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숨가(一息歌)
참계돌게 찾다보면
그인생사 어찌할꼬!
주역오행 만나더니
어떤이는 호위호식
주역점서(占書) 만난순간
누가아니 노예런가
이것저것 다버리고
ᄒᆞᆫ얼ᄯᅡ님 아라보라
글자몇개 더듬어서,
써보나니 혜량하소!
공부하고자 하신분들께서 생각해 봐야 할게 몇가지가 있을 것이라.
1. 한문 원문 해독이 안되고서야, 어찌 공부를 할 수 있겠으며
2. 그 많은 서적들 중에 어떤 책을 선택해야 하는거고
3. 기존 관념, 동양학이라 불리우는 주역에 음양오행, 하도낙서 어찌할꼬?
4. <천지공사(天地公事)> 의 핵심 키워드가 무엇인가?
위백양(魏伯陽)은
종리권(鍾離權), 여동빈(呂洞賓)도 몰랐던가,
어찌하야 주역(周易)은 불러들였으며,
이상호(李祥昊)는
대순전경(大巡典經)에 주역(周易)은 왜 끼워 넣었던가?
(물론, 현무경에 등장^^)
평생을 (ᄒᆞᆫ얼님) 공부(工夫) 하신분 들이
<삼일신고(三一神誥)>, <중화경(中和經)>을 모른다니~~
등, 일것인바,
이 모두는 지난한 문제들 입니다.
관련된 핵심 서적을 만나는 문제도 있겠으나,
더 큰 문제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다들 왜곡, 조작된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황제 내.외경은 왜 만지작 거렸던가?
종리권의 전도집(傳道集) 은
최소 3가지 이상의 판본을 놓고 비교 해야하며
여동빈(呂洞賓)의 태을금화종지(太乙金華宗旨)는
고본을 찾아 봐야 할것이고
여동빈(呂洞賓) 이후의 책들은 삼가 조심 해야 하나
나름 정리가 잘된 책이 몇가지 있지만,
인연 있는 분들이나 만날 수 있을지라.
북창선생의 용호비결(龍虎秘訣)도,
우리의 도가서(道家書)라 말하고 싶겠지만
나름 한계가 있었는지~
일찍 요절(夭折) 하시었고
(그 후로 다들...)
우리 고유의 공부, 수행법(修行法)은
색부루(索弗婁) 단군혁명 이후로
백이(伯夷) 숙제(叔齊) 그 분들
멋쟁이 할배~님들과 함께
자취를 감추어 버렸나니~
글이 있다 한들~~~
그 누구가,
그 어찌 알 수 있으리오!
그 모두, 대부분이
지나(支那)~~ㅉㅌ인,.것을...(짝퉁 주역)
선지후각(先知後覺)이라 하시나니...
일심정성으로
공부에 매진한다면,
각이 열리시와~
인도하는 바가 있을것 이라는 점은
감히 말해 드릴 수 있겠도다. - 雲O -
참동계(參同契)는
"고문참동계(古文參同契)" 만 보면 충분 할듯합니다.
"고문참동계(古文參同契)"에서는
"주역(周易)"이 ~~~^^
원문은 만나기 힘드실껍니다. (사본 보기)
해설한 책이나, 글들이 몇몇 있으나
원본자체를 누군가 손대어 어긋난 글자가 종종 있고
옛 글자(字)라 찾기 힘들어,
유추 해석한 부분이 많이 보입니다.
고문참동계(古文参同契) 올려 봅니다.
(복사 안되지요?^^)
(1주일 정도 정성이면, 나름 해결 하실껍니다.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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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문참동계(古文参同契)
<<上篇>>
乾剛坤柔 配合相包 陽稟隂受 雄雌相須 須以造化 精氣乃舒
坎離冠首 光耀垂敷 玄㝠難測 不可畫圖 聖人揆度 參序元(玄)基
四者混沌 徑入虛無 六十卦周(用) 張布爲輿 龍𢒧(馬)就駕 明君𡕺(御)時
龢(和)則隨从 路平不邪 邪道險阻 傾危國家
君子居其室 出其言善則千里之外應之謂萬乘之主 處九重之位 發號出令
順隂陽節 蔵器俟時 勿違卦月俞作日 屯以子申 用寅戌餘 六十卦俞作 六十卦用 各自有日
聊陳兩象 未能究悉 立俞作在(立)義設刑 當仁施徳 逆之者凶 順之者吉
按立法令 至誠專宻 謹候日辰 審察消息 纎芥不正(生) 悔吝爲賊
二至改度 乖錯委曲 隆冬大暑 盛夏霜雪 二分縦橫 不應漏刻 水旱相伐
風雨不節 蝗蟲湧沸 羣異旁出天見其怪 山崩地裂 孝子用心(逆賊) 感動皇極
近出已口(鼎) 遠流殊域 或以招禍 或以致福 或興太平 或造兵革 四者之來(中) 由乎胸臆
動靜有常 奉其繩墨 四時順宜 與氣相得 剛柔斷矣
不相涉入 五行守界 不妄盈縮
易行周流 屈伸反覆 幽潛淪匿 𢒟(變)化於中 包嚢萬物 爲道紀綱 以無制有
器用者(皆)空 故推消息 坎離没亡
言不茍造 論不虛生 引騐見效 校度神明 推類結字 原理𨤒證 坎戊月精 離巳日光
日月爲易 剛柔相當 土暀(王)四季 羅絡始終 青赤白黑 各居一方 皆稟中宮 戊巳之功
晦朔之間 合符行中 混沌洪濛 牝牡相從 滋液潤澤 施化流通 天地神明 不可度量
利用安身 隱形而匨(藏) 始於東北 箕斗之鄉 (左)旋而右轉 嘔輪吐萌 潛潭見象 發𢿨(散)清光
昴畢之上 震出爲徴 陽氣造端 初九潛龍 陽以三立 隂以八通 三日震動 八日兌行
九二見龍 和平有明 三五徳就 乾體乃成 九三夕惕 虧折神符 盛衰漸革 終還其初
巽繼其(陰)統 固濟操持 九四或躍 進退道危 艮主進止 俞作止進 不得逾時 二十三日
典守弦期 九五飛龍 天位加喜 六五坤承 結括終始 韞養衆子 世爲類母 上九亢龍
戰徳于野 用九翩翩 爲道規矩 陽數已訖 訖則復起 推情合性 轉而相與 循環璇璣
升降上下 周流六爻 難可(以)察覩 故無常位 爲易宗祖
朔旦爲復 陽炁始通 出入無疾 立表㣲剛 黄鍾建子 兆乃滋彰(享) 播施柔暖 黎蒸得常
臨爐施條 開路生光 光耀漸(寢)進 日以益長 丑之大呂 結正低昂 仰以成泰 剛柔並隆
隂陽交接 小往大來 輻輳於寅 運(移)而趨時 漸歴大壯 俠列卯門 榆莢墮落 還歸本根
刑徳相負 晝夜始分 夬隂以退 陽升而前 洗濯羽翮 振索(京=掠)宿塵 乾健盛明 廣被四鄰
陽終於已 中(終)而相干 姤始紀序 履霜最先 井底寒泉 午爲(主)蕤賓 服於隂隂
爲主人遯 (㔺去位)去世位 收斂其精 懐徳俟時 棲遲昧㝠 否塞不通 萌者不生
隂伸陽屈 沒陽姓名
觀其權度 一作權量 察仲秋情 任蓄㣲稚 老枯復榮 薺麥芽蘖 因冒以生 剥爛支體
消滅其形 化氣既竭 亡失至神 道窮則返 歸乎坤元 恒順地理 承天布宣 玄幽逺眇
隔閡相連 應度育種 隂陽之元 寥廓恍惚 莫知其端 先迷失軌 後爲主君 無平不陂
道之自然 𢒟易衰盛 消息相因 終坤復始 如循連環
帝王乘御 千載常存 御政之首 鼎新革故 管括微密 開舒布寶 要道魁柄(杓) 綂化綱紐
爻象內動 吉凶外起 五緯錯順 應時感動 四七乖戾 誃離俯仰(朱子曰當作仰俯)
文昌統録 詰責台輔 百官有司 各典所部 原始要終 存亡之緒 或君驕溢 亢滿違道
或臣邪佞 行不須軌 弦望盈縮 乖變凶咎 執法刺譏 詰過貽主 辰極處正 優游任下
明君布政 國無害道
