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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데오티우이칸
멕시코(México / Méjico 메히꼬) 또는 멕시코 합중국( Estados Unidos Mexicanos)은 북아메리카에 있는 나라입니다. 수도는 멕시코시티이며 인구는 약 1억 1121만 명으로 세계 11위입니다. 스페인어를 사용하는 멕시코는 국민의 88.0%가 유럽인과 인디언 원주민 사이의 혼혈이며, 10%가 토착인이나 인디언 원주민(Nahua, Maya, Zapotecas, Mixtecas, Totonacas, Tarascos, Purepecha)입니다.
아시는 분이 택시를 고속버스터미널에 보내줘서 택시를 타고 운암정으로 가서 저녁식사를 하였습니다. 운암정의 송집사님은 산루이스포토시에서 멕시코시티로 이주하여 한국음식점을 개업한지 약 3개월되었습니다. 음식이 맛깔스럽고 내부가 깔끔하게 단장을 하였습니다. 작년에 산루이스포토시 살때 그집에 놀러간적이 있었습니다.Hambugo(암부고)+ Bialletz(비아예츠)에 있는 운암정이 있는 동네는 치안이 잘 되어있습니다. 한불락의 경찰관이 여러명 배치되어 있어 관광객이 마음놓고 다닐수 있게 되어있습니다.
이곳은 Hambugo(암부고)+ Florence(프로렌스)에 있는 젊은이들이 많이 몰려오는 거리의 호텔 Roommate입니다. 길가다 한 젊은 변호사가 추천하여 이곳에서 이틀을 지냈습니다. 지금 멕시코는 갱과 정부와 전쟁입니다. 멕시코 갱들이 미국으로 마약을 판매하는데 미국의 국경에서 워낙 심하게 차단하니까 자금줄이 막혀서 멕시코 각지역에서 납치가 수시로 이루어져 돈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어디를 다녀도 행선지를 안가르쳐 준다고 합니다.
멕시코의 10개주의 주민이 이동한다고 합니다. 멕시코 군인들도 갱단을 발견하면 그 지역의 남녀노소 할것없이 싹슬이 죽여서 어떤 마을은 쑥밭이 된 마을도 있다고 합니다. 멕시코는 관광객이 격감하여 정부에서도 군인들이 갱들을 색출하는데 혈안이 되어있고 갱단들은 거기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한국의 경찰은 그런 공권력이 약한것을 봅니다. 매맞는 한국 경찰이 불쌍합니다...ㅎㅎ
멕시코시티는 지하철이 잘 되어있습니다. 멕시코 시의 이름은 아즈텍 문명 때 붙은 이름으로 ‘멕시틀리 신의 땅’이라는 뜻입니다. 전쟁의 신 멕시틀리의 이름은 metztli(‘달’)와 xictli(‘배꼽’)에서 온 말로 ‘달의 자식’이라는 뜻이 됩니다. 스페인인들이 멕시코 지방에 왔을 때, 나우아틀어의 /ʃ/ 소리가 스페인어에서 x로 표기하는 소리와 같았기 때문에 멕시틀리를 Mexitli로 쓰는 등 그 소리를 x로 표기했습니다. 현대 나우아틀어로 멕시코를 부르는 말은 Mēxihco(/meː.ɕiʔ.ko/)입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스페인어의 발음이 바뀌어서 x는 /x/로 소리나게 되었고, /ʒ/로 소리나던 j도 /x/로 소리나게 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스페인인들은 두 소리를 모두 j로 쓰도록 철자법을 고쳤습니다. 예를 들어 돈 키호테는 현대 스페인어로 Don Quijote로 쓰는데, 원래 표기는 ‘돈 키소테’에 가까운 Don Quixote였습니다. 한편 멕시코에서는 관습상 x를 고수하고 있으며, 스페인어를 쓰는 나라에 이 옛 표기법을 권장하고 있다. 스페인 한림원에서는 두 가지 표기법을 인정하고 있으며, 많은 스페인어 사전에서 México를 표제어로, Méjico를 다른 표기로 등재하고 있습니다. 멕시코 밖의 스페인어권 나라에서 멕시코의 표기로 México를 쓰는 비율은 인구의 0.35%(코스타리카)에서 10%(스페인) 정도입니다. 멕시코의 발음 /'mexiko/는 ‘메히꼬’에 가깝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영어식 발음의 영향으로 ‘멕시코’로 표기합니다.
