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조선 시대의 궁궐 창덕궁 답④
이 문제는 13회 고급 14번 문제와 아주 유사하게 출제되었네요.
조선 시대의 궁궐에 대한 문제는2~3회 마다 한번씩 나올 정도로 자주 출제됩니다.
특히 경복궁, 창덕궁 안의 여러 전각에 대한 문제가 출제되니 각 전각들의 특징과 역할을 잘 알아두셔야 합니다.
주어진 설명에서의 핵심 개념어는 '가장 오랜 기간 왕들이 거처한 곳', '부용정, 주합루(규장각이 있던 건물)'입니다.
이를 통해 창덕궁임을 파악힐 수 있습니다.
조선 시대 왕들이 가장 오래 거처한 궁궐하면 경복궁을 떠올릴 수 있으나, 임진왜란 이후에는 경복궁 중건이 이루어지지 못해 창덕궁에 거쳐하였다는 것을 꼭 알아두세요.
참고로 조선 시대의 궁궐은 크게 정궁(正宮, 법궁이라고도 함), 이궁(離宮), 행궁(行宮)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정궁은 수도 중앙의 기본궁으로, 경복궁이 조선 시대의 정궁입니다. 이궁은 별궁의 기능을 수행하는 궁으로,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이 있었습니다.
행궁은 왕이 거동하실 때 일정기간씩 머무는 지방에 있는 궁으로, 수원 행궁, 남한산성 행궁, 북한산성 행궁, 강화도 행궁, 평양 행궁 등이 있었습니다.
창덕궁은 경복궁이 지어질 때 경복궁의 이궁으로 태종 때 건축되었습니다. 임진왜란 이전에도 간혹 왕들이 거쳐하기도 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 가장 먼저 중건되어 고종 때 경복궁이 중건되기 전까지 이곳을 정궁으로 사용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유사 기출문제로 조선의 궁궐, 한양의 구조, 읍성 구조, 양반 가옥 구조도를 연관 기출문제로 제시해드려요.
유사 기출문제 더 풀기
조선의 궁궐
15회 고급 12번 문제
12. 경회루 답③
1점짜리 비교적 쉬운 문제네요.
궁궐이나 건축물에 관련한 문제는 자주 출제되는 주제 중에 하나이므로, 꼭 자세하게 알아두시는 것이 좋아요.
문제에 제시된 설명에 '외국 사신을 접견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곳', '2층 건물에 1층은 돌기둥만 있고 2층은 마루를 깔아 연회장으로 이용'이라는 설명을 토대로 할 때,
(가)에 해당하는 건물은 경복궁 내에 있는 전각 건축물 중에 하나인 경회루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외국 사신 접견'이라는 것만 보고 근정전을 고를 수도 있겠지만, 다른 설명을 보면 경회루임을 알 수 있어요.
경복궁 근정전 서북쪽 연못 안에 세운 경회루는 나라에 경사가 있거나 사신이 왔을 때 연회를 베풀던 국가의 공식 연회 장소였습니다.
경복궁을 처음 지을 때의 경회루는 작은 규모였으나, 조선 태종 12년(1412)에 연못을 넓히면서 크게 다시 지었습니다.
그 후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돌기둥만 남은 상태로 유지되어 오다가 270여 년이 지난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고쳐 지으면서 경회루도 다시 지었답니다.
연못 속에 잘 다듬은 긴 돌로 둑을 쌓아 네모 반듯한 섬을 만들고 그 안에 누각을 세웠으며, 돌다리 3개를 놓아 땅과 연결되도록 하였습니다. 이때 연못에서 파낸 흙으로는 왕비의 침전 뒤편에 아미산이라는 아름다운 동산을 만들었습니다.
앞면 7칸·옆면 5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을 하고 있습니다.
태종 때에는 48개의 기둥에 꿈틀거리는 용을 조각하였으나, 다시 지으면서 지금과 같이 간결하게 바깥쪽에는 네모난 기둥을, 안쪽에는 둥근기둥을 세웠습니다.
