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적 삶의 가치를 탐구하는 시 정신
김기덕<문학평론가>
아인슈타인은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뉴저지 프린스턴에서 단 하나의 이론, 우주의 모든 섭리를 설명할 수 있는 원리를 찾고자 연구에 매진하였다. 반세기가 지난 지금 아인슈타인이 연구하던 통일장이론은 지상의 과제가 되었다. 그리고 인류는 끈이론이라는 새롭고 급진적인 이론을 통해 마침내 그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이론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충격에 빠질 것이다. 끈이론에 의하면 우주는 끈으로 이루어져 있고, 현실은 실재와 공상과학이 뒤섞인 세계라는 것이다. 만물의 이론이라는 거창한 이름에도 불구하고 끈이론의 기본 개념은 제일 작은 입자에서부터 머나먼 별에 이르기까지 우주의 모든 물질이 단 하나의 끈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그 끈은 진동하는 에너지이며, 우주는 진동하는 끈들의 연주로 만들어낸 교향곡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말과 행위로써 자신을 드러내도록 배운다. 다양한 공동체 안에 하나의 끈으로 이어진 구성원으로서 언어 소통을 통해 사회적 참여와 보편적 사고를 가지며, 자기 이해를 위한 모든 만물로 이루어진 끈을 향유한다. 세상만물은 끈 아닌 것이 없으며,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끈에 의해 연결되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끈의 에너지들이 인간을 구성하고 사고하게 한다. 세상에 충만한 끈의 에너지들은 상호작용하며 영향을 주고받는다. 그래서 나의 삶은 독자적인 삶이 아니다.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사물과도 유기적 관계를 가지며 공동체적 관계를 이루고 살아간다. 인간은 공동체적 삶의 관계 속에서 오류가능성의 존재임을 인식하게 되고 타인의 모습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재정립해 나간다. 그러한 자아성찰로 시인들은 언어의 세계를 자유로이 넘나들며, 하나의 끈으로 형성된 공동체적 삶의 거대한 융합을 거쳐 끊임없이 사유하는 것이다.
장기간의 여행 후여서인지
서재 한 켠의 거미줄이 새롭다
보이지 않는 거미줄을 모른 채
독서만을 줄의 원천으로 보던 나
언어의 동굴에 펼쳐진
끝모르는 거미줄을 들여다본다
권력의 심장부에서 내려온 줄이
또다른 줄을 감시하고
언어의 공을 굴릴수록
몰려드는 더 많은 줄의 독백
큰 줄과 작은 줄을 움직이는 담론을 모른 채
줄은 공평하면서 공평하지가 않다
서민들을 움직이는 줄은 없고
진실의 방향을 잃은 두 개의 줄이 너의 외형을 감시한다
외면하는 자들을 위해
줄은 하얀 선을 노출시키는데
보이는 줄은 보이지 않는 그물이 아니라는 걸
거미줄 안의 거미는 모른다
- 정신재, 「세 개의 거미줄」 전문
정신재 시인은 장기여행을 다녀온 후 서재에서 거미줄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거미줄에서 새로운 의미들을 생각하며 다양한 사고의 줄을 엮는다.