<<中篇>>
將欲養性 延命却期 審思後未 當慮其先 人所稟軀 體本一无 元精雲(流)布 因炁託初
陰陽爲度 魂魄所居 陽神日魂 陰神月魄 魂之與魄 互爲室宅 性主處內 立置鄞鄂
情主營外 築完城郭 城郭完全 人物乃安 爰斯之時 情合乾坤 乾動而直 氣布清流
坤靜而翕 爲道舎廬 剛施而退 柔化以滋 九還七返 八歸六居 男白女赤 金火相拘
則水定火 五行之初 上善若水 清而無瑕 道之形相 真一難圖 𢒟而分布 各自獨居
類如雞子 白黒相符 縱廣一寸 以爲始初 四支五蔵 筋骨乃俱 彌歴十月 脫出其胞
骨弱可巻 肉滑若飴
坎男爲月 離女爲日 日以施徳 月以舒光 月受日化 體不虧傷 陽失其契 陰侵其明
晦朔薄蝕 掩冒相傾 陽消其形 陰凌災生 男女相胥 含吐以滋 雌雄錯雜 以類相求
金化爲水 水性周章 火化爲土 水不得行 男動外施 女靜內藏 溢度過節 爲女所拘
魄以鈐魂 不得淫奢 不寒不暑 進退合時 各得其和 俱吐証符
關關雎鳩 在河之洲 窈窕淑女 君子好逑 雄不獨處 雌不孤居 玄武龜蛇 蟠糾相扶
以明牝牡 竟當相須 假使二女 其室顔色 甚姝蘇秦 通言張儀 合媒發辯 利舌奮舒
美辭推心 調諧合爲 夫妻弊髪 腐齒終不 相知若藥 物非種名 類不同分 兩參差失
其綱紀雖 黃帝臨爐 太乙執火 八公擣煉 淮南調合 立宇崇壇 玉爲階陛 麟脯鳯腊
把籍長跪 禱祝神祗 請哀諸鬼 沐浴齋戒 冀有所望 亦猶和膠 補釜以磠 塗瘡去冷
加冰除熱 用湯飛龜 舞蛇愈見 乖張
上徳無爲 不以察求 下徳爲之 其用不休
上閉則稱有 下閉則稱無 無者以奉上 上有神徳居 此兩孔穴法
金氣亦相須 知白守黑 神明自來 白者金精 黒者水基 水者道樞 其數名一 陰陽之始
終含黃芽 五金之主 北方河車 故鉛外黑 內懐黃華 被褐懐玉 外爲狂夫 金爲水母
母隱子胎 水爲金子 子藏毋胞 真人至妙 若有若無 髣髴大淵 乍沉乍浮 退而分布
各守境隅 採之類白 造之則朱 煉爲表衛 白裏貞居
方圓徑寸 混而相扶 先天地生 巍巍尊髙 旁有垣闕 狀似蓬壺 環匝關閉 四通踟蹰
守禦密固 閼絶姦邪 曲閣相連 以成(戒)不虞 可以無思 難以愁勞 神氣滿室 莫之能留
守之者昌 失之者亡 動靜休息 常與人俱
內以養已 安靜虛無 原本隱明 內照形軀 閉塞其兌 築固靈株 三光陸沉 温養子珠
視之不見 近而易求
<<下篇>>
維昔聖賢 懷玄抱眞 服煉九鼎 化迹隱淪 含精養神 通德三光(元)
精溢腠理 筋骨緻堅 衆邪辟除 正氣常存 積累長久 化形而仙
憂憫後生 好道之倫 隨傍風采 指畵古(皷)文 著爲圖籍 開示後昆
露見枝條 隱藏本根 托號諸名(砳) 覆謬衆文 學者得之 韞櫝終身
子繼父業 孫踵祖先 傳世迷惑 竟無見聞 遂使宦者 不仕農夫 失耘商人
棄貨志士 家貧吾甚 傷之定錄 此文字約 易思事省 不繁披列 其條核實
可觀分兩 有數因而相循 故爲亂辭 孔竅其門 智者審思 以意觀焉
此魏公述已 著書言 神丹之意以起 下文
河上奼女 靈而最神 得火則飛 不見埃塵 鬼隱龍匿 莫知所存 將欲制之 黃芽爲根
物無陰陽 違天背元 牝鷄自卯 其雛不全 夫何故乎 配合未連 三五不交
중략(中略)
若以 野葛一寸 巴豈一兩 入喉輒僵 不得俛仰 當此之時 周文搮蓍 孔子占象
扁鵲投鍼 巫咸叩鼓 安能令甦 復起馳𧺆
※ 뜻있으신 분께서는
열공해 보시지요.
괄호 안,
ex) "𢒟(變)" or " 成(正)"
〔"𢒟"는 "變"字〕, 〔"成"는 "正"의 뜻) 이라는 의미 입니다.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
- 魏伯陽
위백양(魏伯陽)은 강소성에서 태어났으며, 후한(後漢) 환제(桓帝, 재위 147~167) 시대의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당시 출세를 위해서는 반드시 공부해야 했던 유학(儒學)에는 도통 관심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연단술(煉丹術 : 먹으면 신선이 된다는 묘약의 제조법) 연구에만 몰두했다. 그리고 제자 세 사람과 함께 산 속으로 들어가 수행을 쌓은 후에 금단(金丹 : 불로장생의 영약)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한다. 그러나 제자들의 수행이 아직 충분치 않다는 것을 알고 그들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금단을 완성하기는 했지만, 아직 염려되는 바가 있다. 그래서 개에게 먹여볼까 생각 중이다. 만약 이 약을 먹은 개가 하늘을 날 수 있다면 인간이 복용해도 생명에는 별 지장이 없을 게야."
그런데 금단을 받아 먹은 개는 어이없게도 이내 죽고 말았다.
"이 무슨 일인고. 난 이 영약을 만드는 데 심혈을 기울여왔다. 용케 완성했다 싶었더니 그것을 먹은 개가 죽어버리다니. 우리가 만든 약은 아직 금단에 이르지 못한 것 같구나.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제자들이 위백양에게 말했다.
"스승님께서도 이 약을 드실 생각이신지요?"
"나는 세상을 등지고, 가족도 모두 버리고 산으로 들어왔다. 도를 깨닫지 못했으니 염치없지만 다시 돌아가는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런 부끄러움을 당하고 싶지는 않아. 죽어도 천명, 살아도 천명이야. 나는 이 약을 먹을 생각이네."
그러고는 금단을 입에 털어넣고 순식간에 죽어버렸다. 제자들은 스승의 죽음에 몹시 곤혹스러워했다. 그러나 한 제자는 스승을 따라 금단을 먹고 죽었다. 남은 두 제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금단을 손에 넣으려는 것도 장생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런데 금단을 먹고 이처럼 죽고 만다면 너무도 허망한 일이야. 약을 안 먹으면 이대로 수십 년은 더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는가.'
두 제자는 금단을 먹지 않고 사자(死者)의 관을 준비하기 위해 산을 내려갔다. 그런데 제자들이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죽었던 위백양이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제자와 개에게 먼저 먹였던 만큼의 금단을 먹이자 그들도 되살아났다. 사제(師弟)가 신선이 되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다른 두 제자는 이것을 알고 크게 후회했지만 벌써 스승의 모습은 사라진 다음이었다.