1층 바닥에는 네모난 벽돌을 깔고 2층 바닥은 마루를 깔았는데, 마루 높이를 달리하여 지위에 따라 맞는 자리에 앉도록 하였다네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경복궁(북궐)의 주요 건물
주요 건물 알아보기(위 그림 번호와는 맞지 않음)
① 광화문: 경복궁의 정문, 세 개의 홍예로 이루어졌으며 중앙의 홍예로는 왕, 좌우의 홍예로는 왕세자와 신하들이 출입
② 근정전: 경복궁의 중심 건물, 임금에게 새해 인사를 드리거나 국가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곳
③ 사정전: 경복궁의 편전, 임금이 하루 일과의 대부분을 보내며 정무 처리, 관료들과 만나 국사를 논의했던 곳
④ 강녕전: 임금이 개인적인 시간을 보내는 침전, 이곳에서 주로 독서와 휴식을 즐겼으며, 때로는 신하를 불러 면담
⑤ 교태전: 왕비의 침전, 경복궁 전각 중 가장 화려한 건축미를 자랑, 하늘로 솟은 양과 땅으로 가라앉는 음의 교합으로 생성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음, 궁궐 중 가장 안쪽, 그러니 가장 가운데에 위치(그래서 왕비를 중전이라 하는듯...)
⑥ 선원전: 조선 시대 역대 국왕의 어진(御眞)을 모신 공간
⑦ 경회루: 국가의 공식 연회 장소로 임금이 참석한 가운데 무과 시험이나 무사들의 활쏘기 시합이 열리기도 함
⑧ 수정전: 세종 때 집현전으로 집현전 학사들이 글을 읽던 도서실이기도 하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867년에 재건
⑨ 자선당: 왕세자의 생활 공간
⑩ 자경전: 대비들이 일상생활을 하고 잠을 자는 침전, 장수 기원의 뜻을 가진 글자, 아름다운 꽃담장과 굴뚝이 남아있음
⑪ 향원정: 휴식을 취하던 사적 공간, 향원지는 네모꼴 연못, 그 가운데 작은 동산을 둥글게 만듬
⑫ 집옥재: 고종의 서재로 활용되던 전각, 고종이 선대 임금의 어진을 봉안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장소로도 이용
⑬ 영추문: 경복궁의 서쪽문으로, ‘가을을 맞이한다’는 뜻을 가짐, 주로 문무백관이 출입하던 곳
13회 고급 14번 문제
14. 궁과 관련된 사실 답②
이 문제는 조선 시대의 궁궐(정궁, 이궁)과 관련 있는 조선~현대까지의 역사적인 사실들을 묻는, 통시대적인 문제로 출제되었네요.
태조는 조선을 건국한 후 교통과 국방의 중심지인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1394), 도성을 쌓고 경복궁을 비롯한 궁궐, 종묘, 사직, 관아, 학교, 시장, 도로 등을 건설하여 도읍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도성을 건설할 때 가장 먼저 서쪽에 사직(社稷)을 완공하고, 경복궁을 세운 뒤, 그 동쪽에 종묘(宗廟)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광화문 앞에 육조 관서(六曹官暑)를 배치하고, 운종가(종로)를 두어 시전을 배치하였답니다.
조선 시대의 궁궐은 크게 정궁(正宮, 법궁이라고도 함), 이궁(離宮), 행궁(行宮)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정궁은 수도 중앙의 기본궁으로, 경복궁이 조선 시대의 정궁입니다.
이궁은 별궁의 기능을 수행하는 궁으로,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이 있었습니다.
행궁은 왕이 거동하실 때 일정기간씩 머무는 지방에 있는 궁으로, 수원 행궁, 남한산성 행궁, 북한산성 행궁, 강화도 행궁, 평양 행궁 등이 있었습니다.
그럼 문제에 제시된 각 궁궐 들을 하나씩 살펴보죠.
(가) 덕수궁은 대한제국의 정궁 역할을 하였던 건물입니다.
정전은 중화전이며, 특히 서양식 건축 양식으로 10년여의 공사 기간을 걸쳐 1910년에 완성된 석조전이 유명하죠. 덕수궁은 원래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저택이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인해 서울의 모든 궁궐이 불타 없어지자 1593년부터 선조의 임시 거처로 사용되다가 광해군이 1611년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던 이곳에 ‘경운궁’이라는 정식 궁호를 붙여 주었습니다. 그후 광해군은 1615년(광해7) 재건한 창덕궁으로 어가를 옮기고 경운궁은 별궁으로 남게 됩니다.
