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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자식을 잃은 두 어머니가 있습니다” 2023년 1월 28일 15시 한국작가회의 회의실에서 한국작가회의 연대활동위원회(위원장 권위상) 주관으로 이태원참사희생자 이지한의 어머니와 태안화력발전소에서 희생된 김용균의 어머니를 모시고 대담이 있었다. 자식을 앞세운 두 어머니의 절규를 공감하고, 우리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되짚어 보는 기회를 삼기 위해서였다. 첫 번 대담은 이태원참사유가족협의회 조미은 씨와 이영숙 시인이, 두 번째는 김용균재단 김미숙 대표와 장우원 시인이 진행하였다. 많은 회원들이 참석했고, 권위상 연대활동위원장의 사회로 윤선길, 전비담, 조미희, 주선미 시인의 추모시 낭송도 있었다. 김이하 시인이 사진을 제공했다. |
진정한 추모의 시작은 공감입니다
대담 | 조미은ㆍ이영숙
이영숙 4ㆍ16 세월호 참사가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고 기록되었으면 그나마 얼마나 다행이었을까요. 당시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라는 참사의 해법이 제대로 정확히 작동했다면 10ㆍ29 이태원 참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 자식을 잃은 두 어머니가 있습니다>와 같이 참담하고 애끓는 자리가 마련되지도 않았을 거고요. 차마 고인이라고 칭하기에도 두려운 젊은 영혼들을 애도하고 두 어머니의 고통과 슬픔을 공유하기 위해 우리는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기꺼이 시간을 내주신 고 이지한 군의 어머님 조미은 씨와 먼저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조미은 씨, 여기까지 오시느라 애쓰셨습니다. 남다른 소회가 있으실 텐데요.
참사의 비극과 우리 아이들
조미은 저는 10월 29일 이태원참사로 아들을 먼저 보낸 배우 이지한의 엄마 조미은입니다. 사실 한국작가회의에서 전화를 받고 진심으로 너무너무 감사함을 느꼈습니다. 여기에 계시는 분들이 시인과 작가님들이라고 들었거든요. 일제강점기 때도 시는 빛을 발했고, 시간이 흘러도 그 시는 대한 민국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있음을 저는 압니다. 말과 글로 이 사회의 잘 잘못을 기록하고 비판하며, 아이들의 영혼을 추모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곳에 왔습니다.
저는 시인도 작가도 아니지만, 돌아 오지 못하고 또 서로 연락을 주고받지도 못하는 제 아들에게 매일같이 카톡을 보내며 짧은 실력으로나마 시라고 하면 시라고 할까요, 글이라고 하면 글이라고 할까요, 그런 글을 매일같이 보내고 있었고, 지금은 바빠서 2~3일에 한 번밖에 못 보내고 있지만, 글을 통해서 그리움과 결기를 다지고 있습니다. 저도 글을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었기에 한국작가회의에서 연락을 받았을 때 정말 다른 약속을 다 취소하고라도 반드시 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를 초대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영숙 고 이지한 군은 어떤 아드님이었을까요.
조미은 아들이 그리 유명하지는 않습니다. 유명해지려고 그러던 찰나였지요. 지한이는 10월 28일 경주에서 촬영이 있어서 새벽 6시에 집에서 출발해 12시에 경주에 도착해서 촬영을 마쳤고요, 또다시 6시간 걸려 새벽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해서 겨우 한숨 돌릴 수 있었습니다. 또 다음날인 10월 30일에 촬영이 있었기 때문에 참사 당일인 10월 29일 단 하루 시간이 있었어요. 친구들을 비롯해 그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을 만나면서 이태원에서 핼러윈 축제도 보고 밥도 먹을 겸해서 그날 오후에 집을 나섰습니다.
원래 검소해서 자기가 무슨 옷을 입는지, 무슨 색깔의 옷을 입는지, 옷이 구겨졌는지 안 구겨졌는지 신경도 안 쓰고 다니는 아이라 제가 와이셔츠와 바지를 정성껏 다려서 입혔습니다. 축제에 가니 옷이라도 말끔하게 입고 가기를 바랐던 것이죠. 밥은 먹는 둥 마는 둥 했습니다. 원래도 하루에 한 끼밖에 못 먹었어요. 화면에 얼굴이 부어 보일까, 살쪄 보일까, 제대로 먹은 적이 없는 것 같아요. 뭐 하나라도 먹을라치면 헬스장에 가서 운동하고 몸무게를 체크하곤 했습니다. 엄마로서 보기에도 안타까운 생활을 하고 있었지요. 그래서 10월 29일 하루만 정말 즐겁게 정말 맛있는 거 먹고 오기를 바랐습니다.
신발끈이 풀어져 있었는데 키가 크다 보니까 구부리기가 어렵다면서 “엄마, 신발끈 좀 매주면 안 돼?” 그러더군요. 그날따라 제가 그동안 한 번도 매보지 않은 신발끈을 매줬더니 지한이가 하는 말이 “엄마 신발이 자꾸 벗겨져서 나 이태원 갔다 와서 신발을 하나 사야겠어.” 인터넷에서 35,000원 주고 산 구두였어요. 그래서 이번에는 정말 이름있는 부츠를 사주고 싶었거든요. “그러면 갔다 와서 나랑 부츠 사러 가자.” 그렇게 약속한 것이 마지막 대화였고, 그날 마지막 본 모습입니다.
