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코다테 여행2 - 홋카이도 하코다테의 고료가쿠성 타워에 올라 성을 조망하다!
7월 4일 아침에 일본 혼슈 최북단 도시 아오모리 靑森(청삼) 에서 기차를 타고
해협 터널을 지나서 2시간만에....... 홋카이도 남단 하코다테
函館(함관) はこだて 에 도착해서는 전차를 타고 고료가쿠 성을 찾아 갑니다.
1853년 미국 페리 제독 은 중국으로 가는 중간기지 와 포경선 보급기지 를 얻기위해 구로후네
(黑船 흑선) 7척으로 대서양을 건너고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고 인도양을 건너 말래카해협
을 통과해 홍콩과 상해를 지나 일본 해안을 거슬러 올라와 에도만을 침범해 일본의 개항
을 강요하니..... 하코다테 는 요코하마 와 더불어 1859년 개항장으로 서양에 문을 열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하와이를 지나 태평양을 건너면 일본 인데도 반대 항로 를 택한 것은....
배에 필요한 석탄과 식수며 식량을 태평양에서는 공급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며
또 석유가 나오기 전이라 고래 기름 을 사용했는데, 대서양의 고래가 씨가 마르자
포경선들은 북태평양에서 조업했으니 포경선이 보급을 받을 항구 도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개항후 1864년 러시아 남진 에 대비하여 세운 성곽이 여기 고료가쿠 五稜郭(오릉곽) 인데
해자가 캐나다의 퀘벡성 처럼 별모양의 5각형 으로 되어있어 붙여진 이름이니.....
16세기 서양의 성곽 도시들이 총과 대포 의 발달로 인한 공격에 대비하여 수비측
총의 사각을 없애기 위해 양쪽에서 저격이 가능하도록 고안된 것이 별모양의 성채 입니다.
그런데 개화기에 서양 문물 을 받아들이는데 열심이었던 일본인들이.... 서양의 기술
을 들여와 일본인 기술자가 자체적으로 성채 를 지었으니 일본에서는
이런 것을 "일본인의 정신" 은 그대로 유지하며 서양의 기술 만 차용한다고 말합니다.
이른바 "和魂洋才(화혼양재)" 의 본보기라 하는 모양입니다. 서양의 물질문명
은 기꺼이 수용하겠지만 동양의 정신적 가치 는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뜻으로 중국에서는 “ 中體西用(중체서용)” 에 뒤이어 일본에서 나온 말 입니다.
이후 조선에서도 "東道西器 (동도서기)" 라는 말이 생겼지만 중국과 조선은 근대화에
실패하고.... 왜 유독 일본만 성공하여 서양 제국과 어깨를 나란히 했을까요?
두 나라에서는 정신문명과 기술문명 이 애초 부터 구분될수 없기 때문 이라고 봅니다.
일본에서는일체의 주술적 요소를 서양이 신(God) 에게 맡기듯이, 천황(일왕) 에게 맡기고는
인간은 현세에서 탈주술적 측면인 과학과 기술, 자본주의 를 발달시킬수 있게 되고
이것은 민주주의와 인권 이라는 서양의 정신문명 과 연관되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 합니다?
1868년 조슈번(야마구치) 과 사쓰마번(가고시마) 이 주축이 되고... 히젠번(사가) 과 도사번
(시코쿠) 이 참여한 유신군(신정부) 과 바쿠후군(막부) 과의 무진 전쟁 전투는
신정부군의 함포사격으로 고료가쿠성이 함락 되자 항복했으며 1914년에 공원이 되었습니다.
800엔을 내고 107 미터 타워 에 오르니 여긴 높은 곳이라 5각형 별 모양을 한 고료가쿠
성채와 하코다테 시가지가 모두 한 눈에 잘 내려다 보이는데.... 메이지유신
보신전쟁 후기인 1868년 에노모토 다케아키 등이 에도(도쿄)에서 물러나서 여기
홋카이도의 하코다테 를 점령해서 에조 공화국 을 선언하고 신정부군과 싸웠던 것입니다.
보신전쟁 (戊辰戦争 무진전쟁) 이란 존왕양이 세력인 조슈번과 사쓰마번, 도사번 및 히젠번 등이
미국의 압력에 굴복한 에도막부를 타도 하고 천황(일왕) 을 받들어 새 일본을 건국
하려는 내전인데... 공교롭게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에서 도쿠가와에게 패한 서군 들 입니다!
1603년 에도 도쿠가와 막부를 세운 이래 265년간 일본을 통치해온 막부는 위협을 느끼니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는 정치권력을 천황(일왕)에게 반환하여 도쿠가와 가문
의 보존과 미래의 정부에 참여 할 것을 기대했으나..... 조슈번과 사쓰마번 이 도발 합니다.
반막부측 군대는 나가사키의 영국인 에게서 신식총과 대포 로 무장했는데다가..... 천황(일왕)을
등에 업었는지라 졸지에 관군으로 변신 하자, 이때까지 관군이었던 막부군의 사기가
떨어지니 불과 5천 군세로 1만 5천 막부군을 교토 동쪽에서 격파하니.... 이후 쇼군은 항복합니다.
