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하다
“박춘선생님 글은 어떻습니까?” 돌연한 말에 일순 말문이 막혔다. “남의 글을 평하는 자들은 정작 자신의 글은 잘 쓰지 못합니다. 평론가가 좋은 작품을 남긴 예는 별로 없지요. 이 말은 제 말이 아니고 문학계에서 흔히 듣는 통설입니다.” 겨우 감상문 몇 번 쓴 처지에 마치 내가 평론을 쓰는 자 마냥 둘러댔다. 양심이 찔끔한 만큼, 꼭 그만큼 난감하다.
언제부터인가 에세이스트서울지회 화요글방을 갈 때 이런저런 생각으로 어수선하다. 가급적 단순하게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시간을 낼 수 있고 ‘가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니 간다는 것으로 다른 상념들을 제쳐둔다. 문제는 말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작품을 놓고 의견을 나눌 때 간혹 지나친 언사를 사용한다. 그래 지하철을 타고 갈 때마다 다짐한다. 오늘은 말하지 말고 듣고 함께 즐기자. 이 쉬운 것이 잘 안 된다. 어느 틈에 이러쿵저러쿵 하고 있다.
문학이라는 글쓰기를 깊이생각하게 된 것은 화요글방을 나다니면서부터일 것이다. 나처럼 문학에 대한 기대와 희망, 좌절을 느끼는 처지가 선생님들이 글방을 찾는 이유일 것이다. 글방에 나오시는 선생님들과 같은 고민을 무람없이 나누는 것이 동기를 불러 일으켰는지도 모른다. 그 틈새에서 언 듯 우리는 근본적인 무엇, 말하자면 문학이 무엇인가. 혹은 수필은 무엇인가라는 지경에 오히려 등한시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역설 같은 것이다. 멀리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까지 필요하지 않다. 칸트로부터의 미학이든, 후설의 현상학이든, 가까이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에서 파생된 문학론도 필요하지 않다. 그것들로부터는 문학이 인간감정을, 인간이 어디서 왔는가. 인간은 무엇인가. 인간은 어디로 가는가. 즉 문학이 인간을 누벼내는 한도 없는 열정이라는 것만 건네받으면 족하다.
그들의 복잡하고 현란하고 심오한 이론을 벗어나 지극히 단순하고 간결하게 예술은 창조라거나 혹은 문학이 창작이라는 말에서 출발해도 정의는 차고 넘친다. 창創은 없는 것이거나 있는 것에서 그 무엇을 새롭게 발견한다는 의미일 것이고 작作은 지어낸다는 의미다. 결국 창작은 사물과 인간감정의 본래적인 것을 발견하고 찾아간다는 것이다. 그것들을 향한 작가의 시선이다. 깊고 넓고 예민하게 자기만의 생각을 찾아가는 일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어디서 시작되고 깊이를 갖추는 것일까. 우리의 인식은 어디서 오는가. 아마 아는 것, 곧 지식에서일 것이다. 지식은 독서로부터 올 것이다. 문예비평문에서 흔히 접하는 ‘글의 깊이는 독서의 깊이와 같다.’는 말은 그래서일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예컨대 ‘평론을 하는 작가는 좋은 소설이나 시를 못 쓴다.’라는 궁색한 변명으로부터 ‘왜 못쓴다고 하는 것인가’라고 다시 추궁하는 일이다. 기질적으로 예민한 비평가의 소질을 가졌을 수도 있다. 타고난 선천적 성질을 빌린 생각이다. 평문은 논리를 요구하고 분석과 해석을 요구한다. 논리와 설명하는 글이 주가 된다. 이것을 거꾸로 뒤집으면 산문은 논리와 설명의 글이 부적절하다는 이야기와 같다. 산문은 논리와 서술보다 서사와 묘사가 중요한 골격이라는 말이다. 분석과 해석을 쓰게 되는 평론가가 시와 소설에 성가를 이루지 못하는 이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텍스트를 앞에 두고 글을 쓰는 것과 텍스트 없는 공간을 누비는 글쓰기의 차이 같은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이런저런 것들을 끄집어내고 얼기설기 엮어 조금이라도 자신을 납득시키려는 짓이다.
세간에 예술론이나 창작론은 차고 넘친다. 수필작법 역시 그러하다. 소설작법이나 수필작법 같은 안내서 혹은 개론서 공부로 좀 더 나은 글을 쓸 수 있기도 할 것이다. 필요한 현상임에는 분명하다. 그렇다 해도 한편으로는 과연 수필에 대한 충실한 개론서를 읽고 글이 좋아질 수 있는가는 회의적이다. 무엇을 배우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배우는가의 차이 같은 의문이다. 내 집 거실에 선친이 써놓으신 글이 걸려있다. 학여불급學如不及이요. 학여역수學如逆水라는 글귀다. 학문은 미치지 않는 곳이 없고 학문은 물을 거슬러 오르듯 힘들여야하고 정성을 다해야한다는 의미다. 학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광오한 깃발은 반박하고 싶지만 뾰쪽한 반대논리가 없다. 학문이 물을 거슬러 오르듯 힘들여야 하고 천천히 열중해야 한다는 말에는 전폭적으로 수긍한다. 하물며 인식의 확장과 창작세계는 다른 설명이 필요 없어 보인다.
