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장 선화 후
1. 선화 하시는 날, 용화동 우물이 바닥이나
동리사람들이 3일동안 「생명수」라 하신 우물을 사용하였다.
2. 선화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이규한이 찾아뵈오니, 눈을 뜨셨기에
목메여 울어대니 옆에 사람들이 “솜리는 더 슬퍼하겠다”는 얘기를 하여
더욱 서러워 울다가 밖에 나오니,
안에서 여종도들의 본주님 눈감으셨다는 소리가 들리는 순간 6개월전(6.23)
「좀 늦었다. 어데로 가야 편 할고」하시던 말씀이 생각나
‘그것은 선화하신다는 것을 미리 일러주신 것’임을 깨달았다.
3. 12월 보름경 등잔댁이 ‘경상도 다녀오겠다’고 아뢰오니
「내가 팔다리가 아프니 빨리 다녀오너라」하시어 “예”하고 갔었는데
23일 새벽 꿈에 ‘땅속에서 병이 나오더니,
병속에 사내 아이가 있어, 신기한 일이니 나라에 바치겠다‘고 하오니
신선같은 노인이 ‘부인의 원장한테 데려다 주라’고 하여 “예”하고 답하니 꿈이었다.
그날 용화동에 큰 공사가 있음을 깨닫고 새벽같이 서둘러 돌아오니,
선화하셨다고 하면서 어제 본주님께서 「등잔 안오나」하시며
여러번 찾으셨다 한다.
4. 전남 근방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밤중에 공중에서 상여소리가 나기에 밖에 나가보니
“큰 백합꽃 상여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떠나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후 얼마 안되어 선화 소식을 듣고 달려와 이야기함(원장 부인의 말)
5. 본주님 선화하신후 105일장으로 결의하고 생존시 거처 하신 옷방에 가빈하였다.
날마다 수백명의 종도가 분향 하였으며,
날이 갈수록 냄새가 나지 않을까 걱정을 했는데, 향내가 나고 깨끗하니
따르는 종도들의 마음이 흐뭇했다.
출상날 젊은 종도들이 관을 운구하려고 들어 올리니,
관이 깨끗하여 여러 종도들이 감탄했다.
이날 출상하는 광경을 보고자 멀리서 모여든 종도들과 일반인들 수천명이 동리를 메웠다.
상여는 3층으로 36명이 질서 정연하게 한복으로 차려입고,
시천주와 태을주를 외우니 종도들의 눈물은 끝이 없이 흘러내렸다.
6. 시신은 김제군 금산면 금산리 모악산하 계룡봉에 안장하였다.
(「증산 상제께서 생존시 안필성과 같이 길을 걸으시다가, “좋다 좋다” 거듭 말씀했던 자리」라고
안필성이 말하니,
“원장이 우리가 땅을 사서 모신자리이니 그리 알라” 하니 체념하고 돌아갔다 한다)
7. 선화하신후 3년동안 진단방우가 매일같이 한두번씩 순찰하고
때로는 묘소 앞에서 잠을 자기도 하다가 삼년이 넘어서 진단이도 죽어 묻었다.
8. 선화하신 이듬해 대나무가 꽃이 피고 열매를 맺더니 거의 죽었는데
이런 현상은 용화동 뿐만이 아니라 전국 곳곳에서 일어났다.
9. 경북 경산에서 3년여동안 밤마다 상여소리가 나며
하늘이 빨갛고 앞뒤에 불이 환하여 마치 비행기 가는것 같이 보였다 한다.
(서진화 종도와 여러 종도들의 증언)
10. 김순덕 종도가 꿈을 꾸었는데
“3층으로 집을 지었는데 묘소가 그 안에 있고,
그 부근은 돌담으로 한바퀴 돌려 있었다” 한다.
11. 본주님께서 원지방 배밭에 「집지을 곳」이라고 일러주신 장소에서
한영자 종도가 밭을 매다가 호미로 찍으니,
누런 옥수수가 흙도 묻지 않고 나오기에
파면 팔수록 많이 들어 있기에 좋아라 하다가 깨어보니 꿈이었다.
12. 임상화 종도가 꿈을 꾸었는데
‘용화동 입구 팔정이 다리 옆에서 성문이 있고 산중턱까지 성이 한바퀴 돌려 있는데
위에는 미륵당 부근까지 둘러 싸여 있었다‘ 한다.
13. 인정상관님께서 선화하신후,
생시에 천상에서 황금가마를 타고 내려 오셨는데
잡으려 하면 잡힐듯 말듯 하던 중에 신령을 얻었다고 한다.
그후 사람들을 치병을 하면 완치되었고
소문이 퍼져 하루에도 수만명에 이르니,
‘진동마을이 아니라 흰둥마을로 바꾸자고 한 사람도 있었다’ 한다.
이때에 철도국에서는 교통상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임시 열차까지도 운행하였고 임시역까지도 만들었다 한다.
그곳은 지금도 오가는 사람이 많으며 한 때 기운을 받았다고 말한다.
14. 생존제자 박공우 선생 부인말에 의하면
“선화 하셨어도 잘들 믿어라. 얼마전 우리 도생들끼리 수련하는데
본주 님이 보이시는데 천상의 관세음보살로 보이시며,
금빛 찬란한 가운데 어마어마하게 보였다.