이 이야기는 사제간의 신뢰 관계뿐만 아니라 금단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말해주는 것으로, 당시 사람들의 금단에 대한 인식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할 수 있다.
위백양은 주역(周易)에서 사용하는 효(爻)를 이용해 금단을 만드는 원리를 서술한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라는 책을 지었다. 이 책은 추상적인 내용으로 가득해서 상당히 난해하지만 갈홍(葛洪)의 『포박자』로 계승되었으며, 이후 도홍경의 손을 거쳐 수·당 시대에 전해지게 되었다.
단약으로 인한 부작용과 새로운 해석
위백양으로 대표되는 연단술이 가장 유행했던 시기는 당나라(618~907) 때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던 진시황제나 한의 무제가 단약의 부작용으로 죽었다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지만, 당나라의 많은 황제들 역시 단약으로 인한 중독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기도 했다. 그런 사례들을 한번 살펴보도록 하자.
• 2대 황제 태종(太宗, 재위 626~644) : 훌륭한 황제로 알려졌지만, 외국인이 만든 '연명약(延命藥)'을 먹은 후 돌연 죽고 말았다.
• 11대 황제 헌종(憲宗, 재위 805~820) : 유필(柳泌)이라는 연단술사가 만든 금단을 복용했지만, 입이 마르고 정신이 불안·초조해지는 상태에 빠진 후에 사망했다. 이는 수은화합물에 의한 중독의 전형적인 증상이다.
• 12대 황제 목종(穆宗, 재위 820~824) : 11대 황제의 사망 원인을 제공했던 유필을 처형했지만, 다른 종류의 단약을 복용하고 사망했다.
• 15대 황제 무종(武宗, 재위 824~840) : 열렬한 도교 신자로, 당시 융성했던 불교를 탄압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도 단약을 복용한 후 수은 중독 특유의 증상을 보여 불과 33세에 목숨을 잃었다.
• 16대 황제 선제(宣帝, 재위 840~846) : 많은 연단술사를 초빙했는데, 그 중 이현백(李玄伯)이 조합한 '장년약(長年藥)'을 복용했지만, 등에 악성 종기가 돋아나는 수은중독 증상이 나타나 사망했다.
이 같은 비극적인 사건들이 자주 발생하자 송나라(960~1127)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연단술에 대한 생각도 점차 바뀌게 되었다.
송나라의 학자인 주자(朱子)는 위백양이 쓴 『주역참동계』를 해석한 『참동계고이(參同契考異)』라는 책을 써서 종래와는 다른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그는 위백양의 책이 외단(外丹=복용약)에 대해 서술한 것이 아니라 내단(內丹)에 대해 쓴 것이라고 주장했다. 내단이란 약의 힘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몸속의 힘을 강화하는 것으로, 외단과 같은 효과를 가진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대증요법에서 자연요법으로, 즉 양생(養生)이라는 사고방식으로 위백양을 해석했던 것이다.
참동고(參同攷)
조선후기 학자 서명응이 위백양의 『주역참동계』를 풀이한 도가서. (도서구입: 교보문고)
6권 3책. 필사본. 후한 말 위백양(魏伯陽)의 『주역참동계(周易參同契)』를 해설한 것으로 그의 저술 총서인 『보만재총서(保晩齋叢書)』에는 6권 중 5·6권인 제2책이 없어진 채로 수록되어 있다.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에 있다.
주역참동계란 “참(參)은 잡(雜)이며 동(同)은 통(通)이고 계(契)는 합(合)으로, 『주역』과 이통(理通)하고 의합(義合)함을 이름[彭曉序]”이라 한 것처럼, 연단(煉丹)의 법이 역리(易理:주역의 법칙)에 참통하고 계합함을 설한 책이다.
서명응은 이러한 뜻을 이어 『참동계』의 구성을 『주역』의 상수(象數)로 풀이하고 있는데, 『참동고』의 6권, 즉 6고(考)는 역괘(易卦)의 육효(六爻)를 본뜬 것으로, 전 3권은 본문을 해설하고 후 3권은 같은 이치의 글들을 모아서 펴낸 것이다.
즉, 그 구성은 첫머리에 참동고서(參同攷序)와 참동고총론(參同攷總論)을 붙였는데, 권1의 초의고(初擬攷)는 『역참동계(易參同契)』 상편, 권2의 호체고(互體攷)는 같은 책 중편, 권3의 인중고(因重攷)는 같은 책 하편이다.
권4의 변시고(辨是攷)는 『석함참동(石函參同)』 상편, 권5의 다식고(多識攷)는 『고정참동(考亭參同)』, 권6의 거안고(居安攷)는 『역서장정(易序章程)』으로 엮었다.
내용별로 보면 전반부의 『역참동고』와 후반부의 『석함참동』·『고정참동』·『역서장정』의 네 부분이다. 『주역참동계』에는 전래본의 『금문참동계』와 석함에서 발견되었다는 『고문참동계』가 전하는데, 허균(許筠)을 비롯하여 조선학자들이 모두 후자를 옳다고 보았으나, 서명응은 이를 비판하고 전자를 옳다고 보는 독창적인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권4에는 정기가(鼎器歌), 권6에는 장부(臟腑) 등을 붙여 내단수련의 구체적인 이론을 역리(易理)로 풀어 나가고 있다.
서명응(徐命膺 1716(숙종 42)~1787(정조 11). 본관은 달성으로, 자는 군수(君受)이고, 호는 보만재(保晩齋)·담옹(澹翁)이다.
정조 때 홍문관 대제학, 수어사를 지냈다. 태극·음양오행 등의 역리와 사단칠정 등의 성리학설에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자연과학·음률·진법·언어·농업 등 다방면의 영역을 이용후생의 태도로 깊이 연구함으로써 북학파의 비조가 되었다. 저서로는 「보만재집」, 「보만재총서」, 「보만재잉간」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책머리에>
해제: 선천 역학과 도교 내단학의 결합, 『참동고』
옮긴이는 석사학위논문을 『장자』로 쓰면서, 한국의 도가와 도교 서적들을 정리해 보겠다는 마음으로 한국철학을 전공하였다. 그러다 우연히 서명응의 『도덕지귀(道德指歸)』와 『참동고』를 접하고 도교라는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하지만 『참동고』는 초역을 끝내고 박사학위논문을 준비하느라 잊어버리고 있었고, 학위를 끝내고는 이런저런 일들로 다시 원고를 들여다 볼 여력이 없었다. 그러다 서명응의 『도덕지귀』 번역 작업에 참여하게 되었고, 이 책이 출간되자 내용적으로 짝이 되는 『참동고』를 출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덕지귀(道德指歸)』와 『참동고(參同攷)』는 내용상 서로 보완적이다. 『도덕지귀』만 읽고 『참동고』를 읽지 않는다면 서명응의 도교적 사유와 내단이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고, 『참동고』만 읽고 『도덕지귀』를 읽지 않는다면 서명응이 그리는 선천학의 체계를 이해하지 못한다. 『도덕지귀』 속에는 내단수련을 설명하는 내용들이 무수히 나오는데, 이는 『도덕경』을 내단이론의 근거로 보는 서명응의 시각 때문이다. 그리고 『참동고』의 내용을 끌어와 『도덕지귀』를 설명하고 있는 부분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그래서 서명응은 『도덕경』을 '현경玄經'으로, 『참동계』를 '단경丹經'으로 규정하고, 이 두 책을 하나로 엮은 『이경통해二經通解』라는 책(비록 사라져 버렸지만)을 저술했다. 이런 이유로 옮긴이는 서둘러 『참동고』의 출판을 결심하였다.
해제에는 서명응의 생애와 사상에 관해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이미 예문서원에서 출간한 『도덕지귀』의 해제에 서명응의 삶과 사상이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해제에서는 『주역참동계』라는 책이 도교사에서 갖는 위상과 한국의 주석서들에 대해 중점적으로 다루고, 『참동고』의 내용에 관해서도 간략히 언급하였다.