경운궁은 1897년 대한제국 출범과 함께 고종이 이곳에 머무르면서 정궁 역할을 하게 되죠. 그러나 고종 황제가 황위에서 물러나면서 경운궁은 선황제가 거처하는 궁으로 그 위상이 달라졌고 이름도 덕수궁으로 바뀌었습니다.
(나) 경복궁은 가장 잘 알고 있는 궁궐이죠.
1395년에 건축된 조선 왕조 최초의 궁궐이자 법궁입니다. 경복궁의 정전은 근정전으로, 창덕궁의 인정전, 창경궁의 명정전, 덕수궁의 중화전과 함께 조선 왕조 궁궐의 정전다운 격식과 장식을 잘 갖추고 있는 건물입니다.
근정전과 인정전은 조정의 각종 의식과 외국 사신 접견 장소로 사용하였던 건물로, 일월오봉도가 배치되어 있고, 마당에는 신하들의 지위를 표시하는 품계석이 놓여 있답니다. 경복궁은 임진왜란(1592)으로 불에 타 버렸다가 1865년에 흥선 대원군이 왕권 강화 측면에서 중건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대한제국이 성립된 이후에는 덕수궁으로 그 기능이 옮겨졌답니다.
(다) 운현궁은 고종의 생부인 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사저(개인집)였습니다.
고종이 왕이 되면서 부원군(왕의 아버지를 부르던 호칭)이 살고 있는 곳이라 궁으로 바뀌었죠.
(라) 창덕궁은 태종 5년(1405)에 지어진 궁궐입니다.
임진왜란 때 정궁인 경복궁이 불에 타 소실되면서 임진왜란 이후부터 흥선 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하기 이전까지 조선 왕조의 정궁 역할을 하였습니다.
(마) 창경궁의 본래 이름은 수강궁으로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인 태종을 모시기 위하여 지은 건물입니다.
그 후 성종 때(1483) 세 대비를 모시기 위하여 새로 중건하고 이름을 창경궁으로 바꾸었습니다. 창경궁은 숙종이 인현왕후를 저주한 장희빈을 처형한 일,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인 비극이 일어난 곳이기도 합니다.
① 석조전은 3층 석조 건물로, 1층은 거실, 2층은 접견실 및 홀, 3층은 황제, 황후의 침실, 담화실 등이 있었습니다.
② 미·소 공동 위원회는 경복궁이 아니라, 덕수궁 석조전에서 두 차례 걸쳐 개최되었습니다.
③ 운현궁은 흥선 대원군 이하응의 사저였습니다.
고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면서 흥선 대원군이 자연스럽게 섭정을 하였지요.
그러면서 이곳에서 왕권을 강화할 방법과 내정 개혁을 구상하였을 것이고 서원 철폐 등의 개혁도 논의되었겠죠?
④ 정조는 창덕궁의 후원에 주합루를 짓고 고사를 따라 규장각이라 명명하고, 직제를 갖춘 독립된 기구로서 국립 도서관
의 기능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또한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
로 육성하였습니다.
⑤ 일제는 창경궁에 동물원과 식물원, 이왕가 박물관을 만들고 이름도 '창경원'으로 격하시켰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10회 고급 31번 문제
31. 강녕전과 사정전 답③
경북궁 건물에 대해서는 위에서 자세히 설명하였으니 이 문제는 간단하게 설명할게요.
강녕전(왕의 침전)과 사정전(왕의 편전)은 경복궁 내 건물의 일부입니다.
창덕궁과 창경궁을 동궐이라는 부르는 데 비해 경복궁은 북궐이라고 불렸어요.
① 덕수궁에 대한 설명이죠.
② 규장각 건물은 창덕궁에 남아 있어요.
④ 창경궁에 대한 설명입니다.
창경궁은 일제가 동물원, 식물원을 만들면서 한동안 창경원이라 불리기도 했어요.
⑤ 운현궁에 대한 설명입니다.
운현궁은 고종이 왕에 등극하기 전 살았던 흥선 대원군의 집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7회 고급 24번 문제
24. 창덕궁 답⑤
이 문제는 이궁으로 가장 오랜 동안 왕들이 거처하였던 창덕궁을 살펴볼 수 있는 문제네요.