거미줄은 거미에게는 생존의 수단이지만, 곤충들에게는 죽음의 함정이다. 그래서 거미줄은 대상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낳는다. 정신재 시인은 「세 개의 거미줄」을 통해 거미줄을 세 가지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첫째는 포식자의 줄로 “권력의 심장부에서 내려온 줄”이며, ‘큰 줄’이 ‘작은 줄’을 감시하고 억압함으로써 진실의 방향을 잃은 왜곡된 줄로 묘사한다. 학연이나 지연, 혈연 등의 다양한 공동체적 삶을 통해 더 큰 줄에 닿으려 하고, 그 줄을 통해 굳건한 자기 위치를 굳히려는 게 인간심리일 수도 있다. “언어의 공을 굴릴수록/ 몰려드는 더 많은 줄의 독백”들은 눈덩이처럼 커지며 굴러가지만, 이러한 생각들을 지배하고 굴리는 더 큰 차원의 담론이 존재함을 알지 못한다고 말한다. 둘째는 포충망에 걸린 존재와 같은 서민들을 도울 수 있는 줄로서, 정신재 시인은 꼭 필요하지만 현재 찾아보기 어렵다고 개탄한다. 이는 생명줄과 같은 것으로 절망에 빠진 사람이나 슬픔에 잠긴 이를 위해 던져줄 수 있는 줄이다. 셋째는 이러한 줄들을 움직이는 신적 존재와 같은 보이지 않는 존재의 줄을 말한다. “보이지 않는 거미줄을 모른 채/ 독서만을 줄의 원천으로 보던 나”에서 지금까지 독서를 통하여 삶과 깨달음의 줄을 잡고자 하였으나 언어의 동굴엔 끝 모르는 허무의 거미줄만이 걸려 있음을 본다. 눈에 잘 보이지 않는 함정의 줄도 있어서, 정신재 시인은 “보이는 줄들은 보이지 않는 그물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물이라는 상징성은 포박하고 억제하는 존재로 덫이나 함정, 벗어날 수 없는 운명의 한계성, 또는 다가오는 죽음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어쩌면 우리는 보이지 않는 그물에 걸려 한평생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즉 눈에 보이는 것들을 운용하고 지배하는 커다란 담론과 같은 섭리의 줄 안에 우리가 살고 있음을, 욕망의 줄을 치고 있는 거미줄 안의 거미는 모른다고 일침을 놓는다. 이런 다양한 줄들은 공평한 것 같지만 공평할 수 없다. 우리는 줄과 줄의 관계 속에서 줄타기를 한다. 운명공동체의 삶을 엮어가면서 누구는 올무의 줄을, 누구는 생명의 줄을 던진다.
어디에도 기댈 곳 하나 없는 도시의 음습한 구석
기침소리 들리지 않아 어젯밤 혹시나 했는데
노인네는 양지쪽보다 먼저 나와 앉아 있다
간간이 녹슨 동전소리만 인기척을 내고 가는 골목
하릴없이 고양이가 어슬렁거리다 사라질 뿐
소득주도 경제성장에 가려진 우울한 단면
멀리 하늘에 닿아 있는 집들이 헛헛하기만 한
진정한 복지사회로 가기엔 아직도 어두운 그늘
- 김석규, 「도시의 우울」 전문
김석규 시인의 「도시의 우울」은 양극화가 가중되고 있는 도시의 어두운 단면을 그리고 있다. 소득주도 성장론은 가게의 임금과 소득을 늘리면 소비도 늘어나 경제성장이 이루어진다는 이론이다. 소득주도성장은 임금인상이 총수요에 미치는 효과만 고려해서 공급에 미치는 효과는 고려하지 않음으로 단기적 경기부양책에 불과한 결과를 낳았고, 본래의 목적인 양극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알바쪼개기와 단기 공공근로 등으로 일자리가 부풀려지는 것을 배제하기 위해 총 근로시간을 52시간으로 단축하고 인원고용을 늘렸지만, 최저임금의 상승으로 더 많은 일자리가 사라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거기에 코로나 여파와 부동산문제 폭발로 양극화는 심화되었고, 서민들을 위한 복지는 상대적 박탈감을 가져왔다. 김석규 시인은 사회적 약자인 노년층의 우울한 삶을 조명함으로써 도시화, 산업화 속에서 소외된 사회적 약자의 아픔을 드러낸다. 기댈 곳 하나 없이 살아가는 독거노인들은 주변의 무관심 속에서 고독한 현실을 살아간다. 이와 대조적으로 하늘이 닿을 듯 치솟은 아파트들은 아직도 욕망에 굶주린 채 우뚝 서 있다. 도시가 거대해질수록 그늘 또한 커지게 되는 불평등 사회의 현실을 김석규 시인은 걱정하며 가슴아파 한다. 빛이 강하면 그늘도 짙다. 음과 양이 공존하는 현실 속에서 시인은 그늘 속에 들어가 아픔을 조명할 수 있어야 한다. 김석규 시인은 발전된 도시 속에서 음습한 구석을 조명한다. 노인문제, 빈부격차, 사회복지, 아파트 거품현상 등과 같은 사회적 문제를 거론한다. 이러한 문제는 우리 모두의 공동체적 해결과제다. 그늘이 짙어지면 양지를 잠식하고, 결국은 어둠의 세계를 만들 수밖에 없기 때문에 김석규 시인의 「도시의 우울」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위한 문제 제기가 아닐 수 없다.
