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조(朝鮮朝) 왕릉(王陵)
조선조(朝鮮朝) 역대 왕릉(王陵)에 대한 접근은 외형적 특징만으로도 당대(當代) 역사적 사실을 반증(反證)할 흥미로운 대상입니다.
조선조 왕릉(王陵)은 27대 왕(王)과 왕비(王妃) 혹은 계비(繼妃), 그리고 추존(追尊) 왕들을 포함해 전체 44기 능(陵)이 조성됐습니다.
이 중 태조(太祖)의 비(妃)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제릉(齊陵)과 정종(定宗)과 비(妃) 정안왕후(定安王后)를 모신 후릉(厚陵)만 북한 지역인 개성시에 있기 때문에 답사할 수 없는 지역이고 유일하게 강원도 영월에 조성한 단종(端宗)의 장릉(莊陵)을 제외하고 모두 서울과 경기도에 산재(散在)했습니다.
경기도 구리시의 동구릉(東九陵 : 건원릉(태조), 현릉(문종), 목릉(선조), 휘릉(인조 계비), 숭릉(현종), 혜릉(경종 비), 원릉(영조), 수릉(익종-추존), 경릉(헌종)이나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西五陵 : 경릉(덕종-추존), 창릉(예종), 명릉(숙종), 익릉(숙종 비), 홍릉(영조 비), 서삼릉(西三陵 : 희릉(중종 계비), 효릉(인종), 예릉(철종), 경기도 파주시의 파주삼릉(坡州三陵 : 공릉(예종 비), 순릉(성종 비), 영릉(추존 진종과 비)은 왕릉군(王陵群)을 이루는 필수 답사(踏査) 지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서울 주변에서 학창 시절을 보낸 분들은 학교 소풍 등으로 한두 번 정도는 발을 옮겼을 것입니다. 단순한 관람이나 사진 촬영 정도로 왕릉의 진면목(眞面目)을 이해하기에 여러 가지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왕릉의 정문 홍살문(紅--門)
홍살문은 홍문(紅門)이라고도 불립니다. 본래 궁전(宮殿), 관아(官衙), 능(陵), 원(園:세자나 대군, 공주 등의 묘) 등의 앞에 세우던 붉은 칠을 한 신성한 곳을 알리는 문(門)입니다. 한자로 홍전문(紅箭門)이라 표현합니다. 형태는 30자 이상인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 지붕이 없는 붉은 살을 쭉 박았습니다.
홍살문 오른쪽에는 왕이 제례(祭禮)시 홍살문 앞에서 내려 절을 하고 들어가는 배위(拜位)가 있습니다.
▶능으로 가는 길 참도(參道)
홍살문을 들어서면 정자각(丁字閣)까지 긴 돌길인 참도(參道)가 펼쳐졌습니다. 참도는 주의 깊게 살펴보면 왼쪽 부분은 한 단을 높게 만들었고 오른쪽 부분은 단을 낮게 만들었습니다. 이유는 신성한 정령(精靈)이 다니는 왼쪽 신로(神路) 부분과 사람이 걸어가는 오른쪽 인로(人路) 부분을 분리한 것입니다.
삼각형이나 사각형 모양의 얇은 돌(박석 薄石)을 깔아 반듯하게 조성한 참도는 왕릉의 신성함을 배가(倍加)시키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왕릉(王陵)의 참도(參道)를 걸을 기회가 있을 때 이유야 어떻든 오른쪽 인도 쪽으로 걷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가 아닐까 합니다.
▶왕릉의 예를 다하는 정자각(丁字閣)과 부속 건물(建物)
정자각(丁字閣)은 왕릉(王陵)이나 원(園)의 앞에 있는 제전(祭展)으로 건물 형태가 ‘장정 정(丁)’자 모양을 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입니다.
오른쪽과 왼쪽에 올라가는 계단이 있습니다. 제향(祭享)을 하는 곳이기에 제례(制禮) 의식(儀式)에 따라 동쪽으로 올라가고 서쪽으로 내려오는 동입서출(東入西出)의 의례(儀禮)를 따랐습니다.
건물 구조는 일반적으로 정면 3칸과 측면 1-2칸 정도이고 맞배지붕으로 이뤄졌습니다. 건물 안에 본래 신좌(神坐)를 두고 오향제(五享祭)나 한식제(寒食祭)를 지내왔습니다.
정자각 동쪽에 능의 비(碑)를 안치하기 위해 비각(碑閣)을 조성했습니다. 능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비각(碑閣)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정자각(丁字閣)에서부터 봉분(封墳)까지는 심한 경사(傾斜)의 사초지(莎草地)가 있어 봉분(封墳)까지 직접 볼 수 있는 곳이 없지만 능의 비(碑)라도 자세하게 살펴보는 것이 제대로 된 관람일 것입니다.
