이처럼 모순된 기록을 자행하게 되었을까? 조선 조정은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 왕조의 기틀을 다지면서 친왕적(親王的)인 입장에만 급급한 나머지 전조(前朝)의 사초(史草)을 왜곡시켰던 것이다. 공께서 청렴하였던 기록으로는 조카인 상서좌복야 문효식이 세 번이나 물러나기를 청하자 윤허하는 글에 친혐(親嫌)을 염려했고 문인 이담지(李灌之)가 자기를 돌봐주지 않음을 원망하는 시(詩)를 남기기도 하였다.
반면 원전사료(原典史料)인 고려사(高麗史)및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 유구역의 시에 관한 내용이 한 구절(句節)도 언급되지 않고 있음은 의도적이었음을 입증한다. 다만 고려사에 복합소(伏間疎)를 기록한 것은 충신의 본(本)을 보인 것이 되었으나, 그 내용은 군주(君主)의 위치에서 볼 때 신하가 임금의 허물을 직언(直言)한 것이니 새 기틀을 다지는 왕권확립에 저해(沮害)요인이 되므로 충신이란 사실만 기록하여 군주의 권위를 회복하였을 것이라 짐작된다.
곧은 사대부(士大夫)로서 충간했던 시평(詩評)과 사실을 이인로(李仁老)와 최자(崔濫)가 상세하게 기록해 두었기에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
유구역 벽상시에 대한 서평 -이인로(李仁老1152~1220) 파한집(破閑集)에서- |
지혜로운 사람은 형상으로 나타나기 전에 알아차리나, 어리석은 사람은 무사하다고 태연해 하며 근심스레 여기지 않다가 급기야는 환란이 이른 뒤에야 애태우며 힘써 구하려 한들, 그것이 어찌 살고 죽고 성공하고 실패하는 운수에 이익이 있으리오? 이는 편작)이 환후(의 질병을 고치지 못한 까닭과 같다.
옛날 한(漢)나라 문제(文帝) 때에는 천하가 다스려져 편안하고 백성이 풍성하고 넉넉하였다. 그런데도 가의()는 그 세상을 염려하며 통곡했고, 당(唐)나라 태종(太宗)은 건국(建國)한 뒤부터 날로 더욱 삼가하고 두려워해서 일찍이 조금도 게을리 함이 없었는데도, 위징은 오히려 일의 열가지 징조를 아뢰었다. 그러므로 옛글에 말하기를 "충간하는 자는 그 근원을 살퍼 좋지 못한 것이 나오지 못하게 한 것이니, 얼음은 서리 생길 때에 경계하고, 옥으로 된 술잔을 쓰는 사치는 칠기(漆器)에서부터 막아야 한다. "고 하였다.
옛날 의왕은, 수십세의 풍족하고 평화스럽게 잘 다스려진 왕업에 의지하여 왕위에 있은 지가 오래 되도록 일이 행해지지 않음이 없자, 모두 태평한 왕업이 태산보다 더 안정스럽다고 여겨 감히 중간에서 진언하는 자가 없었다. 정언 문극겸(正言 文克謙) 공은 바로 임금이 계시는 곳의 문을 두드려 충간을 하는 글 한 통을 올렸는데, 말한 바가 당시의 병폐를 제대로 맞아서 다른 사람들이 봉이 아침해에 우는 것과 같다 하였다. 왕이 그 말을 들어 주지 않자, 공은 관복을 벗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한 편의 시를 지었다. 주운(朱雲)이 난간을 부러뜨린 것 명예 위해서 아니고, 원앙이 그 수레 가로막은 일 어찌 일신을 위함이었을까? 일편단심(一片丹心) 하늘이 비춰주지 아니하니 여윈 말 세차게 채찍질하며 물러가기를 머뭇거리노라.