3월6일 아침 지하철을 타고 북부버스터미널까지 가서 그곳에서 티오테오칸에 갔습니다.
입구에 조그만 아즈텍문화를 알리는 문화관이 있습니다. 멕시코의 원주민은 빛나는 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몇몇 부족이 문명의 꽃을 피웠는데, 특히 유명한 부족은 유카탄 반도로부터 이 나라의 동남부에 거쳐서 지금부터 약 1,500년 전에 고대 도시국가를 이룩한 마야족과, 14세기에 북쪽에서 멕시코시티 부근에 남하했던 아즈텍족입니다.
그러나 마야 문명은 그후 쇠퇴하고, 아즈텍 문명도 코르테스 지휘하의 스페인인의 침입으로 1521년에 멸망했습니다. 이후 약 300년간 스페인의 식민지 시대가 계속되는 동안 스페인어와 가톨릭교가 보급되고, 인디오와 스페인인 사이에 혼혈이 진행됐으며, 스페인 기원의 봉건적 대토지 소유 제도가 생겨났습니다.
1821년 독립 당시에는 황제가 다스렸으나 1823년 황제가 퇴위한 뒤, 공화제를 채택했습니다.
독립 당시 멕시코의 영토는 현재의 멕시코 이외에 미국의 캘리포니아 주· 애리조나 주· 뉴멕시코 주· 유타 주·네바다 주·텍사스 주·콜로라도 주·캔자스 주·오클라호마 주·와이오밍 주의 일부와 과테말라· 벨리즈·엘살바도르·온두라스·니카라과·코스타리카까지 포함했습니다.
1845년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해 텍사스를 매각하고 뉴멕시코 주·캘리포니아 주 등의 땅을 미국에게 팔았습니다. 1821년에 독립하였으나 독재정권은 계속되었으며, 근대 국가다운 발전이 시작되기는 1911년에서 1920년까지 계속된 시민 혁명을 거친 이후부터입니다. 1911년 멕시코 혁명이 일어나 지주 중심의 봉건사회가 붕괴됐었습니다. 그리고 연합국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습니다.
아즈텍 전사의 벽화입니다. 멕시코는 한국전쟁 때 UN 정회원국으로서 UN의 대한(對韓)지원 결의에 따라 물자지원을 하였습니다. 주미 겸 주브라질 한국대사 정일권은 1960년 12월 20일, 한국-멕시코 양국간의 경제적 및 문화적 관계를 증진하는 문제에 관하여 마누엘 텔로 외상(外相)과 회담을 가졌습니다.
대한민국과는 1962년 수교하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1980년 수교하였습니다.
멕시코 시티의 중심가에 위치하고 있는 차풀떼? 공원에는 1968년 멕시코가 제 3세계 국가로서 최초로 올림픽을 개최함을 축하하는 의미로 한국 정부가 선물한 <한국정>_pabellon coreano가 위치하고 있습니다.
조각상입니다. 멕시코는 중앙아메리카 여러 나라 중에서 일본과 가장 관계가 깊은 나라입니다. 일본의 메이지 시대의 개국 이후로 체결된 일본-멕시코 수호통상조약은 지금까지 열강 각국의 불평등 조약에 괴로워하던 일본으로서는 최초의 평등조약입니다. 그런 관계로, 일본에 주재한 수많은 여러 외국 대사관 중에서도 국정의 중추지구라고도 일컬어지는 나가타초에 있는 것은 멕시코 대사관 밖에 없습니다. 일본 기업 다수가 멕시코에 진출하여 있는 등 경제적인 관계도 깊습니다.