이영숙 정말 안타깝습니다. 아드님에 대한 참사 소식은 언제 접하셨는지요.
조미은 10월 30일 새벽 0시 32분경 경찰관에게서 전화가 왔어요. 이지한 군 아빠가 맞냐고요. 맞다고 했더니 지한이가 지금 이대서울병원 응급실에 누워있다는 거예요. 그때까지 저희는 이태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 못했어요. 진짜 지한이가 맞나요? 그럴 리가요. 왜 지한이가 응급실에 있나요. 많이 다쳤나요? 사망 소식을 전한 경찰의 목소리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천 번 만 번 물은 것 같았어요. 그 시간에 부랴부랴 운전하고 새벽 1시에 도착했는데 이대 서울병원의 응급실에 들어가 보니 키가 멀대 만한 남자애가 너무나 예쁜 얼굴로 누워있었습니다.
믿을 수 없었죠. 믿고 싶지도 않았고 이태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상태에서 사망 선고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몸에서 온기가 느껴졌어요. 그래서 제가 그 아이의 입에 대고 인공호흡을 했어요. 바람을 후 ̄하고 불어넣었는데 마치 텅 빈 관으로 숨소리가 통과하듯이 텅 소리가 났어요. 그때 직감했죠. 아, 이거는 산 사람의 숨소리가 아닌데. 그제야 제 아이가 정말 하늘나라로 간 건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고 엉엉 끌어안고 울었어요. 눈을 반쯤 뜨고 입도 벌리고 있더라고요. 무엇이 그렇게 한 맺힌 사연이 많았는지 저는 느낄 수 있었지만, 눈을 뜨고 간 아이 모습이 더욱 절망스러웠습니다.
이영숙 당시 병원 상황도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을 텐데요.
조미은 경찰관이 검시를 해야 한다고 응급실에서 빨리 나가래요. 그래서 구걸했어요. “5분만 더 보게 해주면 안 됩니까, 온 지 10분도 안 됐어요.” 그렇게 큰소리로 구걸했더니 마지못해 ‘그러면 5분만, 정확히 5분만 더 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5분 동안 그 아이를 만져봤습니다.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와이셔츠, 팬티, 양말, 바지를 구석에 던져 놨더라구요. 와이셔츠는 가위로 찢긴 상태였어요. 지금도 그 모습이 잊혀지지 않고 너무 슬픕니다. 지한이 옆에 옷을 담는 투명 비닐이 있었어요. 누가 봐도 옷을 담으라고 놓여 있는 비닐이었거든요. 근데 왜, 왜, 옷을 찢어서 구석에 그냥 던져버린 것일까요. 참을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어요. 그런 걸 따지기에는 너무나 심각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약품 냄새가 심하게 많이 났어요. 얼굴에서 머리에서 무슨 검진을 했길래 이렇게 심한 약품 냄새가 나지? 그때는 그냥 그저 그러려니, 뭘 그냥 했겠거니 했는데 다음날까지도 제 옷에서 제 머리에서 제 얼굴에서 그 약품 냄새가 나는 거였어요. 무슨 검진을 했을까, 이 아이에게 어떤 짓을 했을까 생각만 하고 있었죠. 그런데 경찰이 또 그러더라고요. 마약 의심이 있으니 부검을 실시할 수도 있다. 지한이 아빠가 펄쩍 뛰었어요. 무슨 부검이냐고, 애가 죽어서 돌아온 것도 억울한데 부검이라니, 어디서 그딴 소리를 하느냐고 소리를 질러서 보냈다고 합니다. 검사는 장례식장으로 찾아왔죠. 볼 게 있다고. 아이의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고. 저희는 같이 있지 못했어요. 냉동실에 들어있는 그 아이를 꺼내서 어떤 짓을 했는지 보지 못했습니다. 우리보다 더 심한 소리를 들으면서 시체를 인계받은 가족도 많습니다. 158명의 젊은이와 지한이는 그렇게 떠났습니다.
이영숙 네, 그 참담함이 그대로 느껴져서 대담을 이어가기가 정말 힘든데요, 모든 유가족이 고스란히 겪은 고통이었을 겁니다. 오늘이 2023년 1월 28일이니 10ㆍ29 참사로부터 만 3개월째 되는 날입니다. 그동안 고인들의 면면이랄지 정보랄지, 유가족들 간에 공유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힘드시겠지만 그 부분에 대해서도 말씀 부탁드립니다.
평범한 어머니에서 투사로
조미은 네. 참사 초기에는 영정과 위패도 없는 곳에서 묵념하는 대통령과 국무총리, 장관, 여러 인사들을 화면을 통해 보게 됐어요. 이름도 없이 158명이라는 숫자로만 기억되는 고인들 대신 꽃에다가 조문하는 어이없는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랐어요. 이후 녹사평에 분향소를 차렸습니다. 손으로 잡을 수도 없고 품에 안을 수도 없는, 마지막에 세상을 뜬 고등학생 재현이까지 159명의 젊은이들 사진이 저 끝에서 이 끝까지 진열되었습니다. 한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많은 아이들입니다.
