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 임 진천님께서 보내주신 좋은 글을 공유합니다 🍎⚘️성삼문(成三問)일편단심🌿
이 나라🤓위정자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
성삼문은 단종 복위에 앞장섰으나 발각돼 39세를 마지막으로 처형됐다.
성삼문이 거사실패로 잡혀 고문을 받을 때 세조가 묻는다. 거취를 분명히 하라고...
그러자 성삼문은 🍎성삼문(成三問)일편단심🍎
이 몸이 죽어 가서 무엇이 될꼬 하니
봉래산(蓬萊山) 제일봉(第一峰)에 낙락장송(落落長松) 되었다가
백설(白雪)이 만건곤(滿乾坤)할 제 독야청청(獨也靑靑) 하리라.
♣감상
문종이 승하하고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의 숙부인 수양대군은
정인지, 한명회 등과 결탁하여 단종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왕위에 올랐다.
그러자 성삼문, 박팽년, 이개, 유응부, 하위지, 유성원 등의 사육신이 단
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김질의 배신으로 탄로나 처형을 당하게 되었다.
이 시조는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나온 것으로, 단종에 대한 굳은
절개는 어떠한 경우에라도 꺾을 수 없다는 지은이의 굳은 의지가 엿보이
는 작품이다. 즉, 죽음에 임하는 심경을 낙락장송에 빗대어 노래한 것으
로,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태연할 수 있는 굳센 의지. 심한 형벌도 끝내
굽히지 않는 그의 굳은 절개가 엿보인다.
세조는 죽기를 각오한 성삼문의 의지를 알게 됐다.
또 세조가 성삼문을 직접 심문할 때도 끝내 왕이라 부르지 않고 나으리 라고 불렀다.
세조가 다시 묻는다.
네가 나를 나으리라고 하니 그럼 내가 준 녹봉(급여)은 왜 먹었느냐?”
그러자 성삼문은
“상왕(단종)이 계시는데 어찌 내가 나으리의 신하인가?
당신이 준 녹은 하나도 먹지 않았으니 내 집을 수색해 보라고" 했다.
세조가 명하여 집을 수색하니 즉위 첫날부터 받은 녹봉에 어느 날 받은 녹이라고 표시를 해 전부 그대로 보관돼 있었다.
이런 태도에 화가난 세조는 쇠를 불에 달궈 담금질로 성삼문의 다리를 뚫고 팔을 지졌으나
“쇠가 식었구나, 다시 달구어 오라”고 성삼문이 말한다.
국문을 마치고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가면서 성삼문은 한 수의 시를 읊는다.
성삼문(成三問)의 절명시(絶命詩)
擊鼓催人命(격고최인명) "북소리 둥둥 이 목숨 재촉하는데
回頭日欲死(회두일욕사) 돌아보니 지는 해는 서산을 넘네
黃泉無一店(황천무일점) 저승으로 가는 길엔 주막도 없다는데
今夜宿誰家(금야숙수가) 이 밤은 어느 집에서 쉬어 갈수 있을까?"
돌아보니 어린 딸이 울면서 따라온다.
이에 성삼문은
“사내아이는 다 죽어도 너만은 살겠구나” 하면서
목이 메어 말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비록 지금은 죄인이 되어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지언정
끝까지 굽히지 않은 절개와 지조는 오늘날 이합집산으로
철따라 강남가는 위정자들이 갖추어야할 제1덕목이 아닐런지...
"성삼문의 절개와 지조 이런 정치 지도자가 그립습니다".
♣작가소개
성삼문(成三問, 1418~1456) : 자(字)는 근보(謹甫), 눌옹(訥翁), 호(號)는
매죽헌(梅竹軒). 조선조 단종 때의 충신, 학자,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
집현전 학자로서 글씨와 문장에 능하였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할
작에 음운(音韻)을 연구하기 위하여 요동에 귀향와 있던 명나라의 학자 황
찬(黃燦)을 세 번이나 찾아갔었다. 「동국정운(東國正韻)」 편찬에도 참여하
여 많은 공을 세웠다. 수양대군이 집현전 학자들에게 정난공신(定難功臣)의
호를 내렸으나 성삼문만은 이를 수치로 여기고 잔치를 베풀지 않았다고
한다. 세조가 즉위하자 단종 복위를 꾀하다가 탄로되어 39세로 처형됨. 문집에 「성근보집(成謹甫集)」이 있고 시조 2수가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