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산(伽倻山) 산행 Photo 에세이
(2007. 11. 15/백운교-서성재-칠불봉-우두봉-마당바위-토심골-해인사 /늘푸른산악회 따라 홈: http://cafe.daum.net/greenalpine2030)
*.가야산 가는 길
수도권 일산(一山)에서 가야산까지는 335km로 9백리 길이라서, 5시간이나 걸려서 11시에 성주 '백운동탐방지원센터'에서 우리들은 산행을 시작하였다.
가야산 탐방의 일반적인 코스로는 크게 해인사지구와 백운동지구로 나누는데 그 대표적인 코스로는
‘치인리 집단시설지구- 해인사- 가야산정상-칠불봉- 서성재- 백운동탐방지원센터’ 의 5시간 코스이지만 우리들은 이를 역으로 한다. 해인사 탐방보다 산행이 위주이기 때문이다.
가야산은 경남 합천군과 거창군,성주군에 위치한 산으로 울릉도(72.99km²)보다 약간 큰 면적인 77.074km²의 크기로 1972년에 9번째로 지정된 국립공원 20 개 중 산악공원(山岳公園)이다.
합천에는 합천 8경이 있다. 제1경 가야산, 2경 해인사, 3경 홍류동계곡',
4경 남산제일봉(1,010m 매화산‘의 정상)이 가야산 국립공원에 포함된다.
소백산맥이 추풍령을 거쳐 지리산으로 뻗어 내리다가 동쪽으로 갈라져서 경북의 서남단에 우뚝 솟아 오른 것이 영남의 제1봉이라는 가야산이다.
그 자연경관이 수려하여서 가야산은 예로부터 '조선8경' 중의 하나요, ' '해동 제1의 명산'이라고 일컬어져 온 산이다.
*.가야산(伽倻山)이름의 유래
가야산이 있는 합천군은 삼한시대에는 변한에 속하였다가 대가야국이 된 곳이다.
신라에 합병되었을 때는 대가야주, 고려 때는 합주라 하다가 1413년 조선 태종 13년부터 합천이란 지명을 쓰게 된 곳이다.
‘'伽倻'(가야 )의 뜻은 ‘갈래’(分派)나 ‘강’(江), ‘동족’(同族)이란 설도 있지만.가야국에 있던 산이라서 가야산(伽倻山)이라 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이와 다른 학설도 있다.
-불교의 성지(聖地)에는 네팔에 있는 룸비니(석가가 誕生한 곳)와 인도에 있는 보드가야(석가가 得道 成佛한 곳), 사르나트(鹿野苑, 석가가 처음 설법한 곳), 쿠쉬나가르(석가가 涅槃한 곳) 4대 성지가 있다.
그중 석가가 득도 성불한 곳이 보드가야(Buddha Gaya)로 이를 한자로는 '佛陀伽倻(불타가야)로 발음하여 쓰기 때문에 ‘가야’란 말은 석가모니가 설법하던 인도의 가야산(伽倻山)에서 유래 되었다는 것이다. 그 인도의 가야산은 석가모니가 '가야산정경'을 설법한 불교 유적지다.
이는 뒤에 나오는 가야산의 정상 ‘牛頭峰’에서 다시 말해야겠다.
*. 용기골(龍起谷) 산행 길
백운동지구로부터 시작된 우리들의 산행은 가야산관광호텔 근처 주차장을 들머리로 한다.
거기서 아스팔트 따라 오르니 백운탐방지원센터가 있고 입간판으로 서있는 가야산 자료 중 항상 무심코 지나치던 국립공원 안내판이 있다.
- 세계 최초 국립공원: 미국 옐로우스톤( Yellowstone National Park, 1872)
- 한국 최초 국립공원: 제1호 지리산(1967)
- 우리나라 국립공원은 총 20개
* 산악공원: 지리산, 설악산, 북한산, 가야산 등 15개
* 해상공원: 한려해상, 태안해안, 다도해해상
* 사적공원: 경주
* 반도공원: 변산반도
용기골을 넘는 멋진 다리가 깊은 가을에서 초겨울로 넘어가는 계절을 단풍으로 장식하고 있었다. 오늘로 금년의 마지막 가을을 보내는 것 같다.
그 다리에 써 붙인 탐방지수를 보니 오늘 지수는 평균 80점으로 그런대로 합격 점수다.
탐방지수란 날씨, 계절, 건강, 오늘을 지로 따져서 탐방의 적정성을 수치화한 것이다.
용기골부터의 산행은 백운1교로부터 시작하여 백운2교, 3교, 4교, 5교로 이어지는 길인데 가을이라서인가 하류는 건천(乾川, 마른 내)이다가 상류로 가면서 물이 조금씩 보인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땅속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곳도 있다. 산에는 단풍은 벌써 진 지 오래였다.