고향 마을에 하천 공사를 한다고
포크레인 여러 대가 하천 바닥을 퍼내고 있다
작은 새의 보금자리도 막 피어나는 풀꽃들도
사정없이 부서져서 트럭에 실려가고 있다
전두측두엽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의 뇌 속처럼
수없이 깎여나가는 소중한 추억들
톱날 같은 삽날이 부릉거릴 때마다
아름다운 내 어린 날들이 수없이 파여져 나간다
아내의 기억 속에서도 하루에 몇 십 조각씩
금가루들이 부서져 내린다
(중략)
망각의 날개는 왜 가장 아름다운 것부터 지워가는 것일까
하천 정비가 끝나면
기억할 것들도 사랑할 것들도 모두 파여 나간 고향 냇가에는
머물 곳을 잃은 물들만 외면한 채 달려가겠지
포크레인의 폭력에 아름다운 어린 날은 모두 깨어졌지만
힘겹게 혼자 남아 뒤뚱대는 배꼽바위 모양으로라도
아내의 수첩 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남고 싶어서
오늘도 아리셉트를 챙겨주기 위해 아내의 잠을 깨운다
- 엄기창,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일부
엄기창 시인은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에서 치매를 앓고 있는 아내의 뇌와 포크레인에 파괴되어 가는 고향마을을 대비하여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을 표현한다. 아내의 뇌 속에서 뇌세포들이 파괴됨으로써 금가루 같이 아름다운 기억들이 사라져간다. 그것은 어린 날의 아름다운 추억이 담긴 고향이 개발의 시대적 흐름에 밀려 파괴되는 것과 동일시된다. 시대적 변화에 따른 자연의 파괴를 망각으로 환치시켜 아름다운 순간들이 다 지워진다 해도 아내의 수첩 속에서만큼은 지워지지 않는 이름으로 남고자 하는 시인의 간절한 사랑을 표현했다. 하루하루 기억을 잃어가는 아내를 지켜보는 삶은 절박한 현실이다. 시대의 흐름 속에서 나타난 포크레인이 하천을 파괴할 때 엄기창 시인의 어린 날들이 파여져 나가고, 아내의 기억 속에서 금가루들이 부서져 내리는 것은 운명공동체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고향 하천의 파괴는 곧 엄기창 시인 추억의 파괴이며, 아내의 소중한 기억의 파괴가 된다. 그 속에서 “힘겹게 혼자 남아 뒤뚱대는 배꼽바위 모양으로” 고향에 남듯 아내의 수첩 속에 남기를 소망하는 것은 아내와 동일화 된 존재로서의 간절한 염원이 된다. 변하는 현실 속에서 엄기창 시인은 시간을 뛰어넘어 천륜적 사랑의 끈을 끝끝내 놓지 않으려 한다.
사진을 찍었다
두 물길 하나 되는 합수머리에서
잎이 져버린 동그란 나무를
머리 위에 이고 서 있는 두 사람
둥근 지구를 힘겹게 이고 있는 아틀라스
지구에 입을 대고 젖줄 빠는 푸로메테우스,
빈몸 허공에 촉수 뻗어 혼을 부르는,
나무를 밀어버리고 허공의 말씀에 귀 기울였다
아, 빈 몸, 가벼운 빈자리,
아득한 우주의 시원(始原)
- 이혜선, 「가벼운 빈 자리」
이혜선 시인의 「가벼운 빈 자리」는 짧지만 심오한 철학성과 연결되어 있다. 두 물길이 하나 되는 합수머리에서 사진을 찍음으로 자연스럽게 초월적 세계와 만난다. “잎이 져버린 동그란 나무를/ 머리 위에 이고 서 있는 두 사람”은 아틀라스와 프로메테우스라고도 할 수 있지만,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도 하고, 깨달은 자의 모습이기도 하다. 우리의 머릿속은 잎이 져버린 동그란 나무와 같은 핏줄로 구성되어 있다. 나무의 가지 끝이 미세해지며 하늘과 하나가 되듯 우리의 사고 또한 영원한 세계와 이어져 있다. 이는 카발라의 생명나무와 같고 그 생명나무는 곧 우리의 몸과 하나가 된다. 또한 이혜선 시인은 동그란 나무를 지구로 보고, 그리스 신화에서 티탄신족과 올림피아 신들과의 싸움에서 티탄신족의 편을 들었다 하여 제우스로부터 지구의 서쪽 끝에서 하늘을 떠받치라는 형벌을 받은 아틀라스를 생각한다. 또한 아틀라스의 형제이면서 제우스로부터 불을 훔쳐 인간에게 준, ‘먼저 생각하는 사람’이란 뜻의 프로메테우스를 끌어온다. 이들은 신적 존재로서 초월적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이러한 존재들처럼 시인도 “빈 몸 허공에 촉수를 뻗어 혼을 부르는” 생명나무가 된다. 그리고 실재적 나무는 밀어버리고 자신이 생명나무가 되어 허공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 이는 케텔, 호크마, 비나로 이어지는 10개의 세피로트 형상이며, 7개의 차크라를 연 쿤달리니의 모습이다. 