북궐로 불린 경복궁을 살펴 봤으니 동궐로 불린 창덕궁도 잘 알아두죠.
(가)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으로, 국가의 각종 의식과 외국 사신 접견 장소로 사용하였던 건물입니다.
경복궁의 근정전에 해당하는 건물이죠.
(나) 희정당은 국왕이 일상적인 업무를 보던 편전, 그리고 침전까지 딸려 있는 건물입니다.
경복궁의 사정전, 강녕전에 해당하는 건물로 보시면 됩니다.
(다) 대조전은 왕비의 침전입니다.
경복궁의 교태전으로 보시면 될 듯합니다.
(라) 주합루는 정조가 창덕궁 후원에 지은 건물입니다.
아래층은 규장각이고 위층은 열람실이며, 여기에서는 다양한 인재들이 활동하였습니다.
규장각은 본래 역대 왕의 글과 책을 수집, 보관하기 위한 왕실 도서관의 기능을 가지는 기구로 설치되었습니다.
정조는 여기에 비서실의 기능과 문한 기능을 통합적으로 부여하고, 과거 시험의 주관과 문신 교육의 임무까지 부여
하였으며, 또한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자신의 권력과 정책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로 육성하였습니다.
주합루 앞에는 연못인 부용지(芙蓉池), 그리고 연못 남쪽에 정자인 부용정(芙蓉亭)이 있습니다.
(마) 연경당은 순조 때(1828) 창덕궁 후원에 지어진 집으로, 왕궁이 아닌 상류 주택의 양식을 따라 지어진 건물입니다.
⑤ 연경당은 영조가 아닌 순조 때에 지어진 건물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3회 1급 27번 문제
27. 경복궁 답①
이 문제는 조선 시대의 경복궁에 대해 개략적으로 알 수 있는 문제니 답지별로 살펴보죠.
경복궁 배치도는 위에 경복궁 배치도와 건물들의 특징을 알아두면 모든 문제를 풀어낼 수 있으니 잘 알아두세요.
ㄱ - 조선 시대의 궁궐은 크게 정궁(正宮, 법궁이라고도 함), 이궁(離宮), 행궁(行宮)의 세 가지가 있습니다.
정궁은 수도 중앙의 기본궁으로, 경복궁이 조선 시대의 정궁입니다.
이궁은 별궁의 기능을 수행하는 궁으로, 창덕궁, 창경궁, 경희궁, 경운궁(덕수궁)이 있었습니다.
행궁은 왕이 도읍 이외의 곳을 거동하실 때 일정기간씩 머무는 궁으로, 수원 행궁, 남한산성 행궁, 북한산성 행궁,
강화도 행궁, 평양 행궁 등이 있었습니다.
ㄴ - 경복궁의 정문은 광화문입니다.
좌묘우사...즉 광화문 좌측에에 종묘, 우측에는 사직이 배치되었답니다.
ㄷ - 왕의 집무실은 근정전 바로 뒤에 있는 사정전입니다.
근정전은 각종 의식과 외국 사신 접견 때 사용하였던 건물입니다.
ㄹ -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으로, 왕의 침전인 강녕전 뒤에 배치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ㄱ, ㄴ으로 묶인 ①번입니다.
조선의 도성 구조 및 궁궐의 여러 지식
14회 고급 47번 문제_조선 궁궐 지붕의 잡상 위치
47. 궁궐 전각에 잡상을 두는 위치 답④
이번 시험에서 가장 특이한 문제 중의 하나였죠?
이 문제는 카페에 올려놓은 문화재 Q&A 자료들을 한번씩 보신 분들이면 쉽게 맞혔을 것 같네요.
우선 전통 건축물의 지붕 구조에서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가 어디인지를 사진과 함께 살펴보죠.
전통 건축물 지붕의 추녀마루에 설치된 동물 형상은 ‘잡상’ 등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그중 궁궐의 용마루 양 끝에 용 모양을 한 용두, 독수리 모양을 한 취두, 솔개모양을 한 치미가 설치되고 추녀마루나 내림마루에는 잡상과 용두를 설치하기도 합니다(아래 사진 자료 참고).