명종왕이 등극하심에 이르러, 왕명의 출납을 맡는 자리에 발탁(拔擺)되었는데, 국가의 편안함과 위태함, 백성의 이해(利害)와 사대부(士大夫)의 어짐과 못됨을 다 왕께 아뢰고 추호()라도 막힌 것이 없었다. 이제것 이웃 나라와 우호관계를 맺어 안팎으로 편안하고 환란이 없었으니 이는 실로 공의 공로라 아니할 수 없다. 공이 총재(이부상서)의 지위에서 나를 옥당(玉堂 : 홍문관)으로 들어가 왕을 모시게 천거했었는데 일년이 지나서 공은 세상을 떠나셨다.나는 만시를 지어 다음과 같이 기렸다.(8구중 파한집에 3구~6구가 있고 나머지는 동문선에서 발췌)
영특한 그 모습이 상대성(上臺星)을 응했었고 옥병의 얼음같이 그 마음 깨끗했네. 일찍이 대궐문의 구름을 헤치어 외치었고 늘그막에 우연(虜湖)에서 해를 돌이켰네. 단봉(丹鳳)은 오래도록 못(池 : 中書省) 위에서 목욕하였는데 흰닭(신유년을 뜻함)은 어찌하여 꿈 속에서 재촉했나. 사조(謝跳)의 '푸른 이끼' 시구(詩句)만이 남아서 온 세상 만인(萬人)의 입에 우뢰같이 전하네. 당시의 사람들이 말하길 "공이 벼슬길에서 지킨 절개의 처음과 끝은 이 두 시구에서 벗어남이 없으니, 비록 그 분의 실록(實錄)이라 해도 좋겠다. "하였다. 어제 공의 옛 별장(別莊)을 지나다 보니, 풀과 나무가 무성하고 샘물이 돌들에서 나오는데, 공이 평소 노시던 곳이다. 나는 슬프게 여겨 배회하면서 차마 떠나지를 못하고, 시를 지어 벽에 써 두었다.
바위 밑 찬 물줄기, 감돌아 흐름이 무슨 생각 있는 듯하네. 빙설파(氷雪派)가 아직도 봉황지를 따름을 누가 알리오. 동각(東閣)을 거듭 엿봄이요 서문(西門))에 날 저물려 할 때로다. 시를 지어 벽 절반에 써 두는 것은 저승의 임에게 알리려 함이로다. |
충숙공(忠肅公) 묘갈명(墓謁銘) |
1924년 4월 숭정대부 예조판서 겸 판의금부사 홍문관 제학 양산(楊山) 조득림(趙得林) 지음 |
선비가 굳은 마음과 변하지 않는 절개와 뛰어난 풍채를 지닌다면, 백세의 위에 떨치고 백세의 뒤에까지 듣는 자가 감동되어 일어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인데, 나는 고려의 문 충숙공(文忠肅公)에게서 그러함을 체험한다. 공의 이름은 극겸(克謙)이요, 자(字)는 덕병(德柄)이며, 남평군(南平郡)사람이다. 천성이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정직하였다 의종(談宗) 때에 과거에 급제해서 좌정언(左正言)이 되었는데, 왕의 정치가 정도를 잃자 공은 상소하여 극력 충간을 하였다. 그 언사가 지극히 정성스러웠으나 왕은 성내어 황주판관(藝州判官)으로 좌천시켜 버렸다 정중부난(鄭仲夫亂)이 일어나자 왕이 남쪽으로 귀양가며 말위에서 스스로 탄식하기를 "내가 만일 일찍부터 문 아무개(文某)의 말을 따랐더라면 어찌 오늘의 모욕이 있었으랴? 이제는 후회한들 소용이 없구나!"고 하였다 공은 왕에게 더 이상 충간을 할 수 없음을 알고는, 드디어 집으로 돌아갔는데 공주(公州) 유구역의 벽에다 시를 지어 썼던 바, 다음과 같았다. 주운(朱雲)이 난간을 부러뜨린 것 명예 위해서 아니었고 원앙(衰瑞)이 그 수레를 가로막은 일 어찌 일신을 위함이었을까? 이처럼 일편단심(一片丹心) 하늘이 비춰주지 아니하니, 여읜 말 세차게 채직질하며 물러가기를 머뭇거리노라.