이렇게 깨달은 자는 신적 존재와 같지만, 몸 안에 내재된 생명나무를 살림으로 아득한 우주의 시원인 에덴에서 상실한 생명나무를 얻게 된다. 이 시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함으로 쫓겨나면서 상실했던 생명나무의 비밀이 결국은 우리 몸 안에 있음을 깨닫게 하는 카발라의 가르침과 상통한다. 또한 인간의 몸은 에덴의 상징이라서 에덴의 정중앙에 있던 생명나무는 탯줄과도 연결된다. 탯줄은 어머니와의 연결선이지만 신의 세계, 우주의 기운과 연결된 생명선을 상징한다. 상실된 생명나무로 인해 소멸된 우주의 기운을 얻기 위해서는 욕망을 비워야 하고, 생명나무를 세워야 하는데, 그곳이 빈 몸이며, 빈 자리인 것이다. 그런 깨달음의 상태로 돌아갈 때 아득한 우주의 시원인 에덴동산을 회복할 수 있음을 담고 있다. 인간의 정신적인 끈은 우주의 무한한 기운과 연결되어 있고, 그 기운의 끈에 묶여 인간은 또한 운명공동체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떠들썩한 친구들 사이 텅 빈 공간이 그리워
사이버 행동강령 북적대는 네트워크 2호선에 몸을 싣는다
거미줄같이 얽혀 사는 페이스북에서 만난 백여덟 가지 소문들
환승역인 인스타그램을 한 정거장 남겨두고
하나 둘 보이지 않더니 모두 사라지고 없다
아프리카의 그림자처럼 검게 타버린 출입문과 꽉 막힌 창문
언제부터인가 들리지 않는 가상 스피커 안내방송까지
인간과 와이파이는 지하에서만큼은 전혀 열정적이지 않다
연결선을 상실한 블루투스가 터지지 않으므로
운명교향곡에 맞춰 힙합을 추려던 계획을
이쯤에서 취소한다
이제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
- 남상광, 「TV에서 탈출하다」 일부
특정한 관심이나 활동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망을 구축해 주는 온라인 서비스인 SNS(Social Network Site)는 페이스북과 트위터, 인스타그램 등의 폭발적인 성장에 따라 관심의 대상으로 부상했다. 세계 어느 곳이나 인터넷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현대는 사이버의 시대가 되었다. SNS는 생활의 편리는 가져왔으나 프라이버시의 침해, 사적정보의 남용, 온라인상의 공격행위 등과 같은 폐해를 낳고 있다. 남상광 시인은 현대문명을 대표하는 TV에서 탈출하여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떠들썩한 친구들 사이 텅 빈 공간이 그리워 사이버 행동강령 북적대는 네트워크 2호선에 몸을 싣지만, 오히려 더 복잡해진다. 여기서 네트워크 2호선은 자바에 속한 용어이기도 하지만 지하철 2호선처럼 순환하며 서로를 이어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행동강령이 많으므로 좀 더 질서정연할 거라고 생각했던 기대가 무너지고, 오히려 사이버 윤리강령인 108개의 한자성어마저도 사라져버렸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고 블루투스가 연결되지 않는 지하세계에서 자신만의 빈 공간을 발견한다. 하지만 이 지하세계는 오래 머물 수 없는 공간이기 때문에 전통을 상징하는 운명교향곡에 맞춰 현대성의 제유적 대상인 힙합을 추려던 계획을 잠시 취소할 수는 있어도 결국은 하이브리드적인 현실을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하여 남상광 시인의 「TV에서 탈출하다」는 잠깐일 수는 있지만, 탈출할 수 없는 역설적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
무릎을 꿇은 장의사가
악취를 풍기는 이불에서 그를 떼어냈다
구겨져버린 고지서는
깃털보다 가벼웠으므로
한 조각의 구름과 함께 앰뷸런스에 실렸다
이웃들의 투명한 시선들이 내걸리고
곁을 지키던 텔레비전에서
트로트 한 소절이 흘러나와
목을 꺾으며 그를 전송했다
방안에 나뒹굴던 소주병과 알약들이 쏟아낸 말을
봉지에 담아내자
이내 남자의 내력을 씻어내는 소독약 냄새가 가시고
복숭아상자는 백색소음으로 채워졌다
다음날, 한 조간신문이 열어 본
그의 핸드폰에는
복숭아밭의 어떤 바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
- 유정남, 「복숭아벌레의 죽음」 일부
