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10일 대전시립미술관에서 발표한 논문입니다.
상나라 글씨의 창조적 요소
-서예의 원형을 찾아서-
원광대 김 수 천
1. 들어가는 말
2. 선사인들의 조형의식
3. 상나라 문자의 특징
4. 상 명문의 창조적 요소
5. 맺는말
1. 들어가는 말
상나라의 글씨에 대해서는 그의 예술적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직 발전의 과정에 있는 미숙한 단계로 평가하기도 한다.
예술의 평가라고 하는 것은 주관이 반영되므로 보는 사람에 따라 서로의 견해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예술의 평가가 다소 주관적인 성향이 있다 하더라도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객관적인 결론이 도출되는 예도 많다.
여기에서 다루어질 상나라 글씨가 그의 적당한 예가 될 것이다.
왜 많은 사람들이 상나라의 글씨를 서예의 범주로 인정하기를 주저하는가.
이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1. 고대인들의 능력과 심미안에 대한 불신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현대인들은 시간적으로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을
미개와 야만의 단계로 보는데 익숙하다.
이것은 진화론적 세계관에 입각한 것으로 상나라 글씨에 대한 평가절하도
이와같은 그릇된 지식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
2. 전서의 부정형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상나라의 글씨는 문자통일이 이루어지지 않던 시기에 쓰여진 것으로 글자의 형태가 제각각이다.
게다가 글자의 굵기, 크기, 방향이 불규칙하여 후대의 정형화된 전서와 성격을 달리하고 있다.
이것은 상명문을 미숙하거나 과도기적인 단계로 보는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1에 대해서는 선사미술과 상나라 문자의 구조 분석을 통해 고대인들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2에 대해서는 상나라 때 제작된 청동기 명문에 대한 의미부여를 통해
당시에 성행한 부정형이 미숙하거나 과도기적인 서체로 평가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이와같은 고찰을 통해 우리는 지금까지 교육받아온 진화론과 발전이라는 통념을
예술사에 적용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서예의 정신적 원형이 보관되어 있는 거대한 창고가 문자와 서예의 출발점인
상나라임을 증명하는 것이 본 논고에서 설명하고자 하는 가장 큰 목표라는 점을 밝힌다.
2. 선사인들의 조형의식
앞에서 상나라 글씨에 대한 그릇된 평가가 진화론적 사관(史觀)의 해독 때문임을 지적했다.
만일 이러한 생각을 염두에 두고 상나라 글씨를 폄하하는 사람이 있다면
일단 글씨에 대한 생각을 접어주고, 문자가 발생되기 이전에 제작된 선사인들의 미술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도1) 쇼베동굴벽화, 3만년전 (도2) 라스코동굴벽화, 1만 6천년전
인간에 의해 제작된 최고의 미술품으로 알려진 4 만 년 전의 반다르 동굴벽화,
구석기 시대에 제작된 쇼베<도1>, 라스코<도2> 알타미라 동굴벽화,
그리고 전 세계적으로 산재해 있는 선사시대의 미술품들은
고대인들과 고대문명에 대한 불신을 금방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에서 제작된 신석기 시대의 옥기 ․ 채도 ․ 암각화는
신석기시대 중국인들의 사유능력과 심미의식이 얼마나 탁월했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문자가 발생되기 훨씬 이전 중국의 신석기시대 때 제작된 옥기를 보면
마치 현대 공예를 연상할 정도로 세련미가 있다. <도3>
(도3) 중국 신석기 시대의 옥기
이와 같은 아름다움은 중국의 신석기 채도에서도 발견된다.
채도는 함축되고 단순화된 표현을 하고 있으며, 고도의 정신성과 세련미를 느끼게 한다.
<도4> 아울러 몽고를 중심을 산재되어 있는 암각화는
대상의 이미지를 강조하면서 강인한 생명력을 전달하고 있다.
(도4) 중국 신석기 시대의 채도
이들은 이미 표현하려고 하는 대상의 요점을 핵심적으로 갈파하고 있으며,
고도(高度)의 묘사력(描寫力)을 갖추고 있다. 대비,과장,축소,확대의
데포르마숑의 구조는 선사미술 전반에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표현기법은 그들의 미술이 좀 더 예술적이고 원시적 생명력으로 다가오는 이유가 된다고 본다.
선사미술은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미개와 원시와 야만의 수준이 아니라,
후대인들이 본받아야 할 “예술의 원형”들이 모여져 있는 곳이었다.
이와 같은 생각이 본인의 주관적인 생각이 아니라는 것은 20세기 미술을 주도했던
현대미술의 거장들이 선사미술에 바탕을 둔 화가들이 많았다는 사실에서도 확연히 증명되는 바이다.