그 후의 사람이 시를 보고 역의 벽에다 그림을 그렸는데 화공(盞工)은 그 당시에 묘한 솜씨를 갖춘 사람이었다. 그 화공은 관직에 있지 않은 한 남자가 말을 타고 산길을 따라 말고삐를 늦추어 잡고 천천히 가는 모습을 그렸는데 쓸쓸한 모습이었다. 그 그림을 보고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알아내지 못했는데도, 어느 한 도승이 보고 한탄하고 말하기를, "이것은 충간을 직책으로 하는 관원이 조정을 떠나는 그림이다. " 하고, 시를 적었는데, 벽 위에 어느 누가 이 그림을 그렸는가? 간관이 조정 떠나니 나라 일이 어찌 될까? 산승도 한번 보고 오히려 슬퍼지거늘 하물며 사대부인들 오죽이나 할 건가? 그 뒤에, 두 객이 이 시의 운(韻)에 맞추어 시를 처음 사람이 지은 것은 화재 예방 위해 굴뚝 굽히라는 옛말 생각 못하고, 화재 나서 머리를 데고난 뒤 후회한들 무슨 소용인가? 누가 이 간관(諫官) 조정 떠나는 그림 그렸나? 벽에 가득한 맑은 바람이 게으른 사람 격동시키네. 그 둘째 사람의 시는 다음과 같았다 흰옷에 누런 띠 띤 간판의 그림은, 이 사람 굴원(屈原)인가 미자(微子)인가? 임금의 잘못 바르게 하지 못하고 속절없이 조정 떠나니 모름지기 털끝만큼도 애를 쓰지 않았구나. 뒤에 중국의 장군으로 모씨(某氏)가 또한 차운(次韻)을 다음과 같이 지었다. '계로부터 신하(臣下)는 많은 편안을 꾀하나, 그 누가 죽은 후 역사에 기록될 줄 생각했을까? 문 재상(文宰相), 인의를 갖추었으니 해와 달같이 빛나는 장부가 되었네.
사관의 찬(贊)에 이르기를, "문 충숙공(文忠肅公)은 음탕한 짓을 함부로 하는 임금을 만나,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흘로 나서서 충간을 하였으니, 맑은 하늘에 우뢰와 서리치는 날의 추위도 그 열 열함에는 비유할 수 없는 것이었다. 관직에서 밀려났어도 그의 이름은 더욱 높아졌다. 조정을 떠나니 사람들이 다투어 칭송을 하고, 화공은 그림을 그리기에 이르렀으며, 산 속의 도승은 시를 을었다. 뛰어난 풍모와 굳은 절개는 천고에 빛나, 비록 흥하고 사나웠던 정중부(鄭仲夫) 같은 무리라 할지라도, 그의 이름을 듣고는 감히 해치지 못했으니, 주운(朱雲)이 난간을 부러뜨리고 원앙이 수레를 가로막고 충간했던 일보다도 더 나은 것이었도다. 고 했다.
서거정(徐居正) 이인로(李仁老) 등의 여러분이, 다 시문을 지어 그 자취를 실증했다. 점필재 김종직(金宗直)은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어 공이 있었던 옛터를 지나다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은 것은 "고려 국운이 중간에 글러져 왕은 바다 가운데가 거 처 되었었네 무관들은 서로 다투어 큰소리로 꾸짖는데, 문 재상 기등처럼 잘 버티었도다. 조종묘(祖宗廟)에 왕의 신위(神位) 편히 모시게 했던 온 나라에 벽상(壁上)이 빛나는도다. 길이 백성들 신망이 두터워지고 난세에 지조지궈 외로히 우뚝하였네." "자녀 낳고 딸을 시집 보냄에, 그 계책은 쇠처럼 굳세어 아첨하지 않았네 전주이씨 사위 삼아 이실(貳室)의 높음과 같이 되었도다. 뒤얽힌 뿌리는 의당 크게 무성할 것이요 태양은 서서히 나타나 밝혀지리라. 천만세에 큰 복이 있게 되었으니 임의 공명은 마땅히 새겨질 것이로다. "
그 분은 벼슬이 평장사(平章事) 판호부사(判戶部事)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이르렀다가, 곧 중서(中書) 문하(門下) 두 성(省)의 시랑평장사(侍郎平章事)로서 판병부사(判兵部事)를 점하기도 했었다. 세 차례 과거를 주관하여, 뽑아낸 선비 중에 명사(名士)가 많으니 어진 재상이 라고 칭송받았다. 왕이 일직이 한 절구시(絶句詩)를 지어 하사한 바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 치 깊이 마음 속은 많은 일로 소란하다. 나날이 시름 걱정 깊어지는데 생각이 짧고 모자라 헤아리기 어렵고 다만 백발 수천만 올이 머리 위에 가득하도다 이 시를 받은 공은 그 운(韻)을 따라 지어 올렸는데, 그 시는 다음과 같다. 세월이 흘러가면 사리가 어둬지나 나라 일 도을 생각 날로 더욱 깊어지나이다 임금님 은혜 갚자 하나 이루지 못하옵고 무정한 백발만 머리 위에 가득하오이다.