서명응의 『참동고(參同攷)』는 『보만재총서』 자부子部에 수록되어 있다. 모두 6책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완질본은 현재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옮긴이가 번역한 분량은 전 6책 가운데 4책까지이다. 1~3책은 『주역참동계』 전체에 대한 주석이고, 4책은 『석함참동』편으로 명대에 발굴 배포된 『고문참동계』를 소개하고 있다. 애초에 4책은 『참동계』의 내용을 변형하여 배열한 것에 지나지 않아 포함시키지 않으려 했으나, 옳고 그름을 판별케 한다는 서명응의 취지에 따라 함께 수록해 두었다. 김윤수에 따르면, 5책과 6책은 『주역참동계』의 이치에 속하는 것들을 널리 모아 갈래지어서 엮은 것으로, 『참동계』를 연역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한 것이라고 한다. 6책 모두를 번역하고 싶었지만 완질본을 구하지 못해 규장각본을 기초로 4책까지만 번역하였다.
『보만재총서』는 고려대학교 도서관본과 서울대학교 규장각본이 존재한다. 이들은 동일한 판본으로, 그 속에 들어 있는 『참동고』도 동일하게 1책에서 4책까지만 있고 5, 6책이 결본인 상태이다. 옮긴이는 5책과 6책을 확인하고자 간송미술관에 수차례 연락을 취했지만 자료를 얻지 못하였다.
이들 자료가 개인적인 재산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선조의 유산이라는 점에서 공적인 재산이기도 한 만큼, 차후 학술적 연구를 위해 자료들의 필름화를 진행하여 공개하는 일이 진행되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주역참동계』에 대한 전반적인 지도를 해 주신 스승 최일범 선생님께 빚을 지고 있다. 또 난삽한 번역을 읽고 오역을 잡아 주신 임옥균 선생님에게서도 도움을 받았다. 특히 책의 번역에는 SK Telecom사와 손길승 명예회장님의 지원이 있었다. 이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여러 실무적인 일을 처리해 주신 이우형 선생님, 난삽한 원고를 깔끔하게 정리해 주신 예문서원 편집실 분들에게도 감사를 드린다.
2009년 7월 이봉호 씀
1. 『참동계』와 조선의 주석서들
위백양이 저술했다고 하는 『주역참동계』(이하 『참동계』)는 도교사에서 가장 생명력이 강한 초기 도교 경전이다.
이 책은 당대唐代 음장생陰長生의 『주역참동계주周易參同契註』와
무명씨無名氏의 주석인 『주역참동계주周易參同契註』로부터
청나라 강희제 57년에 요구노인(堯衢老人)이 주석한 『참동계』에 이르기까지의
많은 주석본들을 통해 외단서로나 내단서로서 꾸준히 그 생명력을 유지해 왔다. 종교적 이론뿐만 아니라 수련이론적 측면에서 『참동계』가 갖는 위상은 도교의 역사와 맥을 같이해 왔다.
이 책은 탄생 이후부터 당말ㆍ북송 초까지는 외단이론서로서 수많은 금단제련의 이론적 기초를 제공해 왔다. 그리고 북송대에 외단의 실패로 인해 내단으로 수련이론이 전환되는 시점에서는 내단이론의 핵심적 근거로 제시되기도 했다. 이러한 점에서 『참동계』의 주석사는 작은 도교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한 이 책은 도교뿐만 아니라 유학에서도 줄곧 관심의 대상이 되어 왔다. 성리학의 집대성자인 주희도 이 책에 대한 주석을 남겼다.
주희는 『참동계』의 수련법에 대해 "눈앞에 분명하게 보이는데도 착수처를 모르겠다"(『참동계고이』 찬서)라고 말했는가 하면,
채원정이 귀향간 곳에까지 찾아가서 이 책에 내용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다. 주희의 이러한 일화들은 이 책이 지닌 내용의 풍부함 때문이었다. 이 책은 한대漢代의 역학, 천문관, 인체관, 정기신론, 음양오행론 등의 풍부한 내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에, 송대의 학자들은 한당시대 유학을 새롭게 해석하여 리학理學을 세우고자 했을 때 이 책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진단陳摶(871~989, 자 圖南, 호 希夷)이라는 인물이 나와 중요한 역할을 하면서 북송대 학자들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참동계』와 진단, 북송 5대 사상가들의 사상적 관련들은 청대 학자들의 논의를 통해서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참동계』는 조선과 일본에서도 다양한 학자들에게 읽혀 왔다. 지금 남아 있는 조선의 문집들 속에 어떤 주석이 유통되었고, 누가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추측할 자료들이 존재한다. 또한 이 책이 조선을 통해서 일본으로 전래되는 과정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들도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조선 최초의 『참동계』 주석서는 청하자(靑霞子) 권극중(權克中 1585~1659)의 『주역참동계주해周易參同契註解』로, 이 책은 중국의 주석서와 비교해도 손색없는 뛰어난 저작이다. 유ㆍ불ㆍ도 삼교를 합일시키는 학문과 수련이론의 측면에서 가장 독특하면서도 체계적인 이론을 구축하고 있다. 특히 '태극'과 '선천일기先天一氣'라는 개념을 통한 삼교합일의 이론은, 태극과 선천일기가 혼연일체가 된 상태가 바로 만물을 생성하는 근본이라고 보아, 이것이 말류로 가면 사람과 사물이 나고 죽는 도가 되고 여기서 거슬러 올라가면 신선과 부처가 된다는 이론체계이다.
권극중의 수련이론은 태극과 선천일기가 결합된 선천의 상태를 지향하는 것으로 정립된다. 그는 선천의 상태를 지향하기 위한 방법으로 '단법삼관론丹法三關論'과 '선단호수론禪丹互修論'을 제시한다. 연정煉精, 연기煉氣, 연신煉神, 태극太極(還虛合道)의 과정으로 이루어진 '단법삼관론'이 내단수련의 일반적 단계들을 말하는 것이라면,
'선단호수론'은 '단법삼관'의 수련이 한쪽에 치우친 수련이 될 가능성을 막고자 제시된 그만의 독특한 수련이론이다. 그에 따르면, 선禪 수련의 병통은 무無에 치우쳐 유有가 부족하게 되는 것이며, 단丹 수련의 병통은 유에 치우쳐 무가 부족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권극중이 주장하는 호수법互修法의 필요성이자 근거이다. 그래서 그는 단을 닦은 이후에 다시 선을 닦아야 함을 주장한다. 그는 선은 무구無句, 단은 유구有句, 호수는 중간구中間句라고 구별함으로써 '호수'라는 방법을 정식화한다. 호수법이야말로 선과 단이 표리가 되게 하고, 성과 명을 합일되게 하며, 단문丹門과 불문佛門이 체용이 되게 하는 수련방법이라는 것이다.
권극중의 『주역참동계주해』는 많은 학자들에게 읽혀졌고 필사되어 유통되었다. 권극중에 대한 평들을 문집에서 찾아보면, 시인으로서의 위대함을 말하는 글, 수련가로서의 위치를 알려주는 글, 그의 선천일기론에 기초한 태극론을 회의한 글 등 다양한 반응들을 접할 수 있지만, 이러한 점보다는 역시 그를 내단이론가로 규정하는 논의들을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다.
권극중 이후, 우리가 만날 수 있는 『참동계』에 대한 조선의 주석은 남구만南九萬(1629~1711)과 최석정崔錫鼎(1646~1715)이 남긴 미완성 주석본(이를 『참동계남최본』이라 한다)이다. 최석정이 이에 관한 일들을 기록해 두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약천선생(남구만)이 북번에 안찰사로 있을 때에 주자가 주해한 『참동계』를 동춘당 송준길의 집 서궤에서 얻어 간행하였다. 약천선생이 일찍이 이에 대해 논해한 바가 있고 아울러 구결을 덧붙였으나, 끝내 전편을 마치지 못하고 단지 몇 단락만이 남았으니 그것만으로는 간행할 수 없었다. 이에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에게 부탁하여 주자의 주해 뒤에 붙여 간행하도록 하였다.
