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황량하기 이를 데 없고 볼품없는 저곳이 연밭이라고요?” 그림을 그리는 L이 믿지 못하겠다며 몇 번이고 되물었다. 누렇게 말라 꼬꾸라진
연꽃의 죽음 너머는 처음 본 듯하다. 넋을 놓았다. 상상도 못 했다며 휘둥그레진 눈으로 오래도록 응시하더니 종내에는 군더더기 떨궈 낸 삭정이
같은 눈으로 혼잣말을 흘린다. 온갖 꽃 중에 군자라 일컫는 연꽃의 향기와 덩굴지지 않고 진흙에 물들지 않으며 다붓하게 서 있는 품만 봐온
터라 적잖이 놀랐다고 거듭 말한다. 오늘따라 연의 대는 절반을 꺾어 진흙에 묻고 연밥 없는 잎사귀는 떨림도 없이 고꾸라졌다. 항암치료에
견디다 못한 여인이 머리카락 한올한올 다 빠지고 움푹 팬 모습으로 허공만 쳐다보는 꼴이다. 그러고 보니 연잎으로 그득하게 덮일 날이 머지않았는지
밭마다 연뿌리 수확이 한창이다. 푸른 잎사귀로 넘실거릴 새집을 준비하는 농부들의 손이 바삐 움직인다. 연꽃의 재생과 부활을 꿈꾸며 나는
오래전부터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보곤 하는 그림 한 점을 떠올린다. 혜원 신윤복이 비단에 수묵담채로 그린 ‘연당의 여인’이라는 작품이다.
술한잔을 걸친 날에는 하염없이 쳐다보며 혼자 놀기에 진수를 보이는 나를 보면서도 내가 나를 의아해하는 일이 잦다. 화면의 반을 연당蓮唐으로
채운 어느 후원 별당 툇마루에 여인이 홀로 걸터앉아 있다. 왼손에 긴 연죽은 아래로 늘어뜨리고 오른손에는 생황을 들고 해탈의 경지를 넘어 선
무아지경으로 연꽃에 넋을 놓았다. 가채머리 사부작 말아 올려 목단꽃처럼 정수리에 얹은머리 해놓고 좁은 소매에 짧은 저고리와 옷고름에, 가슴을
가린 풍성한 치마허리에 포리모리한 채색으로 물든 옷매무새가 단아한 듯 홀린듯하다. 작고 가녀려 보이는 발목을 감싼 버선코마저 미세한 감정이
묻어난다. 여인의 빼딱하게 벌린 두 발 놓임새와 앉음새를 보노라면 여염집 아낙은 아닐 게다. 치마폭이 거들떠 올라가서 흰 속곳가래가 깊숙이
드러난다. 일반 여염집 여자가 취할 수 있는 자세는 아니잖은가. 미루어 짐작건대 맵시의 여인은 필시 꽃 같은 전성기를 한참 지난 퇴기임이
분명하리라. 흐트러진 연잎과 볼그레한 연꽃이 핀 연당 가 툇마루에 앉아 옛일을 떠올리고 있나 보다. 한 자 두 치 긴 연죽의 은수복 대통에다
알맞게 눅진거리는 성천초를 그득 담고 엄지 끝으로 꼭꼭 눌러 몇 번을 말아 피우다 생황에 애끓는 심정을 닮아냈을까. 뙤약볕에 찾아오는 이
없고 곰방대도 생황도 제 아무리 곁을 지킨다한들 어찌 여인의 무료함을 달래주려나. 옛 시절이 화려한만큼 쓸쓸함도 배가 되는 걸까. 팔월 삼복이나
여전히 싱그러운 넓고 푸른 잎들 사이에 분홍 꽃망울을 터뜨리는 연꽃과는 대조적으로 여인은 잠시 수심에 잠긴 듯한 표정이다. 나른한 한낮 고요가
깔린 후원에 초점 없는 시선으로 상념에 잠겨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등짐장수들의 발걸음이 문지방을 닳도록 드나들었으면 뭐하랴. 앵두같은
입술도 낭만과 에로틱도 한 시절 건너가면 바래지는 것이 삶의 이치라는 걸 여인네는 몰랐는 겐지 것도 아니라면 일찌감치 물러나 연못가에 한 시절을
음미하며 유유자적 하는 겐가. 한때는 색정 넘치는 맵새에 박속같은 살결에 파고들었던 뭇남정네들을 떠올리는 겐가. 가지지 못할 사랑에 가슴앓이도
했을 것이며 젊디젊은 복사꽃같은 여인이 치고 들어와 마음으로 품었던 김초시 품에 와락 안길 땐 그녀인들 시샘하지 않았겠는가. 가슴으로 품을 수
밖에 없는 정인이라도 오는 날에는 버선발로 후원 뜨락까지 쫓아가 담장 너머로 고개 빼고 기다리기를 어언 수십 번에 사슴목이 저절로
되었으리라. 낭창낭창 달밤에 님 보내놓고 오월 밤꽃이 들이치고 소쩍새 울어예는 툇마루에 앉아 삭삭기 세 모래 별에 /나는 구운 밤
닷 되를 심 고이다/그 밤이 움이 돋고 싹 나야만 유덕하신 님 여의어지이다 달빛이 부서지도록 ‘정석가’를 읊조리다 소쩍새 울음이
사방으로 흩어지고서야 방으로 들었을 게다. 모래땅에 구운밤을 심어놓고 싹이 날 리도 만무하겠지만 그 만무함의 간절함 뒤에 혹여 싹이라도 날까
그리하여 덕행있는 님과 이별이라도 하는 날이 오면 어쩔까 애태우며 지센 밤들을 어이 어리석다 할 것이랴. 사방 일곱 걸음을 걸어가지 못하고
떼어놓는 걸음마다 연꽃이 피어나길 학수고대하며 여인이 청정한 걸음으로 피워냈을 그 연당 가에 앉고 보니 그곳이 연화장세계인 것을 여인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