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이선주 옮김, 황금가지. 2003
(괄호 안에 숫자만 있는 것 기울어진 글씨체는 위의 책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청하판 니체 전집. 민음사 들뢰즈 책들. 기타 등등...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가장 흥미로운 인물은 화가 바질의 친구인 헨리 경이다. 그가 바로 순진했던 도리언 그레이에게 자신의 사상을 들려주고 책으로 읽히며(정체를 알 수 없는 노란 색의 책), 도리언 그레이를 거의 제2의 헨리로 만들어버리고야 마는 인물인 까닭이다.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가 자살하고, 절친한 친구이자 자신의 초상을 그려준 바질을 살해하게 되며, 마지막엔 자신의 젊음을 보장해주고 있는 그의 ‘양심’ 자체인 초상화를 칼로 찌르고 종말을 맺는 도리언 그레이의 생은, 그러므로 “끝이 정해진 책처럼” 자연스러운 귀결을 맺는 것으로 보인다. 책 뒤에 부록으로 붙어 있는 오스카 와일드가 쓴 (당시 비평문에 대한) 반박문에 나온 것처럼 지나친(차라리 무제한적인) 욕망에 대한 추구가 맞게 되는 끝의 위험또는 대가란 그런 것이다. 물론 오스카 와일드는 이 책을 어떤 도덕적 교화의 목적으로 쓰지는 않았지만 말이다.(“모든 예술은 무용하다”) 이미 잘 알려진 것처럼 오스카 와일드는 ‘예술을 위한 예술’을 주창한 사람이다.
그런데 니체- 살았던 지역이 달랐지만 거의 비슷한 시기에 살았던 둘. 니체(1844~1900), 오스카 와일드(1854~1900) -의 경우는 어떠한가. 나는 니체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니체 연구자들 중 니체가 보여주는 것은 근본적으로 미학美學(또는 삶의, 존재의 미학화?)이라는 것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을 것 같다. 이 글은 결국- 내 마음대로 미학을 이야기하는 인물로 간주하는- 이 두 인물들의 묘한 조우를 다루게 되고 말 듯 하다. 사실 문학비평이라고 말할 수는 거의 없고, 거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을 읽으면서 띄엄띄엄 읽었던 니체를 추억하는(또는 복습하는?) 글이 되고 말았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의 인용은 거의 헨리와 도리언 그레이가 말하는 부분들이며, 이것과 나란히 놓인 니체의 말들 사이에서 있는 공백들은 아마 읽는 이들과 쓰는 이가 마저 기록해야 할 몫으로 남게 될 것이다. 우선 처음으로 니체와 오스카 와일드(도리언 그레이, 헨리)라는 약간 생소한 짝을 떠올리게 된 것은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였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입니다. 과거의 일은 과거의 일일 뿐 어쩔 수 없다고요.......실제 시간의 흐름이 무슨 상관있나요? 감정에서 벗어나는 데 오랜 세월에서 필요한 사람은 천박한 사람들뿐입니다.......나는 나의 감정에 휘둘리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그 감정들을 이용하고 즐기고, 또 그것들을 지배하고 싶다고요.”(161)
“속죄는 불가능하더라도 망각은 가능했고, 그리고 그는 잊어버릴 작정이었다. 발목을 문 살무사의 대가리를 짓이기듯 그 기억을 발로 짓밟아 몰아낼 작정이었다.”(264)
“나는 한 젊은 목자가 킹킹 신음하고 헐떡거리고 경련하는 것을, 입에서부터 검고 무거운 뱀이 늘어뜨려져 있는 뒤틀린 얼굴을 보았다.......「뱀의 머리를 물어 떼내라! 물어라!」내 속에서 이렇게 절규가 터져 나왔고, 나의 공포, 나의 증오, 나의 혐오, 나의 연민, 나의 모든 선과 악이 내 속으로부터 똑같은 한 절규로써 절규했다.......그때 내가 그 비유를 통해 보았던 것은 <무엇>인가? 그리고 언젠가 오고야 말 그 <사람>은 누구인가?.......그 목자는 그러나 내 절규가 권고한대로 물어버렸다. 잘 깨물어 버렸다. 그는 뱀의 모가지를 멀리 뱉아버렸다. 그리고는 펄쩍 일어났다. 더 이상 목자가 아닌, 더 이상 인간도 아닌 - 변신된 자, 빛에 둘러싸인 자, 그가 <웃었다>.”(니체,『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최승자 역, 청하, 200~201)