훼손된 곳이 많지만 비각(碑閣) 아래로 재실(齋室)이나 고방(庫房) 등의 부속 건물을 두고 있습니다.
▶능원(陵原)의 전형적 모습
왕릉(王陵)의 모습은 각각의 능마다 특징적인 면을 지니지만 사초지(莎草地)를 거슬러 올라와 봉분(封墳)이 있는 능원(陵原)의 전형적인 모습이 보입니다.
봉분(封墳) 자체만 조성된 능이 많지만 봉분 밑을 12각의 병풍석(屛風石)으로 둘러 봉분(封墳)을 보호(保護)하는 호석(호석)을 준 경우가 있습니다. 대체적으로 봉분 주위는 다시 난간석(欄干石)으로 둘러 보호하는 능들이 있습니다. 봉분 앞에 상석(床石)을 두고 상석 좌우에는 망주석(望柱石) 한 쌍을 뒀으며 한 단 아래 중앙에 상징적 등불인 장명등(長明燈)을 세웠습니다.
봉분 전체를 둘러 동서북 3면의 담장을 쌓은 것을 곡장(曲墻)이라 합니다. 봉분의 난간석(欄干石) 바깥쪽에서 곡장을 바라보는 형상으로 4마리씩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을 번갈아 두어 능을 호위(護衛)를 하는 수호신(守護神) 격으로 삼았습니다. 추존(追尊)된 왕릉(王陵)의 경우 석호, 석양의 수를 반으로 줄여 일반 왕릉과 차이를 둔 경우도 있습니다.
봉분 앞 장명등(長明燈)의 한 단 아래에 관(冠)을 쓰고 홀(笏)을 쥐고 있는 문인석(文人石) 1쌍이 좌우로 뒤에 각각 석마(石馬)을 대동하고 서있습니다. 그 아래 단에는 갑옷에 검을 들고 있는 무인석(武人石)이 역시 각각 석마를 거느리고 세워졌습니다.
대한제국(大韓帝國) 성립 후 조성된 고종 홍릉(洪陵)과 순종 유릉(裕陵)의 경우 황제릉(皇帝陵)의 형식으로 조성돼 기존 능과 큰 차이를 보입니다.
▶왕릉 배치 형식
능의 봉분(封墳) 배치에 따른 형식은 6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왕이나 왕비의 봉분을 별도로 조성한 단독(單獨)의 형태인 단릉(單陵)형식 : 태조 건원릉 등
둘째 한 언덕에 나란하게 왕과 왕비의 봉분을 마련한 쌍릉(雙陵) 형식 : 정종의 후릉 등
셋째 한 언덕에 왕과 왕비, 계비의 세 봉분을 나란하게 배치한 삼연릉(三連陵) 형식 : 헌종의 경릉 등
넷째 하나의 정자각(丁字閣) 뒤로 한 언덕의 다른 줄기에 별도의 봉분(封墳)과 상설(常設)을 배치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형식 : 문종의 현릉 등
다섯째 왕과 왕비를 하나의 봉분에 합장한 합장릉(合葬陵) 형식 : 세종의 영릉 등
여섯째 동원이강릉의 변형(變形)으로 좌우 나란한 언덕이 아닌 남북이나 비스듬하게 배치한 특이한 형식의 능 : 효종의 영릉 등
■ 東九陵(동구릉)
사적 제193호로 지정된 경기도 구리시에 위치한 동구릉(東九陵)은 조선조(朝鮮朝) 초대(初代) 태조(太祖)의 건원릉(健元陵)이 조성(造成)되면서 왕릉군(王陵群)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태조의 건원릉(健元陵) 선정은 태조가 생전에 무학대사(無學大師)를 시켜 길지(吉地)를 택하라는 명(命)에 의해 결정했다는 전설도 있으나 실제는 태종(太宗)의 명으로 도성(都城) 가까운 곳에서 길지(吉地)를 물색하다가 의정부사(議政府事) 김인귀(金仁貴)의 추천으로 결정되었습니다.
그 후 이 곳에 총 9개의 능에 17위의 왕(王)과 왕후(王后)를 모신 것으로 볼 때 현재 59만평의 광대한 동구릉(東九陵)의 경내(境內)가 풍수학(風水學) 상으로 길지(吉地)임은 자명한 일입니다.
두 번째로 조성된 능은 1452년에 5대 문종(文宗)과 비(妃)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權氏 : 중종 때 복위)의 현릉(顯陵)으로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을 갖췄습니다.
