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일본ㆍ중국ㆍ프랑스의 날씨
1) 일본
일본에서는 날씨보다 먼저 화산과 지진을 염려해야 한다. 화산 폭발은 직접 당하지 않았지만, 일본에 가 있는 동안 지진이 일어난 것은 여러 번 겪었다. 한 번은 백화점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을 때에 갑자기 발밑이 흔들렸다. 놀라고 당황해 어쩔 줄 몰랐는데, 주위의 일본인들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차분했다. 이미 많이 겪어 훈련이 잘 되어 있는 것을 알고 존경하는 마음이 생겼다.
2011년 후쿠시마(福島) 일대에서 대지진이 일어나 큰 피해가 생긴 직후에, 예정한 일정을 바꾸지 못해 나고야(名古屋)에 가서 열흘쯤 머문 적 있다. 나고야는 피해 지역과 거리가 멀어 안전했다. 일상생활에 아무 변화가 없었으며, 언론에서 피해 상황을 차분하게 숫자를 들어 보도하는 것만 보았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당장 돌아오라는 전화가 빗발치게 왔다. 귀국해서 알고 보니, 한국 텔레비전에서는 피해 현장 화면을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고 계속 보여주면서 해설자가 목소리를 한껏 높였다.
일본은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태풍을 열 개쯤 맞는다. 피해가 극심할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 대비와 훈련이 잘 되어 있어 사상자가 적고, 도로, 교량, 건물 등이 많이 파괴되지 않는다. 불편한 일이 생겨도 아무도 불평을 하지 않는다. 정부가 잘못 한다고 나무라는 말이 없다. 국민 모두 자연재해를 잘 견디는 道士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일본에는 산이 많고, 산에는 나무가 많다. ‘杉’(스기)라고 하는 삼나무가 삼엄한 자세로 산을 덮고 있는 것이 장관이다. 그런데 그 꽃가루가 전국을 덮다시피 해서 숨이 막히고 머리가 아프게 하는 것도 재앙이라 텔레비전에서 날마다 예보를 한다. 나는 예상하지 못한 곤경을 한 달 동안 겪으면서 좋아하는 등산을 그만두어야 했다.
습기,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이것이 가장 심각한 재앙인 것을 겪어보고 알았다. 화산, 지진, 태풍 같은 거대 재앙은 운이 나빠야 만나지만, 습기가 많아 견디기 어려운 것은 어느 때든 누구나 피하지 못하는 일상적이고 지속적인 시련이다. 일본인은 예사로 여기고 조용하게 대처하지만, 견디기 아주 어려워 불만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습기를 제거하기 위해 더위가 오기 전에 에어컨을 틀어야 한다. 일조량이 부족하고 일교차가 크지 않아, 과일이나 채소가 맛이 없다. 한국에서 가져간 양념으로 김치를 제대로 잘 담가도 온전하게 숙성되지 않는다. 생각이 멍해지는 것을 어쩔 수 없다. 일본인 석학이 철학사상은 그리스나 조선처럼 건조한 곳에서나 생겨난다고 한 말을 오래 기억한다.
이른 봄, 늦가을에는 습기가 적어지고 잠시 날이 청명할 때가 있다. 이른 봄에 매화와 벚꽃이 피고, 늦가을에 단풍이 고우면, 일본인은 우울증을 완전히 걷어내고 고양된 기분으로 즐거움을 한껏 누린다. 집에 돌아가지 않고 밖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한다. 일본 구경은 그 때 가야 한다.
‘黃葉’이나 ‘紅葉’이라고 적고 ‘모미지’라고 읽는 단풍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다. 예전 노래 책 <<萬葉集>>에 ‘黃葉’에 대한 찬사가 되풀이되어 나온다. ‘落葉’이라는 단어도 있기는 하지만, <<萬葉集>>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떨어져 짓밟히는 것도 ‘落葉’이라고 하지 않고 ‘黃葉’이라고 했다.
2) 중국
일본에서는 ‘黃葉’이나 ‘紅葉’이라고 적고 ‘모미지’라고 읽는 단풍만 시에서 노래한다고 한 것을 중국의 경우와 비교해보자. 중국에는 ‘丹楓’이라는 말과 ‘落葉’이라는 말이 둘 다 있지만, 시에는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唐詩에서 사용한 용례를 찾아보기 어렵다. 단풍을 ‘紅葉’이라고도 한다.
중국은 단풍이나 낙엽이 그리 아름답지 않다. 北京 香山의 단풍을 자랑하지만, 가서 보면 들리는 말과 다르다. 산뜻한 느낌을 주지 않는 거무칙칙한 붉은 색이어서 실망스럽다. 다른 곳에 가서 더 좋은 색깔을 찾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중국인은 그런 붉은 색을 애호한다.
일본은 습기가 문제지만, 중국은 공기가 탁하다. 공기가 탁해 단풍 색이 곱지 않은 것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어서 색채 감각이 둔해졌다고 하면 실례되는 말인가? 청명하게 맑은 세상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왔다. 이제야 눈을 밖으로 돌려, 설악산이나 제주도를 와서 보고 이런 곳도 있구나 하고 놀란다.