무연고자인 한 남자의 죽음을 배추벌레의 죽음과 연결하여 고독한 인간의 삶과 허무를 표현하고 있다. 웅크린 채로 일주일 만에 발견된 남자는 주변에 이웃 하나 없이 고독하게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방안에 나뒹굴던 소주병과 알약들”을 보면 아픈 몸을 재대로 치유하지 못하고 무절제한 삶을 살아왔음도 짐작케 한다. 어쩌면 술로 살았을 그의 몸은 야위어서 구겨진 고지서와 같았을 것이다. 따뜻한 존재가 되지 못했던 이웃들은 끝까지 방관자로 남아서 구경꾼으로 창가에 내걸리고 미처 끄지 못한 텔레비전만이 슬픈 트로트 한 소절로 떠나보내는 시인의 표현은 담담하면서도 처절하다. “소주병과 알약들이 쏟아낸 말을 봉지에 담아내자/ 남자의 내력을 씻어내는 소독약 냄새가 가시고”, “핸드폰에는/ 복숭아밭의 어떤 바람도 남아 있지 않았다”라고 말함으로써 관계를 상실한 한 남자의 쓸쓸함과 허무를 적절하게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독거노인이나 1인 가구가 많은 현대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그리고 있어서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소외된 계층에 대한 공동체 인식의 부재문제를 다시 한 번 반추하게 만든다.
현대의 공동체 사회에서 소외된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은 실질적인 사망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웃과 친구는 물론, 인터넷 접속도 없고, 종교적인 교류마저 갖지 않고 살아간다면 현대사회에서 이는 살아 있어도 살아 있지 않은 존재와 같다. 시는 화려한 무대에 서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마주한 이들의 골방으로 찾아가 생명의 소중함을 깨우치고 힘과 용기를 주는 것이다. 유정남 시인의 「복숭아벌레의 죽음」은 벌레의 죽음만도 못한 한 사내의 죽음을 조명함으로써 소외된 삶과 공동체 삶의 가치, 관계의 소중함을 일깨운다.
그날 새벽 선창에는 은이가 배웅을 하러 나왔었다
양조장 집 큰며느리가 되어 제일 먼저 시집간 새댁 은이가
바람 부는 바닷가에 나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군산에서 장항으로, 거기서 서울행 기차를 탈 참이었다
공부하러 간다니 넌 좋겠다, 그는 문득 긴 숨을 내쉬었고
좋긴 뭘, 나는 태산 같은 걱정에 눌려 깊은숨을 들이켰다
바닷가에서 손을 흔들던 은이의 다홍색 치맛자락이
바람에 펄럭거리다가 가물거리다가 보이지 않았고
그것이 끝이었다, 은이를 다시는 보지 못했다
목숨을 끊은 은이의 뼛가루를 군산 앞바다에 뿌렸다는,
실성한 어머니도 그 바다로 걸어 들어갔다는 말만 들었다
은이의 바다, 은이처럼 젊고 푸르른 바다
목숨을 바쳐도 끝끝내 바다로만 출렁거리는 바다
너는 좋겠다, 좋긴 뭘, 혼자 주고받으며 건너는 바다
- 이향아, 「혼자 주고받으며 건너는 바다」 전문
이향아 시인의 「혼자 주고받으며 건너는 바다」는 잔잔한 독백적 시이지만 슬픔이 출렁이는 아픔을 간직하고 있다. 과거 양조장은 일이 많아서 아무나 감당할 수 없는 곳이었는데, 큰며느리로 갔으니 자살할 만한 관계성을 느끼게 한다. 그래서 서울로 공부하러 가는 친구가 부러웠을 것이다. 군산과 장항 사이엔 바다와 맞닿은 금강하구가 흐르는데,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배를 타고 건너야 했다. 선창에 나와서 흔드는 손과, 바람에 펄럭이는 다홍색치마와 파도의 이미지가 연결되어 은이와 헤어지던 바다와 은이가 된 바다가 겹쳐진다. 그리고 떠나올 때 짧게 나누었던 “넌 좋겠다”와 “좋긴 뭘”이란 대화를 생각하며 건너는 바다는 과거를 회상하며 건너는 사실적 바다일 수도 있지만, 실은 자신도 하나의 바다임을 말하고 있다. 실성한 어머니와 은이, 그리고 시인과 사실적 바다가 하나가 되어, 독자적 의미의 “은이의 바다”에서 확장되어 피상적 “은이처럼 젊고 푸르른 바다”로 표현되고, “목숨을 바쳐도 끝끝내 바다로만 출렁거리는 바다”의 보편적 대상으로 묘사되었다. 바다는 모든 영혼을 포괄하지만 그냥 바다의 모습으로만 출렁거린다. 결국 바다는 바다가 아니라 무수한 혼들의 너울거림이다. 노년이 되어서 “너는 좋겠다, 좋기는 뭘” 하고 중얼거리며 혼자 건너는 바다에는 인생무상의 감정이 담겨 있다. 살아보니 인생은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이 기차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과정일 뿐임을 덤으로 깨닫게 한다.