동구릉 가장 안쪽에 위치한 14대 선조(宣祖)와 비(妃)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朴氏), 계비(繼妃)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金氏)를 모신 목릉(穆陵)이 동원이강(同原異岡)의 변형으로 세 언덕에 조성됩니다.
동구릉 가장 남쪽에 18대 현종(顯宗)과 비(妃) 명성왕후(明聖王后金氏)의 숭릉(崇陵)이 쌍릉(雙陵)의 형식으로 조성되고 1688년에는 건원릉 서쪽에 4대의 임금대를 살아 복상문제(服喪問題)를 불러일으켰던 16대 인조(仁祖)의 계비(繼妃)인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趙氏)의 휘릉(徽陵)이 자리잡으면서 동오릉(東五陵)의 명칭을 사용하게 됩니다.
그 후 1718년에 세자빈(世子嬪) 때 승하(昇遐)한 후 추존(追尊)된 20대 경종(景宗)의 비(妃) 단의왕후 심씨(端懿王后沈氏)를 모신 혜릉(惠陵)이 자리잡고 다음으로 21대 영조(英祖)와 계비(繼妃)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金氏)를 모신 쌍릉(雙陵) 형식의 원릉(元陵)이 조성됨으로써 동칠릉(東七陵)의 명칭도 사용됩니다.
다음으로 24대 헌종(憲宗)과 비(妃) 효현왕후 김씨(孝顯王后金氏), 계비(繼妃) 효정왕후 홍씨(孝定王后洪氏)를 모신 경릉(景陵)은 나란하게 세 개의 봉분(封墳)이 나란하게 자리잡은 삼연릉(三連陵)의 형식으로 이뤄졌습니다.
마지막 능은 조성 작업이 복잡한데 본래 22대 순조(純祖)의 아들이자 23대 헌종(憲宗)의 아버지로 추존(追尊)된 익종(翼宗 : 고종대에 문조(文祖)로 다시 추존) 모신 수릉(綏陵)은 처음에 경종(景宗)의 의릉(懿陵) 옆에 조성됐다가 양주(楊洲) 용마봉(龍馬峰) 아래로 옮겨지고 또 다시 철종(哲宗) 6년인 1855년 건원릉(健元陵) 왼쪽에 조성되면서 시기로 동구릉의 마지막 능이지만 익종(翼宗)이 24대 헌종(憲宗)의 친부(親父)로 헌종대에 추존(追尊)됐기 때문에 조선왕릉 순서로 헌종 앞에 시기를 둡니다. 수릉에 신정왕후 조씨(神貞王后趙氏)가 1878년(고종 15년)에 합장릉(合葬陵)으로 조성됐습니다.
동구릉(東九陵)의 명칭이 사용된 것은 익종(翼宗)의 수릉(綏陵)이 조성된 1855년부터입니다.
▷동구릉의 내역
건원릉(健元陵) - 초대 태조 [단릉(單陵)]
현릉(顯陵) - 5대 문종과 비 현덕왕후 권씨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목릉(穆陵) - 14대 선조와 비 의인왕후 박씨, 계비 인목왕후 김씨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변형]
숭릉(崇陵) - 18대 현종과 비 명성왕후 김씨 [쌍릉(雙陵)]
휘릉(徽陵) - 인조(16대)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 [단릉(單陵)]
혜릉(惠陵) - 경종(20대)의 비 단의왕후 심씨 [단릉(單陵)]
원릉(元陵) - 21대 영조와 계비 정순왕후 김씨 [쌍릉(雙陵)]
경릉(景陵) - 24대 헌종과 비 효현왕후 김씨, 계비 효정왕후 홍씨 [삼연릉(三連陵)]
수릉(綏陵) - 추존 익종과 비 신정왕후 조씨 [합장릉(合葬陵)]
■西五陵(서오릉)
사적 제198호로 지정된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에 위치한 서오릉(西五陵)은 구리시의 동구릉(東九陵) 다음가는 조선왕실의 왕릉군(王陵群)으로 많은 사람들의 관람이 빈번한 곳입니다.
서오능의 능역(陵域) 조성(造成)이 처음 이뤄진 것은 조선조(朝鮮朝) 세조(世祖) 3년(1457년)
입니다. 당시 세조의 세자(世子)였던 원자(元子) 장(璋)[후에 원자의 아들인 9대 임금 성종(成宗)때 추존(追尊)되어 덕종(德宗)이 됨]이 요절(夭折)하자 여러 길지(吉地)를 물색하다가 이 곳이 풍수지리적(風水地理的)으로 적격인 산수(山水)의 안정적 길지(吉地)로 추천되어 부왕(父王)인 세조가 직접 답사한 후 세자묘(世子墓)[추존 후에 묘호(廟號)를 경릉(敬陵)으로 추숭(追崇)하고 덕종의 비 소혜왕후 한씨(昭惠王后 韓氏)도 연산군(燕山君) 10년에 동원이강(同原異岡)의 형식으로 경릉에 함께 조성함]로 결정되었습니다.
