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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5장
15:1 아침이 되자 곧 선임 제사장들이 장로들과 서기관들과 온 공회와 더불어 회의를 열고, 예수를 결박하여 끌고 와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더라.
2 빌라도가 주께 묻기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하니, 주께서 대답하여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렇도다.”라고 하시더라.
3 또 선임 제사장들이 여러 가지 일을 들어 주를 고소하나, 주께서는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더라.
4 그러자 빌라도가 주께 다시 물어 말하기를 “너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아니하느냐? 그들이 얼마나 많은 일로 너에 대하여 증거하는지 보라.”고 하더라.
5 그러나 예수께서는 여전히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므로 빌라도가 이상히 여기더라.
마가는 다시 한번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넘겨"지신 것에 대해 요약된 설명을 제공한다(1절). 보다 자세한 상황은 누가와 요한복음에 나와 있다.
1. 유대인들은 예수를 빌라도의 재판정 앞으로 데려갔으나 "유월절 양을 먹"을 수 있게 정결을 지키려고 그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요 18:28). 이 "정결하고" "경건한" 양반들은 이방인들의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럽혀지는 것이라 생각해 피하면서도 한 무죄한 사람을 살해하는 일에는 스스로 소도구가 되고 있었다(행 7:52).
2. 빌라도는 억지로 유대인 앞으로 나와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요 18:29)고 묻게 되었다. 그 질문에 대한 제사장들의 첫번째 대답은 "고소"와 무관한 가식적인 것이었다. "그가 행악자가 아니라면 우리가 그를 당신에게 넘겨주지 않았을 것이니이다"(요 18:30). 달리 말하면 "우리가 하는 말을 믿고 이 사람을 사형에 처하시오. 이 사람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짓지도 않았는데 우리가 그를 당신 앞에 데려왔겠소?" 여러분은 이 대답이 매우 "당돌하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10:35-37에서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사항에 대한 주석을 보라).
3. 예수 그리스도를 재판하는 일을 피하기 위한 빌라도의 첫번째 반응은 이러했다: "그를 데리고 가서 너희의 율법에 따라 재판하라"(요 18:31). 그런데 유대인 지도자들은 "발뺌의 여지"를 남기기를 원했다. 말하자면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려 하면서도 자기들이 살해 행위에 주도적으로 개입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행 5:28).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행 7장에서 스테판을 죽일 때에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던 이유를 들고 나온 것이다: "우리가 누구를 사형에 처하는 것은 적법지 못하나이다"(요 18:31). "점령군 사령관인 당신만이 죄수를 사형에 처할 권한을 갖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빌라도는 그리스도를 다시 떠맡게 되었다.
4. 빌라도에게 책임을 넘기는 데 실패하자 유대인들은 일련의 거짓 고소를 제기한다: "이 자가 우리 민족을 현혹하고, 카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그리스도 왕이라고 하더이다"(눅 23:2). 이 예수는 대중 선동가로서 로마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그것은 거짓말인데 주께서는 로마나 카이사에 대해 반역하라고 한 번도 말씀하신 적이 없다. 주의 메시지는 "너희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15)는 것이었다. 주께서는 로마에 세금을 내셨고(마 17:24-27) 누구에게도 세금을 내지 말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12:14-17). 또한 자신을 "그리스도 왕"으로 선포하는 일에 대해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알리지 말라고 엄히 지시하셨다(8:29-30). 예수께서는 심지어 사람들이 주를 "억지로 데려다가 왕으로 세"(요 6:15)우려 할때 그것을 거부하셨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한 번에 세 가지 거짓말을 한 것이다.
왜 그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인민 재판"에서 판결내렸던 그 신성모독이라는 죄명을 빌라도에게 제출하지 않았는가? 이는 빌라도가 유대인의 종교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순회 설교자가 돌아다니면서 "회개하라!"고 외치면서 백성을 가르치더라도 그가 법을 지키고 세금을 낸다면 자신과 상관없다 생각했다.
막 15:2은 눅 23:3, 요 18:33과 같은 내용인데 마태, 마가, 누가복음에서 단순히 "그렇도다"라 되어 있는 데 반해 요한복음은 보다 상세 기술이 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시인하는 대답을 하시면서 그 뒤에 질문을 붙이셨다: "그 말이 네 스스로 하는 말이냐, 아니면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하여 너에게 해준 말이냐?"(요 18:34).
이것이 무슨 말씀인지 생각해 보자.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자칭 왕이라 한다는 이유로 고소했다. 로마 지배 하에서 그것은 불법인데 카이사가 지명하는 자만이 왕이 될 수 있고 또 카이사에게 복종해야 그 왕은 계속 다스릴 수 있었다(헤롯처럼). 예수께서는 자신이 왕이라 인정하셨기에 그 말 자체로 재판은 유죄로 결론이 나야 했다. 그러나 빌라도는 제사장들에게 가서 그리스도가 무죄라 말했다("나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지 못하였노라" - 눅 23:4). 왜 그런가? 예수께서는 개인적으로 빌라도에게 주의 왕국과 주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에 대해 말씀하셨던 것이다.
요 18:36 - "나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왕을 거부했고 그 결과 물리적 왕국은 연기되었다. 그래서 주께서는 이런 말씀을 이어가신다: "그러나 지금은 나의 왕국이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변개된 성경인 ESV는 그 구절에서 "지금은"을 삭제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왕국이 앞으로도 지상의, 가시적이고 물리적인 왕국이 될 수 없게 만들었다. 이것이 무천년주의라고 알려진 이단 교리인데 그 교리는 문자 그대로 수백 개의 본문들과 모순된다(이를테면 사 2, 11, 60, 61, 65, 66장; 렘 23, 30, 31, 33장; 겔 40-48장; 단 2장; 욜 3장; 암 9장; 슼 14장; 계 20장).
빌라도는 반복해서 질문한다("그러면 네가 왕이냐?" - 요 18:37). 그리스도께서 하신 대답을 듣고 빌라도는 예수께서 "미친 설교자"일 수는 있겠지만 반란 주모자는 아닌 것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이 일을 위하여 내가 태어났고, 이런 연유로 내가 세상에 왔으니 진리를 증거하려는 것이라"(요 18:37). 빌라도는 진리에 대해 냉소적인 사람이었을 수 있지만(요 18:38) 그는 그리스도의 무죄에 대해서는 확실히 인식했다(요 18:38).
막 15:3-5의 추가적인 고소들이 어떤 내용인지에 대해서는 눅 23:5에 나온다. 다시 한번(14:60-61을 보라) 예수께서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처럼 침묵을 지키신다(사 53:7). 빌라도는 그리스도께서 침묵하시는 것을 보고 놀란다. 베드로는 이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모욕을 당하셨으나 다시 모욕으로 갚지 아니하셨고[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 고통을 당하셨으나 위협하지 아니하셨으며, 오직 의롭게 심판하시는 분께 자신을 의탁하셨느니라"(벧전 2:23).
그리스도께서 카야파와 빌라도의 법정에 서셨을 때 사실 어떤 사람도 주의 재판관이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아버지께 맡기셨고 "그를 상하게 하는 것이 주를 기쁘시게 하였기에" "그의 혼"이 "속죄제물"이 되신 것이다(사 53:10; 벧전 2:24).
다음 본문으로 넘어가기에 앞서 한가지 언급할 것은 누가는 사건의 "전개 과정"에 뭔가를 추가했다는 점이다. 바라바가 등장하는 장면 이전에 빌라도는 예수께서 갈릴리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냈고(눅 23:6)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재판하지 않으려는 두번째 시도를 했다. 그는 예수를 헤롯에게 보냈는데 이는 갈릴리가 "헤롯의 통치 구역"에 속하고 헤롯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마침 예루살렘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눅 23:7).
헤롯은 예수를 볼 수 있게 되어 기뻐했지만 주께서는 그 부정직한 회의주의자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눅 23:9). 헤롯은 침례인 요한의 설교를 거부했었기에 주께서는 그에게 더 하실 말씀이 없었다. 그러자 헤롯과 그의 전사들은 "주를 멸시하고"(눅 23:11), 즉 주에게 공개적 모욕과 멸시를 가했다. 우리는 그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멸시 행위였는지 모르지만 "조롱한 후에 화려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다시 보내더라"는 눅 23:11 내용으로 볼때 그 멸시와 조롱이라는 것은 동어반복적 수사법인 것 같다.
24절의 "화려한 옷"에 대해서는 17-20절을 다루면서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
눅 23장의 그 단락은 이렇게 마친다: "빌라도와 헤롯이 전에는 서로 적대관계였는데 그 날은 서로 친구가 되니라"(눅 23:12). 서로 전혀 친할 일이 없는 두 인간이(동성애자와 마호메트교도, 페미니스트와 마호메트교도처럼) 하나로 뭉치게 된다면 그 이유는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오라는 공통 분모 때문일 것이다. 결국 그 이유 때문에 나라들은 하나로 연합해서 "하나님의 말씀"이신 분을(계 19:11-19) 대적할텐데 그들의 최종 운명은 영원히 불타는 것이다(슾 3:8; 마 13:40-42).
6 이제 그 명절에는 그가 백성들이 요구하는 대로 죄수 한 명을 놓아주는데,
7 그때에 반란을 일으킨 사람들과 함께 붙잡힌 바라바라고 하는 사람이 있더라. 그는 반란 때 살인한 자더라.
8 무리가 크게 소리질러 빌라도에게 요구하기 시작하기를, 그가 늘 하던 대로 자기들에게 해 달라고 하더라.
9 그러나 빌라도가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하기를 “내가 너희에게 유대인의 왕을 놓아주기 원하느냐?”고 하니,
10 이는 그가 선임 제사장들이 시기로 인하여 주를 넘겨준 것을 알았기 때문이라.
11 그러나 선임 제사장들이 무리를 선동하여, 오히려 그가 바라바를 그들에게 놓아주어야 한다고 하더라.
12 빌라도가 대답하여 다시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러면 너희가 유대인의 왕이라고 하는 그에게 내가 어떻게 하기를 원하느냐?”고 하니,
13 그들이 다시 소리지르기를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하더라.
14 그러자 빌라도가 그들에게 말하기를 “그가 무슨 악한 일을 행하였느냐?”고 하니, 그들이 더 크게 소리질러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하더라.
15 그러므로 빌라도가 그 군중을 만족시키려고 바라바를 그들에게 놓아주고, 예수를 채찍질한 후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넘겨주니라.
16 병사들이 주를 프라이토리움이라 하는 관정 안으로 끌고 가고, 그들은 온 군대를 집합시키더라.
17 그리고 주께 자주색 옷을 입히고, 가시로 관을 엮어 그의 머리에 씌우고,
18 “유대인의 왕, 만세!”라고 하며 경례하더라.
