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고멜과 같았던 신부로서의 공동체
본문 : 호세아 2장 14-23절
그러므로 이제 내가 그를 꾀어서 빈들로 데리고 가겠다. 거기에서 내가 그를 다정한 말로 달래 주겠다. 그런 다음에, 내가 거기에서 포도원을 그에게 되돌려 주고, 아골 평원이 희망의 문이 되게 하면, 그는 젊을 때처럼, 이집트 땅에서 올라올 때처럼, 거기에서 나를 기쁘게 대할 것이다. 그 날에 너는 나를 ‘나의 남편’이라고 부르고, 다시는 ‘나의 주인’이라고 부르지 않을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그 때에 나는 그의 입에서 바알 신들의 이름을 모두 없애고 바알 신들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이 다시는 없도록 하겠다. 그 날에는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생각하고, 들짐승과 공중의 새와 땅의 벌레와 언약을 맺고, 활과 칼을 꺾어 버리며 땅에서 전쟁을 없애어,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 놓고 살 수 있게 하겠다. 그 때에 내가 너를 영원히 아내로 맞아들이고 너에게 정의와 공평으로 대하고, 너에게 변함없는 사랑과 긍휼을 보여 주고, 너를 아내로 삼겠다. 내가 너에게 성실한 마음으로 너와 결혼하겠다. 그러면 너는 나 주를 바로 알 것이다. 그 날에 내가 응답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에 응답하고, 이 먹거리들은 이스르엘에게 응답할 것이다. 그 때에 내가 이스라엘을 이 땅에 심어서 나의 백성으로 키우고, 로루하마를 사랑하여 루하마가 되게 할 것이다. 로암미에게 ‘이제 너는 암미다!’하고 내가 말하면, 그가 나에게 ‘주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하고 대답할 것이다. (새번역)
아버지 하나님은 말씀과 거룩한 영이신 성령님으로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사람들에게 나타내십니다. 아버지 하나님은 말씀과 성령으로 그 분과 친밀하고 온전한 관계를 맺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거하십니다. 그래서 아버지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시며 또한 자신을 사랑하시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와 함께 하십니다. 이것이 말씀이 육화되어 이 세상 가운데, 그리고 아버지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세우신 공동체 가운데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인 그리스도인들이나 또는 비그리스도인들 모두 이 공동체를 가리켜 교회라고 부릅니다. 교회는 영과 물질로 된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에 공동체로서 모일 수 있는 건물이 필요하지만 건물 그 자체가 교회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교회는 공동체, 하나님의 말씀이 육화되어 계신, 그리고 성령님께서 살아서 역사하시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부르신 사람들이 모인 유기체, 즉 생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주님의 몸’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바울은 더불어 각 그리스도인들이 몸의 마디를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성도 한 사람은 주님의 몸을 이루는 유기체입니다. 각 마디, 세포 하나하나가 모여 한 생명을 이루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성도 각 사람들을 부르셔서 모이게 하시고 마디와 세포를 연결하심으로 주님의 몸이라는 생명체를 이루십니다.
이 몸은 성도들이 각자 열심을 내서 이루게 된 생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성도들 각 사람들을 부르셔서 교회라는 공동체를 이루게 하신 것입니다. 성도들이 먼저 공동체를 이루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먼저 그들을 부르셔서 주님의 몸을 이루게 된데는 성도가 되기 이전에 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과 성령님을 통해서 끊임없이 우리가 죄인으로서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맺는데 합당하지 않음을 가르쳐주십니다. 이것을 가리켜 하나님은 거룩하신데 사람들은 거룩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고 사람들이 거룩하지 못하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참으로 온전한 관계를 맺을 수 없음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며 선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자체이신 하나님에 비해 우리는 그 선함에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선함과 그렇지 못함이 함께 어울릴 수가 없기에 죄인이라고 불리는 우리가 선하신 하나님과 참다운 관계를 맺을 수 없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 선함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선하지 못한 것이 선하다고 여기며 살아갑니다. 선하지 못한 것들에 의해 가득 둘러싸인 인생을 살아가기에, 좁아진 시야로 우리를 둘러싼 악한 것들을 한참 넘어서는 선함을 볼 수가 없습니다. 마치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 또는 자기 문제에 빠지면 시야가 좁아져 다른 것들을 보지 못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호세아는 이런 우리의 모습에 대해서 음란한 여인이라고 빗대어 이야기합니다. 물론 호세아가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예언한 대상은 북이스라엘 사람들이지만 그 이야기는 지금과 앞으로 를 살아갈 모든 사람들에게도 적용됩니다.
왜 음란한 여인이라고 했을까요?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인인 고멜과 결혼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호세아는 그 말씀에 순종해서 고멜과 결혼했습니다. 고멜은 호세아와의 사랑의 관계를 통해 아이를 낳았습니다. 인간관계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인 한 남자와 여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고멜은 호세아로부터 도망쳐 다른 남자들과의 성적인, 그리고 인간적인 관계를 즐겼습니다. 한 사람과 또 다른 한 사람이 서로 존중하며 사랑하는 친밀한 인격적 관계를 깨버리고 자신의 욕망이 이끄는대로 비인격적인 관계를 맺었으며 그로 인해 호세아와 세 아이는 깨어진 인격적 관계로부터 오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을 통해 하나님은 호세아를 통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음란한 여인이라고 지칭했습니다. 한 남성과 한 여성이 인격적 관계를 맺어 진정한 아름다운 사랑을 이루고 이를 통해 아름다운 다음 세대가 계속해서 이어지는 것처럼 하나님과 그 분이 창조하신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인격적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사람들이 비인격적 관계를 하나님과 맺는, 즉 관계를 깨버려 하나님과 온 우주를 아프게 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을 가리켜 고멜과 같은 음란한 여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이들을 부르셔서 참다운 인격적 관계, 하나님의 아내로 삼으신다고 호세아를 통해 약속하셨습니다. 하지만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에 사람들이 응답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힘든 세상 가운데 내버려 두십니다. 고멜이 비인격적 관계를 맺던 사람들에게서 버림받아 아파할 때 찾아온 호세아에게 돌아왔던 것처럼 음란한 우리가 그 고통을 통하여 참된 사랑의 하나님 부르심에 응답하여 인격적 관계를 회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때로 그 분이 내버려 두시는 것이 은혜요, 우리는 그 과정을 통과한 과거 고멜이었던 신부로서의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고멜과 같았던 신부로서의 공동체가 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