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佛敎) 역사(歷史)의 인물전
◈ 순도
순도(順道)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한 사람으로 본래 천축(天竺) 사람이라고도 하고 진(秦)나라 사람이라고도 한다.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왕(前秦王) 부견(符堅)의 명으로 사신을 따라 불상과 경문을 가지고 고구려에 와서 귀화하였다.
이로써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의 불교 사상은 본국인 진나라의 일반 대중에게는 충분히 이해되지는 못했지만 대승경전이 유포되고 있었던 점으로 미루어 대승사상으로 짐작된다. 그의 전법 이후 22년이 경과한 제19대왕 고국양왕(故國壤王) 9년(392)에 이르러 불교는 국교(國敎)가 되었다.
◈ 담징
담징(曇徵,579-631)온 고구려 영양왕 21년<610>에 백제를 경유하여 도일(渡日)하였다. 학승이자 화가인 담징은 그가 학승이나 화가였다는 것보다 문화의 창달자임과 동시에 문화서의 전파 자였다는 데 있다. 그는 오경(五經)에 능통하고 또 채색, 지묵(紙墨), 맷돌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다.
610년 3월 법정(法定)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성덕태자의 환영을 받고, 나라에 있는 법륭사에 주석 하였다.
이곳에서 유명한 법륭사 금당벽화를 완성하여 불후의 명장으로 알려지고 있다. 일본에 채색, 지묵, 공예를 전해 준 담징은 일본불교에 불화 기법을 전한 문화 사절로서 손꼽을 만한 인물이며 그가 그린 금당벽화는 근세까지 전하여 중국의 운강석불, 경주 남산의 석굴암과 함께 동양 미술품의 3대 걸작으로 세인의 시선을 끌었으나 1948년 화재로 인하여 소실되었지만 현재의 불전(佛殿)에는 모사(模寫)된 벽화가 전해지고 있다.
◈ 보덕
보덕(普德)은 본래 고구려 고승으로 백제로 남하한 10년 뒤에 백제가 망하고 신라 땅이 되었으며, 그 문하에 훌륭한 제자들이 나와서 신라 불교 사에 적지 않은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고구려 영류왕(滎留王) 때 당(唐)에서 받아들인 도교는 보장왕(寶藏王) 때에 더욱 편파적으로 숭봉(崇奉)되었으며 불법(佛法)올 멀리하게 되었다. 그때 반룡사(盤龍寺)에 있던 보덕이 도교만을 지나치게 신봉하면 국조(國祚)가 위태롭다고 여러 번 왕에게 간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보덕은 거처하던 곳에서 방장(方丈)을 날려서 완산주 남쪽의 고대산(孤大山)으로 옮겼다. 이것이 보장왕 9년(650)의 일이며, 그 후 오래지 않아 고구려는 망하고 신라가 통일을 하였다.
보덕은 고구려에 있을 때 <열반경>을 강설하였으며, 많은 제자가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11인의 제자가 뛰어났다고 한다. 보덕의 제자로는 김취(金趣) 등과 금동사(金洞寺)를 건립한 무상(無上), 진구사(珍丘寺)를 세운 적멸(寂滅)과 의융(義融), 대승사(大乘寺)를 세운 지수(智藪>, 대원사(大原寺)를 세운 일승(一乘), 심정(心正), 대원(大原), 유마사(維摩寺)를 세운 수정(水淨) 등이 있다.
◈ 마라난타
마라난타(摩羅難陀)는 백제 침류왕(枕流王) 원년(384)에 중국의 동진(東晋)을 거쳐서 백제에 들어와 불교를 전하였다.
그는 서역제국(西域諸國> 중 한 나라의 승려로 그에 대한 상세한 전기는 중국에도 없다. 침류왕은 그를 궁내에 영접하여 예경하고 이듬해 2월에 지금의 경기도 광주 남한산에 사원을 창건하고 많은 승려를 득도시켰다. 이것이 백제불교의 시초이다.
◈ 아도
일명 아도(阿道)는 아도(我道), 아두(阿頭)라고도하며 위(齋)나라 제왕(齊王)의 정시(正始) 8년 (240~248), 위나라 굴마(屈摩)가 고구려에 사신으로 왔을 때 도영(道寧)과의 사이에서 출생하였다.
5세에 출가하였고 16세에 추(隣)나라에 가서 아버지 굴 마를 만나보고 현창(玄影) 화상 밑에서 공부하고 19세에 귀국하였다.