이처럼 지붕에 용두, 취두, 치미, 잡상 등의 장식기와를 설치하는 것은 건물의 권위와 위엄을 상징하는 장식적 의미와 함께 화재 등의 재앙과 악귀를 막아주는 주술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잡상을 잘보면 중국의 고전 소설인 서유기의 주인공인 손오공(원숭이), 저팔계(돼지) 등이 나쁜 기운이 궁궐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사방을 노려보고 있음을 알 수 있어요.
잡상은 마루끝 부분에서부터 위로 올라가면서 대당사부, 손행자, 저팔계, 사화상, 이귀박, 이구룡, 마화상, 삼살보살, 천산갑, 나토두 등을 순서대로 설치하고 보통 3좌가 기본이고 그 다음은 5, 7, 9 등 홀수로 설치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경복궁 근정전의 요모조모
사진을 클릭하시면 플래시 파일을 다운받아 근정전의 각 표시된 부분(●)을 클릭하면 지붕의 취두, 용두, 치미, 잡상에 대한 설명을 볼 수 있습니다.
위의 사진을 클릭해 플래시파일을 다운받아 설치하고 이를 열어서 경복궁 근정전에 표시된 부분(●)을 클릭하면 아래와 같은 하나하나의 설명을 볼 수 있어요. 아래는 경복궁 추녀마루를 클릭하여 잡상들에 대한 설명을 본 것입니다. 왼쪽 끝네 용두(용머리 모양)도 보이죠?
경복궁 경회루 지붕에 설치된 용두, 그리고 잡상입니다.
아울러 전통 건축물의 지붕 양식 양식도 알아두시죠.
맞배 지붕
가장 간단한 형식으로 주심포 양식에 많이 쓰입니다. 처마 양끝이 조금씩 올라가고 측면은 대부분 노출되는 구조미를 이루어 수덕사 대웅전, 무위사 극락전, 부석사 조사당, 개심사 대웅전, 선운사 대웅전 건물 지붕에서 나타납니다.
우진각 지붕
지붕면이 전후 좌우로 물매를 갖게 된 지붕 양식입니다.
지붕면 높이가 팔작 지붕보다 높게 되어 있는 해인사 장경판고 지붕이 대표적입니다.
팔작 지붕
가장 아름다운 구성미를 지닌 지붕으로 곡면이 특이하여 부석사 무량수전, 통도사 불이문 지붕이 대표적입니다.
10회 고급 22번 문제_사직단
22. 서울의 사직단 답③
이 문제는 서울에 살고 있는 분이나 이 유적에 다녀오신 분에게 절대 유리한 문제네요.
그리고 제시된 지도는 조선 후기에 김정호가 그린 수선전도라는 고지도입니다.
수선전도에 표시된 것을 보면 서울 사대문 안, 그중에서도 서쪽에 위치한 유적임을 알 수 있어요.
그리고 결정적으로 옆에 제시된 유물 사진을 보면 사직단(社稷壇)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어요.
사직단은 왕이 백성을 위하여 토지신(土地神)인 사(社)와, 곡식신인 직(稷)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입니다.
①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재된 종묘에 대한 내용이고요.
종묘는 서울 종로에 있습니다.
② 소격서는 하늘과 땅, 별에 제사를 지내는 도교의 초제를 맡아보던 관서였어요.
소격서는 서울 삼청동에 있었답니다.
④ 선농단에 대한 설명입니다.
선농단은 처음으로 농삿일을 가르친 신농씨(神農氏)와 후직(后稷)을 제사 지내던 단입니다.
선농의 기원은 신라 때부터로 고려 시대에는 983년(성종2)에 왕이 밭을 갈며 신농에게 제사하고 후직을 배향(配享)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농과 후직을 제사지낸 것은 고려 성종 때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⑤ 성균관에 설치하였던 문묘에 대한 설명입니다.
서울 종로 명륜동에 있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7회 고급 17번 문제_한양의 구조
17. 한양의 구조 답②
이 문제는 조선 시대 한양의 지도를 주고 당시의 도성과 관련한 사실을 묻는 문제입니다.
이런 문제는 사실 지도를 보고만 풀 수도 없고, 지도의 세부적인 모습이 보이지 않으니 평소에 공부한 내용을 토대로 생각하며 풀어나가야 합니다.
답지를 하나씩 살펴보며 풀어보죠.