중국에 가서 새 소리가 맑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이유를 물으니, 공기가 탁한 탓이라고 한다. 다른 나라 새 소리를 듣고 온 사람들은 차이점을 알고 있다. 새 소리가 맑지 않은데 사람은 무사한가?
北京에 두 번 가서 中央民族大學과 北京外國語大學에서 두 차례 집중 강의를 할 때 가장 좋다고 하는 10월을 택했어도 공기가 탁해 어려움을 겪었다. 일년 내내 살고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견디나? 그 인내력을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일본처럼 중국에도 지진이 자주 일어난다는 보도가 이어지고 있다. 지진 때문에 두 나라는 공통된 재앙을 겪고 있다. 그러면서 다른 재앙에서는 간과할 수 없는 차이점이 있다.
일본에 습기가 많은 것은 天災이지만, 중국 공기가 탁한 것은 人災이다. 기피하거나 나무라기만 하고 말 것이 아니다. 人災의 연원을 알아내고 해결을 위해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에 관해 나는 중국에서 강연하면서 한 말을 <<동아시아문명>>에 적었다.
문명을 일으키려면 자연자원을 과도하게 소비해 산림이 황폐해지는 것이 상례이다. 황하 유역의 문명으로 중국이 사막화가 되기 시작해 공기가 나빠졌다. 석탄으로 난방을 하고. 공장 매연이 방치되는 것은 후대에 추가된 이유이다. 산림이 황폐해 사막화되는 것은 중국의 잘못이라고 나무라고 말 일이 아니다. 다음과 같이 말하고 책에 적은 것을 인용한다.
· 한국은 같은 수난을 겪지 않고 문명의 성과를 활용하는 혜택을 누리니 미안하고 고맙게 생각해야 한다. 은혜에 보답하려면 동아시아문명을 더욱 발전시킨 성과를 마련해 중국에 제공하는 것이 마땅하다. 내 학문이 이런 의의를 조금이라고 가질 수 있기를 열망한다. 이번의 방문이 좋은 기회이다.
보답의 방법은 학문만이 아니고 더욱 직접적인 노력이 한층 절실하다. 중국의 탁한 공기가 한국에까지 밀어닥쳐 막대한 피해를 빚어내기까지 하니 공동의 노력으로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중국의 사막화가 더 진행되지 않도록 하는 造林에 협력해야 하고, 물이 적어도 잘 자라게 나무 종자를 개량하는 연구에 몰두해야 한다.
중국은 날씨와 관련된 생활도 국가에서 통제한다. 섭씨 40도가 넘으면 모든 일을 쉬도록 하고, 40도 이상을 39도로 발표한다는 비난을 듣는다. 북경에서는 11월 1일 이전에는 보일러를 가동해 난방을 하지 못하게 금한다. 그 날 가까이 되면 추워서 전기난로를 몰래 사용하는 것이 예사이다.
3) 프랑스
프랑스 날씨에 관한 말은 ‘丹楓’과 ‘落葉’에 관한 비교론으로 시작할 수 있다. 프랑스어에는 ‘丹楓’을 뜻하는 단어가 없고, ‘落葉’을 ‘feuille morte’라고 하는 말은 흔히 쓰고 중요한 시어로 삼는다. 이것은 직역하면 ‘죽은 잎이다’이다. 우리말로는 ‘落葉’이라고 하면 되고, ‘枯葉’이라고 하는 이상한 번역을 할 필요가 없다.
구르몽, <낙엽>(Remy de Gourmont, “Les feuilles mortes”)에서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Simone, aimes-tu le bruit des pas sur les feuilles mortes ?)라고 하고, 베르래느, <가을의 노래>(Paul Verlaine, “Chanson d'automne”)에서 “나는 떠나간다,/ 사나운 바람에/ 몸을 맡기고/ 여기 저기/ 마치/ 낙엽처럼”(Et je m'en vais/ Au vent mauvais/ Qui m'emporte/ Deçà, delà,/ Pareil à la/ Feuille morte.)라고 하고, 구르몽, <낙엽>(Remy de Gourmont, “Les feuilles mortes”)에서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Simone, aimes-tu le bruit des pas sur les feuilles mortes ?)라고 한 것이 널리 알려져 있다.
프랑스에 단풍은 없고 낙엽만 있는 것은 아름다운 단풍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 용어를 사용하면 樹種이 ‘紅葉’은 없고 ‘黃葉’만 있는 것들인데, 가을 날씨가 나빠 단풍이 곱게 들지 않는다. 보지 않은 것을 말하고 노래에 올릴 수는 없다.
프랑스에서는 여름을 ‘아름다운 계절’(belle saison)이라고 한다. 긴긴 날 햇빛이 비치고 그리 많이 덥지는 않기 때문이다. 좋은 계절 반가운 햇빛을 즐기려고 바캉스를 간다고 법석을 떨어, 날씨가 다른 먼 나라 사람들까지 들뜨게 한다.