어머니의 간청에 따라 신라 미추왕(味鄒王) 2년(263)에 포교하기 위해 신라에 갔으나 신라 사람들이 불교를 반기지 않아 3년 동안 일선현(一善縣, 지금의 善山)의 모례(毛禮)라는 사람의 짐에서 은둔해서 살았다.
때마침 공주가 병을 앓아 명의를 구하자 그는 궁중으로 들어가 공주의 병을 고쳤다. 임금은 이를 고맙게 여겨 절을 짓고 불교를 전도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의 법을 추종한 모례의 누이도 비구니가 되어 삼천기에 영흥사(永興寺)를 지었다. 미추왕의 사후 사람들이 아도를 해치려 하자 아도는 모례의 집으로 들어가서 무덤을 파고 들어간 후 다시는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가 죽은 후 그의 법을 전해들은 남은 사람들이 불경을 강론하니 날이 갈수록 불법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고 한다.
◈ 이차돈
이차돈(異次頓, 506~527)의 속성<俗姓)은 박(朴) 씨로서 이차(揚次) 혹은 이처(伊處)라고도 하며 이것을 번역하면 염(厭)이다
촉, 돈, 독(獨), 도(道) 등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모두 쓰기의 편의에 따른 것으로 조사(助辭)이다. 그러므로 염촉․ 염도(厭都) 등이라 한다. 아버지는 알 수 없으나 할아버지는 아진종(阿珍宗)으로서 습보갈문왕(習보 葛文王)의 아들이다.
법홍왕 15년<528) 호승(胡僧) 아도가 신라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하려고 할 때에 모든 신하들이 반대하므로 왕이 난처해하고 있었다. 그때에 26세의 청년으로 내사사인(內史舍人)이었던 이 차돈 만이 불교의 봉행을 주장하였다.
이 차돈이 자진하여 왕께 아뢰기를, "청컨대 소신의 머리를 베어 중의를 정하소서. 만약 도가 행해진다면 신은 비록 죽을지라도 유감이 없습니다. 법을 위하여 형에 나아가니 만약에 부처님이 영험이 있다면 소신이 죽은 뒤에 반드시 이적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법홍왕 5년(528)8월 5일 드디어 목을 베니 피가 흰 젖빛으로 변하여 솟구치므로 모두 놀라고 감동하여 불교를 국가적으로 공인하게 되었다. 경북 경주 동천리의 백율사(栢栗寺)의 석당(石幢)은 이 차돈의 명복을 빌기 위해 세워진 것이며, 그곳에 그의 얘기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이 석당은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 원광
윈광(圓光, 555~638)은 지명(智明), 담육(曇育), 안흥(安弘), 등의 고승들과 마찬가지로 진나라에 법을 구하러 갔다가 신라 진평왕 대에 귀국하였다. 원광은 학리가 깊어지자 일반 서적들을 두루 섭렵하는 데 만족하지 않고 실천을 중요시하여 스스로 구족계를 받고 승려가 되었다. 그 뒤 원광은 삼장 육경을 섭렵하고 수행에 전력하여 강학의 대가로서 활약하였으며, 중국에서 귀국한 후에는 군신으로부터 존경을 받았고, 깨달음의 폭을 넓혔다.
원광은 본시 중국 진의 수도 금릉(金陵) 장엄사에서 승민의 제자로 <성실>과 <반야경>을 강론하였다고 전하여진다.
소주 호구사(虎丘寺)에서 <아함경>의 교의를 익혔고 수나라 개황 9년(589) 문제(文帝)의 어전에서 열린 <섭대승론> 법회에도 참석하여 <섭대숭론>을 강설하였다.
원광은 점찰보를 시설하여 『점찰선악업보경(占察善惡業報經)』을 통해서 불교에 입각한 도덕관을 세워 이것이 항상 범규(梵規)가 되게 하여 지 계와 참회가 생활에 발현되도록 하였다.
