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트 3개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관광 기
2019년 7월 7일부터 7월 15일 까지 7박9일간 북유럽 발트 3국을 고교동기생 백석 회 6명 부부가 3번 째 부부여행을 다녀왔다. 이 모임은 71년 결성해 우리들 애경사와 아이들 혼사 마치고 이제 모두 손주들이 크고 있으니 근 50년이 된 모임인데 이번이 3번 째 해외여행이다. 이제는 사는 곳이 전국으로 흩트려져 무주, 용인, 홍천, 서울, 청주 등에서 각각 개성에 맞는 일들을 하면서 제2인생을 살고 있다. 인천 제2터미널이 생기고 이용했는데 출입국 신고가 자동화되어 여권을 먼저 출입국기기에 대고 통과하면, 두 번째 기기에서 오른손 검지로 그 사람인가를 다시 자동인식하면서 출입국신고가 끝이다. 물론 먼저 수화물 검사포함 안전검사를 마쳐야 한다. 그리고 나는 곧바로 면세구역이다. 출입국검사시간은 단축되어 이제는 3시간 전에 공항에 갈 필요가 없을듯하다 1시간 반이면 남을 것이다. 대면기기로 자동 비행기 표와 자리를 배정 받아 큰 짐을 부치는데 여기는 무게를 달아야 하니 사람이 있다. 아직은 대면기기 무인 비행기표발급기에 서툰 우리 같은 65세 이상 세대를 위해 알바 생들이 도와준다. 사람의 직업이 없어지고, 로봇 화는 우리 생활 속에도 많이 파고 들었다.
가족 중에는 손주가 생겨서 제일 먼저 손주 과자를 사고, 며느리와 마누라 화장품을 사고 남은 시간은 가져간 책을 읽고 대기를 하다 탑승을 했다. 두 번의 기내식이 나오고 우리를 지는 해를 따라 서쪽으로 향한다. 비행기는 중국과 중앙아시아를 거쳐 소련 영공을 지나 목적지 상트페테르부르크 의 풀코브 공항에 착륙했다. 이 공항이 이 지역의 공용주차장이므로 모든 마차와 비행기 들이 이 도시에서 출발을 하는 대도시다. 인구가 500만 명이 되는 러시아의 제2의 관문이니 당연한 일이다. 공항에서 걸어 서도 자고 갈 Park inn hotel이 있어 방을 받아 투숙해도 밖은 훤하다. 가져간 pc연결해 한국 소식을 흩는다. 이 지역은 백야로 낮은 길고 밤은 짧아 밤 10시에 지고 새벽 4시에 일어나니 훤하다.
2일차여행의 시작은 버스타기부터다. 조식 후 러시아 검문소를 향해 출발한다. 예비검문소에서 애송이 소년병이 여권을 보고 지나간다. 그리고 국경출입국사무소에서 짐을 내리고 가방을 들고 입국비자를 받아서 통과 한다. 사회주의 관리는 국민을 통제하기 위해 있는 것이지 출입국 하는 사람에 편의를 제공하려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한 위대한 사회주의 공무원들이다. 보지도 않은 짐 싸 다시 들고 버스에 탑승한 첫 방문국 에스토니아 출입국사무소 입국의 절차는 여권을 운전사가 걷어가 입국 스탬프 찍어오면서 통과다. 유로죤 일원이 되어 들어오는 관광객을 위한 배려인가보다. 국경은 narva강을 경계로 다리를 건너니 중세의 성곽이 나온다. 이반 코로스 요새다. 톰베이 성내의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것까지가 오전 일정이다. 콩 수프와 검은 빵, 닭 가슴살 스테이크, 식당 밖의 현지 꼬마들의 웃음소리가 싱그럽다. 식당 옆 구석에 옮겨둔 레닌의 초라한 동상이 창고를 쳐다보고 있음에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다시 승차하여 에스토니아의 수도인 tallinn으로 갔다. 이곳의 풍경은 도로 양 내내 지평선이 보이는 평원의 초지뿐이다.
타린의 swissotel에 짐을 맡기고 시내의 고성인 60m높이의 알렉산드네스키 성당의 원형돌계단을 어두운 데 줄을 당기면서 한참 올라간다. 계단의 높이가 자연석을 떼어낸 대로 높낮이가 달라서 고역이다. 1400년대에 쌓은 계단이 달고 달아서 맨들 거린다. 시내를 60m 높이에서 조망한다. 멀리 북해바다엔 대형 크루즈 선박이 떠있고 한 대는 출항을 막하고 있다. 하늘이 맑아서 도시는 한 눈에 들어오는 장관이다. 고성에서 촬영하다 사진기가 말썽을 피워서 고장이 난다. 저녁을 시내 광장의 옛 식당에서 했는데 전식으로도 포식을 했는데 메인을 보고 놀랐다. 우리나라 돼지 족발인데 엄청난 크기로 1/10도 못 먹고 내보냈다.
3일차에 러시아 황실의 휴양지 “카드리오르그”궁으로 향했다. 이곳은 아직도 대통령의 궁으로 쓰이고 경비병이 있다. 우리는 화장실 WC를 워싱턴 칼리지의 약자인 WC로 개칭을 해서 화장실을 부르고 급한 사람은 조기입학을 원하는 사람으로 통칭하기 시작했다. 가이드 최 대석 씨의 위트다. 이곳의 평민의 집들은 나무널판 집이 흔했다. 주민의 머리색은 갈색머리다. 금발이나 흑색도 보이는데 이는 염색을 한 머리색이란다. 구 시내 광장에서 무슨 축제가 열리는지 각 나라별로 고유의 민족의상을 입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성 베르도 성당은 무슨 행사가 있어 올라가지 못하고 주변의 광장만 돌았다. 호텔에서 바라보는 시내의 풍경이 좋았다. 비슷비슷한 크기의 건물이 3개다.
4일차 “요한애르스터 비론”이 1760년에 지은 바르크시대의 양식 풍의 건물은 벽과 천정에 장식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유럽이 식민지를 개척하여 엄청난 치부를 할 때다. 현지에서 1원에 산 후추를 2000원에 2000배 이득을 보고 판매 할 때, 돈 걱정 없이 마음 놓고 지은 집이란 듯이 서있다. 이곳은 아이를 낳으면 황새가 물어다 줬다고 얘기를 한단다. 건물 천정은 많은 그림이 있다 地水火風을 부조로 나타냈다. 바르크 시대에서 금박을 칠한 로크크 시대로 변한다. 쉬바로프 왕부터다. 강가의 쉬바로프 왕비의 작은 궁전에서 식사를 하고 맑은 물가의 뜬 다리에서 사진을 몇 장담은 뒤. 리투아니아로 넘어 간다. 발트 3국 중 가장 남쪽이고 민족기질이 저항적인 민족으로 인구도 가장 많은 300만 명이다. 이 나라는 기독교가 가장 늦은 1200년대에 들어와 기독교국이 되었으나 가장 독실한 기독교국으로 소련에서 제일 먼저 떨어져 나와 독립을 한 나라다. 만약 소련이 전쟁을 벌여서 국토를 넓힌다면 제일 먼저 얻어터질 나라로 지목된 나라다. 십자가 언덕이 국경근처에 있다. 언덕도 아닌 에그후라이 정도의 둔덕이다. 이곳은 종교탄압의 역사에 굴하지 않은 사람들의 정신의 표상으로 러시아와 소련의 핍박을 이겨낸 리투아니아의 정신의 표상인 셈이다.
발트여행기 –1
2019.07.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