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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24일 주일예배 - 가을묵상(4) 묵상하라
신명기 6:4-9 / 요한복음 1:45-51
전에 한 역사학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구세대는 좌우로 흔들어야 사상이 굳지 않고 신세대는 앞뒤로 흔들어야 역사와 미래를 알게 된다. 무슨 이야기냐? 사실 우리나라 전통은 책을 읽을 때, 눈과 입과 귀와 코를 이용했었다 라는 것입니다.
서당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학생들이 서당에 왔을 때, 책을 사서삼경을 읽을 때 계속 몸을 흔들면서 읽지 않습니까? 훈장 선생님도 계속 몸을 흔들면서 책을 읽지요. 그렇게 읽는 것이 우리 전통이었습니다. 몸을 이용해서 소리를 내서 읽는 것이 우리는 전통이었는데, 어느새 책을 두 눈으로만 읽게 되었다 라는 것이 실제로 책을 읽을 때 소리내서 읽는 습관을 가지고 있을 때, 더 마음에 새겨지고, 더 이해가 높다 라고 얘기합니다.
과거에 어르신들이 가지고 읽던 책을 소리 내서 읽는 좋은 습관을 다시 그 전통을 회복하자는 마음으로 구세대는 좌우로 흔들어야 사상이 굳지않고, 신세대는 앞뒤로 흔들어야 역사와 미래를 알게 된다 라고 얘기하신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을 읽을 때도 우리 어르신들 예전 개역한글 성경, 세로로 쓰여졌던 성경 기억나십니까? 세로로 쓰여졌던 성경을 앞뒤로 흔들면 헷갈립니다.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좌우로 흔들어서 읽어야 딱 한 줄이 보입니다. 요즘은 개역 개정은 가로로 쓰여져 있죠. 좌우로 흔들면 헷갈립니다. 오히려 앞뒤로 흔들어서 읽어야 더 읽기가 편하지요. 이렇게 마무리 하십니다. 성경 말씀은 눈으로만 읽는 것이 아니라, 입으로 읽고, 귀로 듣고, 몸으로 흔들어 채우는 것이다.
2019년도 이제 거의 마무리 할 때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정리할까, 고민하신다면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한해를 마무리 하시기를 권면드립니다. 그냥 눈으로만 읽지 마시고, 시간을 내서, 몸을 흔들며 입으로 귀로 온몸을 이용해서 말씀을 읽고 한해를 말씀으로 정리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옆에 있는 분들과 이렇게 인사 나누기를 원합니다. 말씀으로 한해를 마무리 합시다. 말씀으로 한해를 마무리 합시다. 이번 한 주 동안 한번 말씀을 읽으시면서 한해를 정리하시는 한 주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가을에 묵상, 가을 묵상 마지막 시리즈 말씀으로 묵상하라 라는 제목으로 함께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요즘 시대를 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이야기합니다. 알파고가 몇 년 전에 세계 바둑 1위 기사였던 이세돌을 5번 중에 4번 이겼죠. 우리 인간은 그 5번 중에 한 번 이겼다고 신이 났었습니다. 이제 여러분 곳곳에는 인공지능 AI 비서가 있을 것입니다. 아마존이라는 회사는 알렉사 라는 인공지능 비서를 두었고요, 삼성에서는 빅스비, 그리고 LG 씽큐, 카카오에서는 하이 카카오 미니라는, 인간이 아니라 인공지능 로봇 비서가 생겨났습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헤이 카카오미니 오늘 날씨가 어때? 하면 날씨를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제가 아침에 일어나서 제 아내한테 오늘 날씨가 어때 하면, 당신이 찾아봐, 이러는데 헤이 카카오미니 한테 물어보면 너무나 친절하게 알려줍니다. 여러분이 궁금해하는 날씨, 교통 상황, 그날 어느 스포츠팀이 이겼는지까지도 인공지능 AI 비서가 다 알려줍니다.
때로는 나의 생체리듬까지도 알려줍니다. 제 딸이 미국에서 와서 한국생활을 하는데, 미국에선 차를 타고 다녔는데 이곳에서는 이제 걸어다니고 버스를 타야 됩니다. 처음으로 집에 올 때 제가 전화로 야, 어느 골목에 들어갔다, 몇 번 버스를 타고, 어디에서 내려가지고, 이렇게 해서 올라오면 돼 라고 말합니다. 아이는 아, 아빠 그만해. 시끄러워. 무슨 얘긴지 하나도 모르겠어. 나 티맵 키고 갈 거야. (좌중 웃음) 이제 아빠보다 티맵이 더 중요한 시대가 됐습니다.