19 또 갈대로 그의 머리를 치고 그에게 침을 뱉으며, 무릎을 꿇고 경배하더라.
20 그들이 주를 조롱한 후에 자주색 옷을 벗기고, 다시 그의 옷을 입혀서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오더라.
이 장면까지 빌라도는 무관심한 척 예수 그리스도를 재판하지 않으려 했었다 - "너희 법정에서 그를 재판하라." 그는 비겁함으로 회피하려고도 했다 - "그는 헤롯의 관할에 속한 자이니 헤롯이 그 문제를 다루게 하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여러분이 만난 사람 중에 가장 떨쳐버리기 어려운 분인데 마치 액운처럼 그는 계속 돌아온다. 헤롯은 빌라도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돌려보냈고 빌라도는 자기 손으로 주를 처리해야만 하게 되었다.
무관심과 비겁함이라는 방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도망치는 데 실패하자 빌라도는 지능적 수법으로 피해 보려 한다. 빌라도는 유월절에 죄수를 풀어주는 유대인의 관습을 이용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털어내려고 시도한다(6절 참고. 요 18:39).
빌라도는 노만 빈센트 필, 로버트 슐러, 또는 조엘 오스틴처럼 "긍정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기에 모든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선하다"고 믿었고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현저한 악인 가운데 누구를 풀어줄지 선택하라고 하면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가 선택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빌라도는 최악의 악인을 한 명 골랐으니 그가 바라바였다. 바라바는 "유명한 죄수"(마 27:16)였는데 이는 그 자가 "강도"(요 18:40)일 뿐 아니라 로마에 대항한 "반란"을 일으켜서 "반란 때 살인"을 저질렀기 때문이다(7절). 바라바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고소한 그 죄를 실제 저지른 자였다(1절 주석을 보라). 바라바는 "유명한 악인"이었다.
빌라도는 군중이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이렇게 말할 것이라 기대했다. "그래, 저 사람은 거리에서 설교하면서 내가 지옥에 갈 것이라 말했지만 그는 실제로 누구도 해치지 않았어. 오히려 그는 문둥병자를 고쳐주고 소경을 보게 했고 절름발이를 온전하게 만들었지. 그는 좋은 사람이야, 그를 풀어주어야 해." 그리고 바라바를 보면서 이렇게 말하리라 생각했다. "저 친구는 강도인데다 살인자야. 그는 로마와 문제를 일으켰고 저 사람 때문에 우리가 다 죽게 될지도 몰라. 그는 우리에게 화근이니 죽여야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군중들은 바라바를 쳐다보고 이렇게 생각했다. "그가 강도와 살인자에 반역자일지 모르지만 그는 알다시피 게토에서 성장했지. 그는 당신과 내가 누리는 혜택을 누리지 못하고 자랐어. 그는 멸시만 받고 살아왔기에 그가 행한 그런 범죄들을 저지를만 했지. 사실 그는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고. 그를 풀어주자." 그리고 나서 그들은 그리스도를 보았다: "저 사람이 그 선지자로군. 저 사람과 나는 완전히 달라. 그는 자기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다 틀렸다고 생각해. 저 사람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누가 또 있겠어? 그를 죽여라!"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지적하는 비판적 설교자 대신 강도 살인자를 택했는데 이는 그 도둑이자 살인자인 바라바가 자기들의 성향에 맞았기 때문이다. 그 성난 군중은 의인 대신 살인자를 택했고(11-13절 참고. 행 3:14) 빌라도는 또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재판해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이제 이 본문에 대해 언급할 중요한 사실이 몇 가지 있다. 그 중 첫째는 10절에 있다. 빌라도는 그 자신이 권모술수에 능한 정치인이었지만 그 선임 제사장들의 속은 꿰뚫고 있었다. 그는 그들이 예수를 데려와서 재판해달라고 하는 이유가 시기심 때문임을 알았다.
그 선임 제사장들, 서기관들, 바리새인들, 그리고 사두개인들은 주를 질투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를 따르는 무리들의 숫자 때문에 시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주께서 성경의 권위에 근거해서 권위있게 말씀하시는 데 반해(1:22 주석을 보라) 자기들은 사람들의 의견과 선호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드러나자 주를 시기했다(7:6-13 주석을 보라). 그들은 주의 사역에 동반되어 나타나는 하나님의 권능을 보고 주를 질투했다.
시기는 "원죄"였다: 루시퍼는 하나님을 시기했다(사 14:12-14). 카인은 자기 동생의 희생제가 주께 열납되는 데 반해 자신의 제사는 거부되자 동생을 시기했다. 요셉의 형들은 부친과 하나님의 호의가 요셉에게 집중되는 것을 보고 그를 시기했다. 사울은 다윗이 골리앗을 죽인 후(삼상 18:7-9) 전쟁에 나서자 그에게 "수만"을 죽인 자라는 칭호가 붙는 것을 보고 다윗을 질투했다. 다른 성도가 하나님께 어떤 좋은 것을 받는 것을 보고 설교자가 질투한다면 그것은 그 설교자가 사역 중에 맞을 수 있는 가장 큰 시험이다.
이제 여러분이 다른 사람을 질투하려는 마음이 일어날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가 알려주겠다. 이런 아메리카 인디언 속담이 있다: "남의 신을 신고 걸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을 평가하지 말라." 여러분이 다른 누구를 질투하기 전에 그 사람이 그 위치에 이르기까지 어떤 과정을 통과해야 했을지 생각해 보라. 이것은 헐리우드 스타들과 신인 배우들에게 잘 적용되는 진실이다. 여러분은 미키 루니나 엘리자베스 테일러처럼 일곱 번 이혼하고 여덟 명의 배우자를 가져보고 싶은가? 여러분은 쥬디 갈란드, 엘비스 프레슬리, 마이클 잭슨, 혹은 행크 윌리엄스처럼 마약에 중독되어 쉰살 이전에 죽고 싶은가? 그게 아니라면 "죄악을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라"(시 37:1).
나는 여기 펜사콜라 성경신학원 밑의 거리에 있는 학교 건물들, 수백만 달러가 들어간 로켓 발사대처럼 보이는 그 건물들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한다. 말하자면 여기서 우리는 깡통 같은 초라한 건물에서 어느 때든 수백 명을 넘지 않는(100-300명 사이) 규모의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성경(AV 1611)을 믿는 믿음을 그들에게 회복시켜 주려 애쓰면서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담대한 증인이 되게 훈련시키고 있다. 그런데 저 교수들은 그들의 학생들에게서 종교 개혁 영어 성경 본문에 대한 믿음을 박탈하고 그 공간에 기독교 학자들의 의견과 주장(보통 그것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주장이었지만 지금은 비잔틴-TR 학파로 바뀌고 있다)을 주입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학생들을 여성적이고 소심한 샌님으로 키워내고 있다(언젠가부터 신학생들이 성경을 펴고 거리에서 설교하면 그들을 "럭크만주의자"로 낙인찍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나는 그런 일들을 보면서 생각한다. "주여, 왜 주께서는 저에게는 저들처럼 일년에 수천 명의 학생들을 주셔서 제대로 훈련시킬 기회를 주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는 저 대학교들의 설립자들이 자기들의 학교 규모를 유지하기 위해 무엇을 했고 하지 않았는지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기독교 학자들과 잘 지내기 위해 NASV와 알렉산드리아 본문을 홍보한 반면, 거리 설교를 하지 않고, 여름철 감옥 설교를 통해 수백 명의 혼들을 구원하는 사역도 하지 않았으며 아이들도 낳지 못했다. 나는 아이들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만일 내게 한 명의 아이도 없다면 어떨지 상상도 못하겠다. 내게는 열 명의 자식과 스무 명의 손자들, 열네 명의 증손자들이 있다. 이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래서 나는 불평하지 않고 내가 가진 것을 향유한다.
바라바에 대한 기록을 보기 전에 그의 이름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바라바라는 이름은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그 군중은 "아버지의 아들" 두 명을 마주하고 있었던 셈이다. 한 명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다른 하나는 강도인 아비(요 10:1 참고. 요 18:40)를 닮은 "아버지의 아들"이었는데 그는 살인자였다(요 8:44 참고. 행 3:14). 여러분이 사 14:12-14로 가 보면 그는 자기 아비처럼 반역자였다. 따라서 여러분은 요 5:43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적그리스도의 모형을 보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나의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나 너희가 나를 영접하지 아니하는도다. 만일 다른 자가 자기 이름으로 오면 너희는 그를 영접하리라."
그런데 여기서 우리의 구원과 관련하여 바라바가 또다른 모형이 되는 것을 본다. 바라바는 "아버지"를 떠난 모든 아담의 아들들을 대표하는 자인데 아버지의 독생자인 분이 갈보리에서(요 1:18) 그 잃어버린 아들들을 되찾으시는 것이다. 적어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대속과 십자가 처형이 신자의 구원과 십자가에 못박힌 삶에 관련하여 갖는 영적, 교리적 파급 효과를 이해하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골고다 언덕의 피의 대속이 있기 전이나 그 사건 중이나 혹은 그 후의 어떤 사람도 바라바의 입장 이상으로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바라바는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죽으신 의미를 몸소 체험했는데 이는 그가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 대신에 풀려난 죄인이었고 골고다 언덕에 세워진 십자가들 중 가운데 십자가는 원래 그가 있어야 할 자리였기 때문이다. 나는 바라바를 이렇게 부르고 싶다: "십자가 사건의 의미를 이해한 유일한 사람."
바라바는 자신이 합법적으로 정죄받은 죄인인 줄 알았다. 그가 자신이 유죄라는 것을 마음에 인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여러분은 구원받기 위해 그리스도께 나아올 때 먼저 자기 의에 호소하는 모든 생각을 버리고 자신이 유죄임을 인정해야 한다.
바라바는 의로운 분이 불의한 판결을 받고 고통당한다는 것을 알았다. 여러분은 바라바 같이 악에 찌든 삶을 살았던 전문 범죄자를 기만할 수 없다. 그는 예수를 보고 그 분이 무죄하다는 사실을 알았다(히 7:26).
바라바는 자신을 대신할 희생자가 나온 것을 알았다. 나는 로마 병사가 바라바를 감옥에서 석방하면서 그의 "사형"이 취소된 것을 알려주었을 때 바라바가 자기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처형되는 그 분을 보려고 찾아갔을 것이라 확신한다.
