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소화가 있는 풍경/이호규
새로 단장한 ‘원이 엄마 테마공원’에는 원이 엄마가 없었다. 다만 길 건너 작은 빈터에 미투리를 든 원이 엄마 동상이 있었다. 주변에는 능소화가 푸른 덩굴에 쌓여 주황빛으로 한창 여름을 피우고 있었다.
십여 년 전, 우리 가족은 이 동상 앞에서 가족사진을 찍은 적이 있었다. 그해 여름에 집안 삼대 식구들이 강원도에서 휴가를 보내고 내려오는 길이었다. 아버지께서 갑자기 안동에 잠깐 들어갔다가 가자고 하셨다. 그곳이 바로 원이 엄마 동상이었다. 유교를 신앙처럼 받들고 살아오신 아버지는 늘 선조의 유적지를 방문하는 것을 좋아하셨다. 그 당시에 고성 이 씨 가문에서는 원이 엄마의 한글 편지로 인해 무척 흥분해 있었던 것 같다.
1998년, 안동시에서 정상지구 택지개발 사업을 하게 되었다. 당시 이응태 일가의 3대 4위의 유택을 안동시 풍천면으로 이장 천묘하게 되었다. 이때 이응태의 묘에서 미라와 함께 상당량의 껴묻거리(副葬品)가 나왔다. 형 몽태가 동생을 애도하며 쓴 시(詩), 평소에 부친으로부터 받은 편지글, 부인이 자신의 머리카락과 삼 껍질을 꼬아 만든 미투리와 애정 서간문(愛情書簡文), 아들 원이가 입던 옷과 부인의 치마 40여 벌 등이었다. 그 부장품 중에서 세간의 큰 주목을 받은 것은 이응태 부인인 원이 엄마가 쓴 한글 편지와 미투리였다.
사후 421년 만에 발견된 한글 편지와 미투리. 젊은 나이에 요절한 남편을 그리워하며 머리카락으로 엮은 미투리 한 켤레와 이름 모를 여인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는 세상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특히 120년의 출판 역사를 가진 내셔널지오그래픽에서 '사랑의 미투리'라는 제목으로 나간 기사로 인해 일약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되었다.
이 편지는 국문학사적으로나 한글 변천 과정을 살필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사료라고도 했다. 안동대학교 박물관에는 미투리 한 켤레와 한글 편지를 비롯한 여러 가지 부장품들을 한쪽 코너에 전시해 놓았다.
원이 엄마 테마공원에는 유난히 능소화가 많았다. 우리 시골집 우물가에도 능소화 한 그루가 해마다 만발했다. 능소화는 혼자서 일어설 수 없어 더불어 피어나는 담쟁이덩굴과 나무다. 7~8월경에 나팔꽃 같은 주황색 꽃을 피우는 이 꽃을 예전부터 양반꽃이라고 했다. 꽃이 떨어져도 끝까지 원래의 자태를 잃지 않는 품위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원이 엄마를 모티브로 한 '능소화'라는 소설이 출간된 적이 있다.
그 무렵 시골집에 자주 들르시는 형수님이 약간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이야기를 전했다. 어머니를 먼저 보낸 아버님이 요즈음 조금 이상하신 것 같다는 것이다. 언제부터인지 노인네가 자주 어머니 산소 앞에서 멍하게 앉아 계신다고 했다. 듣고 보니 살짝 걱정되었다. 늘 정신이 맑으신 분이 그럴 리가 없다고 믿고 있었지만 그래도 모를 일이었다. 평소에 살갑게 대하지 않으시던 부부의 정이 그리우신가? 아니면 자식들의 정성이 부족한 탓인가?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혼자 오래 지내시니 너무 외로우신가 싶기도 했다.
한참 지나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예전에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우리 시골 동네에서 어느 방송국의 '싱싱 고향별곡'이라는 프로그램을 촬영한 적이 있었다. 노인정에서 단체 인터뷰 할 때는 부모님의 수십 년 전의 에피소드가 사랑방으로 소환되기도 했었다. 도로가에 자리 잡고 있는 우리 집에 들어와 상당 분량을 촬영도 했다. 그리고 십여 년이 지나 그 방송국에서 '다시, 마실 갑니다.'라는 프로그램으로 우리 고향에 재촬영이 나온 후 방영되었다. 한참 지나 형님이 영상 파일을 보내왔다.
텅 빈 마당에서 아버지 혼자 인터뷰하고 계셨다. 진행자는 아픈 곳을 자꾸 질문했다. 경상도 사나이처럼 털털한 진행자는 아버지의 옛 정서를 슬쩍슬쩍 건드렸다.
“지금까지 살아오시면서 누구한테 제일 미안했습니까?” “지금 옆에 계시면 어떤 말을 해주시고 싶습니까?” ‘할머니 산소에 찾아가 미안하다고 사과는 했습니까?’
이렇게 저렇게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찔렀다. 90이 넘은 노인네 입에서 되돌릴 수 없는 한숨과 죄스러운 표정이 역력했다. 아, 그래서 어머님 산소를 찾아 하염없이 앉았다가 오시는 것이었구나. 이승에서 나누지 못한 애틋한 마음을 저승에 계신 어머니한테 무언의 소리로 통곡하셨는지도 모르겠다.
얼마 후, 싱거운 소리를 잘하는 동생이 넌지시 물었다.
“아부지! 엄마가 보고 싶은 모양이지요?”
“이제 와 돌아보니 내가 너거 엄마 살아있을 때 너무 모질게 대한 것 같아 맴이 마이 아프다”
구순 노인네 입에서 나온 이야기가 너무나 사무치게 들려 왔다. 결혼 후 70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6년이 지나서 느끼시는 진심의 소회였다. 그러나 한 사람은 영영 떠났고, 다시 한 번 따뜻하게 손잡아 줄 수 없는 노릇이라 더 애달픈 것 같았다. 어머니 산소 앞에서 진한 눈물이 나오더라고 하셨다. 우리 가족은 모두 닭똥 같은 눈물을 소리 없이 흘렸다.
우리 부모 세대는 모두 어려운 시기를 보냈다. 경상도 남정네들은 특히 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살았다. 따뜻한 말 한마디, 살갑게 손 한 번 제대로 잡아주지 못하고 그렇게 세상 인연을 마감했다.
아버지의 “맴이 아프다.”라는 말씀을 듣는 우리의 가슴도 아리고 아팠다. 421년 전, 원이 엄마가 먼저 떠난 젊은 남편을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남긴 애절한 편지만큼은 아니지만, 먼 곳으로 떠난 아내가 그리워 홀로 산소를 찾아 뜨거운 마음의 눈물을 흘린 모습을 우리는 오해했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한마디 말씀이 더 뭉클하게 했다.
“너거는 지금부터라도 잘해라!”
앞산 너머로 흘러가는 하얀 뭉게구름이 능소화 닮은 어머니처럼 설핏 미소 짓고 가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