멕시코의 인종 구성은 현재 백인과 원주민의 혼혈인 메스티소가 약 60%, 30%가 아메린디아인 또는 원주민, 9%가 백인입니다. 가장 큰 백인 그룹이 아일랜드인, 영국인, 프랑스인, 네덜란드인, 이탈리아인, 그리스인, 스칸디나비아인(누에바에스칸디나비아, 치와와), 독일인, 러시아인(몰로칸파), 포르투갈인 등입니다. 1%를 아프로멕시코인, 아시아인, 유대인, 중동출신이 차지하고 있습니다. 멕시코는 대부분이 아르헨티나, 브라질, 쿠바, 니카라과,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과테말라 출신의 중남미인도 거주하고 있습니다. 멕시코에는 아시아인이 20만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대부분이 중국인과 일본인으로, 대부분이 멕시칼리, 바하칼리포르니아 주에 거주합니다
3월6일 아침에 테오티와칸에 도착하였습니다.
멕시코시티 북쪽 약 50Km 지점에 있는 테오티와칸은 BC2세기부터 AD7세기까지 존재한 神政 도시국가였다.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에 해당하는 AD350-650년에 걸쳐 번영의 절정에 달한 도시문명(그때 이미 수세식 화장실을 사용한 흔적이 남아 있다)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런데 20만명 이상의 주민(당시 이만한 규모의 유럽 도시는 로마 뿐이었다)이 어느날 갑자기 20여기의 거대한 피라밋만 남겨놓고 사라져버린 것이었습니다. 이웃 부족의 침입, 내부의 반란, 식량 식수의 부족으로 인한 집단이주등 여러가지 說이 있지만 文字를 사용하지 않은 민족이었기에
그들의 흥망성쇠는 아직도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아 있습니다. 1994년도 미국의 베스트셀러인 "천상의 예언"에 의하면 이들 마야족은 집단적으로 靈의 세계(?)로 건너갔다고 합니다. 그로부터 5백년후 아즈텍 인디안이 그 폐허를 발견하고 "이곳에서는 신들이 살았음에 틀림없다"고 믿고 해와 달을 주제로 한 神話의 무대로 삼았습니다.
그것보다도 테노치티틀란의 멸망사는 더욱 처절하였습니다. 1200년경 멕시코 중앙 계곡에 도착한 아즈텍족은 호수 위의 한 섬에서 神이 계시("독수리가 선인장 위에 앉아 있는 [멕시코 국기에 들어있는 문양] 곳에 도시를 세우면 세상을 다스리는 왕국이 될 것이다")한 땅을 발견하고 1345년 그 선인장이 서있던 자리에 神殿을 세우고 도시를 건설하였습니다.
이후 아즈텍인들은 호수 위의 섬을 중심으로 간척사업을 벌이는 한편 이웃 부족을 정복하여 공물을 거두고 부강한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아즈텍 문명의 절정기에 그들의 석조건축과 정원조경은 같은 시대의 서구 문명을 훨씬 앞질러 있었습니다. 1519년 11월 스페인 코르테스 원정대가 멕시코에 상륙했을 때 아즈텍 조정에서는 항전론과 화친론이 팽팽히 맞섰습니다. 神政一致의 사회에서 절대적 권위를 가진 목테수마 황제 역시 갈피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금은보화로 매수하여 스페인 군대를 돌려보낼 심산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방법은 스페인 사람들의 '엘 도라도'(黃金의 나라) 환상을 더욱 부추길 뿐이었습니다.