제가 아는 장로님은 미국에서 의사신데요, 과거에는 인간의 몸에 대한 연구 논문을 발표하는 학술대회가 대다수였는데, 요즘에는 그 몸을 어떻게 수술할 것인가에 대한 컴퓨터 프로그램에 대한 그런 학술 대회가 더 많아지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의사가 몸에 대한 연구를 하는 것보다 이제는 그 몸을 어떻게 치료할 것인지 바로 AI 와 같은 그런 컴퓨터를 더 연구하는 시대가 되었다 라는 것이지요. 20년 30년 후 쯤에는 지금의 의사 숫자가 상당히 줄어들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습니다. 컴퓨터에 연결된 여러분 스마트폰에 메디컬 어플리케이션이 나오는 것입니다.
요즘에도 있습니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피 한방울만 그 센서에 떨어뜨려 놓으면 그 날에 건강을 체크해 줍니다. 오늘은 무슨 음식을 먹고, 먹지 말아야 할지, 어떤 운동을 해야할지, 말아야 할지, 수면은 몇 시간을 더 자야할 지를 다 알려주는 시대가 된 것이죠. 의사가 필요없는 것입니다.
이제 어플리케이션이, 인공지능 로봇이 알려주는 시대가 됐습니다. 여러분 좋으시죠? 그 시대가 빨리 왔으면 좋겠지요. 그런데 저는 그 시대가 빨리 오는 것이 좀 불편합니다. 자주는 아니지만 우리 사람은 일탈을 하면서 기쁨을 느끼지 않습니까? 건강하지 않은 음식 먹으면서 행복해 하지요. 그렇게 커피 먹지말라고 해도 커피를 먹습니다. 포장마차 떡볶이 먹지 말라. 그래도 그렇게 다 가서 먹습니다.
나의 건강과 일상을 모두 간섭하는 AI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시대에 산다는 것은 솔직히 불편합니다. 여러분 가끔 밤에 야식 먹고 싶잖아요. 저만 그렇습니까? 자장면 때로는 곱빼기 시켜서 먹어야 배가 든든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아무리 신문에 자장면 칼로리가 높고 지방이 높다 해도, 가끔은 자장면 먹고 싶습니다. 퇴근하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영동고속도로를 타게 됐습니다. 빠져나오지 않고, 그래 오늘은 동해 일출 한번 보고 가자. 다음날 회사 제끼고, 그런 일탈이 우리 인간의 삶에 때로는 살아가는 맛을 즐기게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근데 인공지능 로봇 AI 가 지배하는 삶으로 살아가는 항상 통제받고 조종받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삶은 꼭 그렇지 않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생각 외로 많은 사람들이 4차 산업 혁명으로 그런 편의와 신속함, 안전과 완벽한 삶의 시대가 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조금 더 나아가 본다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저와 여러분, 우리 교회를 생각해본다면 저와 여러분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는 크리스천들은 AI 나 인공지능, 알파고, 4차 산업에 컴퓨터들에 의해 통제받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요. 성령 하나님이, 하나님께서 또 말씀대로 사는 것, 그것을 우리는 더 좋아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아이 로봇이라는 영화를 보면, 한 사이보그 인간이 본인도 절반은 인간이고, 절반은 기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공지능 로봇을 싫어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인간이었을 때 완전한 인간이었을 때 한 가지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 경험은 그 주인공이 가족과 함께 여행을 가다가 강물에 차가 빠졌습니다. 그런데 인공지능 로봇 경찰이 물 속에 들어와서 가족을 구하는데, 자신의 어린 딸 대신에 장정한 남성인 주인공인 자기를 구하는 바람에 딸이 익사해서 죽었습니다.
어떻게 연약하고 힘이 없는 딸을 먼저 구하지 않고, 나를 구했냐고 막 화를 냈던 이 인공지능 경찰 로봇이 이렇게 얘기합니다. 로봇은 가장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을 합니다. 컴퓨터 계산으로는 당신이 살 확률이 45%였고, 딸이 살 확률이 11%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살 확률이 높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AI 인공지능 로봇 경찰은 이렇게 판단해서 사람을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구조대가 인간이었다면, 물에 빠진 자동차를 보고 뛰어들었을 때, 물이 차오르는 그 차 안에 연약한 여자 아이와 장성한 남성 어른이 있었다면 분명히 우리 인간은 살아날 확률 대신에 직감적으로 연약한 여자아이를 살리려고 했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실 때 약자를 돕고, 연약한 자를 도와주도록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우리 안의 사랑이라는, 뜨거운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품도록 창조해주셨습니다.