자식을 가진 부모님들은 다 그러신 것 같아요. 네 자식이 내 자식이고 내 자식이 네 자식이고 네 아들딸이 다 나의 아들딸들이다, 그런 기본적인 생각을 다 갖고 계신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거기에 있는 아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았습니다. 교사, 변호사, 쌍둥이 형을 잃은 동생, 미국의 유명 대학에서 수학하고 음반까지 발매한 음악가, 패션 디자이너, 외국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 등 미래가 촉망되는 아이들이 거기 사진 속 주인공들이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지한이의 죽음만 억울한 줄 알았어요. 어제 첫 방영된 <꼭대기의 자리>라는 작품에서 조연이었고, 다음 작품은 MBC의 주연을 따놓은 상황이었습니다. 억울했죠. 그런데 다른 아이들에 대해 알면 알수록 더 분통함을 느꼈습니다. 그때부터 결심했어요. 지한이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 159명의 아이들을 위해서 앞장서서 진실을 규명하고 책임자를 처벌하는 일과, 아이들이 왜 그 골목에서 각자의 집으로 돌아올 수 없었는가를 정확히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지 않고는 잠을 잘 수도 없고, 눈을 뗄 수도 없고, 절대로 그냥 지나갈 수도 없어서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사연을 한겨레에 기고하고 있습니다. 한겨레신문도 많이 봐주십시오.
이영숙 네, 알겠습니다. 지한이 어머니라는 개인으로서, 또 조미은이라는 공인으로서 대내외적으로 여러 가지 일들을 해오고 계시는데요, 그럴 때마다 계속 상처를 헤집는 일들도 생겨날 것 같습니 다. 어떻게 견디고 계시는지요.
조미은 10월 29일 이전과 10월 29일 이후는 제게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완전히 반대되는 삶이 되었습니다. 10월 29일 전에는 저는 정말 얌전한 엄마였습니다. 제가 TV에서 소릴 지르고, 유튜브에 이상한 얼굴로 나와서 원래 그런 줄 알고 계시죠? 저는 가정주부였고, 지한이에게 다이어트 음식을 해주던 너무나 평범한 엄마였습니다. 그러나 10월 29일 이후에 저는 결심했고, 지한이의 영정사진을 보며 매일매일 다짐합니다. 너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나는 오늘부터 투사가 될 것을 결심한다, 지한아, 내가 그 골목에서 이유 없이 죽었다면 너 역시 나처럼 엄마의 죽음을 밝히기 위해서 앞장섰을 것이다.
저희는 그런 가족입니다. ‘옳다고 생각하면 행동으로 옮기자’가 우리의 가훈이거든요. 그러니 저는 얼마나 더 다짐해야 하는 걸까요. 친정엄마도 병으로 보냈고, 동생의 남편은 백혈병으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자식을 먼저 보낸다는 슬픔은 글쎄요, 어떤 언어로 표현할지 모르겠습니다. 거기에 걸맞은 슬픔을 표현하는 단어가 있으면 좀 알려주십시오.
누룽지만 먹다가 건더기 있는 걸 먹으면 소화가 되지 않아 며칠을 고생합니다. 오른쪽 갈비뼈 밑에 간이 있다고 하더군요. 간은 죽을 때까지 아픔을 못 느낀다고 하는데 왜 저는 매일매일 그 부분이 쑤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가슴은 또 왜 벌렁벌렁 매일같이 울분으로 가득 차 있는지 알 수가 없어요. 마스크를 쓰고 말하기도 어렵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그런 상태로 살고 있습니다.
이영숙 평범한 어머니에서 투사 어머니가 되지 않을 수 없으셨군요. 더 큰 위기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조미은 지한이 아빠와 저는 자살 시도를 두 번 했어요. 11월 1일에 지한이 발인식을 하고 약 한 달 후였습니다.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생각한 지한이 아빠가 12월 2일에 핸드폰을 끄고 사라진 것입니다. 112에 신고해서 전화추적으로 동네 뒷동산으로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남편의 인상착의만 되풀이해서 물을 뿐 어느 경찰관도, 어느 소방관도 제 남편을 구하기 위해서 뛰는 사람은 없었어요. 백발이라 멀리서도 보일 테니 먼저 나를 태워 달라고 애원하다시피 했어요. 그랬지만,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만 하더군요.
저의 추적 장치를 통해서 그곳에 도착했어요. 그런데 경찰관 두 명이 따박따박 걸어다니며 주차장을 뒤지고 있었어요. 제가 너무 답답해서 소리쳤어요. 뛰라고, 당신의 아버지가, 당신의 부인이 자살 시도를 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걸어갈 수 있겠습니까, 제 남편이 자살하러 갔다고요! 제발 뛰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저는 다른 경찰관의 손을 잡고 뒷동산으로 마구 뛰어 올라갔어요. 같이 뛰자고요. 아니나 다를까, 제가 큰소리로 ‘지한이 아빠’라고 외치는 소리를 들었는지 그 산꼭대기에서 전화를 했더라구요. 나는 이제 그만 살고 싶으니 미안하다, 너희 둘을 먼저 두고 가는 게 정말 미안하다. 저는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나도 가고 싶지만 자기와 딸 때문에 못 가고 있는 건데 너무나 심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작년 생일 때 사준 지한이의 슬리퍼를 신고 맨발로 산꼭대기에 있었어요. 어렵게 찾아서 내려왔죠.