명종 19년 9월 병인에 세상을 떠나니 나이가 68세였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라 했고 명종(明宗)의 묘정(廟庭)에 모셔 제사지냈다. 영남의 선비들이 삼가(三嘉)에 사당을 짓고, 그 이름을 송호서원(松湖)이라 했으며 묘는 충청도 공주 금계산(公州 金難山) 자락 갑좌의 언덕에 있다. 공의 조부는 이름을 익(翼)이요, 벼슬은 좌복야(左傑射)로서 시호는 경절(敬節)이었다. 부친의 이름은 공유(公裕)요, 벼슬은 지 문하성사(知門下省事) 집현전대학사(集賢殿大學士)를 지냈고, 시호는 경정(敬端)이었다 부인은 지추밀원사(知權密院事) 이시민(李時敏)의 따님이었다. 아들 셋을 두었으니 첫째는 후식으로 평장사를 증직 받았고, 둘째는 유필(惟弼)이니 평 장사였으며, 셋째는 유철(惟哲)이니 추밀원사(權密院使)였다. 딸은 전주이씨 (全州李氏)로 내시부(內侍府) 집주관(執奏官)인 인(璘)에게 시집갔다.
후손에는 강성군(江城君) 익점(益漸), 월천군(越川君) 빈(彬), 경흥군(慶興君) 봉상(鳳欄), 오천군(鰲川君) 회(晦), 오산군(鰲山君) 중용, 월성군(月城君) 이익(以翊), 월은군(月恩君) 사기, 오은군((鰲恩君) 윤중(允中), 백초당(自草堂) 삼, 풍암공(楓菴公) 위세(緯世), 동호공(東湖公) 덕교(德敎)가 있어, 다 도덕 ·학문 충 효 절의로 일세에 모범이 되어 천년토록 격려가 되어지니 조상의 유업을 계승하여 자취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다. 만력(萬歷) 경인년(庚寅年) 3월에, 공주의 진사(進士) 이치림(李致添)은 공을 위해 고간원기(記)를 지어 판목에 생명을 길게 해서 걸었었다. 그랬는데 고간원의 집채가 무너지고 그 터만 남아 있자, 지나는 사람들이 머뭇거리며 한탄한 지 오래였더니, 이제 공의 후손 세휘(世輝)가 재물을 모아 채석(採石)을 해서, 묘도(墓道)에다 세을 내력을 기록하려 함에, 나에게 비명(碑銘)을 요구하였다. 먼 조상을 추모하는 정성에는 떳떳이 마땅한 비명을 찬(撰)해야 할 일이어늘, 내 어찌 감히 사양하리오? 생각건대, 공의 사적은 고려사(高麗史) 및 동국여지승람에 자세히 실려 있어 세월이 천년을 지났는데도, 듣는 사람은 아직도 감동이 일어나는도다. |
충숙공 신도비명(神道碑銘) 병서(竝序) |
정사(丁巳) 세모(歲幕) 문학박사(文學博士) 이가원(李家源) 삼가 지음 |
가원(家源)은 일찍이 고려사를 읽다가 문충숙공(文忠肅公)의 사적에 이르러선 무릎을 치며 여러 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공이 젊었을 때에 날카로운 의기로 권세 부리는 간악한 무리 베기를 청하고, 궁중의 올바르지 못한 일을 규탄하므로 그 명성이 온 나라에 떨치었고, 면직되어 서울을 떠남에 청고(淸高)한 명망이 더욱 높아져서 영특한 풍모와 굳센 절의는 천추에 빛나게 되었다. 공의 묘소는 공주 추동 금계산 갑좌에 모시었는데 예전에 전해오던 신도비가 어느 시대엔가 없어졌으므로 이제 그 후손들이 다시 세우려 함에 종성(鍾誠)과 중대(重大)가 협력하고 일이 이루어지자 원모(元模)와 세훈(世勳)이 공의 실기(實記)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이 비명(碑銘)을 청하였다.