이렇게 불교의 생활화와 교화사업에 힘쓸 때 귀산(貴山)․ 추항 두 청년이 가실 사로 찾아왔다. 귀산이 예를 갖추어 "부디 한 말씀 내리시어 평생의 계명(誡命)으로 삼도록 해주십시오." 하고 여쭈니 원광이 이에 답하여 "불교에는 보살계가 있어 그 조항이 열이 있으나 너희들은 남의 신하와 자식된 몸이니 아마 감당치 못할 것이다. 여기에 세속오계가 있으니,
첫째는 충성으로써 임금을 섬기는 일이요,
둘째는 효도로써 어버이를 섬기는 일이요,
셋째는 신의로써 벗을 사귀는 일이요,
넷째는 싸움에 나아가 물러서지 않는 일이요,
다섯째는 생물을 죽일 때 가려서 죽이는 일이니 너희들은 이 일을 실행하여 소홀함이 없도록 하여라."라고 하였다.
두 청년이 앞의 네 가지 계는 이해하였으나 나머지 하나는 이해하지 못했으므로 원광은 마지막 계명 살생유택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하였다. "육재일(六齊日)과 봄․ 여름<산란기)에는 집에서 기르는 소나 말, 닭이나 개 등을 죽이지 말라, 작은 물건을 죽이지 말 것이니, 살 고기는 한 점으로 만족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이 생물을 죽일 때 가려 죽이는 일이다.
이것도 오직 쓸 만큼만 하고 많이 죽이지 말라,
이것이 세속의 선행이니라," 살생은 불가에서 원칙적으로 금하는 것이지만 그 결과가 공덕과 이익을 가져오는 것이라면 그러한 살생은 원광에게서는 죄악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것을 세속 계에서의 최고의 선이라고 못박은 것이다. 진제문에서 보면 불 살생은 자비의 원리요, 성도의 최상승인데 여기서 유퇴와 무퇴를 현실의 방편으로 삼은 것은 역사의식에 참여한 원광의 불교적 사관이요, 윤리관의 실천인 것이다.
이와 같이 가실사에서 기록된 계명은 비단 귀산, 추항 두 청년뿐 아니라 신라인 전체의 구심점이 되었다.
막연한 종교적 계관의 범주에서 탈피하여 국가에 응용되고 민족을 구할 수 있는 계관으로의 변용은 불교계관사(佛敎戒觀史)에서 보면 원광만이 할 수 있었던 위업이 아닐 수 없다.
당시의 신라인은 내외적 상황에 있어 원광의 이념을 국민적 윤리도덕 이념으로 승화시킬 수 있었고 화랑의 덕목이 되어 이웃 강대국이었던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는 신라 청소년들의 자세 확립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이것은 앞서의 점찰보의 사상과 함께 신라의 항규의 준법이 되었으며 우미를 개화시키려는 원광의 높은 이상이기도 했다. 또한 사회 정의와 윤리 생활이 불교적으로 개화되기를 강조한 일면이기도 했다.
◈ 혜 공
혜공(惠空)은 천진 공이라는 귀족의 집에서 심부름하는 할멈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아명은 우조였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묘한 일이 많았고, 자라서도 신이하여 주인 천진공이 성인이라 우대했다. 출가하여 사문이 된 후 법명을 혜공이라 했다.
사문 혜공은 언제나 조그만 절에 살면서 날마다 미치광이처럼 술에 대취하여 삼태기를 등에 지고 길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을 추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부궤 화상이라 불렀고, 그가 사는 절을 부개사(夫蓋寺)라 하였다.
그는 영묘사의 화재를 미리 예방했고, 생사를 자재로 했으며, 또 당대의 고승 신인조사 명랑(明朗)의 금강사 낙성 회에서는 당시 대덕 가운데 가장 존경받는 승려로 초청 받았다.
혜공은 빗속에 왔으나 옷이 젖지 않았으며 우물 속에서 잠을 자고 나와도 옷이 젖지 않는 등 신기한 일이 많았다.
또 말년에 항사사에 주석 했는데 그때 원효가 제경소를 저술하면서 언제나 그에게 물었다.
그만큼 혜공은 모든 면에서 당대의 고승이었다. 공중에 떠서 입적했는데 사리의 수효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 의상대사
의상대사는 우리나라 불교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사상가 중 한 분이요, 험난한 시대를 계도(啓導)했던 위대한 실천가이다. 625년(진평왕 47) 계림부(鷄林府)에서 신라의 귀족 김한신(金韓信)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자라는 과정에서 남달리 구도(求道)의 정열을 보였다. 20세가 넘자 경주 황복사(皇福寺)로 출가하여 정식 승려가 되었고, 마침 당나라에서 화엄교학(華嚴敎學)이 크게 일어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친 형님처럼 따르던 원효대사와 함께 당나라로 향했다.