결국 목테수마는 거대한 혜성을 목격한 터라 이상한 짐승(당시 멕시코에는 말이 없었다)을 타고 온 하얀 피부에 수염을 기른 코르테스를 '켓살코아틀'(아즈텍 전설에서 언젠가 고향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한 知識의 神)로 떠받들고자 했습니다. 탁월한 전략가인 목테수마는 수백 명에 불과한 코르테스 일행을 처치한다 해도 머지 않아 그 몇 배되는 군대가 쳐들어올 것으로
내다보았던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숫적으로 열세인 스페인 군대가 궁정에 들어와 황제를 인질로 삼고 목테수마가 급사한 뒤 아즈텍 조정에서는 항전론이 우세하여 1521년 7월 1일 스페인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낸 채 심야에 도성을 탈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코르테스는 무력정복을 결심하고 아즈텍에 반감을 품은 주변의 인디안 부족을 규합하여 배를 건조하고 대포를 동원하여 테노치티틀란을 포위공격하였습니다. 당시 코르테스는 '도냐 마리나'라고 하는 인디안 공주를 통역으로 데리고 다녔는데, 코르테스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이 여자 덕분에 스페인 정복자들은 정보수집 판단에 있어 아즈텍인들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었습니다. 훗날 코르테스의 아들까지 낳은 이 여인 앞에서 아즈텍인들의 어림수가 통할 수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1521년 8월 13일 아즈텍 전사들은 스페인 군대와 함께 건너온 천연두의 창궐, 식수·식량의 부족에도 불구하고 젊은 황제(콰테목) 이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용감히 싸웠습니다. 그러나 역부족인 아즈텍 군대는 마침내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테노치티틀란의 최후는 말 그대로 屍山血海를 방불케 하였다고 합니다. 그후 스페인 정복자들은 산 사람의 심장을 제물로 바쳤던 아즈텍 신전을 모조리 파괴해 버렸습니다. 쓸만한 돌은 교회의 건축자재로 남겨놓고 부스러기는 호수를 메우는 데 쏟아부었습니다.
신전 벽면을 장식하였던, 한가운데 태양이 새겨진 솔라 칼렌다 스톤도 지하에 파묻히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2백년후에야 발굴되어 지금 인류학 박물관에서 지름 3.6m나 되는 웅자를 뽐내고 있습니다. 아즈텍 전사들의 결사항전에도 불구하고 찬란했던 아즈텍 문명은 마침내 땅속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지금도 공사를 하다 옛날 유적을 발견하고 발굴작업을 벌이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대통령 집무실이 있는 소칼로(헌법) 광장 한 구석에서도 유적발굴 현장이 공개되고 있었습니다.
멕시코 북쪽으로 부터 남쪽으로 이주하던 멕시카족은 그들의 신의 도움으로 멕시코 중부의 호수 속의 한 작은섬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은 오랫동안 멕시카족들이 꿈꾸던 신의 땅 독수리가 선인장에 앉아 홰를 치고 있는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즉 유대인의 가나안 땅이었던 것입니다.
약속의 땅에 도착한 멕시카족들은 주변 부족들을 정복하고 Texacoco 호수 늪지에 그들의 신에게 봉헌할 신전을 짓고 영원히 정착할 기틀을 마련하기 시작하여 14세기 초반에'테노치티틀란' 즉 '선인장의 자리'라는 이름을 가진 아스떼까 제국의 수도를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언어는 나우아틀어를 썼으며, 칠면조, 개를 육식용으로 사육하였고, 옥수수가 주식이었으며 흡연 습관이 있었습니다. 말이 없었으며 이상하게 소, 양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동물이 없었다는 것은 아스떼까문영에게 대단한 비극이었습니다. 아마 말이나 소가 있었으면, 에스빠냐의 침략자들이 타고 온 말을 '켄타우로스(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반인반마)로 착각하여
속수무책으로 밟혀 죽지도 않았을테고, 또 마차의 필요를 느껴 바퀴를 발명할수 있지 않았을까?