아이를 낳으면 우리 여성분들 건강이 심각하게 나빠지게 됨에도 불구하고 우리 어머니도 자신의 건강보다 내 배에서 나온 생명의 건강을 더 생각하며 그들을 양육하더라는 것입니다. 몸이 불편하고 마음이 불편한 사람들을 돕고자 하면서 내 시간을 버리게 되고, 내 물질을 버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거리낌없이 그들을 돕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존재들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진, 우리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우리 인간이 더 논리적이고 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인공지능 로봇과는 다르게 더 옳고 더 바르고 더 선택을 한다고 생각을 할까요? 수학적으로 확률적으로 계산적으로는 인공지능 로봇의 선택이 더 맞을 수 있습니다. 11% 살아날 여자 아이를 살리는 것보다 45% 살아날 확률은 가진 남자를 구하는 것이 맞을 수 있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자아이를 살리려 하는 인간의 판단과 선택이 인간들에게 우리 공동체에게 더 공감을 얻고 인정을 받는다 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인간은 깊이 생각하고 판단하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존재입니다. 확률과 수학 만으로 판단하고 선택하는 로봇과 컴퓨터와 다른 능력을 가진 것이 있다면, 우리는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깊이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지금 저와 여러분 같은 크리스천의 입장으로 말씀드리면 저와 여러분이 로봇과 컴퓨터보다 지능이 떨어질 수 있습니다. 정보량도 부족하고 계산력도 떨어지지만 그래도 우리 인간이 컴퓨터와 인공지능 로봇과 다른 것은 인간은 묵상할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로봇은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묵상할 수 있습니다. 교회도 점점 4차산업혁명에 물들어갑니다. 교회 시스템도 컴퓨터화 하자고 이야기합니다. 마음이 힘들고 어려울 때 여러분 찬양 집회 찾아가 ccm 찬양 복음성가 여러분 부르시는 찬송가 찾아 부르시는데, 이제는 내가 마음이 지치고 힘들어서 라고 인공지능 비서한테 얘기하면 알아서 찬송가를 찾아 줍니다. 그리고 들려 주기까지 합니다. 굳이 찬양집회 하러 교회까지 가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시대가 되었습니다.
천주교회는 매년 이맘때쯤 되면 한해동안 지은 죄를 고해성사 하는 시간이 있습니다. 조그만 방에 들어가서 신부님께 자신의 죄, 1년 동안 지은 죄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천주교 신부님들의 숫자가 점점 줄어드니까, 고해성사 받을 신부님들이 점점 없어집니다. 그래서 이런 얘기도 합니다. 인공지능 성직 로보트를 만들자고요. 이미 천주교회는 고해성사 애플리케이션이 나와 있습니다. 거기다가 하는 겁니다. 이러다가 설교권도 인공지능 로봇에게 빼앗겨버릴 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러분 굉장히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굉장히 마음이 힘든데요. 당회는 어떻습니까? 교회 행정업무를 살피는 당회, 우리 당회원들도 성도님들 성향에 따라 때로는 정치적인 성향에 따라 일들을 결정하는데 오히려 당회 컴퓨터 프로그램 어플리케이션 있으면 가장 효율적이고 확률적으로 좋은 것을 선택해서 교회 행정업무가 잘 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그런 시대가 오면 교회가 부흥할까요? 이야기를 들으면 그럴듯하지만 마음은 불편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앙은 효율, 확률, 수학적 계산, 기브앤테이크 라는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앙 가운데 기도를 생각해 보십시오. 기브앤테이크가 됩니까? 너무 힘든 일이 있어서 하루종일 교회에서 기도합니다. 10시간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10시간 평안함을 허락해 주십니까? 그렇지 않을 때가 더 많지요. 10번 기도하면 1번 응답 받을까 말까 하는 것이 우리의 신앙 아닙니까?