① 경복궁 앞쪽, 그러니까 광화문 앞으로는 ‘육조거리’라고 불리는 대로가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세종로이죠.
여기에는 의정부와 6조를 비롯한 여러 관청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② 도성(사대문 안)을 가로지르는 하천은 청계천입니다.
한강은 사대문 밖, 즉 도성 밖을 흐르는 강입니다.
③ 왕도의 제도에 따라 경복궁을 중심으로 좌측에는 종묘, 우측에는 사직(좌묘우사)이 세워졌습니다.
④ 문묘는 유교의 성인(聖人)인 공자를 모시는 사당입니다.
문묘는 도성인 한양에는 성균관에 설치되었고, 지방 군현에는 향교에 설치되었습니다.
⑤ 서울성곽은 도성을 둘러싼 것으로, 1396년(태조 5)에 축성되었습니다.
성벽은 백악(白嶽)·낙산(駱山)·남산(南山)·인왕산(仁王山)의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습니다.
중간중간에 출입을 위한 문으로, 사대문과 사소문을 만들었지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②번입니다.
6회 고급 14번 문제_남대문(숭례문)과 종묘 창건 당시의 상황
문제해설
이 문제도 유사 기출문제로 풀어보자구요.
문제에 제시된 왼쪽 사진은 숭례문(남대문), 오른쪽 사진은 종묘 정전의 모습입니다.
숭례문은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던 도성의 정문입니다.
숭례문이라는 현판은 양녕대군이 썼다고 전해집니다.
종묘 정전은 조선 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주 49위를 모신 유교 사당입니다.
종묘도 1년여의 공사 기간을 거쳐 1395년(태조 4년)에 준공되었습니다.
따라서 두 건물 모두 한양으로 천도한 후 태조 때 건설되었으니, 당시의 사실을 답지에서 찾아보죠.
① 사병 혁파는 태종이 왕위에 오른 후 실시하였습니다(1400).
두 차례 왕자의 난을 통해 이방원은 사병이 왕권에 위협적인 요인임을 파악하고 왕에 오른 후 이를 혁파한 것이죠.
② 이종무의 대마도(쓰시마 섬) 정벌은 세종 때의 일입니다(1419).
고려 말인 1389년에도 박위가 쓰시마 섬을 토벌하였던 적이 있죠.
③ 사림원은 고려 시대 충선왕 때 설치한 것으로, 임금의 명령을 받아 문서를 꾸미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입니다.
충렬왕 때 설치된 문한서를 고쳐 부른 것으로, 충선왕은 이를 중심으로 개혁 정치를 추진하였죠.
④ 진관 체제는 세조 때 실시(1457)한 지역 방위 체제입니다.
각 도에 한두 개의 병영을 두어 병사가 관할 지역 군대를 장악하고, 병영 아래에 몇 개의 거진을 설치하여 거진의 수령
이 그 지역 군대를 통제하는 체제였습니다. 이는 뒤에 제승방략 체제로 전환되었는데, 임진왜란 당시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다시 진관 체제로 복귀합니다.
⑤ 태조 5년(1396) 정도전이 작성하여 명에 보낸 외교 문서의 내용을 문제삼아 명이 문서 작성자를 압송할 것을 요구한
표전 문제 등으로 명과의 관계가 불편해지자 정도전이 중심이 되어 요동 정벌을 추진하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5회 고급 23번 문제_한양의 도읍 구조
23. 한양의 구조 답⑤
이 문제는 조선 시대 한양의 구조와 상인에 대해 묻는 문제입니다.
여러 가지 사실들을 각각 묻고 있으니 각각의 것들을 자세하게 하나씩 살펴보죠.
㉠ 종묘는 조선 왕조의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죽은 후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시는 유교 사당입니다.
종묘는 태조 3년(1394) 조선 왕조가 한양으로 도읍을 옮긴 그해 12월에 착공하여 이듬해인 1395년에 완공하였어요.
종묘는 정전을 비롯하여 별묘인 영녕전과 전사청, 재실, 향대청 및 공신당, 칠사당 등의 건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조선 시대에는 정전에서 매년 춘하추동과 섣달에 대제를 지냈고, 영녕전에는 매년 춘추와 섣달에 제향일을 따로 정하
여 제례를 지냈답니다. 종묘 제례는 종묘인 의례 공간과 함께 의례 절차, 의례 음식과 제기, 악기와 의장물, 의례 음악
(제례악)과 의례 무용 등이 조화되어 치러졌습니다.