그러나 고구려의 순라군에게 잡힌 두 스님은 첩자로 오인 받아 수십 일 동안 잡혀 있다가 신라로 돌아왔다. 10년 뒤인 661년(문무왕 1), 두 스님은 다시 당나라 유학 길에 올랐다가 원효대사는 한밤의 해골 물 한 모금에 도를 깨달아 발걸음을 돌렸고, 의상대사는 죽음을 무릅쓰고 홀로 중국으로 향했다. 귀국하는 당나라 사신의 배를 얻어 타고 중국 양주(揚州)에 도착하자, 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이 집으로 모셔가서 성대히 대접하였다.
그 집에는 선묘(善妙)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딸이 있었다.
그녀는 스님의 용모가 매우 뛰어남을 보고 가까이하려 했지만, 돌과 같이 굳건한 스님의 마음을 동하게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의상대사의 굳은 의지에 감화된 선묘는 도심(道心)을 일으켜 스님 앞에서 대원(大願)을 발하였다.
세세생생(世世生生) 스님께 귀명(歸命)하겠나이다.
대승을 배워 익혀 큰 깨달음을 성취하겠나이다.
제자는 반드시 시주(施主)가 되어 스님께서 필요로 하는 생활 폼을 바치겠나이다. 얼마 뒤 스님은 종남산 지상사(至相寺)로 가서 중국 화엄종의 제2조 지엄화상(智儼和尙)을 뵈었다.
지엄화상은 특별한 예로써 의상대사를 맞아들이며 지난밤의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 어젯밤 꿈에 그대가 올 징조를 보았네. 바다 동쪽(海東)에서 큰 나무 한 그루가 나서 가지와 잎이 무성해지더니, 마침내 그 나무는 중국을 덮는 것이었네,
그리고 나무 위에는 봉(鳳)의 집이 있었지. 내가 궁금히 여겨 올라가 보았더니 한 개의 마니보주(摩尼寶珠) (온갖 조화를 일으키는 투명한 보배구슬. 중생의 본성에 즐겨 비유함)가 찬란한 광명을 뿜어내고 있었네. 꿈을 깬 뒤 놀랍고 이상하여 막 청소를 끝내고 기다리는데 그대가 온 것이야.
지엄화상은 스님을 제자로 맞아들여 <화엄경>의 미묘한 뜻을 가르쳐 주었고, 의상대사는 화엄의 오묘한 이치를 속 깊이까지 파헤쳐서 자기의 것으로 만들었다. 이렇게 의상대사가 스승 지엄의 밑에서 화엄 학을 배운 지 수 년이 지난 어느 날, 형상이 매우 기이하게 생긴 신인(神人)이 꿈속에 나타나서 말하였다.
"네 자신의 깨달은 바를 저술하여 사람들에게 베풀어줌이 마땅하다. "또 꿈에 선재동자(善財童子)가 나타나서 총명약(聰明藥) 10여 제를 주었으며, 청의동자(靑衣童子)가 세 번째로 나타나 비결(秘訣)을 주었다. 이를 전해들은 지엄 화상은 명하였다.
"신인이 신령스러운 것을 줌이 나에게는 한 번이었는데 너에게는 세 번이구나. 널리 수행하여 그 통보(通報)를 곧 표현하도록 하라." 명을 따라 그 터득한 바 오묘한 경지를 순서를 따라 부지런히 써서 <십승장 十乘章>10권을 엮고, 스승에게 잘못을 지적해주기를 청하였다. "뜻은 매우 아름다우나 말은 오히려 응색 하다 "
스승의 지적을 받고 물러난 의상대사는 글이 번거롭지 않고 어디에나 걸림 없게 하였다. 지엄과 의상대사는 함께 불전(佛前)에 나아가 그것을 사르면서 서원 하였다.
"부처님의 뜻에 계합 함이 있다면 원컨대 타지 말게 하옵소서."
그 결과 타고남은 나머지에서 210자를 얻었다.
의상대사는 남은 210 글자를 모아 다시 간절한 서원 발하며 맹렬한 불길 속에 던졌으나 마침내 타지 않았다. 지엄은 눈물을 흘리면서 감동하여 칭찬하였고, 의상대사는 그 글자들을 연결하여 게(偈)가 되게 하려고 며칠 동안 문을 걸고 지냈다. 마침내 30구절로 이루어진 게송을 완성하였는데, 그 게송은 능히 화엄의 오묘한 뜻을 포팔 하고 깨달음의 아름다음을 드러낸 것이었다. 의상대사는 다시 이 게송을 54각으로 이루어진 도인(圖印)으로 만들고,'갖가지 꽃으로 꾸며진 일승(一乘)의 진리로운 세계의 모습' 이라는 뜻에서 <화엄일숭법계도 華嚴一乘法界圖 >라 이름하였다.
