꽂혔다
김 선 희
나는 요즘 어떤 것에 꽂혀 지내는가?
꽂다. 꽂히다. 꽂혔다.
쓰러지거나 빠지지 아니하게 세워지거나 끼우다는 뜻의 꽂다, 내던져서 거꾸로 박히게 하다는 뜻의 꽂다. 시선 따위를 한 곳에 고정하다는 뜻의 꽂다. 꽂다의 피동사인 꽂히다. 그 외에도 찔러서 깊숙이 넣는다는 이미지가 있기에 근래의 구어에서는 깊이 마음에 들었다는 의미로 ‘꽂혔다’라는 말을 쓴단다. 요사이 나도 그 시류에 편승하는지 시도 때도 없이 ‘꽂혔다’를 남발하고 있다.
할머니로 불리는 이 나이에 종합사회복지관에서 다양한 국적을 가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글을 가르치는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싶다는 생각에 꽂혔다.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끌어내어 심화시키는 것을 위주로 했던 교사생활은 한글을 체계적으로 가르치는 것에 대해 자신이 없어 한국어를 외국어로 가르칠 수 있는 자격증 취득에 꽂혔다. 나이 제한이 없다는 한국어교육학과 특수대학원에 더욱 꽂혀 덜컥 입학했다. 늦은 밤까지 컴퓨터와 씨름하면서 의사소통을 하면서 지금까지 자연스럽게 익혀 덩어리로 뭉쳐 다니는 한국어를 어휘, 문법 등 조각과 부문으로 떼어 살을 붙이는 공부에 꽂혔다. 평생 사용한 한글에 대해 너무 모르고 있었다는 자책에도 꽂혔다. 진도가 나가지 않아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라 열심히 공부해야 함에 또 꽂혔다.
'꽂히다'는 단순히 좋아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꽂힌' 대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고, 도전하면 새로운 세계가 열리고, 삶의 활력을 불어넣어 삶의 방향을 제시해 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확실히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새로운 나의 '꽂힘'은 삶에 생각지도 못한 변화를 폭풍처럼 일으키고 있었다.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항상 일찍이 나가서 기다렸는데 이제는 친구를 기다리게 하면서 늦어진 이유에 대해 변명을 생각하는 횟수가 쌓여만 가고 있었다.
나는 종이로 된 책에 꽂혀 있었다. 활자와 함께 온라인 강의를 들어야 이해가 빠르다. 그 재미로 이런저런 책을 자꾸 구입하여 빽빽하도록 책꽂이에 꽂아둔다. 교사직을 다 내려놓고 시작한 제2 인생에 필요한 것들을 익히기 위해 책꽂이에서 내려 책상 위에 펼치지만 읽어야 할 책들로 쌓여만 가고 있었다.
나는 하모니카에 꽂혀 있었다. 절대음이 없어 들은 것을 그대로 실행하지 못하는 실패감으로 눈에 보이지 않도록 숨겨두기만 하고 버리지를 못했던 하모니카를 다시 잡았다. 선생님의 도움으로 조금씩 만들어내는 선율의 아름다움에 전율을 느끼며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기에 하모니카는 내 삶의 중요한 부분이 도었다. 그런데도 악보 판에 하모니카 선율에 담을 악보들이 쌓여만 가고 있었다.
나는 대접하는 요리에 꽂혀 있었다. 지금은 흔하지만 오래전에는 귀했던 수제식 돈가스, 만두 등을 직접 만들어 대접했었다. 엄지 척을 올리며 들려주던 찬가나 “아줌마표 돈가스처럼 만들어 줘?”라는 말을 들었다며 요리 실습 모임을 갖자며 박장대소를 했던 기억은 멀어지고 눈과 귀로 익힌 요리법이 음식이 되지 못하고 쌓여만 가고 있었다.
나는 정리에 꽂혀 있었다. 정리수납전문가 자격증을 소지하며 티셔츠, 바지, 양말 등을 정갈하게 개기, 재활용을 위한 비닐봉지를 쉽고 편리하게 사용할 수있도록 정성스럽게 규격별로 접어 정리했는데 주변 정리할 것들이 쌓여만 가고 있었다.
