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끝이 더욱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탓인지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을 때때로 생각해보게 된다. 자연히 자신의 참 모습을 알아내려는 의지와 노력도 헤아려본다. 시간은 항상 변함없이 흐르고 있지만 생의 변곡점마다 다르게 느껴진다. 생각할 수 있는 유년기부터 경쟁에 눈이 뜨기 전인 학창시절은 느림도 빠름도 없이 유현하다. 치열한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 들어선 사회생활의 흐름은 고통이 깊을수록 한없이 느리다. 정년이란 명목 하에 사회생활을 접고 마주하는 노년기는 걷잡을 수 없이 줄달음친다. 은퇴할 때까지의 기간은 자신의 본질을 탐구하는 일말의 여유도 주지 않을 만큼 잔혹하고 비통하다. 잃어버린 뼈아픈 시간을 돌이킬 수 있는 길은 간섭에서 자유로운 노년기에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거의 모두가 그런 값진 노력을 외면한다. 안타깝게도 지루함과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해 시작한 취미생활을 그렇다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꽤 많다. 일반인으로서 자신을 찾는 길은 강력한 의지와 단호한 행동이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빠르게는 중학교부터 키워온 끊임없는 독서로 갖추게 되는 철학적 소양을 통해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천금 같은 기회를 맞이한다. 냉혹하게 말한다면 자신의 실체를 찾으려는 순간부터 철이 들기 시작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결국 극히 일부를 빼곤 모두가 철없이 한번 밖에 없는 삶을 마친다.
비관적인 끝을 제시했지만 그래도 노년기의 생활을 제법 가치가 있고 보람지게 보낼 수 방법은 있다고 본다. 그중의 하나는 몸과 마음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생각할 수 있는 한 깊은 정과 순수함 속에 맺어진 학창시절의 친구들을 기회가 될수록 찾아보거나 만나보는 거다. 시간이 거침없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어 놓칠 수 없는 그런 기회도 손을 꼽을 정도로 많지 않다. 특히 올해부터는 바둑당구대회에 참여도가 민망할 만큼 적어 마음이 무겁다. 횟수를 줄이거나 행사를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착잡하다.
짓누르는 가슴을 억지로 가다듬고 정시 15분 전쯤 당구장에 들어선다. 곧 종로3가 의리의 오야붕으로 불리는 영현이 나타난다. 테이블을 차지하기 위해 거의 문외한인 소인이 큐대를 잡는다. 친구끼리지만 정녕 민폐다. 다행히 정시에 광희가 들어서 정상적인 대결상태를 갖춘다. 조금 지나 승권이가 합세한다. 길 건너편 4층에 있는 기원에 오른다. 항상 차지하고 있던 자리에 친구들이 보이지 않는다. 낯익은 주인여자가 4명의 친구들이 대국을 벌이고 있는 자리를 알려 준다. 원래 예약해 놓았던 자리가 다른 손님들이 막무가내로 차지했다고 미안해한다. 늘 참석하다 지난번에 빠진 근지와 오랜만에 나타난 원표가 원식, 병현과 진지하게 반상에 몰입되어있다. 거짓말을 조금 보태 기원이 꽉 차 숨 돌릴 여유가 없다. 당구장에 다시 들어간 지 20여분 정도 지나니 윤구가 특유의 어눌한 자세로 들어서다. 동문들과 회합 때문에 떠나는 영현의 자리를 차지하고 큐를 휘두른다. 저녁을 시작하려는 5시경에 모두 12명이 모였다. 모처럼 보인 홍주 등 때문에 금일 행사가 체면은 지켰다.
평일인 걸 고려해 영현과 상의해 예약이 없이 이용하던 음식점에 들어서니 우리를 한꺼번에 소화할 공간이 없어 두 패로 나눈다. 오늘 따라 곳곳이 만원으로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요상하다. 모두가 차려놓은 음식에 무척 만족해한다. 한 시간 반 정도 맘껏 들고 나선다. 6명의 친구들은 기원으로 가고 2명은 당구장으로 발길을 옮긴다. 소인은 늘 왕 총무로 수고하는 규석, 종하와 함께 카페를 찾아 익선동으로 들어선다. 낙원상가를 기점으로 수평 차도에 갈라서서 자리 잡은 익선동과 종로3가 지역은 극명한 세대의 대조로 아마도 세계에서 유일한 장소로 명성을 얻고 있다고 본다. 전자는 각양각색의 레스토랑, 카페, 상점으로 꾸며진 한옥으로 젊은이들로 넘쳐난다. 후자는 제법 여유가 있다는 늙은이들로 득실거린다. 카페를 찾으며 들어가 마주치는 생기발랄한 청춘의 모습이 회춘을 시켜주고도 남음이 있다. 값이 제법 나가는 우아한 아이스크림카페를 들며 우리들의 꿈 많고 순진했던 학창시절을 잠시나마 일깨워본다. 7시를 지나 길로 나서니 두 지역을 갈라놓는 도로 양편이 포장마차로 줄지어 자리를 잡고 있다. 역시 젊은이들로 넘실거린다. 그들이 발산하는 상긋함과 정열이 부러울 정도로 마음에 와 닿지만 또 한편으론 그들이 보여주는 정도를 벗어난 개인주의가 못 마땅하게 다가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상반적인 상념에 사로잡혀 걷다 보니 옛 피카디리 극장으로 이르는 골목길에 들어선다. 방금 전의 활기에 넘쳤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쾌쾌하고 엄습한 냄새가 온몸을 감싸고 있다. 노인의 길이 힘을 잃은 발목을 끌어당기고 있다.
함께한 친구들: 강윤구, 권영현, 김종하, 김홍주, 김희택, 문원표, 박병현, 서규석, 이광희, 이근지, 이승권, 이원식, 최원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