공의 휘는 극겸(克謙)이요 자는 덕병(德柄)이요 남평문씨(南平文氏)니 시조는 고려 태사(太師) 무성공(武成公) 다성(多省)이요 고려에 들어와 좌복야(左僅射) 경절공(敬節公) 익(翼)이 조부이시며 아버지 공유(公裕)는 지 문하성사(知門下省事) 집현전태학사(集賢嚴太學士)이며 시호는 경정(敬埼)이시다. 어머니는 장단한씨(長端韓氏)로서 평장사 문렬공(文烈公) 안인(安仁)의 따님이시다.
공은 예종 17년(1123)에 전남 나주군 남평면에서 탄생 하셨으며, 백부 공인(公仁)의 공으로 산정도감판관의 직을 얻었다. 당시의 제도에 평민으로는 열 번이라도 과거에 응시할 수 있으나 부조(父祖)의 공으로 음직에 있는 사람은 세 번 이상 응시하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공은 여러 번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였다. 이에 그 제도의 타당치 못함을 개탄하고 다섯 번까지 응시하게 해 줄 것을 청원하며 조정의 의논이 이를 따랐다. 그 후 공은 벼슬길에 있으면서도 학업을 멈추지 아니하여 의종 12년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여러 벼슬을 거쳐 좌정언(左正言)에 이르렀으며, 의종 17년에 상소하여 말하기를 (상소내용과 이하 내용은 문극겸전에 있으므로 생략함)"
그 후 명종 19년(1189) 9월 병인일에 68세로 돌아가시니 왕이 3일간 조회를 보지 않고 충숙(忠肅)의 시호를 내렸다. 부인은 이씨(李氏)니 추밀원사 시민(時敏)의 따님이시다. 삼남 삼녀를 두었으니 아들로 후식은 증평장사(贈平章事)이고 유필은 평장사이며 유철은 추밀원사이다. 사위로 임부(任博)는 태상경이요 차거수(車擧首)는 태복시사이며 이인(李璘)은 내시부집주관이다. 신종 5년에 명종묘(明宗廟)에 배향되었으며 후에 고간원(端談院)을 사액하고 송호(松湖) 저산(樹山) 장연(長測)의 여러 서원에 모셨다.