또 한 번은 자유로에서 우리 둘이 함께 가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런데 제 딸아이 생각이 나서 도저히 저 아이를 혼자 두고 갈 수가 없어서 ‘아, 죽는 것도 내 맘대로 할 수 없구나, 너무 힘이 드는구나’하고 좌절했습니다. 그런데 키 183에 근육질 몸을 가졌던 지한이와 158명의 희생자는 그 좁은 골목에서 압사를 당할 때 얼마나 고통스러웠던 것일까, 내가 내 목숨조차도 끊지 못하는 이런 상황에 숨을 못 쉬어서 가던 그 애들의 고통은 그 어떤 것이었을까 너무나 참담했습니다. 숨을 쉬지 못해서 압사당하던 그 순간 지한이가 생각했던 마지막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저였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엄마, 엄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금 우리 가족을 비롯해 유가족들의 삶은 정신과에서 처방한 신경안정제 없이는 살 수가 없습니다. 약을 끊으면 손을 덜덜덜덜 떨 정도로 너무나 참담한 나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게 현재 유가족들과 저의 삶입니다.
이영숙 유가족 모두가 얼마나 힘든 나날을 보내고 계신지 알 것 같습니다. 참사 이후 12월 10일에 유가족 협의회가 창립되었는데요, 고 이지한 군의 아버지 이종철 씨께서 대표로 뽑히셨습니다. 유가족협의회의 구성 과정과 활동 상황 등을 듣고 싶습니다.
유가족협의회 구성 과정과 활동 상황
조미은 유가족협의회를 구성하게 된 계기가 있었어요. 협의회 구성 이전에 유가족 20여 명이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에 면담 신청을 했어요. 그런데 두 곳의 의원들 반응이 너무나 천차만별이었습니다. 더불어민주당에 갔을 때는 무언가를 해주고 싶어 했고, 또 못 해주는 일도 있어서 질문이 많았는데, 국민의힘 간담회 때 들어갔더니 얘기를 듣다가 자리를 떠나서 1시간 이상 오지 않았던 분도 있었고, 졸거나 핸드폰을 몇 시간째 위아래로 올리면서 저희를 쳐다보지 않는 그런 여자분도 있었어요.
그중에서 가장 잊지 못하는 분이 한 분 있는데 정진석 의원입니다. 그분이 제게 그러더라구요. “지한이 어머니, 저희 애가 지한이를 무척 좋아했습니다. 남의 일 같지 않군요.” 눈물을 흘리더라구요. 진심으로 받아졌어요. 그 순간에는 ‘아, 국민의힘이라고 해도, 정부의 편이라고 해도 사람이 당한 일을 같이 느끼고 있구나, 참 고맙네.’ 그런 생각을 했거든요. 마지막에 제 손까지 잡으며 어떻게 해서든지 무엇을 해서든지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겠다고 하더라고요. 고마웠죠.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다음날 기자회견 때 그분이 하신 말씀이 저희 유가족 가슴에 칼을 꽂더라구요. “어제 모였던 분들이 유가족 전체를 대변하는 건 아닙니다.” 이렇게 기사를 내셨더라고요. 그러면 어제 우리를 만나서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던 그 사람의 눈물은 어떤 눈물이었을까. ‘지한이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마치 내 생각을 공감해주는 듯 흘리던 그 눈물은 어떤 눈물이었으며 그 음성은 어떤 음성이었을까.
우리는 깨달았죠. 아, 우리가 정정당당해지려면 유가족협의회를 꾸려야겠다. 행안부에 먼저 유가족 연락처를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개인정보보호법 때문에 줄 수 없다고 하더군요. 개인정보보호법, 네, 웃으면서 울어야겠어요. 국민을 향해서는 마치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 양,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데 우리가 대답하지 않는 양 말하지만, 그랬다면 명단이라도 줬어야죠. 행안부에서는 한 명의 정보도 주지 않았고, 한 번의 연락조차 없었습니다.
지금 협의회에는 희생자 107명의 유가족 210명이 모여있습니다. 제가 1번이었고요, 1번이 210번이 될 때까지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과 시민단체(10ㆍ29 이태원 참사 시민대책회의)의 도움을 얻어 저와 지한이 아빠가 이리저리 발품을 팔고 가족 하나하나를 찾아 전화번호를 뿌리면서 미친 듯이 뛰어다녀서 얻은 결과입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게 유가족협의회입니다. 협의회를 구성하게 된 계기가 정진석 의원님 ‘덕분’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이영숙 유가족협의회 구성 후에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을 텐데요, 대내외적으로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요.
조미은 좀 전에 말씀드렸던 대로 구성 전에는 당신들이 유가족 전체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니 내가 당신들의 말을 굳이 깊이 새겨들을 이유가 없다고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협의회라는 대표성이 있으니 우리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시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어요. 협의회 안에는 대표도 있고 임원도 있고 또 생각을 공유하고 슬픔을 나누는 210명의 유가족이 모여있습니다.