여기 통역사랑 관광객이 있습니다.통역사가 아스텍문화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높은 문명을 향유하던 아스떼까, 마야, 잉카 문명이 바퀴를 발명하지 못했으며, 그들의 무기 체제가 그당시보다 거의 5,000년 이전의 무기 체제 수준을 갖고 있었던 것이 단 몇백명의 에스빠냐인들에게 두 거대한 제국이 멸망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낳은것입니다.
아스떼까인들의 종교는 다신교였고, 올메까문명의 악습을 유산으로 받아 신에 대한 제물로 인신을 바쳤습니다.개를 바칠수는 없었을테니까, 그들의 종교 교의에 의하여 신을 살리기 위한 끊임없는 제물이 요구되었으며, 주변 부족과의 전쟁의 가장 큰 이유가 포로 확보였습니다.
인구는 2,000만에서 2,500만 정도였고 수도 테노치타틀란은 총면적 12-15평방 km의 섬으로 20여만의 주민이 거주하는 거대도시였습니다.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Teotihuacán [teotiwa'kan])은 멕시코의 자랑인 거대 유적이며
신대륙 발견 이전의 미주대륙에 세워진 가장 거대한 피라미드 건축물들이 위치해있는 곳입니다. 그러면서도 누가 지었는지, 언제 지었는지 확실하게 알려진것 하나 없는 수수께끼 유적입니다.
테오티우아칸이라는 이름은 또한 멕시코 중부에서 가장 광대한 넓이를 가진 이 도시가 문명
또는 문화의 중심지로서 언급되기도 합니다. 이 고고학 유적은 피라미드 건출물 외에도 ‘죽은자의 거리’로 불리는 대규모 주거단지와 다채롭고 잘 보존된 상태의 벽화들로도 유명합니다. 테오티우아칸은 신대륙 발견 이전의 미주대륙에 위치했던 도시들중 가장 큰 도시이며 서기 원년~500년 사이에 정점을 맞았습니다. 절정기 동안의 이 도시 인구는 10만에 육박하였는데 이는 같은 시기의 전 세계 모든 도시를 통틀어 가장 많은 인구 수입니다. 이 유적지에 거주한 문명 또는 문화집단은 테오티와칸 문명[teotiwakan] 또는 테오티와카노[teotiwakano]라고 불립니다.
이 피라밋은 "달의 피라밋"입니다. 4층으로 이루어진 달의 피라밋은 해의 피라밋보다는 작지만 높은 곳에 우? 서있기에 테오티와칸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테오티우아칸이 제국의 수도였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메소아메리카 전역에 걸쳐 영향을 미쳤음을 여러 문헌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테오티와카노 문명이 존재했음을 증명하는 많은 증거들이 베라크루즈와 마야 지역의 많은 유적지에서 발견되었습니다.
테오티우아칸에 거주했던 주민들이 어느 부족이었는지에 대해서도 논쟁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현재까지의 연구결과로는 나와족, 오또미족 또는 또또낙족이 가장 유력한 후보들로 꼽히고 있습니다. 몇몇 학자들은 테오티우아칸의 거주민들이 다양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합니다. 테오티우아칸 유적은 멕시코의 멕시코주, San Juan Teotihuacan 자치도시에 위치해 있으며 멕시코시티로부터 북동쪽으로 대략 40km [25mi]지점에 위치해있습니다. 유적지의 총 면적은 83 km²에 달하며 1987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고, 멕시코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들이 다녀가는 유적에 속합니다.
서쪽광장을 설명한 표지판입니다. 테오티우아칸이라는 이름은 이 도시가 쇠퇴한 이후 나와틀어를 사용했던 아스텍 시기에 붙여졌습니다. 이 이름은 ‘신의 탄생지’로 번역되어 왔는데 이는 나와족이 테오티우아칸에서 기원했다는 신화에 반영되어있는 것입니다. 이 이름에 대한 또다른 번역은 Thelma Sullivan이 제시하고 있는데, 그는 이 이름을 ‘신의 길을 가진 자들이 사는 곳’이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이 이름은 나와틀어로 ‘테오티-와칸’으로 발음하며 강세가 ‘와’음절에 있는데, 나와틀어의 철자법상 강세가 이 음절에 표기되지는 않습니다.