藥泉南先生按北藩時, 得朱子注參同契於同春宋公家簏, 入梓已行矣. 先生嘗有所論解, 並加口訣而未及卒編, 只有數段, 不可孤行. 今托北伯李公善溥, 附刊於朱解之後.(『明谷集』 권12)
이 인용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은, 남구만이 읽은 『주역참동계』는 주희의 『참동계고이』였으며, 남구만이 이를 간행하고 주석하고자 시도했다는 점이다. 위의 내용과 관련해 남구만의 글을 살펴보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그의 글을 통해 당시 조선에서 읽혔던 판본들과 『참동계』가 일본으로 전수되는 과정, 그가 『참동계』 주석을 시도한 이유 등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내용이 조금 길지만 일부분을 옮겨 보자.
옛날 선왕(효종) 재위 초기에 일본 사람이 『참동계』를 얻고자 하자, 교서관(운관)에 명하여 활자로 인쇄한 것이 몇 백 본이 되었다. 이런 이유로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때에 나는 어려서 남의 집에서 그 책을 보았는데, 책을 펼쳐 보았으나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중년이 되어 또 한 번 읽었다. 비록 그 심오한 내용을 알 수는 없었지만, 그 문구의 청아함을 좋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반복해서 읽으면서 손에서 놓지 않으려 했다. 한스러운 것은 운관에서 인쇄한 것이 『도서전집』 가운데 진일자, 포일자, 상양자 삼가의 주해라는 점이다. 진일자의 주해는 비록 옛날에 가까워 조금 좋긴 하지만 그 사이에 황당한 잠꼬대 같은 말을 면하지 못하였고, 포일자의 주해는 지나친 점이 있었고, 상양의 주해는 오로지 범어를 계승하여 연문에서 탁발하는 스님의 모양새가 되었으니 더욱 볼만한 것이 없었다. 그 이후에 또 다른 여러 주석가들의 책을 보았는데, 모두 새롭게 발명한 것이 없었다. 듣기로 주자의 주해가 있다고 하는데 아직 보지 못했다. 신해년(1671, 현종 12) 봄에 비로소 유염의 『주역참동계발휘』 한 책을 얻었는데, 주자의 주해가 그 속에 들어 있었고 아울러 황서절의 부록도 있었다. 유염의 서술을 살펴보니 진일 등 삼가의 주해와 마찬가지로 노둔하기 이를 데 없었고 주자의 주해 또한 소략하여 완비되지 못했으니, 비집고 들어갈 핵심처에 이르러서는 거의 들판에서 길을 잃었다고 탄식할 만하다.
昔在孝考初, 日本人求參同契, 命校書館印以活字凡累百本. 因分賜朝臣. 時余尙少, 得見其書於人家, 開卷不省爲何語. 中歲又得一閱. 雖未能探賾其蘊奧, 愛其文句之鏗鏘, 反復首尾, 不欲釋手者久之. 第恨芸館所印, 乃道書全集中眞一拘一上陽三家解也. 眞一雖近古稍善, 間不免爲荒唐夢囈之語, 抱一則有甚焉, 至於上陽, 專襲梵語, 爲沿門持鉢之態, 尤無足觀. 其後又見他注數家, 皆無所發明. 聞有朱子所解而獨未之見. 辛亥春, 始得兪石澗琰發揮一冊, 則朱子解參入於其中. 而兼有黃氏瑞節所附錄者. 觀兪氏所述, 與眞一等三家魯衛耳. 朱子所解, 亦略而不備, 而至於孔穴肯綮之地則幾於襄野迷塗之嘆矣. (『藥泉集』 第27)
위의 글에 따르면, 조선에서 일본으로 전수해 준 『참동계』의 판본들은 『도서전집道書全集』 속에 있던 진일자(팽효), 포일자(진현미), 상양자(진치허)의 주석이다. 이밖에도 유염의 판본 등이 유통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남구만이 스스로 주석을 내려고 마음먹게 된 것은 이들 판본의 주석이 황당한 잠꼬대 같은 말들을 하거나 볼만한 것이 없었으며, 특히 기대를 걸었던 주희의 주석 역시 온전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스스로 주석을 시도하였는데, 완성에 이르지 못했던 것이다.
하나 더 지적할 것은 남구만의 글 속에 등장하는 『도서전집』이다. 이 책은 명나라 가정 연간(1538)에 출간된 책으로, 명대에 유행하던 56종의 도교서들 중에 선본을 수집하여 출간한 것인데 그 판본의 유통이 매우 적었다고 한다(중국에서는 1990년에 중국서점에서 영인 출간하였다). 중국에서 도교서들을 정리하여 전집의 형태로 출간한 것으로는 『도장』과 『만력속도장』, 『운급칠첨』 등이 대표적인데, 조선의 문집들에서는 이들 서적보다 『도서전집』이 더 자주 거론되고 있으며 『도서전집초道書全集抄』라는 자료도 남아 있다. 이로 보아 『도서전집』은 조선시대 학자들이 주로 참고한 도교자료로 보인다. 조선에서 일본으로 전해 준 책 역시 바로 이 책이었다. 현재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 고적실에 남아 있다. 서명응 또한 이 책을 언급하면서 당시 서쾌들이 전국에 팔고 다녔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책은 조선에서 도교를 이해하는 기준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 책에 수록된 책들의 성격을 규명하는 것은 한국도교사 연구를 위해서도 필요할 것이다.
2. 외단서로서의 『주역참동계』
청대 학자 동덕녕董德寧도 긍정하였듯이, 초기 중국 도교의 핵심 경전은 『노자상이주老子想爾注』와 『주역참동계』, 그리고 『황정경黃庭經』이다.
『노자상이주』는 도교의 신학적 기초가 되는 경전이고
『참동계』는 외단이론의 기초가 되는 경전이며
『황정경』은 내단이론의 기초가 되는 경전이기 때문이다.
『노자상이주』가 노자를 신격화하고 도를 신격화해서 도교적 신학을 정초지은 책이라면,
『참동계』는 광물질을 사용하여 금단을 이루고자 하는 전형적인 외단이론서이며,
『황정경』은 내관법과 존상법을 통해 우리 몸의 장기가 갖춘 신들을 간직하게 하는 내단이론서이다.
이들 서적들은 도교의 각 종파가 핵심적으로 신봉하는 경전들로, 각 도교 종파는 자신들의 경전에 근거하여 서로 다른 종파를 이론적으로 공격하기도 한다. 가령 『노자상이주』에는 가짜 도교(邪道)라고 규정되는 종파가 있는가 하면, 『참동계』에서도 음도ㆍ방문사술이라고 비판하는 도교 종파가 등장한다. 이렇게 보면 초기 도교의 종파들은 자신들의 수련방법에 기초해 타 종파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초기 도교의 핵심 경전의 하나인 『참동계』는 외단파의 핵심 경전으로 그 지위를 굳건히 하고 있었다. 특히 수ㆍ당대에는 지배층의 비호 아래 외단술이 매우 성행하였는데, 이때의 이론적 기초가 되는 서적이 『참동계』였다. 당시에 외단술(황백술)이 성행하고 발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다. 제왕에게는 외단술이 부귀와 신선을 추구하는 방법으로 인식되었고, 도사들에게는 현실적인 신앙이자 참된 도를 증명하는 길이었으며, 어떤 이들에게는 영화와 재물을 얻는 수단이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외단술은 다양한 발전을 거듭한다.
외단술파들은 『참동계』에서 제시한 금단제련의 원리인 '자연환단설(自然還丹說)', '용약상류설(用藥相類說)', '화후직부설(火候直符說)'을 이론적 근거로 삼는다. 그리고 이들이 사용한 약물이 무엇이냐에 따라 외단술파는 '금사파', '연홍파', '유황파' 등으로 구분된다.