하지만 이후에도 나가오카번과 아이즈번 및 센다이 등 동북 일본이 오우에쓰 열번 동맹군 을
조직해 신정부군에 맞섰으나, 일본의 260개 번들은 사태의 추이를 지켜 보다가 쇼군이
항복하니 신정부군에 가담 하는지라.... 결국에는 신식 무기로 무장한 신정부군에 패배 합니다.
막부 측에서 가장 격렬하게 저항한 곳은 마츠다이라 카타모리 가 번주로 있던 후쿠시마현
서부에 위치한 아이즈번 인데, 사쓰마번(가고시마현) 출신 사이고 다카모리는 주변의
여러 번들을 무력으로 제압한후 9월 14일 신정부군은 아이즈성을 완전히 포위 하게 됩니다.
오다산에 암스트롱 곡사포 를 설치해 아이즈성을 향해 매일 2천발씩 을 발사하여 성이 초토화
되자, 번주 카타모리는 신정부군에 항복하고 열흘후 쇼나이번 도 굴복하지만 막부의
해군 부총재 에노모토 다케아키 는 쇼군 도쿠가와 요시노부 가 전투없이 에도에서 물러나자......
에노모토 다케아키 는 신센구미 와 8척의 함대 를 이끌고 센다이를 거쳐서 1868년
10월 20일 북해도 하코다테 에 상륙해서는 신정부군이 설치한 하코다테부가
파견한 수비대를 격파하고 전진해서 고료가쿠성 五稜郭城(오릉곽성) 을 점령합니다.
막부군 저항세력은 12월에 선거로 에노모토 다케아키 를 대통령 에 선출해서 여기
홋카이도 땅 에 에조공화국 을 설립하고는 신정부군에 끝까지 저항 했던 것입니다.
그런 과정에 이웃 오시마 반도에 자리한 마쓰마에번 을 공격해 아이누족의 땅 에조지
전부를 손에 넣는데..... 1869년 3월 신정부군의 대부대가 오토베 해안에
상륙해서는 신정부군이 고료가쿠로 향해 진군해 오자 에사시 산도에서 대진 합니다.
신센구미 히지가타 도시조 가 이끄는 부대가 진지를 쌓고는 격렬한 총격전으로 신정부군을
격퇴했으나...... 신정부군 증원 부대가 연이어 공격해 오니 요새는 무느지고 마침내
1869년 5월 14일 하코다테와 고료가쿠 를 완전히 포위한 신정부군의 총공격 이 개시됩니다.
이후 하코다테 뒤쪽 절벽을 타고 내려온 신정부군 이 시가지를 점령하자 바로 반격한
히지가타 도시조 마저 전사하고는 5월 17일에는 막부군은 항복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전에 신정부군의 포격으로 함대가 소실되고 성은 함락될 위기 에 처하자....
에노모토 다케아키 는 고이 간직했던 책으로 사카모도 료마 가 이 시대의 보물이라 불렀던
희귀본 네델란드어판 “만국공법” 을 토벌군 사령관 구로다 기요타카 에게
전하니 구로다는 국제 지식의 보고인 귀한 책 의 소실을 막으려는 충정에 감격 하게 됩니다.
그러고도 저항을 멈추지 않았으나.... 결국 1869년 5월 18일 항복하니 이로써 2년여에 걸친
보신전쟁 (戊辰戦争 무진전쟁) 은 막을 내리고 이후 "메이지유신이 성공" 하는데....
신센구미의 지도자인 히지가타 도시조 는 독종부장이라 불리니 농민의 아들로 막부에
출사해 사무라이가 되었으며 절명한 곳에 세워진 비석에는 헌화 가 끊이지 않는다고 하네요?
전투종료후 신정부군의 사령관 구로다 기요타카 는 삭발 까지 하며 책을 내준 에노모토 다케야키
구명운동 을 펼치니... 다케아키는 후일 구로다 기요타카 총리 치세에 외무대신 이 됩니다.
훗날 사령관 구로다 기요타카 는 1876년 강화도 조약시에 전권대신 으로 조선 에 오는데 조약
제1관에 "조선국은 자주국가로서....." 라는 구절은 중국은 이제 조선에 간섭하지 말라는 뜻이라?
또 불평등 조약이니 "선의" 란 것도 국내에서나 베푸는 것이지 국제사회에서는 불가능한 것이라?
그런데..... 전쟁에서 승리한 사이고 다카모리 를 비롯한 신정부의 지도자들은 도쿠가와
충신 들에게 "관용" 을 배풀었고 옛 도쿠가와 막부 지도자 들에게도 신정부의 직위를 수여 합니다.
패자에게도 관용을 베풀고 국민통합 을 이룬 때문인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처절했던 전쟁 은 일본인들에 의해 낭만적 으로 묘사되었고, 수많은 사상자
에도 불구하고 메이지 유신 을 "무혈 혁명" 의 관점으로 바라보는 이들도 있다나요?