명(銘)하였으되 공주(公州)의 산하를 돌아보니 상서로운 기운이 울울히 서린 묘소가 있네 깊고 깊이 옥을 묻었으니 고려대(高麗代)의 꽃봉오리로다. 그 벼슬은 판이부사(判吏部事) 위계가 드높구나 그 시호는 충숙(忠肅)이라 나라로부터 애도와 영광을 갖춰 받았네. 처음에는 음보(蔭補)로 나가서 청운의 길 바야흐로 형통하니 남삼(藍植)입은 신분도 다섯 번 응시케 하자고 나라의 규례를 고쳐 놓았네. 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언론의 집에서 굳센 절의를 지켰네. 소인들 무리가 일어나 형벌 주고 복 주는 왕의 권능을 멋대로 행사할 때 용기 있고 강직한 공의 언론 구름을 헤치고 울려 퍼지다. 황주판관(黃州判官)으로서나 진주판관(晋州判官)으로서나 선정의 소리 무성했네. 중부(仲夫) 비록 사나웠으나 차마 고을 더 이상 해치지 못했네. 말 위에서 외로이 탄식하며 왕은 마침내 남쪽으로 귀양가고 새 왕의 첫 정사(政事)에 결재의 조목 써서 도우니 문신은 편안하게 되고 무신은 공에 의지하고 조정의 옛일도 공에게 자문했네. 왕이 주연에 빠짐에 간절히 화복의 기틀 아뢰었고 사공(司空)으로 좌천되자 청렴히 그 녹을 받지 않았네. 시월의 팔관 의식은 옛 전통 등진 무례함이 니 잘못이로다. 근거한 바 옳고 곧음이 남들의 흠모하는 바 되었네. 백발 둘이서 애달아 하여 임금이 지은 시에 신하는 화답했네. 둘 다 쇠하고 시들어 시의 가락 몹시도 구슬프고나 돌아와 이땅에 몸 붙인 지 아득한 팔백 년 자손들은 면면히 뻗어 있고 묘소의 나무들도 무성하구나. 이 높직한 빗돌에 새기니 나의 말 감개롭다. 뉘 감히 존경하지 않으리오 고려 왕조의 어진 이 재상을 |
3세 |
의성공(毅成公) 극순(克純) |
의종때 내사인이 되어 충환 정함의 합문지후를 거두라 상소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고 파직하여 귀향을 떠나시면서 왕정이 정함의 손에 떨어지고 정중부의 무리가 두렵다고 예언하시었고 정중부가 난을 일으킨 후 다시 불러 명종때 중준내급사로 계시다 71세에 별세하시니 대광보국 도첨의 정승을 증직함 |
4세 충렬공(忠烈公) 후식(侯軾) |
충숙공(忠肅公) 諱 극겸(克謙)의 장남으로 평장사 최선의 따님과 배혼 1137년 출생하시고 1177년(명종7년) 문과에 급제해 한림원 학사로 봉직하고 합문지후 이부시랑 전중내급사를 역임하고 1196년 대부경 동북면 지병마사가 되고 1199년 별세하시니 대광보국 상주국 평장사를 추증함 합문지후파의 파조이시니 아래에 충혜공파 충선공파 감천군파 남제군파로 분파된다.
|
4세 효혜공(孝惠公) 유필(惟弼) |
1151년 출생하시고 1177년(고려명종) 형 후식과 함께 문과에 급제하시다 1216년(고종 3년) 추밀원사로 있을때 부인인 채순희의 따님 광주채씨와 사별함 좌산기상시 어사대부를 거치다. 1220년(고종7년) 안서(황해도 해주)부사가 되어 뇌물을 받아먹는 풍습을 단속하고 1221년(고종8년) 수사공 좌복사를 거쳐 1222년(고종9) 지문하성사가 됨 조석의난 때 왕을 모시고 물러나지 않으므로 왕이 빠른 바람이 불어야 굳센 풀을 알 수 있다고 칭송함 1228년(고종15년) 11월 지문하성사로 봉직하시다 78세로 별세 하시니 왕은 3일 동안 조회를 폐하였다 증직 : 대광보국 숭록대부 상주국 평장사 태자 소사 시호는 효혜로 내리시고 순평(順平:남평)부원군(府院君)이시다. 순평군파의 파조로서 순평은 현재의 남평, 아래에 후순평군파(달한) 판도판서공파(근)로 분파된다 장연서원과 송호서원에서 제향함 |
4세 |
유철(惟哲) |
지문하성사 좌정언 추밀원사를 지내시다 후손없으시다 |
4세 |
정식(廷軾) |
좌대언 평장사 역임 후손 없으시다 이규보와 친해 전해지는 시는 사모하는 깊은 정이 늘어 다시 슲더니 감격하다 그대 오늘 기꺼이 찾아오네 알네라 이달에 흐르는 샘 못에 차면 또다시 지나면서 술잔 띠울것을 |
4세 |
효식(孝軾) |
우보궐 복야를 지내고 지밀직사 병부전서 상장군을 지내셨으나 후손은 없으시다. 통헌에 봉해짐 공이 왕에게 3회이 물러감을 청함에 임금이 윤허한 글이 경이 상소를 보매 늙어 물러감을 청함이 마땅하니 필시 번잡한 사무를 싫어하여 일찍 물러가려 할 뿐이요 결코 사실이 아니다. 그러나 옷을 떨치며 벼슬 마다하는 높은 태도는 대개 세상을 바로잡아 탐내는자를 격동시키려 함이라 |
5세 합문지후파 |
정(挺)1 일명 탄(誕) 충익공(忠翊公) |
1212년(강종1년) 정순대부 판전교사 보문각 집현전 제학을 지내셨고 고종때 별세하시니 대광보국 상주국 평장사를 추증하다 부인은 평장사 문화유씨 성후의 따님 |
5세 착(言卓) |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www.ikjum.com%2Fphoto%2Finmul%2Fnamjei31.jpg) |
가나군(加那君) 시호: 사간공 호: 남제(南濟) 일명 綽(작) 고려 의종14년(1160) 출생하시어 문장이 세성을 떨치었으며 명종14년(1184) 문과 급제해 좌정언이 되었으며 점차 승진하여 병마대원수가 되었으며 명종24(1194) 대제학으로 왕명으로 탐라에 들어와 예악과 문물을 선화하였으며 왕이 그 공을 칭찬하여 상주국평장사를 제수하고 가나군을 봉하여 시호를 사간이라 하였다.