효율적으로 확률적으로 너무나 부족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기도하지요. 어떨 때는 기도했는데, 문제가 더 커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기도했는데 문제가 더 심각해졌음에도 불구하고 또 기도하십니다. 오히려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음을 가지고 나갔습니다. 또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또 읽고 묵상합니다. 10번쯤 묵상하며 하나님이 답을 주실까? 아니 50번 쯤, 아니 백번쯤 불교에서 처럼 108배 기도하면 종교적인 효율과 확률이 더 높아질까, 아니지요. 묵상은 매우 비효율적이고, 기도는 매우 확률적으로 불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는 자들은 기도합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더 깊이 묵상하고 또 묵상합니다. 효율이 없을지라도, 확률이 떨어질지라도, 우리 믿는 자들은 묵상하는자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도 신기하게도 그 기도하는 자들 가운데 그들이 모여서 교회를 세웁니다. 목사가 깊은 묵상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신앙공동체는 생명을 살리더라 라는 것입니다. 우리 믿는 자들은 기도하고 묵상해야 살 수 있습니다. 묵상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죽게 됩니다. 묵상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쓰러집니다. 교회가 쓰러지고 넘어져 타락한다면, 진정으로 묵상하는 자가 교회 안에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깊은 생각 없이 그저 유명한 목사의 설교에 아멘을 남발합니다. 예배가운데 묵상이 사라졌습니다. 우리 교회 가운데, 가까운 곳에 성북동에 지난주 신문을 보셨습니까? 세 모녀가 가난에 못이겨서 마음의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교회는 더 많은 것을 손에 쥐길 원하는 것을 말씀으로 전하고, 더 배부르기 원하는 것을 설교로 전하는 것에 아무 생각없이 아멘 아멘을 외치는 것이 한국교회가 되었습니다.
교회에 깊은 생각을 하는 어른들이 사라지니, 교회 안에 존경심이 떨어지고 있습니다. 교회에 묵상하는 모습이 사라지니, 더 이상 세상이 교회를 본받으려 하지 않습니다. 교회가 묵상없이 세상을 바라보니 이젠 교회가 세상 문화에 뒤떨어져서 쫓아가는 꼴이 되었습니다. 묵상하는 이것을 잃어버리면 교회는 죽습니다. 묵상 하지않으면 영혼이 죽습니다.
에스겔 37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에스겔 선지자를 깊은 골짜기로 데려가십니다. 그곳엔 뼈들이 가득합니다. 2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 즉,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저는 이 구절을 깊이 묵상했습니다. 에스겔이 하나님 말씀을 들어서 그 골짜기를 보게 하시는 겁니다. 그 골짜기를 보고 바로 에스겔이 그 상황을 2절에서 표현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이 장면이 어떤 것을 의미하고 있을까? 하나님께서 그 뼈가 가득한 골짜기를 보여주실 때 무엇을 생각했을까? 뼈들이 무엇일까? 왜 나를 보내셨습니까?
어둠과 그늘진 곳에 내가 왜 와있는 것일까? 깊이 고민하고 생각하고 기도했겠지요. 그것이 무엇입니까? 묵상하는 것입니다.
제가 지난주에 선교를 다녀왔습니다. 에스겔 선지자의 마음으로 곳곳에 선교지를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태국 좋더라 필리핀 살면 괜찮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며 돌아다녔겠습니까? 아닙니다. 곳곳에 선교지를 다니면서 에스겔 37장의 이 말씀처럼 하나님 왜 나를 이곳에 보내셨습니까? 왜 이 사람들을 만나게 하셨을까?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게 하시는 것일까? 왜 이 불편한 마음을 주셨을까? 왜 마음 깊은 곳에 아픔을 허락하실까? 끓임없이 기도하면서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했습니다.
그럼 그것이 묵상이지요. 제가 가는 곳마다 마른 뼈와 같은 곳이었지만, 그곳마다 하나님께서 묵상하게 하시니, 저도 에스겔 선지자처럼 그곳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에스겔 37장 4절에서 5절 보면 '너희 마른뼈들아 내가 생기를 너에게 주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하고 에스겔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합니다. 뼈가 어찌 살 수 있겠습니까? 있을 수 없고 비효율적이고, 확률적으로도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묵상하는 자는 직접 기적을 행할 수 없습니다. 이적을 보여줄 수 없어도 많은 비젼을 볼 수 있습니다. 뼈를 살아나게 할 순 없지만 살아나는 것을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 소리는 묵상해야 하는 것입니다. 에스겔 37장에서 마른 뼈가 큰 군대가 됩니다. 에스겔이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그 뼈 골짜기를 보여줄 때 에스겔은 깊이 묵상을 했더니, 하나님께서 그에게 생명의 말씀을 대언하게 하셨고, 그 대언한 말씀으로 생명의 기적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묵상하셔야 합니다. 묵상의 신앙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죽습니다. 교회는 죽습니다. 신앙의 공동체는 죽습니다. 그러나 묵상의 삶을 지켜내면 우린 다시 소생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회복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묵상의 삶을 살아야 할까?