자연환단설(自然還丹說)은 『참동계』를 이론적 근거로 하여 자연 자체의 구조와 원리에 따라 솥과 화로 속에서 재현해 낸 금단을 말한다. 우선 천지인의 삼재三才구조로 솥과 화로를 만들고, 또 음양 관념에 따라 솥을 상하 두 부분으로 나누며, 솥의 발 높이는 사시四時를 따라 네 치가 되게 한다. 숯의 무게는 24절기를 따라 24근으로 하며, 음양의 두 기가 조화하는 것을 수화水火의 교구交媾로 상징한다. 이러한 식으로 '자연환단설'의 외단 형성의 과정은 자연 자체의 원리와 구조에 근거하고 있다.
용약상류설(用藥相類說)'은 단약을 취할 때 반드시 같은 종류의 약물이 서로 보완한다는 원칙에 근거한 것이다. 이는 『참동계』의 "같은 부류로 자연을 도우니 물이 이루어져 쉽게 도야된다"라는 말에 근거하고 있다. 가령 약물의 종류를 음과 양으로 분류하고, 양약陽藥에 속하는 금金인 유황과 음약陰藥에 속하는 금金인 수은을 결합시켜 내는 식이다. 이렇게 동일한 약물 종류인 금을 음양으로 나누고 이를 조합하여 새로운 물질을 만들어 내는데, 이 때 사용되는 원칙이 상류상보相類相補의 원칙이다. 이는 양인 약이 음인 약을 제압하거나 음인 약이 양인 약을 보완하는 것이다.
화후직부설(火候直符說)은 음양의 변화, 즉 음양의 소장消長에 부합하는 불때기(火候)를 진행하는 것이다. 이는 『참동계』의 "성인은 헛되게 내어 놓지 않았으니, 위를 살피어 천부天符를 드러내셨다. 해와 달의 운행에는 나아감과 물러남이 있고, 굽히고 펴져서 때에 응한다"라는 말에 근거한 것이다. 여기서 천부는 태양의 운행에 따라 일어나는 달의 변화상이다. 이에 따르면, 1달은 6후로 나뉘고 1년 12달은 12괘의 음양 변화와 통한다. 그래서 이러한 내용을 통하게 되면, 어떤 때 문화를 쓰고 어떤 때 무화를 쓰는지를, 또 어떤 때 양화후를 나아가게 하고 어떤 때 음부를 물리게 되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들 세 이론은 크게 자연의 구조와 운행에 따른 금단의 제련을 설명하는 동일한 원리이다. 결국 외단파들이 다양하게 분파하게 된 것은 용약用藥을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서였다. 용약을 어떻게 해석할지는 구체적인 방법론에 해당한다.
'금사파'는 황금과 단사를 중시한다. 이들은 갈홍을 계승하였는데, 황금의 불변하는 성질과 단사의 변화를 중시하여 금단을 이루고자 하였다.
'연홍파'는 주로 납(鉛)과 수은(汞)을 사용하여 금단을 이루고자 한 유파이다. 납과 수은은 그 성질상, 변화와 불변을 대표하는 광물들이다. 수은의 경우 한 덩이가 흩어져 수만 덩이가 되더라도 둥근 형태를 유지한다. 납의 경우는 가루의 상태가 되면 백색의 색깔을 띠다가도 다시 제련하면 본래의 형태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변화를 상징한다.
'유황파'는 유황과 수은을 혼합하여 제련하는데, 이들은 유황을 태양의 정수로 파악하고 수은을 태음의 정수로 파악하여 유황과 수은의 결합을 음양의 결합으로 본다.
이처럼 금단제련의 원리나 용약에 따른 다양한 외단파들이 존재한다. 내단이론의 개척자로 알려진 수나라 때의 소원랑蘇元郞(581~600, 자는 靑霞子)은 『보장론寶藏論』에서 당시의 외단술사들이 파악한 약금藥金과 약은藥銀이 대략 30여 종에 이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매표梅彪가 지은 『석약이아石藥爾雅』에는 연단의 약물 150여 종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점을 통해서도 외단술을 통해 금단을 성취하고자 했던 욕망들을 읽을 수 있겠다.
3. 외단에서 내단으로의 전환과 『참동계』의 재해석
그렇다면, 『참동계』를 내단이론서로 전환해 내는 논리는 무엇일까? 당나라 시기의 숭도崇道정책과 맞물려 일어난 외단 복용의 열풍과 그에 따른 수은과 납 중독사가 그 원인의 하나일 수 있다. 외단에 심취했던 당태종은 물론이고 외단을 적극적으로 비판했던 리학의 선구자 한유까지도 수은중독사하였다는 사실은 외단에 대한 회의와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이런 와중에 소원랑이 나타나 내단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내단이론으로의 전환을 시도하게 된다. 『나부산지羅浮山志』에 근거하면 소원랑은 "천지는 오래되었고 장대하니 성인이 그것을 본떴고, 정화가 일월에 있으니 수화에서 진퇴를 운행한다. 이러한 까닭에 성명을 함께 닦으니, 내외의 단이 하나의 도이다"라고 전제하고서, 외단의 용어를 빌려 내단을 설명한다. "몸은 정로가 되고, 심心은 신실神室이 되며, 진津은 화지華池가 된다"는 것이다. 그는 천연과 영아를 몸속의 감坎으로, 주홍과 차녀를 몸속의 리離로, 황파를 심心 속의 의意로, 황아를 몸속의 비장脾臟으로, 몸속의 신神으로부터 신神 속의 성性으로 들어가는 것을 귀근복명歸根復命으로 설명한다.
게다가 『종려전도집鍾呂傳道集』(이하 『전도집』)이 나와 『참동계』를 내단의 논리로 해석하는 시도를 보여 준다. 이 책에서는 도를 수련하는 방법으로 천도의 운행을 본받아 이를 인체에다 적용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천도의 운행을 인체에 적용하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이는 내단적 수련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천도天道는 건을 체로 삼고 양을 용으로 삼아 위에서 기가 쌓인다. 지도地道는 곤을 체로 삼고 음을 용으로 삼아 아래에서 진수眞水를 쌓는다." 건곤이 교류하여 만물이 생성되고 천지가 오르내리며 번갈아 합치어 그 운행이 그침이 없는 것처럼, 인체도 신장의 수水와 심장의 화火가 사귀어 왕복해야만 장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도집』에서는
심(心)을 리離ㆍ양룡陽龍ㆍ주사朱砂로,
신(神)을 감坎ㆍ음호陰虎ㆍ연鉛으로 파악하여, 용호가 교구하면 황아가 발생하고 마침내는 금단대약을 얻게 된다고 본다.
그리고 이를 황정으로 옮기는 것을 '채약'으로 파악한다.
이 과정에서 화후를 진행하여 신장 속의 양과 심장 속의 음을 뽑아내어 교구하는데, 이를 '태선'이라고 한다.
다시 이것을 하거(河車)에 의지해서 삼단전에 반복적으로 운행한다. 그 결과 금정옥액을 얻고 이를 환단(옥액환단)하여 금액환단을 얻는다. 이 과정에서 형체를 단련하며(煉形), 형체를 단련한 이후에 기氣를 단련하고(煉氣), 기를 단련한 이후에 신神을 단련하며(煉神), 신을 단련하여 도에 합한다(合道). 이렇게 하여 도가 이루어지는 것을 '도성道成'이라고 한다. 『전도집』의 이러한 내용은 『참동계』의 논리를 끌어 와서 내단이론으로 정립해 낸 것이다.