이를 <삼국유사>에서는 법계도서인(法界圖書印)이라 하였고, 이밖에 화엄일승법계도장(華嚴一乘法界圖章), 화엄법계도(華嚴法界圖),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 법계도장(法界圖章), 법성도(法性圖), 해인도(海印圖)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실로 <법계도>는 의상대사 자신이 스스로 깨달은 자내증(自內證)의 경지를 기술한 것이고, 그 자내증이 부처의 뜻에 완전히 계합 하는 것이기에 불후의 명저를 낳게 된 것이다.
(법계도)가 이루어진 것은 스승 지엄이 입적하기 몇 달 전인 670년 7월이었다. 이것은 이 책의 끝에 밝혀져 있고 <삼국유사>의 기록과도 일치한다. 의상대사는 <법계도>의 첫머리에 이것을 짓게 된 동기를 이렇게 밝혔다.
진리(理)에 의하고 부처님의 가르침(敎)에 근거하여 간략한 반시(槃詩)를 만들어서 이름에만 집착하는 무리들로 하여금 그 이름마저도 없는 참된 근원으로 돌아가게 하고자 함이다.
그리고 7언(言) 30구(句)로 이루어진 이 글을 인(印)의 형식을 취하여 도(圖)로 만들게 된 까닭을 이렇게 설명했다.
석가여래께서 가르치신 그물과 같은 교법(敎法)이 포괄하는 세 종류의 세간(世間)을 해인삼매(海印三昧)를 좇아 드러내고자 한 때문이다. 곧 해인삼매에 들었을 때 나타나는 삼종의 세간인 기세간(器世間, 물질의 세계)과 중생세간(衆生世間, 인간들의 세계), 그리고 지정각세간(智正覺世間, 正覺에 의한 智慧의 세계)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특히, <법계도>는 횐 종이 위에 붉은 도인의 길(줄)과 검은 글자를 써서 만들었는데, 이 세 가지 색은 삼종세간을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또한 <법계도>의 인은 사각형을 이루고 있고 중심의 법(法)자에서 시작하여 역시 같은 중심의 불(佛)자에 이르기까지 54개의 각을 이루면서 210자의 시가 한 줄로 연결되어 있다.
의상대사는 스스로 이 도의 모양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있다.
①, 어째서 인문(印文)이 외줄로 되어 있는가?
②, 시의 글에는 왜 굴곡이 많은가?
③, 어찌하여 시의 글자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가?
④, 어째서 사면사각으로 되어 있는가?
⑤, 왜 시작하는 글자와 끝 글자는 중앙에 위치하는가?
의상대사는 스스로 질문한 내용에 대해 스스로 답을 내리고 있다. 그 내용을 순서에 따라 정리해보자.
①, 인문이 다만 하나의 길로 되어 있는 것은 여래(如來)의 일음(일음)올 표시하기 위한 것이다.
②, 또 그 길이 번거롭게 굴곡을 나타내고 있는 까닭은 중생의 근기(根氣)와 욕망이 같지 않고 차별이 있기 때문이니, 삼승교(三乘敎)가 이에 해당한다.
③, 그리고 이 하나의 길에 끝이 없는 것이 여래의 훌륭한 방편(方便)에는 특정한 방법이 없고 대응하는 세계에 알맞게 융통성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는 원교(圓敎)에 해 당한다.
④, 사면사각으로 되어 있는 것은 사섭법(四攝法,布施․愛語․利行․同事)과 사무량심(四無 量心, 慈․悲․喜․捨)을 나타낸 것이다.
또, 시의 글자에는 시작과 끝이 있는데, 그것은 수행방편(修行方便)에는 원인과 결과가 따로 있기 때문이다.
⑤, 왜 첫글자와 끝글자가 중심에 와 있느냐 하면, 인과(因果)의 양위(兩位)는 법성가내(法 性家內)의 진실한 덕용(德用)으로서 그 성(性)이 중도(中道)에 있기 때문이다.
첫댓글 합장합니다 약사여래불 ,,
잘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성불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