십억 명이 넘는 모슬렘들이 그들의 "선지자"와 함께 불못에 떨어져야 하는 이유 중 하나는 그들이 자기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분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알라는 자신의 추종자들을 동정할 줄 모르고 경건함도 갖추지 못한 신이기에 마호메트를 포함한 모든 모슬렘들은 그들의 죄문제를 자기 선행으로 해결하려 애쓴다. 카톨릭, 불교도, 힌두교도, 신도교도, 공자교도, 시크교도, 프로테스탄트, 유대인, 그리고 그리스 정교도들도 이하동문이다. 사람의 "마음"이 신들의 저울에 달았을 때 "진리의 깃털"보다 가벼워야만 영원한 복락으로 들어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이집트의 "사자의 서"가 나온 이래 인간의 종교는 한 치도 발전하지 못했다. 그것이 영생의 기준이 맞다면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은 지옥에 가야 할 것이다. 내 말을 믿지 못하겠는가? 롬 3:4, 13을 보고 읽어보라! 미신적인 이교도처럼 어리석게 굴지 말라.
여러분이 "최후의 심판" 자리에 선다면 거기서 "진리의 깃털"이나 여러분의 악행을 상쇄하는 선행 같은 것이 아닌 더 큰 저주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완벽한 "하나님의 의"에 대해 답변해야 하는데(롬 10:3-4) 지금 여러분이 그 의를 값없는 선물로 받지 않으면(롬 5:18) 그 의로 인해 정죄받게 될 것이다(롬 2:2-5, 16).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죄들을 위해 대속적으로 죽으신 사실을 여러분이 믿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치 주지사가 사형 집행을 하루 앞둔 사형수인 여러분을 사면하려 할때 여러분이 사면을 거부하고 "전기 의자"로 가는 것과 같은 일이다.
바라바는 대속이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킨다는 것을 알았다. 율법 하에서 누군가 바라바의 범죄로 인해 죽어야 했는데 자신이 죽거나 아니면 율법이 허용한 다른 누군가가 그 죄 때문에 죽어야 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시 율법에 따라 바라바의 자리인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의 대가를 치르기 위해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에 순종하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셔서 율법의 저주로부터 우리를 구속하셨으니"(갈 3:13).
바라바는 자신이 죄의 대속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인 것을 알았다. 이런 옛 찬송가 가사가 있다: "나 빈손 들고 나아가 주의 십자가를 붙드네" 이것이 구원이다.
막 15장으로 돌아와서, 무관심과 비겁함, 꾀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회피하지 못한 빌라도는 마지막 수단을 사용하는데 그것은 타협이다. 빌라도는 그 군중이 피에 굶주린 줄 알고 그들을 만족시켜 주려 했고, 그래서 그는 생애의 마지막을 앞둔 예수를 채찍질하도록 명령했다(15절).
예수께서 빌라도의 재판정으로 귀환하셨고("프라이토리움" - 16절 참고. 요 18:28, 33) 빌라도의 호위병들이 전부 모였다. 예수께서는 양 손을 머리 위로 한 채 기둥에 묶이셨고 그의 등은 병사들을 향해 드러나 있었다. 그 병사들 중 한 명이 "아홉 꼬리의 고양이" - 유리 조각과 깨진 그릇 파편, 동물 뼈 등이 박힌 아홉 가닥의 긴 가죽으로 된 채찍 - 를 들고 앞으로 나왔다. 그 병사는 채찍을 힘을 주어 크게 휘둘러 친다. 그러면 채찍의 가닥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달라붙으면서 거기 매달린 날카로운 조각들이 주의 피부와 근육에 깊이 박힌다. 채찍을 뒤로 물리면 살조각이 찢겨 나간다. 이사야는 이렇게 예언했다. "그의 용모가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이 상하였고, 그의 모습이 사람들의 아들들보다 더 상하였도다"(사 52:14). 유대인의 법에서는 한 번에 40대 이상 때리는 것을 금했지만(신 25:2-3) 로마인들은 대수 제한을 두지 않았기에 채찍이 망가질 때까지 병사가 계속 때리기도 했다. 어떤 죄수들은 십자가에 올라가기도 전에 채찍질 때문에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병사가 채찍질을 마쳤을 때 예수 그리스도는 피범벅이 되셨을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당하신 모욕은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병사들은 주의 옷을 벗긴 다음 "주께 자주색 옷을 입히"(17절)고 있다. "자주색" 무엇이라고? 마가는 그것이 어떤 옷인지는 말하지 않는다(20절을 보라). 그런데 그 옷은 "자주색 겉옷(robe)"(요 19:2, 5)이었다. 누가는 그것이 "화려한 옷"(눅 23:11)이었다고 말한다. 그것은 왕권을 상징하는 옷이었고(판 8:26; 에 8:15) 부를 나타내기도 했다(눅 16:19). 마태는 그 옷(robe)이 또한 "주홍색"(마 27:28)이었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이 겉옷(robe)은 종교 창녀와 상관이 있는 옷으로서(계 17:4-5) 일곱 언덕의 도성과 관련이 있다(계 17:9). 누가, 대체 누가 이 옷과 유관한 자인가?
이제 이 부분은 잘 알아둘 필요가 있는데 이는 카톨릭 교회가 예전부터 유물 숭배를 해 왔기 때문이다. 이 풍습은 음란한 것들에서부터(아기 예수의 포피와 마리아의 모유) 괴이한 것들(성령의 날개에서 나온 깃털과 나사로의 몸의 악취나는 부분[내 생각에 그것은 1,500년이 흘러서도 계속 악취를 풍겼을 것이다]), 또 병적인 것들(그리스도를 십자가에 고정시킨 못)과 우스꽝스러운 것들(침례인 요한의 참수된 머리 두 개와 마태의 팔 여덟 개)까지 있다. 유럽에 떠돌아다니는 "참된 십자가" 조각들을 합치면 큰 목장 울타리를 만들 정도가 된다고 한다.
로마 카톨릭의 미신에서(로이드 더글러스의 책을 통해, 또 빅터 머추어와 리차드 버튼의 영화를 통해 잘 유명해진) 이 "겉옷"(robe)은 치유의 능력을 갖고 있고(막 5:27-29을 표절한 것) 죄와 의와 심판을 드러낸다고(요 16:8; 행 24:25을 표절한 것) 여겨진다. 내가 그런 미신을 믿는 자들에 대해 평가할 말은 "바보들, 얼간이들!" 밖에 없다.
여러분이 에디 아놀드나 조지 비벌리 시아가 "그의 겉옷(robe), 그의 겉옷, 갈보리의 겉옷"을 노래하는 것을 듣거든 그 가사를 그대로 쓰레기통에 넣어 버리라.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건 전에 입으셨던 옷에 대해(겉옷을 빼앗기신 다음 주께서 받으신 옷) 성경은 결코 그것을 "robe"라고 부르지 않는다. 주께서는 자신의 원래 옷(clothes)을 돌려받으셨고(20절) 그것은 긴 옷이 아닌 그냥 옷이었고(garments)(24절) 그 옷은 "raiment"(눅 23:34), "vesture"(요 9:24)라 불렸다. 복음서에서는 그 옷에 대해 "robe"라 부르지 않는다. 그 "robe"는 로마 병사들이 주께서 채찍에 맞아 "피에 적신 옷"을 입으신 것을 비웃으면서 입힌 옷인데 주께서는 왕으로 다시 오실 때 그 피에 적신 옷을 입고 오실 것이다(계 19:13; 사 63:1-6). 가시관(17절)은 장차 주께서 쓰실 "많은 왕관"을 조롱하는 의미로 마귀가 씌운 관인데 주께서는 재림 때 열 왕들을 쳐부수시면서 그들의 머리에서 "많은 왕관"을 취하실 것이다(계 17:12; 단 7:24 참고. 삼하 12:30).
마가는 병사들이 "갈대"로 예수의 머리를 친 것을 기록한다(19절). 그렇게 한 데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 그들이 주의 머리에서 가시관을 손으로 들고 씌우다가는 자기들이 가시에 찔릴 수 있었기에 갈대를 이용해서 관을 씌우고 그것으로 쳐서 머리에 고정시킨 것이다. 그러나 마가가 하지 않은 설명을 마태는 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갈대를 주께 쥐어 주면서 모욕한 것이다(마 27:29-30). 그것은 주께서 재림하실 때 민족들을 통치하실 "철장"(계 2:27, 12:5)을 조롱하는 의미였다. 그 프라이토리움에서 이방 군인들이 "유대인의 왕"을 때리면서 조롱하고 있었지만 권능 가운데 재림하실 때 주께서는 "민족들을 칠 것"(계 19:15)이다. 말하자면 주께서는 그들의 머리를 부수시고 그들의 몸을 짓밟으실 것이다. (나에게 화내지 말라. 내가 그 구절들을 기록하지 않았다. 가서 계 19:15-21을 읽어보고 스튜어트 커스터가 상상하는 온건하고 유화적이며 신사적인 "예수"가 재림하시면서 이런 일을 행하신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그에게 침을 뱉으며"(19절). 이것은 주께서 채찍질당하시는 것에 대한 예언에 같이 나오는 말씀이다.
"내가 치는 자들에게는 내 등을, 머리카락을 뽑는 자들에게는 내 뺨들을 맡겼도다. 내가 치욕과 침뱉음으로부터 내 얼굴을 숨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0:6).
그들은 주의 얼굴에 침을 뱉었을 뿐 아니라 주의 수염을 잡아당겨 뽑았다. 주께서는 인성 가운데 이 모든 것을 통과하시면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도우시고 의롭게 여기실 것을 믿으셨다(사 50:7-9 참고. 히 12:2). 여러분이 주를 따르는 제자라면 주께서 "자기에게 저질러진 죄인들의 그와 같은 모순된 행동들을 견뎌 내신" 것을 생각하고 여러분은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고 역경을 이겨내야 할 것이다(히 12:3 참고. 갈 6:9).
"무릎을 꿇고 경배하더라." 물론 그것은 조롱의 표현이었다. 그들 중 누구도(이 시점까지는! - 39절) 주께 왕의 영예를 돌리지 않았고 주를 하나님으로 경배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장차 어느날 그들은 그래야 할 것이고(사 45:23; 롬 14:11-12) 그들이 주께 경배하게 되는 이유는 주께서 여기서 이런 일들을 통과하셨기 때문이다(빌 2:8-11). 하늘나라를 향해 가는 침례교 설교자 중 한명으로서 나는 이 사실을 아는 것이 흡족한데, 그 날이 오면 내가 과거에 설교했거나 복음을 전한 모든 사람들이 내가 믿어온 그 쪽으로 회심하게 될 것이다. 물론 내가 전한 복음을 거절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때늦은 회심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불못에 떨어지기 직전에 "회개"할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한 것이다. "지금이 기뻐 받아들여진 때요, 보라,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고후 6:2).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때가 죽은 다음 재판관이신 주 앞에 설 백보좌 심판석이어서는 안된다. 주께서는 지금 여러분의 구주가 되실 수 있다. 나는 그 구원의 조건을 1949년 3월 14일에 그레고리와 팔라폭스에 있는 방송국 녹음실 안에서 받아들였다.