나는 TV 드라마 보기에 꽂혔다. 손가락 하나로 채널만 클릭하면 세상의 온갖 이야기를 담아 끝도 없이 뱉어내는 TV를 넋을 놓고 보고 있으면 세상의 온갖 재미가 다 들어있다는 듯 즐겼던 드라마들이 다시 보기도 모자라 쌓여만 가고 있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니 얼마든지 게을러도 괜찮구나. 잡곡밥, 된장국, 김치, 시골에서 가져온 푸성귀, 생선 한 토막의 조악한 음식이 노후의 건강식이구나. 찻잔을 들고 건너다보니 공원 야산 수목이 마치 내 집 마당처럼 눈에 들어오니 가꾸는 수고 없이 그 안에 가득한 꽃과 나무를 즐기는구나. 한유(閑遊)의 복은 노후의 특권이구나. 일상에서 초연해지는 것이 ‘늙음’의 은총이구나. 내가 도착한 ‘노년’은 얻으려는 욕망이 걷힌 빈 마음으로 풍요의 고장, 축복의 땅이구나. 우리들 생명의 주인과 우리를 살게 해 준 여러 인연들게 진실로 감사의 마음을 드리자”라며 유선진(여, 수필가)씨의 ‘노년은 젊음보다 아름답다’를 차운하여 읊은 노후찬가의 구절들에 꽂혔다. 나도 팔순이 되면 그런 마음이 될까?
요즘의 나는 어떤 한 가지 일을 추진하고자 하면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 혀를 내둘러야 할 또 꽂혔네. 나이가 들면서 점점 외골수로 내달리는 편협성을 경계하게 만드는 ‘꽂혔다.’다. 화살촉을 쏘기 전에 과녁판을 만들어야겠다며 오늘도 잠자기 전 내일의 할 일에 대해 자세한 계획표를 세운다. 잠자리에 누었다가 벌떡 일어나 뒤늦게 생각난 만남을 기록한다. 다중으로 팽팽 돌았던 그 시절이 좋았는데...
너무 많은 것을 하고 있는가? 아니다. 해야 할 일들의 수가 필요로 하는 시간이 흐르고 있음을 꼼꼼히 계산하지 못함의 탓이리라. 완벽한 것은 없음을 순수히 인정하고 줄여 나를 사랑하자. 그런데 무엇을 줄여야 하지? 물음표가 지면에 닫기도 전에 퍼뜩, 빠르게, 순식간에, 잘할 수 있는 대책 세우기에 꽂힌다.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내려놓을 것을 찾아 꽂힘을 버려야겠다면서 아직도 그 땅에 도착하지 못해 여전히 ‘꽂히고’ 있다.
2020 《수필춘추》 등단/상록수필문학회, 달구벌수필문학회 회원
k17815sh@hanmail.net
천국의 열쇠를 읽고
김 선 희
친구와의 모임에서 “아직 천국의 열쇠를 읽지 않았다고?” 내가 긁히고 있었다. 나는 등장인물들이 엮어내는 일상의 스토리를 머리에 그림으로 저장하면서 소설 읽기를 좋아한다. 그런 나를 아는 친구니 다시는 소설 좋아한다고 말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었기에 묵묵부답할 수밖에 없었다.
A, J.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를 단숨에 읽는다. 스코틀랜드 출신인 프랜시스 치점 신부는 평생을 걸쳐 만나는 양면성을 가지는 일상에서 천국을 만들어간다. 나는 천국의 열쇠를 무엇으로 만들어가고 있는가? 읽은 책 속의 프랜시스 치점 신부의 평생을 떠올려보려고 해도 머리는 뿌연 안개만 뿜어낸다. 또렷한 것이 없다. 뭔가 찜찜하여 책장을 뒤적거린다. 내 삶의 방식이 책을 읽고 느낀 감동을 좀 더 나은 방식으로 동일시하기에 너무 멀리 와 있구나. ‘이것이 아닌데’라는 갈증은 무엇인가를 자꾸 찾아 헤매게 한다. ‘진정한 구원에 이르는 길은 무엇인가?’ 부제를 단 ‘책 읽어주는 수녀의 오디오북’이 눈앞에 보인다. 반복해서 들으며 기억력을 높여 프랜시스 치점 신부님 속으로 들어간다.