길은 내내 돌길인데 잔돌이 아니요 반석 같은 돌로, 국립공원답게 정성 들여 깔아놓은 완만한 오름길이었지만 얼마 안가서 등산복을 벗어야 할 정도로 숨이 찼다.
오늘의 나의 계획은 이 용기골이 끝나는 지점인 백운4교 근처에 있다는 육대산장과 미륵불, 용기폭포와 용기사지(龍起寺祉)를 둘러보는 것이었는데 그 이정표마저 없어서 이를 그냥 지나치고 말았다.
그 곳들은 등산로 밖 오른쪽에 있다는데 아마도 등산로가 폐쇄된 모양이다.
그 오른쪽 길로 가야 '육대산장- 용기폭포- 미륵불- 얼음골- 용기사지- 가야산성'으로 해서 통나무 백운 5교로 나올 수 있다는데-.
등산을 하다보면 공연히 시간에 쫓기어서 등산길에 있는 안내 지도나 각종자료는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 카메라로 기록을 대신하고 지나치던 나의 습관 때문인 것 같다.
그곳을 지나온 것을 백운사지에 이르러서야 때늦게 비로소 알게 되었다.
다리가 끝난 지점부터는 나무 층계의 오름길이었다.
널찍한 곳이 이정표와 함께 나를 맞는다. '백운암지'(白雲岩趾)로 옛날 용기골 아래에 있었다는 금당사(金塘寺)의 암자였던 절터였다.
거기서 조금 더 가니 비로소 낙엽 진 나뭇가지 사이로 우람한 돌산 가야산이 보이기 시작한다.
뒤돌아 멀리 보이는 산봉들이 합천 4경이라는 매화산인가. 거창의 황석산, 금원산 산줄기인가.
그 부근이 서성재라는 상아덤으로 거기에 개국 전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여 본다.
- 상아덤은 용기골에서 정상에 오르는 성터에 우뚝 솟아 삼리등(三里登)이라고 하는데 이 봉우리는 사백리를 볼 수가 있는(可望四百里) 성봉(聖峰)이다.
옛날 가야산에는 아름답고 성스러운 기품의 정견모주라는 여신이 살고 있었다.
여신은 백성들에게 살기 좋은 터전을 마련해 주겠다고 하늘에 정성을 다하여 소원을 빌었다. 이를 가상히 여긴 천신(天神) 이징하가 어느 봄날 오색 꽃구름 수레를 타고 이곳 상아덤에 내려와 둘이는 부부가 되어 옥동자 둘을 낳았다. 큰 아들 뇌질주일(惱窒朱日)의 얼굴은 천신인 아버지를 닮아 둥글었고, 둘째 뇌질청예(惱窒靑裔)는 어머니인 여신을 닮아 갸름하고 흰 편이었다.둘은 무럭무럭 자라서 형은 대가야국의 시조 이진아시 왕이 되었고, 아우는 금관가야국 시조 수로왕이되었다.
이들이 살던 상아덤은 기암괴석의 봉우리로 가야산에서 가장 아름다운 만물상 능선과 이어져 천하 절경 등산로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곳을 '서장대' 또는 '서성재'라 부르고 있으나 '상아덤'이 본래의 이름으로 백운동탐방지원센터에서 3.1km요 가야산 정상까지 1.4km 지점에 있다.
상아덤이란 말은 '상아'는 여신, '덤'은 바위(巖)를 지칭하는 말로 '여신이 사는 바위'란 뜻이 된다.
서성재부터는 기암괴석이 앞을 막는데 그 위로 쇠층계가 꾸불꾸불 계속되더니 칠불봉을 향한 마지막 가파른 층계가 보인다.
드디어 칠불봉에 올랐더니 정상 석에 쓰인 '七佛峰 1,433m 가야산 정상''으로 그 정상 석에 쓰인 높이가 지금까지 알던 내 생각과 다르다.
*. 칠불봉(七佛峰) 이야기
조금 전 백운탐방지원센터에서 사온 '가야산국립공원'(관리공단발행) 지도에는 상왕봉(1,430m), 칠불봉(1,377m)인데 여기 칠불봉 정상 표지 석은 상황보다 더 높은 1,443m라니 어떤 것이 옳단 말인가.
이럴 땐 국립공원 홈페이지가 제일인 것 같아서 인터넷을 찾아보았더니 그 질문과 대답이 있는데 대답이 말도 되지 않는다.
- 가야산 정상이 우두봉인지, 칠불봉인지 알려주세요. 2007-03-20작성자 : 가야산사무소
- 우선 가야산국립공원을 방문하여 주심에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H님이 문의하신 가야산 정상은 상왕봉(1,430m)이 맞습니다. 참고로 칠불봉 표지석이 있는 곳은 1,432m 인 것으로 국토지리정보원에 확인을 했습니다.