아마도 문학은 자신에게 전해져온 전통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시대를 드러낸다. 자신의 시대 저변을 흐르고 있는 시간과 공간에 냄새와 색깔을 입히는 일이다. 시대인들 무의식 속에 스며들어 있는 징후적인 느낌을 형상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들이 희구하는 아름다운 것, 또 그것의 결핍에서 오는 좌절을 말한다. 만일 수필이 문학이라는 테두리가 아니라거나 다른 심오한 무엇이라면 나는 문학을 모르거나 수필을 모르고 있는 것일 게다.
오늘날의 문학은 서구인들에게서 왔다. 그들에게 문학은 창조주인 신과 인간이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고 어떤 형식으로 표현하는가의 궁리였다. 문예사조란 바로 그 변천을 하나의 카테고리로 엮은 것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고전주의의 계몽적이고 교훈적분위기에 반발하여 낭만주의가 깃발을 치켜세웠다. 낭만주의 성격의 불안이 사실주의를 키워냈다. 텍스트를 분해하고 다시 짜 맞추는 구조주의든, 분해하지 않고 쪼개어 그 하나하나를 상호관계 속에서 기능적 역할로 보여주는 형식주의이든, 이처럼 문예사조는 표현양식에 대한 변화를 시사한다. 이 말의 골계는 곧 문학은 표현수단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문학적 표현이라는 모호한 언어가 곧 문학이 요구하는 한 부분일 수도 있다. 문학은 정보나 보고서처럼 논리와 직접적인 실체를 전달하려하지 않는다. 할 수 있는 한 이야기줄거리를 상황을 드러내는 재현묘사로 대신 시킨다. 논리는 엄중한 전개와 결론이 요구되지만 재현묘사는 다만 해결되지 않는 갈등을 보여주는 것으로 족하다. 말하자면 이야기의 결과를 지연시키고 독자로 하여금 자신의 기질과 인식위에서 감정이 움직이도록 하는 것이다. 수필이라는 특별한 위치가 자연발생적으로 서술적 설명을 피할 수 없게 하지만 그래도 그 설명을 대신할 상황묘사가 가능하다면 가능한 지경까지 노력해야할 이유일 것이다. 문학의 글쓰기는 작가가 글을 쓰면서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아가는 기능도 한다. 장르의 특성상 수필은 여타의 장르보다 훨씬 두드러질 것이다. 성찰이라는 언어의 무게 탓이다.
일부 수필작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수필작가는 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이다. 소년소녀시절 문학작품을 읽고 영혼을 흔드는 아름다움과 애잔함을 잊지 못하고 꿈으로 간직해온 사람들이기 십상이다. 뒤늦게 글의 세계에 뛰어든 경우가 많아 보인다. 나 역시 같은 처지다. 그래 그 갈등과 허기를 공감한다. 주제넘게 문학을 말하는 까닭이다. 주제넘지만 하나는 말하고 싶다. 무엇을 배우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배우느냐의 차이다. 우리가 가진 지식체계는 이것 아니면 저것에 익숙하다. 일찍부터 사지선다형과 오 엑스의 시험으로 선별하는 구조에 단련되어왔다. 어느 틈에 생각마저도 무의식 중에 단답형에 머물고 만다. 그 틀을 벗는 것이 글의 깊이를, 글의 향기를, 작가가 자신을, 그리고 우리의 삶을 충만 시킬 수 있는 첫 번째 걸음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느끼고, 아는 만큼 고민하고, 아는 만큼 행복해진다.
세계를 움켜쥐고 주물럭거리고 있는 서구인들의 그 복잡 현란 심오한 생각이라는 그릇이 어떻게 생겨났을까를 궁리해본 적이 있다. 그들이 가진 정신의 뿌리를 더듬는 것이 그들의 장광설에 쉽게 접근하는 방법일 것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것을 해결하는 길은 유일하게 독서였다. 더불어 역설적으로 우리를 이해하는 가장 빠른 길이기도 했다.
그렇거나 말거나, 누가 판검사가 되고 누가 재상이 되어 선망의 대상이 되고 또 그들이 어느 날 추문에 떨어져 세상 우세스런 꼴이 되건 말건 동해 죽변항의 오징어잡이 배는 만선의 희망을 싣고 신새벽 바다로 나가고, 남해 통영바다 굴 양식장 굴은 자라고, 서해 조깃배는 물때를 맞춰 배를 띄운다. 저 먼 전라도 신안 갯벌 세발낙지잡이 노인은 여직갯벌을 훑고, 회천땅 농부는 늙은 몸으로 아직 쪽파를 심는다. 충청도 괴산농부는 오달진 꿈으로 사과나무를 심고, 안성 땅 농부는 참외 씨를 묻는다. 순천 선암사 은목서는 초가을 햇살에 하얀 꽃을 피워 산녘과 절간을 영원처럼 향기로 뒤덮고, 선운사 동백은 목숨이듯 꽃을 던진다. 문학은 이것들을 자신의 아픔으로 엮어내는 일인지도 모른다. 신이 없어도 인간은 존재되었을 가능성(진화론)이 있지만 인간이 없으면 신은 존재되지 못한다. 물론 이 말은 창조론 시원을 무시한 단순한 성격의 희작에 가까운 말이지만 신의 존재를 증거 하는 성경을 인간의 손으로 수백 년에 걸쳐 기록했다는 의미에서 생각해볼 수 있는 공간이다. 이것의 의미는 신과 더불어 인간의 인간을 모색하는. 곧 문학은 인간을 환기시키는 생각이라는 것. 그럴 것이라는 의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