이런 유가족들을 위해 보건복지부에서 정신과 트라우마센터를 지원한다고 했습니다. 제 딸을 그곳에 보냈습니다. 엄마 아빠가 자살 시도를 하고 있으니 제 딸의 마음은 오죽하겠습니까. 엄마 그냥 우리 여기서 끝내면 안 될까. 엄마, 그냥 우리 셋이 여기서 조용히 사라지면 안 될까. 엄마, 나는 아빠가 그렇게 앞장서는 게 너무 위험해서 싫어. 엄마가 방송 타면서 악성 댓글에 시달리는 게 너무 참을 수가 없어. 우리 그만 여기서 끝내요. 그래서 지한이 누나를 트라우마센터에 보낸 것인데요, 1시간 동안 상담을 하고 나온 제 딸이 너무나 침울한 얼굴로 더이상 상담을 못 받겠다고 하더군요. 앵무새처럼 자기 심정을 상대방에게 얘기하는 꼴이 됐고, 듣는 분은 공감하기보다는 ‘글쎄요, 제가 그런 일을 겪어 보지 않아서 잘 이해되지는 않습니다.’라고 했다는군요. 거짓말이라도 ‘당신의 심정을 이해합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라도 그랬을 것 같아요.’라고 말하는 게 위로가 아닐까요. 딸 애는 트라우마센터에 가는 건 의미가 없다고 했습니다. 기자님들이 많이 도와주시면서 유가족협의회의 이름으로 이런 사연들을 하나하나 올리고 있습니다.
이영숙 유가족협의회라는 대표성을 가지고 일하실 수 있다니 힘이 나시겠습니다. 이태원 참사와 관련된 기사들을 좀 찾아봤는데요, 4ㆍ16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는 물론이고, 2001년 아카시시 육교 사고를 당한 일본의 아카시 유족들도 이태원 참사의 유족들에게 연대의 손길을 보내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조미은 네, 맞아요. 이태원 참사에만도 14개국의 희생자 26명의 외국인이 있습니다. 이 참사는 대한민국만의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전 세계가 참여해서 같이 참사의 진실과 진상을 규명하고, 또 책임자 처벌을 할 수 있도록 연대해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정부가 대사관에도 기자를 파견해 이 참사가 이슈화되는 걸 막고 있다고 저는 들었고요, 또 외신 기자들조차도 어떤 커다란 이슈가 없는 한은 그렇게 깊은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생각했죠. 아, 영어로 49재에 관해서 한 번 발표해보자. 그곳에 와있는 외신 기자들에게 영어로 바로 직역될 수 있도록 한 번 발표해보자. 그래서 시도를 했고, 또 며칠 뒤에는 외신 기자회견 간담회를 만들어서 저희 부모들이 다 영어로 발언했습니다. 그런데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이제는 세계 각국에 계신 시민단체 여러분들과 협동해서 이 참사의 진실을 함께 풀어가고자 하는 것이 앞으로의 계획입니다.
이영숙 유가족협의회의 역할이 유가족들 간의 소통을 넘어 세계와의 연대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많은 유가족이 투사가 될 수밖에 없는 필연적 과정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런데 국내 상황은 별다른 진전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국정조사도 있었고 특수본 수사도 있었는데, 그 결과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나요.
국정조사와 특수본 수사, 이의 있습니다!
조미은 국정조사와 특수본 수사에 대해서는 정말 할 말이 많은데요. 55일간이었다고는 하지만, 여러 기관의 보고와 현장 조사, 청문회, 그리고 유가족 공청회 등을 따져보면 실제로는 한 10일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주 이상한 일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유가족이 국조특위 간담회(‘용산 이태원 참사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한 국정조사 특별 위원회 유가족 간담회’의 약칭)를 신청해서 국회에서 열렸는데요, 어떻게 국민의힘 의원들이 하나도 참석하지 않을 수가 있나, 이게 여야를 가릴 문제가 아닌데, 젊은 아이들이 어떤 도움 하나 받지 못하고 간 참혹한 현실을 두고 여당이 참여하지 않은 이유를 저는 찾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울부짖으면서 ‘국조특위에 돌아와라, 국회의원으로서 직무를 다하라’라고 해서 겨우겨우 다시 국정조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시다시피 여당 국회의원 7명이 돌아가면서 닥터카를 탔다는 신현영에 대해서만 집요하게 질문하는 거예요. 신현영에 대해서 말하지 말라는 게 아니었거든요 한 명이 말했으면 6명은 다른 의견을 물어봤어야죠. 다른 질문을 했어야죠. 그러면 우리들의 억울함과 우리들의 의문점에 대한 7가지 질문이 되는 건데 7명이 돌아가면서 신현영에 대해서만 질문했기 때문에 제가 너무 억울해서 그만하라고 소리 질렀습니다. 그들이 그 많은 월급을 받으면서 저 자리에 앉아서 저런 짓을 하는구나 싶으니까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그로 인해 국정조사는 파행이 되고 말았지만, 그들은 제 항의의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고 “(신현영과) 같은 편이네,”라고 말하면서 마치 유가족이 야당과 한편이 되어서 여당을 압박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어요. 마지막 공청회 때 유가족들이 울면서 하는 이야기를 듣고 전주혜 의원과 김형동 의원이 일어나서 머리를 숙이면서 특히 전주혜 의원이 ‘앞으로 잘하겠다, 너무 슬프고 죄송하다’고 눈물을 흘리더라고요. 아 그래서 정말 엄마로서 부탁했는데 마음이 전달됐구나, 또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했어요. 