애매모호한 대답이었다. 1,432m는 표지석 높이까지라는 말인데 그렇다면 산 높이를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이 되는데 말이 되는 답변인가.
칠불산 정상석 밑에는 검은 오석에 음각된 칠불봉의 유래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 가야국 金首露王(김수로왕)은 인도의 아유타국 공주 許黃玉(허황옥)과 결혼하여 10명의 왕자를 두었다. 그 큰 아들 居登(거등)은 김수로왕에 이어 왕위를 계승하여 金氏(김씨)의 시조가 되었고, 둘째 셋째는 어머니의 성을 따라 許氏(허씨)의 시조가 되었다.
나머지 일곱 왕자들은 허 왕후의 오라버니 장유화상을 스승으로 모시고 칠불봉 밑에서 3년 간 수도 후 도를 깨치고 生佛(생불)이 되었는데 그 밑에 칠불암 터가 있다.
이 전설과 관계 있는 전설이 해인사 일주문 밖의 影池(영지)에도 전하여 온다.
-속세를 떠나 불문에 든 아들들의 안위가 걱정이 된 왕비 허 황후가 찾아가 자식들을 만나고자 하였으나 7왕자들은 이미 발심 출가하여 세상을 잊은 지 오래였다.
그래서 왕비는 칠불봉이 비치는 이 연목에 와서 그 그림자로 그리움을 달래었다는 못이 영지(影池)다.
*. 우두봉(牛頭峰, 일명 '象王峰') 이야기
사람을 자세히 보려면 그 사람을 가까이 해야 하지만, 그 사람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려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봐야 하는 법이다.
가야산 정상이라는 牛頭峰(우두봉)도 그랬다.
멀리서 보니 다른 봉들의 뾰죽뾰죽한 것과는 달리 그 가운데가 약간 들어간 모습이 그 이름처럼 소머리 같기도 하고 어찌 보면 코끼리 머리 같기도 하다.
칠불암에서 그 정상까지는 200m이었지만 가파른 바위 길을 지나서 그 정상 석은 정상 아래의 평평한 곳에 있었다.
정상 석에는 위 그림 같이 '伽倻山 牛頭峰 해발 1430m 陜川郡 (상왕봉)' 이라 음각되어 있다. 그러니까 정상석이 있는 곳이 소의 등이요 그 정상이 소 머리인 모양이다.
앞에서 나는 '伽倻'(가야)란 말이 부처가 성불한 보드가야(Buddha Gaya)의 인도의 가야산에서 왔다는 이야기를 소개하였다.
- Gaya(가야)란 말의 산스크리트어(Sanskrit. 옛 인도어, 梵語)의 뜻은 힌두교 교도들이 숭상하는 '소'(牛)다.
그래서 소머리 같이 생겼다고 해서 '牛頭峰'(우두봉)이라 한 것이다.
그 우두봉 아래 소의 코에 해당하는 곳에 신기하게도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 샘이 있는데 그 이름이 '牛鼻井'(우비정)이니 어찌도 이렇게 절묘하게도 불교와 이야기와 어울리는지.
물이 있는 곳에 절도 있는 법이니, 앞서 말한 칠불봉 아래에 칠불암 터가 있다는 전설도 가능한 이야기가 되게 하는 샘터였다.
'牛頭峰'(우두봉)을 '象王峰'(상황봉)이라고 하는 것도 불교와 연관하여 설명된다.
-불교사전에 ‘象頭山’이란 말이 나오는데 이는 가야산(伽倻山)을 뜻하는 말이다. 象迦葉(상가섭)에서의 '象('상)은 석가모니를 뜻하는 말이요 迦葉(가섭)은 부처님 제자의 이름이다.
이렇게 가야산이란 이름은 옛 지명으로, 산의 모습으로 또는 불교와 연관하여 어원을 따져 볼 수도 있다.
-이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가야산‘ 참조
가야산에는 이렇게 가야산이란 이름 이외에도 우두산(牛頭山),상왕산(象王山),설산(雪山),중향산(衆香山),지달산(只怛山)이란 5가지 이름이 더 있다.
중향산과 지달산이란 말은 가야산을 '영남의 금강산'이라 하여 금강산과 관계하여 생긴 이름이다
*. 가야산의 기암괴석들
한국의 산이 특히 아름다운 것은 돌산(骨山)이 많기 때문이다.
그 바위들이 억겁의 세월을 두고 추위와 눈보라, 비바람에 깎기고 연마 되어 기기괴괴한 갖가지 모양을 만들어서 더욱 그러하다.
금강산, 북한산, 월출산, 천관산, 팔영산, 달마산 등이 다 그런 바위산들이다. 그런 기암이 가야산에도 수없이 많다.
