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로 한 대, 기타 한 대, 자전거 한 대
김귀영
-귀영아
-네, 전도사님
-사택에 심부름 좀 다녀올래
-네 전도사님
평소 자전거를 타고 다니시는 전도사님은 바쁘시다고 왕복 걸어서 30분이 걸리는 사택에 심부름을 시키셨다. 평소 전도사님을 잘 따랐던 나는 선택받았던 기분으로 사택에 부리나케 달려갔다.
아직 결혼하지 않았던 전도사님 댁에 가본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렜다. 나는 10대 후반 소녀이었기에 늘 궁금증을 자아내셨던 전도사님 집을 간다는 것은 말 할 필요가 없었다.
선망의 대상이었고 서울대 성악을 전공하셔서 목소리로 일단 소녀들을 제압하고 기타를 치고 포크송을 가르치던 전도사님을 뵙는 것 만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여고시절.
두꺼운 안경을 쓰시고 늘 교회에서 만나면 “어서 와라, 잘 지내냐”를 먼저 묻고 웃으며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던 분의 심부름은 유쾌한 일이었다.
발걸음은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며 도착해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깜짝 놀랐다. 집안에 옷가지 몇 개만 벽에 걸려있고 덩그라니 첼로 한 대만 있을 뿐 가재도구가 없었다. ‘이 분 서울에서 오신 분 맞아’ 서울대 성악과를 나오셨는데 이건 뭐지 싶었다. 결혼을 안 하셔서 그렇다고는 치나 개인물건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무리 둘러봐도 커다란 방안에 가재도구도 없고 음식을 해 먹는 것도 없었다. 밥이야 식당에서 해결하면 되지만 나의 기대는 실망스럽기도 하고 의아함 자체였다.
전도사님께 심부름한 물건을 전해드리며 “전도사님 집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어떻게 사세요? 라고 물었다. 그져 빙그레 웃을 뿐 ”녀석 별걸 다 신경쓴다“하시며 수고했다 라는 말을 하시고 주보작업을 이어가셨다.
전도사님은 늘 자전거를 타고 다니셨다. 좋은 자전거도 아니였다. 1986년쯤이니 차도 없었고 새벽예배 인도는 호소하듯 설교를 하셨다. 그 분은 우리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치셨다.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며 교회에 올 수 있도록 늘 응원해 주시던 분이었다.
그 때 국어선생님과 주보를 소책자로 만드셔서 노래도 싣고 성경이야기도 싣고 다양한 이야기거리들을 실어 꽤나 괜찮은 주보를 매 주 보게 해 주셨던 분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나의 선망의 대상 전도사님이 사라지셨다. 홀연히 분명 월요일에 뵈었는데 일주일 만에 사임하시고 어디론지 사라지셨다. 함께 하던 모든 분들도 어디로 가신지 알지 못했고 오리무중에 빠졌다. 물어 볼수도 없고 아는 사람조차 없었다. 우린 소문을 만드는 공장을 가동시켰지만 소문은 소문일 뿐 그렇게 홀연히 사라진 전도사님과 작별을 고했다.
그리고 나의 꿈도 조용히 사그라 들게 되었다.
몇 년이 지난후 제주도에 계신다는 소식과 플롯을 전공한 아리따운 아가씨와 결혼한다는 청첩장을 보았을 뿐 연락은 되지 않았다. 나는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었고 전도사님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양평에 있는 국수교회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 뵈었다. 그 때도 그 때의 일을묻지 않았다. 물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사를 했으니 교회를 알아봐 달라고 부탁을 드렸더니 가나안농군학교 개척멤버이기도 하고 많은 헌신을 하신 괜찮은 목사님이 담임하시고 목사님 아빠하고도 알고 지내시는 분이라며 방주교회를 소개받았다.
뭐 그러고 나는 나대로 결혼도 하고 아이들도 낳고 사느라 가끔 전화만 드릴 뿐이었다. 큰아이가 8살, 작은아이 7살 딸이 5살 때 남편을 데리고 교회를 방문하였지만 그때도 별 생각이 없었다.
요즘 그 분이 생각 나는 건 그 분이 왜 그만 두었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중앙교회에 담임목사를 내 보내야 한다는 일로 시끄러울 때 전화를 드렸다. 특별한 이야기는 없으셨는데 여수에 세미나차 와 있으니 기차를 타고 오라고 하셨다. 아침이나 같이 먹고 기차타고 다시 올라가야하는데 같이 가자고 하시며 우리 부부를 불렀다. 생각해 보니 바쁜일정도 있고 일행도 있었으나 위로차 우리 부부를 불렀던 것 같다.
나는 그 때 물었다. 왜 그ㅡ 때 홀연히 사라지셨는지?
대답은 간단했다. 그 때가 여름무렵인 것으로 기억하는데 담임목사님께서 12월까지 하고 다른 임지를 알아보라고 하셔서 ”아! 내가 필요 없구나“를 느끼고 바로 그 주에 사임을 하시고 홀연히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때는 핸드폰이 없으니 사라지면 연락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본인만 사라지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었고 소문도 없이 자진사의로 정리를 했다고 하셨다.
담임목사님과 있었던 이야기는 하지 않으셨다. 교회분열에 대해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라고 하시며 이렇게 흩으셔야 작은 교회도 살 수 있고 또 다른 하나님의 계획을 볼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느꼈다 ‘아 이것이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라는 것을......
목사님은 나의 정신적 멘토이시다. 서울대를 나와서 가난하게 태어난 소녀들을 위해 공장안에 있는 교회로 오셨을까?
늘 웃으시던 모습, 조용히 기도하시는 모습, 학생들이 힘들 때 조용히 어깨를 두드려 주시던 모습, 기타한대 메고 포크송을 가르치시고, 노래좀 하는 아이들 불러서 중창단 만들고 찬양인도할 때 두 소절만 불러도 모든 노래에 반주를 해 주시던 전도사님......
그 때 처음부르며 울었던 “뜻없이 무릎꿇는” 찬송가가 생각난다.
- 뜻없이 무릎꿇는 그 복종 아니요/ 운명에 맡겨 사는 그 생활 아니라/ 우리의 믿음 치솟아 독수리 날 듯이 /주뜻이 이뤄지이다 외치며 사나니
약한자 힘주시고 강한자 바르게/ 추한자 정케함이 주님의 뜻이라 /해아래 압박 있는 곳 주 거기 계셔서 /그 팔로 막아 주시어 정의가 사나니
가난한 전도사 한 사람이 많은 소녀들을 살렸다.
덩그러니 놓여진 첼로와 자전거, 기타 한 대는 소망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의 삶을 보여 주시기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었던 흔적을 내게 남기고 홀연히 거룩한척 사라지셨지만 나의 선생님이요 나는 그의 제자임이 뿌뜻하다.
왜냐하면 그분은 나를 제자라고 소개를 하기 때문에 제자라 감히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