이제 예수께서 자신의 옷을 돌려받으시고 십자가 처형을 위해 이동하실 때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첫째, 빌라도가 군중들 앞으로 예수를 데리고 나왔다. 그는 자주색 겉옷을 걸치고 가시관을 머리에 쓴, 살이 찢어져 너덜너덜하게 되고 피투성이가 된 예수를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빌라도는 분명 감정적 격앙 상태에 있었다. 그는 예수께서 이 지상의 유일한 사람인 것처럼 "이 사람을 보라!"(요 19:5)고 말했다.
그러나 "선임 제사장들"(요 19:6)에게는 문제가 있었다. 그들은 "무리를 선동하여" 바라바의 석방을 요구하게 했었다(11절).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처형할 것을 요구하는데 "이는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요 19:7)이었다. 여러분이 "종교"를 따른다면 저주는 따놓은 당상이다.
마지막 고소 내용은 빌라도의 정신이 번쩍 나게 했다(요 19:8). "하나님의 아들"이라?! 이교 우상숭배자인 빌라도가 (실제적인 면에서) 주요 기독교 대학 교수진보다 창세기 6장과 다니엘서 3장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를 재판정으로 다시 불러들여 질문을 했다. "네가 어디서 왔느냐?!"(요 19:9). 이것은 "스타트랙" 차원의 질문이다.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 배경이 갈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주를 빌라도에게 보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은 분"이라는 어떤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빌라도의 질문에 답하지 않으셨다. 빌라도는 너무 여러 번 그의 양심을 더럽혔다. 어떤 재판관이 피고인에 대해 "무죄"라는 선언을 세 번이나 하고서도 다시 그에게 사형 판결을 내리는 것을 생각해 보라. 빌라도는 그런 일을 저질렀다.
빌라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석방하기 위한 마지막 시도를 했다. 그는 예수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말했다. "너희의 왕을 보라!"(요 19:14). 그러나 그 선임 제사장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왕께 자신들의 자리를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그를 죽이시오!" "너희의 왕을 내가 십자가에 못박으랴?"(요 19:15). "카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요 19:15).
이런 이런! 그들은 그 말을 해서는 안되었다! 그들은 합법적 메시아를 거부하고 자신을 신이라 착각하는 과대망상적 로마 독재자를 왕으로 수용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클라우디오(행 18:2), 네로, 티투스(A.D. 70년 예루살렘 파괴의 주인공), 교황들, 짜르들, 무솔리니, 히틀러를 통치자로 주셨다. 왜 그랬는가? 유대인들이 말한 대로 그들에게 이루어진 것이다.
어떤 성경 주석가들은 유대인들이 박해받아온 이유가 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벌을 내리신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지만 신명기 28장과 재판관기, 예레미야 애가를 제대로 읽은 독자라면 그런 결론을 거부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올바로 행하면 그들을 축복하시겠지만 그들이 범죄하면 이방 민족들을 보내시어 그들을 박해하고 노예화시키고 죽이게 하시며 그들의 삶을 비참하게 만들겠다고 말씀하셨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럭크만, 당신은 반유대주의자인가요?" 전혀 아니다! 나는 세상을 다 준다 해도 유대인들에게 해를 끼치는 일을 할 생각이 없다! 왜 그러면 안되겠는가? 하나님의 뜻이 유대인들을 괴롭게 하는 것인데도 말이다. 왜냐하면 주께서 유대인들을 징계하기 위한 목적으로 일으키신 민족들은 그들의 일을 마친 후에 자기들도 마찬가지의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시 137:7-9을 보라). 하나님께서는 앗시리아인들을 보내시어 우상숭배에 빠진 북이스라엘 지파들을 벌하게 하셨고, 그 후에 주께서는 바빌론을 통해 앗시리아를 멸망시키셨다. 주께서는 느부캇넷살을 사용하시어 북이스라엘처럼 범죄한 유다와 베냐민을 벌하게 하셨고, 다시 주께서는 메디아와 페르시아를 부르시어 느부캇넷살의 왕국을 차지하게 하셨다. 주께서 페르시아인들의 치세를 끝내실 때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을 부르셔서 페르시아를 무너뜨리셨다. 그리스가 그들의 임무를 마칠 무렵이 되자 주께서는 로마인들을 일으키셨다. 로마인들이 주께 무익한 존재가 되자 주께서는 훈족, 서고트족, 동고트족, 반달족 등을 불러들이셨다. 주께서는 교황들이 유대인들을 게토에 몰아넣고 추방하고 화형시키는 것을 주가 보시기에 충분한 시점까지 허락하셨다가 마틴 루터를 세우셨고 그를 통해 중세 카톨릭 체제를 박살내셨다. 주께서 이방 땅에 흩어진 자신의 백성을 1,900년 만에 이스라엘 본토에 돌려보내기 원하셨을 때 주께서는 짜르, 무솔리니, 아돌프를 부르셔서 그들로 하여금 러시아와 유럽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을 쫓아내게 하셨다. 그 일이 충분히 된 다음 주께서는 볼세비키들이 짜르 정부를 전복시키고 연합국이 유럽에서 독일군을 몰아내게 하셨다.
유대인들을 박해하면 어떻게 되는지 알겠는가? 나는 유대인 박해에 가담하느니 차라리 깨진 유리 위를 맨손과 맨발로 기어다니는 쪽을 택하겠다. 그러나 성경에 등장하는 가장 강력한 "반셈주의자"가 만군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이 맞다(겔 5:8-9을 보라).
"그러면 내가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는 어떻게 하랴?"(마 27:22). "그를 죽여라!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라!" "도대체 그가 무슨 악한 일을 행하였느냐?"(마 27:23). 주께서는 악한 일을 전혀 행하지 않으셨다! 주의 평판이 어떠했는지는 "그분이 두루 다니시면서 선한 일을 행하시며 마귀에게 억압받는 모든 자를 치유하셨으니"(행 10:38)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군중은 선임 제사장들에게 선동되어 이성이 마비된 상태였기에 그들은 빌라도의 질문에 답하지도 않았다. 그들의 요구는 이러했다: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마 27:23).
빌라도는 그의 지배 하에 있던 백성들보다 신 21:6-7에 대해 더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물대야를 가져오게 하여 군중 앞에서 손을 씻었다(마 27:24). 물론 카톨릭 사제나 캠벨주의 장로들만큼이나 빌라도도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한 자신의 죄를 물로 씻어낼 수 없었다. "무엇이 내 죄를 씻을 수 있습니까?" 글쎄, 여러분은 도시의 상수도에 흐르는 물을 통해서는 씻을 수 없다. (내가 생각컨데 그 수돗물에 불소가 함유되어 있다면 그것으로 침례받는 자들은 "원시 침례교"[hard-shell Baptist]가 될 것이다.)
그리고 다시 한번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저주 아래 둔다: "그의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라"(마 27:25). 여기서 또 한번 성경 주석가들은 분명한 사실을 무시하려 하는데 그들이 거부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2천년 동안 유대인들을 징계하신 이유가 그들이 자기들의 메시아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저, 그 심판은 그들의 자식 세대까지만 적용됩니다, 따라서 유대인의 심판은 A.D. 70년에 끝났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는 편이 좋겠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극에 달하였음이니라"(살전 2:16) "이방인들의 충만함이 차기까지는"(롬 11:25). 그때 하나님께서는 "구원자"를 보내시어 "야곱에게서 경건치 아니한 것을 제거하"게 하실 것인데(롬 11:26) 아직까지는 아니다. 대부분의 신학자들이 교회 시대의 유대인이 받는 개인적 구원과 재림 때 이스라엘이 받는 민족적 구원을 구별할 줄 모른다.
"십자가에 못박으려고 끌고 나오더라." 타협안은 먹히지 않았다. 그것이 빌라도에 무익했던 것처럼 죄인인 여러분에게도 무용하다. 목적지에 절반까지 다가간 것은 의미가 없고 약간이든 많이든 놓쳤다는 결과는 마찬가지이다. 빌라도는 주의 피투성이가 된 모습이 피에 목마른 군중을 흡족하게 하리라 생각하고 주를 매질하게 했다. 물론 그 방법은 통하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빌라도처럼 여러분도 예수님에 관해 피할 수 없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만일 여기서 빌라도가 바른 판결을 내렸다면 그는 역사책에 예수 그리스도 다음으로 위대한 인물로 기록되었을 것이다. 만일 빌라도가 총독의 권위를 나타내는 그의 겉옷을 벗어 예수 그리스도의 어깨에 걸쳐드린 다음 "여기 너희들의 왕이 있으니 나를 못박으라!"고 말했다면 나폴레옹이나 아브라함 링컨보다 더 많은 빌라도 전기들이 쓰여졌을 것이다. 그러나 빌라도는 자기 양심을 더럽혔고 자기 힘을 올바로 쓰지 않았으며, 정치적 편의에 따라 행동했고 결국 자기 혼을 저주하고 말았다. 가련하고 가식적이며 사람 좋지만 한심한 폰티오 빌라도여. 미국의 성인 남성 가운데 90%가 그런 것처럼 빌라도도 윤리적 비겁자였다.
21 그때 시골에서 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쿠레네인 시몬이 그곳을 지나가자, 그들은 그에게 강제로 주의 십자가를 지고 가게 하더라.
22 그리하여 그들이 ‘골고다’라는 곳에 주를 데려가니, 그것을 해석하면 ‘해골의 곳’이더라.
20절에는 로마 카톨릭에서 "십자가의 길"이라 부르는 그것이 나온다. 카톨릭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께서 빌라도에게 사형 선고를 받으신 후에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장소에 이르기까지 중요 사건이 발생한 열두 개 지점이 있었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교황들은 약간의 진리에 엄청난 분량의 거짓말들을 섞는다(7:6-13 주석을 보라).
카톨릭 교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쓰러지신 후 쿠레네인 시몬이 예수의 십자가를 같이 지고 올라갔다는 이야기를 믿는다. 여러분이 성경을 조사해 보면 소위 "비아 돌로로사"에서 예수께서 세 번 쓰러지셨다는 어떤 기록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모친을 만나신 장소, 베로니카가 손수건으로 주의 땀을 닦았다는 곳, 기도하신 장소 같은 것들은 만화에 지나지 않는다. "성금요일", 갈보리가 예루살렘 내에 있었다는 주장, 예수 그리스도가 적갈색 머리칼을 한 아일랜드인이라는 생각, 혹은 십자가가 층층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생각 등도 똑같은 미신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전부 구름과자 같은 허튼 소리들이다. 그런 이야기들은 럼펠스틸트스킨, 아기돼지 삼형제, 그리고 세 마리 염소 형제 이야기만큼이나 비성경적인 것들이다.