*. 마애불상 갈림길
가야산 정상에는 '우두봉'이라 크게 써 놓고 모든 이정표에서는 '상왕봉'이라 해 놓았으니 이를 구별하는 사람들이 몇이나 될까? 하나로 통일할 일이다.
상왕봉에서는 해인사까지가 4km인데 그 중간에 마애불상 갈림길이 있다. 내리막길부터 무릎이 아파오기 시작하여 스틱 둘에 의지해서 조심조심 내려오다 보니 1.4km 지점에 이정표 지도가 있다.
그냥 이정표로 가볍게 보고 카메라로 기록삼아 찍고 그냥 지나쳤더니 아뿔싸, '해인사 석조여래입상'을 못보고 지나치고 만 것이다.
안타까워하는 나를 보고 빙그레 웃는 이가 있다. 혹시나 내가 지나칠 것 같아서 우리 산악회장 카우보이님이 찍었다는 것이다. 어찌나 고맙던지-.
- 이 '해인사 석조여래입상'(보물264호)로 목 부분이 잘렸고 발과 대좌도 없어져 원형을 잃었다. 현재 크기는 210m 정도이다. 양팔을 몸에 붙이고 반듯이 선 자세로 얼굴은 둥글며 코와 입이 작게 표현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미륵불은 옛날 내가 보았던 마애석불이 아니다.
우리가 내려오는 길이 토신골이어서 못 본 것인가 아니면 상아덤에 있다는 것인가.
해인사를 찾아가서는 꼭 보아야 할 이 마애석불(보물 222호)은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라고 하는 불상으로 키기 6.5m에 둥근 후두광배가 조각되어 있는 부처다. 그러니까 내가 서성대가 어디냐고 찾던 그 부근에 있는 것을 그것도 그냥 지나쳐 온 모양이다.
옛날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갔었는데도 미룩불은 길을 막고 그 상호(相好)를 보여 주더니 오늘은 벼르며 찾아 왔는데도 세 마애미륵불상이 외면하며 이 사람을 이렇게 섭섭하게 하시는가.
불자(佛者)는 아니지만 산에 가면 반드시 절에 들려 절의 소리를 듣고, 절의 약수를 담아 집에 가지고 와서 일용할 식수로 쓰면서, 그런대로 불교를 열심히 연구하였는데-.
그뿐인가. 금년에는 네팔과 인도의 부처의 성지 찾아 참배를 갔었고, 실크로드 길에는 불교 성지인 둔황(敦煌) 등을 순례하면서 적지 않은 글도 남겼는데, 무슨 연고로 가야산의 마애석불이 이 사람을 외면하시는가.
해인사의 지형이 물 위에 떠가는 배의 형국이라서, 마애석불(보물222호)은 그 배의 선장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는 미륵이다.
무릎 보호대로 단단히 무장하였으나 내리막 길이라서인가 무릎이 아파오기 시작하여 스틱 둘에 의지해서 오느라고 지나친 것이다.
그보다 오름 길이에는 하나하나 챙기지만 내리막길에서는 항상 지나치기 쉬워서 그런 것도 같다.
*. 해인사(海印寺) 이야기
정선그림/3층탑과 석등
불교 용어로 '삼보(三寶)'가 있다.
불자라면 마땅히 공경해야 할 세 가지 보배 같이 귀중한 것으로 불(佛), 법(法), 승(僧)이 있다.
그래서 귀의 불(歸依 佛), 귀의 법(歸依 법), 귀의 승(歸依 僧)을 하는 것을 하여 삼귀의(三歸依)라 한다.
우리나라 절에도 삼보종찰(三寶宗刹)이 있다.
양산의 통도사는 부처님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셔서 불보 사찰(佛寶寺刹)이요, 합천의 해인사는 팔만대장경을 모셔서 법보사찰(法寶寺刹), 승주의 송광사는 역대로 16명의 고승의 국사(國師)를 배출한 사찰로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 한다.
해인사는 조선 초 고려 대장경판(국보32호)이 이운(移運) 봉안되면서부터 법보종찰(法寶寺刹)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가야산을 주산으로 하는 해인사는 법보종찰로 대한 불교 조계종 최대의 총림(叢琳, 종합수도장)이다.
-해인사의 '해인(海印)'이란 말은 '대방광불 화엄경' 속의 '海印三昧(해인삼매)의 준말이다.
'바다에 온갖 사물의 그림자가 비치듯이 부처님의 지혜바다에는 온갖 불법이 나타난다.'는 뜻으로 이런 화엄의 진리 사상을 실천하기 위해서 절 이름을 해인(海印)이라 한 이 절은 화엄 10찰 중의 하나이다.