그 뒤에 덕종(德宗)의 동생이었던 조선조 8대 예종(睿宗)의 능원(陵園)으로 창릉(昌陵)이 1470년에 조성[예종의 계비(繼妃)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韓氏)도 연산군 4년에 동원이강의 형식으로 창릉에 조성됨]되었고, 또한 1680년[숙종 6년]에 20대 숙종(肅宗)의 비(妃)인 인경왕후 김씨(仁敬王后金氏)의 익릉(翼陵)에 이어 숙종과 계비(繼妃)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金氏)를 모신 명릉(明陵)[인현왕후릉(1701년)과 숙종릉(1720년)은 쌍릉(雙陵) 형식, 인원왕후릉(1757)은 단릉(單陵) 형식]이 조성되었으며 마지막으로 1757년에 영조(英祖)의 비(妃)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徐氏)의 홍릉(弘陵)이 조성되어 서오릉(西五陵)의 명칭을 사용하게 됩니다.
또한 서오릉에는 왕릉(王陵)뿐만 아니라 원(園)과 묘(墓)도 다수 있는데, 명종(明宗)의 장자(長子)인 순회세자(順懷世子)를 모신 순창원(順昌園)과 일제시대 때 숙종의 후궁(後宮)인 장희빈(張禧嬪)의 대빈묘(大嬪墓)도 옮겨져 경내(境內)에 조성되었습니다.
▷서오릉의 내역
경릉(敬陵) - 추존 덕종과 소혜왕후 한씨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창릉(昌陵) - 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 한씨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
익릉(翼陵) - 숙종(19대)의 비 인경왕후 김씨 [단릉(單陵)]
명릉(明陵) - 19대 숙종과 계비 인현왕후 민씨, 제2계비 인원왕후 김씨 [쌍릉(雙陵)]
홍릉(弘陵) - 영조(21대)의 비 정성왕후 서씨 [단릉(單陵)]
■西三陵(서삼릉)
서오릉(西五陵)과 인접한 사적 제200호로 지정된 경기도 고양시 원당동에 위치한 서삼릉(西三陵)은 1537년[중종 32년]에 조선조(朝鮮朝) 11대 중종(中宗)의 계비(繼妃)인 장경왕후 윤씨(章敬王后尹氏)를 모신 희릉(禧陵)이 옮겨와 조성되면서 왕릉군(王陵群)의 시작을 이룹니다.
하지만 서삼릉(西三陵)의 능들은 많은 우여곡절(迂餘曲折)을 겪는데, 처음 조성된 희릉(禧陵)도 본래 3대 태종(太宗)의 헌릉(獻陵) 옆으로 택지가 결정[1515년]되었다가 권력 다툼으로 인해 이 곳으로 천장(遷葬)되었고, 중종(中宗)의 정릉(靖陵)도 희릉(禧陵) 옆에 조성했다가 현 위치인 서울시 강남구의 선정릉(宣靖陵) 위치로 천장(遷葬)[명종 17년]을 합니다.
그 후 최단명(最短命) 임금인 12대 인종(仁宗)[1545년 조성]과 비 인성왕후 박씨(仁聖王后朴氏)[1555년 조성]를 모신 효릉(孝陵)이 자리잡고 고종(高宗)대[1865년]에 25대 철종(哲宗)과 비(妃) 철인왕후 김씨(哲仁王后金氏)[1878년 조성]를 모신 예릉(睿陵)이 들어서면서 서삼릉(西三陵)의 명칭이 사용됩니다.
또한 서삼릉(西三陵) 구역 내에는 왕릉뿐만 아니라 명종(明宗), 숙종(肅宗) 이후 조선조 말기(末期)까지 많은 후궁(後宮)과 대군(大君), 군(君), 공주(公主), 옹주(翁主)의 원묘(園墓)가 만들어져 왕실 무덤의 면모를 갖추게 됩니다.
▷서삼릉의 내역
희릉(禧陵) - 중종(11대)의 계비 장경왕후 윤씨 [단릉(單陵)]
효릉(孝陵) - 12대 인종과 비 인성왕후 박씨 [쌍릉(雙陵)]
예릉(睿陵) - 25대 철종과 비 철인왕후 김씨 [쌍릉(雙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