종묘는 그 가치를 세계적으로 인정받아 1995년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답니다.
종묘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링크를 클릭하고 보세요. http://cafe.daum.net/hankuksalove/VfMS/1
㉡ 사직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을 아울러 이르는 말입니다.
사직단은 왕이 토지 신과 곡식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입니다
역대 왕조에서는 종묘(宗廟)와 더불어 사직단을 지어서 나라와 백성을 위하여 사직에게 복을 비는 제사를 지냈습니다.
특히 사직은 나라나 조정(朝廷), 왕조(王朝)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극에서 보면 나라가 위태로운
상황에 처할 때 "사직이 위태롭다", "종묘사직이 무너진다"라는 말이 나오는 것을 본적이 있죠?
㉢ 시전이란 정부에 점포세와 상세를 부담하며 상행위를 하던 상설 점포입니다.
시전은 주민들의 일상 생활용품 공급과 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수요품의 조달 등을 담당하였습니다.
시전은 고대로부터 있었으며, 조선 시대 들어 시전 상인은 왕실이나 관청에 물품을 공급하는 대신에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과 난전을 단속하는 권리(금난전권)를 부여 받았습니다.
이들 시전 중에 명주, 종이, 어물, 모시, 삼베, 무명을 파는 점포가 가장 번성하였는데, 후에 이를 육의전이라 하였죠.
정부에서는 이들의 불법적인 상행위를 통제하기 위하여 경시서를 두었습니다.
㉣ 육의전은 국가로부터 독점적 판매권을 부여받고 국가 수요품을 조달한 선전(비단상점), 면포전(무명상점), 면주전(명
주상점), 지전(종이상점), 저포전(모시,베상점), 내외어물전(생선상점)의 여섯 종류의 큰 상점을 말합니다.
정조 때 시전 상인의 특권인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신해통공(1791)을 반포하였으나 육의전은 제외되었습니다.
㉤ 종루, 이현(동대문 밖), 칠패(남대문 밖)는 조선 후기 들어 형성된 시장으로, 사상들이 활동하였던 난전입니다.
난전이란 정부로부터 판매를 허가 받지 않고 물건을 판매하는 행위나 시설을 의미합니다.
시전 상인들은 금난전권을 가지고 이들의 상행위를 금지, 방해했으나 18세기 이후에는 사상이 서울을 비롯한 각지에
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⑤ 지방에서 5일마다 열렸던 비상설 시장인 장시에 대한 설명입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⑤번입니다.
조선의 읍성 구조 및 양반 가옥의 구조
2회 2급 20번 문제_조선 시대 읍성의 구조
20. 조선 시대 읍성의 구조 답④
조선 시대 궁궐이나 도성의 구조, 건물뿐만 아니라, 군현의 읍성의 구조도 살펴보면 좋을 것 같아 유사 기출문제로 함께 공부하도록 제시합니다.
이런 내용은 대부분의 교재에서도 다뤄주지 않는 주제이니 이 기회에 잘 공부해두는 것이 좋겠죠?
이런 문제가 나오더라도 당황하지 말고 풀면 의외로 답은 쉽게 찾아지는 경우가 많아요.
이 문제도 그런 경우이니 문제 푸는 요령도 함께 배워보세요.
문제에 제시된 조선 시대의 읍성은 오늘날에도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는 고창읍성입니다.
그럼 각 건물들을 하나씩 살펴보며 공부하자구요.
① 객사(客舍)는 고려~조선 시대에 각 고을에 설치해둔 관사(館舍)입니다.
이 객사는 중앙에서 내려오는 관리들의 숙소, 또는 드물게 외국에서 오는 사신들의 숙소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지방을 여행할 때 객사를 볼 수 있거나 강릉 객사문처럼 터가 남아 있는 경우가 있으니 주의 깊게 살펴보세요.
② 내아(內衙)는 내당(內堂)이라고도 하는 수령의 사적인 거처로, 수령 가족의 생활 공간을 의미합니다.
양반 가옥에서 부녀자들이 거처하는 방을 내당이라고 부릅니다.