하코다테 전투 를 회상하노라니 문득 국민대 교수 김병준 씨의 동아일보 칼럼에 보면... 1871년
신미양요 에 참전했던 미해병 장교의 편지와 보고서 를 읽고 참담한 기분을 느꼈다고 합니다.
"이게 조선 이었던가? 이게 나라였던가? 미군 은 초지진과 덕진진을 함락하고 이어
광성보 로 진격하니 어재연의 조선군 600명은 참으로 열심히 싸웠으나....
최신식 소총으로 무장한 미군을 상대로 구식 화승총은 재장전에 시간 이 너무 걸리자..."
"성벽을 오르는 미군 들을 향해 화승총을 버리고 돌을 던지며 저항했다고 한다.
구식 총 보다는 차라리 활이나 돌 이 더 나았던 것이네?
누가 우리 병사들을 돌 과 같은 "구석기 시대 무기" 로 전투에 임하게 했었나?
돌을 던지는 조선 병사를 후방의 미군이 저격하니 전투는 불과 한시간 만에 끝난다"
"600명 조선군 중에서 전사자는 어재연등 350명 에 부상자 20명을
포함해 다수가 미군의포로 가 되었는데도 미군은 전사자 3명 에 부상 10명 이라!
1875년에 대포 2문 을 장착한 일본군함 운양호 는 영종진 에 이르러 포격 후에.... 보트 2척에
22명 육전대 를 상륙시키니..... 450명 조선군은 전사 35명에 포로 16명 을 내고 대포
38문과 화승총을 버린채 도주하는데 일본군 피해는 전사자는 없고 경상자 2명 에 불과했으니?
“이 나라는 나라가 아닙니다” 율곡 이 선조에게 올린 상소문 “萬言封事
만언봉사” 에 보면... “이 나라는 썩어 무느지고 있는 집 과 같습니다,
기둥을 바꾸면 서까래가 내려앉고 지붕을 고치면 벽이 무느져 내립니다.”
“때가 바뀌면 법과 제도도 바뀌어야 합니다, 천하에 없는 법이라 하더래도 상황에 맞추어
개혁 해야 합니다” 하지만 선조 는 귓등으로 흘려 들었고, 이후 정조 때에 정약용 등이
같은 말을 했으나 정조때 반짝하다 농사꾼 강화도령 을 허수아비 로 세우면서 무느집니다!
찬란한 문화 를 지닌 나라 조선이 망하는데 한가지 억울한건, 일본군과 전쟁은 커녕 전투도
한번 치르지 못했으니 그게 원통 합니다! 500년 유구한 역사를 지닌 나라가 망하면서
공식적인 싸움 한번 없이 평화리에 망한 사례 가 인류 5천년 역사에 또 있는지 궁금합니다?
일본은 여기 하코다테를 함락 하면서 무진전쟁을 마무리 짓고 신정부는 "메이지 유신"
개혁 을 통해 토사구팽이라고 폐번치현, 사무라이 칼 휴대등 특권폐지, 농지개혁,
신문개혁과 산업발전등 근대 국가 로 탈바꿈해 세계 열강의 자리 에 올라섰던 것이지요?
미국과 유럽을 둘러본 선각자로 만엔권 지폐에 나오는 후쿠자와 유기치 가 1863년에 저술한
"서양사정" 이 1870년대에 조선에 들어오자 일본 처럼 서구문명에 관심을 가진 젊은이
들이 있었으니 1880년 수신사 김홍집 에 이어 1881년 박정양등 신사유람단 이 파견되었습니다.
김옥균도 자신이 신사유람단 을 꾸려 일본을 둘러보던중 갑신정변이 발생하자 귀국했으나 바로 1882년
수신사 박영효 와 함께 다시 도일해 후쿠자와 유기치의 집에서 4개월간 머물며 가르침과 원조 를
받아 박영효, 윤치호, 홍영식, 서재필, 서광범등이 1884년 갑신정변 을 일으켰지만 3일 천하 로 끝납니다.
아베 신조총리의 외고조부 오시마 요시마사가 경복궁을 점령해 고종을 포로로 잡은후 이노우에 공사
가 훈수해 1894년 김홍집 등은 반상의 신분제도 타파, 노비 해방, 천민제도 폐지, 연좌제 폐지,
과부재혼 허용 등.... 갑오개혁 을 실시하지만, 친일내각 의 타율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3차례
개혁도 미완으로 실패로 끝나니..... 아관파천 으로 김홍집은 맞아죽고 유길준은 일본 으로 도망칩니다.
세월은 흐르고 도쿄 일본육사 출신 일본군 중위 박정희 는 5.16 쿠데타로 대통령이 되자
77년 후인 1972년 메이지 유신 을 본뜬 "10월 유신" 을 일으켰으나..... 비극으로
끝났지만 경제발전의 성과로 민주화 가 이루어지니 한국은 선진국의 대열 에 들어섭니다.