생존시 초라한 모습으로 계시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왔는데
천상에서 보니 그렇게도 무서운 어른인 줄을 몰랐다" 하며
이말을 전하기 위해 왔다 한다.(여러 종도들이 있을때 잘 믿으라고 하며 돌아갔다)
15. 본주님께서 선화하신지 20년만에 이장을 하는데,
각 파 간에 찬성 또는 반대가 많아 옥신각신 하며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을때,
유완종 종도가 수련후 지리에 마음이 열려
그의 말을 믿는 몇몇 종도들이 새벽에 나가서 파묘를 하니,
체백이 좋지 않아 반대했던 사람들도 말없이 진행하였다.
간단한 유물과 금패물을 수십명이 찾아 보았으나
눈에 띠지 않아 어찌할 수 없어 돌아왔다가
이튿날 생존시 열쇠 찾으라고 하셨던 이규한이
어제는 옥 신각신하여 가지 않았으나 오늘은 가봐야 하겠다고 묘소를 향하니
유완종, 한강수, 이덕원 등이 같이 갔는데,
오르자마자 “저게 무엇인고” 이규한이 말하니,
“한강수가 어제 찾던 금패물이 저기 보이네 하여 똑같이 바라보니
그렇게도 어제 찾아도 없더니 바로 그곳에 있네” 하여 만세를 부르고
금패물은 이덕원씨가 보관하고 열쇠는 이규한씨가 보관하고 있다.
16. 묘소
모악산 기두 을병정 3개룡에 축간용 계룡봉 결인
태극계장 을묘룡 손사입수 묘좌유향 축사(축상병득 ×) 신(辛)파
17. 병오년 7월 5일 이웃집 탁장환 부인이 발바닥에 습창이 나서 백약이 무효터니
그날 본인은 문병차 갔었는데 어떤 노인이 오셨다.
자세히 보니 상관님이셨다.
발을 상하로 씻어주며 「병이 다 나았다」 하시고
책보를 끌러주시며 나더러 「보라」 하시고
「공부는 이공부를 마쳐야 끝난다」 하시는데,
통싱통령 주문과 윷판을 그렸는데,
몇 백년전 장지에 고운 때가 묻었었다.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구리골 넘어 동네로 간다」 하시더니
순간에 인홀불견(因忽不見)하였다.
18. 병오년 7월 7일 참선중,
「선인(仙人) 5인(五人)이 나타나
일본사국(日本四國) 구주(九州)에서 세계천지판대회(世界天地板大會)가 있으니 가자」 하며
「우리는 구경하고 서구열은 출전을 해야 한다」 하며
동행하여 일본(日本) 구주(九州)를 지나 사국(四國)이라 하는데
건해산 백제봉이 산세수려하고 봉우리는 흰바위로 되었는데,
돼지 발톱처럼 생겼더라.
그 산 아래는 둥근 무극처럼 생긴 육지가 있고 강물이 둘러 있었다.
한 노인이 윷방석을 펴놓았다.
옷을 주며 6人이 노는데,
‘누구든지 모걸로 가든지 숫모토를 하여 뒷구멍으로 가도 안되며
한바퀴를 도는 사람 이 장원이라‘ 하였다.
나는 한바퀴를 두번 숫과모를 하고 걸을 했더니 구열이 장원이니
‘옷과 판을 상으로 준다하며 갖으라 하고 자기 들은 본국(本國)으로 간다’하였다.
그후 해석해 보니 윷놀이는 춘하추동 오행놀이로 깨달았다.
19. 서구열 종도의 말에 의하면
본주님께서 <조가선의소(醫家先忍所)>라 쓰시며 「육임을 조직하라」 하시고
「읽어보라」 하시여 ‘醫자’ 를 ‘의자’로 읽으니, ‘놀릴조’라 하시고
자’를 모른다고 하오니 ‘뽑을 의자’ 라고 말씀하시어
「‘조가선의소’라 읽어라」 하시고 「때가 되었으니 일하라」 하셨다한다.
20. 김우석 종도의 말에 의하면
“귀부인이 찾는다” 하여 꼬마 동자가 “따라오라”하여 가서보니
「전할 말이 있어 오라했다」 하며,
지난 경자(庚子 1900, 1960)년에 “천상에서 인정상관님이 당선되었다” 고 전하며
“만날사람 보았으니 금병산으로 간다”하며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한다.
21. 인정상관님 출생지를 찾아 탄강내력을 알고 싶어
유완종 선배님과 함양 황석산 일대를 수소문 했으나 알지 못하고
진주 모 여관에서 잠을 자는데,
필자(김정화)의 꿈에 인정상관님 출생지를 일러 주시는데 어데인지 한 참 가다보니
‘여기가 화심동이라’고 하시고 흙절벽이 수십장 높이 있는데,
“흙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면 두칸집에 계신다”고 하시여,
이튿날 수소문하여 하동읍 화심동 여종모 영감님(인정상관님 당질)을
밤늦게 찾아뵙고 알게 되였다.
<참고자료>
화심동(花心洞): 1750년경 의령 여씨(宜寧余氏)가 정착하여 세거하면서 광비등(光碑嶝) 또는 화심(和深)이라 칭하였다가,
1872년 마을 지형이 풍수지리상 화심(花心) 형국이므로 화심동(花心洞)으로 바꾸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정동(井洞)·화심동·신촌동(新村洞)·선장동(仙掌洞), 전라남도 광양군 다압면(多鴨面) 섬진리(蟾津里) 만지가 통합되어, 하동읍 화심리가 되었다. [출처] 향토문화전자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