③ 동헌(東軒)은 수령들이 정사를 집행하던 관아 건물입니다.
사극에 보면 수령이 대청 의자에 앉아 있고 지방민들이 동헌 마당에 꿇어 앉아 억울함을 호소하는 모습 보셨죠?
그 건물과 장소가 바로 동헌입니다.
④ 향청(鄕廳)은 수령을 보좌하고 향리를 감찰하며 향촌 사회의 풍속을 바로잡기 위한 기구였습니다.
향청은 유향소가 바뀐 이름으로, 지방 행정 관서 단위로 운영되었던 자치 기관입니다.
향청은 수시로 향회를 소집하여 지방의 여론을 모으고, 백성들을 교화하였으며, 수령에 대한 자문, 수령의 비행을
고발하는 등 오늘날의 지방 의회와 비슷한 역할을 하였답니다.
⑤ 감옥이 읍성에 설치되었으니 수령들이 사법권(재판권 및 수사 형옥 업무)을 행사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 밖에 문제에 제시된 주요 건물 중, 관청은 음식을 만들던 건물, 장청은 장교들을 비롯한 군사와 관련한 자들이 군사
업무를 보던 건물이라네요.
④ 향리인 육방이 행정 업무를 보던 건물은 작청입니다.
작청을 모르더라도 향청이 무엇인지 알면 의외로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는 문제네요.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④번입니다.
3회 1급 28번 문제_조선 시대 양반의 가옥 구조
28. 조선 시대 양반의 가옥 구조 답③
조선의 궁궐, 도성의 주요 건물, 그리고 읍성의 구조까지 살펴봤으니 양반 가옥 구조에 대한 문제까지 공부합시다.
제시된 양반 가옥에 나타난 각각의 건물들을 살펴보고 문제를 풀어보죠.
행랑채는 하인들이 기거하거나 곡식 등을 저장해 두는 곳이었습니다.
사랑채는 바깥주인이 거처하며 손님을 접대하는 용도로 쓰는 장소였습니다.
안채는 집안의 주인마님을 비롯한 여성들의 공간으로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에 위치하였습니다.
궁궐에서도 왕비의 침전은 가장 안쪽, 그러니 궁궐의 중앙에 위치하였는데(그래서 왕비를 중전이라 부른다네요...^^) 양반 가옥에서도 마찬가지랍니다.
별당채는 결혼 전의 딸들이 기거하던 곳으로, 초당으로도 불렸습니다.
사당은 대문으로부터 가장 안쪽에 조성된 조상들에 대한 의례 공간으로 마련된 건물입니다.
① 하인들의 거처인 행랑채는 대문 근처에 둔 것을 알 수 있죠?
② 조상 숭배 정신은 사당의 존재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③ 양반의 가옥 구조를 보면 개방적인 것이 아니라 폐쇄적인 구조임을 알 수 있어요.
집은 겹겹의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고 내부에도 폐쇄적으로 구획되어 있습니다.
④ 성리학적 기본 윤리는 여자는 안, 남자는 바깥인데, 집도 그러한 것에 맞춰 설계되었습니다.
⑤ 안채와 사랑채를 붙여 놓은 경우는 안채의 아녀자들이 사랑채의 남자 손님 접대를 쉽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문제의 정답은 ③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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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보는데 엄청 오래걸림. ㅠㅠㅠ
아 궁궐 문제 저도 어렵던데 ㅎㅎㅎ 해설 감사욤
어렵네요 ㅠㅠ
아 못살아 궁궐 나오지마라 나오지마라
와우..궁궐 문제 안나왔음 좋겠어요. 뭐가 뭔지;
우와 진짜 궁 ㅋㅋㅋㅋ
주합루안에 규장각있었군요 감사합니다!
어렵네요...ㅜㅜ 열심히 외워야 겠어요
궁궐문제는 봐도봐도 적응이 안되네요..ㅋㅋㅋ그래도 보다보면은 알게되겠죠?ㅠㅠㅠ해설 정말 감사합니다!
답이없다....이런....
뜨헐... 궁 문제는 정말... 봐도 너무 어려워요~~!
궁궐 정리해서 공부해야겠어요.
궁궐문제....어렵네여
(여기서부터보기)
궁궐문제 ㅠㅠ...... 흠 진짜 헷갈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