탐라지 성씨부에 이르기를 처음에는 보성군 복성현 사람인데 탐라에와서 고씨에게 장가들었다
제주도 입도조로 남제공 부터 9대에 이르기 까지 추모하는 탑을 북제주군 애월면 하가리에 건립하고 4월5일 추모제를 올리고 있다 |
5세 순평군파 |
정2(言正 ) 정민공(貞敏公) |
고려 충렬왕때 광정대부 검교 추밀원사를 지내시고 정민이라는 시호를 받으시고 부인은 평강채씨 인계님의 따님 부인의 외갓집 후손종에 최영장군이 있다 |
6세 합문지후파 |
중연仲連 |
벽상공신상주국문하시랑을 지내시다(대동보) 고려 충렬왕때 광정대부 검교 추밀원사를 지내시고 정민이라는 시호를 받으시고 부인은 평강채씨 인계님의 따님 부인의 외갓집 후손종에 최영장군이 있다 |
6세 남제공파 |
양부(陽夫) 장숙공(章淑公) 일명 : 양부(陽富) |
1176(명종6년) 출생하시어 명종23(1193) 과거에 급제하여 1198(신종원년)참지정사 좌정언 참지정사에 오르고 문무지략과 융기가 겸전하였으므로 용호대장군으로 누진한 다음 병마 대원수됨 1208(희종4) 문양부에게 왜구의 침략에 대비하도록 탐라국으로 군사를 발하도록 명령한 바 1212(강종원년)에 왕이 크게 근심하는 바를 해결하고 돌아오니 그 공을 칭찬하여 대사마 대중군 상주국공신 금자광록대부 동 평장사를 제수하였으며 이부상서를 추증함과 동시 특별히 가나군에 봉하고 시호를 장경공이라 하였는데 이 사적은 동국대전과 한훤당집에 실려져있다 -임신보의 기록내용이며 경신대동보 기록과 차이있슴 |
6세 판서공파 |
인위(仁渭) |
벼슬이 충선왕 때 봉순대부 대부소경을 지내고 상장군 공부상서 역임 우복야 참지정사 및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에 이르렀으며 신유년에 돌아가시다(대동보)≪新增東國輿地勝覽 제43권 黃海道 長淵縣 人物 高麗≫
오랫동안 천추궁(千秋宮:千秋太后의 宮)의 사(使)로 있었는데 성실하고 겉치레가 없어 김치양(金致陽)의 난에 화를 면하였으며 김치양의 무리가 숙청될 때 천추궁의 궁료(宮僚)가 많이 연좌되어 죽고 귀양갔으나, 문인위만은 강조(康兆)의 도움으로 죽음을 면하였다.
<신종우 인명사전은 연대가 맞지 않으나 소개하면> 1009년(현종 즉위년) 공부상서(工部尙書 정3품)가 되고, 2년 뒤인 1011년 우복야(右僕射)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으며, 1019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로 타계하셨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