첫 번째는 하나님을 묵상하되, 하나님을 가슴에 못을 박아놓은 듯 묵상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신명기 6장의 말씀을 보십시오. 4절에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시니 여러분의 이름을 넣어서 한번 읽어보십시오. 주용아 새겨들어라! 마음에 꾹꾹 찔러 새겨들어라.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오직 유일한 하나님이시다. 네가 묵상을 해야한다면 오직 유일한 하나님만 묵상해야 한다는 것이 5 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묵상하는 것이지요.
어떻게 하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가슴에 못이 박혀지는 것 같은 그런 묵상이 우리 가운데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6절에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내가 묵상하는데 어떻게 하는가? 7절에서는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을 때나 길에 갈 때나, 누워있을 때나 일어날 때 말씀을 강론하라. 무엇을 얘기합니까? 집과 길과 누워 있는 곳과 일어서는 곳 장소를 얘기하면 어느 장소, 어느 시간 때든지 그렇게 하나님을 늘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8절 9절에서도 집에 문설주와 바깥 문을 흘려,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을 기록한다. 여러분의 시간, 여러분의 장소, 어느 곳에 어떤 때든지 늘 여호와 하나님을 묵상하는 것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정말로 이렇게 하나님만을 묵상하고 계십니까? 시공간 모든 것을 드려서 하나님을 묵상하고 계십니까? 가슴에 못을 박듯, 그렇게 하나님만을 내 영혼에 새기는 묵상을 여러분의 신앙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습니까?
몇 줄 되지도 않는 매일 있는 생명의 삶, 그 성경 말씀 그냥 그거 1분만에 읽고 한 1, 2분 눈 감고 기도하는 것으로써 오늘 묵상 다했다고 바리새인처럼 그렇게 외식적으로 살아가지 않습니까? 주일날 목사님 설교 듣고 잠깐 생각하고 잠깐 반성하는 것으로 한 줄 묵상의 삶을 다 했다고 고백한다면 여러분 그것은 진정한 묵상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참된 묵상은 하나님을 내 가슴에 못을 박아내듯 새기고 또 새기는 기도가 이루어지는 것, 내 모든 시공간 내 삶의 시공간이 다 하나님으로 채워지는 것이 참된 묵상입니다.
유명한 소설가 마크 트웨인이 교회에 갔습니다. 설교를 듣는데 아이고 설교 도입부가 너무 좋았습니다. 야 이 설교가, 설교 잘 하는구나. 내가 오늘 헌금해야 겠다. 10불을 헌금해야지 라고 결심했습니다. 그 결심 이후부터 이 사람은 10불만 생각합니다. 야 10불 하기엔 좀 많은데, 설교를 조금 더 들어보니 10불은 아깝고 9불만 해야겠다. 조금 더 들어보니 야 9불도 아깝다, 8불, 7불, 5불까지 내려갑니다. 중간쯤 되니 조는 사람도 있네. 야 5불도 아깝다. 3불, 1불. 설교가 거의 끝날 즈음에 어떻게 바꿔었습니까? 야 오늘 헌금 못하겠다. 즐거운 예배가 다 끝나고, 그 예배를 돌아보니 맨 도입부만 기억나고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10불만 계속 생각한 겁니다.
제가 가끔 어떤 권사님을 설교 가운데 칭찬합니다. 권사님 신앙이 좋습니다. 그러면 일주일 내내 소문이 납니다. 목사님이 그 권사 칭찬했대. 설교 내용은 하나도 기억 못하시고, 그거 인사 칭찬한 것만 기억하신 겁니다. 질투하는 마음을 가지시는 거죠. 제가 성가대 칭찬을 가끔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 제가 성가대 게일찬양대 칭찬하면 1부, 2부, 우리 부용, 연못골 찬양대 난리가 납니다. 그리고 다음 주에는 설교 내용은 듣지 않고 우리 찬양대 언제 칭찬하나? 그것만 듣는거죠.