본문에 분명한 이유는 나오지 않았지만 로마 군인들은 북아프리카 리비아 출신의 한 남자를 붙잡아(행 2:10) 그로 하여금 도보로 십오분 거리에 있는 갈보리까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했다. (그가 혼자 십자가를 지고 갔을 수 있고 그리스도와 함께 지고 갔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 쿠레네인 시몬이 행 8장의 에디오피아 내시처럼 유대교로 개종한 아프리카 흑인이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는데 그것이 맞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저주하신 족속의 일원을 성령께서 구원하시는 일에 관한 예표적 인물일 수 있다(창 9:25; 슼 14:21).
"이는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을 살게 하려 함이라"(고전 15:22).
"너희가 모세의 율법으로는 의롭게 되지 못하였던 그 모든 일에 있어서도 믿는 자는 모두 그분[예수 그리스도]을 통하여 의롭게 된다는 것이니라"(행 13:39).
자유주의와 인종차별 폐지론, 또 여성해방론을 따르는 목사들이 잘못 가르치는 갈 3:28을 어떻게 해야 올바로 적용하는지 아는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갈 3:26) 하나될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박해받는 소수자"로 지옥에 가야 한다.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21절). 이 루포라는 이름이 롬 16:13에 다시 등장하기에 스코필드와 몇몇 학자들은 그 둘이 동일 인물이라고 추측한다. 그것이 맞다면(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시몬이 이 사건을 계기로 구원받았다고 볼 수 있다. 바라바나 시몬처럼 그리스도와 극적인 조우를 했던 사람들이 다시 예전 모습으로 살아갔으리라 믿기는 힘든데, 그렇게 구원받은 사람들의 전례가 있기도 하다(10:17-23 주석을 보라).
십자가형이 집행된 장소는 "골고다"(22절)였는데 그 뜻은 히브리어로 "해골의 곳"(22절; 마 27:33; 요 19:17)이었다. 눅 23:33에는 라틴어로 해골(또는 두개골)이 "갈보리"인 것으로 나온다(요한복음 주석서에서 요 19:17 주석을 보라). 여러분이 찬송가에서 골고다라는 말을 찾으면 훨씬 많은 갈보리라는 단어가 찾아질 것이다.
본문에서 그 이미지는 흥미롭다. 자신을 "세상의 빛"이라 소개한 한 남자가 해골 모양으로 생긴 언덕에서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사탄교 숭배자들, 마녀들, 부두교도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 그들이 해골 위에 초를 올려놓는 의미 말이다. 그 자들은 자기들이 왜 그런 일을 하는지 모르면서 행한다. 그것은 "생이 타면서 소진되다가 죽음으로 꺼지는 것"을 상징하는 게 아니다. 여러분이 킹제임스 성경을 믿던지 말던지 그 성경은 여러분 뒤에 있다.
23 또 그들은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께 주어 마시게 하였으나, 주께서는 마시지 아니하시더라.
이 본문을 가르치는 성경 교사가 성경대로 믿는 사람인지 로마 카톨릭이나 친카톨릭 교회에 속한 교사인지에 따라 그 해석이 판이하게 달라지는 것을 여러분은 알아야 한다. 십자가 처형 당시 그리스도께 주어졌던 두 종류의 음료가 있었다. 하나는 "포도주"(헬. oinos)로서 여기 본문에 나온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식초"(헬. oxos)인데 그것은 마 27:34; 눅 23:36; 요 19:29-30에 나온다. 주께서는 막 15:23의 포도주는 확실히 거절하셨다. 주께서는 마 27:34의 식초를 맛보셨지만 마시지는 않으셨는데 이는 그것이 고통을 경감시키는 작용을 하기 때문이었다. 주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상의 모든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기 원하셨다. 그게 끝이 아닌데, 주께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마 27:34의 경우처럼 몰약이 포함되지 않은 식초를 받으셨다.
여러분이 미사 포도주에 취해 있는 로마 카톨릭 사제나 바티칸 사본에 맞춰 변개된 "성서"를 옹호하는 근본주의 성경 학교와 대학의 교사가 아니라면 이 사실을 믿을 것이다. 여러분이 알다시피 변개되고 배교한 ESV(자유주의적 RSV를 "보수주의"의 입맛에 맞게 편집한) 같은 역본은 눅 23:36과 요 19:30의 oxos라는 헬라어를 "신 포도주"로 번역했는데 그것은 테일러 같은 사전편찬자의 단어 정의 중 하나에 따른 것이다. 이제 "신 포도주"와 "식초"(oxos에 대한 또다른 단어 정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에서 왜 "보수주의"를 지향하는 ESV 편찬 위원회의 경건한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술꾼으로 만드는 번역을 택하였는가? 그것은 단지 oxos를 어떻게 번역할지에 대한 "선호"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역본을 로마 카톨릭의 변개된 본문과 일치시키는 사안이다.
알다시피 그 자들은 알렙과 B사본(시내 사본과 바티칸 사본), 다섯 개의 다른 대문자 사본과 일부 필기체 사본들, 또 웨스트코트와 홀트(그리고 네슬, 알란드, 메쯔거)의 사본에 근거해 A사본 - 알렉산드리아 사본 - 을 포함한 열여덟 개의 대문자 사본들 및 대다수의 필기체 사본들을 무시한채 마 27:34의 oxos를 막 15:23의 oinos로 바꾸었는데 그 결과 주께서 최소한 포도주를 맛보신 것으로 만들었다. 이런 변개는 본문을 로마 카톨릭의 라틴 벌게이트와 맞추기 위해 자행되었다.
그런데 우리들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헬라어와 히브리어 사전을 우리의 최종권위로 삼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그보다 더 확실한 권위, 곧 성경이 있다(벧후 1:19-20).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의 성령께서는(벧후 1:21)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천년도 더 전에 시 69:21에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무엇을 마시게 되실 것인지, 그것이 시큼한 것이든 다른 종류든 포도주는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미리 알려주셨다. 주께서는 "식초"(히. khomets) 종류를 드셨다. 배교한 ESV 위원회가 시 69:21의 식초를 "신 포도주"로 고치기 위해 한 일은 70인역을 근거로 다시 한번 oxos를 사적으로 해석하는 것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방식은 "보수주의"를 자처하는 번역 위원회가 그들의 길을 지옥과 사망으로 확정짓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변개된 NIV와 NASV조차도 이 부분은 올바로 번역했다.
24 그들은 주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의 옷을 나누는데, 각자 어떤 것을 가질까 하여 제비를 뽑더라.
성령께서는 마가를 통해 이 부분을 간략히 약식으로 기록하신다. "그들은 주를 십자가에 못박고." 다른 복음서들에도 십자가형의 구체적 과정에 대해서는 기록하지 않았다. 여러분이 이 모든 유혈낭자한 과정을 의학적인 관점에서 알고자 하면 프레데릭 쥬기브 박사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형에 대한 법의학적 연구라는 책이 있다.
내가 이야기할 것은 요 20:25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손"(hands)에 못자국이 있었다고 말씀한다는 점이다. 요한은 못자국이 주의 손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기에 암흑 시대의 로마 카톨릭 화가들은 손바닥 가운데 못자국을 그렸고 카톨릭 신비주의의 스티그마타(성흔) 현상도 손바닥 가운데 나타나곤 한다(이를테면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의 경우). 이번에도 카톨릭은 헛다리를 짚었다.(그들이 고장난 시계보다 자주 틀린다는 것을 알겠는가?)
그리스도의 손바닥에 못을 박았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데 이는 체중으로 인해 못이 손바닥을 찢어놓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카톨릭은 방법을 고안해 내는데 그들은 그리스도의 양팔을 나무에 고정시킨 밧줄이 따로 있었다고 가정한다. 물론 성경 내적이나 외적으로 그것에 대한 증거는 없다. 로마인들은 십자가형을 집행할 때 일반적으로 사형수의 몸을 못으로 나무에 고정시키거나 아니면 밧줄로 묶었지 밧줄과 못을 동시에 사용하지는 않았다). 못이 들어간 위치는 손목에서 약간 위였는데 그 지점은 네 가닥의 손목 뼈가 지나가는 사이의 공간이다. 다시 한번 성경은 학자들이 제기한 모든 "모순들"을 말끔히 정리해 버리는데 창세기 24:22, 47을 보면 손목이 손의 일부로 간주된다(엘리에셀은 리브카의 "손"에 팔찌를 끼워주었다).
17절을 다루면서 그리스도의 원래 "옷"과 로마 병사들이 주를 모욕하기 위해 입힌 "겉옷"(robe)의 차이에 대해 설명했으니 그곳을 참고하라. 주목할 점은 병사들이 제비를 뽑아서 "그의 옷"을 나누기에 주께서는 벌거벗으셨다는 것이다. 물론 화가들은(나를 포함해서) 체면상 주의 허리에 천이 둘려있는 것으로 그리지만 실제 주께서는 나체로 십자가에 달리셨다. 십자가형은 고통스러운 죽음이었을 뿐 아니라 수치스러운 죽음이기도 했다.
그리스도의 옷을 차지하기 위한 이 주사위 게임에 대해 그 일이 있기 천년 전에 예언이 되었다. 시 22:18과 그 이하 본문에 보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께 어떤 일이 일어나고, 주께서 어떤 상황이신지, 또 주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상세하게 묘사되기 때문에 오늘날 이스라엘의 랍비들은 그들의 교인들이 시 22편을 읽는 것을 금하고 있다(이사야 53장도 마찬가지). 한 선교사가 히브리어 성경(구약)을 이스라엘에 반입하기 위해 절차를 진행하다가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이스라엘 당국이 시편 22편과 이사야서 53장이 삭제된 성경만 반입을 허가한다는 것이었다. 왜 그러겠는가? 6학년 수준의 영어나 히브리어를 독해할 수 있는 사람이면 그 선지자들이 누구에 대해 예언하고 있는지 모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그 예언들을 성취시키셨다(앞으로도 그것들을 성취할 사람은 나오지 않는다).