3. 상나라 문자의 특징
상나라의 서예의 수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상나라 문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상나라의 서예는 다른 나라의 문자와는 달리
문자 자체에 이미 풍부한 예술적 요소를 갖추고 출발하기 때문이다.
상나라의 서사형태는 갑골문과 청동기 명문으로 전해지고 있다.
갑골문과 명문은 모두 인간과의 소통보다는 하늘과의 소통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천의(天意)를 적은 갑골문도 제사를 지내는 목적으로 쓴 청동기 명문도
모두 하늘과의 소통을 하기 위한 종교적인 성격을 띤 것이었다.
갑골문은 정인(貞人)에 의해서 쓰여 졌다.
정인은 하늘과 소통하는 무(巫)를 말하며, 왕이 정인을 겸할 정도로 지위가 높았다.
정인은 우선적으로 접신(接神)을 위해 몸과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 재계(齋戒)의 절차를 거치게 된다.
그리고 하늘을 경배하는 마음으로 겸허한 예의를 갖추어 글씨를 썼을 것이다.
이와 같이 글씨를 대할 때의 성(聖)스러운 마음가짐은 시대가 흐르면서 다소 희석 되었을지라도
3천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기까지 동아시아 서예의 정신적 맥락으로 이어져오고 있다.
상나라 문자는 한자의 조자원리인 육서(六書 : 象形, 指事, 會意, 形聲, 轉注, 假借)를 이미 구비하고 있었다.
이 조자원리에 입각하여 상나라의 글씨를 보면,
당시의 사람들이 얼마나 뛰어난 통찰력과 지혜를 가진 사람들인가를 발견하게 한다.
1) 상형(象形)
상형은 대상을 간략하게 축약한 것이다.
* 사슴은 긴 뿔과 잘 뛰는 형상을 표현하고 있다.
* 말은 긴 얼굴과 목의 갈기 아래로 늘어뜨린 꼬리로 특징을 강조하고 있다.
* 호랑이는 큰 입과 꼬리의 움직임을 강조하고 있다.
* 코끼리는 긴 코와 굵은 목, 그리고 꼬리에 털을 달아 코끼리의 특징을 묘사하고 있다.
* 돼지는 몸이 비대하고 꼬리가 짧고 등허리가 굽어있는 형상이다.
* 소와 양은 뿔이 올라간 것을 소로 뿔이 아래로 처진 것을 양으로 묘사하고 있다.
2) 지사(指事)
지사는 본래 형태가 없는 것을 형상화한 것이다.
지사문자의 구조 속에는 고대 중국인들의 추상적 사유가 번뜩이고 있다.
위 아래를 글씨로 표현한 상하(上下)자는 본래 형상이 없는 것인데
임의의 선을 긋고 위 아래에 점을 찍어 의미전달을 하고 있다.
상나라 사람들은 연속된다는 뜻을 글자로 표현하기도 하였다.
갑골문 융(肜)자를 보면 끊임없이 연속됨을 글자로 묘사하고 있다.
상나라 사람들은 소리까지도 글자로 표현하고 있다. 북치는 소리 방(彭)자가 바로 그 예라 하겠다.
훈(暈)자는 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빛 무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상나라 사람들은 향기까지도 글자로 표현하고 있다.
예로서 식기를 표현한 조(皂)자는 몇 개의 점으로 음식물의 향기를 묘사하고 있다.
3) 회의(會意)
회의문자는 두 개의 상형이 합쳐져서 하나의 글자가 된 것이다.
이외에도 형성(形聲), 전주(轉注), 가차(假借)가 있지만,
이들은 상형과 표의에서 벗어나 있으므로 여기에서 다루지 않기로 한다.
위에서 보듯이, 몇 가닥의 선조(線條)만으로 대상의 핵심만을 표현하는 기법은
창조적인 사고 없이는 불가능하다. 상나라 문자의 기본구조는 대상의 전체를 간략하게
한 은유적 표현과 대상의 일부를 간취한 환유적 표현으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이들은 모두 대상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최대한 압축한 형태로서
상나라의 문자 속에는 문자 자체에 이미 강한 힘과 생명력이 담겨져 있다.
또한 상나라 문자를 논함에 있어서 빼어놓을 수 없는 특징은 표현의 자유로움이 있다는 점이다.
당시에는 문자가 통일되어있지 않은 관계로 동일한 글자라 하더라도 다양한 표현이 가능했다.
획을 가감(加減)하고 글자의 좌우와 상하를 바꾼다 하더라도 글자의 규칙에 위배되지 않았다.