오스카 와일드에서의 인용은 도리언 그레이가 그의 초상화를 그려주기도 했던 화가 친구 바질이 도리언을 질책하자 하는 말이고, 니체에서의 인용은 3부 <환영과 수수께끼>라는 절에서 가져온 것이다. 이 인용문의 앞부분은 짜라투스트라와 난장이와의 대화가 등장하는데, 여기서 말해지는 것은 바로 영원회귀의 문제이다(되돌아가는 긴 길과 나아가는 긴 길, 이 영원한 두 길을 잇는 출입구에는 순간이라는 이름이 붙어있다). 그러니까 아마 뱀의 모가지를 물어뜯어냄으로써 웃게 되는, 목자의 비유(?)는 초인(위버멘쉬)의 탄생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두 인용문에서 두드러지는 것은 뱀의 형상이다. 뤼디거 자프란스키가 쓴 책(<니체-그의 사상과 전기>, 오윤희 역, 문예출판사)에서 읽은 기억에 따르면 이 뱀의 형상을 시간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고, 또 전통적으로 뱀이 상징해왔던 바를 따라서, 영원회귀라는 무서운 진리에 대한 긍정으로서 지혜를 뜻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니체에게서도 적극적인 망각이란 중요한 주제의 하나였다. 어찌할 수 없는 과거를 자체로 긍정하는 것(가령 2부의 <구제에 대하여>라는 절에서 의 다음과 같은 구절들. “과거의 것들을 구제하고, 모든 「그러했다」를 「내가 그러길 원했다」로 개조시키는 것 - 맨 먼저 그것을 나는 구제자라고 부른다”, “의지는 되돌아가 의욕할 수가 없다. 의지는 시간과 시간의 욕망을 깨지 못한다는 것 - 그것이 의지의 가장 외로운 비애인 것이다.”), 그것은 순간에 대한 몰입과 ‘생성’과도 긴밀히 연결되는 것이다. 창조와 생성은 늘 ‘처음처럼’ 이루어지는 것이고, 이전의 어떠한 전통적 모델이나 고착화된 이미지, 도덕과도 단절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적극적이고도 창조적인 망각은 <도덕의 계보> 2부(죄, 양심의 가책 및 기타)에서의 분석(도덕이라는 것의 중핵을 이루는 요소인 자유의지와 책임이라는 전통적 관념, 그리고 이것에 자연히 뒤따르는 ‘주체’라는 허상)에서 보여준 것처럼 기억이 바로 자유의지와 책임이라는 관념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요청되는 것이다.
여기에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다음과 같은 구절을 추가해볼 수 있을 것이다.
“육체는 한 번 죄를 지을 뿐, 그 죄는 사라지지. 왜냐하면 행동은 정화의 한 형태니까. 남는 것은 쾌락의 기억, 또는 회한이라는 사치뿐이야. 유혹을 사라지게 하는 단 하나의 방법은 유혹에 지는 것.”(35)
어쩌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몇몇 부분은 니체의 중요한 생각 몇몇과 연관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다음으로 ‘힘에의 의지’의 문제를 떠올리게 하는 몇몇 구절들이 있다. 니체의 가장 충실한 후계자 중 한 사람인 질 들뢰즈의 해석에 따르자면 힘이라는 것이 ‘할 수 있는 것’ 곧 역량을 뜻한다면 힘에의 의지는 그 힘의 내적인 요인이며 동시에 그것을 의욕하는 자를 뜻한다. 도식적으로 말하자면 힘이 ‘할 수 있음’이라면 의지는 ‘하고자 함’인 것이다. 세상이 힘(또는 힘에의 의지)이라는 것 자체와 다른 것이 아니라면, 이 힘‘의’ 의지인 동시에 힘에 ‘대한’ 의지인 ‘힘에의 의지’는 언제나 그것이 작용하는 무언가를 가진다. 즉 그것은 언제나 관계맺음 속에서 움직인다. 그 관계맺음은 하나가 다른 하나를 지배하고, 지배받는 식으로 작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현실은 이미 힘의 양이다. 단지 서로서로 긴장 관계 속에 있는 힘의 양들일 따름이다. 모든 힘은 복종하거나 명령하기 위해서 다른 힘들과 관계를 맺고 있다.” (질 들뢰즈, 『니체와 철학』, 이경신 옮김, 민음사 P87) 그러므로 작용적/반작용적 힘이 있고 긍정적/부정적 힘에의 의지가 있다. 이때 힘 자체의 질을 결정하고, 그것을 해석하고 평가하는 작업, 즉 “가치의 가치”를 문제시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힘에의 의지’이다. 나는 다음 구절들에서 이러한 말들의 그림자를 느끼게 된다.