신응/이정 -신라 애장왕 때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順應)과 그의 제자 이정(利貞) 스님이 있었다. 일찍이 양무제 때 중국에 가서 불법을 구할 때였다.
보지공(寶誌公)대사 문도로부터 '海東踏山記'(해동답산기)를 전하여 받고 대사의 설법을 들으며 게시를 들었다.
'너희 나라에 우두산 서쪽에 불법이 크게 일어날 곳이 있으니 환국하거든 절을 창립하라.
두 대사가 귀국하여 가야산 들어와서 지금의 퇴설당(堆雪堂) 극락보전 부근에 초암을 짓고 정진을 하던 중, 왕후의 불치의 등창 병을 법력으로 치료해 준 인연으로 국왕이 은혜에 보답하려는 뜻으로 해인사를 창건하게 되었다.이 때가 애장왕 3년(802년)이었다.
해인사는 창건 이래 회랑조사, 균여대사, 대국국사 등 수 많은 고승 대덕을 배출하였다.
-그 절 창건 당시인 신라 애장왕 때 심었다는 느티나무가 일주문에서 봉황문(천왕문) 가는 중간에 1,200년 세월을 뛰어 넘어 고사목으로 서 있는데, 1945년 수령을 다하고 지금은 고사목(枯死木)으로 서 있다.
- 신라 말 고려 태조 왕건은 후백제 견훤과 자웅을 다투다가 해인사에 들어 주지 희랑대사(希朗대사)에게 구원을 청하니 희랑이 승군을 일으켜 태조를 도와 주었다. 태조 왕건이 그 보답으로 절을 확장하도록 도와주었다.
-'海印寺古籍記'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고
*. 고운 최치원과 가야산 이야기
가야산에서 내려와서 마지막 다리를 넘어 해인사 경내로 들어가니 언덕에 심상치 않게 큰 고목이 한 그루 서 있다.
'학사대(學士臺) 전나무'(경남기념물 제215호)였다.
나무줄기가 2개로 벌어져 아래로 향하여 뻗어 있는 나무로 높이 30여 m, 둘레 5.1m 가량 되는 1,000년 고목이었다.
신라 대유학자 고운 최치원 선생이 말년에 제자들 앞에서 땅에 지팡이를 꽂으며 말했다.
'내가 살아 있다면 이 지팡이도 또한 살아 있을 것이니 학문에 열중하거라.'
유언을 남기고 지금의 홍제암 뒤 진대밭골로 가서 갓과 신발만 남기고 유유히 사라져 버렸다.
그래서 이 전나무를 고운 선생의 '지팡이 나무' 라고 한다.
'학사대(學士臺)라고 하는 것은 고운 선생이 헌강왕 때 28세의 나이로 한림학사 벼슬을 하여서 그 벼슬 이름을 따른 것이다.
나뭇가지가 아래로 쳐진 것은 고운 선생이 당시 지팡이를 거꾸로 꽂았기 때문이라니 유념하여 볼 일이다.
홍류동(紅流洞)은 이보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만년에 살다가 신선처럼 사라진 곳이라 해서 그 유명함을 더하고 있다.
-고운 최치원은 '우리나라 한문학의 비조(鼻祖)' 로 경주 최 씨(崔氏)의 시조다.
12살에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는 아들 최치원에 그의 아버지 견일 이 말하였다 한다. "10년 내에 과거에 합격하지 않으면 내 아들이 아니다." 아버지의 격려에 따라 유학 8년만인 18세 나이에 과거 빈공과에 합격하고 10여 년 동안 벼슬살이를 하였다. '討黃巢檄文'(토황소격문)을 써서 신라인으로서 문명을 떨쳤다. 황소(黃巢)가 그 글을 보고 의자에서 떨어졌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29세에 신라에 돌아와서 한림학사 등의 벼슬을 거쳤으니 고운(孤雲) 선생이 살아 있을 때는 신라가 망하고 왕건과 견훤이 세력이 다툴 때였다.
이에 고운 선생은 세사에 뜻을 잃고 38세의 젊은 나이에 가야산에 은둔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가야산에는 고운 최치원이 살다간 흔적이 많다. 그 중에 하나가 합천 3경이라는 홍류동의 '농산정(籠山亭)' 이 유명하다.
농산정은 고운 선생이 바둑을 두며 노닐었다는 정자로 정자 건너편 적벽이 제시석(題詩石)으로 거기에 '遁世詩'(둔세시)가 남아 있다.
해인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을 일주문(一柱門)에서 두 번째 문인 봉황루(사천왕문)까지 고목과 어울린 길이라 한다.
그 일주문에서 마지막 건물인 8만대장경이 있는 대장경판전(大藏經版殿국보 제52호)까지는 총 108계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 계단 한 계단 오를 때마다 108 가지의 세속의 번뇌를 떨쳐버리고 불도의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게 하라는 뜻 깊은 층계였다.