따라서, 상나라 때의 글씨는 글씨의 약속체계를 그대로 이행했던
서주이후의 글씨보다 더욱 더 융통성 있고 개방적인 표현이 가능했다. <도5,6>
(도5) 번체(繁體), 간체(簡體), 이체(異體)가 공존한다.
(도6) 좌우 향방을 구분하지 않는다.
4. 상 명문의 창조적 요소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상나라 문자는 문자 안에 예술이 갖추어야 할 생명력을 이미 갖추고 있다.
상나라의 서예가들은 이와 같은 문자의 예술적인 조건을 가지고 그것을 가공미화(加工美化)시켜 나갔다.
상나라 명문은 선사미술기법과 매우 닮아있다.
선사미술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대비,과장,축소,확대의 데포르마숑의 구조는
상명문에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 이와 같은 공통점은 상나라 사람들의 생활에서도 발견된다.
상나라는 역사시대로 접어들었지만 여전히 선사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원시가무를 그대로 계승하고 있었다.
상나라 사람들의 신앙은 샤머니즘과 애니미즘으로 대표되는데,
이것은 글씨를 쓰는 사람들이 심도 있는 예술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샤머니즘은 접신(接神)을 목적으로 하며,
샤먼이 신의 세계와 조우하려면 자기를 비우고 망아(忘我)의 상태가 되어야 한다.
애니미즘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모든 만물을 ‘살아있는 신령한 존재’로 바라본다.
하늘,땅,해,달,별,바람,비,산,바다,동식물은 물론이고
하나의 조그만 돌덩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살아있는 존재로 대했다.
이들은 만물이 살아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드러난 형상보다는
형상의 이면(裏面 : 속)에 드리워진 이미지에 관심을 보였다.
바로 이점은 선사인과 상나라 사람들의 작품에서 고정된 복제형태가 등장하지 않는 이유이다.
이미지 관조에 바탕을 둔 묘사는 상황성을 중시하기 때문에 고정화,획일화로부터 벗어나 있다.
일명 명필이라고 불리 우는 창조적인 서예가들은 이 이미지 관조의 전통을 계승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면, 상명문을 감상하면서 초기서예에 나타난 조형적 특징을 분석해보도록 하겠다.
도판에서 보듯이 전체가 문양처럼 보인다. 그러나 가운데 있는 도상은 그림이 아니라 시루솥 언(甗)자이다.
<도7> 다음의 도판 역시 모두 문양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가운데 부분이 글씨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글자는 벌(伐)자로서 사람을 창으로 베는 형상이다. <도8>
(도7) 상나라 명문 언(甗)자 (도8) 상나라 명문 벌(伐)자
이와같이 상나라의 명문은 문양과의 조화를 이루면서 발전했다.
어떤 것이 문양이고 어떤 것이 글씨인지 전문가가 아니고서는 좀처럼 파악하기가 어렵다.
이로보아 상나라 명문은 내용을 전달하는 기능을 넘어서 청동기를 아름답게 꾸미는
디자인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어부을魚父乙”이라고 쓴 명문이다. 여기에서는 을(乙)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글자는 한 번에 쓸 수 있는 글씨지만 외곽선 라인으로 처리하고 있다.
그 이유는 어(魚)자와 부(父)자의 분위기에 맞추기 위해서일 것이다.
즉, 을(乙)자를 일반적인 방법으로 한 번에 처리하면 전체적인 조화에 어긋나므로
이와 같은 융통성을 글씨에 도입되었을 것이다.<도9>
(도9) 상나라 명문 어부을(魚父乙) (도10) 상나라 명문 □작보이(□作寶彛)
<도10>에서도 상나라 사람들의 글씨를 대하는 융통성이 잘 나타나 있다.
오른쪽에 글씨가 세 글자처럼 보인다. 그런데, 내용을 고찰해보면
그것이 세 글자가 아니라 두 글자라는것을 안다.
오른쪽의 글씨는 “□작(□作)”이고, 오른쪽 글씨는 “보이(寶彝)”이다.
이와같이 한 글자를 두 글자처럼 보이게 하는 표현방법은 상명문의 특징이다.
러시아의 문예비평가 시클로프스키는 ‘예술적 표현의 특징을 낯설게 보이게 하는데 있다’고 했다.
그림이고 디자인이고 글씨이고 간에 너무 상식적인 표현은 사람들을 지루하게 해 더 이상 관심을 불어들이지 않는다.
<도11> 상나라 명문 <도12) 상나라 명문
전농작보준이(田農作寶尊彛)
<도11>은 “전농작보준이(田農作寶尊彛)”로서 오른쪽에 네 자를 왼쪽에 두자를 배치하고 있다.