“그[도리언]에게 말하는 건 잘 만들어진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과 비슷했다. 활이 닿고 떨릴 때마다 그는 반응했다.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에는 극도로 매혹적인 무엇이 있었다. 그 어떤 일도 영향력을 행하는 일에 비하지 못하리.”(59)
“사람이 발산하는 효과, 힘이란 건 적을 만들게 되어 있습니다. 범용한 사람만이 좋은 평판을 가질 수 있지요.”(281)
“저는 잔인한 힘은 견딜 수 있지만 잔인한 이성은 견딜 수 없습니다....역설이 성립하는 방식은 진실이 성립하는 방식과 같소. ‘현실’을 시험하기 위해서는 언제든 그것을 팽팽한 밧줄 위에 올려놓고 보아야 하지. ‘진실’을 곡예사로 만든 다음에야 우리는 그것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다오.” (64)
“우리가 사물에 아름다운 이름을 붙여주는 이름을 잃었다는 것, 슬프지만 그건 사실입니다...내가 문학에서 속류 사실주의를 혐오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요. 삽은 삽이라 불러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삽을 쓰겠다는 충동을 가질 수밖에 없거든요.”(277)
아주 짤막하게, 망각의 문제와 힘에의 의지의 문제를 끄적거려 봤는데, 사실 니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책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더불어 <도덕의 계보>, <선악을 넘어서> 같은 저서였다고 한다. 말년에 쓴 <이 사람을 보라>에서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 같은 부분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다른 책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은 분량이 할애되고 있고, 뒤의 두 책들은 니체 본인이 자신을 이해하고 싶다면 꼭 읽어봐야 될 책이라고 이야기되었기 때문이다. 이제 도덕비판이자 문명비판으로까지 확장되는, 선악을 넘어선 ‘주인의 도덕’의 문제를 볼 차례이다. 선악과 얘기로 잠시 우회해보면, 가령 <너는 저 열매를 먹지 마라>는 원인들을 모르는 아담에게 있어 도덕적 금지의 표현으로 들린다. 그러나 이 말은 아담이 선악과를 섭취했을 때 낳을 자연적 귀결을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아담의 오류는 이것이다. 자연법칙의 문제, 곧 윤리의 문제를 도덕의 문제로 전환시킨 목적론적 가상의 오류, 존재와 당위의 전도라는 오류. 니체와 마찬가지로, 스피노자에게 있어서도 선과 악은 없으며 좋음과 나쁨만이 ‘윤리’라는 이름을 얻기에 마땅한 것이다. “우리가 악, 질병, 죽음의 범주 아래 넣는 것은 다음과 같은 형태들이다: 나쁜 만남, 소화 불량, 중독, 관계의 해체.”(질 들뢰즈, 『스피노자의 철학,』 박기순 옮김, 민음사 p38) “선과 악의 인식은 우리들이 그것을 의식하는 한에서 기쁨이나 슬픔의 정서일 뿐이다.”(스피노자, 『에티카』, 강영계 옮김, 4부 정리 8 p218)
“행복하다면 우리는 항상 선하네. 하지만 선하다고 해서 우리가 항상 행복한 건 아니야.”(118)
“가난한 자의 진정한 비극은, 그가 자기 욕망을 부정하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는 데 있다고 생각하네.”(119)
“인생의 진짜 비극은 대체로 대단히 비예술적인 방식으로 일어나고, 그것들은 그 조악한 폭력성, 완벽한 비일관성, 의미의 어이없는 부재, 일정한 양식의 전적인 부재로 우리를 상처 입힌다고 할 수 있네...하지만 때로 아름다움이라는 예술적 요소를 가진 비극이 우리의 삶에 일어나네.”(151) “아마도 대부분의 즐거움이, 그리고 모든 쾌락이 잔혹을 그 속성으로 갖고 있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187)
그러나 니체가 당시 유행했던 두 사회적 조류-사회주의와 민주주의-에 반대했던 것은 바로