정진석한테 속았는데 또 전주혜한테 속았다고 확신한 건 국정조사결과보고서를 채택하는 다음 날이었어요. 가습기 살균제하고 어떤 그것(삼풍백화점 붕괴사건)밖에는 국정조사결과보고서 채택이 되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세월호에서도 채택이 되지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그렇지만 어제 저희가 그들의 눈물을 보았기 때문에 잘 될 거라고 믿었어요. 그런데 변호사님한테서 전화가 왔어요. “어떡하죠. 국정조사결과보고서가 채택이 안 될 것 같습니다. 대표님 좀 와서 도와주세요.” 저희는 신호를 위반하고 차선을 위반하면서 국회에 도착했어요. 아니나 다를까, 전주혜 의원은 딴소리하고 앉아있고, 조수진 의원은 청담동 술자리 이야기를 하고 있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청담동 술자리랑 이태원 참사랑 국정조사결과보고서 채택이랑 무슨 상관이 있냐고, 너 인간이 맞냐고 그랬어요. 엄마로서 부탁하지 않았느냐 그랬거든요. 특히 전주혜 의원에게 실망했습니다. “파행하세요, 파행하시라니까요, 민주당 의원들 좌석 수가 많지 않나요?” 이러며 파행되기를 조장하고 있더라고요. 저는 조수진이 들어가서 잠근 방문을 두드리면서도 소리쳤습니다. “엄마로서 부탁했지 않느냐, 숫제 지한이를 살려내고 국정조사 하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마라, 걔만 돌려주면 너희들은 할 일이 하나도 없으니까 그렇게 딜을 하자.” 돌아오지 않는 아이이기 때문에 제가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었더군요.
큰일 났구나, 안 되겠구나! 지한이 아빠는 거기서 벽을 치며 통곡했고 국회 바닥에 쓰러져 119에 실려 갔어요. 지병이 있던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약을 하나라도 먹고 있던 사람이 아니에요. 그런데 혈압이 170이 넘었습니다. 응급실에 도착한 지한이 아빠는 혈압이 150으로 떨어졌지만 안정된 상황은 아니었는데 더이상 그곳에서 누워있을 수가 없다고 해요. “이 상황에서 내가 링거를 맞고 이곳에 어떻게 누워있냐. 집으로 가고 싶다.” 저희의 삶은 이렇습니다. 국정조사, 간담회 등 끝까지 어느 것 하나 만족하지 못하는 슬픔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영숙 국정조사가 끝났지만, 여전히 진상규명도 미완이고 또 윗선에서 책임져야 할 사람들에 대한 어떤 조치도 취해지지 않고 있는 그런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유가족과 우리 시민사회가 해야 할 일들이 있을 텐데요. 그 진상규명과 재발 방지를 위해서 어떤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조미은 진상조사는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정말 이해되지 않는 게 있습니다. 대통령은 책임이 있는 자에게만 책임을 딱딱 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국무총리와 행안부 장관과 대통령이 왜 죄가 있지 않은지를 알 수 없다는 거예요.
최근에 유가족 모두가 특수본 결과통지서를 받았습니다. 9장이었어요. 그런데 모든 항목이 다 혐의점 없음, 불송치, 뭐 이런 문구가 적혀 있는 거예요. 그들이 다중운집 위험에 대한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의무가 없고, 대규모 인명 피해 발생에 대해 예견할 수 없었으며, 이 인명 피해를 막을 가능성이 없었기에 무혐의라는 겁니다. 제가 다 외울 수 없어 좀 적어 왔는데요, 결과통지서의 맥락은 재난안전 총괄 부처의 장이 다중운집 위험에 대해 구체적으로 주의해야 할 의무가 없었고 대규모 인명 피해 발생을 예견하거나 막을 가능성이 없었다, 즉 대한민국에서는 재난안전법상 규정된 위험에 대해서만 주의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고, 또 경찰청장은 다중운집행사 안전관리에 대한 의무가 없었으며, 관련 내용 보고받은 바가 없어 예견할 수 없었다는 것이죠. 그러면 또 서울시 자치경찰위원회는 다중운집 행사 안전관리에 대한 사무 의무가 있으나 보고받지 않아 몰랐으니 죄책이 없다는 건데, 사람들이 112에 전화해서 경찰청, 서울청, 용산서, 이태원파출소에 살려달라고 했지, 서울시 자치경찰에 전화해서 살려달라 한 게 아니잖아요. 8시 53분에 울려 퍼진, 가장 심각한 신속 대응을 요구하는 코드제로는 자치경찰위원회가 발령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특수본 수사 결과에서 서울시 자치경찰위원회는 법령상 다중운집 행사 안전관리 사무에 대한 지휘 감독권은 있으나 핼러윈 대비 계획이 적절한 시간에 보고되지 않아 지휘감독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는 것인데 이는 법령상 의무는 있지만 보고를 받지 못해서 몰랐기 때문에 아무 잘못이 없다는 것입니다. 경찰청장도 보고받지 못해서 몰랐으니 아무 잘못이 없다는 건데, 혹시라도 상부로 보고하지 말라고 지시한 건 아닐까요? 몰랐으면 죄책이 되지 않으니 상부에 보고하지 말라고 지시했을 수도 있겠죠. 보고받지 못했다, 보고하지 않았다, 들은 적이 없다면서 모르쇠로 일관하는 이런 현실에 대해서 그들은 저희 유가족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 모두에게 사과하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럼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도 ‘나는 당신에게 보고하지 않았고, 나는 당신에게 보고받은 일이 없으니, 나는 책임이 없다’고 하면 모든 게 무사통과가 되겠네요. 이런 식이라면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는 게 아닐까요.