이 도시의 원래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상형문자로 쓰여진 마야 문헌에서 ‘puh’또는 ‘갈대가 자라는 곳’이라는 명칭으로 등장합니다. 이 사실은 ‘톨란’이라고도 불렸던 후-고전시대의 중앙 멕시코 도시들,이를테면 툴라-이달고나 촐룰라처럼 고전시대 마야인들이 테오티우아칸을 ‘갈대가 자라는 곳’으로 여겼다는 것을 뜻합니다.
"해의 피라밋"입니다. 해의 피라미드는 높이 63m에 계단은 45도로 경사져 있으며 동서남북 4방으로 올라가게 되어있습니다. 이 돌 계단은 한 면이 225m로 하루 3천명을 동원해도 30년이 걸렸을 정도로 거대합니다. 태양신전은 오늘날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이룬 거대한 예술작품의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수학여행 온 학생들.
경사가 60도가 넘는 가파른 달의 신전 계단
숨이 턱에 닿는 고산증세도 무릅쓰고 천천히 피라미드 정상에 올라 하늘을 향해
손을 높이 들고 태양신이 주는 기를 온몸으로 받고 내려오는 관광객.
토산품을 파는 아미고(Amigo)입니다. 아미고는 남자이고 아미가는 여자입니다. 아미고는 친구라는 뜻입니다. 나보고 집의 어머니가 아프다고 팔아달라고 하면서 ...아즈텍의 진짜 옛날 골돌품이 있다고 하면서 보여주는데 보기에는 진짜인 조그마한 아즈텍 돌 인형인데...두가지측면으로 흥정을 안했습니다. 하나는 진짜인지 구별하지 않게 정교한점...두번째는 괜히 국보급 골동품을 지녔다가 신고당하면..낭패를 당하기에 흥정을 안했습니다.
60도 가파른 경사의 돌 계단입니다. 그당시 평야에 이런 돌을 구한다는것도 경이할만하지만
이런 건축물을 만든다는것도 놀라울 따름입니다.
일본 관광객들이 내려오면서 나에게 "오하이고자이마스"라고 하길래
"도꼬데 기마시다까?(어디서 왔어요)"라고 물으니 나보고 일본어를 잘한다고
하면서 토교에서 남쪽으로 떨어진 도시에서 왔다고 합니다.
근데..나는 일본어를 잘하지 않고 몇마디 일본어만 하는데..ㅋㅋㅋ
해의 피라밋에서 달의 피라밋을 찍는데 사람이 코너에서 있습니다..
이들 아스떼까제국은 그들의 신인 태양신이 죽지 않으려면 계속되는 인신공양이 필요하다고 믿었기에 아스떼까 문명의 최대 악습인 인신 공양에 희생된 포로들은 연간 거의 2만명에 달한데다 그 포로 들을 주변 부족과의 전쟁이나 약소 부족의 공물로 충당하엿기 때문에 나중에 Cortes 가 아스떼가를 공격하기 위하여 적대 인디오 부락들과 동맹을 쉽게 맺을 수 있어 아스떼까의 명을 재촉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해의 피라밑에서 내려다 본 전경입니다.
운명의 여신은 너무도 빨리 그들의 쇠망을 재촉하여 그의 아들 목테수마2세때인 1519년 스페인의 정복자 Hernan Cortes가 11척의 군함에 508명의 병사와 16필의 말, 대포 14문을 끌고 지금의 Veracruz 지방에 상륙하여 내륙원전이 시작하였습니다. 독종인 꼬르떼스가 적지에 상륙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일이 돌아갈때 타고 가야할 배 11척을 모두 태워버린것입니다. 즉 배수진을 친것입니다.