억척스럽게 밀려왔다
흰 거품을 물고 칠십칠 년을 쉼 없이
달려와 백사장에 누웠다
마지막 한숨도 남기지 않고 촉루의
흔적마저 사라진 검푸른 물결 위에
감자꽃이 흐드러지던 하지 무렵이었다
땅 속에서 백잣빛으로 익어가던 붉은
심장이 줄줄이 지상으로
끌어올려졌지만 아무도
울지 않았다
심장은 여전히 뜨거웠다
열일곱 그대로의 연분홍 꽃잎무늬가
푸른 물결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칠십칠 년 동안 억척스럽게 끌어당긴
파도가 주름을 펴고
바람을 놓았다
바다만을 바라보던 소금꽃 한 송이,
이순의 내 가슴 속에서 홀연히 떠나났다
- 김남권, 「엄마의 바다」 전문
험난한 삶을 산 엄마 자체를 김남권 시인은 「엄마의 바다」에서 바다로 묘사한다. 쉼 없이 억척스럽게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의 삶을 살다가 어머니는 일흔일곱이 되어 백사장에 눕는다. “마지막 한숨도 남기지 않고/ 흔적마저 사라진 검푸른 물결 위에” 라는 표현은 어머니가 물에 빠져 떠났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갖게 한다. 하지만 이 또한 상징적이어서 세상 자체가 험난한 바다이기에 우리 모두는 바다를 떠돌다 풍랑을 만나 떠나는 존재로 표현될 수도 있다. 그 때는 감자 꽃이 피던 하지 무렵이었고, 감자가 땅에서 뽑혀 지상으로 끌어올려지듯 어머니의 처절한 삶이 낱낱이 파헤쳐졌지만, 아무도 울지 않았음은 큰 충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시는 바다만을 묘사하지 않고 서로 상사성이 적은 바다와 감자를 연결시켜 사고를 확장시키고 있다. 심장은 여전히 뜨거웠다고 쓴 것은 어머니의 풋풋했던 꿈을 보아서일 것이다. 그 꿈의 존재는 바다만 바라보던 소금꽃 한 송이이며, 아들을 향한 감자꽃 같은 사랑일 것이다. 이순이 되어서도 파도처럼 살다 가신 어머니의 삶을 기억하며 쓴 「엄마의 바다」가 생감자즙처럼 아리다.
험난한 삶이 바다가 되고 소금꽃이 되는 것은 풍랑 때문이고, 바람 때문이고, 뜨거운 햇살 때문이다. 잔잔한 삶에 풍랑이 이는 것은 주변적 영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런 영향 덕분에 바다는 살아 숨 쉬고 무수한 생명들을 키울 수 있다. 한 시인의 고통이 세상의 바다를 살리고, 썩어가는 정신의 바다를 살릴 수 있다. 김남권 시인의 애절한 바다가 뜨거운 사랑의 해풍을 몰아온다.