해인사에는 석가모니를 모시는 대웅전 대신에 대적광전(大寂光殿)이 있다.
석가모니 대신 화엄종의 주불인 법신불 비로자나불(毘盧자那佛)을 모셨기 때문에 대웅전이라 하지 않는 것이다.
이곳에서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7개의 불상 중 가운데 본존(本尊) 외에 삼존불(三尊佛)이다.
고려 시대 가지가 셋인 은행나무로 만들었다는 목조 보현보살, 비로자나불, 문수불로, 용기골에서 말한 금당사에 모셨다가 1897년 해인사에 모신 불상들로 지금의 주불을 모시기 이전까지 주불이었던 목조 불상이다.
그 대적광전 앞에 부처님을 상징하는 삼층석탑(경남 유형문화재 254호)과 부처님 계신 사찰에 어둠을 밝혀주는 석등(경남 유형문화재 제 255호) 한 쌍이 서있는데 대적광전보다 더 깊은 역사를 가진 것들이다.
*. '8만 대장경' 이야기
8만대장경을 참배하러 갔더니 장경판전 보수공사가 한창이라서 정문을 폐쇄하여 옆문으로 들어가야 하였다.
그 분위기가 참배객들을 거절하는 것 같아서 되돌아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해인사의 주산(主山)인 가야산 일원은 삼재(三災: 火災, 水災, 風災)가 미치지 못하는 삼재불입처(三災不入處) )로도 유명하다.
8만대장경을 모시기 위해서 조선 9대 성종 때부터 8년간에 걸쳐 만들어진 이 전각은 임진왜란, 병자호란 때도 오대산, 소백산과 함께 전화(戰禍)가 미치지 못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인사는 임란 후 200년 사이 7차에 걸쳐서 대화재를 당하여 당우 50여 동이 다 불타버렸으나, 부처의 도움에서인지 장경각만은 화를 면하여 600년 이상 이렇게 완전하게 보관되고 있었다.
외우내환(內憂外患)이 잦았던 시절, 몽고족의 침략에서 국난을 극복하기 위해서 만든 8만 대장경은 고려 23(1236년)부터 16년간에 걸쳐서 만들어 강화도 선원사(禪院寺)에서 소장하고 있었다. 그 후 이 8만대장경(국보 32호)을 영구히 보존할 곳을 찾다가 조선 태조 때에 이곳 해인사로 옮겨왔다.
그 대경판전의 특징은 다음으로 요약된다.
- 국보 중에 국보인 8만 대장경을 모신 장경판전(藏經板殿, 국보52호)은 대적광전 위에 있어서 비로자나 부처가 법보인 대장경을 머리에 이고 있는 위치에 있다.
- 본 터를 지대가 높은 곳으로 하고, 그 바닥에 소금과 숯과 횟가루와 마사토를 섞어서 방충과 습기로부터 안전하게 하였다. 건조기에도 습도를 자연 조절하게 판전의 창문도 격자창 모양으로 하였다.
-건물의 창을 앞쪽은 아래 창이 위 창보다 세 배나 크게 하였고, 뒤쪽은 그 반대 꼴로 하여 독창적인 과학적인 통풍 방법을 썼다.
8만 대장경은 부처님의 말씀을 체계적으로 집대성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 그 판수가 81,258장이고, 인간 세계의 8만4000 번뇌를 생각하여 8만 4천 법문(法文)을 수록하였기에 '8만대장경'이라 하였다.
- 대장경 판목은 남해와 거제에서 나는 후박나무를 베어 3년 동안 바닷물에 담갔다가 그늘에서 말린 나무였다.
- 16년이란 긴 세월 동안 16명이 썼으나 글자가 일정하고 한 글자도 잘못 쓰거나 누락된 것이 없다. 그 글씨를 종이에 쓰고 거꾸로 부쳐서 각자(刻字)하였다.
날이 저물어서 찾아간 장경판전(大藏經版殿)이었다.
그 입구부터나마 사진으로 그 경판을 보게 하고 화살표 따라 장경판전으로 돌아 찾아 가게 하였다.
장경판전 주위는 대장경에 관한 사진 자료로 가득하여 행복하게도 카메라에 가득 담아 가지고 내려오다 보니 구광루와 해탈문 절 마당에 탑이 하나 서 있고 미로 찾기 같은 형상을 돌로 박아 놓았다.
' 해인도(海印圖)'였다.
이 해인도를 안에서 부터 합장한 체 한 바퀴 돌아 나오면 큰 공덕을 성취할 수 있다 하는데, 신라 의상대사가 창안한 것으로 이 길은 팔만대장경의 진리를 나타내고 있다고 한다.
이름난 모든 사물은 이름값을 하는 법이다.