어떤 책임도 없음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그들은 그 아까운 종이 9장을 결과통지서라는 이름으로 우리에게 보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앞으로 일어날 사태들에 대해 공직자들이 책임질 일을 없애자는 의도를 담은 것이니, 이를 국민이 더 정신을 차려 경계하고 감시해야 한다는 경각심을 일깨우는 메시지로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이영숙 재난 상황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지만, 현실에서는 늘 예기치 않은 재난이 발생하는데요, 공직자들이 책임지지 않는 것이 얼마나 더 큰 사회적 문제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잘 짚어주셨습니다. 재난 상황에 이어 늘 2차 가해 문제가 불거졌습니다만.
2차 가해자들의 민낯
조미은 저희 유가족의 용기를 잃게 하고 2차 가해를 하는 사람들이 바로 제일 위에 계신 대통령, 그다음에 국무총리, 행안부 장관, 이런 분들입니다. 얼마 전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한 49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대통령은 그다음 날도 아니고 전날도 아닌, 바로 그날 크리스마스트리에 점등식을 했을까요. 왜 그날 술잔을 샀으며, 왜 그날 떡을 주민들에게 돌렸을까요. 아이들을 추모하고 안전한 나라로 갈 수 있게 명복을 빌었던 하필 그날이었을까요. 유가족들 보라고 그랬을까요. 누가 시켜서 하는 건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해가 안 갈 때가 많습니다. 한동훈 장관에 대해서는 그렇게 끔찍이 애정 어린 말을 하면서,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간 아이들에 대해서는 사진도 위패도 없는 곳에서 묵념하는 사람들입니다. 조계사에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라고 얘기한 건 기사화하기 위한 사과였을까요, 왜 행안부장관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면서 비행기를 타는 걸까요, ‘네 옆에 내가 있으니 걱정말라’고 저희에게 보여주는 암묵적인 시위였을까요.
어이가 없습니다. 좌동훈 우상민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 두 사람만 지키면 되는 건가요. 국민의 숨소리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듣겠다고 했고 국민의 생명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겠다고 대통령이 되기 전에도, 된 후에도 발언했잖아요. 그런데 신년 행사 말씀에 왜 이태원 희생자들의 명복을 비는 얘기는 하지 않았을까요. 대통령이 그 자리를 유지하려면 공감이라는 단어를 배워야 하고, 공감이라는 단어를 배우지 못했다면 그 누군가는 그에게 가르쳐서라도 느끼게 해줘야 하지 않을까요. 진정한 추모의 시작은 공감일 테니 말입니다. 지금 이태원 참사에 대한 여당의 인식이 그 연장선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영숙 의당 국민의 아픔을 위로하고 공감해야 할 대통령 이하 공직자들로부터 받은 상처와 배신감이 그 무엇보다 더 크셨겠습니다. 혐오 세력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조미은 녹사평에 이태원 참사 시민분향소가 있고요, 분향소 가까이에 신자유연대라는 단체가 텐트를 치고 있습니다. 김상진이라고 이 세상에 있는 줄도 몰랐던 사람이 주동자인데요, 어느 날 제가 분향소에 있는 걸 알았는지 어떤 여자가 그 텐트에서 나오면서 제게 ‘시체팔이 배우팔이 엄마’라고 비아냥거리고는 다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전에도 매일 방송을 틀어놓고 확성기에 온갖 욕설과 모욕을 일삼는 그들의 행태를 참았습니다. 그들의 목적은 유가족이 흥분하면서 자신들과 몸으로 부딪치는 장면들을 카메라에 담아 유튜브에 이슈화시키는 거라고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참고 참았는데 저를 겨냥한 그 말은 정말로 참을 수가 없더라고요. 제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면서 너 나와보라고, 너도 인간이냐, 너도 엄마냐! 그리고는 그만 119에 실려가 8일 동안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후회했지요. 내가 그때 참았으면 8일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까…. 8일 내내 진통제를 먹었습니다. 약을 먹으면 조금이나마 걸어 다닐 수 있었지만, 약 기운이 떨어지면 다시 눕게 되는 일이 반복되었습니다. 감기도 앓은 적이 없고, 코로나에 걸리지도 않은 정말 튼튼한 사람이었는데 그 사람 하나 때문에 8일을 놓쳤다는 사실이 저를 너무 괴롭혔습니다. 다시는 엮이지 말아야겠다, 그런 말을 듣더라도 다시는 흥분하지 말아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영숙 위로를 받기만 해도 유가족에게는 힘든 나날일 텐데 정부와 혐오 세력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현실이 참담합니다. 그와 반대로, 그동안 힘이 되셨던 일이 있다면요?