‘프랜시스 치점은 감기를 오랫동안 앓고 있는 클로틸드 수녀의 초췌한 얼굴과 추위로 입술이 파랗게 질린 베로니카 수녀 곁으로 다가가 성당 문을 닫아야겠다며 젖은 마룻바닥에서 그들을 일어나게 한다. 세 사람 모두 성당 밖으로 나가 물바다가 된 마당으로 내려선 순간 성당이 춤을 추듯 흔들리고 있었다. 저물어가는 뿌연 회색빛 아래 위용을 자랑하던 성당 건물이 빗물에 번들거리며 흔들리는 것도 잠시 이윽고 뼈 없는 거대한 괴물처럼 쓰러져 버렸다.’
‘성당 문을 닫아야겠다.’라는 말에 담은 프랜시스 치점 신부의 관심과 배려를 간섭당했다는 불쾌감으로 받아들이는 그들의 목숨을 구하는 길이 되었다. 나는 타인에게 관심과 배려를 보내고 있는가?
나는 내 앞에 놓여있는 상황에 대한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잘난 척하며 조언을 구하지도 않고 오래 생각하지도 않았다. 교만했다. 일단 선택한 것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최선을 다해 살아가며 만족했다. 뽐냈다. 내가 선택한 일에 책임을 지며 누구를 탓하지도 않았다. 감정을 나타내며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으니 친절과는 거리가 멀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다가 상처받으면 두 번 다시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나 자신만 다독였다. 나의 이익을 추구하면서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하였다. 나는 시기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부러움은 가슴 저 밑으로 내려가 우울감으로 자리 잡아 숨는 것이었다. 무례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지 않으며 가까이 가지 않으니 예의를 차릴 겨를이 없는 것이었다. 타인의 슬픔에 공감한다고 생각했다. 비 내리는 날 우산을 받쳐주며 동행하듯 어깨를 빌려주지도 못하는 것이었다. 나와 생각이 다르면 반대하는 사람으로 치부하며 상처받았다고만 생각했지 조율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고, 뽐내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하지 않고, 자기 이익을 추구하지 않고, 성을 내지 않고, 앙심을 품지 않고,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참고 기다리며, 친절하고, 진실을 두고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 내는 것인데 모든 것에 사랑의 마음이 없었구나.
내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해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프랜시스 치점 신부의 다른 사람을 향한 세심한 관심이 부럽다. 부러운 것은 따라 해야 한다. 관심을 기울이면 그 관심받은 사람이 좋아할까? 아니. 나에게 먼저 관심을 가져보자.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며, 무엇을 슬퍼하고, 무엇을 즐기는가? 내적으로 강한 사람이 감성이 풍부해진다. 프랜시스 치점 신부처럼 방심하지 않는, 온전히 깨어 있는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이며 깨어 있자. 늘 스스로 낮출 이유가 없는 곳에서 겸손하자. 자기 욕구 충족을 채우거나 상대를 지배하지 않는 봉사를 하자. 자기 스스로를 낮추어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자. 이웃의 처지를 외면하는 오만을 버리고 선행하자. 나와 이웃이 좋아하는 것에 동행하자. 싫어하는 것 하지 않을 용기를 가지고 희생하며 배려하자. 슬퍼하는 마음 옆에서 기다려 주며 따뜻한 정 한 자락 건네주자. 함께 신나게 즐길 수 있음에 감사하자. 나를 다독이면 자란 사랑은 이웃 사랑으로 퍼지겠지.
아빠 엄마와 평화롭게 살다가 9살에 위기에 몰린 어린 시절의 자신을 꼭 닮은 안드레아를 찾아가는 프란시스 치점 신부의 ‘오! 주님 평생에 단 한 번의 소원이옵니다. 당신의 뜻이 아니라 저의 뜻을 제발 이루소서.’라고 드리는 기도에 각자가 지니고 있는 사랑과 다른 모든 사람을 향한 사랑도 더욱 자라게 하시고 충만하도록 세상사를 이겨 낼 수 있는 힘을 청하라고 하시던 주임신부님의 말씀이 겹친다.
2020 《수필춘추》 등단/상록수필문학회, 달구벌수필문학회 회원
k17815sh@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