가을이 되면 날이 흐리고 이따금 비가 부슬부슬 온다. 어디 가도 즐길 단풍은 없고, 낙엽이 바람에 뒹군다. 산이라고는 보이지 않고 여기저기 있는 숲에 서 있는 나무에 엉킨 겨우살이가 흔들려 을씨년스러운 느낌을 자아낸다. 위도가 높아 낮이 차차 짧아지다가 겨울이 되면 일찍 어둑어둑해진다. 기차를 타고 한참 가도 즐겁지 않다. 모두들 동경하는 이상향 남불 해안까지 가야 시련에서 벗어나 햇빛을 본다.
여름에는 온갖 찬사를 다 바치다가, 가을은 반기지 않는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는 것을 시련의 시작으로 여긴다. 보들래르, <가을의 노래>(Charles Budelaire, “Chant d'automne”)에서 그런 심정을 아주 날 나타냈다. 사연이 길지만 잘라 인용하기 어렵다.
이윽고 우리는 차가운 어둠속에 잠기리라.
잘 가거라, 너무 짧은 우리의 여름 날빛이여!
나는 이미 음산한 충격을 느끼면서 듣는다,
마당 길 위에 부려놓는 나무가 울리는 소리를.
겨울이 닥쳐와 온통 내게로 들어오려고 한다.
분노, 증오, 전율, 공포, 장기간의 강제 노동이.
극지의 지옥에 갇혀 있는 태양이라도 된 듯이,
내 가슴은 붉게 얼어붙은 덩어리이기만 하다.
나는 떨며 장작 떨어지는 충격에 귀 기울인다.
사형대를 짓는 소리라도 더 둔탁하지 않으리.
내 마음은 무너져 내리고 마는 탑과도 같다,
성벽 파괴 도구로 무겁고도 끈덕지게 내리쳐.
이 단조로운 충격에 흔들리면서 나는 느낀다,
어디선가 누가 급히 관에 못을 박는 것 같다.
누구를 위해? - 어제는 여름이고, 지금은 가을이다!
이 야릇한 소리가 출발 신호처럼 울린다.
Bientôt nous plongerons dans les froides ténèbres ;
Adieu, vive clarté de nos étés trop courts !
J'entends déjà tomber avec des chocs funèbres
Le bois retentissant sur le pavé des cours.
Tout l'hiver va rentrer dans mon être : colère,
Haine, frissons, horreur, labeur dur et forcé,
Et, comme le soleil dans son enfer polaire,
Mon coeur ne sera plus qu'un bloc rouge et glacé.
J'écoute en frémissant chaque bûche qui tombe ;
L'échafaud qu'on bâtit n'a pas d'écho plus sourd.
Mon esprit est pareil à la tour qui succombe
Sous les coups du bélier infatigable et lourd.
Il me semble, bercé par ce choc monotone,
Qu'on cloue en grande hâte un cercueil quelque part.
Pour qui ? - C'était hier l'été ; voici l'automne !
Ce bruit mystérieux sonne comme un départ.
온갖 시련을 다 생각하고, 죽음이 다가온다고 느끼기까지 한다. 사형대에서 처형당하는 것을 상상하고, 관에 못을 박는 소리가 들린다고도 한다. “어제는 여름이고, 지금은 가을이다!/ 이 야릇한 소리가 출발 신호처럼 울린다.” 이렇게 말한 출발 신호가 죽음을 향한 신호이다.
추운 겨울에 눈이 펑펑 와서 쌓인 다음 활짝 개이면 새로운 광명 세계가 열리는 느낌일 수 있는데, 프랑스에서는 이런 기적을 기대하지 못한다. 눈과 비가 섞여 오기나 하고 날은 계속 침침하며, 바짝 추워지지도 않는다. 그래도 영국보다는 날씨가 월등하게 좋고, 독일보다도 낫다고 스스로 위안한다. 이탈리아에는 기가 죽는다는 말은 덮어두고 행복하게 지낸다. 더 먼 나라에는 적극적인 관심을 가지지 않고, 프랑스가 제일 좋은 나라라고 여긴다.
4) 한국
한국은 장마철이 지나면 거의 날마다 날씨가 청명하고, 가을이 특히 아름답다. 가을을 한 가지로만 노래하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단풍만, 프랑스에서는 낙엽만 노래하는데, 한국에서는 두 노래를 다 갖추고 가을의 두 모습을 나타낸다. 단풍은 가을의 아름다움을 자랑하게 하고, 낙엽은 가을이 쓸쓸한 계절임을 알린다.
“內藏은 秋景이요, 邊山은 春景이라. 丹楓도 좋거니와 彩石도 기이하다.” 이것은 李世輔의 시조이다. 임이 오는가 여겨 나가보고 “저 개야 秋風 落葉을 헛되이 짖어서 날 속일 줄 어째오.” 이것은 무명씨 여인의 탄식이다.
*<하시춘풍(何時春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