해인사에는 이런 국보 2점 외에도, 민속자료 3호인 광해군과 왕비의 옷 등 70여점을 보관하고 있었다.
*. 여행은 생략의 예술인가
해인사 일주문에서부터 8만대장경이 있는 대장경판전(大藏經版殿국보 제52호)까지 108 번뇌를 상징하는 108 층계를 거꾸로 밟아 일주문 밖에 서니 '원당암/ 홍제암/ 용랍선원/ 외나무다리' 를 향하는 이정표가 있다.
원당암은 통일신라시대 왕실의 원찰이요, 홍제암은 사명대사께서 열반하신 호국의 도량으로, 임란의 공으로 나라님이 내린 '홍제존자'라는 시호 때문에 생긴 이름이다.
용탑선원은 기미독립운동 33인 중에 한 분인 백용성 스님이 주석하신 암자다.
외나무다리는 숭유척불(崇儒斥佛)의 조선 시대에 무엄하게도 말을 타고 법당까지 오는 양반들을 막기 위해서 소나 말이 건널 수 없게 만든 다리라는데,
-불심이 깊은 선남선녀가 이 외나무다리를 건너면 모든 업장이 소멸 된다는 수백 년 전부터 설치되어 있다는 다리다.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묻는다 한다.
-해인사에 가 봤는냐? 해인사의 외나무다리를 건너 봤느냐?
가야산 해인사에서 다른 곳은 몰라도 홍제암은 꼭 가보고 싶은 곳이었다.
가서 임진왜란 때 터무니없이 왜놈에게 당한 그 한을 풀어준 '사명대사 탑비'(보물 제301호)와 홍제암에 모셨다는 스승인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영정을 카메라에 담고 싶어서다.
가서 만년을 해인사에서 보내다가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체 입적하였다는 임진왜란의 영웅의 향취를 맞고 싶었다.
그러나 여행을 하다 보면 항상 겪게 되는 것이 아름다운 뒷맛이다. 보고 싶은 것을 다 못보고 남겨 두고 가는 아쉬움 때문이다.
그러나 여행은 생략의 예술이니 다음에 다시 또 오고 싶다는 기약 없는 약속을 내일로 미루며 사는 것이 나그네 길의 인생인가 보다.
*. 해인사 부도(浮屠)들
부도(浮屠)란 승려들의 사리나 유골을 안치한 묘탑이지만 일반적으로 말할 때는 고승의 묘탑을 말한다. 부도는 가람의 앞이나 뒤쪽에 위치하는데 해인사 부도는 일주문 앞에 즐비해 있는 '해인사 비림'이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자운대사의 사리탑과 비 바로 위에 있는 성철대종사의 사리탑이다. 그 사리 탑 앞에서 그 설명을 읽으며 님이 남기고 가신 화두(話讀)를 뇌어 본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나도 한 마디 남기고 가야겠다.
'가야산은 가야산이요, 해인사는 해인사로다.'
-성철 스님은 해인총림의 방장과 대한 불교 조계종의 6, 7대 종정을 역임하며 올곧은 수행정진과 중생을 향한 자비의 실현 서릿발같은 사자후로 한국 불교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성철스님의 사리를 모신 이 사리탑은 통도사 적멸보궁을 기본형으로 하여 우리나라 전통 부도의 아름다움을 현대적으로 새롭게 해석한 것이다.
가운데 둥근 것은 완전한 깨달음과 참된 진리를 상징하고 살짝 등을 맞대고 있는 반구는 활짝 핀 연꽃을 표현하며, 크기가 다른 정사각형의 3단 기단은 수행과정을 의미한다.
*. 홍류동(紅流洞)이야기
홍류동은 해인사 입구인 치인리 무릉교(武陵橋)에서 해인사에 이르는 4km의 계곡을 말한다.
장자골 진대밭골 등의 계곡수가 합류한 계곡이 홍류동 계곡이다. 합천 8경 중에 3경이 바로 홍류동(紅流洞)으로 가야천을 이루는 계곡이다.
울창한 송림과 절벽 사이로 흐르는 이 계곡 수는 봄이면 진달래와 가을에는 선혈 같은 단풍으로 하여 붉게 붉게 흐른다 해서 홍류동(紅流洞)이란 이름을 얻었다.
여름에 비라도 내리게 되면 침식된 화강암 흰돌 위로 마구 쏟아져 내리는 옥 같은 물이 금강산의 옥류천(玉流川)을 닮았다고 하여 '옥류동(玉流洞)'이라는 이름을 갖는 이 홍류동은 시인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서 그들이 노닐 던 장소였다.
일찍이 조선 초 대학자 김종직도 이 가야산 홍류동에 와서 그 경치를 읊은 시가 전하여 온다.