여러분은 24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를 수 있지만 누군가는 여기서 우주의 통제권을 놓고 게임을 벌이고 있는 형국이다. 여러분은 히 1:10-12에서 하나님의 "옷, 겉옷"(vesture, garment)(이 지상에 거니셨던 주의 아들의 옷에 대해서도 같은 표현이 쓰였다)이 등장하는 것을 보는가? 거기서 하나님의 옷은 "하늘들"(히 1:10)이다. 그 로마 보병들은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스타워즈, 스타트랙, "우주전쟁", 배틀스타 갤럭티카, NASA, 아폴로 등에 관련된 행동을 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창조주의 섭리 하에 있는 성좌들, 은하계들, 그리고 성단들을 자기들의 통제권에 두려 시도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날이 올 것이다. "좋다, 내가 땅 위에 있었던 그때 너희는 나를 벌거벗겼지. 너희는 나를 벌거벗기기 원하느냐? 한번 보거라!" 그러자 은하수, 안드로메다, 알파드라코니스 등이 사라지고 거대한 버섯구름 폭발 속에 우주의 모든 것이 날아가는데 그 우주적 MOAB(모든 폭탄의 어머니) 폭탄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졌던 핵폭탄을 장난감으로 보이게 할 정도의 위력을 가졌다(벧후 3:10-12). 그리고 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대의 구원받지 못하고 죽은 죄인들을 큰 백보좌 심판석 앞으로 소환하시는데 그들은 자기들이 멸시하고 저주했던, 모독하고 반역하며 거부했던 그 분이 본연 그대로의 영광과 진노 가운데 나타나 계신 것을 목도하게 될 것이다(계 20:11-12).
여러분이 "럭크만, 그때 당신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방화재질"의 몸을 입고 있으리라 대답하겠다. 알다시피 나는 옷을 입으신 그 분을 붙잡았다. 나는 그 분의 옷(해와 달, 화성, 목성, 금성, 처녀자리, 사자자리 등)에 관심을 둔 게 아니라 그분 자체에 모든 관심이 가 있었다.
"나 이제 어떤 정죄도 두렵지 않네.
예수님, 그분 안의 모든 것이 내 것이네!
영원한 머리 되신 주 안에 나 살아가네.
그리고 거룩한 의의 옷으로 나 입혀졌네."
여러분이 달과 화성에 식민지를 개척하고 정착민들을 늘릴지라도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오히려 붙잡을 것이다. 그리고 수천년이 흐른 후에 여러분은 누가 더 나은 선택을 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25 제삼시가 되니 그들이 주를 십자가에 못박더라.
26 죄명을 쓴 명패가 있었는데 ‘유대인의 왕’이라고 쓰였고,
25절의 "제삼시"는 유대식 시간일 것이다. 그것은 아침 6시에서 9시 사이의 3시간을 가리킨다. 주께서는 오후 3시인 "제구시"까지 십자가에 달려 계셨는데 우리는 오후 3시면 "오후"(afternoon)라 말하지만 유대인들의 시간 개념에서는 그때가 저녁의 시작이다. 주께서는 십자가에서 내려지신 다음 요셉과 니코데모에 의해 "방부처리"되고(요 19:38-39) 오후 6시가 넘기 전에 무덤에 안치되신 후 무덤 입구에 봉인이 쳐졌는데 그제사 주께서 묻히신 첫날 밤이 시작된다(마 12:40).
26절에서는 빌라도가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 걸게 한 "명패"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요 19:19). 복음서의 저자들은 명패의 문구에 대해 각기 부분적으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여러분이 그것들을 합하면 전체 문구를 알 수 있다: "이 사람은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마 27:37; 본문; 눅 23:38; 요 19:19).
눅 23:38과 요 19:20은 그 문구가 세 언어로 기록되어 있었다고 알려주는데 그것들은 노아의 세 아들에서 비롯된 세 인종을 상징한다. (물론 그들의 주장에 대해 나도 안다: "오직 하나의 인종만 있으니 그것은 인류입니다." 이것은 "신(neo) 창조론자들"이 읊어대는 주문 같은 말이다. 그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은 인종차별 폐지론자들, 인종통합론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영어 사전과 성경에 근거해 인종을 정의내리는 것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않게 보인다. 그러니 여러분이 아는 "사실들"과 정의들을 "조화시켜야" 한다. [예를 들자면 이런 식이다. 로드니 킹이 마약에 취한 채 시속 100마일 이상으로 달리는 흉기처럼 고속도로를 질주하다 백인 경찰들에게 잡혔을 때 그는 자신을 체포하려는 경찰들에게 반항하다 두들겨 맞았다. 그것을 복수하겠다고 들고 일어난 흑인 폭도들은 한 백인 남자를 붙잡아 죽을 정도로 구타했는데 결국 로드니 킹은 흑인의 영웅이 된 것이다.]) 그 언어들은 히브리어(셈 - 창 10:22-24), 라틴어(함 - 로마 제국의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쓰였던 공용어), 헬라어(야펫 - 로마 제국의 유럽 지역에서 일반적으로 쓰인 공용어)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모든 사람 - 흑, 백, 황인종, "연노랑 피부색", 혹은 땡땡이 피부를 가진 사람들 모두를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사도행전에서 복음이 온 세상에 퍼질 때 먼저 아프리카 사람에게 갔고(에디오피아 내시 - 행 8장), 동양인에게 갔으며(바울, 유대인 - 행 9장), 그리고 백인 유럽인(코넬료 - 행 10장)에게 전달되었는데 이들은 인류의 세 "가지들"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상 통치를 위해 재림하실 때 그는 "온 땅을 치리할 왕"(슼 14:9)이 되실 것이며 그는 유대인의 도성인 예루살렘에서 통치하실 것이다(슼 14:16). 따라서 이 명패의 문구 안에는 초림과 재림 모두가 압축되어 있다.
26절과 마 27:37은 그리스도의 "죄명"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십자가에 달린 사형수의 머리 위에 죄명을 쓴 명패를 거는 것은 로마의 일반적 관습이었다. 제사장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거기에 죄명을 쓰기 원했다. 그들은 명패에 "자칭 유대인의 왕"(요 19:21)이라 쓰기 원했다. 달리 말하면 그들은 예수께서 진짜 왕이 아니라 정신나간 신성모독자라고 말하기를 원한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만군의 하나님을 피해서 엔드런을 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왕이 십자가에 달려 있고 그는 "최후에 웃게" 되실 것이다(시 2:1-6). 주께서는 민 23-24장에서 구원받지 못한 "근본주의자"를 사용하셨을 때나 요 11:49-51에서 구원받지 못한 한 제사장을 쓰셨던 것 같이 이번에는 구원받지 못한 데다 비겁하고 능글맞으며 냉소적인 정치인 - 상황파악이 안되어 헤매는 - 을 사용하신다. 빌라도는 그 유대인 제사장들에게 "나는 내가 써야 할 것을 썼노라"(요 19:22)고 말한다. 빌라도는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 문구의 한 글자도 고칠 생각이 없었다.
빌라도가 쓴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단지 "죄명"이 아니라 "명패"(요 19:19)였다. 빌라도는 자기 직위를 지키려고 시기심에 사로잡힌 살인자들에게 굴복함으로써 자신의 혼을 저주받게 했을지 모르지만 그럼에도 요 18:36-37과 요 19:7-14 이후 그는 예수께서 누구신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빌라도는 자신이 세 번이나 그리스도를 무죄라 선언했음에도 그 종교 지도자들이 그를 압박하여 사형 판결을 받아내자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이 명패를 쓴 것이다. 이 명패의 강경한 선언 문구는 뒤에 나오는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힌 두 명의 강도들이 예수께 대해 반응하게 하는 근거가 되었다.
27 주와 함께 강도 두 명을 십자가에 못박으니, 한 사람은 주의 오른편에, 또 한 사람은 주의 왼편에 있더라.
28 그리하여 ‘그가 범죄자들과 더불어 헤아림을 받았다.’고 말한 성경이 이루어졌더라.
29 그때 지나가던 자들이 자기들의 머리를 흔들며 주를 모독하여 말하기를 “아하, 성전을 헐고 삼 일 만에 짓는 자여,
30 네 자신을 구원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하니라.
31 선임 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더불어 이와 같이 그들 가운데서 조롱하며 말하기를 “그가 남은 구원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구원할 수 없도다.
32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여, 십자가에서 지금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보고 믿으리라.”고 하더라. 그리고 주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자들도 주께 욕하더라.
27절은 인간의 속성을 간단히 요약해서 보여준다. 그 세 십자가에는(에델버트 벌링거는 십자가에 다섯 명이 달렸다고 주장하는데 두 강도, 두 "행악자"[눅 23:32], 그리고 그리스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 구식 "극단적 세대주의자"는 생명의 빵을 너무 잘게 썰어서 부스러기로 만들어 버렸다) 지구상에 살았던, 또 살게 될 모든 남녀들의 모습이 담겨 있다.
가운데 십자가에는 죄 없으신 분이 달려 있다. 그는 죄가 전혀 없는 분이었지만(고후 5:21) 우리의 죄들을 대신하기 위해 죄를 갖고 계셨다(히 9:28). "그는 범죄자들과 더불어 헤아림을 받았으나"(28절 - 사 53:12의 성취) 그것은 육체적, 영적인 면에서 그랬다.
그리스도의 한편에 달린 강도는 행인들과 선임 제사장들처럼 주를 모독했다(29-31절 참고. 눅 23:39). 그는 자신 안에, 또 위에 죄를 갖고 있었다. 그는 그 상태대로 죽어서 지옥에서 깨어났다.
그리스도의 다른 편에 못박혀 있던 죄인이 있었다. 의심의 여지 없이 그는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합당한 벌을 받고 있음을 인정했다(눅 23:41). 처음에 그는 다른 강도처럼 하나님을 비난했지만 그 상태로 머물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를 믿었고 주와 함께 본향 낙원에 갔다. 그는 더 이상 단순한 죄인이 아니라 구원받은 죄인이 되었다. 그의 안에 남아 있던 죄는 더이상 그에게 머물지 않았다. 그 죄들은 "중간에 계신 분"에게 전가되었다(롬 4:8).
그 회심한 강도는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 그의 행동들에 의해서는 아니다. 그는 침례받을 수 없었다. 그는 "성령 침례의 초기 증거인 방언들을 말할 수" 없었다. 그는 황금률이나 십계명을 지키지도 않았고 그가 저질러온 악한 일을 상쇄할 정도의 선한 일을 할 시간도 없었다. 그는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 어떤 일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여기에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만 구원받은 한 죄인이 등장한다. 물론 여러분이 믿고 구원받는 그것과는 다른 믿음이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죄들을 위해 죽으시고 여러분을 의롭게 하시려고 부활하신 사실을 "성경대로"(고전 15:1-4; 롬 4:24-25) 믿을 때 구원받는다. 여러분이 그것들 외에 다른 무엇을 믿었다면 절대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갈 1:8-9).