이처럼 소원랑과 『전도집』에 의해 내단이론이 정식화되는 과정에서 『참동계』의 논리가 원용되었던 것이다. 소원랑이 성명쌍수(性命雙修)의 원칙을 제시했다면, 『전도집』은 심신心身의 교구, 연홍을 추출하는 원리, 연형煉形, 연기煉氣, 연신煉神, 합도合道라는 내단학 체계를 완성해 낸다. 이것이 진단에 이르러 '현빈지문, 연정화기, 연기화신, 오기조원, 취전감리, 연신환허, 복귀무극'이라는 수련단계로 정립된다. 이를 도상(圖象)으로 표현한 『무극도』가 정립되고, 다시 장백단 등으로 이어져 내단학사가 구성되는 것이다.
특히 『전도집』은 『참동계』를 내단으로 이해하는 주석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이 책은 『참동계』의 핵심 용어인 정로=천지(건곤), 약물=감리=연홍=용호, 화후=60괘=추첨, 오행 등을 설명하는 편들을 싣고 있고, 또 단법삼관과 『무극도』를 연역할 내용들도 갖추고 있어서, 『참동계』를 내단으로 해석해 내는 지침을 제시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참동계』의 역학에 좀더 세밀한 오행론을 결합시키는 것이나, 몸속의 요소들이 금단을 형성하는 과정과 금단이 다시 옥액환단과 금액환단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도식적으로 파악하는 시도는 진단에 의해서 이룩된다. 물론 진단 이전에 팽효가 『참동계』에서 '수화광곽도'와 '삼오지정도'의 그림을 그려낸 바 있지만, 이 두 그림들을 연결하여 '단법삼관'을 결합시키고 다시 '무극'과 '현빈지문'을 결합시켜 지금의 『무극도』를 그려낸 이는 진단이다.
진단은 역학사적으로 송대 상수학의 창시자로 규명된다. 그의 학설은 소옹의 선천역과 주돈이의 『태극도설』로 이어졌다가 주희에게서 상수역으로 정립된다. 진단이 송대 상수학의 개산자로 평가되는 것은 『하도』와 『낙서』, 『무극도』가 그의 손에 의해 세상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모기령毛奇齡은 "태평흥국 연간에 화산도사 진단이 홀연히 『하도』, 『낙서』, 『선천도』(『무극도』)의 옛 역을 끄집어내 보였다. 세상 사람들이 이를 세 가지 보물이라고 불렀다"라고 전하고 있다. 이처럼 진단은 상수역학 혹은 선천학을 연 선구자로 칭송되었는데, 그의 이러한 학문적 연원은 『참동계』와 관련된다고 평가된다.
4. 서명응(徐命膺)의 선천학과 『참동계』
보만재保晩齋 서명응(徐命膺 1716~1787)은 선천학을 궁구하여 체계화한 학자이다. 그에게 있어 선천학이란 학문적으로는 도교와 유가를 결합하는 논리였으며, 개인적 수양론으로는 후천의 상태에서 선천을 지향하는 논리였다. 학문적으로 도교와 유가를 결합하는 논리는 학문이 분화되기 이전의 선천시대를 추구하는 것이었으며, 개인적 수양론에서 선천사도先天四圖의 진리를 내단수련의 진리로 규정한 것은 바로 우리 몸의 순건체의 회복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서명응은 『참동계』를 주석할 때, 앞서 살펴본 인물이나 서적들을 모두 인용하고 있다. 『참동계』를 축으로 한 선천학의 전래 역사에 종리권과 여동빈을 등장시키는가 하면, 진단의 논리들을 직접 끌어와 인용하기도 한다. 이러한 점에서 서명응은 『참동계』가 외단이론에서 내단이론으로 전환되어 가는 도교사적 흐름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다. 특히 초기 도교의 수련법들 가운데 『황정경』을 중심으로 한 내관법에 대한 이해도 상당히 깊은데, 『참동고』 속에서 이 수련법을 인정하고 있기도 하다.
서명응은 『참동계』를 중심으로 선천학의 역사를 구축한다. 이는 상수역과 도서역의 전수과정을 사상사적으로 규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공자가 복희의 선천역과 문왕의 후천역을 집대성했는데, 후천역은 세상에 전해졌고, 선천역은 방외가로 전해져서 위백양에 이르러 수련의 논리로 체계화된다. 위백양은 이를 서경휴와 순우숙통에게 전수한다. 그리고 이는 종리권과 여동빈에게 이어지고, 다시 진단에게로 이어지며, 진단으로부터 소옹과 주돈이로 전해진다. 이상이 서명응이 파악한 선천학의 역사이다.
공자에서 위백양으로, 위백양에서 종리권과 여동빈으로, 이들에서 진단으로, 진단에서 소옹과 주돈이로 이어지는 것이 바로 선천역의 역사라는 것이다. 서명응은 이것이 소옹의 상수학이자 주돈이의 『태극도』로 이어졌으며, 『주역참동계』에 기인해서 주희가 『역학계몽』을 완성하였다고 본다.
이렇게 보면, 서명응의 『참동고』는 선천역의 역사에 대한 탐구로 읽힌다. 사실 『참동고』 상편의 설명들은 선천사도 중의 '복희팔괘방위도'에 나타난 사정괘를 설명하고 있다. 그가 선천역을 중심으로 『참동고』 상편을 설명하는 까닭은, 그 속에 선천역과 금단의 비결이 섞여 있으며, 선천사도로써 일신一身에 상象을 세우고 일신으로써 선천사도에 상을 세운 것이 내단의 논리라고 파악하였기 때문이다.
서명응의 이러한 관점은 『참동계』가 약물제련의 방법을 적은 외단서가 아니라 선천역의 관점에서 천지의 구조와 운행을 몸에다 적용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는 내단수련이 천지의 구조(건곤감리=천지일월)와 운행(일월의 운행=60괘의 화후)을 따라 선천을 회복한다는 관점과 일치한다. 특히 그는 하도河圖와 천체구조, 인체를 모두 동일한 구조로 파악하고 있다. 하도의 흑백권들을 천체의 운행을 설명하고 있는 논리로 파악하는 동시에, 인체의 정기신의 운행도 이와 동일한 방식으로 진행된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인체를 소우주로 본다는 선언적 명제를 넘어 인체 내 장기들의 크기와 위치, 기능과 역할까지도 천체의 구조 속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5. 괘상과 수련이론
서명응은 『참동고』 중편과 하편에서 내단이론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를 행한다. 『참동고』의 상편이 선천역의 구조와 인체의 구조를 동일하게 그려낸 것이라면, 중편은 인체의 장기들과 정ㆍ기ㆍ신의 관계를 중심으로 논하고 있고 하편은 수련의 끝마침이 건체의 회복임을 밝히고 있다.
그가 논의하는 수련이론의 특징은 괘상과 장기 그리고 정ㆍ기ㆍ신의 배당이다. 가령 건괘에는 장기로는 폐장, 정로와 약물로는 솥뚜껑, 수련의 대상으로는 기를 배당한다. 감괘는 장기로는 신장, 정로와 약물로는 정로, 수련의 대상으로는 정기신 수련 모두를 배당하며, 리괘는 장기로는 심장, 정로와 약물로는 약물, 수련의 대상으로는 감괘와 마찬가지로 정기신 수련 모두를 배당한다. 그리고 곤괘는 장기로는 비장, 정로와 약물로는 솥과 의, 수련의 대상으로는 정ㆍ신ㆍ단을 배당한다.