이것을 뒷받침하는 공리, 즉 모든 사람들은 동등하며 동일한 권리를 갖는다는 공리 때문이었다. 도대체 인간은 저마다 자신의 역량을 확대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자신의 역량을 축소시키고 ‘박애’(보편적 사랑의 명령,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를 주장하는 도덕은 그야말로 ‘노예의 도덕’이지 않은가? 바로 당대 현실과 연관해서 니체의 비판이 겨냥하고 있는 것은 “유럽의 인간의 왜소화, 평균화”(니체, 『도덕의 계보,』 김태현 역, 청하, p51))로 나타나는 금욕주의적 이상과 니힐리즘인 것이다. 니체가 민주주의와 사회주의 모두를-자연과학적 객관성, 무사심無私心 등으로 표상되는 공리주의적인 동일성 하에 무리짓는다는 점에서- 하나의 거울반영으로 간주하고,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그것이 각 개인의 보다 커지려고 하는 어떤 힘에의 의지를 평준화시켜버리고 동질적인 양과 질로 통일시켜버린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각자가 자신의 관점에서 적극적인 해석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계보학적 탐사를 통해 “가치들의 가치”를 물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새롭게 관점주의에 선 개인이 취해야 할 것은 자신의 힘에의 의지를 극대화하는 일이다. 다시금 도덕이 아니라 윤리가 문제가 된다. “나는 약화시키는 것, 초췌하게 만드는 것 모두에 대해 아니오를 가르친다. 나는 강화하는 것, 힘을 저축하는 것, 힘의 감정을 긍정하는 것 모두에 대해 예를 가르친다.” (니체,『권력에의 의지』, 강수남 옮김, 청하, p57)
“당신은 내게 해리가 해 주었던 이야기 속의 인물을 연상시켜요. 박애주의자였던 이 사람은, 어떤 사회 문제를 시정하기 위해서였는지 부당한 법률을 개정하기 위해서였는지. 정확히 무슨 일이었는지는 잊었지만 자기 인생의 스무 해를 한 명분을 위해 바쳤답니다. 결국 그는 성공했지요. 하지만 일이 성공했다는 것만큼 그를 실망시키는 것도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무 할 일도 남아 있지 않았고, 그래서 그는 권태로 죽을 지경이었다지요. 그리고 그는 확고한 인간 혐오자가 되었다고 해요.”(164)
“아무 관심도 애정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늘 친절할 수 있는 법이니까.”(149)
“낙천주의의 근거는 절절한 공포감이야. 우리가 인간의 본성이 관대하다고 믿는 건, 이웃이 우리에게 도움이 될 미덕을 소유했다고 믿고 싶기 때문이야.”(113)
이와 같은 도덕 ‘이후’에 무엇이 오는가? 선악을 넘어선 그 피안 아닌 피안에는 무엇이? 니체라면 영원한 회귀라는 단 하나의 것(존재의 일의성)이 있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생성의 다수성, 관계와 연결의 다수성 자체인 한에서의 일의성이다. 즉 차이나는 것의 반복으로서의 영원회귀인 것이다. 들뢰즈의 말로 이를 대신하기로 하자. “존재는 차이를 통해 언명된다는 의미에서 차이 자체이다. 그리고 존재는 일의적이지 않은데 그 안에서 우리가 일의적인 것은 결코 아니다. 존재는 일의적이다. 그런 존재 안에서, 그 존재에 대해서 우리가, 우리의 개체성이 다의적인 것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들뢰즈, 『차이와 반복』, 김상환 옮김, 민음사, p109) “영원회귀는 힘의 의지의 변신과 가면들로 연출되는 연극적 세계를 통해 언명된다. 영원회귀가 언명되는 무대는 이 의지의 순수한 강도들이 드러나는 연극적 세계이다.”(위의 책, p113)
“인간의 자아를 단순한 무엇, 영원하고 변함없으며 단 하나의 본질을 갖고 있는 그 무엇으로 여기는 사람들의 천박한 심리학에 도리언 그레이는 경이로움을 느끼곤 했다. 그[도리언 그레이]에게 인간이란 수많은 삶과 수많은 감각, 복잡한 여러 개의 형태를 가진 존재, 그 안에 여러 기이한 생각과 열정의 유산을 지니고 있으며, 그 육체부터가 죽음이 거느리는 괴물 같은 질병의 오점과 떼어 생각할 수 없는 존재였다.”(207)
“어쩌면 인간은 어떤 배역을 연기할 때라야 가장 편하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법인지도 모른다.”(250)
“나의 성격, 나의 개성이란 게 나에겐 짐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도망쳐 어디론가 멀리 가서 나를 잊고 싶어요”(292)
그리하여 도리언 그레이 그리고 헨리의 최종 결론은 다음과 같은 말 속에서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듯 하다.