밀물과 썰물을 밀어낸
기울어진 패선의 눈길이
갇힌 바다를 꾸역꾸역 끌고 나와
함초밭 소복하게 일궈놓고
해당화 꽃그늘에 잠겨들었다
모두가 떠난 포구에서
턱 치켜세운 도시가 충혈된 눈길로
조각난 바다를 꿰매고 있는
함초파도 출렁이는 월곶 생태공원
낡은 소금창고 껴안은 채
노을에 잠긴 황금물결과 쪽빛 바람이
사리와 조금을 기다리며
순백의 화원 차려놓고 파라다이스를 꿈꾼다
- 김해빈, 「떠나지 못한 바다」, 일부
주변에 아파트들이 들어선 월곶 생태공원은 소래습지에 조성된 공원으로 소금창고와 폐염전 등이 보존되어 있어 도시 속의 바다를 체감하게 한다. 김해빈 시인은 간척사업으로 밀물과 썰물을 밀어내고 알몸의 갯벌만 남은 습지를 떠나지 못한 바다라고 명명한다. “기울어진 패선의 눈길이/ 갇힌 바다를 꾸역꾸역 끌고 나와/ 함초밭 소복하게 일궈놓고/ 해당화 꽃그늘에 잠겨들었다”는 문장은 누구라도 한번쯤 가보고 싶게 하는 표현이다. 그러나 주변엔 턱을 치켜세운 도시가 있다.
소래포구의 물길이 이어진 월곶 생태공원은 턱 치켜세운 도시와 조각난 바다가 한 곳에서 만나 서로에게 부족한 부분을 채워줌으로써 한마음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차마 떠나지 못해 남을 수밖에 없었던 바다가 함초밭을 일궈놓았고 해당화 꽃그늘에 잠겨들어 생태공원을 조성했음을 시인은 발견한다. 또한 턱 치켜세운 도시가 조각난 바다를 꿰맴으로써 함초파도 출렁이는 생태공원에서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보여주고 있다. 전혀 어울릴 수 없을 것 같은 도시와 바다가 서로의 미비함을 보완해가며 함께 순백의 화원 차려놓고 파라다이스의 꿈을 꾼다. 둘의 만남이 하나의 공동체로 연합하여 상생함으로써 생명이 깃든 새로운 생태공원을 탄생시킨 것이다. 김해빈 시인의 「떠나지 못한 바다」는 공동체적 삶의 의식이 개개인의 발전과 자아성찰의 핵심을 이루어 생태위기에서 벗어나도록 한다는 점을 고취시키고 있다.
선정된 몇 편의 작품들을 통해 시인은 모든 만물을 공동체로 상정함으로써 서로 존중하고, 건강한 상호관계 맺기를 지향, 실천하기를 바라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공통적인 관심을 갖는 공동체적 삶의 현장이 문학을 공유하고 창출하고 반성하는 자아성찰의 장이며, 변화하는 글쓰기, 탐구하는 시 정신의 본질임을 엿볼 수 있었다.
위대한 과학자인 뉴턴은 “나는 바닷가에서 노는 어린소년과 같았다. 더 예쁜 조개와 더 동그란 조약돌을 찾는 동안 내 앞에는 거대한 진실의 바다가 비밀을 감춘 채 누워 있었다.”라고 말했다. 250년 후 뉴턴의 진정한 후계자인 아인슈타인이 등장해 이 거대한 바다가 수학적 기호, 수학적 이론으로 풀리는 간단한 것임을 보여줬다. 그리고 아인슈타인 사후 50년이 지난 지금 그의 끈이론으로 우주의 모든 비밀을 푸는 단계에 와 있다. 그렇다면 이 끈이론이 어떻게 거시세계와 미시세계를 통합하며, 이 사실이 어떻게 맞는지 틀리는지 알 수 있을까? 현재 어떤 실험으로도 끈이론의 실체를 밝혀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서 끈이론은 영원히 안전하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끈이론은 과학인가, 철학인가.
어쩌면 끈이론은 문학의 해답이 될 수도 있다. 사실적이면서도 추상적인 존재, 끝없이 결합될 수 있는 에너지이고, 무한 해체될 수 있는 최소단위이며, 세상에 충만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공동체는 둘 이상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이다. 공통된 하나의 끈으로 맺어진 집단이다. 시인마다 바라보는 삶은 천차만별이지만, 시인으로 살아가는 삶은 하나이기에 불가분의 공동체적 운명을 같이 한다. 문학의 끈으로 연결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 아름다운 생존을 위한 시대의식을 일깨우는 공동체적 운명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 문장 하나의 끈이 절망에 빠진 독자를 구할 수 있음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