서명응의 이러한 분류는 일반적인 분류와 상당히 다르다. 내단으로 전환된 이후 『참동계』 주석이 따르는 가장 일반화된 분류법은 건곤괘를 정로로, 감리괘를 약물로 상정하고 나머지 60괘를 화후로 배당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서명응의 분류와 배당은 인간의 신체를 작은 우주로 보면서도 여기에다 수련의 관점을 결합시킨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이는 『참동고』 전반에서 견지되는 분류방식인 '추류배상推類配象'과 '추물상류推物相類'의 원칙에 기초한 것이다. 이 '추물상류'와 '추류배상'의 분류원칙은 복희가 최초로 하늘과 땅, 사물들을 분류하고서 괘상으로 그려낸 원칙이자, 앞서 언급한 '용약상류설'과 '상보상류설'을 재해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그는 『하도』와 천체구조 그리고 인체구조를 일치시켜서 천체의 운행과 인체에서의 정기신의 운행을 동일한 방식으로 파악한다. 하늘이 둥글게 위에 펼쳐져 있으면서 기를 위아래로 운행하는 것과 폐가 여러 장기들의 위에 위치하여 둥글게 둘러싸면서 호흡을 통해 기를 몸에 운행시키는 것의 유비를 통해, 건괘=솥뚜껑=폐장=기라는 도식을 형성한 것이다. 특히 곤괘를 비장으로 보고 솥(鼎器)이라고 규정한 것은, 수련의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곤괘를 중시하지 않았던 기존의 주석과는 매우 다른 점이다. 곤괘=비장=솥이라는 도식을 설정하고 이를 의意로 규정한 것은 『황정경』류의 내단수련서에서 보이는 내시존상內視存想의 수련법과 맥이 닿는 것이어서, 『참동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참동고』에는 의학적 내용들이 상당히 인용되고 있고 『황정경』이 그려내는 내경도內景圖와 유사한 부분이 많아, 의학적 관점에서의 해석도 상당 부분 시도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곤괘에서 단丹의 성취를 설명하고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비장을 중단전으로 보는 내단이론의 논리를 확인할 수 있게 한다. 그의 이러한 해석은 초기 도교 경전인 『참동계』와 『황정경』의 수련법을 결합하고 있어서 매우 시사점이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초기 도교 경전들은 각기 다른 수련법을 견지하면서 상대방의 수련법을 비판하였는데, 서명응은 내단이론의 관점에서 이들 수련법을 결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기존 주석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신장과 심장을 감坎ㆍ리離괘로 삼은 것은 일반적인 이해와 같아서 별로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감괘를 정로로 삼고, 리괘를 약물로 삼는 이해는 일반적인 이해와 달라 보인다. 일반적으로 감괘와 리괘는 약물로 분류되고, 오행으로는 수水와 화火, 정기신으로는 정精과 기氣로 분류되어 이들이 교구하여 단을 형성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그러나 서명응의 분류는 이를 정기신의 수련에 모두 배당하고 있어서 기존의 이해들과 다르다.
이와 더불어 서명응은 효의 하나하나에다 수련대상들을 결합시키고 있기도 하다. 이 가운데 건괘의 초효, 중효, 상효를 모두 기氣와 관련시키고 곤괘의 초효를 의意와, 중효를 의意 및 정精과, 상효를 신神 및 단丹과 관련시켜 구분하는 것은 서명응의 매우 독특한 이해로 보인다.
서명응의 상수학자로서의 관점, 의학과 수련을 동일시하는 관점, 내시법과 『참동계』의 내단이론을 동일시하는 관점에서 보면, 하늘이 땅을 둘러싼 모습과 폐장이 다른 장기를 둘러싼 모습은 유비될 수 있다. 그리고 하늘의 운행이라는 것이 기라는 점에서 보자면 폐장의 역할도 기의 운행으로 이해된다. 이런 논리를 통해 건괘의 세 효를 기와 연관짓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곤괘를 비장으로 유비하는 것은 『황정경』의 수련논리와 같다. 『황정경』은 비장을 중단전으로 상정하여 단의 성취가 비장에서 이루어진다고 보는데, 서명응의 논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비장이 의意를 주관한다는 관점도 의학적 관점이나 『황정경』의 관점과 동일하다. 이렇게 보면, 곤괘를 비장 및 솥으로 배분하고 의意와 정精ㆍ신神ㆍ단丹의 단련으로 본 것은 『참동계』의 논리와 『황정경』의 논리를 결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감괘와 리괘의 각 효들을 정기신의 수련으로 분류한 것은 필자도 아직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앞으로의 연구과제로 여전히 남겨 둔 채, 다만 괘상과 도식을 통한 수련은 소옹이 행한 수련법이라는 것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끝으로 서명응이 『참동계』에 기초한 수련을 했을까 라는 질문을 던져 볼 수 있겠다. 서명응이 『참동계』를 수련서로 파악한 것은 확실하다. 그는 『참동고』 권4에서 명대 양신楊愼의 서문이 있는 『고문참동계』가 위작이라는 것을 밝히면서, 잘못된 내용으로 수련을 진행하면 그 재앙이 바로 미치게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스스로 『참동계』에 기초한 수련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그가 수련을 했다는 기록들은 여러 전적에 남아 있는데, 그의 『보만재집保晩齋集』과 『연보年譜』 등에서 그가 행한 수련의 내용들을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보만재집』 권1에 실려 있는 『우음(偶吟)』이라는 시이다.
그런가 하면 『보만재집』 권2의 『독도경(讀道經)』이라는 시에서도 그가 도달한 수련의 경지를 확인해 볼 수 있다.
이 밖에 그의 손자 서유구가 지은 『연보』에서는, 서명응의 내단수련이 어느 정도 경지에 올라 70세에 정계에서 은퇴하고 난 뒤에도 3, 40대의 용모와 기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서명응은 그 자신이 직접 수련을 하였고, 그 결과가 3, 40대의 용모로 드러났던 것이다. 실제로 『연보』에서 암시하는 내용을 기초로 보자면 그가 『참동계』의 내단수련법을 사용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공께서는 항상 "장자방이 병을 핑계로 문을 걸어 닫고 적송자를 따라 소요하기를 원했는데, 아마도 『도덕경』에서 얻음이 있었을 게다. '명예가 이루어지고 몸이 물러난다' 장 아래에 '백을 타고 영위하며 하나를 안는다' 장으로 이은 것은, 그 뜻이 몸이 물러난 뒤에 바야흐로 양생과 학선學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옛사람이 문장들을 정밀하고 자세히 보았다는 것을 여기에서 또한 알 수 있다"라고 하셨다. 공은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 문을 걸어 닫고 손님을 맞이하지 아니하고 종일토록 뜰에 내려가지 않았으니, 비록 이웃에 있는 곁방이나 사랑채에도 왕래하지 않았다. 게다가 용모와 정신이 항상 3, 40대의 젊은이와 같아서, 사람들이 혹간 공이 몰래 『참동계』의 연단법을 사용하였다고 의심하여 말하기도 했다.
公常言張子房謝病杜門, 願從赤松子遊, 蓋有得於道德經. 名遂身退章之下, 卽繼以載營魄抱一章者, 其意若曰身退之後, 方可以養生學仙也. 古人看文字精細, 此亦可見. 及夫休致之後, 杜門謝客, 終日不下庭, 雖隣房子舍, 亦不往來, 而顔貌精神 常若三四十歲, 少壯之時, 人或疑公暗用參同契煉丹之法云. (保晩齋年譜』 권3)
이렇게 보면 서명응의 『참동고』는 『참동계』에 대한 학문적 연구서로서만이 아니라 수련지침서로서의 역할까지도 수행했다고 할 수 있다.
6. 『참동계』를 비롯한 도교 연구의 필요성
이상에서 서명응의 『참동고』를 이해하기 위해 도교사에서 『참동계』가 어떻게 이해되어 왔는지를 대략적으로 서술하였다.
『참동계』는 외단서로 출발하여 내단서로 확립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내단이론을 정초 짓게 만들었다. 서명응의 『참동고』는 이 과정들에 대한 모든 정보를 포함하고 있다.
『참동계』 자체는 수많은 은유와 비유, 난해함으로 인하여 그 내용을 이해하기 어렵다. 게다가 서명응의 주석을 이해하는 일은 그의 선천학적 체계를 전제해야 한다. 심지어 서명응의 『참동고』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교사적 이해에다 의학적 지식까지 동원해야 하므로 지난한 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참동계』가 조선의 학자들에게 두루 읽혀 왔고 다양한 해석들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또 그 해석들이 중국의 학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어 왔다는 점에서 연구의 필요성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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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지귀(道德指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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