이 구원받은 강도는 여러분처럼 구원받지 않았다. 여러분은 "무슨 말씀 하시는 거에요, 럭크만?"이라 말할 수 있다. 그 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직 죽으시고 부활하시기 전이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오며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니라"(롬 10:17). 그렇다면 그 강도가 "하나님의 말씀"의 어떤 부분을 "들었기에" 그것이 구원받을 수 있는 믿음을 그 안에 형성시킨 것인가? 물론 고전 15:3-4은 아닌데 그 회심한 강도는 그런 말씀을 도무지 듣지 못했다.
그러나 그 강도가 읽고 반응하게 한 뭔가가 있었다. 그는 예수께 "주여, 주께서 주의 왕국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라고 말했다. 어떤 "왕국" 말인가? 예수께서 어떤 "왕국"의 왕이 되실 것이라는 사실을 그는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우리는 그 강도가 잡혀서 사형수가 되기 전에 예수에 대해 들었거나 그의 말씀을 직접 들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추측에 의하지 않고 순수하게 성경에 근거해서 알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그 강도는 주의 머리 위에 있는 명패의 글귀를 읽었다: "이 사람은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라."
그 문구는 다른 강도도 읽었지만 둘의 차이점은 구원받은 강도의 경우 그것을 "사람들의 말"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었다는 것이다(살전 2:13). 이제 여러분은 왜 그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로마 총독이 구원을 받지 못했다고 내가 말하는지 알 것이다. 빌라도는 구원받지 못한 이방인 다신교도였을지 모르지만 그가 그리스도의 명패를 쓸 때 그는 진리를 썼던 것이고, 비록 그가 그 진리와 마주하고 있을 때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랬다(요한복음 주석서에서 요 18:38 주석을 보라). 만일 빌라도가 그 유대인 제사장들의 말을 따라서 그리스도께 합당한 칭호 대신 단지 죄명만 기록했다면 그 문구는 절반의 진실이 되었을 것이고 누구나 알다시피 절반의 진실은 완전한 거짓말이다.
킹제임스 성경이 "하나님의 보존된 말씀"이라고만 시인하는 것이 부족한 고백인 이유가 여기 있다. 그 말도 진리이지만 그것은 온전한 진리와 유일무이한 진리에 대한 고백이 아니다. 권위역 성경은 신정통주의자들의 가르침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보존하신 어떤 "메시지"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언어로 만들어 주신 오류가 입증되지 않은 성경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영어로 주신 온전한 성경이며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딤후 3:16)이다.
회심한 강도는 명패의 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고 그는 자신이 읽은 것을 믿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그는 구원받았는데 믿었다는 증거로 그는 주의 이름을 불렀다(롬 10:14을 보라): "주여..." 라고 했지 현대 역본들처럼 "예수여"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 변개는 고대의 이단 사상인 "단일신론"과 상관이 있는데 그 이단들은 인간 예수가 침례받을 때 "그리스도"가 임하여 그를 하나님이 되게 했고 십자가에서 예수를 떠났다고 가르치는데 그렇다면 그는 단지 인간으로 죽으신 게 된다. 예수께서는 "예수"로 태어나시기 전에도 하나님이셨다(미 5:2을 보라). 그는 하나님이 아니셨던 적이 없고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도 하나님이셨다. 주의 지상 사역 때만큼이나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도 그는 "주님"이셨다. 현대 "성서들"은 죄인이 주의 이름을 고백하는 대목들에서 그리스도의 신성을 제거하고 있다(사도행전 주석서에서 8:37, 9:6 주석을 보라).
막 15장 29절로 돌아와서: "아하, 성전을 헐고 삼 일 만에 짓는 자여." 이것은 주께서 카야파 앞에서 부당한 재판을 받으실 때 씌워진 거짓 고소 내용이었는데 그것에 대해서는 14:58을 보라. 그때 그들은 주께서 하신 말씀을 왜곡하여 고소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하고 있다. 주께서는 헤롯 성전을 허물겠다고 하신 적이 없고 그것을 삼 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말씀하지도 않으셨다. "원문"으로 돌아가서 요 2:19-21을 보라. 주님 자신이 아닌 그들이 성전을 허물 것인데 그 성전은 "성전 된 자기 몸"(요 2:21)이었지 헤롯 성전이 아니었다. 그들은 주의 말씀을 왜곡하면서도 주께서 하신 말씀을 그들이 의도하지 않은 채 성취시키고 있었다.
31절: "그가 남은 구원하면서도 자기 자신은 구원할 수 없도다." 이것은 사탄에게 어울리는 칭호가 아닌가? 사탄은 29절에서 자신의 자녀들에게(요 8:44) 거짓말을 시켰는데 그것은 "몇 개의 좋은 사과를 그 위에 올려놓지 않으면 바구니에 가득 찬 나쁜 사과를 팔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앞부분의 참말을 하고 나서 곧바로 그 뒤에 거짓말을 했는데 그들이 정말 앞부분의 그 말처럼 생각했던 것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구원하실 수 없었는데 그것은 주께서 힘이 없으셨기 때문은 아니다. 주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가 지금이라도 나의 아버지께 간구하여 나에게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즉시 보내 달라고 할 수 없는 줄로 생각하느냐?"(마 26:53). 그러나 주께서는 그러실 수 없었는데 이는:
1. 성경이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마 26:53).
2. 주께서는 아버지의 뜻에 복종하고자 하셨고(막 14:36) 그래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잔을 드셨다(요 18:11).
3. 주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여러분과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없었다(벧전 3:18).
그 중 마지막 부분은 사탄이 그리스도께 자신을 구원해 보라고 유혹한 간교한 미혹이었는데, 주께서 그렇게 하셨더라면 우리는 저주받았을 것이다. 레즈비언들, 호모들, 그리고 사회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아들의 대속적 죽음을 성부 하나님에 의한 "아동 학대"라 부르면서 조롱한다. 그런 태도는 현실과 "절연된" 것이다. 역사는 어떤 남자(혹은 여자)가 더 위대한 선을 이루기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준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어떤 사람들이 독일과 일본이 쳐들어와서 이 나라를 점령하지 못하게 싸우러 나가야 했다. 징병 위원회는 "너, 그리고 너"라고 말했다. 그것은 "아동 학대"에 해당하지 않는가? 그들은 젊은 청년들이었고 중년이나 장년이 아니었다. 이런 속담이 있다: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노인들이지만 가서 싸우는 것은 젊은이들이다." 그러나 그들 모두가 군대에 끌려간 것은 아닌데 "4-F"(불합격) 등급을 받은 오디 머피 같은 사람은 체중 미달이었지만 바나나를 먹고 몸을 불려서 전쟁에 나갔고 15살짜리 아이들이 나이를 속이고 군대에 들어가기도 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억지로" 갈보리로 가도록 몰아세워지신 적이 없다. 주께서는 자원하셨다. 주께서는 그 일이 필요한 줄 아시고 스스로 그 책임을 맡으셨다. 주께서는 (문자 그대로) 그 난국에 스스로 대처하셨다. 주께서 자신을 구원하실 수 없으셨다면 그것은 그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주께서는 자신을 구원하지 않으셨고,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지옥 외에 갈 곳이 없었을 것이다.
32절: "이스라엘의 왕 그리스도여, 십자가에서 지금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보고 믿으리라." 주께서 그 말에 응하셨다면? 여러분은 그들이 주를 믿었을 것이라 생각하는가?
절대 아니다. 그들은 주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시는 것과 마귀들을 쫓아내시는 것, 소경을 보게 하시는 것과 죽은 사람들을 살리고 수천 명을 기적적으로 먹이시는 사건(두 번이나!)을 보았다. 그런 기적들을 보았던 그들이 믿었는가? 물론 아니다!
눅 16장의 부자가 죽어 지옥에 갔을 때 그는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부탁하기를 나사로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려 보내어 부자의 다섯 형제들에게 지옥을 경고하게 해 달라고 말했다(눅 16:27-28). 아브라함이 그 늙은 탕아에게 어떻게 대답했는가? "만일 그들이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비록 누가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난다 해도 그들을 설득할 수 없을 것이니라"(눅 16:31).
그것과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나사로"가 죽은 자들로부터 살아나자 그 제사장들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는 것을 막으려고 나사로를 죽이려 했다(요 12:10-11). 사도행전을 보면 그리스도 자신이 죽을 자들로부터 살아나신 후 제사장들은 사도들의 입을 막아 보려고 밤낮으로 대책을 강구하며 애쓰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셨다면 그 자들은 한 마음이 되어 주를 다시 십자가에 매달아 보려고 애썼을 것이다.
33 제육시가 되니 어두움이 온 땅에 덮여 제구시까지 가더라.
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큰 음성으로 소리지르며 말씀하시기를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타니.” 하시니, 해석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이더라.
35 그 곁에 서 있던 사람들 가운데 몇 사람은 이 말을 듣고 말하기를 “보라, 그가 엘리야를 부른다.”라고 하니
36 한 사람이 달려가 해면에 식초를 흠뻑 적셔 갈대에 꿰어서 마시라고 주는데, 말하기를 “가만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내려놓는가 보자.”고 하더라.
33절의 "제육시"는 "정오 때"이고 "제구시"는 오후 3시를 말하는데 그 때는 유대인의 "저녁"이 시작될 무렵이다. 그 세 시간 동안 초자연적인 "어두움"이 임하는데 그것은 흔히 하나님께서 주를 "우리를 위하여 죄로 삼으신 것" 때문에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34절)를 완전히 버리신 증거라고 설명한다. 그 현상은 일식과는 무관한 것이었다(마 27:45과 눅 23:45의 주석을 각 주석서들에서 확인하라). 만월 때에는 일식이 일어날 수 없는데 유월절은 항상 보름달이 뜰 때에 겹쳐진다.
오후 3시가 되자 모든 것이 끝났다. 그때 예수께서는 "엘로이, 엘로이, 라마 사박타니?"라고 외치신다. 그것은 아람어 문장으로(5:41 주석을 보라) 시 22:1에서 따온 것이다 -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주께서는 나를 버리셨나이까?"
주께서 죽으실 때 "그리스도"가 "예수"를 남겨두고 떠났다는 주장은 허튼 소리에 불과하다(상기 회심한 강도의 주석을 보라). 주께서는 "나의 아버지"라 부르지 않으시고 "나의 하나님"이라 부르셨다. 이것은 성자 하나님이 성부께 올리는 말씀이 아니라 인자가 그의 하나님께 부르짖는 말씀이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는 말씀이다.