여러분 지금 이것이 우리가 형식적으로 하는 묵상의 현실 아닙니까? 처음에는 하나님만을 묵상하겠다. 하나님! 하나님을 묵상하니 기쁘고 행복하니 이 모든 것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어느새 하나님께 모든 것을 드리려고 생각하니, 아깝기 시작합니다. 시간이 아깝고, 내 공간이 아깝고, 내 물질이 아깝고, 그러면서 그 묵상으로 하나님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하나님 외의 것을 생각하기 시작하면서, 그 묵상의 시간은 가식의 시간이 됩니다. 여러분 마지막까지, 끝까지 하나님만 묵상하십시오.
사랑하는 연동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만 묵상하셔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살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묵상 너머를 기대하라는 것입니다. 묵상 너머를 기대하라. 오늘 신약의 본문 요한복음 본문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빌립이 예수를 만나고 거듭났습니다. 그리고 그의 친구 나다나엘에게 '야, 내가 선지자를 만났어 나사렛 예수가 선지자야,' 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이 '야,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오겠냐' 라고 얘기하죠. 비아냥거리는 겁니다. 그러자 빌립이 '야, 그래도 한번 가보자. 와봐라' 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나다나엘이 예수께 가봅니다.
예수님께서 나다나엘이 오는 것을 보고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구나.' 그러자 나다나엘이 놀라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또한 예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우리 4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나다나엘이 이르되, 어떻게 나를 아시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 있을 때에 내가 보았노라."
어떻게 저를 아십니까? 제가 이스라엘에 간사함이 없는 사람인데, 그렇게 뛰어난 저를 어떻게 아셨습니까? 예수님께서 내가 너 무화과 나무에 앉아있는 걸 보았다.
여기서의 무화과나무는 무엇입니까? 바로 저와 여러분이 행하는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묵상의 삶의 상징적인 것입니다. 무화과 나무를 헬라어로 쉬켄이라고 합니다. 유대인 랍비들이 율법을 연구하고 율법을 가르치고 때로는 율법을 읽고 명상을 할 때 자리하던 곳이 무화과 나무 였습니다. 여러분 무엇과 비슷합니까? 불교의 석가모니가 고행 중에 보리수나무 아래서 명상을 하던 중에 세상의 삼태만상을 다 깨닫는 그것과 매우 유사한 설명을 갖고있지요. 바로 나다나엘도 그 나무 아래서 명상하던 중에 율법의 진리를 깨닫고 지혜를 깨달은 것입니다.
근데 우리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무화과나무 보리수나무 아래서 지혜와 진리를 깨달았던 나다나엘에게 무엇이라 말씀하고 계십니까? 무화과 나무 아래서 진리를 깨닫는 사람들은 야, 저 사람은 율법으로 뛰어난 사람이야 도를 깨우친 사람이라고 다 얘기하는데 예수님도 야, 이스라엘에 이만한 사람이 없구나 라고 나다나엘에게 얘기했지만, 실제로 예수님의 뜻은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50 절과 5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함께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 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
내가 너를 무화과 나무 아래서 보는 것을 가지고 내가 무화과 나무 아래서 이렇게 도를 닦는 것을 인정해주는구나 라는 것이 아니다 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지요.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고 믿느냐? 거기에 머무르면 안 돼. 이보다 더 큰 일을 너는 보게될 것이다. 내가 무화과나무 보리수나무 해서 진리를 깨닫고 율법을 묵상했다고 자랑하느냐? 참된 묵상은 어떤 나무, 어떤 신비를 얻었든지, 깨달음을 얻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 묵상 너머에 하나님의 비젼, 하나님의 계획을 보는 것, 그것이 진정한 묵상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곧 보게 되리라. 여러분 가부좌 틀고 나무 아래서 명상을 깊이 하면 그 가운데 진리와 지혜는 깨달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비전은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한 계획은 볼 수 없습니다.
바로 나다나엘에게 우리 예수님은 그 무화과 너머에 묵상 너머의 것을 예수님은 기대하고 있으신 것입니다. 묵상과 명상의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명상은 내 자신을 보는 거지만, 묵상은 내 자신을 넘어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묵상은 묵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묵상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그 묵상 너머의 크고 비밀한 일들을 우리에게 깨우쳐 주십니다.
묵상하십시오 눈을 감고 묵상해야 세상이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영으로 묵상해야 세상 사람들이 깨닫지 못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묵상해야 살 수 있습니다. 묵상하지 않으면 죽습니다. 반드시 묵상하셔야 합니다. 그런 깊은 묵상의 삶으로 한 주를 정리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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