이렇게 좌우의 배열이 현저한 차이가 있음에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상나라 명문을 쓴 사람들은 개체보다는 전체의 어울림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준(尊)자의 오른쪽 위에 조그만 획이 있다. 이것은 언덕 부(阝)로서 유난히 작게 쓰여 졌다.
이것은 대부분 왼쪽에 있는 것이 일반적이나 경우에 따라서는 오른쪽에 붙여 쓰기도 하고,
심지어는 제거하여도 글자가 성립된다.
이 명문을 쓴 사람은 이 글자를 놓고 어떻게 처리할까에 대해 고민하였을 것이다.
왼쪽에 넣으면 조화가 안 되고, 오른쪽에 넣으면 공간이 답답해질 것이고,
빼면 허전하다고 생각하여 오른쪽 위에 살짝 올려놓은 것으로 추측된다.
이와 같이 상나라의 서예가들은 고정관념이 없이 상황에 따라 적재적소(適材適所)하게 글씨를 써나갔다.
<도12>는 악기와 관련된 글씨이다. 손에 악기를 들고 북을 치고 있는 장면이다.
북의 꼭대기에 있는 세로 획이 우측으로 조금 이동하였다.
획이 이동한 이유는 북의 소리를 전달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도13>에서 보듯이 글자꼴이 다 제각각이다.
상명문은 그 글자가 어디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수시로 변형된다.
상명문에는 어떤 특정한 모범글꼴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렇게 모범글꼴이 없기 때문에 상명문은 더욱 개방적이고 창조적이고 열린 표현이 가능했을 것이다.
(도13) 상명문 동일자 비교표 (도14) 상나라 명문
상명문은 정적인 표현보다 역동적인 동태미를 표현한 것들이 많다.
<도14>는 그의 대표적인 예가 될 것이다.
본 도판의 구조 분석을 통해 상나라의 명문이 얼마나 무질서도가 높은 글씨인지를 알 수 있다.
대소(大小 : 크고 작음), 비수(肥瘦 : 굵고 가늠), 기정(奇正 : 기울고 바름),
소밀(疏密 : 성기고 빽빽함), 경중(輕重 : 가볍고 무거움), 참치(參差 :들쭉날쭉함)가 함께
어우러져 무질서를 한층 더해주고 있다. 이 무질서는 정리되어야 할 무질서인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상명문이 이렇게 고도의 무질서를 끌어들이고 있음에도
보는 사람의 눈을 전혀 어지럽히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무질서 안에 질서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으로 해석해볼 수 있다.
‘난중유서(亂中有序)’ 즉 ‘카오스속의 질서’ 는 상명문의 특징이다.
서론사(書論史)에서는 이와 같은 양식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여기에서 분명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상명문에 담긴 카오스가 청산되어야 할 성분이 아니라는 점이다.
5. 맺는말
앞에서 상나라 글씨의 감상을 그릇 치는 요인이 진화론적 세계관에 있음을 지적했다.
제시된 도판들이 말해주듯이 상나라 글씨보다 훨씬 오래 전에 제작된
동서양의 선사미술에서는 진화론의 흔적을 도저히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다.
본 논문의 고찰을 통해 발견되는 것은 상나라 사람들이 선사시대와 가까워서 미숙하고
미개하고 원시적인 글씨를 쓴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문화가 선사와 가까움으로 인해
더 영활하고 심오한 서예를 전개할 수 있었다는 것으로 추론된다.
도판에서 보듯이 선사인들은 대상을 재현하려하지 않고 새롭게 재구성하고 있다.
그들의 미술은 핵심적이고 요약적이며 어떠한 표현을 하던 거기에는 강한 생명력이 깃들어 있다.
이같은 선사인들의 표현능력은 역사시대를 기점으로 점점 퇴화하기 시작한다.
좀 더 자세히 언급하자면 오늘날의 문명인들이 예찬에 마지않는
문자, 역사, 거대국가로의 탄생을 기점으로 본질을 꿰뚫어보는 직관력이 조금씩 손상되기 시작한다.
상나라는 바로 문자, 역사, 거대국가로 접어들기 시작한 시대에 속한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상나라 까지만 하더라도 선사적인 사유와 풍습이 식지 않고 남아 있었다.
그것을 입증하는 예가 상나라의 문자와 상명문의 미의식에 활발발하게 반영되어 있다.
이와 같은 원시적 생명력은 상나라로 계승되지만,
서주시대로 접어들면서는 서서히 획일화, 경직화의 현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한 견지에서 볼 때, 상나라의 글씨는 오늘날의 서예인들에게
“서예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해주는 귀중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