이제 그 근처에서 듣고 있던 사람들에게 주의 말씀은 다르게 해석되었다: "보라, 그가 엘리야를 부른다"(35절). 이것이 빈정대는 말인지 아닌지는 확실치 않다(다음 구절을 보면 비웃는 말은 아닌 듯 하다). 그들이 "엘로이"를 "헬리오스"로 혼동했던지, 혹은 냉소적으로 언어 유희를 하는 것이든간에 그들에게는 메시아의 오심에 동반되는 엘리야의 출현(말 4:5)을 기대할 이유가 있었다("Elias"는 Elijah의 헬라어식 표현이다).
36절에서 다시 한번 NASV와 ESV 번역 위원회의 배교한 번역자들과 개정자들은 로마 카톨릭의 발효된 포도주를 구주의 목구멍에 흘려보내려고 한다(23절 주석을 보라). 그 두 가지 변개된 성경들은 36절의 헬라어 oxos를 "신 포도주"로 번역했다. 그들은 순수하고 거룩하신 구세주를 술에 쪄든 자기중심적 신성모독자 교황처럼 만들려 하는 것이다.
37 그때에 예수께서 큰 음성으로 소리지르신 후 숨을 거두시니
38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더라.
39 주의 맞은편에 서서 주께서 그렇게 소리지르고 숨을 거두신 것을 본 백부장이 말하기를 “참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하더라.
37절에서 예수께서 소리지르시는 것에 대해 마가는 그 내용을 기록하지 않는데 요한과 누가는 그것을 기록했다. 그 두 말씀은 그리스도의 "가상칠언" 가운데 마지막 두 가지 말씀에 해당한다. 나는 이것들에 대해 요 19:25-30과 눅 23:34에서 충분히 다루었으니 여기서는 반복하지 않겠고 그 주석서들의 내용을 참고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하신 두 말씀은 이렇다:
1. 승리의 말씀: "다 이루었다"(요 19:30). 이 말씀을 하시기에 앞서 예수께서는 대제사장의 입장으로 이런 기도를 하셨다: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그 일을 완성하였나이다"(요 17:4). 주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인자도...많은 사람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몸값으로 주려고 온 것이라"(10:45). 이제 그 사역이 끝났다.
"다 이루었다." 속죄가 끝났다. 그 사역은 매주 일요일 아침 로마 카톨릭 미사에서 "피없는 방식"으로 되풀이될 필요가 없다. "한 번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드리심으로 우리가 거룩하게 된 것이라"(히 10:10, 바티칸 사본의 히브리서가 왜 9:14 이후로 완전히 삭제되어 있는지 그 이유가 여기 있다 - 그들은 십자가 사건이 우리의 죄들을 위한 마지막 희생제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영어의 이텔릭체 부분("for all")을 삭제한다고 해서 칼 키팅과 로마 카톨릭 사제 집단에게 하등 도움이 될 것은 없다. 그리스도의 문자적 몸을 드리는 희생제는 여전히 "한 번" 뿐이지 반복되지 않는다.
2. 만족과 체념의 말씀: "아버지시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나이다"(눅 23:4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셔야 할 때가 되기 전에 죽으실 수 없었다. 주께서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내려놓지 않으셨다면 지금까지도 십자가에 달려계셨을 수 있다(요 10:18).
37절로 돌아와서: "숨을 거두시니."(gave up the ghost) 이 표현은 "사망하다"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이것이 헬라어에서는 ekpneo이고 히브리어에서는 gava이다. 그 표현은 틴데일 성경에서도 발견되지만 킹제임스성경으로 인해 보편적으로 쓰이게 된(세속 언어학자들을 포함하여) 표현이다.
ESV 같은 변개된 현대 역본들은 이 표현을 대체하기 위해 "expired"나 "breathed out his last" 같은 말을 집어넣었는데 그것들은 인간의 기본 속성에 대한 정의를 모호하게 하는 표현들이다. 성경에서(AV 1611에서, ESV 같은 따라쟁이들 말고) 사람은 몸, 혼, 영의 존재로 정의된다(살전 5:23). 사람이 죽을 때 그의 몸은 무덤에서 썩게 되는데 그 몸은 휴거 때 부활하거나(구원받은 경우) 큰 백보좌 심판 때 부활할 것이다(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경우). 죽은 사람의 혼은 하늘나라나 지옥으로 간다(눅 16:22-23). 그러나 "영은 그것을 주셨던 하나님께로" 돌아간다(전 12:7).
그리스도께서 신성과 인성을 겸비하셨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성령이 몸의 형태로 충만히 거하시는 분으로서 아버지와 함께 계신 분이요(요 10:30, 14:9) 하나님의 독생자이실 뿐 아니라(KJV의 요 1:18에서; NASV, NIV, 혹은 ESV를 놓고 고민하지 말 것은 그것들을 통해서는 여러분이 두 명의 하나님을 믿게 되기 때문이다: 태어난 하나님과 태어나지 않은 하나님) 주께서는 사람의 몸, 사람의 혼, 그리고 사람의 영도 가지셨다. 46절에서 보듯이 사람의 몸에 해당하는 부분이 무덤에 들어가셨던 것이다. 사람으로서 주의 혼은 낙원으로(눅 23:43), 또 지옥으로(행 2:27) 내려가셨다(엡 4:9). 그러나 사람으로서 주의 영, 곧 그의 영(ghost)은 아버지께로 돌아갔다.
현대의 변개된 성서들은 그 단어가 하나님의 영에 쓰였건 사람의 영에 쓰였건 "ghost"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킹제임스 성경의 다른 많은 단어들처럼 이 "ghost"라는 단어도 독일어에서 유래되었는데 그 독일어 단어는 geist이다. 그 뜻은 "영"인데 선한 영과 악한 영, 사람, 마귀, 혹은 천사의 영 등 어떤 영에도 쓰일 수 있다. 그래서 과학적이고 정확한 권위역 성경은 요 4:24에서 "하나님은 한 영이시니"(God is A Spirit)라 했는데 ESV는 저자의 의도를 흐리는 표현인 "God is spirit"(하나님의 영이시니)이라 해 놓았다.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영들이 있는데 마귀는 영이고 여러분도 영을 가졌으며 심지어 개, 고양이, 박쥐 등도 영이 있다. 여러분은 그들 모두가 "하나님"이라 생각하는가? 어리석지 말고 현명해지라.
그러나 우리가 ghost라는 단어에서 이해해야 할 것은 그 말이 단순히 그 사람의 영을 뜻할 뿐 아니라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그의 영적 현현을 가리키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눅 23:46에서는 그 구분이 되고 있다 - "아버지시여, 내 영(spirit)[이 말씀을 하시는 주께서는 아직 살아 계시다]을 아버지의 손에 의탁하나이다.”라고 하시고, 이 말씀을 마치신 후 숨을 거두시니라(gave up the GHOST)[죽으셨다]."
그렇기에 여러분은 성경의 저자이신 그 분께서(벧후 1:20-21) 자신에 대해 가장 즐겨 쓰시는 호칭이 무엇인지 아는가? 그것은 Holy Ghost인데 이 호칭은 킹제임스성경에 90회 쓰였는데, 반면 Holy Spirit은 단 7회만 쓰였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The Spirit of God"(하나님의 영)은 "the Spirit of Christ"(롬 8:9; 벧전 1:11)이기 때문이고 그리스도는 사람으로 죽으셨기 때문이다.
"성전의 휘장"이 찢어지는 사건이 여기 막 15:38에 기록되었는데 마 27:51-53, 눅 23:45에도 나온다. 그런데 사건의 세부사항을 기술한 것은 마태복음 뿐이다. 휘장이 찢어질 때 지진이 일어났다. 따라서 휘장만 찢어진 것이 아니라 "바위들"도 갈라졌다(마 27:51). 그 일이 일어날 때 "무덤들이 열리며"(마 27:52) 그 무덤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토요일 저녁 6시 이후 무덤에서 부활하실 때까지(마 27:52-53) 열린 채로 있었다. 주께서 무덤에서 일어나실 때 예루살렘 외곽에 묻혀있던 많은 구약 성도들도 같이 부활했는데 그들은 "거룩한 도성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다(마 27:53).
그런데 그때 모든 구약 성도들이 부활한 것은 아니고 "많은" 숫자가 부활했다. 다윗 왕은 "죽어 장사되어서" "그의 묘" 가운데 지금도 남아 있다(행 2:29). 부활한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 많은 사람들에게 나타났는데 그들은 죽은지 얼마 안되었고 쉽게 알아볼 수 있는 성도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만일 그들이 오래전 시대의 구약 성도들이라면 하나님께서 예루살렘 거민들에게 초자연적인 인지능력을 주셔서 그들을 알아보게 하셨을 것인데, 이는 마치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변형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났을 때 즉각 누구인지 알아보았던 것과 같을 것이다. 만일 선한 대제사장 여호야다(왕하 11장) 같은 이가 살아나서 카야파 앞에 나타나서 며칠 전 예루살렘에서 발생한 일에 대한 자기 생각을 말했다면 어떻겠는가?
39절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실 때 회심한 백부장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백부장은 백 명이 병사를 거느린 지휘관이다(라틴어에서 cent는 100을 뜻한다. 그래서 century가 100년인 것이다). 보통 갈보리 사건은 한 명의 백부장과 그의 휘하에 있는 네 명의 병사가 진행한 것으로 나온다. 따라서 이 사람은 "C.O."(Commanding Officer: 부대장)이었다. 아마 이 백부장은 전에 많은 십자가 처형을 해 보았을 것인데 그리스도의 처형은 이전 경우들과 전혀 달랐다.
그 백부장은 예수의 십자가를 감독하면서 우리가 22절부터 다루고 있는 모든 것들을 듣고 보았다. 그는 구원받은 강도의 회심을 보았다. 그는 선임 제사장들의 야유와 조롱을 보았다. 그는 가운데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 하나님께 외치자 해가 빛을 잃는 것을 보았다. 그는 주께서 고통 가운데 자신의 모친을 제자에게 맡기시는 것을 보았다(요 19:27). 그는 주께서 자신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음료 마시는 것을 거부하시는 것을 보았다. 그는 주께서 자신에게 고통을 준 자들을 용서하시는 말씀을 들었고(눅 23:34) 그는 주께서 마지막으로 승리의 외침을 부르짖는 것을 들었고 주께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자신을 아버지께 의탁하시는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다. 그 모든 것을 경험하고 난 백부장은 "참으로 이 사람은 의인이었도다"(39절 참고. 마 27:54)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진이 일어났을 때 백부장은 새로운 것을 깨달았는데 그는 이 "유대인의 왕"이신 분이 단지 인간이 아닌 그 이상의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참으로 이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39절 참고. 마 27:54). 그 백부장은 선임 제사장들, 서기관들, 그리고 유대인 장로들보다 더 많은 것을 알았던 것이다(참고. 마 27:4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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