공감과 지지의 힘
조미은 저희 유가족들이 원하는 게 거창하지 않아요. 그냥 내 애들을 다시 주면 좋겠다는 게 우리 부모들이 가장 하고 싶은 말이에요.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 이상 뭘 바랄 게 있을까요. 이 불가능한 꿈처럼 우리가 힘을 얻는 것도 큰 데서 오는 게 아니에요. 녹사평역 시민분향소에 많은 분이 오셔서 저희에게 힘을 주고 계십니다. “지한이 엄마 지금처럼 하세요, 지금처럼 하시면 됩니다, 저희가 다 보고 있어요, 나타나서 소리치지만 않는 것이지 뒤에서 다 지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해 주실 때 정말 많은 용기를 얻습니다.
며칠 전엔 명동성당엘 갔는데요, 신부님이 이런 말씀과 기도를 해주셨어요. “공감하지 못하는 자는 AI 로봇과 다름이 없으며, 그는 인간이 아니고, 이상한 사람입니다.” 유가족의 슬픔에 공감하지 못하고 우리에게 상처를 주던 그 숱한 사람들이 떠올랐습니다. 그 큰 성당, 그 많은 성도 앞에서 바른말을 해주시는 신부님으로부터 저는 진정한 위로를 받고 행복했습니다. 또 집에 올 때 택시를 탔는데요, 기사님이 저를 알아보시고 말씀하더라고요. “지금 대한민국이 반으로 갈려져 있어요, 어머니. 그렇지만 옳고 그름을 생각할 줄 아는 국민이 더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자식 팔아 장사한다’며 ‘나라 구하다 죽었냐’라고 유족과 희생자들을 모욕하는 글을 페북에 올린 창원시의 김미나 국민의힘 시의원의 제명이 부결되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시더라고요. 창원시의회 절반 이상의 의석을 가진 국민의힘이 반대표를 던졌기 때문이었다는 거예요. “그래도 어머니, 힘내세요. 어머니를 지지하는 국민이 더 많습니다. 이태원 참사를 정부의 잘못이라 인식하고 계신 분이 훨씬 많으니 용기 내십시오.” 이렇게 응원해주시더군요.
이런 분들 덕분에 ‘조미은은 저렇게 떽떽거리는 사람이구나’, 또 ‘저 여자 또 나와서 소리치는구나’, 아니 그보다 더 심한 댓글에도 이젠 신경 쓰지 않습니다. 국민의 반 이상은 다 저와 유가족 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영숙 공감과 위로는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정말 큰 것이군요. 이제 마지막으로 여기에 참석한 시인, 작가들과 시민사회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조미은 제가 두서도 없이 너무 긴 시간 말씀을 드렸는데요, 꼭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한국작가회의의 여러 시인과 작가님들께서 이태원 참사와 희생자들에 관해서, 그리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등에 관해 많은 글을 써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감하지 못하는 대통령이 있는 나라에서는 회초리로 때려줄 수 없으니 말과 글로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사람이 느낄 수 있건 없건 간에 바른말을 좀 많이 해주십사 부탁드리겠습니다.
대한민국의 지식인들, 교수님들, 시인과 작가님들, 종교계에 계신 분들, 변호사분들, 검사분들, 판사분들께도 제가 다 찾아다니면서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욕도 할 수 있잖아요. “윤땡땡(윤○○), 그땡땡(그○○), 세땡땡(세○○)아, 너 그 자리에 있을 자격이나 있나, 다시 한 편 국민 투표 붙여 볼까.” 저는 엄마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시인이기 때문에, 작가이기 때문에, 변호사이기 때문에 이태원 참사로 먼저 간 아이들을 위해서 정부를 비판해주시고, 아이들의 영혼을 같이 추모해 주시길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저희가 2월 4일 토요일에 광화문 북광장에서 이제 100일 된 아이들 추모식을 하는데요, 교회와 성당에 다니시는 분들도 차 대절해 오신다고 했거든요. 지한이 아빠가 “백만 명이 모여주세요.”라고 해놨는데 사실은 걱정이 됩니다. 진짜 그렇게 많이 와 주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말을 했을 거예요. 여기 계신 분들도 그날만큼은 좀 와주셔서 우리 아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봐주셨으면 하는 게 제 부탁입니다. 그렇게 해주시리라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영숙 조미은 씨께서 한국작가회의에 속한 시인과 작가들이 해야 할 중요한 지표를 제시해 주셨습니다. 계속 눈물 흘리며 말씀하시는 걸 보니 참사 희생자의 어머니로서 담대하지 않으면 이런 대담에 응하시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지만 저희에 대한 믿음으로 이 자리에 오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저희도 글로 응원하고 또 최선을 다해 행동으로 동참하겠습니다.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이영숙 | 1991년 <문학예술>로 시 등단. 2016년 <시와세계>로 평론 등단. 시집으로 『詩와 호박씨』, 『히스테리 미스터리』가 있음.
―《내일을 여는 작가》 2023년 봄호(한국작가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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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담 잘 보았습니다~
자식을 어이없이 보낸
부모와 형제자매가 어찌 살아갈수 있을지
가슴이 미어집니다~
그들은 아직도 하루하루가 지옥인데
세상엔
벌써 잊혀져 가는것이 안타깝네요~
그분들의 말씀을 잘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것만으로
선생님은 큰 일을 하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공감과 지지가 가장 훌륭한 우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