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신일 묘역(이천 향토유적 17호)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이천서씨 시조 서신일선생 묘역 뒤에서 바라 본 모습 |
[김성회의 뿌리를 찾아서]〈64〉서씨(徐, 西), 이천서씨(利川徐氏) 세계일보 2013-12-24 ◆ 서씨(徐, 西)씨는 |
▲ 서신일선생 묘역 입구 길 옆에 주차 |
▲ 서신일선생 묘역 이정표에는 100미터... |
▲ 좁은 길을 100여미터 걸어 들어가니 넓게 조성된 묘역이 보입니다. 이 곳까지 차로 들어 올걸... 더운 날씨로 잠시 후회... |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서(徐)씨는 이천서씨를 비롯하여 달성(達城·대구 포함),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당성(唐城), 평당(平當), 복흥(福興), 의령(宜寧), 남양(南陽), 황산(黃山), 염주(鹽州), 군위(軍威) 등 20본이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조선시대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153본, 일제강점기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176본으로 기록되어 있다. |
▲ 묘역 입구 전경 |
▲ 홍살문 전방에 조성된 공덕비 모습 |
▲ 서신일선생 관련 설화 내용... |
▲ 홍살문 앞에서 바라 본 서신일선생 묘역 |
◆ 이천서씨(利川徐氏)는 |
▲ 서신일선생 묘역 전경 |
그 후 서신일이 85세에 아들인 서필(徐弼)을 얻었다. 서필은 고려 광종 때 벼슬이 종1품 내의령(內議令)에 올랐다. 그리고 서필의 아들이 거란군과의 담판으로 유명한 서희(徐熙)다. 또 서희의 아들은 문하시중을 역임한 서눌(徐訥)이고, 그의 딸이 덕종 비인 원목왕후이다. 꿈에 나타난 산신령의 예언대로 대대로 재상에 오른 것이다. 이 때문에 서씨 가문에서는 사슴 고기를 먹지 않는 풍습이 있다. |
▲ 홍살문을 지나서 묘역으로 다가가며 바라 본 모습. 묘역이 상당히 넓고 깨끗하게 조성되어 있습니다. |
▲ 서신일 선생이 신라 말, 고려 초의 인물로 천년이 넘은 묘역이 제대로 남아 있을리는 없었을테고... 최근에 조성한 묘역 같습니다. |
이천서씨의 분파로는 서념(徐恬)을 파조로 하는 문한공파(文翰公派), 서선(徐選)을 파조로 하는 공도공파(恭度公派), 서윤(徐玧)을 파조로 하는 시랑공파(侍郞公派), 서보(徐輔)를 파조로 하는 전서공파(典書公派), 서광(徐珖)을 파조로 하는 예빈공파(禮賓公派), 서익(徐翼)을 파조로 하는 부령공파(副令公派), 서학종(徐鶴踵)을 파조로 하는 참봉공파(參奉公派), 서첨(徐詹)을 파조로 하는 소윤공파(少尹公派), 서릉(徐稜)을 파조로 하는 절효공파(節孝公派), 서유(徐愈)를 파조로 하는 양경공파(良景公派), 서척(徐陟)을 파조로 하는 창사공파(倉使公派), 서진(徐晉)을 파조로 하는 교리공파(校理公派) 등이 있다. |
▲ 봉분 좌측에 오래된 묘비가 있는데 당시 묘비 같지는 않고 조선시대에 후손들이 조성한 묘비 같습니다. |
▲ 봉분 우측에 조성된 신 묘비 |
▲ 1991년 묘역 확장과 정화 작업을 했다는 표석 |
◆ 이천서씨의 연혁과 인물 성종 12년, 거란이 쳐들어오자 조정에서는 서경 이북을 할양하고 강화하자고 했지만, 서희는 이에 반대하며 국서를 가지고 적진에 들어가 소손녕(蕭遜寧)과 담판을 벌였다. 그 결과 거란과 싸우지 않고 그들을 철수시켰다. 이듬해 평장사(平章事)로서 출정해 압록강 동쪽 280여 리의 땅인 강동6주를 회복했다. 태보내사령(太保內史令)을 지낸 그는 병을 얻어 개국사에서 숨을 거뒀다. |
서신일선생 묘역 위치도 |
지도 하단 빨간선 시작점에 주차. 빨간선 끝 지점에 서신일선생 묘역이 위치. 소재지 : 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 |
지도 우측 화살표 지점에 서신일선생 묘역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지도 좌측 이천시청을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