九曲飛流激怒雷 구곡비류격로뇌
落紅無數逐波來 낙롱무수축파래
半生不識桃源路 반생불시도원로
今日應遭物色猜 금일응조물색시
-紅流洞/金宗直
아홉 굽이 물결이 우레 소리 같더니
단풍 든 낙엽은 물결 따라 오누나.
반평생
무릉도원(武陵桃源) 모르다가
비로소 아름다움 만나네.
-ilman 시조 역
홍류동은 이보다 고운 최치원이 만년에 살다가 신선처럼 사라진 곳이라 해서 그 유명함을 더하고 있다.
-고운 최치원은 '우리나라 한문학의 비조(鼻祖)' 로 경주 최 씨의 시조다.
12살에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는 아들 최치원에 그의 아버지 견일(견일0이 말하였다.
. "10년 내에 과거에 합격하지 않으면 내 아들이 아니다."
고운은 유학 8년만인 18세 나이에 그렇게 어렵다는 과거 빈공과에 합격하고 조국 신라를 빛내며 10여년 동안 벼슬살이를 중국에서 하였다.
'討黃巢檄文'(토황소격문)을 써서 문명을 떨쳤다. 그 글에 놀라 황소가 의자에서 떨어졌다는 것은 유명한 일화다.
29세에 신라에 돌아와서 한림학사 등의 벼슬을 거쳐서 한국 최초의 문집인 '계원필경'을 쓰기도 하였으나, 고운이 살아 있을 때는 신라가 망할 무렵 왕건과 견훤이 자웅을 다툴 때였다.
籠山亭
이에 고운 선생은 세사에 뜻을 잃고 38세의 젊은 나이에 가야산에 은둔하였다.
그래서 가야산에는 고운 최치원이 살다간 흔적이 많다. 그 중에 하나가 홍류동 '농산정(籠山亭)'이다.
농산정은 고운 선생이 은둔 수도하며 노닐던 정자로, 그 건너편 절벽이 제시석(題詩石)으로 '遁世詩'(둔세시)가 바위에 깊게 음각 되어 남아 있다.
狂奔疊石吼重巒 광분첩석후중만
人語亂分咫尺間 인어난분지척간
尙恐是非聲到耳 상공시비성도이
故敎流水盡籠山 고교류수진농산
-고운 최치원
바위 사이 휘돌아 산을 울리는 건
시비하는 말소리 들릴까 두려워서
고의로
물소리 흘려
온산 감싸 흐르네
-ilman 시조 역
이중환의 택리지 '명산명찰 조'에 이런 글이 전하여 온다.
-경상 일도에 암석으로 횐 산봉우리가 불꽃처럼 뾰족뾰족 솟아 잇는 화산(火山) 이 불꽃이 공중으로 솟아오르는 듯하니 지극히 높고 또 수려하다. 동구에 홍류동과 무릉교가 있으며 폭포와 너럭바위가 수십 리 뻗쳐 있는데 세상에 전해오기를 최 고운(崔孤雲)이 여기서 종적을 감추어 간 곳을 모른다고 한다.
이 농산정도 찾아가서 최 고운 선생의 얼을 우러러 보고 싶지만 당일 등산에서는 언감생심(焉敢生心)할 일이라 서둘러 900리 길을 달려가야 한다. 가야산을 거쳐서 해인사 탐승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보내서, 홍류동에 이르렀을 때는 낮장 밤단의 초겨울이라서 벌써 어둑어둑해질 무렵이었다.
그래서 홍류동의 아름다움은 계절지수가 좋은 다음 날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종일 나 혼자 가야산을 헤매며 누구보다 행복하였다.
따라 온 산이 아니라 찾아간 산이어서 그런 것 같다. 그 온 산, 온 하루를 온통 나 혼자 가져서 그런 것 같다.
그 마음을 정리하며 유감없이 보낸 즐거운 오늘 하루를 닫는다. 나의 2007년 가는 나의 가을을 이렇게서 보내게 되는가 보다.
伽倻山
山에 가면
山뿐이더라
옛날을 속삭여주는 寺刹도 있고
귓가를 두드리는 溪谷도 있고
落葉으로 달려 오가는 가을, 겨울도 있고
心臟을 고동치는 거친 숨결도 있고
샘처럼 솟아나는 땀방울도
배고파 까옥 까옥 우는 까마귀도
山 고파 헤매는 사람도 있고
眺望을 猜忌하는 烟霧도
시장한 하루도
아파오는 무뤂도 있었지만
내 눈
내 귀
내 마음에는
山뿐이더라
오늘은
伽倻山 뿐이더라.
첫댓글 가야산은 작년에 우리 카페님들과 같이 다녀 왔는데 정말 좋더군요. 입구에 늘어선 참나무 숲에 겨우살이(?).......좋은 자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