해의 피라밑에 올라오는 관광객들
그들의 출현은 보통 왕조의 말기에 나타나는 불길한 현상, 예를 들면 한밤중에 하늘에서 대낮같은 불꽃이 나타나 주위를 비춘다던가, 머리가 둘 달린 아이가 태어난다던가 하는 소문이 돌아 안그래도 불안에 떨때 였습니다. 그런데다가 하필 그 해가 그들의 조상에게 문화를 가져다준 희 피부의 케찰코아틀신이 돌아온다는 예언의 해였습니다.
중국인 관광객이 사진을 찍어주면서 얼굴이 모자 그림자때문에 안보인다고 모자를 돌리라고 하여 ...케찰코아틀신은 인신공양에 반대하다가 인신 공양을 원하는 태양신인 '테스카틀리포카'신에게 쫓겨나 동족으로 광주리를 타고 떠나면서 어느 해에 돌아온다는 말을 남겼는데
그해가 바로 Cortes가 아스떼까에 도착한 해였습니다.
해의 피라밑에서 본 주위 환경입니다. 마침 일본의 방송국에서 기획프로그램을 찍으러 이곳에서 촬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인디오들이 놀란 것은 말로 표현할수 없을 지경이었습니다. 생전 처음 보는 바다에 떠있는 섬에서 흰피부와 긴 수염을 기른 인간같이 생긴것들이 화살로 뚫을 수 없는 번쩍이는 쇠붙이 옷을 입고 불과 연기를 뿜는 천둥 무기를 가진데다, 나르는듯 빠른 괴물을 탔는데, 그 괴물이 달리면 돌이 하늘에서 우박치듯 떨어지는 소리가 나고 대지가 진동하며 흙먼지가 자욱한 것이 사람인지 신인지 구별하는데 애로가 엄청 많다 는 표현이
우리말로 하면 파발이 왕에게 장계를 올린 내용이었습니다.
피라밑 꼭대기 정점에서 한 멕시칸이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물어보니 기를 받는다고 합니다. 하늘의 기를 ...Veracruz에 도착한 Cortes는 수도로 향하는 도중 정복한 인디오들을 군사로 편입한데다, 아스떼까의 적측 인디오들과도 연합하여 연합군을 편성한 후 테노치티틀란을 향하여 진군하였습니다. 얼마후 Cortes군은 '틀락스칼라'를 점령하고 아스떼까제국 동맹의 일원인 Cholora에 도착했습니다.
기를 받은 멕시칸 Artoro Galnares 랑 같이 사진을 찍었습니다.
Cholora 부락의 귀족들은 에스빠냐군을 환영하는 척하여 도시의 안쪽으로 유인한 후 그들이 잠든 사이에 학살하자는 음모를 세워놓았습니다. 그때 Cortes의 정부가 된 인디오 처녀 Marina가 그 계획을 알아채고 Cortes에게 알려줌으로써 분노한 Cortes는 귀족들을 포함한 수천명의 주민들을 학살하였습니다.
죽음의 거리에서 정면에 달의 피라밋이 보입니다.
오늘날 멕시코인의 대다수인 Mestizo의 시조 어머니인 Dona Marina(도냐 마리나)는 Cortes가 Veracruz에 도착한 후 테노치티틀란으로 오는 도중 마야의 추장에게서 상납받은 예쁘고 총명한 여자로서 마야어와 나우아틀어를 알고 있었으며 스페인어를 배워 그때부터 Cortes의 첩으로, 또 최초의 통역겸 스파이로서 활약을 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녀는 Cortes에게는 더없는 귀중한 존재였으나 아스떼까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배반자였던 것입니다.
달의 피라밋에서 ...이 피라밋은 해의 피라밋보다 높이가 조금 적습니다. 그래서 다리에 너무 무리를 주는것 같아서 올라가지 않았습니다. ㅎㅎㅎ
테오티와칸에서 노팔선인장의 즙으로 그림을 그리며 팔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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