“도리언 그레이는 관능의 진정한 본성은 결코 이해된 적이 없다고, 관능은 잔혹하고 동물적인 것으로만 여겨졌다고 생각했으며, 그것은 온 세상이 관능을 굶김이라는 통제 수단으로 순하게 길들였거나 고통을 가해 죽여 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관능은 길들이거나 죽여야 할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향한 섬세한 본능이 그 지배적인 특징이 될 새로운 영성의 요소여야 했다. 역사를 통과하며 인간이 거쳐 온 길을 생각할 때마다 그는 모종의 상실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토록 많은 것이 포기되었다! 그것도 그처럼 사소한 목적을 위하여!...지금 우리 시대에 기이하게 부활하고 있는 거칠고 조악한 청교도주의로부터 인생을 구해 낼 새로운 쾌락주의가 마련되어야 했다. 무엇보다 지성이 그 쾌락주의를 위해 봉사할 것이다... 그 쾌락주의의 목표는 경험 자체가 될 것이며...이 쾌락주의는 감각을 죽이는 금욕주의도, 감각을 무디게 하는 천박한 방종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그 자체가 한순간일 뿐인 인생의 순간들에 열중할 수 있도록 가르칠 것이다.”(191)
니체와 오스카 와일드(의 작품)은 각기 당시의 시대정신에 대한 저항, 하나의 문명비판으로서의 의미를 갖고 있다. 관능과 충동과 진정한 경험의 가치, 역량의 확대에 봉사하는...그 무엇. 그래서 나는 이 윤리적 미학, 또는 미학적 윤리가 갖는 혁명적 힘에 ‘정치’라는 새로운 제3항을 덧붙인다면 이들의 관계가 과연 어떻게 될지 궁금하다. 새로운 정치학으로서 윤리학이라는 것이 뜻이 통하는 말인가? 아니면 새로운 윤리학으로서 정치학이라는 말은? (그러고보니 여기서 學이란 말은 적당하지 않은 것 같다. 차라리 화化라는 말은, 정치화 그리고 윤리화라는 식으로) 어쩌면 질문 자체가 적당하지 않아서인지도 모르겠다. 무엇이 무엇 이후에 오는가, 무엇이 무엇을 규정하고 근거짓는가? 여기저기에서 글들의 몇몇 조각들을 옮겨적고 그것들의 마주침에서 약간의 이색적인 기분을 즐기다 난 뒤에 오랫동안 돌보지 않고 있던 질문들이 생각났는데, 그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
첫댓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아 네 잘 읽으셨다니...근데 좀 민망합니다;; 물론 순전히 재미를 위해 쓴거 맞지만... 이제 저는 곧 입대인데 여기는 당분간 못 들어올 거 같네요. 아쉽습니다. 건강히들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겨우 vandam이란 닉네임에 익숙해진 듯한데...(잠시) 이별이군요?... 저도 아쉽습니다. 몸 건강히 잘 다녀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